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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년 9월호

논술, 이렇게 준비하자! / 2007학년도 대비 - 자료 제시형 논술 심층 해설

현대 예술의 다양한 모습과 인간의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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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복
종로학원 본원 강사·종로논술연구소 연구위원
  <제시문 1>은 예술의 개념이나 효용에 관한 관점이 제시되어 있고, <제시문 2>는 현대 예술의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제시문 1>에서 <제시문 2>로 변화된 본질이 무엇이며 이 새로운 체험이 우리의 사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논술하시오.
 
 
  ■ 제시문 1-1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속에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후 일정한 외형적 기호로 표현할 때 예술은 비롯된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늑대를 만나서 공포를 경험한 소년이 그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가정해 보자. 타인에게도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소년은 먼저 자신의 일부터 시작하여 늑대를 만나기 전의 자신의 상태나 주위 형편, 숲, 상쾌한 기분, 그리고 이어서 숲에 나타난 늑대의 모양, 움직임, 자신과 늑대의 거리 등을 묘사한다. 소년이 이미 경험한 그 감정을 이야기하는 사이에 다시 새로 경험하고, 듣는 이들에게도 그 느낌을 모두 경험시킨다고 한다면, 이는 예술이다. 이번에는 그 소년이 늑대를 본 적은 없지만 항시 늑대를 무서워했었다고 가정해 보자. 자신이 늑대에게 느끼던 공포감을 타인에게도 불러일으키고자, 소년은 늑대를 만난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듣는 이들에게도 그 공포감이 환기되도록 교묘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예술이다.
 
  우리가 실제 또는 공상 속에서 고통의 두려움이나 쾌락의 매력을 경험하여 캔버스나 대리석에 이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이 그 감정에 감염되었을 경우에도, 역시 예술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명랑, 환희, 우수, 절망, 용맹, 권태 등의 감정이나 이들 감정으로부터 다른 감정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경험 또는 상상해서 그 감정을 소리로 나타냈을 때 듣는 이가 이에 감염되어 동일한 감정을 경험한다면, 이도 역시 예술이 된다.
 
  감정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매우 강하든 약하든 간에, 대단한 것이든 하찮은 것이든 간에, 나쁘거나 좋거나 간에, 만일 그것을 독자나 관중이나 청중에게 감염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극(劇)에 의해 전달되는 자기 희생의 정신이나 운명과 신에 대한 복종의 감정, 소설로 씌어진 연인들의 황홀감, 그림으로 그려진 육욕(肉慾), 개선 행진곡으로 전달되는 웅장한 감동, 무용으로 불러일으켜지는 명랑한 기분, 우스갯소리가 자아내는 해학의 맛, 저물녘의 풍경화나 자장가에 의해 전해지는 고요한 느낌, 이는 모두 예술이다. 관중이나 청중이 작가가 경험한 것과 같은 느낌에 감염되기만 하면 그것으로 예술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속에 예전에 경험했던 감정을 상기시킨 후에 움직임, 선, 색, 소리를 통해, 그리고 단어로 표현된 이미지를 통해 상기된 감정을 다른 사람도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게끔 전달하는 것 ─ 예술 활동은 이 속에 존재한다. 즉, 예술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가 경험한 느낌을 일정한 외면적인 기호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하고, 타인은 이 느낌에 감염되어 이를 경험함으로써 성립되는 인간의 작업이다.
 
  예술은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美)라든지 신(神)이라든지 하는 어떤 신비적인 관념의 나타남도 아니고, 생리학적 미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축적한 에너지의 여분을 발산시키는 유희도 아니다. 또한 외면적인 부호에 의한 감정의 발로도 아니고, 즐거운 대상을 만들어 내는 일도 아니며, 특히 쾌락 따위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것은 개개 인간 및 인류의 생활과 행복에의 발걸음에 없어서는 안 될 인간 상호간의 교류 수단이요, 모든 사람을 동일한 감정으로 통일하는 수단이다.
 
  모든 사람은 말로 표현된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혜택으로 사상계에서 전 인류가 자기를 위해 해 준 일을 죄다 알 수 있고, 타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덕분으로 타인의 활동에 참가할 수 있다. 또 자신도 이 능력의 덕택으로 타인에게서 얻은 사상이나 자기 자신 속에서 우러나온 사상을 동시대(同時代) 사람이나 후세 사람에게 전할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예술에 의하여 타인의 감정에 감염될 수 있는 능력 덕택으로 감정의 세계에서도 그 이전의 인류가 경험한 일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고, 동시대 사람들이 경험한 감정이나 천 년 전의 타인이 맛본 느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자기의 느낌을 타인에게 전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에게서 말로써 전해지는 옛날 사람들의 사상을 죄다 몰수해 버리거나 그에게 자기 사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은 야수 아니면 카스페르 하우젤(Kasper Hauser - 말도 모르고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 버려진 아이)과 마찬가지의 존재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만일 또다른 인간의 능력, 즉 예술에 감염될 수 있다고 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은 훨씬 더 야만스러워졌을 것이고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서로 원수 사이가 되어 버렸으리라. 그러므로 예술의 작용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중요함은 언어의 작용에도 필적할 만한 것이고 또 그만큼 보급되어 있기도 하다.
 
  - 톨스토이, 『예술이란 무엇인가』
 
 
  ■ 제시문 1-2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나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효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감동이나 혼의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그 쾌락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른다.
 
  문학은 억압 없는 쾌락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 준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것을 읽는 자에게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을 ‘안 당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한다. ‘인간은 이래야 행복하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문학은 그러나 문학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며, 인간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무지와의 싸움을,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의 싸움을 뜻한다. 존재론적인 차원이나 의미론적인 차원이라는 말 때문에 놀랄 필요는 없다.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아무러한 반성 없이, 9시에 회사 문에 들어서서, 잡담하고 점심 먹고 5시에 퇴근하는, 그런 일과가 월, 화, 수, 목… 계속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란 것을 밝혀 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아니 더 나아가서 문학은 그것의 존재가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무지를 그러므로 우리는 폭넓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이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는 것은, 문맹인이 있다는 것을 글을 읽을 줄 아는 이에게 부끄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무디게 갇혀 있는 일상인의 의식이 하나의 코미디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것을 뜻한다.
 
  사르트르라는 프랑스의 작가가 태도의 희극이라고 부른 나쁜 신앙 - 자기 기만이야말로 가장 나쁜 무지의 일종이다. 마리 앙트와네트라는 프랑스 전제 시대의 한 왕비를 기억하기 바란다. 그녀는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분노의 함성을 듣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게 아니냐고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그러한 대답이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을 밝히는 역할을 문학은 맡고 있다. 이렇게 좋은 글을 못 읽는 사람이 있다니! 문학은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다. 삶 자체의 조건에 쫓기는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꿈꿀 수 있다. 인간만이 몽상 속에 잠겨들 수가 있다. 몽상은 억압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몽상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문학은 그런 몽상의 소산이다.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낸다. 그 거리야말로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이다. 불가능한 꿈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삶은 비천하고 추하다. 그것을 깨닫는 불행한 의식이야말로 18세기 이후의 문학을 특징짓는 큰 요소이다.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꿈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성할 수 있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 거리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갇혀 버려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사춘기 때에, 나는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마음 속으로 간음하였다. 그녀들은 그 때의 나에게는 단순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을 이해하게 되자마자, 여자들은 먹히기를 기다리는 고깃덩어리이기를 그치고, 장미꽃 핀 화원을 드나드는 천사들이 되었다. 문학은 그 고깃덩어리와 천사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매개체이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제시문 2-1
 
  유명한 현대 작곡가 존 케이지는 <4분 33초>라는 피아노곡을 만들었다. 이 작품의 연주를 위해 피아니스트는 정장을 하고 무대 위로 걸어 나가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리고 건반 뚜껑을 열고서 정확히 4분 33초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 그리고 다시 건반 뚜껑을 닫고서 조용히 무대를 걸어 나온다. 연주는 훌륭히 마무리되었다. 말하자면 그 시간 동안에 들려오는 잡음이라든가 듣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 고동 소리, 그 모두가 다 음악이라는 것이다.
 
 
  ■ 제시문 2-2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전시회에 마르셀 뒤샹은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이 작품은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를 뒤집어 놓은 작품이었다. 전시회의 주최측은 이 작품이 작가가 직접 창조한 작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고 또한 음란한 물건이라고 판단하여 전시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 작품은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용어와 개념으로 점점 확실하게 정착되어 가고 있으며, 손으로 만드는 수공적 기술이 아닌 예술가가 선택하는 정신적 행위(아이디어)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현대 미술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뒤샹은 모나리자를 복사한 그림 위에 수염을 그려 넣고 밑에다 ‘L.H.O.O.Q.’라는 제목을 적어 넣었다. 이 알파벳 문자열을 불어로 읽으면, ‘엘르(L) 아쉬(H) 오(O) 오(O) 뀌(Q)’가 되는데, 이것을 연음시켜 ‘엘라쇼오뀌’라고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Elle a chaud au cul.)”라는 문장과 같은 발음이 된다. 동음이의를 이용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정된 레디메이드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샘’이라는 제목의 변기를 전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전통을 모독하는 행위로 읽혀질 수 있다. 뒤샹은 이처럼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하여 미술의 정의와 미술가의 독창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노골적인 도전을 하였다.
 
 
  ■ 제시문 2-3

 
  서울역 광장에 가면 볼 수 있는 박기원 씨의 작품 <자-넓이>는 5미터 크기의 푸른색과 검정색의 기하학적 직각자가 묘한 긴장감을 주지만 왠지 허술해 보인다. 더구나 눕혀진 직각자는 앉거나 눕기에 편하도록 매끈하게 표면을 갈아 노숙인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집합소가 되어 버렸다. 역 관계자들에게는 눈살 찌푸려질 일이다. 대합실 의자 사이에 칸막이를 놓아 이용객들이(속내는 노숙인들이) 눕지 못하도록 했듯이, 이 조형물도 구상 단계에서 노숙인들이 앉기에 불편하도록 표면을 거칠게 하거나, 중간중간을 떨어뜨려 아예 눕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펜스를 쳐서 접근조차 불가능하게 해 달라는 관계자의 요구가 있었다. 그 때 던진 작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럼 어때요. 노숙인들도 사람인데……. 제 작품에 누워서 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배영환 씨의 <거리에서>는 더 걸작이다. <노숙자 수첩>으로 더 많이 알려진,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작고 빨간 수첩이다. 예쁘거나 앙증맞다기보단 어쩐지 촌스럽다. 무료 배급소나 보건소 위치 등 노숙인 생계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담은 <거리에서>는 3만 부 정도 제작되어 노숙인들에게 배포되었다. 작품이라 부르기에는 주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 작품이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예술가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자 사각 지대 소수자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작은 목소리라 할 수 있다. <자-넓이>와 <거리에서>는 노숙인를 포함한 소수자를 바라보는, 같지만 또다른 시선, 작지만 분명 따뜻한 시선의 산물이다.
 
  - 윤태건, 「공공 미술 베스트 5」
 
 
  ▣ 출제의도
 
  예술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의들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은 아마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일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대답은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모방론은, 예술이란 외부 대상의 외관이나 본질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예술은 모방이다.’는 명제는 예술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래된 견해이기도 하다. 일찍이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의 모방이며, 예술은 현실의 모방이라고 함으로써 예술을 ‘모방의 모방’으로 단정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희극, 비극, 서사시로 구분된다는 장르론으로 발전시켰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한술 더 떠서 예술은 현실의 충실한 복사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랜 영향력을 유지하던 모방론은 낭만주의 예술이 등장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낭만주의 예술은 외부 대상에 대한 모방이나 재현보다는 작가의 독창적인 감정을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는 일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을 위해서라면 외부의 대상에 대한 모방이나 재현은 약화되거나 왜곡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즉, 예술은 작가의 의도나 관심, 정서, 사상 등을 표현하는 활동과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 표현론의 기본 관점이다. 이러한 표현론은 모방론이 외적 대상을 반영하는 것임에 반해, 내적 상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모방론과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그러나 표현론은 ‘표현’이라는 범주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된다. 예술과 외설, 미의 표현과 추의 표현, 사상의 표현과 감정의 표현 등 ‘표현 대상’의 문제와 ‘표현의 방법’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특히 작가의 감정 표현을 읽어 내기가 힘든 추상 예술의 등장으로 표현론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추상 예술을 포용하는 예술 이론이 필요해졌으며, 이 필요에 부응하는 이론이 형식론이다. 형식론은 미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유의미한 형식을 모든 예술 작품의 공통된 성질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는 재현적인 풍경화 속에서도 미적 경험을 하며 따라서 이런 작품을 예술 작품이라고 칭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변기와 물품 상자를 사용한 뒤샹의 <샘>이나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같은 다다(dada)류의 예술이 등장함으로써 형식론 역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완전한 답변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논제는 예술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들을 살펴보고 현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예술 작품들이 기존의 예술론과 다른 점은 무엇이고 이러한 새로운 예술 작품들이 우리의 사고와 체험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하였다.
 
 
  ▣ 논제분석
 
  ① <제시문 1>은 예술의 개념이나 효용에 관한 관점이 제시되어 있고 <제시문 2>는 현대 예술의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② <제시문 1>에서 <제시문 2>로 변화된 본질이 무엇이며 이 새로운 체험이 우리의 사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논술하시오.
 
  이번 논제는 제시된 지문을 얼마나 잘 분석했느냐 하는 논술자의 지문 분석 능력과 이 분석을 토대로 제시된 자료를 비교·검토하여 논술자의 사고를 어떻게 전개해 나가느냐 하는 창의적 사고력을 평가하기에 좋은 논제이다.
 
  ① 은 제시문을 독해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다. 동일한 지문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글이 될 수 있으므로 논의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논제에 글을 분석하는 기준을 제시해 준 것이다. 따라서 <제시문 1>을 통해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예술의 개념과 ‘예술은 어떤 점에서 필요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라는 예술의 효용을 추출해 내야 한다.
 
  아울러 <제시문 2>에 나타난 자료를 통해 현대 예술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서 <제시문 1>에서 분석한 내용과 비교해 그 차이점을 찾아 내야 한다.
 
  ② 는 이 논제의 핵심 논점으로 두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논술해야 한다. 우선 <제시문 1>에서 <제시문 2>로 변화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논술할 것이 요구되는데, 이는 전통적인 예술관과 새롭게 시도되는 예술 사이의 차이점에 주목하면 어떤 점이 변화되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제시문 2>에 나타난 새로운 예술이 우리의 삶과 사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논술하는 것인데, 이 부분은 논술자의 깊은 사고력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특히 주어진 자료와 사실에 근거하여 논지를 전개하되 근거 없는 무리한 주장을 펼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 제시문 이해
 
  <제시문 1-1>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글로서 그는 이 글에서 예술의 중심에 감정이 놓여 있음을 역설하며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속에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후 일정한 외형적 기호로 표현할 때 예술은 비롯된다. 스스로 속에 예전에 경험했던 감정을 상기시킨 후에 움직임, 선, 색, 소리를 통해, 그리고 단어로 표현된 이미지를 통해 상기된 감정을 다른 사람도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게끔 전달하는 것 ─ 예술 활동은 이 속에 존재한다.”
 
  톨스토이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도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게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자기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공감되지 못하는 감정의 표현은 예술적 표현이 아니다. 예술이란 작가가 경험한 느낌을 일정한 외면적인 기호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하고, 타인이 이 느낌에 감염되어 이를 경험함으로써 성립되는 인간의 작업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술의 효용과 관련하여 예술은 신비적인 관념의 나타남, 유희, 즐거운 대상을 만들어 내는 일, 쾌락 따위가 아니며 개개 인간 및 인류의 생활과 행복의 발걸음에 없어서는 안 될 인간 상호간의 교류 수단이요, 모든 사람을 동일한 감정으로 통일하는 수단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감염은 시간을 초월하여 천 년 전의 타인이 맛본 느낌을 알 수 있고 또 자신의 느낌을 타인에게 전할 수도 있게 된다고 하고 있다.
 
  <제시문 1-2>에서 김현은 문학이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문학의 효용을 말한다. 또한 문학은 무지를 추문으로 만들어 무디게 갇혀 있는 일상인의 의식이 하나의 코미디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며,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꿈꿀 수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는 것이 <제시문 1-2>의 핵심이다.
 
 
  <제시문 2-1> 에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우연성의 음악, 불정확성 음악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통적 음악 개념으로는 음악이라고 보기 어려운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아방가르드(avant-garde)이다. 이 음악은 일정한 법칙이나 제한이 없다. 작곡가는 기존하는 음표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련의 기호 같은 음표를 대신하기도 한다. 연주자는 작곡자의 의도를 자유롭게 이해하고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물론 연주는 그때 그때마다 달라지고 작품은 녹음을 해야만 보존될 수 있다.
 
  <제시문 2-2>의 마르셀 뒤샹은 가장 난해하고 과격한 예술가였고, 또한 20세기 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끈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뒤샹은 레디메이드와 설치 미술, 퍼포먼스와 실험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창조했으며,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로부터 네오다다, 팝아트, 개념 미술 등의 후견인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 ‘샘’과 ‘L.H.O.O.Q.’는 레디메이드 작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나 뒤샹의 <샘>, 는 삶 속에서 성취한 가장 높고 가장 좋은 감정을 감상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톨스토이식 예술관에 대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낯설고 기이한 감정이나 생각을 유발시킴으로써 기존의 예술적 전통에 도전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도전을 제기하느냐는 학생들 몫으로 남겨 두어 그들에게 독창적 아이디어를 제시하게끔 유도하는 일이 바람직할 것이다.
 
  <제시문 2-3>에서 예술은 사회의 산물이며 예술 속에는 그 사회의 전통, 관례, 가치관 등이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그리스 예술에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그 사회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고, 중세 예술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발자크의 소설에는 그 당시 귀족들의 관례가 드러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은 사회로부터 독립된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예술은 독자적 자율성으로 자신을 탄생시킨 사회를 비판하고 개선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적 관례나 전통을 비판하는 자율성이 때로는 지나친 과격으로 비추어져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전위 예술이나 실험 예술이 그 대표적 예이며, <제시문 2-1>과 <제시문 2-2>에 언급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나 뒤샹의 <샘>과 등도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두 작품은 예술가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은 시도이자 사회에서 소외된 사각 지대 소수자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작은 목소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모범개요
 
  Ⅰ. 서론
  예술에 관한 화제 제기 (현대 예술의 난해성)
 
  Ⅱ. 본론
  1. 예술의 개념과 효용에 관한 정리 (제시문 1 활용)
  2. 현대 예술에 나타난 예술의 변화
  3. 새로운 예술이 우리의 사고와 삶에 끼친 영향
 
  Ⅲ. 결론
  예술과 삶 (논의의 정리)

 
 
  ▣ 모범 예시문
 
  오늘날 현대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일정 수준의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이들에 국한된다. 현대 예술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냉담하다. 현대 예술의 전위적인 작품들에 대해 대중은 놀라움을 표시하며 심지어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는 적대적 반응을 보이기까지 한다. 대중의 이 같은 무관심과 적대심은 현대 예술이 지닌 난해성과 연관된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나 뒤샹의 <샘>, 등의 예술은 대중에게 아름다움보다는 당황, 낯섦,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과거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는 작업으로 인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을 미적 원칙으로 규정한 이후 예술가들은 최대한 현실과 유사한 작품을 생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다가 낭만주의 시대와 더불어 자연의 외부적 묘사보다는 작가의 주관적 관점이 강조되는 예술관이 우세하게 된다. <제시문 1>에 나타난 톨스토이 예술관은 예술가의 독창적인 감정을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는 낭만주의 예술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술가는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전달해야 하지만, 경험한 감정 중에서도 삶 속에서 성취한 가장 높고 가장 좋은 감정을 감상자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존 케이지의 <4분 33초>나 뒤샹의 <샘>은 삶 속에서 성취한 가장 높고 좋은 감정을 감상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톨스토이식 예술관에 대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낯설고 기이한 감정이나 생각을 유발시킴으로써 기존의 예술적 전통에 도전한다고 볼 수 있다. 주관성과 독창성이 높이 평가되는 문화적 흐름이 현대 예술을 관통하고 있다. 회화는 추상적으로 변했고, 음악은 멜로디 대신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고, 소설에서 줄거리는 사라졌으며, 연극은 부조리해졌다.
 
  칸트는 미의 문제를 다루면서 ‘공통감’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보편적 심리 구조를 지니고 있으므로 아름다움을 타인에게 전하고 이해시킬 수 있다. 실제로 과거 예술의 본질은 ‘재현’과 ‘소통’에 있었다. 그런데 현대 예술은 이 소통을 거부한다. 주관성에 입각하여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 예술가들은 더 이상 타인의 이해를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고 이해되지 못함 자체가 현대성을 의미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예술은 새로움과 독창성을 생명으로 하고, 새로운 것은 인간에게 어렵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피카소, 칸딘스키의 독창성이 이미 친숙함으로 다가오듯이 대중들도 현대 예술을 새로운 문화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술가들은 보다 많은 실험을 거쳐야 할 것이며 보다 열린 마음으로 대중에게 다가서야 할 것이다. 뒤샹은 그림을 만들어 내는 자를 관람객 자신이라고 보았다. 암호처럼 숨어 있는 현대 예술 작품의 의미는 그것을 찾는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
 
  대개 우리는 우리에게 쓸모 있을 만한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우리가 현실에서 미처 보지 못한 면면을 보여 준다. 즉 예술은 우리에게 현실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클레는 “예술은 보이게 하는 것이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말하였다. 박기원의 <자-넓이>, 배영환의 <거리에서>는 예술가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은 시도이자 사회에서 소외된 사각 지대 소수자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작은 목소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예술은 보이는 것에 한정된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우리 세계관에 전환점을 가져오는 감각적인 경험들을 제안하는 것이다.
 
 
  ▣ 읽기자료
 
  관심이란 어떤 대상의 현존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심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 - 그것이 욕구 능력을 규정하는 근거든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욕구 능력을 규정하는 근거와 필연적으로 결부된 것이든 - 언제나 욕구 능력과 연관된다. 그런데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아닌지가 문제일 경우, 우리는 그 사태의 현존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또는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 경우 우리는 그 사상을 단지 관조(직관 또는 반성)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판정(감상)하고 있는가 하는 것만을 알고자 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앞에 보이는 궁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물론 “단지 멍하니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해도 좋을 것이며, 혹은 저 이로쿼이족의 족장처럼 “파리에서는 선술집이 제일 마음에 들더군.”하는 투로 대답해도 좋을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 나는 꼭 루소와 같은 투로 인민의 고혈을 그처럼 무용한 것에 낭비하는 왕후들의 허영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내가 다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어느 무인도에 살고 있고 또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러한 호화스러운 건물을 마법으로 당장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살기에 알맞은 오두막집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그런 건물을 만들기 위해 내가 어떠한 수고도 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아주 당연하게 확신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말을 모두 승인하고 옳다고 인정하겠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다만 대상의 표상이 나에게 만족을 주는가(내 마음에 드는가)하는 것뿐이며, 그래서 나는 그 표상의 대상이 현존하는지에 관해서는 항상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하기 위해, 또 내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이러한 표상으로부터 내가 부여하는 어떤 것일 뿐, 나로 하여금 대상의 현존에 의존하게 하는 어떤 것이 아님은 매우 분명하다. 미에 관한 판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섞여 있으면, 그 판단은 매우 편파적이며 또 순수한 취미 판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취미의 문제에 있어서 심판관의 역할을 하려면, 우리는 사태의 현존에는 조금도 마음이 끌려서는 안 되고, 이점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극히 중요한 이 명제는, 우리가 취미 판단에서 나타나는 순수한 무관심적 만족을 관심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과 대립시켜 볼 때, 그리고 특히 그와 동시에 관심의 종류는 이제 아래에서 열거하게 될 종류 외에는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 가장 잘 해명될 수 있다.
 
  - 칸트, 『판단력 비판』
 
 
  ◎ 읽기 자료 이해
 
 
  [01] 앞의 글에서 칸트가 말하는 ‘아름다움’을 설명하시오.
 
  [예시답안]
  칸트는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낄 때의 우리 마음의 상태를 무관심성의 상태라고 언급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느낄 때 우리 마음의 상태는 관심이나 욕구가 만족되는 마음의 상태와는 다르다. 예컨대 어떤 부족의 족장처럼 술이 마시고 싶어 선술집을 찾으려는 욕구가 가득한 상태에서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바라보아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우리의 속담과 유사하다. 또한, 베르사이유 궁전을 건설한 전제 군주의 횡포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관심에 비추어 베르사이유 궁전을 바라볼 경우에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아름다움이란 그러한 욕망이나 관심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02] 앞의 글에 나타난 칸트의 관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 보시오.
 
  [예시답안]
  칸트는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 모두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보편적 마음의 상태를 무관심적 상태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런 무관심성의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느냐는 점은 의문이다. 우리는 항시 욕망과 관심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욕망과 관심을 바탕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한 남성이 미모의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느꼈을 때, 과연 그 때의 마음 상태가 ‘무관심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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