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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06년 5월호

[연재]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10권4장)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979년의 드라마

작전車는 불타고, 함성은 총성을 부른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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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과 함께 치솟은 불길은 한 30m쯤 올라갔다. 사방이 환해졌다. 이어서 최루탄 쏘는 폭음이 터졌다. 『우-』 하면서 시위군중이 몰려가는 소리,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비명, 폭음, 불길의 조명이 잊을 수 없는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한 폭 歷史畵의 민중봉기 장면이었다. 암흑의 도심지에서 경찰 작전車가 뒤집히고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은 30代 중반의 사건기자로 하여금 무심코 이런 말을 하도록 했다.
『한 시대가 넘어가는 것인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리고 진주한 군인들.
  1979년 10월16일 저녁 부산 국제신문 사회부 전화는 불이 났다.
 
  『오늘 데모 난 것 압니까?』
 
  『예』
 
  『왜 데모 기사 안 났지요? 나는 30년 독자인데요, 내일부터 신문 끊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개새끼야! 할복이나 해라!』
 
  또 다른 전화가 울린다.
 
  『그 쪽 사정이 어렵다는 것도 압니다만, 용감한 학생들을 생각해서 잘 해주시오』
 
  이런 전화를 받다가 지친 기자들은 전화기를 내려놓기도 했다. 이날 낮과 밤에 사진기자들은, 시위군중을 향하여 플래시를 터뜨린다는 것은 생명을 거는 일임을 알게 된다. 언론기관 표시 차량과 몇 개 親與(친여) 언론사는 投石(투석)의 표적이 되었다.
 
  『보도도 못 하는 기자는 필요없다』
 
  시위대의 이 말에 대답할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釜馬사태는 기자들이 찍은 시위장면이 거의 없는 이상한 사건이 되었다.
 
  국제신문 사회부 趙甲濟 기자(당시 34세)는 밤 8시 부산 남포동 거리에 있었다. 교련복을 입은 한 고교생이 길 건너편의 경찰을 향해 돌을 집어던졌다. 이때 기자가 잘 아는 서부경찰서의 한 사복 경위가 학생을 붙들어 종아리를 몇 번 걷어찬 뒤 자리를 떴다. 다른 시민들은 그가 학생의 파괴적인 행동을 언짢게 생각하는 양식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거리는 캄캄했다. 일부 음식점과 술집을 빼고는 다 셔터를 내렸다. 어둠 속으로 사람 덩어리들이 몰려다녔다. 육교 위와 계단에까지 사람들이 몰려 시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부영극장 앞에서 한 쉰 살 먹은 것 같은 여자가 쇳소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이놈들! 아까운 세금으로 이런 짓만 하고 있어!』
 
  아무 죄도 없는 행인이 최루가스를 마셔야 하는 데 화가 난 것이다.
 
 
  누군가가 성냥불을 그었다
 
  저쪽 찻길에서는 「우르르」 데모대가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경찰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쫓아가고 있었다. 한 경찰관은 시위 구경꾼들을 향해서 사과탄을 던졌다. 어둠 속의 폭발음은 총성처럼 들렸다.
 
  부산극장 앞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한 100명쯤 되는 학생들이 손뼉을 치면서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고 있었다. 『언론자유』를 외칠 때 趙기자는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온다!』는 소리와 함께 경찰에 쫓긴 시위대가 몰려왔다. 학생들은 달아났다가 금세 제일극장 앞에 다시 모여 구호를 외쳐 댔다. 불 꺼진 동아데파트 한 모퉁이에선 「우당탕탕」 부서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대를 향해서 돌멩이와 유리병이 날아갔다. 어둠을 믿고서 소년들까지 끼어 옥상에서 지상에서 던지고 있었다.
 
  밤 8시40분, 부산진경찰서 병력은 중앙동 반도호텔 앞에 진을 치고 있다가 부영극장 앞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장 안연세 총경의 지휘로 100명 병력은 기동순찰차, 두 대의 작전트럭, 서장 승용차를 앞세우고 남포동 지하도쪽으로 간선도로를 따라 행진했다. 그때는 500명가량의 시위대가 남포파출소를 습격한 직후였다. 스무 평 남짓한 파출소는 시위대가 던진 유리병·벽돌·돌멩이로 폐허가 되어 버렸다.
 
  기동순찰車와 작전車가 교통체증을 일으킨 차량행렬 사이에 끼였다. 작전트럭에 탄 경찰관들이 車에서 뛰어내려 경계태세를 취하지만 늦었다. 군중은 이들을 향해 돌과 유리병으로 포격을 한 뒤 각목을 들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서장車가 맨 먼저 달아났다.
 
  시위대는 기동순찰차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운전사를 각목으로 쑤셔 댔다. 다른 무리는 차를 뒤엎으려고 차체를 들썩들썩거렸다. 운전사는 차가 기우뚱할 때 뛰어나와 남포파출소 쪽으로 뛰었다. 시위대는 순찰차를 모로 세웠다. 기름통에서 휘발유가 새나왔다. 누군가가 성냥불을 당겼다.
 
  『펑』
 
  폭음과 함께 「부산1가 1163」 포니는 불길에 휩싸였다.
 
  뒤편에서 부산진경찰서 경비과장 이무영 경정(후에 경찰청장 역임)은 이 불길이 포니 바로 뒤에 있는 작전차에 옮겨 붙을 것 같아 보였다. 이 엘리트 학사 경정은 서른 명의 부하들을 돌아보면서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고는 작전차를 향해 뛰어갔다.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李경정은 작전차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핸들이 뜨끈뜨끈했다. 차를 뒤로 빼려 했으나 고장이 났는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시위군중이 작전트럭으로 몰려와 차 위로 기어올랐다.
 
  李경정은 운전석에 갇혀 버렸다. 데모대는 차 위에서 쿵쿵 발을 굴러 댔다. 그들은 각목으로 운전석 뒤 유리창을 깨고는 李경정을 들쑤셨다. 그는 운전석 양쪽 문을 잠그고는 뒤통수를 감싸고 쪼그리고 앉았다. 군중은 트럭을 뒤엎을 모양이었다. 꽁무니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것이었다. 이때 한 마흔 되어 보이는 사람이 운전석 옆 창문을 두드렸다.
 
  『내가 책임질 테니 나오시오』
 
  『정말입니까』
 
  『안심하고 빨리 나와요. 차가 넘어갑니다』
 
  李경정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 시민이 李경정을 안다시피 하여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갔다. 그러면서 모자와 웃옷을 벗겼다. 러닝셔츠 차림이 된 李 경정은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길 건너편으로 뛰었다.
 
  『펑』
 
  작전차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그는 어깨너머로 쳐다보았다.
 
  부산진경찰서 소속 「부산7가 1335」 작전차에서 불길이 치솟았을 때 趙甲濟 기자는 그곳에서 한 100m 떨어진 부영극장 앞 육교 밑에 있었다. 폭음과 함께 치솟은 불길은 한 30m쯤 올라갔다. 사방이 환해졌다. 이어서 최루탄 쏘는 폭음이 터졌다. 『우-』 하면서 시위군중이 몰려가는 소리,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비명, 폭음, 불길의 조명이 잊을 수 없는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한 폭 歷史畵의 민중봉기 장면이었다. 암흑의 도심지에서 경찰 작전차가 뒤집히고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은 30代 중반의 사건기자로 하여금 무심코 이런 말을 하도록 했다.
 
  『한 시대가 넘어가는 것인가』
 
  곁에 있던 선배기자는 1960년에 3·15 마산 義擧(의거)를 취재한 분이었다.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 적어도 내일은 위수령이야』
 
 
  심리적 충격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朴正熙 정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체제였다. 대학교에서 학생이 벽에다가 反정부 낙서만 해도 경찰이 찾아내어 구속시킬 정도였으니 도심 시위는 물론이고 학내 시위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부산대학교에서 오전에 시작된 시위는 오후엔 도심지로 번져 시민들이 가세했고, 밤에는 드디어 파출소를 습격하고 작전차를 불태우는 소요사태로 확대되었다. 적어도 부산에선 朴정권이 하루 사이에 무력화되었다.
 
  이날 사태의 충격은 시위의 규모나 强度(강도)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보이던 유신체제에 대한 상상을 뛰어넘는 일격이 연쇄반응을 부르는 충격파가 된다. 학생들뿐 아니라 중산층과 저변층이 가담한 民亂(민란) 형태의 소요는 1961년 朴정권이 출범한 이후 처음이었다.
 
  1964년 6월3일 비상계엄령을 부른 서울의 韓日회담 반대시위도 대학생들이 主力이었지 일반 시민의 참여는 거의 없었다. 부산은 朴대통령이 한때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근무했던 곳이 아닌가. 자유당 정권 타도를 계획하고 있던 朴소장은 4·19 때는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으로서 시위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연이 있다. 그 부산에서 일어난 大시위는 朴정권엔 무엇보다도 심리적인 大타격이 되었다.
 
 
  1979년의 드라마
 
  1979년은 1945, 1950, 1960, 1961처럼 연도만 떠올려도 그해의 성격이 잡히는 그런 해였다. 1979년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釜馬사태를 매개로 하여 「10·26」과 「12·12」라는 두 개의 대폭발로 귀결되었다. 12·12 사건은 다음해 「5·18」이란 또 하나의 대사건을 만든다. 12·12와 5·18 사건은 10·26 사건의 後폭풍이라 할 수 있다.
 
  결국 10·26 사건은 그날 하룻동안 있었던 일로 해서 18년간의 朴正熙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뒤 13년간 이어질 全斗煥-盧泰愚 정권을 만들어 낸다. 한국 현대사 60년 중 30년을 결정한 24시간이었다. 사건의 형식은 우발적이라도 내용은 필연적이었다. 즉 인과관계로 설명이 가능한 사건이다. 물론 시간이 흘러 지금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뒤돌아볼 때 그 전말이 이해되는 것이지, 그 사건의 한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사태의 자초지종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과거는 확실하지만 현재는 늘 모호하고 미래는 불안한 것이다.
 
  1979년 초에 있었던 이란 팔레비 정권의 붕괴와 호메이니 정권의 등장은 석유값을 배럴당 30달러 선으로 올려놓았다. 제2차 석유파동이 온 것이다. 1973~1974년의 1차 석유파동 때 朴正熙 정부는 벌여 놓은 중화학공업 투자계획을 접지 않고 오히려 「호랑이 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식의 과감한 中東건설 시장 진출로 이 위기를 轉禍爲福(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1977년이가면 中東에서 벌어들인 외화로 中東에서 석유를 사 오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은 1차 위기 때처럼 석유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정치안정기였던 1차 때와는 달리 국내 정치위기와 맞물려 버린다.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의 결합이 釜馬사태를 거쳐서 10·26 사건으로 폭발하는 상황전개의 밑그림이었다.
 
100억 달러 수출은 3년 앞당겨 실현되었다.

 
  자기 성공의 희생자
 
  朴대통령은 1975년 4월 월남 패망 직후 국민들이 안보에 불안을 느끼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함으로써 야당·언론·학생·在野운동권의 도전을 봉쇄할 수 있었다. 1978년 말까지 계속된 4년간의 정치안정기에 朴대통령은 「정치비용을 최소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효율적인 유신체제를 이용하여 수출확대, 중화학공업 건설, 자주국방력 건설(방위산업 건설), 새마을 운동, 中東건설 시장 진출을 성공시켰다.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라는 목표는 3년 앞당겨 달성되었다.
 
  아파트와 마이 카 시대가 열리고 중산층이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붙은 朴대통령은 1978년 12월12일의 총선거에 官權 개입을 금지시켰다. 공정하게 치러진 이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에 득표율로는 1.1%를 앞섰다. 1976년부터 中道통합이란 온건노선으로 신민당을 이끌었던 李哲承(이철승) 총재는 그러나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어버린다. 李총재는 안보 분야에선 朴정권에 협조하되 국내정치 분야에서는 경쟁한다는 소신으로 야당을 이끌면서 12·12 총선의 善戰(선전)을 가져왔으나 이 총선 결과는 李총재의 온건노선을 침몰시키고 金泳三·金大中 세력의 강경노선을 강화시킨다.
 
  12·12 총선을 패배로 보지 않았던 朴 대통령도 공화당內의 引責(인책) 여론에 밀려 청와대와 내각의 중심인물들을 교체한다. 공화당이 선거의 敗因(패인)으로 분석했던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한 것은 金正濂 경제팀이었다. 金正濂 비서실장은 9년 동안 사실상 경제팀의 수장이었는데 南悳祐 경제부총리-金龍煥 재무장관과 함께 물러나고 申鉉碻 경제부총리 팀이 들어섰다. 이 새 경제팀은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을 숨고르기 하려고 했다.
 
  이 인사의 핵심은 金正濂이 물러난 자리에 金桂元씨가 들어온 일이다. 金正濂씨는 도승지役에 충직하면서 내각과 권력기관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행정능력과 생활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金桂元씨는 인간됨은 유순했으나 비서실장에게 요구되는 행정 및 조정 능력이 부족했고, 대만대사로 7년간 한국을 떠나 있어 무엇보다도 國內정세에 어두웠다. 그는 그 9년 전에는 중앙정보부장직을 감당할 수 없어 1년 남짓 하다가 교체된 사람이었다. 그런 金씨가 사양하자 朴대통령은 『국정은 내가 다 할 터이니 말동무나 해달라』고 하면서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이 인사는 朴대통령이 밀려오는 波高(파고) 앞에 서서 긴장이 풀려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金桂元 비서실장이 부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벌써 권력의 핵심부에서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갈등
 
  金載圭는 1979년 11월 육군본부 검찰부에서 한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 金桂元 실장과 車智澈 경호실장과의 평소의 관계를 아는 대로 진술하시오.
 
  답: 金桂元 실장이 부임하고 2~3주일 후에 실장실에 찾아갔더니 車실장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면서 『저 친구하고 담판을 내든지 무슨 수를 써야겠다』고 벼르는 말을 들은 바 있고, 그 후에도 자세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車실장과의 의견충돌 및 사소한 시비로 큰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수차에 걸쳐 들은 바 있습니다. 두 사람 간의 관계는 성격상으로 보아서도 근본적으로 좋은 관계는 아니라는 것은 단정할 수 있습니다>
 
  金桂元 실장의 눈에 비친 車智澈과 金載圭의 관계는 어떠했던가? 10·26 사건 뒤 육본검찰부에서 한 金桂元씨의 진술을 읽어 보자.
 
  <문: 비서실장 재직時 차지철과의 관계를 상술하시오.
 
  답: 개인적인 친분관계는 별로 없고 비서실장 직책을 맡은 후 자주 접촉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차실장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본인이 1978년 12월22일 비서실장으로 부임한 이래 첫 번째 대통령각하 면접실에서 처음 만났음.
 
  (본인) 『외국에 오래 나가 있어 사정이 어두워 잘 모르니 지도해 주시오』
 
  (차지철) 『염려마시고 같이 잘 합시다』
 
  라는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억합니다.
 
  얼마 안 있어. 차지철의 사무실로 부임 인사차 정식으로 방문하였는데 차지철은 그 답례로 인사를 오는 것이 예의인 데도 한 번도 본인의 사무실을 방문한 일이 없어 괘씸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보고하러 가다가 본인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면 2층의 본인 사무실로 올라와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인 데도 불구하고 차지철은 꼭 경호원을 시켜서 1층 대기실로 본인을 불러 내려오게 하여서 본인은 차지철이 좀 오만하고 개성이 너무 강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또한 국무총리·각부장관 및 당직자라도 각하에게 보고를 드리러 올 때는 반드시 본인에게 들르는데 차지철은 권위의식이 강하여 재임 중 본인 사무실에는 한 번도 들른 사실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정부종합청사를, 각하가 순시하거나 회의참석할 때 내빈용 엘리베이터를 타게 될 경우 각하, 총리, 관계 장관, 차실장이 타면 차지철이가 본인에게 대기 중인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라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저 늙으면 죽어야 돼』
 
  金桂元씨의 진술은 계속된다. 金씨는 「무골호인」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유순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車智澈에 대해서 어떤 평을 하고 있는가?
 
  <차지철의 他人에 대한 무례한 행동에 관하여는 1979년 6월 초순경 16시30분. 경기도 수원시 부근 소재 뉴관악 골프장에서 각하를 모시고 백두진 국회의장, 차지철 실장, 본인, 후쿠다 前 일본수상 등이 환영 골프대회를 가졌는 바 당시 백두진 국회의장이 먼저 샤워장에 들어가 늦게 나오자, 차지철이가 샤워장 문을 발로 차면서 『영감 뭘해 빨리 나오시오』, 『그저 늙으면 죽어야 된다고』 독촉을 하므로 백의장이 서둘러 나오면서 『미안하외다』 하는 광경을 보고 차지철 실장이 아버지뻘 되는 백의장에게 오만불손하게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분격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경호를 한다는 구실下에 좌석이나 차량운행 순서 등을 무시하므로 경호실 직원이 비서실 직원과 서로 알력이 져서 불평하는 일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본인은 그때마다 부하를 타일렀지만 괘씸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업무상의 보고관계에 있어서도 본인은 직무상 각하가 매일 출근하시면 바로 결재서류를 가지고 결재를 받는 것이 통례이나 간혹 차지철은 각하가 출근 전에 직무실에서 대기하다가 먼저 들어가 보고함으로써 본인이 결재를 받는 데 지장이 있거나 또한 본인이나 장관이 결재를 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는데 차지철이 각하 집무실 입구 경호원에게 연락하여 자기가 각하를 뵈올 일이 있으니 못 들어가게 하라고 지시하여 기다리게 한 후 자기가 먼저 보고한 후 다른 사람들이 결재를 받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차지철의 월권행위 및 강경발언에 관하여 아는 바를 말씀드리면 차지철은 자기 업무도 아닌 정치공작 문제까지도 관여하고 첩보를 수집하여 각하에게 보고하는 등 월권행위를 자주 하고, 軍內 중요 지휘관 및 장성급을 수시로 불러다가 술도 사주고 돈도 뿌리는 일이 있고, 또한 항간에는 군인이 경호실을 다녀와야 진급 및 보직 면에서도 혜택을 본다고 하므로 이는 軍의 통수계통을 문란시키는 일이라고 한탄하였으며,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세호 대장을 매주 1~2회 정도씩 사무실에 불러 환심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차지철의 강경발언에 관하여는 여러 번 있습니다만 기억나는 것으로는 각하를 모시고 유정회 의장, 공화당 의장, 경호실장, 본인 등이 김영삼 당수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 차지철이 『사대주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김영삼이 하나를 제명치 못하는 국회라면 뭣하겠는가. 안 되면 내가 탱크로 밀어 버리겠습니다』 하는 등 상식 이하의 강경발언을 자주 하였습니다>
 
  하나의 수수께끼는 朴대통령이 왜 이런 車智澈을 방치했는가이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행동까지 다 알고 있는, 총을 찬 경호실장을 어려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무렵 金鍾泌 의원이 辛格浩 회장의 부탁을 받고 신축 중인 롯데호텔의 고도제한을 풀어 달라고 대통령에게 건의한 적이 있었다. 대통령은 『그 문제는 車실장한테 이야기 해봐』라고 하더란 것이다.
 
 
  경호실장-정보부장 암투
 
  다시 金桂元씨의 증언을 들어 보자.
 
  <문: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의 관계를 아는 대로 진술하시오.
 
  답: 두 사람의 관계는 5·16 혁명 이후 각하를 측근에서 가까이 모시던 사람들이라 제 생각으로는 두 사람 간에는 대통령의 신임을 얻으려고 서로 암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극도로 관계가 악화된 것은 지난 5월 신민당 전당대회 때 총재선거時 중앙정보부는 李哲承을 총재로 당선시키고자 공작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차지철이 별도로 신민당 신도환 의원을 통해 李哲承 당선 공작을 벌이게 되었으므로 중앙정보부는 각하의 지시로 중도에서 공작을 중단하게 되었는 바 결국 신도환의 이철승 지지가 지연되므로 총재선거에서 탈락되어 차지철이 비난을 받아야 할 터인데 모든 비난이 중앙정보부에 집중되었으므로 차지철과 김재규는 서로 악화가 되었습니다.
 
  문: 피의자와 김재규가 서로 만나 차지철을 비난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이며 어떤 내용입니까?
 
  답: 제가 부임한 지 2개월 후부터이며 김재규와 만나게 되면(매월 6~7회 정도 본인의 사무실 또는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각하를 모시는 자리) 차지철을 비난하게 되는데 주로 차지철의 오만불손한 언동과 특히 정치문제에 깊이 관여하면서 강경일변도의 주장과 건의로써 각하의 결심을 흐리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을 지칭하면서, 『저 자식을 해치워 버려야지. 저놈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각하 결심만 흐려 놓고 안 될 텐데』, 『각하께서 나보고 무어라고 명령하는 것은 좋지만 지가 뭔데 각하보다 한술 더 떠서 이러쿵 저러쿵 나에게 이야기하는지, 짜식』 등 수없이 차지철에게 증오를 터트리거나 욕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의 진술서에서 나오듯이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不和를 화해시켜야 할 의무를 진 金桂元 비서실장이 金載圭 부장 편에서 경호실장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고 있었다. 두 金씨는 오랫동안 형제처럼 친한 사이였다.
 
 
  金桂元-金載圭 사이
 
  金桂元은 10·26 사건 후 육본검찰 신문에서 金載圭와 맺은 인연에 대해서 상세히 진술했다.
 
  <1960년도 5월경부터 본인이 진해의 육군대학 총장으로 근무했는데 부총장이 金載圭였습니다. 그 당시 해군과 육군의 군수물자 수송 揚陸 합동훈련을 마친 후 마산에서 술을 마시고 진해로 귀환하던 중 앞에 가던 김재규가 차 사고로 부상당하자 본인이 그를 구출하여 병원에 입원 가료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김재규는 본인을 은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1965년도 본인이 1군 사령관으로 재직時 김재규가 제6사단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는 바 당시 대통령 각하께서 갑자기 6사단을 밤중에 방문한다고 하기에 본인도 참석하였고, 대통령과 김재규의 친밀한 관계를 알고 나도 더욱 친하게 지냈습니다.
 
  본인이 1967년도 육군참모총장 재직시 김재규가 6관구 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는 바 군수지원 문제 등으로 자주 접촉하였고, 청와대에서 지휘관 회식 時 등에는 꼭 김재규를 대동하였습니다.
 
  네 번째로 본인이 중앙정보부장 재직 당시에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수도경비사령관인 윤필용과는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자 서로 암투하고 권력다툼을 벌이는 등 극한 대립을 하고 있어 대통령 각하의 지시로 이를 중재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섯째로 1978년도 본인이 駐中대사로 있을 당시 귀국하면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영접을 나오지 않았는데 김재규 부처가 본인을 부부동반으로 초대해서 따뜻하게 대해 주는 등 배려를 해주어 아주 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본인의 국회의원 출마과정에 있어서 각하께 건의하여 본국으로 소환하여 주는 등 많은 신세를 입어 더욱 친해졌습니다>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 1979년 11월17일 진술조서)
 
  車智澈에 불만을 가진 또 한 사람은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강직한 軍人인 그는 車실장이 경호를 빙자하여 軍지휘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데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 당시 軍內의 실력자 그룹은 사단장·연대장·대대장 등 實兵지휘부서를 장악한 정규육사 출신들이었다.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을 지도자로 따르던 이 장교단은 軍수뇌부가 車실장에게 굴종한다고 보고 선배 장성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이런 균열된 권력구도 위에 얹혀 있던 것이 朴대통령이었다. 이런 불안정한 구도는 정치위기가 오면 권력투쟁으로 폭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형제 같은 두 金씨는 車智澈을 미워하는 마음이 연장되어 車실장을 비호하는 朴대통령에 대한 서운한 감정과 배신감까지 공유하게 된다. 권력핵심부의 감정前線은 「김계원+김재규」 對 「박정희+차지철」 구도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감정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朴대통령이 죽게 되는데, 참으로 한국적인 감정싸움의 결과라고 하겠다.
 
  권력의 핵심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이런 갈등은 1979년에 일어나는 정치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어진다. 시스템 운영의 鬼才(귀재)로 불리던 朴대통령이 경호실장에게 국내정치 공작 임무의 상당 부분을 위임함으로써 정보부장과의 불화를 조장했고, 그 피해를 자신이 보았다는 점에서 10·26 사건의 최종 책임자는 그 자신일 것이다. 권력 시스템 운영의 실패인 것이다.
 
 
  YH 여공 新民黨舍 농성
 
YH여공 농성 진압.

  석유값이 오르자 물가가 일제히 오르기 시작했다. 1979년 3월7일 정부는 국내 석유제품 값을 평균 9.5% 올린 데 이어 7월10일엔 석유제품 값을 59%, 전력요금을 평균 35% 올렸다. 1979년의 소비자 물가는 21%나 올랐다. 기업도산과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커졌다. 신발공장들이 몰려 있던 부산진구 출입기자였던 기자도 이 해 여름의 주된 취재는 살인사건이 아니고 해고·임금체불 같은 것들이었다.
 
  기자가 「해고된 노동자 쇼크死」, 「停年 낮추어 무더기 해고」 같은 제목의 기사를 쓰고 있는 동안 부산의 商人들은 세금過重으로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1979년 부산시민들이 부담한 세금은 전년도보다 32%나 많아졌다. 10월16일 부산 시위 때 도심 상인들이 응원하고 가세한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조세저항 심리였다.
 
  경제불황과 함께 밀려온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싫증을 공세적으로 이용한 것이 金泳三 총재가 이끌기 시작한 신민당과 종교계, 노조, 在野운동권이었다. 이들의 강경투쟁노선은 국민들의 경제적·정치적 불만을 자극하고 확대시켜 나갔다. 국민들과 투쟁세력 사이의 상승작용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를 매개한 것은 신문의 적극적인 보도였다.
 
  8월에는 吳元春 사건과 YH여공 사건이 동시에 터졌다. 「경북 영양군의 가톨릭농민회 분회장이던 吳씨를 기관원이 납치하여 포항 울릉도로 끌고 다녔다」고 천주교 안동교구 신부가 폭로했다. 경찰이 수사를 해보니 허위폭로임이 밝혀졌다고, 吳씨와 신부 등을 구속했다. 이에 대해서 金壽煥 추기경이 나서서 안동 목성동 성당에서 전국 기도회를 열고 정부를 공격했다.
 
  『경찰이나 정보기관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이같은 관념이 바로 그 많은 인권유린 사태를 낳게 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국민들이 눌려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대구지법은 吳元春씨가 허위폭로를 했다고 판단하여 吳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고, 吳씨는 항소하지 않아 刑이 확정되었다. 그래도 천주교와 많은 국민들은 재판 결과를 믿지 않으려 했다.
 
  경찰이 吳元春 사건을 발표하던 8월10일 더 큰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YH무역 노조 소속 여공들이 회사의 폐업에 항의하여 공장에서 농성하고 있다가 마포 신민당사로 옮겨 간 것이다.
 
 
  金載圭, 농성 女工 강경진압 지시
 
  1966년에 10여 명의 종업원으로 시작한 이 가발회사는 4년 뒤엔 종업원이 4000명이나 되는 수출순위 15위의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설립자 장용호씨는 미국에서 백화점을 차리고 업종전환을 모색했는데 잘 되지 않아 본사는 축소경영의 길을 택해야 했다. 1975년엔 종업원이 1800명으로 줄어들었다. 低임금과 해고 불안에 싸여 있던 노동자들은 1975년에 전국섬유노조 YH무역지부를 설립했다.
 
  1979년 3월29일 회사는 「경영난으로 4월 말에 문을 닫는다」는 폐업예고를 했다. 노조는 이에 항의하여 농성을 하고 회사는 살길을 찾다가 결국 8월7일 폐업공고를 하고는 『해고수당을 8월10일까지 미수령할 때는 법원에 공탁한다』고 발표했다.
 
  8월9일 재야운동권의 문동환·고은·이문영씨가 金泳三 총재 집을 찾아가서 여공들이 신민당사로 찾아가면 그 호소를 들어 보고 당국에 해결책을 촉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金총재는 여공들이 黨舍(당사)를 농성장으로 택할 줄은 몰랐고 호소차 방문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200명에 육박하는 여공들은 黨舍로 들어오더니 4층에 올라가 농성에 들어갔다.
 
  金총재도 여공들을 위로하고 『억울한 일이 없도록 정부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여공들의 寢食(침식)에 黨이 나서서 편의를 제공하도록 시켰다. 신민당은 정부 측과 접촉하여 여공들의 요구조건을 반영시키려고 했으나 홍성철 보사부 장관은 대화를 거부했고, 金載圭 정보부장이 청와대 대책회의에서 강경진압을 주장했다.
 
  8월11일 새벽 경찰병력이 신민당사에 들어갔다. 여공들과 함께 저항하는 신민당원들이 경찰과 난투극을 벌였으나 여공들은 간단히 끌려나왔다. 취재기자들이 여러 명 경찰에 구타당했다. 상황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여공 김경숙양이 떨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사망했다.
 
 
  金正燮 증언
 
  金正燮 정보부 제2차장보는 1979년 11월18일 陸軍본부戒嚴보통軍法회의 검찰부에서 한 진술에서 YH여공 농성 사건의 진압과정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했다. 요지는 金載圭 정보부장이 강경한 진압을 지시하였다는 것이었다.
 
  <1979년 8월9일 오전 10시부터 YH 회사 여공 200명가량이 회사 내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오전 10시경 청와대 金桂元 비서실장실에서 金桂元·金載圭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연석회의가 열려 강제해산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본인은 그날 저녁 8시경 치안본부장실에서 경찰투입에 따른 안전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소방서에서 사용하는 安全網(안전망)이 두 개밖에 없어 부득이 매트리스와 모포로 대체키로 하고 다음날 새벽 2시에 병력을 투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후 치안본부장이 柳赫仁 수석 및 高建 수석과 안전대책을 점검한 결과 미흡하다는 결론이 나와 하루 이틀 연기하자는 건의를 본인에게 전화로 걸어왔습니다. 이에 본인은 金載圭 부장에게 두 차례 연기해 달라고 건의하였으나 金부장은 『金桂元 실장도 연기하자고 연락이 왔지만 일단 상부에 보고한 대로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므로 본인도 두 차례 金부장의 뜻을 치안본부장에게 전하고 8월11일 새벽 2시 경찰을 투입하여 YH여공들을 강제해산시키도록 하였습니다>
 
  농성 여공들을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후유증이 심각했다. 야당, 재야단체, 종교단체가 일제히 반발하자 경직된 공화당과 유정회도 YH 사건 배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다면서 조사를 촉구했다. 이런 공방전에 대해서 언론은 정부 측 견해를 많이 전달했으나 行間을 읽는 데 익숙해진 국민들은 야당과 재야세력 편이 되어 갔다.
 
  이때부터 朴正熙 대통령은 金泳三 총재를 거세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변화를 눈치 챈 車智澈 경호실장이 강경 드라이브를 주도하면서 공화당과 정보부는 주도권을 상실했다.
 
  1979년 8월 중순 朴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안보장관들이 참석한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YH 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농민회 대책이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金載圭는 『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긴급조치 9호로써는 부족합니다. 9호가 오래되어 효과가 무디어졌으므로 더 강한 10호가 필요합니다』라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朴대통령은 申稙秀 특보와 김기춘 검사에게 『한번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金載圭는 玄鴻柱 정보부 企政국장에게도 가톨릭농민회·도시산업선교회 등 종교단체의 개입을 효과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긴급조치를 구상해 보라는 지시를 했다. 그는 긴급조치 9호의 핵심인 긴급조치 비난 금지 조항은 빼고 종교단체의 활동과 노사문제를 규제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침을 주었다. 검사 출신인 玄국장은 종교의 정치 관여 금지, 외부세력의 노사관계 개입 금지를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案을 만들어 金載圭 부장에게 건의했다.
 
  8월26일 오후 5시부터 6시 사이, 을지연습 중 벙커에서 朴대통령이 국무총리·비서실장·경호실장 및 안보 관련 장관들과 시국수습에 관한 논의를 하는 자리였다. 金載圭가 또 긴급조치 10호 이야기를 꺼냈다.
 
  『각하,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많이 무디어졌습니다. 칼날이 시퍼런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 현홍주, 신직수 특보가 새로 마련한 긴급조치안을 설명했다. 朴대통령은 이런 논평을 했다.
 
  『그렇게 해서 학생·종교·근로자들을 다 敵으로 돌리면 어떻게 이 난국을 타결해 나가겠소. 당분간 9호를 가지고 밀고 나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 연구된 긴급조치안은 보존해 두었다가 필요시 발동하면 될 것이오』
 
  金載圭는 다음날 참모회의에서 하루 전에 있었던 긴급조치 이야기를 전하고 의견을 구했다. 정치업무를 맡은 金正燮 제2차장보를 비롯한 간부들 전원이 10호 신설에 반대하고 9호를 강력히 시행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었다.
 
 
  미국의 시각―「金泳三이 金大中 의식하여 강경투쟁한다」
 
  YH여공 강제연행에 항의하는 신민당의 당사 농성이 계속되고 있던 1979년 8월13일 또 다른 사건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날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세 사람이 金泳三 총재를 비롯한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정지를 구하는 가처분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냈다. 당원 자격과 대의원 자격이 없는 22명이 전당대회에 참석하였으므로 金泳三 등의 총재 당선은 무효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9월8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6부는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여 金泳三 총재와 네 부총재의 직무집행 및 권한행사를 정지시키고 鄭雲甲 의원을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누가 봐도 이 사건은 金泳三 죽이기에 나선 정권의 공작이란 느낌이 들었다. 여론은 또다시 朴정권을 떠나고 있었다. 金泳三 총재는 당할수록 크게 반발하는 성격대로 행동했다. 그는 9월10일 기자회견에서는 『朴正熙 대통령의 하야를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했다.
 
  당시 韓美관계는 6월 말의 朴-카터 회담으로 정상화된 듯했으나 朴정권의 야당 압박에 의해 다시 악화된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駐韓 미국대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이 다시 朴대통령에게 한발 더 양보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는지 평소 온건하던 정치인들도 反정부 시위에 가세했다. 특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눈에 띄는 강경노선을 펼쳤다. 거기에는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에게 야당 지도자 자리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결의도 작용했다>
 
  9월16일자에 뉴욕 타임스에 보도된 스톡스 특파원과 가진 인터뷰에서 金泳三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은 朴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그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국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어거지이다.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곳에 3만 명의 지상군을 두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국내문제에 대한 개입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駐韓미군을 한국의 內政에 대한 개입이라고 해석한 것은 지금 읽어 보아도 미숙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朴정권의 초강경 대응이 金泳三 총재의 실수를 덮어 주고도 남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朴대통령은 이 회견문에 화가 나서 金泳三 총재를 구속할 생각까지 했다가 의원직 제명으로 방향을 잡았다. 車智澈이 대통령의 이 뜻을 집행하고 감독하는 대리인이 되었다. 공화당·유정회·정보부의 온건론은 朴대통령을 업고 나오는 車실장 앞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金載圭의 마지막 시도
 
  글라이스틴 대사는 9월26일에 金載圭 정보부장을 만났다. 이때 그를 동행한 사람이 美 CIA 서울지부장 브루스터였다. 이날 金載圭는 대사에게 「한국의 국내정치 발전 방향」에 대해서 물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정치적 대립이 첨예화되면 국가분열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현재의 헌법과 정치시스템으로써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질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金載圭는 정치안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날 대사와 지부장은 金載圭를 통해서 金泳三 의원직 제명을 재고해 주도록 朴대통령에게 건의하려고 했었다. 두 사람은 金부장으로부터 조금도 이상한 태도를 찾지 못했다.
 
  10월2일 朴대통령은 청와대에서 金載圭·金桂元과 함께 1시간 동안 점심식사를 했다. 여기서 金載圭는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金泳三 총재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고 건의했다. 10월3일 金載圭는 장충체육관 근처의 정보부 안가에서 金泳三 총재와 만났다. 金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대통령과 국수를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미 공화당에 金총재 제명 지시가 내려갔습니다. 제가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金총재를 만나 담판을 짓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내일 아침 기자들과 우연히 환담하는 척하면서 뉴욕 타임스 회견 내용이 다소 과장되고 와전되었다고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명이 안 되도록 해보겠습니다. 대통령은 제명에서 그치지 않고 구속할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정부도 양보를 해야겠지만 총재도 조금 참아 주셔야 합니다』
 
  金총재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날 金桂元 비서실장은 신라호텔의 한 객실에서 박준규 공화당 의장서리, 태완선 유정회 의장, 김재규 정보부장과 함께 金泳三 제명건을 논의했다. 金실장은 『모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는데 제명을 재고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소개하면서 『우리 네 사람이 지금 각하를 찾아가 재고를 건의하자』고 말했다. 이때 車智澈 실장이 나타났다. 그는 『방금 각하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각하의 뜻은 확고하다』고 말하는 바람에 청와대行은 이뤄지지 않았다. 金載圭는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金泳三 총재를 만난 것이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金泳三 의원을 10월4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미국은 글라이스틴 대사를 현안문제 협의라는 명목으로 소환했다.
 
 
  한가한 대통령
 
  숨막히게 진행되는 朴정권의 강공 드라이브는 그 실상이 언론에 의하여 상세하게 전달되었다. 朴정권이 경제개발의 성공으로 만들어 낸 도시 중산층에서부터 정권의 야당탄압에 반발하는 여론이 확산되어 갔다. 朴대통령은 여론의 이런 중대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는 듯했다. 강경하고 오만한 車智澈과 우직하나 능력부족인 金載圭에 둘러싸인 대통령은 세상이 돌아가는 原理(원리)와 生理(생리)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 결정적 며칠간 朴대통령은 아주 한가한 일정을 보냈다. 제명 이틀 전인 10월2일 朴대통령은 오후를 배드민턴 시합으로 보냈다.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그리고 崔侊洙 의전수석이 참여했다.
 
  다음날은 개천절이었는데 대통령은 오후 1시에 청와대를 나가 저녁 9시35분에 돌아왔다. 행선지는 알 수 없다. 金泳三 의원직 제명이 있던 날 대통령은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를 구경했다. 다음 날은 한가위였는데 오후에 배드민턴을 즐겼다. 그 다음날 토요일에는 아들 志晩 육사생도를 데리고 자동차편으로 고향(경북 선산)으로 내려가 省墓(성묘)를 하고 왔다.
 
  10월7일 일요일에는 종일 청와대를 떠나 있었다. 10월11일에서 13일까지 대통령은 경주 보문단지內 조선호텔에 머물면서 駐韓 외교사절단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고 골프를 쳤다. 대통령은 10월12일 저녁엔 朴東鎭 외무장관 부부만 초청하여 식사를 같이 했다. 10월11일이 朴장관 생일인 것을 알고 축하해 주기 위한 자리였다. 朴장관은 대통령이 「여유가 많아 보였고, 전에 없이 유쾌해 보였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이 순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선 「혁명적 공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경제불황과 租稅저항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정권의 對野공작과 강경 드라이브가 학생·중산층·서민층에서 분노를 소리 없이 축적시켜 가고 있는 가운데 부산에서는 몇몇 학생들에 의해서 불씨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인화물질과 불씨가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9년 10월4일 백두진 국회의장은 여당 의원만 참석한 가운데 여의도 국회의사당 146호실에서 본회의를 열고 金泳三 신민당 총재 제명안을 가결, 선포했다.

 
  『모입시다!』
 
  1979년 9월17일 낮 12시 부산공업전문대학 게시판 슬래브 지붕 위에 올라간 한 학생이 휴대용 메가폰으로 『모입시다!』 라고 외쳐 댔다. 학생 500명이 게시판 앞으로 몰려갔다. 기계과 2학년생 신홍석으로 밝혀진 이 학생은 선언문을 읽다가 뛰어 올라온 체육교사한테 병아리가 솔개한테 채어 가듯 붙들려 갔다. 이 선언문 사건의 주모자는 세 학생으로 밝혀졌다. 그중 한 명인 김맹규는 서울대학교 자연계열에 합격하여 다니다가 反독재 유인물을 돌렸다고 출학을 당한 뒤 전문대학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세 학생은 열다섯 명의 학생들을 모아 이념서클을 만들었다. 이들의 교재는 「역사란 무엇인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같은 책이었다. 학교에선 세 학생을 경찰에 넘겼다. 경찰은 이들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신홍석의 고등학교 친구가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생 鄭光敏이었다. 이 학생이 부마사태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時局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부마사태와 10·26 사건처럼 명확히 밝혀진 예도 드물 것이다. 그 상당한 이유는 기자의 부마사태와 10·26 사건 취재기록에 의한 것이다.
 
  신홍석은 선언문 사건을 계획할 때 부산역에서 우연히 鄭光敏을 만났다.
 
  『광민아, 부산대학은 네가 책임져라. 같이 일어나자』
 
  『우리 학교는 아직 멀었다. 분위기가 충분히 익지 않아 자신이 없다』
 
  신홍석은 헤어지면서 『유신대학 놈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중얼거렸다.
 
  신홍석이 구속된 며칠 뒤 鄭光敏은 동래경찰서에 불려 갔다. 신홍석이 鄭군과 상의한 사실을 진술한 모양이었다. 鄭光敏은 진술서를 하나 쓰고 나왔다. 鄭光敏의 아버지는 월남한 사람으로서 화물차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 1978년에 대학생이 된 鄭光敏은 시험공부에서 해방된 에너지를 책읽기에 돌렸다. 「백범일지」, 「소유의 역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변혁시대의 한국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 그는 매주 한 권꼴로 읽었다. 서서히 그는 朴正熙 정권을 권력과 재벌의 결탁체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도시공업경제에 희생된 농촌경제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鄭光敏이 속했던 경제학과 2학년생은 76명이었다. 학비감면 대상자가 40명쯤 될 정도로 집안은 풍족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 경제의 어두운 면에 관심이 많아 좌파 경제학자들이 쓴 책들을 많이 읽었다. 이 科(과)의 지도교수는 학생들이 교수들도 읽어 본 적이 없는 좌파서적들을 읽고 있는 데 놀랐다. 그 교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마르크스 계통 이론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의 심리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위태위태하게 보였다.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1979년 4월19일 鄭光敏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4·19 의거 날을 그냥 보내는 학생들의 모습에 울분을 느꼈다. 종이에다가 「4·19―19주년」이라고 매직펜으로 써 들고 도서관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다음날 鄭光敏은 학생 상담관실에 불려 가 경위서를 썼다.
 
  1979년 9월 학교가 개학되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캠퍼스로 돌아온 학생들은 분위기가 술렁거리면서도 긴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사복형사들이 할 일 없이 校庭(교정)을 서성대고 있었다. 방학 중에 있었던 YH 사건이 경제학을 전공한 학생들에게 특히 큰 자극이 되었다. YH 사건은 한국 경제구조를 정권과 재벌의 결탁이란 도식으로 파악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이 옮았음을 증명한 셈이었다.
 
  경제학과 2학년생들이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는 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는데 한 학생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런 착상을 하는 사람은 학원가의 범법자』라고 소리쳤다. 鄭光敏이 일어나더니 『그러면 무슨 대책이라도 있습니까』라고 소리쳤다. 鄭군은 그 말만 하고 앉아 버렸지만 다른 학생들은 『나는 과연 행동할 수 있나』 하는 自問自答을 했다고 한다. 시국에 예민해진 학생들의 마음이 달구어지고 있었다.
 
  부산대학교 工大 기계과 3학년생인 李鎭傑(이진걸)은 동고등학교 남학생들과 동여고 출신 여학생들이 만든 「동녘회」라는 모임에 속했다. 이 모임은 회원의 친목을 위한 활동을 주로 했으나 1978년 4·19 선언문 사건으로 회원 이성동이 구속되면서 이념서클로 바뀌었다.
 
  이진걸은 노동자와 농민을 주제로 등장하는 토론에 자주 참여하면서 의식화의 과정을 밟았다. 그는 서점 점원인 황선용, 黃의 친구인 남성철과 친해졌다. 이 세 사람은 주로 독서와 토론을 통해서 유신체제를 독점매판자본과 독재권력의 결합체로 인식해 가기 시작했다.
 
 
  선언문 등사 야간작업
 
  1979년 9월 개학이 되자 이진걸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단계로까지 울분이 高潮(고조)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10월 초순 세 음모자는 결행날짜를 10월15일로 잡았다. 세 사람이 선언문 등사기를 가지고 황선용이 일하는 서점에 모인 것은 10월13일 밤10시였다.
 
  황선용은 왼쪽 허벅지의 골수염 수술 자리가 도져서 再수술 날짜를 받아 두었다. 그는,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면 틀림없이 감옥에 갈 텐데 이런 몸으로는 견디기 어렵다고 걱정했다. 이진걸, 남성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한 뒤 열병을 앓고 있던 남군은 집에 가고 李·黃 두 청년은 한 여관에 들어갔다. 900장의 선언문 등사가 끝난 것은 10월14일 새벽 4시쯤이었다.
 
  10월15일 오전 이진걸과 남성철은 선언문을 부산대학교 본관과 도서관에 뿌렸다. 선언문에는 「도서관 앞으로 오전 10시에 집결하자」고 적혀 있었다. 선언문을 뿌리고 도서관 앞에 와서 학생들이 모이기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호응이 없자 터벅터벅 걸어서 학교 밖으로 나왔다. 술집에 가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신 이진걸과 남성철은 남은 선언문을 뭉텅이로 변소에 쳐넣었다.
 
  이날 정오 부산대학생 鄭光敏은 학교에 당도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뿌려진 李鎭傑의 격문을 읽고 도서관 앞에 모였던 학생들은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자 흩어지고 있었다(李鎭傑은 너무 일찍 포기하고 학교 밖으로 물러났던 셈이다).
 
  격앙된 鄭光敏은 친구 둘을 만났다. 세 학생은 학교 매점으로 갔다. 鄭光敏은 『이젠 우리가 나설 때다』고 말을 꺼냈다. 두 친구도 찬동하는 듯했다. 그들은 등사판을 살 돈이 없었다. 그날 오후 겨우 다른 친구 집에서 줄판 롤러 따위를 빌릴 수 있었다.
 
  이날 밤 정광민과 친구는 鄭군의 다락방에서 작업에 들어갔다. 鄭군은 엿새 전에 써 둔 선언문 초안을 찾아내 원지에 옮겨 썼다. 정광민은 등사판을 밀어 본 경험이 없었다. 잉크가 골고루 묻지 않은 데다가 롤러를 서툴게 밀어 등사는 엉망이 됐다.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전체의 5분의 1도 안 됐다. 태반은 글자모양도 알 수 없었다. 새벽 4시까지 정광민은 롤러를 밀고 친구는 종이를 끄집어내면서 선언문 200장을 등사했다. 정광민의 교련복 바지는 시커먼 등사잉크투성이가 됐다. 둘은 다락방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이려고 했다. 잠이 올 리 없었다. 두 시간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일어났다. 정광민은 가방에 선언문 300장을 집어넣고 집을 나와 아침 8시에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는 역사와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선언문
 
  정광민이 쓴 선언문은 이러했다.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 보게나. 특히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금융이 그들의 기업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기보다는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 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했던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임금 외의 값싼 상품 공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저임금을 지불하고서도 그것이 과연 전체 국민의 후생을 증대시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 (下略)
 
  폐정 개혁안
 
  1. 유신헌법 철폐
  2. 안정성장정책과 공평한 소득 분배
  3. 학원사찰 중지
  4. 학도호국단 폐지
  5. 언론집회 결사의 완전한 자유 보장
  6. YH사건에서와 같은 완전한 자유 보장
  7. 전 국민에 대한 정치적 보복 중지
 
  모든 효원인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16일 10시 도서관으로!>
 
  정광민은 이 선언문에서 정권타도나 朴正熙 하야와 같은 요구를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고, 부산 출신 金泳三 의원 제명에 대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문제의식은 다분히 사회·경제적인 틀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스며드는 주사파류 극좌이념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으나 朴정권의 성공적인 경제개발을 계급적 착취구조로 인식하고 있었다.
 
  釜馬사태의 전체적 성격은 朴정권의 장기집권에 대한 반발이고, 특히 이 지역 출신 金泳三에 대한 탄압이 큰 원인이 되었던 면이 있으나, 이 사태에 불을 당긴 학생들의 문제의식은 다분히 경제적·사회적·계급적이었다. 釜馬사태는 좌파적 인식(주로 경제·사회적 분석 틀)과 우파적 감정(주로 정치적 반응)이 한 덩어리로 결합된 운동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가면 좌파적 인식이 표면으로 나오면서 민주화 운동이 변질된다.
 
 
  뛰어든 불덩어리
 
  1979년 10월16일 오전 9시10분쯤 정광민은 商大 앞 벤치에 앉았다. 벤치 앞으로 두 동급생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광민은 그들을 불러 세워 『조금 있다가 교실로 뛰어들 테니 분위기를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9시30분 정광민은 먼저 商大 206호 강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첫째 시간 수업이 끝나 둘째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 가운데 그는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1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엄태언에게 정광민은 선언문 마흔 장쯤을 슬며시 건네주면서 「빨리 나눠주라」고 눈짓을 했다. 복도에서 정광민은 또 친구 이성식을 만나 선언문 석 장을 주었다.
 
  『무역과를 부탁한다』
 
  『한번 해볼게』
 
  정광민의 목표는 같은 科의 306호 강의실이었다. 경제과 2학년생 마흔 명쯤이 첫째 시간인 「화폐금융론」 강의가 일찍 끝나 앉은 채 중간시험에 대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광민은 뒷문을 통해 뛰어 들어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광민이 들어오는 것과 때맞춰 몇몇 학생이 미리 알고 『우―』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다른 학생들도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 정광민은 가방에서 선언문을 꺼내 책상을 돌면서 나눠 주었다. 그는 이제 흥분상태에 빠졌다. 나중에 자신이 교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 내지를 못할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다른 곳과 연락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뛰어나갑시다』
 
  『나가자!』
 
  마흔 명의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나갔다. 주저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왜 이 젊은이들이 조건반사적으로 집단행동에 나섰던가.
 
  시대정신의 압축된 모습이었다. 1970년대의 학원사찰 시대를 살아온 젊은이들의 가슴마다에 쌓여 있었던 분노와 정의감, 1970년대 말에 집중적으로 터친 朴정권의 갖가지 부패상, 특히 언론이 연일 보도해 온 YH여공 사건과 金泳三 의원직 제명사건, 그런 것들이 조성한 發火 환경에다가 하루 전에 있었던 선언문 살포 사건이 조성한 기대감, 이런 것들이 뒤엉켜 인화물질을 이루었고, 그 한복판으로 정광민이란 불덩어리가 뛰어든 셈이었다. 사명감·정의감·울분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정광민은 바늘을 찌른 셈이었다. 그 에너지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사태는 자연법칙에 따라 큰 물리적 운동으로 전개될 것이다.
 
 
  『모두 일어나자』
 
  경제과 2학년 학생들은 경영과 206호실을 지나가며 합류를 호소했다. 경영과 학생들도 엄태언으로부터 선언문을 받아 책상 위에 놓고 지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가 뛰쳐나왔다. 무역과·회계학과 학생들도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나왔다가 한 덩어리가 됐다. 이들이 인문사회학관 건물 앞으로 나왔을 때는 100명쯤의 덩어리가 생겼다. 정광민은 선언문 뒷면에 검은 사인펜으로 「자유」라고 휘갈겨 썼다. 그는 이 「자유」를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앞장을 섰다. 흥에 겨워 어깨까지 흔들어 가면서 정광민은 빠른 걸음으로 학생들을 商大 앞까지 이끌어 갔다.
 
  이곳에서 노래가 터져 나왔다. 부산 데모의 주제가가 된 「우리의 소원은 자유」를 목이 터져라 불러 댔다. 중간시험을 앞두고 도서관 안엔 10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앞뜰의 잔디와 벤치에도 200명쯤이 흩어져 있었다. 데모대는 도서관 잔디밭에 들어갔다.
 
  『모두 일어나자』
 
  이런 고함소리가 간간이 데모대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선구자」, 교가, 애국가를 계속 불렀다.
 
  박기채 총장, 이충걸 학생처장, 신태곤 商大 학장, 오종석 商大 교무과장이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달려온 것은 이때였다. 총장은 정광민의 어깨를 툭툭 치며 타이르듯 『이제 그만 내려가라』고 했다. 吳교수는 정광민의 허리띠를 붙들고 뒤로 끌어냈다. 큰 나무 밑으로 끌고 간 吳교수는 『이것까지는 내가 책임진다. 학장실로 가자』고 했다.
 
  정광민은 말을 바로 받았다.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2, 3년 살 각오를 하겠습니다. 끝까지 하겠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대열로 돌아왔다.
 
 
  시위를 키운 형사들의 역습
 
  스무 명의 잠복형사들은 사태가 너무 빠르게 전개돼 가는 바람에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학생데모는 초동 단계에서 깬다는 것이 원칙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깨고 들어갈 만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몇몇 형사들은 학생들의 팔을 잡아당기며 『학생! 이러면 안 돼!』 라고 말려 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서면 근방의 소매치기 소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30세의 이성희 형사는 김성수 형사의 팔을 툭 치며 『이제 깨어 버리자』고 속삭였다.
 
  그때 정광민은 친구로부터 선언문을 한 장 받아들고 도서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열람실을 돌아다니며 아직도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우리 일어납시다』고 소리쳤다. 정광민이 다시 잔디밭으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두 형사는 학생들을 헤집고 그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李형사가 정광민의 멱살을 잡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누군가가 면도칼이 아니면 만년필촉 같은 날카로운 쇠붙이로 李형사의 손바닥을 그었다.
 
  학생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욕설을 퍼부으며 두 형사를 차고 밟고 했다. 잔디밭 가장자리로 몰린 두 형사는 그만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두 형사가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자 한 이 체포 시도는 노래만 부르고 있던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꺼져 가던 열기에 휘발유를 부은 꼴이 됐다. 두 형사의 행동으로 자극받은 구경꾼 학생들도 한꺼번에 데모대열에 끼어들었다. 도서관 안에서도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형사의 기습은 시위대열을 300명에서 1000명으로 불어나게 했다. 저절로 다섯 줄의 어깨동무 대열이 이뤄졌다.
 
  대열은 계단을 내려가 商大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꿈틀꿈틀하는 용의 몸뚱아리처럼 대열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뒤늦게 달려온 학생들이 잇따라 이 흐름에 말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학생들도 끼어들었다. 데모에 소극적이게 마련인 복학생과 4학년 학생, 심지어 대학원생들까지 합류했다. 몇몇 교수들은 대열과 같이 뛰면서 학생들을 잡아당겼으나 오히려 학생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대열은 아스팔트 산책로를 따라 商大를 지나 신관을 한 바퀴 돌고 스탠드를 가로질러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블랙 마리아」의 추격
 
  데모 대열은 이젠 2000명쯤으로 불었다.
 
  『유신』
 
  『철폐』
 
  처음으로 구호가 터져 나왔다. 시위 대열은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교련 수업을 받고 있던 ROTC 학생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데모 대열은 新정문으로 향해 나갔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철문 바깥엔 스파르타 병정들처럼 방패와 방석모로 무장한 경찰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농구골대를 밀고 와 新정문에 이르는 비탈길로 굴렸으나 쇠문은 끄떡도 안 했다. 보도에 깔린 붉은 보판을 깨어 경찰대열에 집어던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오전 10시15분 新정문 바깥에서 동래경찰서장은 진압부대의 캠퍼스 돌격을 명령했다. 맨 앞장을 선 것은 페퍼포그를 뿌리는 지프차였다. 「블랙 마리아」란 별명이 붙은 이 차는 하얀 가스를 내뿜으면서 교정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그 뒤로 얼굴을 방석철망으로 가린 초록빛의 대열이 발맞춰 따라 들어왔다.
 
  학생 대열은 매운 가스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재채기를 터뜨리고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그들은 우르르 물러났다.
 
  일부 학생들은 대항했다. 시계탑 밑의 보도에 깔린 보판을 빼내 가스차에 던졌다. 유리창에 철망이 쳐져 있어 보판을 맞고도 끄떡하지 않자 보판을 깨어 조각으로 만들어 던지기도 했다. 잘못 던져 앞의 학생이 얻어맞기도 했다.
 
  학생들이 대항하자 경찰은 MPG 최루탄 발사기를 쏘고 사과탄을 던졌다. 이때 캠퍼스로 들어온 경찰은 585명이었다. 데모대를 완전히 해산시키기엔 모자라는 병력이었지만, 학생들을 자극하여 거대한 분노의 덩어리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블랙 마리아」는 운동장으로 들어가 달아나는 학생들을 뒤쫓았다. 너무나 집요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구경하고 있던 지질학과 이만규는 『저러다간 학생들이 차에 깔려 죽겠다』고 소리치며 데모 대열로 뛰어들었다. 달아나는 어느 학생이 「갈 지(之)」 자를 그리며 「블랙 마리아」의 추적을 뿌리치려고 해도 지프차는 스탠드 바로 밑까지 깔아 죽일 듯 그 학생을 몰아갔고 학생들은 야유를 보냈다. 사학과 졸업반은 운동장에서 「우우」 하는 함성이 터져나올 때까지 수업을 받고 있었다. 교수가 바깥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자고 했으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매운 최루가스는 학생들을 행동으로 몰아세웠다.
 
  학생들은 교수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몰려나갔다.
 
 
  중립지대가 사라지다
 
  『모두 본관으로 들어가라!』
 
  경찰은 경고방송과 동시에 최루탄을 쏘았다. 2, 3층의 유리창이 최루탄을 맞고 박살이 났다. 유리조각이 좌르르 우박처럼 떨어졌다. 학생들은 본관으로 피해 들어가 창문을 통해 경찰에 욕을 퍼부었다.
 
  『창가에 서지 마라』
 
  경찰의 두 번째 최루탄 세례가 유리창으로 날아왔다. 와장창 와장창, 곳곳에서 창문이 깨지고 복도는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많은 교수들도 모멸감을 느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너희들이 무얼 아느냐』고 데모하는 제자들을 꾸짖고 있었던 교수들은 이젠 학생들과 마음속에서 같은 편이 되고 있었다.
 
  경찰의 캠퍼스 돌격은 방관하던 학생들을 참여자로, 참여자를 더 용기 있는 시위자들로 만들었다. 이 교정 진압작전 이후엔 막는 쪽과 외치는 쪽이 있을 뿐이었다. 방관자의 설 땅을 없애 버린 것은 바로 경찰이었다.
 
  학생들은 경찰이 일단 운동장으로 물러나자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문창회관 앞에선 700명 남짓한 무리가 모였다. 이 무리는 舊정문 쪽으로 행진했다. 舊정문은 新정문에서 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나갔다. 체육관·도서관·본관에 몸을 피했던 학생들이 다시 쏟아져 나와 이 대열에 합세했다.
 
  이때 경제과의 어느 학생은, 본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데모 대열을 구경하고 있는 마지막 방관자들에게 외쳤다.
 
  『역사를 두려워하라!』
 
  이 구호는 아마 부산 데모를 통해 나온 모든 구호 가운데 가장 수준 높고 준엄한 것이었으리라. 대열이 舊정문으로 꺾이는 모퉁이를 돌 때 옆에 붙은 工大 강의실에서 공대생들이 무더기로 뛰어나와 합류했다. 이제 1000명이 넘게 불어난 사람의 무리는 비탈길을 무서운 관성으로 휩쓸며 내려갔다.
 
  舊정문을 향해 쏟아져 내려간 학생들은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수위실에 돌을 던져 박살을 내고 그 옆에 붙은 블록담을 공격했다. 블록담에 쳐진 철망을 걷어내고 수백 명이 한꺼번에 발길질을 하자 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드디어 학교 밖으로 나온 학생들은 100명쯤의 기동경찰대와 맞닥뜨렸다.
 
  舊정문 앞에는 가게가 있고 이 가게 앞엔 빈 음료수병이 쌓여 있었다. 학생들은 너도 나도 이 빈 병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경찰버스의 앞 창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경찰은 이 기세에 눌려 주춤했다. 학생들은 무너진 舊정문 쪽 블록 담 사이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300명 남짓한 학생들이 주택가 골목 사이로 빠져 온천장 쪽으로 뛰어갔다.
 
  10월16일 오전 11시 부산大 도서관 앞. 도서관 앞엔 2000명가량의 학생들이 모였다. 수백 명의 사복형사와 교수들, 그리고 정보형사들의 카메라렌즈 앞에서 무역과 김창수가 학생들을 모두 앉도록 했다. 선언문 낭독이 있어야 할 차례였다. 정광민은 자기가 쓴 선언문을 꺼내 읽으려 했다. 그러나 희미하게 등사돼 아예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정광민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친구가 전날 받았던 이진걸의 선언문을 건네주었다.
 
  정광민은 『우리는 학원 내 일체의 외부세력을 배격한다…』는 선언문을 우렁찬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그가 선언문의 첫 단락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 속으로 들어온 것은 도서관 옥상에서 그를 겨냥하고 있는 카메라렌즈였다. 한 학생이 앞으로 나와 데모할 때 주의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자.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나. 상점이나 학교 기물을 부수지 말자. 모두 우리가 낸 세금이다. 행인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질서를 지켜 시위를 하자』
 
  학생들은 데모의 목표 지점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온천장으로 가자」, 「아니 부산역까지 나가야 한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정광민은 같은 학과 친구들에게 끌리다시피 하여 도서관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한 친구는 3000원을 주면서 『이제 너의 할 일은 끝났다. 친구집에 가서 숨어 있으라』고 했다. 네 친구는 광민이를 번쩍 들어 뒷담으로 넘겨 보냈다.
 
 
  자발성
 
  학생들은 목적지를 놓고 도서관 앞에서 토론을 벌였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우선 학교를 뚫고 나가기로 했다. 여덟 줄로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곤 비탈길을 따라 무너져 내리듯 운동장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들이 가방을 든 채 뛰었다. 여학생들은 콜라와 사이다를 한아름 사 가지고 와 대열과 나란히 뛰면서 남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경찰은 이제 이번 데모가 옛날의 그 어떤 학생 데모와도 다른 성격을 띠어 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 채기 시작했다. 가장 큰 특징은 놀라운 자발성이었다. 졸업반 학생과 여학생까지 스스로 끼어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체면치레로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학생들과 교수들이 실랑이를 벌여 自中之亂(자중지란)이 생기고 여기에서 데모의 김이 새버리는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캠퍼스에 있었던 학생들 가운데 90% 이상이 대열에 끼어들었다. 전에 없던 높은 참여율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두 번이나 깨어져 흩어졌다가도 세 번이나 다시 뭉쳐 더 거센 도전을 해왔다. 학생들의 상기된 얼굴은 신념으로 빛났고 장난삼아 데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시위 대열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운동장 북쪽의 사대부속고등학교 담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담엔 셔터식 철문이 달려 있었다. 학생들이 밀어붙이자 문이 떨어져 나갔다. 이곳으로 서로 먼저 나가려고 학생들이 엉겨붙었다. 이때 누군가가 『질서 유지』라고 구호를 선창했다. 『질서』, 『유지』 어느새 합창으로 변했고, 학생들은 질서를 되찾았다.
 
  10월16일 정오 부산대학. 한편 경찰이 뒤늦게 사대부속高 담을 봉쇄하자 미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학생들 2000명가량은 어깨동무를 한 채 대학 운동장을 계속 맴돌았다.
 
  낮 1시쯤부터 학생들은 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경찰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생각했다. 학생들이 정문을 나서는 데는 굳이 말릴 까닭을 찾을 수 없었다. 학교당국에서도 오후에는 수업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경찰은 자기들에게 도발을 하지 않고 교문을 지나가는 학생들에게는 손 댈 수 없었다.
 
  경찰은 곧 학생들이 가는 곳이 부산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성희 형사는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부산역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공중전화 부스 옆에선 어떤 학생이 『우리는 했다. 너희들은 무엇 하느냐』고 소리치는 것도 엿들었다. 이 정보는 부산시경에 즉시 보고됐다. 동아대학교를 비롯한 다른 대학에도 경찰의 비상망이 쳐졌다. 학생들이 캠퍼스를 빠져나간 뒤에 박기채 총장은 교수들을 강당에 모았다.
 
  『인류 역사 시작 이래로 젊은이들은 항상 과격한 행동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면학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 최선을 다합시다』
 
  그는 짤막한 당부의 말을 던지고 강당을 나가 버렸다.
 
 
  10월16일 서울에서는…
 
  10월16일 오전 서울. 부산대학교가 최루가스와 함성으로 휩쓸리고 있던 이날 오전 국회 본회의는 휴회 기간 중에 사망한 유정희 金聖煥 의원에 대한 묵념을 올리고 의원직을 승계한 고귀남 의원 선서를 듣고 5분 만에 끝났다. 金泳三 총재 제명 이후 처음 열린 본회의장에서 여당 의원들은 텅 빈 야당 의석을 의식해서인지 좌석에 앉아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는 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공화당 의장서리 朴浚圭는 기자들과 만나 신민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 문제에 대해 『야당 의원들이 자살한다고 해도 곡할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고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날 오전 朴대통령은 한강을 가로지르는 열한 번째의 다리 성수대교 개통식에 참석하여 테이프를 끊은 뒤 강남 쪽으로 걸어서 건넜다. 이어서 여의도에 있는 한국기계공업진흥회관을 방문해 한국기계 교역전을 둘러보았다. 대통령은 전시장에 온 일반 시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대통령이 전시장을 떠날 때 관람객들이 바깥으로 나와 박수를 치자, 손을 들어 답례했다.
 
 
  학생 숨겨 주는 시민들
 
  10월16일 오전 경찰이 부산대학교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 학생들을 스탠드나 교실 안으로 몰아넣고 있을 때 부산시경 밑에 있는 아홉 개 경찰서엔 비상이 걸렸다. 이때가 오전 10시45분쯤, 동래경찰서 관할 지역과 붙어 있는 부산진경찰서 다중진압 부대 150명은 15분 만에 뒷마당에 집결했다. 방석모와 방석복을 입고 곤봉을 찬 그들은 야구의 포수들 같았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들은 학생 데모 진압의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때는 아무도 그들이 정작 중요한 장비를 빠뜨리고 간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방패를 두고 갔던 것이다.
 
  오전 10시50분 부산대학교 舊정문의 담을 무너뜨리고 바깥으로 나온 300명 가량의 학생들은 골목을 따라 금강공원 쪽으로 달렸다. 금강공원에서 온천장까지 구호를 외쳐 대면서 시위를 벌였다. 행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보기만 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행인들과 가게 주인들 가운데 『잘한다!』면서 손뼉을 치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부산일보 사진부 김승준 기자는 다른 취재를 마치고 영업용 택시를 타고 가다가 온천장에서 데모대를 봤다. 택시를 세우고 카메라를 차창 밖으로 내밀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데모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사진기자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카메라가 든 가방을 빼앗아갔다. 金기자는 카메라를 돌려 달라고 사정했다. 한 학생이 필름통을 꺼내 햇빛 앞에서 쭉 뽑아 보인 뒤 돌려 주었다.
 
  국제신문의 사진기자 김탁돈은 오전 11시쯤 회사에 있다가 데모 소식을 사회부로부터 전해 들었다. 찍어 보았자 신문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뛰어나가는데 편집국장이 『어딜 가느냐』고 소리쳐 물었다. 데모 취재를 간다고 했더니 국장은 짜증 섞인 투로 『그런 데는 가지 마라』고 잘라 말했다. 金기자는 무안당한 꼴이 되어 시무룩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늘을 꽉 채운 투석
 
  부산진경찰서 진압부대는 SSB 무전기를 통해 시경 경비과장의 작전지시를 들었다. 학생들 수백 명이 미남로터리 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로터리로 가서 이를 막으라는 명령이었다.
 
  로터리에 도착한 서장은 자기 차를 달아나기 쉽게 머리를 남쪽으로 하여 세워 두었다. 그리곤 데모진압 부대를 가로로 배열시켰다. 학생들은 경찰을 보자 멈칫했다. 그들 앞에는 목욕탕이 있었고 그 옆엔 하수도 공사장이 있었다. 시멘트 하수관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자갈더미도 있었다. 학생들은 직감적으로 이곳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하수도관을 굴려 경찰차가 못 넘어오게끔 바리케이드처럼 만들었다. 그리곤 너도 나도 자갈더미에서 돌멩이를 한움큼씩 잡았다. 경찰 진압부대에 30m쯤 접근했을 때 학생들은 한꺼번에 돌을 던졌다. 500개가 넘는 돌이 뒤엉켜 날아왔다. 우두둑 여기저기서 돌덩어리가 경찰부대 속으로 떨어졌다. 『어!』 『아!』 『아야!』 돌을 맞은 경찰관들이 비명을 질렀다. 두 번째 일제 투석이 우박처럼 또 쏟아져 내렸다. 경찰 대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은 이때야 방패를 들고 오지 않은 실수의 代價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맨몸으로 주먹만 한 돌을 얻어맞게 된 경찰관들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서장의 승용차가 달아났다. 작전車 운전사는 차를 호위하던 경찰관들이 달아나 차만 덩그렇게 남은 것을 알아차리자 운전석에서 뛰어나와 도망갔다. 서장이 달아나자 간부들도 지휘를 포기했다. 서동백 수사과장은 학생들이 몰려오자 모자를 벗어 버리고 길가 집으로 뛰쳐 들어가 몸을 피했다. 집 문밖으로 학생들이 몰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이번 학생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釜馬사태를 찍은 드문 사진 중에 속한다.

 
  취재 포기한 기자들
 
  10월16일 오전 부산진경찰서 상황실. 이날은 샘이 날 만큼 훌륭한 가을날이었다. 구름은 한 점도 없었다. 햇빛은 눈부시게 빛났다. 조금 더운 가을날 같았지만 바람결은 서늘하게 살갗을 스쳐갔다. 이날 오전 부산의 사회부 기자들은 사상구 괘법동에서 일어난 정병주씨 부부 실종사건의 수사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출입처를 지키고 있었다.
 
  국제신문 사회부 趙甲濟 기자는 오전 10시45분쯤 부산진경찰서 다중진압 부대에 비상이 걸리는 것을 보고 상황실로 뛰어 올라갔다. 무전기가 숨가쁘게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참새 200마리 舊정문 돌파하여 식물원 쪽으로 진출하고 있음』
 
  『참새들 금강공원 통과』
 
  『참새 네 마리 연행 중』
 
  데모 상황을 보고하는 음성과 병력 배치를 지휘하는 음성이 뒤섞여 무전기는 데모 중계방송을 하는 듯했다. 趙기자의 충격은 컸다. 부산대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난다 해도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 가운데 맨 나중에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趙기자는 사회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취재하러 갈까요』라는 어리석은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그것은 신문에 날 수 없는 사건, 따라서 취재할 필요도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기자를 만나자 『우리 데모 구경 갈까요』라고 농담조로 얘기한 것이 고작이었다.
 
  趙기자는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점심 뒤 숙직실에 들어가 냄새가 나고 땟국이 흐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잤다. 얼마쯤 잤을까?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숙직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형사 둘은 국방색 전투복 차림이었다. 지친 표정이었다. 구두끈을 풀고 털썩 드러눕더니 『야!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하는 것이었다.
 
  趙기자가 형사계에 들어가 보니 대학생들 열댓 명이 책가방을 든 채 잡혀 와 있었다. 서면로터리에서 타고 가던 시내버스에서 끌려 온 것이었다.
 
  그들은 오늘 한 일을 시간별로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趙기자는 도수 높은 안경을 낀 한 의예과 학생이 쓴 자술서를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울분에서 데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명의 손길
 
  경찰은 학생들이 시내버스를 타고 市중심부로 몰려가는 것을 막아 보려 했다. 자동차로 시내버스를 뒤쫓았다. 학생들이 주로 많이 탄 것은 부산대학교 근처에 시발점이 있는 18번, 19번 버스였다. 많은 버스가 학생들로 꽉 채워졌다. 학생들은 승강구 문을 잠그게 했다. 그리곤 정류소에 멈추지 말고 광복동 쪽으로 계속 달리도록 운전사에게 부탁했다. 경찰차가 뒤따라오자 『아저씨, 자동차 경주엔 이겨야 해요!』 라고 운전사에게 응원을 보냈다. 멋모르고 신바람이 난 시내버스 운전사는 차를 내쳐 몰았다.
 
  경찰은 서면로터리에서 일단 학생들이 탄 시내버스를 검문하여 그들을 끌어내리려 했다. 몇 번 이 짓을 해보고 경찰은 손들어 버렸다. 서면로터리는 하루에 10만 대의 차들이 오가는, 부산에서 가장 번잡한 교통 중심지다. 이곳에서 시내버스를 하나씩 세운다면 차량 교통은 완전히 마비될 터였다. 워낙 학생 버스가 많아 모든 학생들을 끌어 내린다는 것도 될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부산역에 다시 모인다는 정보에 따라 부산시경은 역 광장과 지하도 주변에 병력을 깔았다. 맨 처음 부산역 정류장에 도착, 버스에서 내린 40~50명의 학생들이 이들 경찰관에게 몽땅 붙들려 갔다.
 
  경찰은 학생들을 가득 태운 시내버스가 잇따라 부산역 지하도 근방 정류소에 닿자 승강구 문을 열지 못하게 하고 시청 쪽으로 계속 가도록 했다. 나중엔 아예 정류장에 멈추지도 못하게 하고 그냥 통과하도록 했다.
 
  학생들의 집결지 목표는 他意(타의)에 의해서 시청 부근으로 바뀐 것이었다. 이것도 釜馬사태를 폭발시킨 많은 우연들 가운데 하나였다.
 
  시청 부근인 광복동 남포동 거리가 데모에 있어서는 사회·경제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부산역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은 몇 시간 안 되어 밝혀질 것이었다. 거기엔 격앙된 상인·소시민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불쏘시개가 되어 그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운명의 손길은 경찰을 통해서 朴정권의 종말을 재촉하는 방향으로 중단 없이 작용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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