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는 아내를 잃은 뒤 日記에 수십 편의 감상적인 詩를 남겼다. 그는 「앉은 자리 밟던 자국 / 체온마저 따스하여라」, 「짝을 잃은 저 기러기 / 나와 함께 놀다 가렴」이라고 쓸쓸해하다가 「푸른 별이 되어 / 반짝이고 있겠지 / 저-기 저 별일까 / 저 별일 거야」라고 자신을 달랬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朴대통령은 이런 日記를 썼다.
「현관에 도착하니 아내가 마중 나와서 맞아줄 것만 같아 낭하를 걸어 들어가면서도 이층에서 누가 내려오는 것 같기만 했다」
「현관에 도착하니 아내가 마중 나와서 맞아줄 것만 같아 낭하를 걸어 들어가면서도 이층에서 누가 내려오는 것 같기만 했다」
- 진해 벗꽃길에서 朴대통령이 찍은 아내의 뒷모습.
<축제일을 슬픔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도록 한 데 대하여 진심으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신 정중한 조의에 보답하는 길은 이 땅에서 폭력과 빈곤을 몰아내고 사랑과 희망이 가득한 행복한 생활을 우리 모두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8월20일 朴대통령은 오후 5시경에 車智澈 국회의원을 불러 경호실장에 임명하겠다는 사실을 통보한 후 저녁에 이런 詩를 썼다.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
喪家에는 무거운 침묵 속에
씨롱 씨롱 씨롱
매미 소리만이
가신 님을 그리워하는 듯
팔월의 태양 아래
붉게 물들은 백일홍이
마음의 상처를 달래 주는 듯
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 가고 나만 남았으니
斷腸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리>
朴대통령은 8월31일 밤에는 「추억의 흰 목련 遺芳千秋」란 제목으로 詩를 썼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 극락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사랑을 베풀고
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보리
그 누구에게 구하리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고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없이 지고 가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朴대통령은 9월1일 일요일 밤에도 詩를 썼다.
<아는지 모르는지
비가 와도 바람 불어도
꽃이 피고 꽃이 져도
밤이 가고 낮이 와도
당신은 아는지 모르는지
해가 뜨고 달이 져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도
당신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 3일 뒤인 9월4일 수요일 朴대통령은 오후 6시55분부터 8시25분까지 金正濂 비서실장, 車智澈 경호실장, 崔永喆 의원, 柳赫仁 정무수석 비서관과 함께 청와대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한 뒤 아내 없는 침실로 돌아와 詩를 썼다.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의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 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 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 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

朴대통령은 아내를 잃은 뒤 한동안 일요일에 즐기던 골프를 치지 않았다. 9월14일은 토요일이었는데 그는 오후 2시34분부터 두 시간 동안 서울 근교를 드라이브했다. 다음날 일요일 오후 4시50분부터도 드라이브를 하면서 보냈다. 이날 청와대로 돌아와서 쓴 詩의 제목은 「백일홍」이었다.
<당신이 먼 길을 떠나던 날
청와대 뜰에 붉게 피었던 백일홍과
숲 속의 요란스러운 매미 소리는
주인 잃은 슬픔을 애달파 하는 듯
다소곳이 흐느끼고 메아리쳤는데
이제 벌써 당신이 가고 한 달
아침이슬에 젖은 백일홍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매미 소리는 이제 지친 듯
북악산 골짜기로 사라져 가고
가을빛이 서서히 뜰에 찾아드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되노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오고
가을이 가면 또 겨울이 찾아오겠지만
당신은 언제 또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아, 이것이 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아, 그대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1974년 9월30일은 추석이었다. 이날 오전 7시 朴대통령은 국립묘지를 찾았다. 이 감상을 그는 그날 밤에 詩로 남겼다.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 마디 없소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 마디 없소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와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아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오겠소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올 테니
그럼 안녕!>

1974년 11월23일, 朴正熙 대통령은 訪韓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미국 포드 대통령을 김포공항에까지 환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러 아내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비석은 아직까지 돌로 만들지 못해 임시로 木碑(목비)를 꽂아 둔 상태였다. 朴대통령은 묘소 주위를 둘러본 뒤 木碑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시로 세운 비석이지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생전의 지만이 엄마를 연상하게 하는구먼. 애쓰신 분들이 참 고마워. 관리 사무실 어디 있나? 거기 들렀다 가지』
朴대통령은 그곳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운 듯 천천히 발을 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춘하추동을 여기서 맞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아쉽고 안타까워. 그러나 그 사람이 늘 걱정하고 사랑하는 조국이 나날이 발전하고 애들도 잘 자라고 있으니 마음놓고 天上에서 자리 잡고 있겠지. 나도 열심히 일을 더 잘해야겠소』
朴대통령은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관리실에 들러 그곳 직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잘 돌보아 줘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잘 돌봐 주십시오』
朴대통령은 조금도 대통령 티를 내지 않고, 단지 부인의 산소를 관리하는 분들에게 사례를 하는 평범한 남편의 모습으로 최대한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관리실을 나와서 떠날 때도 朴대통령은 아쉬움이 남는지 묘소를 바라보았다.
『잘 있으시오…』
말끝을 흐리며 아내에게 혼잣말로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도 朴대통령은 몇 번이나 산소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청와대로 향하는 차 안에서 朴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밤 朴正熙는 이런 일기를 남겼다.
<降雪(금년 첫눈) 종일 흐림
김포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작동에 들러 아내 幽宅을 찾다. 그저께 제막한 비석이 퍽도 깨끗하고 아담하게 서 있고 비문도 단정하고 맵시 있게 부각되어 있다. 애쓰신 분들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린다. 당신이 여기에 묻혀 그 앞에 비석이 설 줄이야. 당신은 여기에 잠들어 風雨星霜 춘하추동 가고 오고, 오고 가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 모를 리가 있으랴.
당신이 사랑하는 이 조국과 겨레의 삶의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며 보살펴 주고 사랑해 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오.
아내가 그토록 정성들여 애쓰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저 깜박거리는 네온 불빛이 동작동에서도 보이겠지>

1975년 8월 초 朴대통령은 진해 猪島(저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다. 그러나 말이 휴가이지 일종의 지방 시찰과 다름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朴대통령은 몇 명의 경호원과 수행원만 데리고 연락도 없이 섬을 떠나 거의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궁금해했으나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저녁나절에야 대통령이 숙소에 돌아왔다. 鮮于鍊 공보비서관이 朴대통령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구경 좀 하고 왔지』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주위에서 계속 물어보니까 그때서야 설명을 했다.
『여천 공업단지, 호남정유 메탄올 공장, 七肥(칠비), 삼일만 부두공사 현장, 중화학공업단지, 여천 단지 공사 현장 등을 보고 왔소. 많이 구경했지? 허허. 지금 진행 중인 공사들이 완공되어야 선진국으로 가는 문이 조금씩 가까워질 거야. 오늘 그 많은 공장과 공사 현장을 보니까 마음이 후련해지더군. 해수욕하는 것보다도 한결 시원한 것 같아』
이 말을 하는 朴대통령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朴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보고 수행했던 기자들이 나중에 『영부인의 1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렇게 종일 일을 하실 수 있을까』 라고 수군거렸다.
그날 밤 朴대통령을 찾은 한 비서가 이런 말을 했다.
『영부인의 기일이 다가왔는데 각하께서는 일만 하신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이 말을 들은 朴대통령은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며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지만이 엄마 기일이 다가오니까 해수욕 생각도 없고, 그래서 團地들을 돌아보고 온 거야. 만석꾼 집에서 고이 자란 지만이 엄마 소원이 뭔지 알아?
나보다 더한 개혁주의자였고, 국민들을 잘살게 해달라고 늘 나에게 말했어. 오늘 다녀온 곳이 모두 우리가 잘살게 되는 기본 시설 아닌가』
이 얘기를 하는 朴대통령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내가 혼자 시찰하고 온 줄 알아? 지만이 엄마랑 같이 갔다 온 거야』
낮은 목소리로 쓸쓸하게 말하는 朴대통령의 그 말에 순간 비서는 온몸이 저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陸여사를 그리워하며 쓴 일기 속의 詩는 수십 편에 이른다. 1975년 8월 진해 猪島 별장으로 휴가를 갔을 때는 1년 전의 일이 생각나 더욱 애잔한 詩를 남겼다. 8월6일자 詩.
<一首
님과 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우거진 숲 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
앉은 자리 밟던 자국
체온마저 따스하여라
猪島 섬 백사장에
모래마다 밟던 자국
파도 소리 예와 같네
짝을 잃은 저 기러기
나와 함께 놀다 가렴>
8월9일에도 朴대통령은 긴 詩를 썼다. 「猪島의 추억」이란 詩의 일부를 소개한다.
<해마다 여름이면
그대와 함께 이 섬을 찾았노니
모든 시름 모든 피로 다 잊어버리고
우리 가족 오붓하게
마음껏 즐기던 행복한 보금자리
추억의 섬 猪島
올해도 또 찾아왔건만
아! 어이된 일일까
그대만은 오지를 못하였으니
그대와 같이 맨발로 거닐던 저 백사장
시원한 저 백년 넘은 팽나무 그늘
낚시질 하던 저 방파제 바위 위에
그대의 그림자만은 보이지 않으니
그대의 손때 묻은 家具 집기
작년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미소 띤 그 얼굴
다정한 그 목소리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건만
그대의 모습은 찾을 길 없으니
보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찾을까
해와 달은 어제도 오늘도 뜨고 지고
파도 소리는 어제도 오늘도
변치 않고 들려오는데
님은 가고 찾을 길 없으니
저 창천에 높이 뜬 흰구름 따라
저 지평선 너머 머너먼 나라에서
구만 리 장천 은하 강변에
푸른 별이 되어 멀리 이 섬을 굽어보며
반짝이고 있겠지
저-기 저 별일까
저 별일 거야!>
8월11일 휴가를 끝내고 청와대로 돌아온 朴대통령은 그날 밤 이런 일기를 썼다.
<청와대 현관에 도착하니 아내가 마중 나와서 맞아줄 것만 같아 낭하를 걸어 들어가면서도 이층에서 누가 내려오는 것 같기만 했다>

1975년 8월15일. 이날은 陸英修 여사가 피살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朴대통령은 아침 일찍 국립묘지의 아내 무덤에 다녀왔다. 그 이후 朴대통령이 비서들을 집무실로 불렀다.
『벌써 1주년이 되었구먼. 그 사람 극락에 가 있겠지. 처음에는 눈물도 많이 흘렸으나, 이제 지만 엄마를 위로하는 길은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라 발전에 힘쓰는 것이라고 느껴.
주위에서는 예의에 벗어난 줄도 모르고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내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소리 말라고 일러 줘요. 국내외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내가 지만이 엄마를 잊고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朴대통령은 부인을 잃은 쓸쓸함에 대해서 말을 이어갔다.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면 집사람 초상화를 보면서 대화를 하지, 그 사람의 遺志를 받들어 더 열심히 일을 해야지 하고. 친구가 홀아비가 되었을 때는 그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는데 내가 겪고 보니 가슴이 텅 빈 것 같아. 성경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여자의 갈비뼈 하나로 남자를 만든 것 같아, 허허』
朴대통령은 마치 살아 있는 부인을 옆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朴대통령의 숙연함에 비서들은 다 식은 커피잔만 내려다보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대화가 끝나자 대통령은 기제사를 지내기 위해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그 뒷모습이 쓸쓸하게 보였다.
1975년 12월12일. 朴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공보실의 비서관들을 불러 점심을 함께 했다.
『오늘은 지만이 어머니와 결혼한 지 만 25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내가 살아 있었으면 은혼식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대신 아침에 산소에 다녀왔어요. 아내 산소 앞에서 나는 속으로 얘길 했지. 「남편을 두고 혼자 먼저 가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노」 하고.
참 생각할수록 고생만 하다가 간 사람이야. 애들에게 보충 수업도 해주고. 지만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는 여름에 피서도 안 가고 근혜하고 지만이를 가르쳐 주었지. 내가 강사료라도 좀 주었어야 했었는데. 참 그렇게 되면 과외수업이 되지, 허허허.
아내가 살아 있을 적에 내가 「지만이를 위해 강사를 초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말했더니 집사람이 「그런 것을 하면 과외수업이 돼서 정부 방침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까? 지만이는 나와 두 누나가 도와주면 족하니 그런 것 생각지 마시고 지만이 아버지는 정치에나 전념하십시오」라고 했었는데…』

朴대통령의 변화에 대해서 鮮于鍊 공보비서관은 이런 비망록을 남겼다.
<대통령은 영부인 생각이 날 때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아 있을 때 잘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가슴 아파했다. 대통령은 우울하거나 기분이 언짢아 보였는데도 한두 시간 지나고 다시 보면 기분이 풀려 즐거운 표정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사이에 국립묘지에 가서 영부인을 만나고 온 것이었다.
대통령은 영부인이 돌아가시고 나자 눈에 띄게 쓸쓸한 모습을 자주 보였고, 기력도 많이 약해졌다. 전에는 비서관들을 자주 불러 술도 함께 하며 농담도 잘했으나, 영부인의 서거 뒤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자리를 같이 하더라도 술보다는 주로 차를 들었다.
청와대 식당 한쪽 벽에 커다란 영부인 초상화를 걸어 두고, 그곳에서 대통령은 혼자서 식사할 때도 자주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초상화의 영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한번은 차를 마시면서 대통령이 『옛말에 「惡妻가 효자보다 낫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를 좀 알 것 같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朴대통령은 陸여사에게 결코 자상한 남편도 모범 남편도 아니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한 대통령이었다. 그 때문에 陸여사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놀라운 절제력으로 그런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참다 못한 陸여사가 朴대통령의 외국 방문을 앞두고 청와대를 가출하여 종적을 감춘 일도 있었다.
무뚝뚝한 朴대통령의 아내에 대한 진심은 아내가 죽은 뒤 아무도 보지 않은 일기를 통해서만 표현되었다. 陸여사도 생전에 남편의 마음속에 숨은 이런 신뢰와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만 57세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권력자의 허전한 마음을 채운 것은 「이럴수록 조국 근대화를 더욱 세차게 밀고나가야 한다」는 다짐이기도 했지만 인생에 대한 허무감도 곁들여졌을 것이다.
陸여사는 또 남편에게 정치적 견제도 할 수 있는 「청와대內의 야당」이었다. 陸여사는 朴대통령 측근들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서민의 입장에서 분노한 이였다. 빈틈 없는 陸여사는 남편에게 진정서를 전달하여 조치를 요청할 때도 미리 내용의 진실성을 조사한 뒤에 했다. 朴대통령은 이런 아내의 건의를 존중하여 처리했다.
朴대통령으로서는 의지가 되고 동시에 견제도 해주던 동반자를 잃은 것이다. 이런 변화가 그의 國政운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앞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1974년 8월15일 국립극장에서 在日동포 文世光이 일본 경찰서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한국의 대통령 부인을 살해한 사건은 韓日 간의 큰 외교문제가 되었다. 文世光이 조총련 간부 金浩龍의 조종을 받았고, 일본에서 가짜 여권을 낼 때 좌익성향 일본인의 이름을 도용했음도 밝혀졌기 때문에 한국 정부로서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할 많은 자료를 가진 셈이었다.
문제는 1년 전 李厚洛의 중앙정보부 공작팀이 金大中을 납치해 온 사건이었다. 이 사건 수사를 맡았던 일본 경찰은 우리 정부로부터 전혀 협조를 받지 못했다. 우리 정부는 형식상 수사본부를 차렸으나 『계속 수사 중』이란 통보만 일본에 했다. 다만 金鍾泌 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정치적 사과를 함으로써 외교문제로서는 일단락지었다.
일본 정부, 특히 경찰은 일본 땅에서 일어난 주권침해적 납치사건의 범인을 인도받지 못하고 기소도 하지 못한 점에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文世光 사건은 일본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지만 어떤 점에선 1년 전의 金大中 사건 수사 때의 보복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8월22일 金鍾泌 총리는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 앞으로 친서를 보내 『한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으므로 사건 배후의 철저한 규명을 절실히 요청한다』고 했다. 金총리는 『이번 범행이 1972년 7월부터 일본 국내에서 계획되어 왔고, 범인은 불법으로 일본 여권과 일본 경찰의 권총을 입수하여 사용하였으며, 두 명의 일본인과 소위 조총련의 요원이 직접 관련되어 있음이 수사결과로 나타난 만큼, 일본당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후조치로서 조총련의 反韓활동 근절책을 요청했다.
8월26일 외무부는 우시로쿠 駐韓일본대사를 불러 文世光의 진술내용을 전달했다. 이 진술내용을 읽어 보면 文世光이 金浩龍으로부터 철저한 조종과 교육을 받으면서 암살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이 실감난다. 文이 진술한 북한 공작선 「만경봉」호 승선 관련 내용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지난 연초 외무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서 기자가 찾아 낸 부분을 소개한다.
<1974년 5월4일밤 일본 오사카항에 접안해 있던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아래층 객실에서 한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밤 10시경 여자의 안내로 위층 식당으로 가서 북괴 공작지도원(키 162cm 정도 마른 편이고 앞대머리가 벗겨졌고 곤색 상하의를 착용한 40세 가량의 남자. 성명 미상)과 약 40분간 접견했다.
그 지도원은 文世光의 신원과 과거 투쟁경력, 그리고 文世光이 추진 중인 朴대통령 암살 계획에 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었으며 극구 칭찬했다. 식당에서 인사가 끝난 후 그 지도원은 文世光에게 인삼주와 식사를 접대하면서 『남조선인민민주주의 혁명 완성을 위해서는 남조선의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朴대통령을 암살하는 방법 이외는 길이 없다. 이 사실은 金日成 주석이 직접 지시한 혁명과업이니 신념을 가지고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文世光은 지도원에게 金日成 주석을 위하여 생명과 젊음을 바쳐 혁명역량을 다하여 朴대통령을 기필코 암살하겠다고 맹세하고 그날 밤 10시40분경 하선하였다>
朴대통령 암살을 金日成이 직접 북한공작부서에 지시했고, 이 지시에 따라 조총련의 金浩龍이 조종자로 움직였다는 文世光의 진술은 최근 탈북하여 한국에 온 前 북한통일전선부 요원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이 요원은 金日成과 金正日의 소위 혁명역사를 정리하는 부서에 근무하면서 비밀문건을 보았던 사람이다. 그는 『金日成이 金大中씨의 집권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朴대통령 암살을 직접 지휘했다고 적힌 문건을 읽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文의 범행 당일 남한內의 북한간첩들에게는 국립극장 등 광복절 행사장 주변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도 한다.

朴대통령은 외무부에 대해서 文世光의 조종자 金浩龍의 신병을 인도받으라는 지침을 주었다. 최근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金浩龍의 신병확보문제」란 제목의 메모가 포함되어 있었다.
1974년 9월에 작성된 정부의 「(문세광 조종자) 金浩龍의 신병확보 문제」 메모는 『韓日 간의 사후수습이 시이나(椎名悅三郞) 특사의 訪韓으로 정치적으로 해결되고 나면 金浩龍의 신병확보 요구를 일본 측에 행할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고로, 시이나 특사 방한 중, 또는 방한 직후 한일간의 합의사항 실행의 일환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金浩龍의 신병확보를 추진해 나가야 함.
신병인도의 필요성: 조총련의 규제, 日北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이점이 있음. 한일간 합의사항 실행에 관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테스트하는 가장 좋은 케이스임. 신병확보 실현 여부에 관계없이,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사건처리와 조총련 규제 등에 대한 압력수단이 될 것임.
시행방안: 일본 측이 범죄인 인도 제도에 의하거나 강제퇴거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요구를 막후에서 행함. 조약상 범죄인 인도 의무 有無와 사법부 판단이 개재되지 않고 행정부가 독자적으로 집행적 조치로써 결정할 수 있는 강제퇴거 절차까지도 일본이 거부함은 한일간 친서에 의한 합의사항의 불이행이란 점을 강조해 나감. 일본도 불란서와 홍콩 등지에서 이 제도에 의하여 일본 범죄인을 송환받은 사례가 있음.
고려사항: 일본 측으로서는 이를 거절할 명분은 약하지만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김호룡의 신병을 한국에 인도하여 줄지 여부에 대하여는 불확실한 점이 있음.
시이나 특사 방한 중 또는 방한 직후를 넘기면 일단 失機(실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또한 앞으로 유사한 일본內 조총련계 범죄인 신병확보 문제에 대하여도 선례가 될 것임. 이번 요구는 막후에서 신중히 사전 탐색하는 절차를 수반하는 것이 바람직함>
한국 측으로서는 金浩龍의 신병확보를 최대치의 목표로 삼고 對日교섭을 진행해보았으나 일본內 언론과 여론의 反韓감정, 이를 빌미로 삼은 일본 집권당의 미온적 태도가 너무 큰 벽이었다. 9월6일 金永善 駐日대사는 본국에 이런 보고를 하고 있다.
<일본 정계(사토 前 총리 포함)의 일치된 견해는 韓日관계 타결이 지연되는 경우 일본內의 反한국(좌우익 막론) 및 좌익계에 유리한 일본內 여론의 거센 反韓 반격 파도가 올 것이 두려워지며 그러한 반격파도가 있는 경우 누구도 이를 막기 어려울 것이다. 기술적인 외교절충 및 조정의 단계는 지났고, 단편적인 보고나 건의로서 사태변동을 가져오기는 어렵다는 인식이다>
朴대통령은 결국 金浩龍의 신병확보는 포기하고, 일본 정부가 보낸 특사의 사과를 받아 체면을 세우는 선에서 외교마찰을 마무리한다. 이는 그 1년 前 金大中 납치 사건 때 일본 정부가 납치범을 한국 측으로부터 인도받는 것을 포기하고 金鍾泌 총리의 訪日 사과로써 외교문제를 봉합한 것의 역설적 재판이었다.

1974년 9월17일 金永善 駐日대사는 이병희 무임소 장관과 함께 시이나 자민당 부총재를 찾았다. 시이나 부총재는 이틀 뒤 특사로 한국을 방문하여 朴대통령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시이나 부총재는 사토 내각 당시 외상으로서 韓日수교회담을 마무리지었던 親韓派 거물정치인이었다. 그는 괴뢰만주국의 고위간부로 일했던 소위 만주인맥으로서 그런 점에서 만주국 장교였던 朴대통령과도 통하는 바가 있었다.
金永善 대사에게 시이나는 시원시원하게 이야기했다. 金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電文에 따르면 시이나는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하든지 조총련 문제에 결착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시이나는 일본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하여 『현행법안에서도 얼마든지 규제가 가능하지 않느냐고 힐책한 바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에 訪韓하면 (외무성에서 만들어주는 자료의 한도를 넘어서라도) 모든 문제를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여 이를 다나카 총리에게 보고하고 자민당의 당책으로 삼겠다』는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9월19일 일본항공을 타고 서울에 온 시이나(椎名悅三郞) 특사는 가네마루(金丸信) 의원 등 9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왔다. 그는 오전에 국립묘지에 가서 故 陸英修 여사의 묘지에 참배한 뒤 오후 3시에 朴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시이나 특사는 다나카 총리의 친서를 전했다. 다나카 총리는 친서에서 「사건의 철저한 조사와 재발방지, 그리고 한국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는 범죄행위의 단속」 등을 약속했다. 시이나 특사는 이런 요지의 사과와 설명을 올렸다.
<범행 준비가 일본에서 이뤄진 점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고 충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본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강력한 수사체제를 갖추어 전력을 다하여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 측과 협력하여 철저한 수사를 함으로써 진상규명에 노력함과 동시에 그 결과에 따라서 범법자에 대하여는 엄정히 처벌할 방침이다>
朴正熙 - 시이나 특사 면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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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9월19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朴대통령에게 사과하는 日本 자민당 부총재 시이나 특사. |
1974년 9월19일 오후 3시부터 4시45분까지 청와대 서재에서 있었던 朴대통령과 시이나 특사의 면담록은 최근 외교부에 의하여 공개되었다. 이 자리에는 金東祚 외무부 장관, 金正濂 대통령 비서실장, 우시로쿠 駐韓 일본대사, 아리타 게이스케 일본 외무성 심의관이 배석했다. 착석하기 전에 시이나 특사는 「대통령 각하 영부인의 서거」에 대해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다.
<朴대통령: 韓日 국교 정상화 당시에 외무대신으로서 각별한 노력을 하였던 시이나 특사가 금번 양국 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준 데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금번 문제를 둘러싸고 韓日 간의 관계는 한때 악화일로를 달려 파국 직전에까지 이르렀으나 양측이 성의와 인내를 가지고 노력한 결과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을 매우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특히 이번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여기 있는 우시로쿠 대사가 헌신적인 노력을 한 데 대하여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시이나 특사: 금번 문제에 관하여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대신이 현재 南美를 여행하고 있습니다만 본 문제의 귀추에 대해서 비상한 걱정을 하고 있으며, 이번에 다나카 총리의 요청에 의하여 본인이 친서를 가지고 와서 각하께 올리고자 방한하였습니다(대통령이 이를 일독함).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간 외교 루트를 통하여 많은 절충이 있었으며, 일본 측으로서는 한국 측 요망에 따라 친서를 수정하는 문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그와 같이 되지 못하고 본인이 그간 양국 사무당국에서 있었던 절충의 경위에 따라 친서에 부연해서 설명드릴 사항을 문서로 작성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 자리에서 각하께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친서에 부연 설명, 문서를 낭독하였음).
이상 말씀드린 이외에 이번 기회에 韓日 양국 간의 관계에 대한 본인의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韓日 양국 간의 국교가 정상화되었을 때 마침 본인은 외무대신으로서 이에 관여하여 각하와 귀국 정부에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그 후 약 9년이 경과하였습니다마는 10년도 안 된 기간에 우리 양국 간에 이와 같은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으며, 본인은 당시에 韓日 양국이 양양한 전도를 기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에 세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행히도 일본 경제는 「붐」의 물결을 타고 번영 일로를 달렸고 한편 미국은 월남 전쟁으로 많은 경제적 희생을 치른 결과 미국 경제가 흔들리는 사태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일본은 「붐」의 물결을 놓치지 않고 지내왔는데 뜻밖에도 닉슨·키신저의 對중공 접근 정책이 돌연 들이닥쳐 일본 정부로서는 크게 당황하고, 또 그동안 일본 번영의 지주가 되어 온 美日 안보조약 체제가 흔들리는 동시에 일본 언론계에서는 美日 안보조약이 더 이상 필요없지 않는가 하는 유력한 의견까지 대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구라파의 일각으로부터 불어온 「데탕트」, 즉 국제 긴장완화의 물결은 일본에도 들이닥쳐 美-中共 관계 개선 이후에는 더욱이 美日 안보체제가 필요 없다는 공기가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日中 국교 회복은 세계 대세라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일본과 대만의 관계가 한 편의 각료담화로써 방기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일본의 자민당內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동요와 혼란이 있었습니다.
日中 국교 수립은 세계의 대세에 따른 것이라 하는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대만을 저버리는 것은 국제적 신의 및 예의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큰 목표인 日中 관계 수립에 지장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대다수가 참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와중에서 韓日 간의 문제가 그 본질은 여하간에 국민의 여론에서 점차 퇴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되며 의식하지 못한 채 대세에 밀려가는 기분이었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방심 상태가 금번 문제의 배경이 되고 또 저변에서 작용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실은 본인이 외무대신 재임 중에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대학 문제가 대두되었고 조선대학이 각종 학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바 특별 입법을 통해서 이를 규제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조선대학 측의 주장은 在日 조선인이 특별한 지위의 국적을 취득하였다고 하더라도 민족의 과거를 더듬어 민족의 역사와 연혁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일본 측도 조선대학에서 혁명 교육을 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것이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연히 건드려서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성사치 못하였는 바 아마 이런 일은 일본 외에는 예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으로서는 마음에 걸리는 상태에서 외무대신 직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조선대학 문제에 관해서는 야당이 전혀 떠들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야당이 떠드는 것을 막기에 급급한 자민당으로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본인은 차제에 다시금 이와 같은 경위를 상기하면서 우리가 이 문제를 기본적 관점에서 생각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검찰당국도 여론이 떠들지 않으면 문제삼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은 자민당內에서 본인과 親韓인사 몇 사람이 이 문제를 제기하여 기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던 바 그들도 모두 본인의 생각에 동감이었으며, 결심해서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서는 사회당과 대결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朴대통령: 지금 시이나 특사가 말한 대로 시이나 특사는 韓日 국교 정상화가 우리 두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절대 필요하다는 확신하에서 국교 정상화를 위하여 노력한 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으며 10년이 지난 오늘 지난 날을 회상하는 시이나 특사의 말을 들으니 감개가 깊다. 금번의 8·15 사건에 관하여 韓日 양국 정부 당국자들이 이 일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하여 그간 절충을 벌여 왔으며 타결이 지연되었다고 알고 있다.
물론 양측의 실무 당국으로서는 상당한 신경을 써서 친서 문구 하나하나를 신중히 절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무 당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나 본인은 친서의 자구 한두 자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표현 문제보다 근본적인 것은 상대방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양국민 사이에 맺어진 신의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8·15 사건 후 일본 정부가 취한 일련의 조치 그리고 일본 정부의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허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동안 침묵을 지켜 왔으나 이번 기회에 몇 가지 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과연 일본 정부가 우리를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만약에 우리를 우방으로 생각한다면 喪中에 있는 대통령 가족이나 국민들이 슬픔과 분노에 차 있는 이 시기에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인사들이 행한 발언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일본 측에서는 법적·도의적인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것은 정치·외교·법을 떠나서 동양적인 예의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하여 도의적인 책임도 없다는 말인가?
이번 사건의 범인은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들어와서 일본 경찰이 사용했던 권총으로 범행을 저질렀는데, 물론 일본 정부가 시켰다거나 고의로 그렇게 했을 리는 없겠지만 이 사건은 큰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것은 분명히 일본 정부의 과실이고 또 과실 중에서도 重과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금번 절충의 과정에서 일본 측 책임의 표현 문제에 관하여 논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알기로는 일본 외무성에는 수재나 엘리트 관료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어찌해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하여 도의적 책임 외에 아무 책임도 없단 말인가? 범죄의 음모가 일본 국내에서 이루어졌고 또 일본內에 있는 불법단체에 의하여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온 것이 명백하다.
우리는 일본을 경유해서 침입하는 간첩을 그간 수백 명 체포하고 그들을 조사한 결과 조총련이 이런 음모를 획책하고 있는 것을 알고서 일본 정부에 대하여 이를 단속해 달라는 정식 요청을 지난 5월18일에 일본 정부에 전달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8·15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어찌하여 책임이 없다고 하겠는가?
나는 국제법에는 문외한이지만 그러나 他國 영토內에서 제3국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행위가 있을 때에는 이를 단속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국제법의 원칙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정부 당국은 일이 있을 때마다 국내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리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내가 알기에는 일본 헌법에도 국제법을 존중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알고 있다.
이번 문제에 대해서 일본 측이 야당과의 문제나 여론의 분위기 등에 비추어 법률적 책임이 있다고 명백히 말하지 못하더라도 「응분의 책임」이 있다는 표현을 당연히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그간의 절충결과 일본 측도 「그 나름 대로의 책임」을 느낀다는 것을 밝히게 된 것은 응분의 책임을 느낀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다행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또한 이 문제에 관하여 나는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금번의 일본 측 태도는 한국을 너무나 무시한 태도라고 본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일본 청년이 한국內의 불법단체의 배후조종을 받아서 한국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한국 경찰이 분실한 총기로 일본 천황이나 총리대신을 저격하다가 그 결과로 황후폐하나 총리 부인을 살해했다고 한다면 일본은 한국 정부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바꾸어서 예를 들면 일본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미국 청년이 미국 정부를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의도하에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또 일본 관헌이 사용하던 무기로써 미국의 포드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요행히 대통령은 난을 면하고 포드 대통령 부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면 일본 정부는 미국에 대하여 법적·도의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본 측의 태도는 한국을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는 한때 일본 정부가 끝내 우리에게 이런 태도로 나온다면 우리는 일본을 우방으로 인정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가진 바도 있었다.
다음으로 범인 수사에 대한 일본 측의 태도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저격범 文世光이 자백한 바에 의하면 조총련 조직원인 金浩龍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자금을 댄 것이 명백하며, 또 요시이 유키오 부부는 文의 여권 획득을 알선하고 요시이 미키코는 권총을 구하러 文과 함께 홍콩에까지 다녀왔다.
그런데 金浩龍에 대한 일본 경찰 당국의 수사는 매우 미온적이며, 요시이 미키코는 일단 구속되었으나 바로 석방되었는데, 물론 일본 법원이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일본 법원도 넓은 의미에서는 일본 정부의 일부분이 아닌가? 이번에 한국 국민들의 감정이 폭발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조총련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이다.
시이나 특사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에 있는 조선대학은 공산당 간부를 교육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파괴하고 전복하기 위한 간첩 양성소이며, 아마 자유 진영에 속하는 나라에 공산대학이 존재하는 곳은 일본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범죄의 근원은 조총련이고 韓日 간의 이간을 책동하는 것도 조총련인데 일본 측은 왜 조총련을 그렇게도 비호하고 두둔하는가? 조총련에 치외법권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조총련의 이와 같은 불법행위는 일본 경찰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괴는 교육비라는 명목하에 연간 수십억원의 공작비를 조총련에 보내고 있는데 이와 같은 공작비는 스파이 양성과 일본內에서 反한국적 여론을 조성하는 공작비로 사용되고 있으며, 조총련의 20만 조직은 북괴의 지령에 의하여 남한의 적화공작을 하고 있는 것을 일본 경찰당국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이 對南 적화 공작기지化 되고 있는 문제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만경봉호는 표면적으로는 무역선이나 실제로는 북괴의 공작원을 싣고 내왕하면서 조총련에게 지령을 주고 있는 「이동하는 對南 적화기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 알기에는 그간 만경봉호에 승선한 인원이 연 13만 명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 당국에서 나온 통계라고 생각한다.
또 내가 알기에는 만경봉호에 승선할 때에 여권을 가지고 타는데 어떤 자는 자기 여권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하선시키고 자기는 만경봉호로 북괴에 가서 간첩훈련을 받은 후 다시 만경봉호로 일본에 돌아와서 이번에는 자기 여권으로 하선하는 등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하며 이것은 체포된 조총련계 간첩이 자백하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일본 영토가 對南적화 공작기지로 이용되고 그와 같은 조총련의 「기지가 성역화한다」는 것은 한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기무라 외상은 「한국이 北으로부터 위협이 없다」는 발언을 하였는 바, 北의 위협은 직접 북쪽으로부터 받는 위협과 또 하나는 일본을 경유하여 南으로부터 받는 위협이 있다. 한국의 대통령이 직접 생명의 위협을 받고 그 가족이 내 눈앞에서 피살이 되는 데도 위협이 아니라고 한다면 기무라 외상이 말하는 위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기무라 외상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기무라 외상은 최근 몇 가지의 중대한 발언을 행하였다. 그중 하나가 이미 언급한 「北으로부터의 위협이 없다」는 발언이고, 또 하나는 「한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발언을 일본 의회에서 행하였다는 바 일본 정부의 공식해명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기무라 외상의 발언은 우연히도 북괴의 주장과 일치되는 것이다. 북괴는 대한민국 정부를 불법 정부라고 하면서 대한민국과 미국이 북한을 침범하기 위하여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기무라 외상의 발언과 일맥 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이 문제는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지난번 장례식 때에 다나카 총리가 내한하였을 때에도 간곡히 이야기한 바 있다. 이것은 조총련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시이나 선생께서 다나카 총리의 특사로 오신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특사에게 분명히 나의 견해를 말하고자 하는데 『조총련이 앞으로도 일본 국내에서 지금과 같은 對韓 파괴 및 전복 공작을 계속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우리 정부의 견해를 분명히 말하여 두는 바이다.
이는 우리의 직접 생존에 관한 문제요 死活에 관한 중대한 문제다. 나는 앞으로 일본 정부가 조총련을 철저히 단속해서 이번과 같은 불행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해 줄 것을 재삼 요망하는 바이다. 만약에 불행하게도 이번 사건이 재발할 시에는 양국의 우호관계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20만 조직을 가진 조총련은 일본의 장래를 위하여서도 암적 존재이며 일본 공산당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이다. 나는 차제에 일본 정부가 철저한 발본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생각하며 속담에 있듯이 養虎遺患(양호유환)의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일시 악화일로를 치닫던 양국관계가 양국 정부의 이성과 인내와 꾸준한 노력으로써 일단 타결을 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그간 양국 정부의 노력도 있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를 걱정하고 원만한 해결을 위하여 전력해 주신 시이나 선생과 일본의 親韓的 인사들의 따뜻한 우정과 노력에 감사하며 또 금번 韓日 간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헌신적 노력을 한 우시로쿠 대사의 노력을 치하하는 바이다.
끝으로 한마디 해두고 싶은 것은 이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며 양국 정부와 국민이 서로의 특수한 입장을 이해하면서 상호 존중하고 신의를 지켜나아가야만 양국 간의 항구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이나 특사: 대통령 각하께서 각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신 것은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그중 어떤 문제에 대하여 이미 외무성에서 어떻게 말씀드렸는지는 모르나 지금 말씀하신 것은 깊이 명심할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제의 근본은 지적하신 대로 조총련의 기본적인 성격인 바 이것은 매우 큰 문제로서 우리는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韓日 간에 격의 없는 분석과 그 결과를 교환함으로써 결론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정치기구가 복잡하기 때문에 야당의 실태를 볼 때 국내에 일본적 조총련이 또 하나 있는 감이 있습니다. 금번 대통령 각하 영부인께서 서거하신 비통한 일이 있던 바로 그 무렵에 사회당 서기장이 金日成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본인은 지금 각하께서 말씀하신 사항을 충분히 고려해서 그 대책을 힘차게 그리고 신중하게 세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일본의 黨과 정부에서 의견을 종합해서 다시 말씀드리는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또 일본內의 수사에 있어서도 미온적인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기무라 대신이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정부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경솔한 발언으로서 본인이 귀국하면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朴대통령: 솔직히 말해서 조총련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 국내에 정치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으나 일본의 정치적 장래를 위해서는 지금 이 시점에서 좀 무리가 있더라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이나 특사: 먼저 말씀드린 대로 조선대학 문제에서 저의 노력이 좌절된 일이 있는데 이 문제는 계속 추진하도록 결의를 가지고 해나갈 생각입니다.
朴대통령: 최근의 사례를 보면 일본의 자민당 정부가 자유진영의 일환으로서 끝까지 남을 결의가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최후까지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남을 결의가 있다면 지금 斷을 내리지 않으면 어렵다고 생각한다. 야당이나 신문이 떠든다고 내버려두면 점점 더 기세를 올릴 것이다. 이에 대한 자민당 수뇌부의 생각은 어떤가?
시이나 특사: 아까 말씀드린 조선대학은 각종학교가 아닌 특별한 제도로 바꾸기 위해서 법제상의 문제로 제기하여 탄탄하게 규제하지 않으면 문제해결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朴대통령: 일본 정부, 특히 외무성 당국은 조총련을 건드리는 것을 「터부」시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본의 정치적 장래를 생각할 때 좌경화하더라도 하는 수 없다는 생각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 金日成의 목표는 확실히 먼저 남한의 赤化와 그리고 일본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을 赤化시키려는 것이다.
시이나 특사: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건드리지 않으면 말썽이 없다」는 격언에 따라 조총련을 종기 다루듯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나 본인은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974년 12월25일 일본 정부는 朴대통령 저격사건 수사본부를 해산하기로 했다면서 수사결과를 통보해 왔다. 文世光이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얻도록 도와준 요시이 미키코만 여권법 위반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文世光의 조종범으로 확정한 金浩龍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면서 기소도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 특사 시이나의 철석 같았던 약속은 일본 경찰에 의하여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 정치인과 관료의 역할분담과 합작이 朴정권을 농락한 셈이다.
金日成이 지령한 朴대통령 암살 계획이 文世光의 실수로 陸英修 살해를 결과한 것은 남북한 대결에서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金日成은 자신의 라이벌로부터 동반자를 빼앗아감으로써 정신적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다. 朴대통령의 무리한 對野공작이 부른 10·26 사건도 陸여사가 살아 견제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陸여사 대신 朴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랫동안 모시게 되는 車智澈 경호실장은 陸여사가 했던 역할을 정반대로 했던 것이다.
朴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등장한 全斗煥 정권은 집권과정에서 유혈사태를 불렀지만 朴대통령 시절의 성과를 확대해갔다. 1980년대 한국 경제는 물가를 잡고 무역흑자를 냈으며, 세계 200여 개국 중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바탕에서 집권세력과 국민들이 소란 속에서도 평화적으로 타협한 민주화가 이뤄졌다.
全斗煥 정권은 레이건 대통령의 美國과 나카소네의 日本과 손잡고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기 폭파 등 金正日의 도발을 극복하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남북한의 격차를 벌렸다.
金日成이 서울올림픽에 대항하여 유치한 「89년 세계청년 축전」은 약 50억 달러의 出血性 투자를 불러 경제를 멍들게 했다.
이렇게 본다면 金日成의 지령에 의한 朴대통령 암살 계획은 朴정권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나 全斗煥이란 상대하기 어려운 强者를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결코 성공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朴대통령은 아내를 살해한 文世光의 조종자인 조총련 간부 金浩龍을 일본 경찰이 기소조차 하지 않고 놓아 주는 것을 보고는 치를 떨었을 것이다. 자민당의 시이나 특사는 조총련과 범행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치와 수사를 朴대통령에게 약속했으나 일본內의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때 조총련은 대단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집권 자민당 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여 그들의 약점을 잡아 둔 것이 조총련이었다. 약 9만3000명의 北送 교포들이 남기고 간 일본內 재산은 조총련 차지가 되어 있었다. 조총련이 굴린 자금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비자금 담당이었던 金炳植 부의장이 1970년대 초에 평양에 가서 金日成에게 6000만 달러를 바쳤다는 黃長燁씨의 증언이 있다.
월남전쟁 반대 분위기 속에서 일본에서는 左派가 득세하고 있었고, 제1야당인 사회당이 親北정책을 펴고 있었으며 언론도 金大中 납치사건 이후엔 反韓으로 돌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자민당의 親韓派(친한파)가 文世光 배후 수사를 독려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일본 경찰이 그 1년 전의 金大中 납치사건 때 한국 정부가 수사를 방해한 것에 대한 보복을 결심하고 있었으므로 文世光 배후 수사는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총련은 朴정권에 대해 승리한 것인가. 역사는 그런 셈법으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데 묘미가 있다.

1975년 9월16일, 朴대통령은 집무실에서 몇몇 비서관과 이야기하다가 며칠 전에 있었던 조총련계 在日동포의 母國방문에 대해 말했다. 공보비서관 鮮于鍊의 비망록을 인용한다.
『조총련계 在日동포의 모국방문은 성과가 큽니다. 딴 곳에도 이 정책을 넓혀야 되겠어요. 이 사업을 창안하여 추진한 趙一濟 오사카 총영사에게 고생 많았다는 치하의 말을 전해 줘요. 모처럼 고국을 방문해 친척들이 서로 껴안고 울면서 같이 성묘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이렇게 마음씨 좋은 겨레가 왜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헐뜯고 살게 되었는가」 하고 우리 역사를 한탄한 적도 있어요. 우리 국민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도 있는데, 이것을 빨리 고쳐서 동포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될 것입니다』
趙一濟 오사카 총영사는 정보부 국내담당 차장보를 지낸 사람이었다. 申稙秀 정보부장 아래 金永光 판단기획국장도 별도로 대통령에게 조총련 동포들의 모국방문 사업을 건의했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간 조총련 가입자에 대한 선처를 처음에는 꺼렸으나 『이 일은 지아비로선 할 수 없지만 대통령으로서는 해야 한다』면서 추진하라는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1965년 韓日 국교정상화가 이뤄졌을 때 약 60만 在日동포 중 약 70%가 조총련이었다. 조총련을 포함한 在日동포의 약90%는 고향이 남한이었다. 이 점에 착안한 정보부는 동포들의 귀소본능을 자극하여 母國방문단을 모집하고 허용했다. 이들은 한국에 와서 가족들을 만나고 산업시설을 방문했다. 북한의 선전과는 너무 다른 약진하는 조국이 거기에 있었다.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전해 주는 조국 이야기는 조총련 내부를 뒤집었다.
이에 조총련도 北送동포 가족들을 포함한 조총련 가입자들에게 북한방문을 허용하는 방안으로써 대응했다. 이것이 역작용을 낳았다. 북한에 가서 참상을 본 조총련 동포들이 전해 준 이야기가 또다시 조총련을 흔들었다. 이탈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지금 조총련의 회원수는 在日동포 전체의 약 10%라고 한다. 朴대통령의 私感을 버린 결심과 포용책이 아내를 죽인 세력에 대해서 더 큰 복수를 한 셈이다.
金大中 납치와 文世光 사건의 여파로 韓日 간의 정보협력이 그 뒤 서울올림픽 때까지 어렵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한국의 정보부나 안기부 직원들이 對北정보를 전해 주려고 해도 청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다방에서 만났다고 한다. 한국 측이 제공하는 정보를 소홀히 한 일본 경찰이 북한 정권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에 대해서 늑장 대응한 측면도 있다.

朴正熙 대통령은 밑에서 써 올리는 연설문을 수정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한 뒤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직접 한 연설문 초안 교정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은데 1960년대 중반의 「국방대학원 졸업식 諭示」 원고가 남아 있다. 연설문 작성 비서관이 써 올린 것을 朴대통령이 수정, 加筆한 부분을 들여다보면 그의 언어감각이 매우 적확함을 알 수 있다.
朴대통령은 우선 표현을 최대한 구체화하려고 한다. 연설문 초안에 있는 「軍과 정부의 重鎭要員으로 있는 여러분들은」이란 대목에서 그는 重鎭要員을 「中堅幹部」로 바꾼다. 훨씬 그 의미가 구체화된 것이다.
<초안: 『여러분들이 (중략) 진지한 연구를 하게 된 것은, 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朴대통령은 「뜻깊은」이란 애매한 표현을 「유익한」으로 바꾼다. 이 역시 의미가 확실해지면서 구체화된 것이다.
연설문 초안에서 『무엇보다도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國內的 안전」이 선행되어야 하겠다』고 한 것을 朴대통령은 「國內的」을 「사회적」으로 바꾼다. 국내적 안전은 국가의 안전과 같은 맥락의 뜻이므로 중복이 되는데, 「사회적 안전」으로 바꿔 놓으니 국가의 내면과 질서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그는 또 초안의 「모든 국민이 뚜렷한 목표와 보람 속에」를 「모든 국민이 뚜렷한 목표와 희망 속에」로 교정한다. 「보람」은 문맥상 어색하지만 「희망」은 「목표」를 보강하는 適所의 낱말이다. 나 같은 전문 편집자도 감탄할 만한 언어감각이다.
朴대통령은 연설문 초안을 다 읽고는 석 장을 추가했다. 그가 직접 쓴 추가분은 이러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둡고 절망적인 면이 많이 있는 반면에는, 밝고 희망적이고도 고무적인 면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용기와 의욕을 가지고 분투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졸업생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세대에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서 우리 다 같이 평생에 소원이 있다면, 우리들 세대에 우리의 조국을 근대화해서 先進열강과 같이 잘 사는 나라를 한 번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서구라파인들이 그들의 조국을 근대화하기 위해서(문예부흥이고 산업혁명이요 하고: 산업혁명으로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동안) 피 땀 흘려 노력할 때에 우리 조상들은 케케묵은 당파싸움이나 하고 兩班 자랑하느라고 세월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후 20년 동안 패전의 苦盃를 마신 패전국가들이 잿더미속에서 피눈물을 흘려 가며 그들의 조국을 재건해서 오늘날 그들은 전쟁 전보다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후 20년 동안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與野 정치싸움만 하다가 또 다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앞으로 5년 내지 10년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또 다시 놓친다면 우리에게는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또 다시 놓친다면 우리는 영원히 후진국가란 낙인을 벗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생산과 건설에 집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기간 동안은 우리는 모든 것을 참고 이겨 나갈 수 있는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맡은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용기와 결심을 가지고 분투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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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유시에서 朴대통령은「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를 양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朴대통령은 여기에서 국가의 목표를 「근대화」라고 규정한 다음 5~10년의 기한內에 생산과 건설에 모든 자원과 인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영원히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朴대통령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역사의 기회는 그 시간대가 무한하지 않고 제한적이므로 국력을 집중하여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朴대통령이 혼신의 기력을 쏟아 한 연설이 19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유시이다. 북한 정권이 보낸 암살자에게 아내를 잃은 그로서는 정예국군의 대오를 앞에 둔 이 자리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 처한 상황을 생존투쟁으로 규정했다.
<우리 국군의 역사는 건군 초창기부터 공산침략자들과의 투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도 그들과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또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생존투쟁입니다>
그는 「유신체제는 공산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라고 단정했다. 그는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우리는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우리도 남과 같이 주어진 자유라고 해서 이를 다 누리고 싶고, 또 남이 하는 것은 다 하고 싶고, 그러고도 자유는 자유대로 지키겠다고 한다면, 또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환상적인 낭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다른 자리에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지만 북괴가 노리는 국론분열을 막아 더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실정에 맞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朴대통령은 또 『민주주의는 어떻게 보면 공자가 말씀하신 中庸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며 전제군주식 억압정치도 나쁘지만 무절제한 자유방임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中庸의 핵심은 온건한 균형감각일 것이다. 朴대통령은 유교적 교양위에서 균형감각이 있는 인격을 쌓아 올린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文武를 통합한 균형미를 바탕으로 하여 엄격하면서도 多感하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여 사물을 항상 주체적으로, 균형적으로 보려고 한 그는 중간선을 택하는 기회주의자의 균형이 아니라 심사숙고 끝에 대담한 결단을 내린 뒤 우직하게 밀고 가는 隱忍自重型(은인자중형)의 균형감각 소유자였다.
朴대통령은 한산도의 戍樓(수루)를 둘러보다가 「금연」이라고 쓴 팻말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루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고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회상하며 담배 한 대쯤 피우고 싶지 않겠소? 금연보다 오히려 재떨이를 비치해 두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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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은 제2땅굴이 발견되자「오, 神이여!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소서」라고 썼다. |
1974년 9월30일은 추석이자 朴대통령의 57세 생일로 알려진 날이었다. 朴대통령은 1917년 음력 9월30일에 태어났는데 양력 9월30일로 잘못 알려져 이 날이 생일로 치러져 왔었다. 자신과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결벽증을 보일 정도로 무심했던 朴대통령은 1976년에 들어와서 생일을 11월14일로 고쳐 지냈다. 朴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골프를 즐기는 것만 빼고는 거의 서민생활 수준이었다.
그는 유행에 둔감했다기보다는 아예 무시했다. 양복을 새로 지어 입기를 싫어해 바지의 허리를 늘리는 수선을 자주 했다. 넥타이도 헌 것을 좋아했다. 20여 년 전 결혼 선물로 받았던 시계를 그냥 차고 다니는가 하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성냥갑은 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성냥알이 없어지면 큰 통에서 새로 담아 계속 쓴 결과였다. 수영복도 몇 년째 바꾸지 않았다. 복장과 예의범절에 있어서의 보수성은 서민성의 한 표현이었다. 민족사상 가장 큰 근대화 개혁을 한 사람이 복장과 예절에선 보수적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朴대통령이 어린 시절 존경했던 나폴레옹도 그랬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담백한 한식을 좋아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칼국수나 물김치냉면, 갈비탕, 곰탕을 즐겼다. 갈비탕이 나오면 고기는 물론이고 갈비뼈까지 손으로 쥐고 뼛속 진액까지 빨아먹었다.
陸여사가 곁에서 사라진 뒤 朴대통령은 피아노 대신 단소를 자주 불었다. 1층 집무실에서 2층 내실로 퇴근한 朴대통령은 일부러 전등을 끈 뒤에 哀調(애조) 띤 가락을 단소로 뱉어 내었다. 당직 근무자들이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슬픈 가락이었다고 한다.
1974년 10월1일 朴대통령은 제26회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딸 槿惠씨를 데리고 갔다. 아내가 앉던 자리에 딸이 앉게 되었다. 이는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관계에도 영향을 주는 일이 된다.
다음날은 陸英修 여사 사망 49齊 날이었다. 12시30분부터 1시간8분간 朴대통령은 22명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이 자리에도 槿惠씨가 참석했다. 朴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오는 위로편지의 대부분이 서민층이고 그 가운데 7할이 부녀자들의 편지이다. 편지를 읽노라면 생전에 이 사람이 이런 일도 했나 하고 느낄 때도 있다』고 말했다.
10월9일 朴대통령은 申稙秀 정보부장과 車智澈 경호실장을 데리고 뉴코리아 골프장에 나갔다. 아내를 잃은 뒤 처음 치는 골프였다.

인간이나 조직이 균형감각을 갖출 때 통합성을 유지할 수 있다. 통합성은 상반된 요소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 융합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신라는 文武를 균형적으로 통합한 나라였고, 고구려는 武가 너무 강했고, 조선은 文에 치우쳐 나라가 쇠락한 경우이다. 세계제국이었던 로마·몽골·미국은 전쟁은 단호하게(또는 잔인하게), 통치는 너그럽게 했다. 엄격과 관용의 균형과 통합이었다.
인간 朴正熙의 중요한 특성인 균형감각은 그의 일하는 방식에도 반영되었고, 개성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그는 「소심하되 대담한」 면에서도 균형적 통합을 이룬 경우이다. 총탄이 가슴을 관통하여 선혈이 낭자한 상황에서도 『난 괜찮아』라고 말했던 朴대통령이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부끄럼을 탔고 누가 면전에서 칭찬을 하면 어색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소심하고 대담한 그의 성격은, 큰일을 결정하고 방향을 세우는 데는 대담하지만 그것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는 세심한 확인으로 나타났다(宋孝彬, 「가까이서 본 朴正熙 대통령」).
朴대통령은 가뭄 때 진해 猪島로 휴가를 오면 기자들에게 『비가 안 와 마음이 찝찔하고 편치 않다. 꼭 죄지은 사람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날 밤 비가 내리자 기분이 좋아진 朴대통령은 기자들과 함께 여수종합석유화학단지로 시찰을 떠났다. 대통령은 수행기자들이 탄 버스를 나이가 지긋하고 차분한 운전기사가 운전하도록 하고 『남해고속도로는 2차선이고 비가 온 뒤이니 꼭 서행하라』고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경호과장을 버스에 동승시켜 서행을 감독하도록 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한민족에게 주어진 역사의 기회는 이번뿐이란 강박감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는 신속한 결단과 工期단축-納期단축의 개발연대 행동철학으로 확산되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복장과 예절엔 보수적인 사람이 나라를 진보시키고, 한민족 사상 가장 과감한 개방전략을 쓴 사람이 자주국방을 추진한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상일 것이다. 진정한 보수가 진정한 진보를 가져오며, 진실로 개방적인 사람이라야 진정 自主的일 수 있다.

1974년 11월15일 朴正熙 대통령은 오후에 헬리콥터 편으로 포천에 도착하여 3군 산하 5군단의 野外기동훈련을 참관했다. 그는 5군단 사령부 근방의 軍野地砂防 현장을 헬기로 공중시찰했다.
대통령은 참관을 마친 후 헬리콥터로 청와대에 도착하여 비서진들에게 소감을 말했다.
『기동 훈련을 보고 우리한테 공군력만 충분히 있다면 북괴가 어떤 도발을 해도 걱정이 없겠다는 느낌을 가졌어. 휴전선 땅 밑에서 남쪽으로 땅굴을 파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 군사과학이 그것 하나 못 찾을 줄 아는 모양이지. 땅굴을 파는 것은 러일전쟁 때 여순에서나 있었던 일이지. 너무도 現代戰(현대전)을 모르는 것 같아. 러시아와 일본군도 서로 땅굴 작전을 했는데 그때도 별로 성공하질 못했어.
그것을 과학이 발달된 지금 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야. 충분한 힘을 가진 우리 국군에 대해서 그런 옛날에나 있었던 전술을 쓰려고 하는데 통할 턱이 있나. 북괴 하는 짓이 두렵기보다 오히려 가련해 보여.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유비무환, 속전속결의 결의를 늦추어서는 안 되지. 내가 생각하기에 북괴가 중공과 소련의 지원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남침하리라고는 생각 안 해. 그 자들의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단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결코 6·25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휴전 중이라는 것을 국민 모두가 명심해야 될 거야』
朴대통령은 밤에 이런 일기를 남겼다.
<오늘 아침 7시경 전방 고랑포 부근 DMZ 안에서 북괴가 北으로부터 南으로 지하터널을 뚫어서 중앙분계선 남쪽으로 ○○지점까지 나오다가 우리 순찰대에 발각. 현장을 파헤쳐 본 즉 폭 90cm, 높이 120cm의 땅굴을 뚫어서 철근 콘크리트로 벽과 천장을, 틀을 짜서 갱도식으로 조립하면서 굴착해 나오던 것을 발견, 그들이 갱도 굴착을 위해 사용하던 각종 도구를 습득하다. 북괴가 입으로는 평화 운운하면서 기실은 무력남침을 위하여 이처럼 집요하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狂的으로 날뛰는데, 아직도 태평성세에 사는 것처럼 착각하여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일부 인사들의 철없는 행위는 可嘆 可嘆>
1975년 3월9일 우리 軍은 철원 북방 휴전선 안에서 또 다시 북한 땅굴을 발견했다. 다음날 일기에서도 朴대통령은 이런 한탄을 남겼다.
<이런 판인데도 北의 남침야욕이 없다고 운운하는 이 나라의 일부 정치인들의 그 무책임한 소리가 이러고도 또 있을 것인가. 북한 공산당들은 언제나 민족적인 양심에 되돌아가서 동족끼리 단합해 통일된 조국을 재건하여 만방에 떳떳하게 살아볼 날이 올 것인가.
오, 神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