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화폐개혁 지시한 건 김정일이 아닌 김정은
⊙ 어머니(고용희) 측근 리제강에게 박남기 처형 명분 만들라 지시
⊙ “김정은 저놈은 안 된다”(총살 직전 박남기의 마지막 외침)
⊙ “화폐(돈)개혁에 실패했으니 저놈 시체를 돈(동전)을 만드는 용광로에 넣어라”
⊙ 보산제철소보다는 천리마제강 용광로일 가능성 커
⊙ 용광로 사건 비밀에 부친 이유 “주민 걱정에 눈물 흘리는 김정은에 대한 환상 깨질까 봐”
[편집자 주]
《월간조선》은 한 고위 탈북자에게서 “화폐개혁의 책임을 지고 총살당한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경제부장의 시체는 김정은의 지시로 용광로에 던졌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북한 정보는 ‘가짜 뉴스’인 경우가 많다. 북한 문제는 당사자의 반론이나 반발이 즉각 전해지지 않는 특수성을 노린 익명의 취재원들이 ‘~카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다. 그럼에도 이 탈북자의 주장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를 오랜 시간 취재해오면서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 북한을 떠난 이 탈북자는 이른바 ‘미공개 고위 탈북자’다.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지난 정부 국정원 슈퍼컴퓨터에 저장됐던 그의 이력을 보면 그가 왜 ‘유령’의 삶을 택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탈북자는 박근혜 정부의 요청으로 100페이지가 넘는 김정은과 관련한 문서를 작성할 정도로 북한 고급 정보가 많았다. 여기에 김정은이 보인 엽기적 만행(장성택 머리 전시 등)을 보면, 실제 박남기를 용광로에 던져 “뼈 한 조각, 살 한 점 남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주장이 허위가 아닐 수 있다. 실제 많은 대북(對北) 전문가도 김정은 시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 어머니(고용희) 측근 리제강에게 박남기 처형 명분 만들라 지시
⊙ “김정은 저놈은 안 된다”(총살 직전 박남기의 마지막 외침)
⊙ “화폐(돈)개혁에 실패했으니 저놈 시체를 돈(동전)을 만드는 용광로에 넣어라”
⊙ 보산제철소보다는 천리마제강 용광로일 가능성 커
⊙ 용광로 사건 비밀에 부친 이유 “주민 걱정에 눈물 흘리는 김정은에 대한 환상 깨질까 봐”
[편집자 주]
《월간조선》은 한 고위 탈북자에게서 “화폐개혁의 책임을 지고 총살당한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경제부장의 시체는 김정은의 지시로 용광로에 던졌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북한 정보는 ‘가짜 뉴스’인 경우가 많다. 북한 문제는 당사자의 반론이나 반발이 즉각 전해지지 않는 특수성을 노린 익명의 취재원들이 ‘~카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다. 그럼에도 이 탈북자의 주장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를 오랜 시간 취재해오면서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 북한을 떠난 이 탈북자는 이른바 ‘미공개 고위 탈북자’다.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지난 정부 국정원 슈퍼컴퓨터에 저장됐던 그의 이력을 보면 그가 왜 ‘유령’의 삶을 택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탈북자는 박근혜 정부의 요청으로 100페이지가 넘는 김정은과 관련한 문서를 작성할 정도로 북한 고급 정보가 많았다. 여기에 김정은이 보인 엽기적 만행(장성택 머리 전시 등)을 보면, 실제 박남기를 용광로에 던져 “뼈 한 조각, 살 한 점 남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주장이 허위가 아닐 수 있다. 실제 많은 대북(對北) 전문가도 김정은 시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김정일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주 후 의식을 회복했다. 11월 뇌졸중 후유증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김정일은 다시 술과 담배를 찾았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지만, 이후에도 김정일은 쓰러졌다 일어나길 반복했다고 한다. 죽음의 불안을 느낀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신속히 권력을 이양키로 했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죽기(2011년 12월) 1년 전쯤인 2010년 9월 28일 당 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자로 ‘책봉’됐다. ‘공식’이 2010년이지, 비공식적으로는 2009년 초부터 후계자 역할을 했다. 당시 김정일 최측근들의 집에는 ‘샛별 왕자님’이라 불리던 김정은의 초상화가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옆에 걸려 있었다. 김정은은 2009년을 ‘2012년 강성대국’을 달성하는 결정적인 해로 규정, 사실상 북한을 통치했다.
김정은은 과거 1970~80년대 계획경제 수준의 경제력을 회복하자는 명분 아래 ‘150일 전투’를 지시했다. 목표 달성에 실패하자 또다시 100일 전투에 돌입했다. 김정은이 150일, 100일 전투에 목을 맨 건 시장경제가 북한 체제를 잠식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150일, 100일 전투의 표면적 목표는 경제 회복이지만 실제는 시장경제 해체였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민란 걱정
김정은은 돈을 번 사람들이 현금을 ‘장롱 속’에 쌓아둔 것이 북한 경제에 타격을 준다고 생각했다. 북한에서는 재산의 사적 소유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돈을 번 사람들은 현금을 ‘장롱 속’에 쌓아두기 시작했다. 북한에도 우리나라의 은행과 같은 ‘저축소’가 있지만, 연 금리가 3% 수준에 불과하고, 정부가 저축한 재산을 몰수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로 집에 현금을 보관한다.
경제학적으로 ‘화폐퇴장’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 때문에 북한 중앙은행은 돈을 더 찍어내야 했고, 시중에 통화량이 늘면서 물가 상승을 부추겨 북한에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판단이었다.
실제 북한 경제에 정통한 전직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지난 10년 새 북한 정부가 지급하는 근로자 임금은 30배가량 인상됐다. 하지만 정부가 그렇게 많은 돈을 풀었지만 실제로 유통되는 통화는 전체의 10% 수준으로 짐작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업들마저 돈을 쓰지 않고 쌓아두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구조”라고 했다.
김정은은 이런 상황이 지속할 경우, 민란(民亂)이 일어날까 걱정했다. 150일, 100일 전투를 통해 장마당을 해체하고, 장롱 속 현금을 일거에 강탈하면 해결될 것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했다.
화폐개혁이란 리셋 버튼
150일, 100일 전투에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계획경제는 더욱 망가졌고, 시장경제는 커졌다. 김정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제의 악순환에 화폐개혁이란 ‘리셋(reset·처음으로 되돌림)’ 버튼을 누른 것이다. 2009년 11월 말이었다.
김정은의 지시로 북한 당국은 2009년 11월 30일 오전 10시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과 내각 결정 423호 “새 돈을 발행함에 대하여”를 공포, 화폐 교환 사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렸다.
김정은은 100원을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통해 ‘돈주’들의 시중 자금을 강탈했다. 당시 화폐개혁은 이전의 다른 화폐개혁과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현금과 예금의 교환 비율이 현금은 100대 1로 100원이 1원으로 바뀌지만, 예금은 10대 1로 10원이 1원으로 대체됐다. 예금자보다 현금을 대량으로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구조다. 또 1가구당 15만원(새 돈 1500원)으로 교환 한도를 두어, 15만원을 넘어가는 돈은 1000대 1로 바꿔주고, 모두 은행에 예치하도록 했다. 부(富)의 재분배와 은닉자금의 노출을 동시에 노린 조치였다. 김정은이 사실상 시장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자산을 축적해온 주민들의 재산을 몰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본인의 공식 책봉을 앞두고 장마당을 장악한 ‘시장 세력’의 확대를 막을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섣부른 ‘개혁’은 물가 폭등과 장마당 마비를 불러왔다. 화폐개혁 후속 조치로 시장을 폐쇄하고 달러 사용을 금지하자 국가기관·기업소 등의 운영이 줄줄이 중지돼 경제 사정이 더욱 악화했다.
당시 한 중국인 사업가는 《조선일보》에 “노동당 산하 기업들도 배급이 안 돼 대부분 가동이 중단되고 길거리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며 “군량미를 풀어 극단적인 아사(餓死) 상황은 막았다”고 증언했다.
탈북자들의 증언으로는 당시 민란이라도 날 듯 분노가 들끓었다고 한다. 화폐개혁과 함께 가구당 10만~15만원 이상의 현금 재산이 증발하자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것이다. 악화한 민심이 나아지지 않는데다 실패를 수습할 수단도 없었던 김정은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양이었다.
희생양 박남기
당시 김정각(2018년 4월 22일 황해북도에서 중국인 관광객 32명이 숨진 버스 추락 사고로 북한 인민군 서열 1위 총정치국장에서 해임)은 김정은의 최측근이었다. 김정은을 가까이서 보좌했다. 김정은이 북한 통치를 시작한 직후인 2009년 4월 국방위원으로 임명됐다. 김정각의 ‘눈엣가시’가 있었으니, 박남기였다.
노동당 재정계획부장이었던 박남기는 군부가 운영하는 외화벌이 회사들을 노동당으로 통폐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총정치국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박남기 세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 이권에 큰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다. 김정은 최측근인 김정각은 화폐개혁의 실패 원인을 박남기에게 뒤집어씌워 그를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와중에 박남기는 김정일의 면전에서 화폐개혁 이후 상황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김정일은 대로했다. 희생양이 박남기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박남기에게 화폐개혁 책임을 묻더라도, 죽이기 위한 더욱 분명한 명분이 필요했다.
화폐개혁과 같은 엄청난 일을 박남기가 주도적으로 벌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임이 분명한데다, 그가 1986년 12월 인민 경제를 총괄하는 국가계획위원장에 발탁된 이후 24년간 북한 계획경제를 최일선에서 지휘한 거물이었던 탓이다. 박남기는 2002년 10월 북한 경제시찰단(18명) 단장 자격으로 한국을 8박 9일간 둘러봤고, 김정일은 경제 현장 시찰 때마다 그를 대동했다.
박남기를 간첩으로 만들라는 김정은 지시
김정은은 리제강에게 북한 사람들이 박남기가 화폐개혁을 주도한 것으로 믿을 수 있는 명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었던 리제강은 김정은의 친모 고용희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직 미(美)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인 마이클 리는 2017년 《월간조선》과의 단독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정남이냐, 김정은이냐를 놓고 벌어진 암투는 주로 당시 노동당 행정부장이며 국방위원회 위원인 장성택과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인 리제강과의 기 싸움으로 집약됩니다. 개혁파인 장성택은 김일성의 사위일 뿐만 아니라 모든 보안기구,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를 휘두르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김정남의 고모부라는 확실한 카드를 쥐고 있었고, 경제 개혁개방을 꿈꾸는 모사였습니다. 반면에 수구파 리제강은 당 조직과 간부들을 좌지우지하는 김정일 다음의 최고 권력 실세였습니다. 장성택은 개혁 성향이 있는 김정남 편이고 리제강은 수구 성향이 있는 김정은 편이었습니다.”
리제강은 2010년 6월 평양~원산 고속도로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김정은의 지시에 리제강은 《혁명대오의 순결성을 강화해나가시는 나날에》(이하 《혁명대오》)란 책을 썼다. 이 책에는 박남기의 실각 과정이 소상히 소개됐다.
저자 리제강은 박남기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태생부터 문제 삼았다. ‘친일 분자 첩×의 아들’이자 ‘지주의 외손자’로, 토지개혁 실시로 외조부가 토지를 몰수당하자 이에 대한 앙심과 옛 지위를 되찾으려는 야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6·25전쟁 때는 ‘한청 자위대’와 ‘금강 청년단’이라는 우익단체 활동에도 가담했지만, 전후 신분을 세탁해 애국자로 행세했다고 리제강은 썼다.
또 박남기가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시기 복잡한 틈을 타 우리 대오 안에 기어든 적(敵) 간첩으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저지하고 자본주의 경제 방식을 끌어들이려다 덜미를 잡혔다’고 했다.
책에 따르면 박남기는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이 평양시의 난방과 식수 문제 해결을 지시했는데도 게으름을 피웠고,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 때는 외화를 확보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를 묵살했다. 2009년 11월 화폐개혁 역시 김정일이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제시했는데도 박남기가 이를 무시해 혼란이 빚어졌다고 주장했다. 또 책은 박남기의 ‘정체’는 2010년 1월 본부당(중앙당) 대논쟁(인민재판)을 통해 드러났다고 했다. 김정일이 직접 마련한 이 재판에서 박남기는 “남조선식 경제 수용이 자본주의 제도로 복귀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 여겨 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김정은 저놈은 안 된다”
1997년 김정일은 노동당 농업 비서 서관희를 공개 처형했는데, 당시 수십만명이 굶어 죽은 건 ‘미제(美帝) 간첩’으로 포섭된 서관희의 농단 때문이라고 몰고 갔다. 북한 경제 운용 실패의 책임을 전부 서관희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가 간첩이란 증거는 ‘6·25 때 행적을 재조사해보니 이상하더라’는 수준이었다. 박남기도 서관희와 똑같은 방식으로 간첩으로 몬 것이다.
2010년 2월 4일 김정일은 당 간부들 앞에서 “박남기는 혁명대오 안에 기어든 간첩으로 앞으로 총리가 돼 자본주의 경제로 끌고 갈 흉심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는 2010년 3월 “만고역적 박남기를 처형한다”고 선고했다.
3월 10일 북한 국방위원회는 예고 없이 노동당 부부장급, 각 성 부상급 이상 고위층들을 집결시켜 버스에 태우고서 평양 순안구역에 있는 강건군관학교(우리의 육사에 해당)로 데리고 갔다. 강건군관학교는 일반인에게 공개할 수 없는 공개처형이 이뤄지는 곳이다.
군관학교 사격장에는 박남기가 묶여 있었다. 당시 목격자는 “박남기 부장은 보위부에 얻어맞아 얼굴이 부은 상태에서 앞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재판부는 “박남기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리한 화폐개혁을 단행해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이는 ‘민족반역죄’에 해당된다”고 발표하고 9발의 총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첫 총알이 머리 부분에 박히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아! 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이어 가슴, 다리에 총알이 들어가자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공개처형을 목격한 고위직 간부 중에는 “우리도 필요 없으면 저렇게 죽을 수 있다”며 흥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 박남기는 “나는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아 당에 감사하는데 김정은 저놈은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유성옥 진단과 대안 연구원장은 2014년 3월 11일 새누리당 의원이던 김무성 전 대표가 주최한 통일경제교실에 강연자로 나서 김정은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남포 용광로에 던져라”
박남기의 유언에 격분해서였을까. 김정은은 “박남기를 남포 용광로에 던져라” 했다고 한다.
화폐(돈)개혁에 실패했으니 돈(동전)을 만드는 용광로에 넣어 뼈 한 조각, 살 한 점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부관참시였다. 이 장면은 북한 최고위급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남기의 시체를 어느 제철소 용광로에 던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증언을 한 고위 탈북자는 “최고위층으로부터 남포 용광로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다만 남포에는 2개의 제철소가 있다. 하나는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이고, 다른 하나는 보산제철소다.
두 곳 중 한 곳의 용광로에 박남기의 시체를 던졌다는 것인데,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산제철소보다는 천리마제강 용광로일 가능성이 크다고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등 북한 전문가들은 추측했다.
천리마제강은 1956년 시작된 김일성의 천리마운동 발원지이다. 천리마운동은 1956년 12월 김일성이 평안남도 강선제강소(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의 옛 이름)를 방문하고 같은 달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이 제기된 다음 해인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공업총생산량이 매년 평균 36%씩 성장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은은 세습 직후부터 천리마제강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2013년 4월 19일 《로동신문》 1면 ‘강선이 지펴올린 증산투쟁의 불길이 온 나라에 타 번지게 하자’는 제목의 사설이 대표적이다.
사설은 “강선에서 타오른 불길은 새로운 주체 100년대 진군의 힘 있는 박차”라고 규정하고 “이것은 또한 우리의 핵무장 해제와 제도 전복을 꾀하는 미제와 그 추종 세력들의 침략전쟁 책동과 ‘제재’ 소동을 자립의 무쇠망치로 짓뭉개버린 역사적 장거”라고 주장했다.
1990년대 공개 화형 시작한 北
박남기의 시체를 용광로에 던졌다는 증언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1993년 탈북자들을 공개 화형에 처한 적이 있다. 또 결과론이지만 김정은은 집권 후 일반인이 상상치 못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등을 소총이 아니라 대공(對空) 무기인 14.5mm 고사총으로 박살 냈다. 우리 국민을 6시간 넘게 바다에 놔두고 조사하다 결국 사살, 소각하기도 했다. 미국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의 책에서 트럼프가 “김정은이 내게 말하길 장성택을 죽이고 머리를 다른 사람이 보도록 전시했다”고 말한 게 과장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박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북한 김씨 일가의 비자금과 외화 조달을 관리하던 노동당 39호실 출신 고위 간부로 미국에 거주하는 리정호씨는 2020년 9월 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10년 북한은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을 총살했다. 당시 김정은과 아버지 김정일의 허가를 모두 거친 것이었지만, 민심이 악화하자 박남기가 주도한 것처럼 꾸며 총살한 것이다.”
리씨는 노동당 39호실 대흥총국의 선박무역회사 사장과 무역관리국 국장, 금강경제개발총회사 이사장 등 북한에서 차관급 지위까지 올랐던 인물로, 현재까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탈북자 중에선 최고위급이다.
김정일은 박남기가 죽은 즉시 “박남기의 죄행을 일꾼들이 똑바로 알아야 한다”며 고위급만 봤던 리제강이 쓴 책 《혁명대오》를 “하부 단위에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앞서 언급한 《혁명대오》에는 김정은이 박남기의 시체를 남포 용광로에 버렸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고위급 탈북자는 “당시만 해도 북한 주민들은 젊은 유학파인 김정은이 북한을 확 바꿔줄 것이란 기대감이 컸다”며 “용광로 이야기를 어떻게 공개하겠나. 그 장면을 목격한 소수 고위층도 김정은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고 했다.
김정은의 두 얼굴
박남기는 2010년 공개 처형됐다. 그러나 죽은 이유와 방식이 어처구니없어서인지 뒷말이 무성했다. 특히 대북 정보서비스 회사가 그가 건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히면서 더욱 그랬다. 2011년 2월 1일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는 북한 고위급 소식통을 인용해 “박남기는 여전히 건재하며 김정일의 개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박남기는 현재 가짜 여권을 이용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오가며 김정일의 재산을 관리하는 기업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또 “북한은 일부 인사들의 좌천을 이용한 기만전술을 펴는 경우가 많다”면서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죽었다고 공표한 인사 가운데 장례식이 진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좌천된 일부 핵심 인사들은 비공식적으로 북한의 외자 유치 전담 기구인 ‘대풍국제투자그룹’이나 김정은의 치적을 포장하려고 기획한 ‘10만세대살림집건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처형됐다는 사람이 버젓이 공개된 장소에 살아서 나타나는 곳이 북한이긴 하다. 다만 박남기는 총살당한 것이 사실로 보인다. ‘박남기 생존설’은 2014년 1월 북한을 다녀온 전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장성택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진 ‘장성택 생존설’과 비슷한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북한은 그간 주요 간부 처형 뒤에는 주요 매체에서 이들의 흔적을 지우는 행태를 보여왔다. 2010년 화폐개혁 실패 책임을 물어 박남기를 처형하고서는 모든 기록영화에서 그의 생전 모습을 없앴다. 2012년 7월 군부 제1인자였던 리영호 총참모장을 해임한 이후에도 각종 기록영화에서 그의 모습을 삭제했다. 장성택도 마찬가지다.
10년이 넘은 일을,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김정은이 어떻게 처리하라 했는지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눈치를 보는 듯한 대북정책을 밀어붙이는 데에는 김정은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는 지적이다.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는 미소 지었지만 정작 뒤에서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문 대통령을 존중한 적 없다”고 했다.
북한 주민 앞에서는 “감사의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다”고 눈물을 흘리는 김정은의 본모습은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씌워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 시체를 용광로에 던져버린 자이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죽기(2011년 12월) 1년 전쯤인 2010년 9월 28일 당 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자로 ‘책봉’됐다. ‘공식’이 2010년이지, 비공식적으로는 2009년 초부터 후계자 역할을 했다. 당시 김정일 최측근들의 집에는 ‘샛별 왕자님’이라 불리던 김정은의 초상화가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옆에 걸려 있었다. 김정은은 2009년을 ‘2012년 강성대국’을 달성하는 결정적인 해로 규정, 사실상 북한을 통치했다.
김정은은 과거 1970~80년대 계획경제 수준의 경제력을 회복하자는 명분 아래 ‘150일 전투’를 지시했다. 목표 달성에 실패하자 또다시 100일 전투에 돌입했다. 김정은이 150일, 100일 전투에 목을 맨 건 시장경제가 북한 체제를 잠식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150일, 100일 전투의 표면적 목표는 경제 회복이지만 실제는 시장경제 해체였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민란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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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김정일이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 새로 만들어진 수영장을 방문했을 때 그 자리에 참석한 박남기(오른쪽 점선 안). 사진=조선DB |
경제학적으로 ‘화폐퇴장’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 때문에 북한 중앙은행은 돈을 더 찍어내야 했고, 시중에 통화량이 늘면서 물가 상승을 부추겨 북한에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판단이었다.
실제 북한 경제에 정통한 전직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지난 10년 새 북한 정부가 지급하는 근로자 임금은 30배가량 인상됐다. 하지만 정부가 그렇게 많은 돈을 풀었지만 실제로 유통되는 통화는 전체의 10% 수준으로 짐작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업들마저 돈을 쓰지 않고 쌓아두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구조”라고 했다.
김정은은 이런 상황이 지속할 경우, 민란(民亂)이 일어날까 걱정했다. 150일, 100일 전투를 통해 장마당을 해체하고, 장롱 속 현금을 일거에 강탈하면 해결될 것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했다.
화폐개혁이란 리셋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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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새로 발행한 화폐들. 사진=논문 〈북한의 화폐에 관한 연구〉, 이진욱, 동국대 북한학 박사 |
김정은의 지시로 북한 당국은 2009년 11월 30일 오전 10시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과 내각 결정 423호 “새 돈을 발행함에 대하여”를 공포, 화폐 교환 사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렸다.
김정은은 100원을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통해 ‘돈주’들의 시중 자금을 강탈했다. 당시 화폐개혁은 이전의 다른 화폐개혁과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현금과 예금의 교환 비율이 현금은 100대 1로 100원이 1원으로 바뀌지만, 예금은 10대 1로 10원이 1원으로 대체됐다. 예금자보다 현금을 대량으로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구조다. 또 1가구당 15만원(새 돈 1500원)으로 교환 한도를 두어, 15만원을 넘어가는 돈은 1000대 1로 바꿔주고, 모두 은행에 예치하도록 했다. 부(富)의 재분배와 은닉자금의 노출을 동시에 노린 조치였다. 김정은이 사실상 시장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자산을 축적해온 주민들의 재산을 몰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본인의 공식 책봉을 앞두고 장마당을 장악한 ‘시장 세력’의 확대를 막을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섣부른 ‘개혁’은 물가 폭등과 장마당 마비를 불러왔다. 화폐개혁 후속 조치로 시장을 폐쇄하고 달러 사용을 금지하자 국가기관·기업소 등의 운영이 줄줄이 중지돼 경제 사정이 더욱 악화했다.
당시 한 중국인 사업가는 《조선일보》에 “노동당 산하 기업들도 배급이 안 돼 대부분 가동이 중단되고 길거리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며 “군량미를 풀어 극단적인 아사(餓死) 상황은 막았다”고 증언했다.
탈북자들의 증언으로는 당시 민란이라도 날 듯 분노가 들끓었다고 한다. 화폐개혁과 함께 가구당 10만~15만원 이상의 현금 재산이 증발하자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것이다. 악화한 민심이 나아지지 않는데다 실패를 수습할 수단도 없었던 김정은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양이었다.
희생양 박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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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화폐개혁을 추진한 것은 김정일이 아닌 김정은이었다. 사진=조선DB |
노동당 재정계획부장이었던 박남기는 군부가 운영하는 외화벌이 회사들을 노동당으로 통폐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총정치국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박남기 세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 이권에 큰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다. 김정은 최측근인 김정각은 화폐개혁의 실패 원인을 박남기에게 뒤집어씌워 그를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와중에 박남기는 김정일의 면전에서 화폐개혁 이후 상황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김정일은 대로했다. 희생양이 박남기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박남기에게 화폐개혁 책임을 묻더라도, 죽이기 위한 더욱 분명한 명분이 필요했다.
화폐개혁과 같은 엄청난 일을 박남기가 주도적으로 벌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임이 분명한데다, 그가 1986년 12월 인민 경제를 총괄하는 국가계획위원장에 발탁된 이후 24년간 북한 계획경제를 최일선에서 지휘한 거물이었던 탓이다. 박남기는 2002년 10월 북한 경제시찰단(18명) 단장 자격으로 한국을 8박 9일간 둘러봤고, 김정일은 경제 현장 시찰 때마다 그를 대동했다.
박남기를 간첩으로 만들라는 김정은 지시
김정은은 리제강에게 북한 사람들이 박남기가 화폐개혁을 주도한 것으로 믿을 수 있는 명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었던 리제강은 김정은의 친모 고용희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직 미(美)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인 마이클 리는 2017년 《월간조선》과의 단독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정남이냐, 김정은이냐를 놓고 벌어진 암투는 주로 당시 노동당 행정부장이며 국방위원회 위원인 장성택과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인 리제강과의 기 싸움으로 집약됩니다. 개혁파인 장성택은 김일성의 사위일 뿐만 아니라 모든 보안기구,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를 휘두르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김정남의 고모부라는 확실한 카드를 쥐고 있었고, 경제 개혁개방을 꿈꾸는 모사였습니다. 반면에 수구파 리제강은 당 조직과 간부들을 좌지우지하는 김정일 다음의 최고 권력 실세였습니다. 장성택은 개혁 성향이 있는 김정남 편이고 리제강은 수구 성향이 있는 김정은 편이었습니다.”
리제강은 2010년 6월 평양~원산 고속도로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김정은의 지시에 리제강은 《혁명대오의 순결성을 강화해나가시는 나날에》(이하 《혁명대오》)란 책을 썼다. 이 책에는 박남기의 실각 과정이 소상히 소개됐다.
저자 리제강은 박남기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태생부터 문제 삼았다. ‘친일 분자 첩×의 아들’이자 ‘지주의 외손자’로, 토지개혁 실시로 외조부가 토지를 몰수당하자 이에 대한 앙심과 옛 지위를 되찾으려는 야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6·25전쟁 때는 ‘한청 자위대’와 ‘금강 청년단’이라는 우익단체 활동에도 가담했지만, 전후 신분을 세탁해 애국자로 행세했다고 리제강은 썼다.
또 박남기가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시기 복잡한 틈을 타 우리 대오 안에 기어든 적(敵) 간첩으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저지하고 자본주의 경제 방식을 끌어들이려다 덜미를 잡혔다’고 했다.
책에 따르면 박남기는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이 평양시의 난방과 식수 문제 해결을 지시했는데도 게으름을 피웠고,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 때는 외화를 확보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를 묵살했다. 2009년 11월 화폐개혁 역시 김정일이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제시했는데도 박남기가 이를 무시해 혼란이 빚어졌다고 주장했다. 또 책은 박남기의 ‘정체’는 2010년 1월 본부당(중앙당) 대논쟁(인민재판)을 통해 드러났다고 했다. 김정일이 직접 마련한 이 재판에서 박남기는 “남조선식 경제 수용이 자본주의 제도로 복귀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 여겨 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김정은 저놈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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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기는 총살 직전 “김정은 저놈은 안 된다”고 소리쳤다. 사진=조선DB |
2010년 2월 4일 김정일은 당 간부들 앞에서 “박남기는 혁명대오 안에 기어든 간첩으로 앞으로 총리가 돼 자본주의 경제로 끌고 갈 흉심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는 2010년 3월 “만고역적 박남기를 처형한다”고 선고했다.
3월 10일 북한 국방위원회는 예고 없이 노동당 부부장급, 각 성 부상급 이상 고위층들을 집결시켜 버스에 태우고서 평양 순안구역에 있는 강건군관학교(우리의 육사에 해당)로 데리고 갔다. 강건군관학교는 일반인에게 공개할 수 없는 공개처형이 이뤄지는 곳이다.
군관학교 사격장에는 박남기가 묶여 있었다. 당시 목격자는 “박남기 부장은 보위부에 얻어맞아 얼굴이 부은 상태에서 앞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재판부는 “박남기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리한 화폐개혁을 단행해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이는 ‘민족반역죄’에 해당된다”고 발표하고 9발의 총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첫 총알이 머리 부분에 박히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아! 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이어 가슴, 다리에 총알이 들어가자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공개처형을 목격한 고위직 간부 중에는 “우리도 필요 없으면 저렇게 죽을 수 있다”며 흥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 박남기는 “나는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아 당에 감사하는데 김정은 저놈은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유성옥 진단과 대안 연구원장은 2014년 3월 11일 새누리당 의원이던 김무성 전 대표가 주최한 통일경제교실에 강연자로 나서 김정은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박남기의 유언에 격분해서였을까. 김정은은 “박남기를 남포 용광로에 던져라” 했다고 한다.
화폐(돈)개혁에 실패했으니 돈(동전)을 만드는 용광로에 넣어 뼈 한 조각, 살 한 점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부관참시였다. 이 장면은 북한 최고위급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남기의 시체를 어느 제철소 용광로에 던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증언을 한 고위 탈북자는 “최고위층으로부터 남포 용광로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다만 남포에는 2개의 제철소가 있다. 하나는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이고, 다른 하나는 보산제철소다.
두 곳 중 한 곳의 용광로에 박남기의 시체를 던졌다는 것인데,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산제철소보다는 천리마제강 용광로일 가능성이 크다고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등 북한 전문가들은 추측했다.
천리마제강은 1956년 시작된 김일성의 천리마운동 발원지이다. 천리마운동은 1956년 12월 김일성이 평안남도 강선제강소(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의 옛 이름)를 방문하고 같은 달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이 제기된 다음 해인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공업총생산량이 매년 평균 36%씩 성장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은은 세습 직후부터 천리마제강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2013년 4월 19일 《로동신문》 1면 ‘강선이 지펴올린 증산투쟁의 불길이 온 나라에 타 번지게 하자’는 제목의 사설이 대표적이다.
사설은 “강선에서 타오른 불길은 새로운 주체 100년대 진군의 힘 있는 박차”라고 규정하고 “이것은 또한 우리의 핵무장 해제와 제도 전복을 꾀하는 미제와 그 추종 세력들의 침략전쟁 책동과 ‘제재’ 소동을 자립의 무쇠망치로 짓뭉개버린 역사적 장거”라고 주장했다.
1990년대 공개 화형 시작한 北
박남기의 시체를 용광로에 던졌다는 증언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1993년 탈북자들을 공개 화형에 처한 적이 있다. 또 결과론이지만 김정은은 집권 후 일반인이 상상치 못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등을 소총이 아니라 대공(對空) 무기인 14.5mm 고사총으로 박살 냈다. 우리 국민을 6시간 넘게 바다에 놔두고 조사하다 결국 사살, 소각하기도 했다. 미국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의 책에서 트럼프가 “김정은이 내게 말하길 장성택을 죽이고 머리를 다른 사람이 보도록 전시했다”고 말한 게 과장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박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북한 김씨 일가의 비자금과 외화 조달을 관리하던 노동당 39호실 출신 고위 간부로 미국에 거주하는 리정호씨는 2020년 9월 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10년 북한은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을 총살했다. 당시 김정은과 아버지 김정일의 허가를 모두 거친 것이었지만, 민심이 악화하자 박남기가 주도한 것처럼 꾸며 총살한 것이다.”
리씨는 노동당 39호실 대흥총국의 선박무역회사 사장과 무역관리국 국장, 금강경제개발총회사 이사장 등 북한에서 차관급 지위까지 올랐던 인물로, 현재까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탈북자 중에선 최고위급이다.
김정일은 박남기가 죽은 즉시 “박남기의 죄행을 일꾼들이 똑바로 알아야 한다”며 고위급만 봤던 리제강이 쓴 책 《혁명대오》를 “하부 단위에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앞서 언급한 《혁명대오》에는 김정은이 박남기의 시체를 남포 용광로에 버렸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고위급 탈북자는 “당시만 해도 북한 주민들은 젊은 유학파인 김정은이 북한을 확 바꿔줄 것이란 기대감이 컸다”며 “용광로 이야기를 어떻게 공개하겠나. 그 장면을 목격한 소수 고위층도 김정은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고 했다.
박남기는 2010년 공개 처형됐다. 그러나 죽은 이유와 방식이 어처구니없어서인지 뒷말이 무성했다. 특히 대북 정보서비스 회사가 그가 건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히면서 더욱 그랬다. 2011년 2월 1일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는 북한 고위급 소식통을 인용해 “박남기는 여전히 건재하며 김정일의 개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박남기는 현재 가짜 여권을 이용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오가며 김정일의 재산을 관리하는 기업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또 “북한은 일부 인사들의 좌천을 이용한 기만전술을 펴는 경우가 많다”면서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죽었다고 공표한 인사 가운데 장례식이 진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좌천된 일부 핵심 인사들은 비공식적으로 북한의 외자 유치 전담 기구인 ‘대풍국제투자그룹’이나 김정은의 치적을 포장하려고 기획한 ‘10만세대살림집건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처형됐다는 사람이 버젓이 공개된 장소에 살아서 나타나는 곳이 북한이긴 하다. 다만 박남기는 총살당한 것이 사실로 보인다. ‘박남기 생존설’은 2014년 1월 북한을 다녀온 전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장성택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진 ‘장성택 생존설’과 비슷한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북한은 그간 주요 간부 처형 뒤에는 주요 매체에서 이들의 흔적을 지우는 행태를 보여왔다. 2010년 화폐개혁 실패 책임을 물어 박남기를 처형하고서는 모든 기록영화에서 그의 생전 모습을 없앴다. 2012년 7월 군부 제1인자였던 리영호 총참모장을 해임한 이후에도 각종 기록영화에서 그의 모습을 삭제했다. 장성택도 마찬가지다.
10년이 넘은 일을,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김정은이 어떻게 처리하라 했는지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눈치를 보는 듯한 대북정책을 밀어붙이는 데에는 김정은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는 지적이다.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는 미소 지었지만 정작 뒤에서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문 대통령을 존중한 적 없다”고 했다.
북한 주민 앞에서는 “감사의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다”고 눈물을 흘리는 김정은의 본모습은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씌워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 시체를 용광로에 던져버린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