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춘수, 입학서류 미비로 법대 대신 예술대 입학… 릴케의 詩에 빠져들어
⊙ 김상옥, 진정한 시인은 阮堂(김정희)과 靑馬, 未堂
⊙ 박경리, 도스토옙스키와 숄로호프·제임스 조이스·토머스 울프의 소설 탐독
⊙ 김상옥, 진정한 시인은 阮堂(김정희)과 靑馬, 未堂
⊙ 박경리, 도스토옙스키와 숄로호프·제임스 조이스·토머스 울프의 소설 탐독
표현론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작품은 환경의 산물이다. 그 환경은 가족이나 친구, 스승일 수도 있고 그저께 읽은 책일 수도 있다. 의도하지 않고 우연히 다가온 ‘주변’이 작가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시인 김춘수(金春洙·1922~2004)는 ‘꽃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에게 꽃은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의 결과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의도적으로 민족적 현실이나 시대적 아픔을 지워 버렸다. 대신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시인이 1967년 《현대문학》 11월호에 쓴 산문 〈영향이라는 것〉을 보자.
경남 통영 태생인 김춘수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경기중에 입학하지만 사춘기 번민으로 5년제 중학교의 졸업을 석 달 앞두고 자퇴한다. 얼마 뒤 일본으로 건너간 시인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대(法大)에 지원할 생각이었다.
〈일본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면 모교(경기중)의 소견표니 성적표니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자면 중퇴한 모교의 담임선생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 어떤 사정으로 나는 그것이 싫었다. 그래서 입학일을 놓치고 말았다. 고교에 들어가지 못할 바에야 법학도 포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나대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꼭 법학을 해야 된다는 것도 아니었다.〉(p.44, 《현대문학》 6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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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수가 직접 쓴 자신의 시 〈꽃〉 전문. |
〈예과 1년을 수료할 무렵,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이 되었을 때라고 기억한다. R. M. 릴케를 일어역(日語譯)으로 읽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시를 대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중략) 나는 이때부터 시를 쓰고 싶다는 어떤 욕망을 가지게 된 듯하다.〉(p.44)
김춘수의 초기 시에 이른바 ‘릴케 스타일’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초 발표한 꽃을 소재로 한 일련의 연작시는 릴케의 실존주의적 세계관을 따르고 있다. 실존주의는 전후(戰後) 사회의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한 존재론적 자각을 담은 철학적 조류를 말한다.
사실, 김춘수의 시와 산문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름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시 〈기(旗)〉 〈릴케의 장(章)〉 〈가을에〉가 그렇다. 릴케에 영향 받아 시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릴케의 이름까지 작품에 담았다.
〈내 나이 서른을 전후해 릴케의 영향이 상당히 짙게 내 시에 나타나게 되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물을 릴케처럼 바라보려는 노력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지 시를 만드는 방법이나 기교에 있어서는 여전히 나는 나대로였다. (중략) 이 무렵 나는 또 철학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특히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 심취한 듯하다.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생각으로 그 방면의 참고서와 철학자의 저서를 찾아다닌 기억이 되살아난다.〉(p.45)
초정 “지금껏 내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분은 未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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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통영 항남 1번가에 조성된 ‘초정 김상옥 거리’. |
김상옥은 지나치리만큼 완벽주의자였다. 심지어 ‘한민족을 통털어 진정한 시인은 그를 제외하고 완당(阮堂·김정희) 청마(靑馬·유치환) 미당(未堂)밖에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또 ‘한국의 쓰리킹’에 자신을 포함시켰다. 쓰리킹이란 권력의 킹은 박정희, 돈의 킹은 이병철, 예술의 킹은 김상옥을 뜻한다.
시인은 1968년 《현대문학》 8월호에 쓴 산문 〈시보다 서화와 도예〉에서 자신이 영향 받은 작가를 이렇게 고백한다.
〈서구의 시로선 누구나들 대개 좋아하는 발레리와 릴케를 나도 좋아했고 한시(漢詩)로는 두보와 왕유, 그리고 중국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의 시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 고시조와 가람(伽藍·李秉岐), 노산(蘆山·李殷相) 두 분 선생의 시조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또 시조에 대한, 아니 우리말에 대한 격조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작품에서 감명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시에 있어서는 청마보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를 가장 좋아하여 한때 그를 부산까지 청해다 왕자처럼 ‘시인의 좌(座)’를 마련해 드리기도 했고, 내가 제자들의 결혼 때 주례를 맡게 되면 으레 그의 작품 〈아지랑이〉나 〈무등을 보며〉의 전문을 외우고, 그 다음에야 내 말을 곁들이기도 했다.〉(p.48~49, 《현대문학》 68년 8월호)
완벽주의자 초정도 미당 선생 앞에선 머리를 숙였다는 얘기다.
〈내가 가장 많이 영향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분이 미당 선생이다. 또 그 때문에 그를 닮지 않으려고 나는 가장 그를 경계하기도 한다. 우리 문단에 나보다 몇 갑절 좋은 시를 쓰는 사람, 또 유명한 사람들이 기라성같이 많겠지만 나는 눈곱만치도 그를 부러워하거나 겁을 내지 않는다. 다만 지금껏 내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손을 드는 분은 오직 미당 한 분뿐이다.〉(p.49)
그렇다면 미당은 초정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언젠가 미당은 초정의 시를 두고 “모든 사물을 볼 때마다 거기 살다가 죽어 간 옛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넋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우리 시인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눈을 가진 선수”라고 초정을 칭찬했다.
고서화나 도자기를 보고 시를 배우고 시를 써

초정 선생은 ‘아자방(亞字房)’이란 골동품 가게를 열 정도로 도자기 애호가였다고 한다. 보증금이 2000만원 하던 전세를 살 때 4000만원 하는 이조백자를 빚을 내 살 정도였다.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시작(詩作)에 영향을 미쳤다. 시인은 “시를 읽고 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서화나 도자기를 보고 시를 배우고 시를 얻는다”고 말할 정도다.
〈나는 요즘 시를 별로 읽지 않는다. 본디 그림을 좋아하던 나는 시집보다 세계미술전집이나 중국연대화가들의 화집을 즐겨 보고, 특히 우리 그림으로 겸재(謙齋)와 같은 화인(畵人)의 그림보다 소위 민화라 일컫는 작자미상의 그림을 좋아해서 그것들을 구하여 보는 재미는 시집을 보는 재미보다 더하다. (중략) 그러나 그림에도 자주 권태가 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도자기를 본다.〉(p.49)
도자기에는 어떤 매력이 숨어 있을까. 시인은 “어쩌다 피로해서 백자 항아리에 눈을 주고 있으면 비로소 예술과 종교가 합일하는 묘리를 깨친다. 이 백자 항아리 같은 시를 쓰자면 무슨 까다로운 이론이나 재치있는 기교보다 먼저 마음, 순수무구(純粹無垢)한 그 어느 무명씨인 도공의 마음들과 상종하고 교통할 수 있어야 가능하리라 믿는다”고 했다.
초정의 대표작 〈백자부〉를 음미해 보자.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중략) // 갸우숙 바위틈에 볼로초(不老草) 돋아나고 /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박경리 소설 속에 숨은 文豪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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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의 《토지》 배경이 된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조성된 최참판댁. |
박경리의 작품이 초기의 단편에서 장편, 대하소설로 점점 확장되듯 작품의 세계관 역시 개인사에서 가족사, 민족사로 넓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그녀의 소설이 다루는 주제는 ‘운명과 대결하는 인간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이 그렇다.
‘운명과의 대결’은 러시아의 문호(文豪)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설 장치다. 1967년 《현대문학》 10월호에 쓴 산문 〈많은 작가와 작품 속에서〉에서 박경리는 자신이 학창시절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고백한다.
〈그 당시(소녀 시절-편집자주) 감격하고 경도한 작품 작가는 많았겠지만 (중략) 제일 먼저 부닥치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다. 그것은 작품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것에 따르는 에피소드 때문인지 모르겠다. 처음 여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기숙사에 있었는데 한방의 상급생 언니가 그것을 읽고 있었다. 언니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고개를 비틀고 읽는 것도 괴로운 노릇이었지만 다 읽기도 전에 책장이 넘어갈 때는 원망스러웠다. 이튿날 아침 등교종이 울리고 모두들 학교로 가는데 언니가 책을 두고 가는 기미를 안 나는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앓아 온종일 책 읽는 삼매경(三昧境)에 빠졌던 것이다.〉(p.246, 《현대문학》 67년 10월호)
박경리는 여학교 1학년 때 처음 《죄와 벌》을 접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죄와 벌》을 즐겨 읽었다. 3학년에 때도 ‘결석을 하여 기숙사 안을 쏘다니며 읽을 것을 찾던 중 누군가의 책꽂이에 있던 《죄와 벌》을 읽은 일’도 잊을 수 없다.
〈그 《죄와 벌》은 곧 방학이 되어 집으로 가져가서 내가 먹어 버리고 말았는데 죄의식(罪意識)이 강한 나를 상당히 괴롭힌, 그야말로 죄와 벌의 서(書)였다. 〉(p.247)
한국전을 겪으며 그녀의 독서도 달라졌다. 세계사 책을 탐독하며 좀 더 넓은 세상을 목도한 것이다.
〈6·25를 전후하여 내 독서경향은 달라졌던 것 같다. 어줍지 못하게 숙원이던 사학을 해 보겠다고 세계사대계를 독파한 것은 환도 후이며 고본점(古本店)에서 사학서적을 사들이곤 했는데〉(p.247) 문단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김동리의 《황토기》 《찔레꽃》, 황순원의 《목넘이 마을의 개》, 손창섭의 《광야(曠野)》, 서정주의 《화사집(花蛇集)》 등을 즐겨 읽었다. 또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토머스 울프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를 읽으며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것(《고요한 돈강》-편집자주)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에 무의미함을 느낀다. 가없이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우물을 파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직업적 의식을 되살리며 자신을 달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 포크너와 조이스 같은 분의 작품을 읽을 때는 귀신같다는 생각이 든다.〉(p.248)
박경리 문학의 총체는 삶에 대한 외경심과 환경에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인간의 의지다. 도스토옙스키와 숄로호프, 제임스 조이스, 토머스 울프가 그리고자 했던 인간 세상의 구경(究竟)과 다르지 않다. 박경리의 작품 속에 그런 문호들의 고뇌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