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기관(의문사委)이 국가기관(국방부)을 은폐·조작 조직으로 몬 초유의 사건
⊙ 가슴 2발에 머리 1발 자살?… 법원-법의학자 “스스로 3발 쏠 수 있다” 판단
⊙ 2심 재판부, ‘생활반응’과 ‘왼손상처’ ‘접사’ 보면 “타살일 수 없다”
⊙ 1심 재판부, 허 일병의 최초 총상을 가슴에서 머리로 슬그머니 바꿔
⊙ 살인자로 몰렸던 盧씨, “2심 판결을 계기로 전 상병 다시 만나게 되길”
⊙ 가슴 2발에 머리 1발 자살?… 법원-법의학자 “스스로 3발 쏠 수 있다”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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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심 재판부, 허 일병의 최초 총상을 가슴에서 머리로 슬그머니 바꿔
⊙ 살인자로 몰렸던 盧씨, “2심 판결을 계기로 전 상병 다시 만나게 되길”
1984년 4월 2일, 강원도 화천의 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 소속의 한 병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몸엔 3발의 총상(머리 1발, 양쪽 가슴 각각 1발) 흔적이 있었다. 이름은 허원근(許元根·당시 22세). 전남 진도 출신으로 부산 수산대(현 부경대) 재학 중 입대한 그가 입대 7개월 만에 총기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그는 사건 다음 날 입대 후 첫 휴가를 나가기로 돼 있었다. 유서는 없었다. 그의 신상명세표에 특기는 배구, 취미는 바둑, 주량은 소주 1홉 정도라 적혀 있었다. 중대장의 전령(傳令)으로 근무했던 그를 동료들은 성실한 병사로 기억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허 일병의 사망 경위를 두고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사건 직후 군 수사기관은 일찌감치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유족은 이를 믿지 않았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생겨난 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을 대표적 군내(軍內) 의문사 사건으로 규정하고 재조사를 시작했다.
의문사위는 2002년 8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허 일병은 살해됐으며, 군 당국이 진실을 조작했다.” 의문사위라는 국가기관이 국방부의 조사결과를 전면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간 거듭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국방부는 거세게 반발했다. 국방부는 특별진상조사단(특조단)을 꾸려 대대적으로 재조사를 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2004년 제2기 의문사위는 “재조사 결과, 타살이 맞다”고 다시 반박했다. 법원도 각기 다르게 판결했다. 2010년 서울중앙지법(1심)은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올해 서울고법(2심)은 자살이라고 뒤집었다. 사실 관계를 따지는 사실심(事實審)의 최종 단계인 2심에서 법원은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고 최종 결론을 내린 셈이다.
서울고법, 1심 뒤집고 ‘자살’로 판단
서울고법 민사9부(재판장 강민구)는 지난 8월 22일 허 일병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허 일병의 사인(死因)을 ‘자살’로 보면서도 군 수사기관의 부실 수사로 30년간 의문사 논란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국가는 허 일병 부모에게 3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강원도 육군 7사단에서 복무하던 허 일병은 1984년 4월 2일 폐유류 창고 뒤편에서 가슴과 머리에 3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군 당국은 당시 두 차례, 1999년 한 차례 조사를 벌인 뒤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02년 의문사위는 숨진 날 새벽 노양식(盧讓植) 중사가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리다 쏜 오발탄에 허 일병이 맞았고 이를 자살로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 아침에 시신을 옮겨 2발을 더 쏘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해 국방부 특조단은 자살이라고 최종 발표했다.
이에 대해 2010년 1심 재판부는 “허 일병이 타살됐고 소속 부대 등이 사실을 은폐·조작했다”며 “국가가 유족에게 9억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날 “허 일병이 M16 소총으로 좌·우측 흉부에 각 한 발씩 발사했으나 바로 사망하지 않자 비탈진 곳에 누워 왼손으로 M16 소총의 총구를 지지한 채 오른쪽 눈썹 위에 한 발을 발사해 사망했다”며 “허 일병과 신체조건이 비슷한 사람이 이 같은 발사자세를 취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스스로 M16 소총으로 여러 발을 쏴 자살한 사례도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허 일병의 시신이 옮겨지지 않은 점, 3군데 총상 모두 생존했을 당시 입은 총상이라는 의학적 소견, 타살이라고 주장한 핵심 증인의 진술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 등을 자살 근거로 꼽았다.
재판부는 “노양식 중사가 허 일병을 쏘는 것을 봤다는 이 사건의 유일한 증언은 유도신문에 의한 것으로 보여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다”며 “법의학적 소견 및 공소시효가 지난 지금까지 양심선언을 한 부대원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 등에서 자살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의문사위의 타살 발표 그대로 받아쓴 대다수 매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을 어떻게 조사해 발표했을까. 2002년 8월 20일 의문사위는 “허 일병은 타살됐으며 현장에 있던 중대원뿐 아니라 상부의 조직적 개입으로 자살사고로 조작 은폐됐다”고 밝혔다. 허 일병 유가족들은 사건 당시부터 “자살하는 사람이 M16 총으로 3발씩이나 쏠 수 있는가”, “사고 당일 휴가를 가기로 한 사람이 자살할 이유가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의문사위 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84년 4월 2일 허 일병이 근무하던 부대 안에서 간부들이 회식을 했다. 회식 중 중대장 전령이었던 허 일병은 안주를 나르는 등 술시중을 들었고, 새벽 2~4시쯤 회식을 하던 간부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술에 취한 한 하사관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집어 난동을 부리다 실수로 총이 발사됐고 허 일병은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숨졌다.
그날 새벽 4~6시 사이에 김모 중대장(대위)은 곧 이 사실을 대대에 유선으로 보고했고, 대대는 연대로 이 사실을 보고한다. 대대장이 아침 6~7시 사이에 사건이 벌어진 3중대에 와서 중대장 및 현장에 있던 간부들과 사건 대책을 논의하고 간다. 중대장은 현장에 있던 10여 명의 사병들을 하나씩 중대장실로 불러 허 일병의 피를 닦아내기 위해 물청소를 지시하는 등 할 일을 알려주고 알리바이를 조작한다.
오전 10~11시 중대원들이 허 일병 시체를 폐유류 창고로 옮긴 뒤 왼쪽 가슴과 머리에 한 발씩 더 쏴 자살로 위장했다. 중대장은 오전 10~11시 총성을 듣고 폐유류 창고에 가보니 허 일병이 숨져 있었다고 허위신고한다.>
의문사위의 중간수사 발표가 있자, 언론도 우왕좌왕했다. 대부분 매체가 허 일병이 술 취한 상관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자살로 은폐·조작된 사실이 18년 만에 밝혀졌다고 단정적인 보도를 했다.
8월 20일자 MBC TV의 <9시 뉴스데스크> 앵커는 “군 복무 중이던 사병이 술 취한 상관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을 군부대가 조직적으로 자살인 것처럼 은폐했던 사실이 18년 만에 밝혀졌습니다.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서 시체에다가 추가로 총질까지 해댔습니다”라며 ‘총질’, ‘해댔다’ 등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보도했다.
2002년 8월 20일 ‘군(軍)서 자살로 조직적 은폐’라는 다수 언론의 보도가 나간 일주일 후, 8월 28일자 《조선일보》는 ‘허 일병 부대원들, 조직적 은폐 조작은 없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의문사위 발표와 관련, 당시 사고 현장에 있었던 부대원 대부분이 이를 정면 부인해 논란이 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월간조선》도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조갑제(趙甲濟) 《월간조선》 대표는 <2002년 8월 20일 사회부 기자들은 ‘집단자살’하기로 결의했는가>라는 칼럼을 싣고, “허원근 일병 아버지의 ‘주장’을 ‘진실’로 승격시켰다”며 “이 승격에 의도가 들어갔다면 조작(造作)이 된다”고 했다.
이어 《월간조선》은 허 일병의 시신을 부검한 당시 육군과학수사연구소 군의관, 수사를 담당한 7사단 헌병대 수사계장, 의문사위와 전모 상병에 의해 살인자로 누명을 쓴 노양식 중사, 노양식 중사를 살인자로 몬 전모 상병을 인터뷰해 사건의 실체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핵심 쟁점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난 8월 22일, 서울고법 제9민사부는 허 일병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가리기 위해 사체에 대한 법의학적 판단, 참고인 진술의 신빙성에 중점을 두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대대장 전모 중령과 중대장 김모 대위, 보안대 허모 하사가 사건의 조직적 은폐와 조작을 했는지 여부도 철저하게 검증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의 쟁점 사안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다.
●사체의 이동여부=1심과 의문사위는 현장 사진에 출혈이 적고, 골편이나 뇌 실질(實質)이 보이지 않으므로 첫 총상 후 사체가 중대본부 막사에서 폐유류고로 이동됐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헌병대 수사기록상 허원근 일병 머리 좌전방 30cm~1m 부근에 골편이 산재해 있었고, 소대장 장모 중위의 진술을 보면, “크고 작은 대여섯 개 골편이 좌측 언덕 부위 산재(하얗고 안쪽에 살점이 붙은 손톱 크기만 한 골편)하고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흉부에 2발의 총상이 먼저 있어 이미 다량의 출혈이 있었으므로 머리의 출혈은 적었을 것(머리 총상의 사입구(射入口), 사출구(射出口)는 머리 앞쪽 또는 앞쪽 측방이며, 누운 상태여서 피가 많이 흐르지 않음)이라고 했다. 또 M16 소총의 회전력으로 인해 뇌 실질이나 혈액이 비산해 흩어졌고, 허 일병이 야전상의 등 6겹의 상의를 입고 있어 상당량의 흉부 출혈을 흡수했다고 보았다.
머리에 있는 혈액흔 방향이 일정(이동되었다면 여러 방향으로 피가 흘러 피범벅이 돼야 함)해 망인의 최종자세와 일치했고, 사체 이동 시 나타나는 끌린 흔적이 없는 점 등 사체에 이동 흔적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중대본부 막사로부터 폐유류고까지 약 50m의 굽은 소로길로 운반도구 없이는 성인 4명이 협동해도 사체 운반이 어려워 운반을 시도했을 경우, 허 일병 사체가 크게 훼손된다고 보았다.
핏자국 씻기 위한 물청소 진술은 유도신문의 결과
●대대 및 연대에 보고된 시각=1심과 의문사위는 1984년 4월 2일 새벽에 대대 및 연대 상황실, 대대장, 연대장에게 보고됐고, 이를 뒷받침하는 진술들이 다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다수의 진술자가 의문사위 조사 시 유도신문에 의해 진술하였거나 실제 진술 내용과 다르게 조서(調書)에 기재됐다며 진술을 번복했다고 했다. 18년 전 사고의 보고시각에 대한 기억이므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게다가 참고인들은 1차와 2차 의문사위, 국방부 특조단 조사과정을 통해 유입된 정보로 ‘기억의 오염’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즉 참고인들의 진술은 법의학적 증거에 비해 증거로서의 가치가 낮다는 것이다.
예컨대 재판부는 사고 다음 날인 4월 3일 새벽 헌병대의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주요 사건 보고가 있었는데 이것과 혼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상당수의 대대 및 연대원에게 사망 보고시각이 알려진 상황에서 사망시각을 조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다수 부대원은 당일 새벽 연대와 대대에 사건보고가 있었다고 진술했다가 진술을 번복했다. 연대 인사과장 장모 소령이 사고 당시 작성한 ‘매(화)장 보고서’에 허 일병의 사망일시가 ‘1984년 4월 2일 오전 10시52분’으로 기재돼 있었고, 7사단 헌병대장이 사단장에게 총성 청취일시를 ‘사고 당일 오전 10시50분경’이라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대대 및 연대 지휘관이 허 일병 사건 사고 당일 새벽에 보고를 받고도 이를 은폐·조작하려면, 대대 및 연대뿐만 아니라 사단 헌병대, 사단장, 군단 헌병대, 육군 헌병감까지 은폐·조작에 가담시켰어야 한다는 뜻이다.
●핏자국을 씻기 위한 물청소 실시 여부=1심과 의문사위는 4월 2일 오전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핏자국을 보았고 이를 씻기 위한 물청소가 있었다고 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진술들이 다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핏자국을 보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진술자가 의문사위 조사 시 유도신문에 의해 추측을 진술하였을 뿐 사실과 다르다고 진술을 번복했다고 했다. 예컨대 조사관이 “피를 닦기 위해 내무반을 물청소하였다는데, 그렇다면 바닥이 젖어 있지 않았겠느냐”고 해 “물청소를 하였다면 젖어 있겠지요”라고 답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허 일병의 銃傷 숫자를 파악 못한 중대장
●총성을 2발만 청취하였다는 진술=의문사위는 전모 상병의 진술에 맞추기 위해 오전 11시경 2발의 총성에 초점을 맞췄다. 의문사위에서 이 사건 현장에서 총기 발사실험을 실시했다. 돼지고기에 전투복 상의와 군 야전점퍼를 씌우고 접사한 경우와 소염기를 군복으로 감싸고 총을 쏜 경우에는 다른 초소에서 총성을 듣지 못하거나 약하게 들렸다고 했다.
허 일병이 당시 6겹의 상의를 입고 있었고 오른쪽 가슴을 쏠 때는 총구를 꽉 누른 상태에서 총을 발사했기 때문에 실험에서와 같은 상황일 가능성이 커서 총성이 잘 안 들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문사위는 GOP 경계근무의 특수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GOP 경계는 일몰 후부터 일출 전까지로 모든 소초병이 주간보다 촘촘하게 초소 경계를 하게 된다. 취침시각은 오전 7시부터 12시다. 따라서 의문사위 주장처럼 새벽에 총격이 이뤄졌다면, 최전방 GOP의 근무형태와 소초 배치에 미뤄볼 때, 중대본부 인근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소초원들이 총성을 듣지 못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헌병대 조사에서 중대원 9명 모두가 오전 9시50분 무렵의 총성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탄피 3개 가운데 2개만 발견된 이유=허 일병은 발견 당시 3발의 총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오른쪽으로 누운 사체의 자세 때문에 오른쪽 가슴의 사입구를 확인하지 못하고 허 일병이 2발의 총상(머리, 왼쪽 가슴)을 입은 것으로 착각, 조사됐다. M16 소총에 남은 실탄을 확인한 결과, 12발(탄창 11발, 약실 1발=15발들이 탄창)이 확인됐다.
소총에 남은 실탄이 1발 부족하다고 판단해 실탄 부족에 따른 문책 또는 타살 혐의를 피하기 위해 중대장 지시로 실탄을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결국 헌병대에서 허 일병 사체에 깔려 있던 나머지 탄피 1발을 찾아내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당시 헌병 수사관 중 2명은 허 일병의 사체에 깔려 있던 나머지 탄피 1발을 찾았다고 진술했지만, 헌병대 기록에는 전혀 이런 사정이 기재돼 있지 않았다. 헌병대가 이 사건 사고를 자살로 조작할 생각이었다면, 탄피와 같은 핵심적인 사항을 이렇게 정리해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중대장이 총상의 숫자를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은 거꾸로 허 일병의 사체를 이동시키거나 변경한 적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허 일병의 사체는 발견 당시 그대로 헌병대에 인계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중대장 김모 대위는 사건 은폐·조작을 한 혐의로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 기소의견으로 송치됐다.
3발 모두 생존 시 총상
●3군데 총상 모두 ‘생활반응’이 있는지 여부=1심과 의문사위는 총상에 나타난 출혈을 생활반응(살아 있을 때에만 나타나는 몸의 반응. 내출혈·염증성 발적·부기·곪음 따위는 시체에는 생기지 않으므로, 상처가 살아 있을 때의 것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데 이용)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사후에도 혈액이 응고될 때까지 혈액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첫 총상 후 7~8시간 뒤에 총상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2번째, 3번째 총상에서 혈액이 나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의문사위는 “허 일병의 출혈을 생활반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한 노용면 재미 법의학자의 의견만 수용했던 것이다. 의문사위는 또 개체적으로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세포사(細胞死)에 이르기까지 근육이 충격에 반응할 수 있다(초생활반응)고 주장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노용면을 제외한 거의 모든 법의학자가 3군데 총상 모두에 생활반응이 있으므로 3발 모두 생존 시 총상이라고 한 사실을 주목했다. 즉 벌어진 폐, 조직에 스며든 출혈, 왼손등 발적(發赤) 등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첫 총상이 흉부이든 머리이든 7~8시간 동안 생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당시 외부 온도 영하 5도로 체감온도는 영하 9도), 허 일병에 대해 평소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중대원들이 총상을 입은 허 일병을 의무대로 호송할 생각은 하지 않고 유기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왼쪽 및 오른쪽 흉부 총창 사입구의 색깔 차이의 원인에 대하여=유족들은 총상이 발생한 시간적 차이로 인한 건조 상태의 차이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양쪽 흉부의 사입구 형태의 차이, 야전 상의의 화약흔의 크기와 형태, 옷이 찢어진 모양의 차이는 총구와 사체와의 거리 또는 발사 각도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고, 이로 인해 색깔 차이가 생겼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M16 소총으로 흉부 2발, 머리 1발을 쏘아 자살할 수 있는지 여부=허 일병과 신체조건(신장 181cm)이 비슷한 사람이 M16 소총으로 당시 상황 재연 시 큰 어려움이 없었다. 1995년 10월 육군 위모 소위가 K-2 소총으로 복부 2발, 머리 1발을 쏘아서 자살한 사례가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 외 M16 소총으로 하복부 6발, 턱밑 1발, 입 1발 총 8발을 쏘아 자살한 사례, 복부에 1발, 대퇴부에 5발 쏘아 자살한 사례 등이 있다고 했다.
법의학자 대부분은 흉부 총상 2발은 폐를 관통했으나 심장을 관통하지 않아 치명상이 아니며, 그 자체로 의식을 잃는 것은 아니어서 총상 후 다시 머리에 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총상의 발생은 흉부에서 두부의 순서라는 것이다. 부검사진의 사출구의 크기 및 흉부 내의 근육 출혈량 등을 볼 때 바로 의식을 잃거나 행동능력을 상실하였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銃擊은 목격했는데, 銃聲은 듣지 못했다?
●핵심 증인 진술의 신빙성 여부=의문사위는 전모 상병의 진술(노양식 중사가 술을 먹고 소란을 피우던 중 발사된 총알이 허원근 일병의 가슴에 맞았다)의 신빙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전모 상병은 의문사위 조사결과와 허 일병 유족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진술을 한 유일한 인물이다.
지금껏 13명의 중대본부원과 100여 명의 참고인 가운데 허 일병의 사망 경위에 대해 구체적 진술을 한 사람은 전모 상병뿐이다. 그는 의문사위 조사에 대한 보상으로 의문사위로부터 3000만원을 수령했다. 1심 재판부는 전모 상병의 진술은 채택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렇게 판단했다. 핵심 진술자인 전모 상병은 의문사위 1회 진술 시 “허 일병을 4월 2일 오전에 목격했고, 그 후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허 일병이 죽었다고 한 것 이외에는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전모 상병은 13회에 걸친 의문사위의 집중적인 진술조사에 10회까지 오발사고를 부인하다 11회부터 의문사위 조사관이 다른 사람의 진술을 들려주거나 자신의 추론을 들려주면 “듣고 보니 그럴 것 같다”고 하면서 진술을 조금씩 추가하다가 12회째 소위 ‘양심선언’을 했다.
‘사건 당일 새벽 중대본부 중대장실 안에서 술을 마시던 노○○ 중사가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중대원들을 집합시키고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노○○ 중사가 들고 있던 M16 소총에서 총알이 발사됐고, 허 일병이 가슴 부분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누군가 허 일병의 사체를 중대본부 막사 밖으로 옮겼다.’
그러나 전모 상병은 심지어 총소리가 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경위사실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다. 전형적인 유도신문에 의한 진술로서 신빙성이 의심되고, 전모 상병을 제외한 모든 중대원은 새벽에 총기 사고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허 일병의 피를 닦기 위해 물청소를 했다는 진술도 국방부 특조단 조사에서 모두 부인됐다. 중대원들은 “허 일병 사고로 상급기관의 간부들이 방문할 것을 대비해 중대본부 내부 양동이에 있던 물을 먼지 방지 차원에서 바닥에 뿌린 것에 불과하다”고 증언했다.
다른 중대원들이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 전원 ‘진실 반응’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형사상 공소시효, 손해배상의 소멸시효가 휠씬 지난 30년 후인 지금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판단했다.
허 일병의 최초 총격 부위도 ‘오락가락’
●의문사위와 제1심 판결 이유의 타살 인정의 문제점=의문사위는 흉부 총상이 먼저(4월 2일 새벽), 머리와 나머지 흉부 총상이 나중(4월 2일 오전 10시50분경)이라고 하고, 1심 판결은 머리 총상이 먼저, 흉부 총상은 나중이라고 판단했다.
즉 전모 상병은 허 일병의 총상이 최초 가슴(새벽)→머리 및 가슴(오전)이라고 진술했으나, 1심은 머리(새벽)→양쪽 가슴(오전)으로 총상 순서를 자의적으로 변경하고, 최초 총격 시점도 당일 새벽 2시30분~3시에서 새벽 6시경으로 최대한 늦췄다. 이것은 재판부가 생활반응에 대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취한 고려로 보인다.
그러나 항소심은 어떤 경우이든 법의학적 소견(3발 모두 접사여서 타살이기 어려움, 왼손의 파열상 및 발적흔은 총구를 엄지와 검지로 지지한 채 발사한 흔적으로 보임, 3발 모두 생활반응이 있어 총상의 시간적 차이 설명 안 됨 등)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미국 법의학자 노여수 및 한국 법의학자 대부분이 자살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경계근무인원도 낮보다 많고 소음도 적은 새벽에 발생한 총성임에도 이를 청취한 부대원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자살로 조작할 의도였다면 새벽에 자살한 것으로 조작하는 것이 가장 간편한데, 굳이 오전 10시50분경에 총 2발을 더 발사해 타살의 의혹만 가중시킬 이유가 없었다고 보았다.
즉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2발의 총상을 더 입히는 것은 1발의 총상보다 오히려 타살의 의심을 더 받게 될 것이다. 특히 원심 결과와 같이 ‘머리’에 먼저 총상을 입었다고 가정할 경우, 가슴 부위 2발의 총상은 더욱 확실한 타살 혐의점이 될 것이다.
타살이나 사고사라면 평소 허원근 일병과 관계가 좋았던 부대원들 중 전모 상병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양심선언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4월 2일 아침에 허 일병을 목격했다는 진술들이 구체적이며,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다고 판단했다.
軍 수사기관의 부실수사는 인정
서울고법 제9민사부는 이 사건을 ‘자살’이라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또 “사망원인이 자살인 이상 부대원, 군 수사기관, 특조단의 은폐·조작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며 “단, 원고들의 은폐·조작 주장에는 군 수사기관의 부실수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포함돼 있다고 선해해 그 부분을 판단했다”고 했다.
서울고법은 “외부와 엄격히 격리되어 있는 군대 내 사고에 대하여는 군 수사기관의 실체적 진실 규명 의무는 일반 수사기관보다 더 높다”며 “피해자의 유족들에게는 철저한 조사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서울고법은 또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헌병대 수사는 현저히 부실하게 이뤄졌다”며 “총상이 3군데이므로 탄피도 3개, 총성도 3번인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탄피와 총성이 2개씩밖에 없음에도 이에 대한 조사가 미진하고 추측만으로 조사를 마무리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헌병대 수사기록에 골편에 대한 기재가 있으나 현장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며 “골편, 핏자국에 대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당시 부대원들 중 M16 소총을 3발 쏘아 자살할 수 있는지 의심하면서 타살 의혹을 가진 사람이 많았으나 자세 실연(實演), 법의학자에 대한 자문 등 의혹을 풀기 위한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재판장인 강민구(姜玟求) 부장판사는 “군대 내 사고의 특징, 군대에 가족을 보낸 유족의 고통, 당시 헌병대의 현저히 부실한 수사가 이 사건을 30년 동안의 의문사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이란 점 등을 고려해 위자료를 산정했다”고 했다.
강 부장판사는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은 일체의 선입견이나 이념개입을 배제하고 증거재판주의에 입각해 판단했다”며 “오늘 판결로 고인의 영면과 동고동락한 부대원 모두의 영혼의 안식을 찾기를 희망하고, 유족들도 심적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감히 권유드린다”고 했다.
국방부 특조단 현장 검증의 기억
2002년 11월 27일, 의문사위의 타살 발표에 거세게 반발한 국방부는 특조단을 꾸렸고, 대대적인 재조사를 실시했다. 특조단은 최종 발표를 하루 앞두고, 강원도 화천군 7사단 3중대 본부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당시 기자를 포함해 노양식·오용근·손명조·이진영·권오진·안병덕씨 등 당시 중대원 6명과 보도진 40여 명이 참석했다. 헬기로 서울 용산기지를 출발한 취재진은 45분 정도 비행해 잔설(殘雪)이 뒤덮인 화천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군용 지프에 나눠 탄 일행은 험한 산길을 따라 4km 가량을 달려 3중대 본부 앞에 있는 폐유류고에 내렸다.
특조단 정수성 단장(육군 중장)은 “당시 의문사위 조사는 노 중사와 목격자인 권모씨가 입회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조사관의 추리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며 “오늘 검증은 자살이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의문사위는 허 일병이 사건 당일 새벽 내무반에서 노 중사가 쏜 총탄에 맞았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내무반과 초소에 근무했던 허 일병 동료 부대원들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해 사건 당시 총기 발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의문사위는 “내무반 주위에 방호벽이 있는 상황에서 밀착사격을 했다면 총소리가 작아 내무반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안 들릴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특조단은 13평(43㎡) 남짓한 내무반에서 군복을 입힌 돼지 사체에 M16 소총을 밀착해 발사했다. “빵~”하는 폭음과 함께 귀가 멍할 정도였다. 탄피가 2m 정도 튀었고 화약냄새가 진동했다. 탄이 허 일병을 관통했다는데, 중대본부 내부에는 탄착점(彈着點)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만일 노양식 중사가 허 일병을 내무반에서 총기오발로 쏘았다면 자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못 들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조단 수사관이 측정한 소음수치는 91.3db이었다. 순간적으로 전차가 굉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소리라고 했다. 중대본부 막사 밖에서 내무반 내 총성을 들어보니 50m 정도 떨어진 초소에서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특조단은 이를 근거로 “최전방에서, 그것도 새벽에 총기사고가 있었다면 당장 총성이 보고돼 사단급 이상 수준에서 비상이 걸렸을 것”이라며 의문사위 발표를 부정했다. 동료 부대원 손명조씨는 “이렇게 큰소리가 나는데도 어떻게 부대원 전체가 총소리를 못 들을 수가 있느냐”며 “의문사위가 부대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정황을 조작했다”고 했다.
총상 색깔이 차이 나는 까닭
당시 현장검증에서 허 일병의 자살 상황을 연출한 병사는 허 일병과 신체조건(키 181cm)이 같았다. 왼손으로 M16 소총의 상단부를 잡고 오른손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가슴에 두 발을 쏘고, 극심한 통증으로 몸이 견디기 어려워지자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총은 싸리나무 울타리에 끼워져 있었다), 왼손으로 총열의 가스관을 잡고 오른손으로 두부(頭部)를 향해 격발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특조단은 의문사위가 타살 의혹으로 주장한 양쪽 가슴의 총상 색깔 차이에 대해서도 실험을 했다. 의문사위는 오른쪽 가슴 총상 색깔이 검게 나타났고, 왼쪽 가슴 총상 색깔이 붉게 나타난 것은 “총격 시간의 차이”라고 주장해 왔다.
특조단 수사관이 군복 입힌 돼지에 접사(接射), 근접사(近接射) 두 가지 방법으로 총을 쏘았다. 접사는 군복이 지름 3cm 가량의 십자형으로 찢어지며 총상 부위가 검게 나타났다. 근접사는 이와는 달리 총상 부위가 파열되며 붉은색을 띠었다.
특조단 수사관은 “허 일병 가슴의 두 군데 총상 색깔이 다른 것은 의복과의 밀착 여부에 따라 의복 사이로 매연이나 화약이 빠져나가는 양이 다르기 때문이지, 피격된 시간 차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황적준(黃迪駿) 전 고려대 의대 학장은 2002년 11월 25일 국방회관에서 열린 ‘법의학 공개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총창을 살펴볼 때 타살보다 자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생존시간과 활동을 볼 때 새벽 2~4시에 한 발, 그리고 7~8시간 뒤에 다시 한 발을 맞았다는 것은 모순이다. 당시 날씨는 영하 5도였고, 체감온도는 이보다 더 떨어진 영하 9도였다. 초탄을 한 방 맞고 8시간 정도 밖에 있었다면 아마 동사(凍死)했을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 가슴의 총상 색깔 변화도 시간 차가 많이 난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허원근 일병의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의 파열상이 방어흔인가 지지흔인가 여부도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가르는 핵심 쟁점이다. 국방부 조사본부 홍성혁(洪成赫) 팀장은 “의문사위는 누군가 허 일병의 머리와 가슴에 총구를 밀착하자 총구를 감싸쥔 상태에서 나타난 ‘방어흔’이라고 주장했다”며 “그러나 총구를 감싸쥐었을 경우, 파열상은 손바닥 안쪽에 나야 하지만 허 일병은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파열이 발생했고, 이는 총구를 엄지와 검지 사이 V자 홈으로 지지한 ‘지지흔’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의문사위, 헌병대 최초 조사기록 보지 않아
사건 당일 오후 1시20분경 식사를 가지러 가다가 허 일병의 시체를 발견한 권오진, 안병덕씨 두 사람이 사망 현장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대본부에서 나오면 당시는 오솔길이었습니다. 모퉁이를 도는데 허 일병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허 일병이 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철모는 안 보였고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머리 중간 쪽이 뻥 뚫려 있어 섬뜩했습니다. 무서워서 가까이 못 가고 5m 전방까지 가서 보다가, 놀라서 밥을 타러 가던 밥통도 버리고 중대본부로 뛰어올라갔습니다.
중대본부에는 신재영, 전모 상병이 있었습니다. 전 상병이 ‘야, 인마. 오늘이 만우절도 아닌 4월 2일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얼굴이 장난스런 표정이 아니니까 ‘거짓말이면 혼난다’면서 두 사람이 뛰어내려 갔죠. 신재영 상병이 허 일병의 명찰을 확인하고 허 일병임을 확인했습니다. 허 일병은 생각보다 피는 많이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용근 병장, 이진영 상병, 신재영 상병, 이모 하사, 전모 상병(당시 계급) 등은 사건 당일 아침 허 일병을 본 목격자들이다. 아침에 허 일병을 본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새벽 2시경 노양식 중사의 오발로 허 일병이 죽었다는 의문사위 발표를 부인하는 결정적인 증거다.
특히 전모 상병이 1984년 4월 4일 헌병대에서 작성한 진술조서(237~238쪽)를 보면 허 일병이 아침까지 생존했던 사실이 분명하게 적혀 있다.
<본인은 소속대 1·3종 계원으로 근무하는 자로서 당일 1984년 4월 2일 오전 6시10분경 기상하여 막사 옆 10m 정도 떨어진 공터에서 병장 오○○의 인솔 아래 81mm 관측하사 이○○, 이병 허원근(일병의 誤記임), 81mm 관측병 상병 안○○, 상병 전○○, 이병 권○○ 등이 모여서 오전 6시30분까지 일조점호 행사를 취했다.
점호 후 병장 오○○, 상병 손○○, 이병 권○○, 이병 허원근은 조식 및 경유를 운반하러 단독군장으로 오전 6시35분경 16소초로 이동했다.… 오전 9시30분 중대장은 16소초장과 이○○을 대동하고 순찰을 출발했다.… 허원근은 뚜렷한 할 일이 없었던지 평소하던 대로 행정반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몇 시인가는 모르겠지만 허원근이가 교환대 옆 병기대 앞에 엉거주춤 서있길래 “왜 휴가복 빨러 안 가냐” 물었더니 아무 대꾸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게 마지막 본 것 같습니다.>
다음 날 휴가 출발을 알고 있었던 이진영 상병은 허 일병 대신 중대장과 순찰동행을 한 사람이다. 그는 허 일병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중대장이 순찰 나가는데 전○○ 상병이 일어나 인사를 했습니다. 중대장이 철모를 쓰려고 하는데 턱끈이 낡아 지적을 받았어요. ‘너는 보급병이면서 중대장 턱끈도 제대로 못 갖추느냐’면서 중대장이 자신의 철모로 내 철모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허 일병에게 ‘넌 전령이면서 이런 것도 못 하냐’며 야단을 치고는 순찰을 나갔습니다. 내가 철모로 맞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당시 허 일병 사망 사건을 수사했던 이해교(李海敎) 당시 헌병대 수사계장은 “허 일병 사망원인이 타살이라는 의문사위 주장은 한마디로 소설 같은 얘기”라며 “수사 원칙상 몸에 총알을 3발이나 맞는 드문 사건을 접하고 처음에 타살로 간주하고 수사에 착수했으나, 별다른 타살 흔적을 찾지 못해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는 “시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의문사위 주장대로 사망시각이 사건 당일 새벽 2~4시라면, 제가 현장에 오후 4시에 도착했으니 12시간쯤 지났을 때인데 허 일병의 몸은 강직(强直)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고 시반(屍斑) 현상(시신을 만질 때 생기는 자줏빛 얼룩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왜 의문사위가 헌병대 수사관들의 보고서를 못 믿고 일부 중대원들의 진술만 갖고 이러쿵저러쿵 했는지 모르겠다”며 “당시 의문사위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18년 전의 현장 도착 시각과 사건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사건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헌병대가 사단 차원의 5부 합동조사(감찰, 법무, 인사, 의무, 헌병)가 이뤄져 헌병대가 독자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헌병대가 사건을 은폐·조작하려 했다면 굳이 중대장의 사체 발견시각, 탄환 관련 조작을 밝힐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국방부 특조단, ‘날조·조작’이란 용어 사용
2002년 11월 28일 국방부 특조단은 “허 일병은 자살”로 최종 발표했다. 특조단은 “의문사위가 자살을 타살로 날조·조작해 허 일병 동료 부대원들의 인권을 말살했다”면서 이례적으로 ‘날조·조작’이라는 강한 표현을 써가며 의문사위 수사내용을 정면으로 뒤집는 발표를 했다.
당시 정수성 단장은 “의문사위 발표와 달리, 사건 당일 오전 2~4시 사이 중대본부 내 총기오발 사건이 없었으며, 당일 노양식 중사를 포함한 모든 중대원의 알리바이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부검의 박의우(朴宜雨) 건국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1984년 4월 4일 7사단 보급수송 근무대에서 허 일병을 부검했다. 박 교수는 소견서에서 “총상 주변에 남은 그을린 흔적과 화약 성분으로 보아 허 일병이 총을 거의 몸에 밀착시킨 상태에 발사(근접사)된 총탄에 의해 숨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치명상은 두부 관통상이었다”면서 “가슴을 관통한 2발의 총탄은 폐와 간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 치명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부검기록에는 허 일병이 총을 맞은 가슴 두 곳과 머리 등 세 곳 모두에서 근육이 위축되는 ‘생활반응’이 나왔다고 돼 있다. 허 일병은 마지막 총에 머리를 맞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의문사위 발표대로라면, 우측 가슴에 첫 발을 맞은 허일병은 그 후 6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 단순한 사고사를 자살 사건으로 은폐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을 했다는 결론이 된다.
국방부 특조단은 “현장에서 회수된 세 개의 탄피는 모두 허 일병 총에서 나온 것으로 판명됐다”며 “이는 노 중사가 자신의 총으로 허 일병을 쐈다는 의문사위 결론이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논란의 초점이 됐던 3발을 쏴 자살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첫 2발이 간과 허파를 손상시켰지만 치명상이 아니었고, 죽으려고 마음 먹으면 반복적으로 끝까지 결행하는 자살자의 심리상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특조단 조사에서는 허 일병의 자살을 추정할 만한 새로운 진술도 확보됐다. 중대원 신재영씨는 “자살하기 며칠 전, 함께 식사를 추진하던 허 일병이 ‘다른 사람 총으로 자살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하고 물어 ‘(총 주인은) 영창 간다’고 이야기해 주었다”고 진술했다.
특조단은 자살 동기로 “괴팍한 성격을 가진 중대장 밑에서 전령 업무를 보면서 갖게 된 심적 부담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조단은 “의문사위는 노 중사의 키가 허 일병보다 22cm나 작은 데도 현장 검증 때 총이 수평으로 발사됐다는 부검 사실과 맞추기 위해 노 중사 대역을 허 일병 대역보다 키가 큰 사람으로 내세웠다”고 했다.
특조단은 “의문사위는 군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군의 특성과 당시 주변정황 등을 살피지 않고, 조사관의 짜맞추기식(式) 시나리오에 의해 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했다”고 했다.
의문사위는 이날 기자회견을 자청, 국방부의 발표를 반박하면서 재조사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정수성 특조단장은 “의문사위가 이 사건을 날조와 조작으로 일관했고, 허 일병 사건이 민주화운동과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결정난 만큼 의문사위는 이 사건을 재조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정 단장은 “의문사위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따지는 기관일 뿐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는 허 일병 사건은 의문사위에서 다루지 말았어야 했다”고 반박했다.
국방부가 당시 사건에 대해 ‘날조·조작’ 등 직설적인 표현을 써가며 의문사위를 정면 공격한 것은 의문사위 발표가 군의 신뢰에 치명타를 날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조단의 조사결과가 발표된 이후, 사건의 진상을 놓고 의문사위와 특조단 사이에 갈등이 격화됐고, 감사원이 확인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許永春·73)씨가 제1기 의문사위 결정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자 2003년 10월 의문사위는 제2기 의문사위를 구성해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을 재조사했고, 2004년 6월 “타살이 맞다”고 다시 발표했다. 결국 허 일병 유족은 의문사위가 1기 의문사위와 같이 “타살”로 발표했으나, 허 일병의 사망이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리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七友會
국방부와 의문사위가 번갈아 자살과 타살로 공방하는 가운데, 당시 중대원들은 말로 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이다. 당시 허 일병이 근무했던 3중대 출신 예비역들은 ‘칠우회(七友會)’란 모임을 만들었다. 그들은 허 일병 사망 사건 당시 중대본부 현장에 있던 일곱 사람으로, 허 일병이 자살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칠우회는 이진영(李眞榮·51·당시 보급계)씨를 총무로 노양식 중사, 오용근, 손명조, 신재영, 권오진, 안병덕씨 등으로 조직돼 의문사위의 날조와 조작에 반박하는 노력을 펼쳐왔다. 이진영 총무는 “모임의 목표는 중대본부 요원 중 유일하게 의문사위 편에서 진술했던 전 상병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동료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회원들은 전 상병이 최초 진술과는 달리 의문사위에서 “노양식 중사가 허 일병을 쏘았다”고 진술함에 따라, 국방부 특조단에 전 상병과의 대질심문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상병은 대질심문은 고사하고, 국방부 조사 자체를 피했고 그런 가운데 국방부 조사가 마무리됐다. 전 상병은 허 일병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 1심에 참고인으로 출석하지 않다가 2심 재판부가 적극적으로 구인하자 2심 법정에서는 진술했다.
기자는 전 상병을 인터뷰하기 위해 칠우회의 도움으로 그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2년 12월 6일 이진영, 손명조 상병과 함께 전북 전주시로 전 상병을 찾아갔던 일이 떠올랐다.
노 중사와 그 중대원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예전의 전우 ‘전 상병’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가장으로 훌쩍 세월을 먹은 이들에게 18년 전의 고통은 이젠 추억이 됐던 것이다.
전 상병과의 자연스런 ‘대질심문’을 기대하고 전주 완산구에 있는 ‘만화뱅크’라는 만화대여점에 들어섰다. 전 상병이 운영하는 30여 평(99㎡) 규모의 만화대여점이었다. 오후 4시, 전 상병은 갑자기 들어선 낯선 손님들을 보고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옛 중대원들이 만나는 데도 포옹이나 뜨거운 악수는 없었다. 전씨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은 복잡한 이야기 그만두고 그냥 술이나 한잔하고 올라가라”며 기자에게는 “오늘은 중대원들하고만 얘기하고 싶으니 서울로 올라가시라”고 했다.
기자가 “노 중사는 전 상병이 살인범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며 “전 상병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고 했다. 전씨가 “내가 당한 것은 그 이상이다”라고 하자, 손명조씨는 “전 상병은 본뜻과 다르게 이번 사건에 휩쓸렸던 것이다. 우리는 노 중사가 전 상병에게 소송을 건다는 것을 눌러놓고 이 자리에 온 것”이라며 의문사위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 청구소장을 내보였다. 전 상병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진영씨가 “노 중사가 고발한 것은 네가 아닌 의문사위다. 나중에 네가 고집을 부리면서 의문사위를 대변하면 법정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양쪽의 진술이 엇갈릴 때는 대질심문이라는 방법을 쓴다. 왜 국방부 특조단의 대질심문에 응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전씨는 “9대 1인 상황에서는 아무리 ‘진실’이라도 나 혼자 나서기에는 어려웠다. 난 ‘새가슴’이다”라고 했다.
기자가 다시 “아침에 허원근 일병을 본 사람들이 오용근, 이진영, 신재영씨 등 여럿이 있다”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하자, 전씨는 묵묵부답이었다. 중대원 두 사람은 예전의 순박했던 전 상병이 아니라며 안타까워했다. 전씨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검은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이진영씨가 “노 중사가 허 일병을 쏘았고, 우리가 몰랐다고 치자. 그럼 노 중사가 밤중에 혼자 허 일병을 (폐유류고까지) 끌고 나갔냐. 그럼, 본 사람은 너 하나밖에 없으니까 너는 노 중사와 공범이라는 이야기밖에 더 되냐”고 다그쳤다. 전씨가 아무런 답변을 못하자, 이진영씨는 “지난번 대구에서 만났을 때 노 중사가 울면서 널 용서한다고 했다”며 “대신 따귀만 한 대 때리고 용서한다고 했다. 서로 만나보면 무슨 갈등이 있겠냐”고 했다. 전씨가 고개를 떨구며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진영씨가 “너를 만나러 온 것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며 “우리는 너를 구하고 싶지만 판단은 전적으로 네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대원 두 사람은 이튿날 새벽 2시30분까지 10시간이 넘도록 결론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씨는 중대원들의 설득을 뿌리치고 “아침 9시경에 만나 콩나물 국밥 한 그릇이나 먹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9시경, 약속장소에 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전씨와 칠우회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기자가 이튿날 노 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 중사는 “나도 전 상병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었다”며 “어제 전 상병의 연락을 하루종일 집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베트남전에서 무공훈장 두 차례 받아
전 상병에 의해 살인범으로 몰린 노양식 중사는 최근 진통제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2002년 7월 교통사고를 당해 경추요추분리증 및 추간판탈출증이라는 중상을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최근에는 베트남전의 후유증인 목 디스크까지 악화됐고, 지방간으로 인해 침샘이 말라 3분 정도만 말하면 혀가 꼬이고 목이 타들어가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노 중사는 최근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의 2심 판결에 대해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의 발판이 마련된 것 같다”며 반겼다. 그는 2002년 의문사위 한상범(韓相範) 위원장 등 다섯 명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소송을 낸 목적은 돈도 명예도 아니다”며 “32년 군 생활의 명예와 잃어버린 부권(父權)을 되찾기 위해서다”고 했다.
노씨는 1970년 군에 입대, 32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1998년 1월 원사로 전역했다. 그는 1970년 5월 6일, 백마부대 28연대 박격포 반장(하사)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크고 작은 27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인헌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다. 귀국한 그는 1971년 3월 1일 7사단에 부임해 1998년 전역 때까지 7사단에 근무했다.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수도통합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은 뒤 전역하게 됐다.
노씨는 “중대장이 전령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해 키가 헌칠하고 잘생긴 원근이를 추천했었다”며 “중대장과 동향(同鄕)이었지만, 괴팍한 성격을 가진 중대장 밑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회식자리에서 중대장과 말다툼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노씨는 “중대장이 회식 때면 자잘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회식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며 “다만, 여덟 살 아래인 중대장의 사생활에 대해 꼭 충고하고 싶은 것이 있어 중대장 체면도 있고 해서 회식자리를 택해 말씀을 드렸더니, ‘싸가지 없는 놈, 하사관이 건방지다, 자기 일도 똑바로 못하는 놈이 왜 남의 일까지 참견하느냐’고 일방적으로 욕을 먹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제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주제넘게 말씀드려 죄송하다’고 하는데도 펄펄 뛰자, 장 중위가 제 전투복 바지를 서너 차례 잡아당겨 나가라는 신호를 했다”며 “‘죄송하게 됐다,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던 것”이라고 했다. 문을 박차고 나온 사실에 대해서도 “중대장실 문이 본디 잘 안 열려 문고리를 잡고 문짝 아래를 발로 툭 찼던 것”이라며 “중대장실이 얇은 베니어판으로 돼 있어 내부에서 야단맞는 소리를 중대원들이 말다툼 소리로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의문사위가 자신들의 기초조사를 근거로 우리를 신문해야 하는 것이 수사의 기본인데, 수사관은 처음부터 ‘허원근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황당하게 물었다”며 “내가 ‘허원근 자살 사건이요’라고 했더니, ‘자살’ 소리가 나오자마자 책상을 ‘꽝’ 치면서 왜 자살이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노씨는 “만약 내가 허 일병을 쏘았다면, 당시 조사로 고통받았던 중대원들이 나를 찾아오겠느냐”며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본 국민들은 어떻게 살인혐의가 있는 사람을 조사도 하지 않고 1998년까지 군 생활을 하게 했느냐고 하는데, 그때 정말 전화벨 소리도 싫었다”고 했다.
허원근 일병의 유족 측과 국방부는 각각 2심 판결에 불복, 상고해 대법원의 확정판결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다.
2000년 11월 출범한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는 법적 시한을 연장해 가며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는 사건에 무려 9년간이나 조직을 유지했다. 그 사이,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로 내몬 의문사위 수사관들은 훈장을 받았다.
받아쓰기식 언론과 문제투성이 의문사위가 억지와 조작으로 허 일병은 타살됐으며 군이 이 사실을 은폐했다고 주장한 지 11년. 마침내 이에 거의 종지부를 찍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그는 사건 다음 날 입대 후 첫 휴가를 나가기로 돼 있었다. 유서는 없었다. 그의 신상명세표에 특기는 배구, 취미는 바둑, 주량은 소주 1홉 정도라 적혀 있었다. 중대장의 전령(傳令)으로 근무했던 그를 동료들은 성실한 병사로 기억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허 일병의 사망 경위를 두고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사건 직후 군 수사기관은 일찌감치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유족은 이를 믿지 않았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생겨난 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을 대표적 군내(軍內) 의문사 사건으로 규정하고 재조사를 시작했다.
의문사위는 2002년 8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허 일병은 살해됐으며, 군 당국이 진실을 조작했다.” 의문사위라는 국가기관이 국방부의 조사결과를 전면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간 거듭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국방부는 거세게 반발했다. 국방부는 특별진상조사단(특조단)을 꾸려 대대적으로 재조사를 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2004년 제2기 의문사위는 “재조사 결과, 타살이 맞다”고 다시 반박했다. 법원도 각기 다르게 판결했다. 2010년 서울중앙지법(1심)은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올해 서울고법(2심)은 자살이라고 뒤집었다. 사실 관계를 따지는 사실심(事實審)의 최종 단계인 2심에서 법원은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고 최종 결론을 내린 셈이다.
서울고법, 1심 뒤집고 ‘자살’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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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8월 27일 민주당 대선후보 신분으로 의문사위를 방문, 허원근 일병 아버지(오른쪽)등 유가족들을 만나고 있다. |
강원도 육군 7사단에서 복무하던 허 일병은 1984년 4월 2일 폐유류 창고 뒤편에서 가슴과 머리에 3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군 당국은 당시 두 차례, 1999년 한 차례 조사를 벌인 뒤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02년 의문사위는 숨진 날 새벽 노양식(盧讓植) 중사가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리다 쏜 오발탄에 허 일병이 맞았고 이를 자살로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 아침에 시신을 옮겨 2발을 더 쏘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해 국방부 특조단은 자살이라고 최종 발표했다.
이에 대해 2010년 1심 재판부는 “허 일병이 타살됐고 소속 부대 등이 사실을 은폐·조작했다”며 “국가가 유족에게 9억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날 “허 일병이 M16 소총으로 좌·우측 흉부에 각 한 발씩 발사했으나 바로 사망하지 않자 비탈진 곳에 누워 왼손으로 M16 소총의 총구를 지지한 채 오른쪽 눈썹 위에 한 발을 발사해 사망했다”며 “허 일병과 신체조건이 비슷한 사람이 이 같은 발사자세를 취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스스로 M16 소총으로 여러 발을 쏴 자살한 사례도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허 일병의 시신이 옮겨지지 않은 점, 3군데 총상 모두 생존했을 당시 입은 총상이라는 의학적 소견, 타살이라고 주장한 핵심 증인의 진술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 등을 자살 근거로 꼽았다.
재판부는 “노양식 중사가 허 일병을 쏘는 것을 봤다는 이 사건의 유일한 증언은 유도신문에 의한 것으로 보여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다”며 “법의학적 소견 및 공소시효가 지난 지금까지 양심선언을 한 부대원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 등에서 자살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의문사위의 타살 발표 그대로 받아쓴 대다수 매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을 어떻게 조사해 발표했을까. 2002년 8월 20일 의문사위는 “허 일병은 타살됐으며 현장에 있던 중대원뿐 아니라 상부의 조직적 개입으로 자살사고로 조작 은폐됐다”고 밝혔다. 허 일병 유가족들은 사건 당시부터 “자살하는 사람이 M16 총으로 3발씩이나 쏠 수 있는가”, “사고 당일 휴가를 가기로 한 사람이 자살할 이유가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의문사위 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84년 4월 2일 허 일병이 근무하던 부대 안에서 간부들이 회식을 했다. 회식 중 중대장 전령이었던 허 일병은 안주를 나르는 등 술시중을 들었고, 새벽 2~4시쯤 회식을 하던 간부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술에 취한 한 하사관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집어 난동을 부리다 실수로 총이 발사됐고 허 일병은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숨졌다.
그날 새벽 4~6시 사이에 김모 중대장(대위)은 곧 이 사실을 대대에 유선으로 보고했고, 대대는 연대로 이 사실을 보고한다. 대대장이 아침 6~7시 사이에 사건이 벌어진 3중대에 와서 중대장 및 현장에 있던 간부들과 사건 대책을 논의하고 간다. 중대장은 현장에 있던 10여 명의 사병들을 하나씩 중대장실로 불러 허 일병의 피를 닦아내기 위해 물청소를 지시하는 등 할 일을 알려주고 알리바이를 조작한다.
오전 10~11시 중대원들이 허 일병 시체를 폐유류 창고로 옮긴 뒤 왼쪽 가슴과 머리에 한 발씩 더 쏴 자살로 위장했다. 중대장은 오전 10~11시 총성을 듣고 폐유류 창고에 가보니 허 일병이 숨져 있었다고 허위신고한다.>
의문사위의 중간수사 발표가 있자, 언론도 우왕좌왕했다. 대부분 매체가 허 일병이 술 취한 상관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자살로 은폐·조작된 사실이 18년 만에 밝혀졌다고 단정적인 보도를 했다.
8월 20일자 MBC TV의 <9시 뉴스데스크> 앵커는 “군 복무 중이던 사병이 술 취한 상관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을 군부대가 조직적으로 자살인 것처럼 은폐했던 사실이 18년 만에 밝혀졌습니다.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서 시체에다가 추가로 총질까지 해댔습니다”라며 ‘총질’, ‘해댔다’ 등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보도했다.
2002년 8월 20일 ‘군(軍)서 자살로 조직적 은폐’라는 다수 언론의 보도가 나간 일주일 후, 8월 28일자 《조선일보》는 ‘허 일병 부대원들, 조직적 은폐 조작은 없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의문사위 발표와 관련, 당시 사고 현장에 있었던 부대원 대부분이 이를 정면 부인해 논란이 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월간조선》도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조갑제(趙甲濟) 《월간조선》 대표는 <2002년 8월 20일 사회부 기자들은 ‘집단자살’하기로 결의했는가>라는 칼럼을 싣고, “허원근 일병 아버지의 ‘주장’을 ‘진실’로 승격시켰다”며 “이 승격에 의도가 들어갔다면 조작(造作)이 된다”고 했다.
이어 《월간조선》은 허 일병의 시신을 부검한 당시 육군과학수사연구소 군의관, 수사를 담당한 7사단 헌병대 수사계장, 의문사위와 전모 상병에 의해 살인자로 누명을 쓴 노양식 중사, 노양식 중사를 살인자로 몬 전모 상병을 인터뷰해 사건의 실체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핵심 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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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의 국방부 특조단 현장검증에서 허 일병과 키가 같은 대역병사가 총기 격발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사체의 이동여부=1심과 의문사위는 현장 사진에 출혈이 적고, 골편이나 뇌 실질(實質)이 보이지 않으므로 첫 총상 후 사체가 중대본부 막사에서 폐유류고로 이동됐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헌병대 수사기록상 허원근 일병 머리 좌전방 30cm~1m 부근에 골편이 산재해 있었고, 소대장 장모 중위의 진술을 보면, “크고 작은 대여섯 개 골편이 좌측 언덕 부위 산재(하얗고 안쪽에 살점이 붙은 손톱 크기만 한 골편)하고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흉부에 2발의 총상이 먼저 있어 이미 다량의 출혈이 있었으므로 머리의 출혈은 적었을 것(머리 총상의 사입구(射入口), 사출구(射出口)는 머리 앞쪽 또는 앞쪽 측방이며, 누운 상태여서 피가 많이 흐르지 않음)이라고 했다. 또 M16 소총의 회전력으로 인해 뇌 실질이나 혈액이 비산해 흩어졌고, 허 일병이 야전상의 등 6겹의 상의를 입고 있어 상당량의 흉부 출혈을 흡수했다고 보았다.
머리에 있는 혈액흔 방향이 일정(이동되었다면 여러 방향으로 피가 흘러 피범벅이 돼야 함)해 망인의 최종자세와 일치했고, 사체 이동 시 나타나는 끌린 흔적이 없는 점 등 사체에 이동 흔적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중대본부 막사로부터 폐유류고까지 약 50m의 굽은 소로길로 운반도구 없이는 성인 4명이 협동해도 사체 운반이 어려워 운반을 시도했을 경우, 허 일병 사체가 크게 훼손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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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29일 정수성 당시 국방부 특별진상조사단장(육군중장)이 “중대 내무반에서 노 중사의 총기오발이 있었다”는 내용의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그러나 항소심은 다수의 진술자가 의문사위 조사 시 유도신문에 의해 진술하였거나 실제 진술 내용과 다르게 조서(調書)에 기재됐다며 진술을 번복했다고 했다. 18년 전 사고의 보고시각에 대한 기억이므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게다가 참고인들은 1차와 2차 의문사위, 국방부 특조단 조사과정을 통해 유입된 정보로 ‘기억의 오염’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즉 참고인들의 진술은 법의학적 증거에 비해 증거로서의 가치가 낮다는 것이다.
예컨대 재판부는 사고 다음 날인 4월 3일 새벽 헌병대의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주요 사건 보고가 있었는데 이것과 혼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상당수의 대대 및 연대원에게 사망 보고시각이 알려진 상황에서 사망시각을 조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다수 부대원은 당일 새벽 연대와 대대에 사건보고가 있었다고 진술했다가 진술을 번복했다. 연대 인사과장 장모 소령이 사고 당시 작성한 ‘매(화)장 보고서’에 허 일병의 사망일시가 ‘1984년 4월 2일 오전 10시52분’으로 기재돼 있었고, 7사단 헌병대장이 사단장에게 총성 청취일시를 ‘사고 당일 오전 10시50분경’이라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대대 및 연대 지휘관이 허 일병 사건 사고 당일 새벽에 보고를 받고도 이를 은폐·조작하려면, 대대 및 연대뿐만 아니라 사단 헌병대, 사단장, 군단 헌병대, 육군 헌병감까지 은폐·조작에 가담시켰어야 한다는 뜻이다.
●핏자국을 씻기 위한 물청소 실시 여부=1심과 의문사위는 4월 2일 오전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핏자국을 보았고 이를 씻기 위한 물청소가 있었다고 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진술들이 다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핏자국을 보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진술자가 의문사위 조사 시 유도신문에 의해 추측을 진술하였을 뿐 사실과 다르다고 진술을 번복했다고 했다. 예컨대 조사관이 “피를 닦기 위해 내무반을 물청소하였다는데, 그렇다면 바닥이 젖어 있지 않았겠느냐”고 해 “물청소를 하였다면 젖어 있겠지요”라고 답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허 일병의 銃傷 숫자를 파악 못한 중대장
●총성을 2발만 청취하였다는 진술=의문사위는 전모 상병의 진술에 맞추기 위해 오전 11시경 2발의 총성에 초점을 맞췄다. 의문사위에서 이 사건 현장에서 총기 발사실험을 실시했다. 돼지고기에 전투복 상의와 군 야전점퍼를 씌우고 접사한 경우와 소염기를 군복으로 감싸고 총을 쏜 경우에는 다른 초소에서 총성을 듣지 못하거나 약하게 들렸다고 했다.
허 일병이 당시 6겹의 상의를 입고 있었고 오른쪽 가슴을 쏠 때는 총구를 꽉 누른 상태에서 총을 발사했기 때문에 실험에서와 같은 상황일 가능성이 커서 총성이 잘 안 들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문사위는 GOP 경계근무의 특수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GOP 경계는 일몰 후부터 일출 전까지로 모든 소초병이 주간보다 촘촘하게 초소 경계를 하게 된다. 취침시각은 오전 7시부터 12시다. 따라서 의문사위 주장처럼 새벽에 총격이 이뤄졌다면, 최전방 GOP의 근무형태와 소초 배치에 미뤄볼 때, 중대본부 인근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소초원들이 총성을 듣지 못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헌병대 조사에서 중대원 9명 모두가 오전 9시50분 무렵의 총성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탄피 3개 가운데 2개만 발견된 이유=허 일병은 발견 당시 3발의 총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오른쪽으로 누운 사체의 자세 때문에 오른쪽 가슴의 사입구를 확인하지 못하고 허 일병이 2발의 총상(머리, 왼쪽 가슴)을 입은 것으로 착각, 조사됐다. M16 소총에 남은 실탄을 확인한 결과, 12발(탄창 11발, 약실 1발=15발들이 탄창)이 확인됐다.
소총에 남은 실탄이 1발 부족하다고 판단해 실탄 부족에 따른 문책 또는 타살 혐의를 피하기 위해 중대장 지시로 실탄을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결국 헌병대에서 허 일병 사체에 깔려 있던 나머지 탄피 1발을 찾아내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당시 헌병 수사관 중 2명은 허 일병의 사체에 깔려 있던 나머지 탄피 1발을 찾았다고 진술했지만, 헌병대 기록에는 전혀 이런 사정이 기재돼 있지 않았다. 헌병대가 이 사건 사고를 자살로 조작할 생각이었다면, 탄피와 같은 핵심적인 사항을 이렇게 정리해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중대장이 총상의 숫자를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은 거꾸로 허 일병의 사체를 이동시키거나 변경한 적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허 일병의 사체는 발견 당시 그대로 헌병대에 인계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중대장 김모 대위는 사건 은폐·조작을 한 혐의로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 기소의견으로 송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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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과학수사연구소 법의과장으로 허원근 일병을 부검했던 박의우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
그러나 항소심은 노용면을 제외한 거의 모든 법의학자가 3군데 총상 모두에 생활반응이 있으므로 3발 모두 생존 시 총상이라고 한 사실을 주목했다. 즉 벌어진 폐, 조직에 스며든 출혈, 왼손등 발적(發赤) 등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첫 총상이 흉부이든 머리이든 7~8시간 동안 생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당시 외부 온도 영하 5도로 체감온도는 영하 9도), 허 일병에 대해 평소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중대원들이 총상을 입은 허 일병을 의무대로 호송할 생각은 하지 않고 유기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왼쪽 및 오른쪽 흉부 총창 사입구의 색깔 차이의 원인에 대하여=유족들은 총상이 발생한 시간적 차이로 인한 건조 상태의 차이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양쪽 흉부의 사입구 형태의 차이, 야전 상의의 화약흔의 크기와 형태, 옷이 찢어진 모양의 차이는 총구와 사체와의 거리 또는 발사 각도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고, 이로 인해 색깔 차이가 생겼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M16 소총으로 흉부 2발, 머리 1발을 쏘아 자살할 수 있는지 여부=허 일병과 신체조건(신장 181cm)이 비슷한 사람이 M16 소총으로 당시 상황 재연 시 큰 어려움이 없었다. 1995년 10월 육군 위모 소위가 K-2 소총으로 복부 2발, 머리 1발을 쏘아서 자살한 사례가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 외 M16 소총으로 하복부 6발, 턱밑 1발, 입 1발 총 8발을 쏘아 자살한 사례, 복부에 1발, 대퇴부에 5발 쏘아 자살한 사례 등이 있다고 했다.
법의학자 대부분은 흉부 총상 2발은 폐를 관통했으나 심장을 관통하지 않아 치명상이 아니며, 그 자체로 의식을 잃는 것은 아니어서 총상 후 다시 머리에 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총상의 발생은 흉부에서 두부의 순서라는 것이다. 부검사진의 사출구의 크기 및 흉부 내의 근육 출혈량 등을 볼 때 바로 의식을 잃거나 행동능력을 상실하였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銃擊은 목격했는데, 銃聲은 듣지 못했다?
●핵심 증인 진술의 신빙성 여부=의문사위는 전모 상병의 진술(노양식 중사가 술을 먹고 소란을 피우던 중 발사된 총알이 허원근 일병의 가슴에 맞았다)의 신빙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전모 상병은 의문사위 조사결과와 허 일병 유족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진술을 한 유일한 인물이다.
지금껏 13명의 중대본부원과 100여 명의 참고인 가운데 허 일병의 사망 경위에 대해 구체적 진술을 한 사람은 전모 상병뿐이다. 그는 의문사위 조사에 대한 보상으로 의문사위로부터 3000만원을 수령했다. 1심 재판부는 전모 상병의 진술은 채택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렇게 판단했다. 핵심 진술자인 전모 상병은 의문사위 1회 진술 시 “허 일병을 4월 2일 오전에 목격했고, 그 후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허 일병이 죽었다고 한 것 이외에는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전모 상병은 13회에 걸친 의문사위의 집중적인 진술조사에 10회까지 오발사고를 부인하다 11회부터 의문사위 조사관이 다른 사람의 진술을 들려주거나 자신의 추론을 들려주면 “듣고 보니 그럴 것 같다”고 하면서 진술을 조금씩 추가하다가 12회째 소위 ‘양심선언’을 했다.
‘사건 당일 새벽 중대본부 중대장실 안에서 술을 마시던 노○○ 중사가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중대원들을 집합시키고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노○○ 중사가 들고 있던 M16 소총에서 총알이 발사됐고, 허 일병이 가슴 부분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누군가 허 일병의 사체를 중대본부 막사 밖으로 옮겼다.’
그러나 전모 상병은 심지어 총소리가 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경위사실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다. 전형적인 유도신문에 의한 진술로서 신빙성이 의심되고, 전모 상병을 제외한 모든 중대원은 새벽에 총기 사고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허 일병의 피를 닦기 위해 물청소를 했다는 진술도 국방부 특조단 조사에서 모두 부인됐다. 중대원들은 “허 일병 사고로 상급기관의 간부들이 방문할 것을 대비해 중대본부 내부 양동이에 있던 물을 먼지 방지 차원에서 바닥에 뿌린 것에 불과하다”고 증언했다.
다른 중대원들이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 전원 ‘진실 반응’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형사상 공소시효, 손해배상의 소멸시효가 휠씬 지난 30년 후인 지금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판단했다.
허 일병의 최초 총격 부위도 ‘오락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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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사단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특조단 수사관이 군복을 입힌 돼지 사체에 M16 소총을 발사해 소음수치를 측정하고 있다. |
즉 전모 상병은 허 일병의 총상이 최초 가슴(새벽)→머리 및 가슴(오전)이라고 진술했으나, 1심은 머리(새벽)→양쪽 가슴(오전)으로 총상 순서를 자의적으로 변경하고, 최초 총격 시점도 당일 새벽 2시30분~3시에서 새벽 6시경으로 최대한 늦췄다. 이것은 재판부가 생활반응에 대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취한 고려로 보인다.
그러나 항소심은 어떤 경우이든 법의학적 소견(3발 모두 접사여서 타살이기 어려움, 왼손의 파열상 및 발적흔은 총구를 엄지와 검지로 지지한 채 발사한 흔적으로 보임, 3발 모두 생활반응이 있어 총상의 시간적 차이 설명 안 됨 등)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미국 법의학자 노여수 및 한국 법의학자 대부분이 자살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경계근무인원도 낮보다 많고 소음도 적은 새벽에 발생한 총성임에도 이를 청취한 부대원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자살로 조작할 의도였다면 새벽에 자살한 것으로 조작하는 것이 가장 간편한데, 굳이 오전 10시50분경에 총 2발을 더 발사해 타살의 의혹만 가중시킬 이유가 없었다고 보았다.
즉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2발의 총상을 더 입히는 것은 1발의 총상보다 오히려 타살의 의심을 더 받게 될 것이다. 특히 원심 결과와 같이 ‘머리’에 먼저 총상을 입었다고 가정할 경우, 가슴 부위 2발의 총상은 더욱 확실한 타살 혐의점이 될 것이다.
타살이나 사고사라면 평소 허원근 일병과 관계가 좋았던 부대원들 중 전모 상병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양심선언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4월 2일 아침에 허 일병을 목격했다는 진술들이 구체적이며,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다고 판단했다.
軍 수사기관의 부실수사는 인정
서울고법 제9민사부는 이 사건을 ‘자살’이라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또 “사망원인이 자살인 이상 부대원, 군 수사기관, 특조단의 은폐·조작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며 “단, 원고들의 은폐·조작 주장에는 군 수사기관의 부실수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포함돼 있다고 선해해 그 부분을 판단했다”고 했다.
서울고법은 “외부와 엄격히 격리되어 있는 군대 내 사고에 대하여는 군 수사기관의 실체적 진실 규명 의무는 일반 수사기관보다 더 높다”며 “피해자의 유족들에게는 철저한 조사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서울고법은 또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헌병대 수사는 현저히 부실하게 이뤄졌다”며 “총상이 3군데이므로 탄피도 3개, 총성도 3번인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탄피와 총성이 2개씩밖에 없음에도 이에 대한 조사가 미진하고 추측만으로 조사를 마무리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헌병대 수사기록에 골편에 대한 기재가 있으나 현장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며 “골편, 핏자국에 대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당시 부대원들 중 M16 소총을 3발 쏘아 자살할 수 있는지 의심하면서 타살 의혹을 가진 사람이 많았으나 자세 실연(實演), 법의학자에 대한 자문 등 의혹을 풀기 위한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재판장인 강민구(姜玟求) 부장판사는 “군대 내 사고의 특징, 군대에 가족을 보낸 유족의 고통, 당시 헌병대의 현저히 부실한 수사가 이 사건을 30년 동안의 의문사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이란 점 등을 고려해 위자료를 산정했다”고 했다.
강 부장판사는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은 일체의 선입견이나 이념개입을 배제하고 증거재판주의에 입각해 판단했다”며 “오늘 판결로 고인의 영면과 동고동락한 부대원 모두의 영혼의 안식을 찾기를 희망하고, 유족들도 심적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감히 권유드린다”고 했다.
국방부 특조단 현장 검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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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28일 의문사위 김준곤 상임위원이 종로구 수송동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방부의 허원근 일병 ‘자살’ 결론에 신뢰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
당시 기자를 포함해 노양식·오용근·손명조·이진영·권오진·안병덕씨 등 당시 중대원 6명과 보도진 40여 명이 참석했다. 헬기로 서울 용산기지를 출발한 취재진은 45분 정도 비행해 잔설(殘雪)이 뒤덮인 화천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군용 지프에 나눠 탄 일행은 험한 산길을 따라 4km 가량을 달려 3중대 본부 앞에 있는 폐유류고에 내렸다.
특조단 정수성 단장(육군 중장)은 “당시 의문사위 조사는 노 중사와 목격자인 권모씨가 입회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조사관의 추리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며 “오늘 검증은 자살이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의문사위는 허 일병이 사건 당일 새벽 내무반에서 노 중사가 쏜 총탄에 맞았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내무반과 초소에 근무했던 허 일병 동료 부대원들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해 사건 당시 총기 발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의문사위는 “내무반 주위에 방호벽이 있는 상황에서 밀착사격을 했다면 총소리가 작아 내무반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안 들릴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특조단은 13평(43㎡) 남짓한 내무반에서 군복을 입힌 돼지 사체에 M16 소총을 밀착해 발사했다. “빵~”하는 폭음과 함께 귀가 멍할 정도였다. 탄피가 2m 정도 튀었고 화약냄새가 진동했다. 탄이 허 일병을 관통했다는데, 중대본부 내부에는 탄착점(彈着點)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만일 노양식 중사가 허 일병을 내무반에서 총기오발로 쏘았다면 자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못 들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조단 수사관이 측정한 소음수치는 91.3db이었다. 순간적으로 전차가 굉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소리라고 했다. 중대본부 막사 밖에서 내무반 내 총성을 들어보니 50m 정도 떨어진 초소에서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특조단은 이를 근거로 “최전방에서, 그것도 새벽에 총기사고가 있었다면 당장 총성이 보고돼 사단급 이상 수준에서 비상이 걸렸을 것”이라며 의문사위 발표를 부정했다. 동료 부대원 손명조씨는 “이렇게 큰소리가 나는데도 어떻게 부대원 전체가 총소리를 못 들을 수가 있느냐”며 “의문사위가 부대원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정황을 조작했다”고 했다.
총상 색깔이 차이 나는 까닭
당시 현장검증에서 허 일병의 자살 상황을 연출한 병사는 허 일병과 신체조건(키 181cm)이 같았다. 왼손으로 M16 소총의 상단부를 잡고 오른손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가슴에 두 발을 쏘고, 극심한 통증으로 몸이 견디기 어려워지자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총은 싸리나무 울타리에 끼워져 있었다), 왼손으로 총열의 가스관을 잡고 오른손으로 두부(頭部)를 향해 격발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특조단은 의문사위가 타살 의혹으로 주장한 양쪽 가슴의 총상 색깔 차이에 대해서도 실험을 했다. 의문사위는 오른쪽 가슴 총상 색깔이 검게 나타났고, 왼쪽 가슴 총상 색깔이 붉게 나타난 것은 “총격 시간의 차이”라고 주장해 왔다.
특조단 수사관이 군복 입힌 돼지에 접사(接射), 근접사(近接射) 두 가지 방법으로 총을 쏘았다. 접사는 군복이 지름 3cm 가량의 십자형으로 찢어지며 총상 부위가 검게 나타났다. 근접사는 이와는 달리 총상 부위가 파열되며 붉은색을 띠었다.
특조단 수사관은 “허 일병 가슴의 두 군데 총상 색깔이 다른 것은 의복과의 밀착 여부에 따라 의복 사이로 매연이나 화약이 빠져나가는 양이 다르기 때문이지, 피격된 시간 차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황적준(黃迪駿) 전 고려대 의대 학장은 2002년 11월 25일 국방회관에서 열린 ‘법의학 공개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총창을 살펴볼 때 타살보다 자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생존시간과 활동을 볼 때 새벽 2~4시에 한 발, 그리고 7~8시간 뒤에 다시 한 발을 맞았다는 것은 모순이다. 당시 날씨는 영하 5도였고, 체감온도는 이보다 더 떨어진 영하 9도였다. 초탄을 한 방 맞고 8시간 정도 밖에 있었다면 아마 동사(凍死)했을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 가슴의 총상 색깔 변화도 시간 차가 많이 난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허원근 일병의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의 파열상이 방어흔인가 지지흔인가 여부도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가르는 핵심 쟁점이다. 국방부 조사본부 홍성혁(洪成赫) 팀장은 “의문사위는 누군가 허 일병의 머리와 가슴에 총구를 밀착하자 총구를 감싸쥔 상태에서 나타난 ‘방어흔’이라고 주장했다”며 “그러나 총구를 감싸쥐었을 경우, 파열상은 손바닥 안쪽에 나야 하지만 허 일병은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파열이 발생했고, 이는 총구를 엄지와 검지 사이 V자 홈으로 지지한 ‘지지흔’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의문사위, 헌병대 최초 조사기록 보지 않아
사건 당일 오후 1시20분경 식사를 가지러 가다가 허 일병의 시체를 발견한 권오진, 안병덕씨 두 사람이 사망 현장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대본부에서 나오면 당시는 오솔길이었습니다. 모퉁이를 도는데 허 일병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허 일병이 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철모는 안 보였고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머리 중간 쪽이 뻥 뚫려 있어 섬뜩했습니다. 무서워서 가까이 못 가고 5m 전방까지 가서 보다가, 놀라서 밥을 타러 가던 밥통도 버리고 중대본부로 뛰어올라갔습니다.
중대본부에는 신재영, 전모 상병이 있었습니다. 전 상병이 ‘야, 인마. 오늘이 만우절도 아닌 4월 2일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얼굴이 장난스런 표정이 아니니까 ‘거짓말이면 혼난다’면서 두 사람이 뛰어내려 갔죠. 신재영 상병이 허 일병의 명찰을 확인하고 허 일병임을 확인했습니다. 허 일병은 생각보다 피는 많이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용근 병장, 이진영 상병, 신재영 상병, 이모 하사, 전모 상병(당시 계급) 등은 사건 당일 아침 허 일병을 본 목격자들이다. 아침에 허 일병을 본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새벽 2시경 노양식 중사의 오발로 허 일병이 죽었다는 의문사위 발표를 부인하는 결정적인 증거다.
특히 전모 상병이 1984년 4월 4일 헌병대에서 작성한 진술조서(237~238쪽)를 보면 허 일병이 아침까지 생존했던 사실이 분명하게 적혀 있다.
<본인은 소속대 1·3종 계원으로 근무하는 자로서 당일 1984년 4월 2일 오전 6시10분경 기상하여 막사 옆 10m 정도 떨어진 공터에서 병장 오○○의 인솔 아래 81mm 관측하사 이○○, 이병 허원근(일병의 誤記임), 81mm 관측병 상병 안○○, 상병 전○○, 이병 권○○ 등이 모여서 오전 6시30분까지 일조점호 행사를 취했다.
점호 후 병장 오○○, 상병 손○○, 이병 권○○, 이병 허원근은 조식 및 경유를 운반하러 단독군장으로 오전 6시35분경 16소초로 이동했다.… 오전 9시30분 중대장은 16소초장과 이○○을 대동하고 순찰을 출발했다.… 허원근은 뚜렷한 할 일이 없었던지 평소하던 대로 행정반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몇 시인가는 모르겠지만 허원근이가 교환대 옆 병기대 앞에 엉거주춤 서있길래 “왜 휴가복 빨러 안 가냐” 물었더니 아무 대꾸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게 마지막 본 것 같습니다.>
다음 날 휴가 출발을 알고 있었던 이진영 상병은 허 일병 대신 중대장과 순찰동행을 한 사람이다. 그는 허 일병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중대장이 순찰 나가는데 전○○ 상병이 일어나 인사를 했습니다. 중대장이 철모를 쓰려고 하는데 턱끈이 낡아 지적을 받았어요. ‘너는 보급병이면서 중대장 턱끈도 제대로 못 갖추느냐’면서 중대장이 자신의 철모로 내 철모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허 일병에게 ‘넌 전령이면서 이런 것도 못 하냐’며 야단을 치고는 순찰을 나갔습니다. 내가 철모로 맞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당시 허 일병 사망 사건을 수사했던 이해교(李海敎) 당시 헌병대 수사계장은 “허 일병 사망원인이 타살이라는 의문사위 주장은 한마디로 소설 같은 얘기”라며 “수사 원칙상 몸에 총알을 3발이나 맞는 드문 사건을 접하고 처음에 타살로 간주하고 수사에 착수했으나, 별다른 타살 흔적을 찾지 못해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는 “시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의문사위 주장대로 사망시각이 사건 당일 새벽 2~4시라면, 제가 현장에 오후 4시에 도착했으니 12시간쯤 지났을 때인데 허 일병의 몸은 강직(强直)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고 시반(屍斑) 현상(시신을 만질 때 생기는 자줏빛 얼룩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왜 의문사위가 헌병대 수사관들의 보고서를 못 믿고 일부 중대원들의 진술만 갖고 이러쿵저러쿵 했는지 모르겠다”며 “당시 의문사위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18년 전의 현장 도착 시각과 사건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사건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헌병대가 사단 차원의 5부 합동조사(감찰, 법무, 인사, 의무, 헌병)가 이뤄져 헌병대가 독자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헌병대가 사건을 은폐·조작하려 했다면 굳이 중대장의 사체 발견시각, 탄환 관련 조작을 밝힐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국방부 특조단, ‘날조·조작’이란 용어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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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6일 전주시 완산구에서 만난 의문사위의 핵심 증인 전모 상병(가운데). 왼쪽은 손명조 상병(중대본부 병기계), 오른쪽은 이진영 상병(보급계). |
당시 정수성 단장은 “의문사위 발표와 달리, 사건 당일 오전 2~4시 사이 중대본부 내 총기오발 사건이 없었으며, 당일 노양식 중사를 포함한 모든 중대원의 알리바이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부검의 박의우(朴宜雨) 건국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1984년 4월 4일 7사단 보급수송 근무대에서 허 일병을 부검했다. 박 교수는 소견서에서 “총상 주변에 남은 그을린 흔적과 화약 성분으로 보아 허 일병이 총을 거의 몸에 밀착시킨 상태에 발사(근접사)된 총탄에 의해 숨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치명상은 두부 관통상이었다”면서 “가슴을 관통한 2발의 총탄은 폐와 간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 치명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부검기록에는 허 일병이 총을 맞은 가슴 두 곳과 머리 등 세 곳 모두에서 근육이 위축되는 ‘생활반응’이 나왔다고 돼 있다. 허 일병은 마지막 총에 머리를 맞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의문사위 발표대로라면, 우측 가슴에 첫 발을 맞은 허일병은 그 후 6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 단순한 사고사를 자살 사건으로 은폐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을 했다는 결론이 된다.
국방부 특조단은 “현장에서 회수된 세 개의 탄피는 모두 허 일병 총에서 나온 것으로 판명됐다”며 “이는 노 중사가 자신의 총으로 허 일병을 쐈다는 의문사위 결론이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논란의 초점이 됐던 3발을 쏴 자살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첫 2발이 간과 허파를 손상시켰지만 치명상이 아니었고, 죽으려고 마음 먹으면 반복적으로 끝까지 결행하는 자살자의 심리상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특조단 조사에서는 허 일병의 자살을 추정할 만한 새로운 진술도 확보됐다. 중대원 신재영씨는 “자살하기 며칠 전, 함께 식사를 추진하던 허 일병이 ‘다른 사람 총으로 자살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하고 물어 ‘(총 주인은) 영창 간다’고 이야기해 주었다”고 진술했다.
특조단은 자살 동기로 “괴팍한 성격을 가진 중대장 밑에서 전령 업무를 보면서 갖게 된 심적 부담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조단은 “의문사위는 노 중사의 키가 허 일병보다 22cm나 작은 데도 현장 검증 때 총이 수평으로 발사됐다는 부검 사실과 맞추기 위해 노 중사 대역을 허 일병 대역보다 키가 큰 사람으로 내세웠다”고 했다.
특조단은 “의문사위는 군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군의 특성과 당시 주변정황 등을 살피지 않고, 조사관의 짜맞추기식(式) 시나리오에 의해 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했다”고 했다.
의문사위는 이날 기자회견을 자청, 국방부의 발표를 반박하면서 재조사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정수성 특조단장은 “의문사위가 이 사건을 날조와 조작으로 일관했고, 허 일병 사건이 민주화운동과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결정난 만큼 의문사위는 이 사건을 재조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정 단장은 “의문사위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따지는 기관일 뿐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는 허 일병 사건은 의문사위에서 다루지 말았어야 했다”고 반박했다.
국방부가 당시 사건에 대해 ‘날조·조작’ 등 직설적인 표현을 써가며 의문사위를 정면 공격한 것은 의문사위 발표가 군의 신뢰에 치명타를 날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조단의 조사결과가 발표된 이후, 사건의 진상을 놓고 의문사위와 특조단 사이에 갈등이 격화됐고, 감사원이 확인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許永春·73)씨가 제1기 의문사위 결정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자 2003년 10월 의문사위는 제2기 의문사위를 구성해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을 재조사했고, 2004년 6월 “타살이 맞다”고 다시 발표했다. 결국 허 일병 유족은 의문사위가 1기 의문사위와 같이 “타살”로 발표했으나, 허 일병의 사망이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리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七友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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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월간조선》과 인터뷰하고 있는 노양식 중사. |
칠우회는 이진영(李眞榮·51·당시 보급계)씨를 총무로 노양식 중사, 오용근, 손명조, 신재영, 권오진, 안병덕씨 등으로 조직돼 의문사위의 날조와 조작에 반박하는 노력을 펼쳐왔다. 이진영 총무는 “모임의 목표는 중대본부 요원 중 유일하게 의문사위 편에서 진술했던 전 상병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동료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회원들은 전 상병이 최초 진술과는 달리 의문사위에서 “노양식 중사가 허 일병을 쏘았다”고 진술함에 따라, 국방부 특조단에 전 상병과의 대질심문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상병은 대질심문은 고사하고, 국방부 조사 자체를 피했고 그런 가운데 국방부 조사가 마무리됐다. 전 상병은 허 일병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 1심에 참고인으로 출석하지 않다가 2심 재판부가 적극적으로 구인하자 2심 법정에서는 진술했다.
기자는 전 상병을 인터뷰하기 위해 칠우회의 도움으로 그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2년 12월 6일 이진영, 손명조 상병과 함께 전북 전주시로 전 상병을 찾아갔던 일이 떠올랐다.
노 중사와 그 중대원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예전의 전우 ‘전 상병’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가장으로 훌쩍 세월을 먹은 이들에게 18년 전의 고통은 이젠 추억이 됐던 것이다.
전 상병과의 자연스런 ‘대질심문’을 기대하고 전주 완산구에 있는 ‘만화뱅크’라는 만화대여점에 들어섰다. 전 상병이 운영하는 30여 평(99㎡) 규모의 만화대여점이었다. 오후 4시, 전 상병은 갑자기 들어선 낯선 손님들을 보고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옛 중대원들이 만나는 데도 포옹이나 뜨거운 악수는 없었다. 전씨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은 복잡한 이야기 그만두고 그냥 술이나 한잔하고 올라가라”며 기자에게는 “오늘은 중대원들하고만 얘기하고 싶으니 서울로 올라가시라”고 했다.
기자가 “노 중사는 전 상병이 살인범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며 “전 상병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고 했다. 전씨가 “내가 당한 것은 그 이상이다”라고 하자, 손명조씨는 “전 상병은 본뜻과 다르게 이번 사건에 휩쓸렸던 것이다. 우리는 노 중사가 전 상병에게 소송을 건다는 것을 눌러놓고 이 자리에 온 것”이라며 의문사위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 청구소장을 내보였다. 전 상병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진영씨가 “노 중사가 고발한 것은 네가 아닌 의문사위다. 나중에 네가 고집을 부리면서 의문사위를 대변하면 법정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양쪽의 진술이 엇갈릴 때는 대질심문이라는 방법을 쓴다. 왜 국방부 특조단의 대질심문에 응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전씨는 “9대 1인 상황에서는 아무리 ‘진실’이라도 나 혼자 나서기에는 어려웠다. 난 ‘새가슴’이다”라고 했다.
기자가 다시 “아침에 허원근 일병을 본 사람들이 오용근, 이진영, 신재영씨 등 여럿이 있다”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하자, 전씨는 묵묵부답이었다. 중대원 두 사람은 예전의 순박했던 전 상병이 아니라며 안타까워했다. 전씨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검은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이진영씨가 “노 중사가 허 일병을 쏘았고, 우리가 몰랐다고 치자. 그럼 노 중사가 밤중에 혼자 허 일병을 (폐유류고까지) 끌고 나갔냐. 그럼, 본 사람은 너 하나밖에 없으니까 너는 노 중사와 공범이라는 이야기밖에 더 되냐”고 다그쳤다. 전씨가 아무런 답변을 못하자, 이진영씨는 “지난번 대구에서 만났을 때 노 중사가 울면서 널 용서한다고 했다”며 “대신 따귀만 한 대 때리고 용서한다고 했다. 서로 만나보면 무슨 갈등이 있겠냐”고 했다. 전씨가 고개를 떨구며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진영씨가 “너를 만나러 온 것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며 “우리는 너를 구하고 싶지만 판단은 전적으로 네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대원 두 사람은 이튿날 새벽 2시30분까지 10시간이 넘도록 결론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씨는 중대원들의 설득을 뿌리치고 “아침 9시경에 만나 콩나물 국밥 한 그릇이나 먹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9시경, 약속장소에 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전씨와 칠우회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기자가 이튿날 노 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 중사는 “나도 전 상병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었다”며 “어제 전 상병의 연락을 하루종일 집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베트남전에서 무공훈장 두 차례 받아
전 상병에 의해 살인범으로 몰린 노양식 중사는 최근 진통제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2002년 7월 교통사고를 당해 경추요추분리증 및 추간판탈출증이라는 중상을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최근에는 베트남전의 후유증인 목 디스크까지 악화됐고, 지방간으로 인해 침샘이 말라 3분 정도만 말하면 혀가 꼬이고 목이 타들어가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노 중사는 최근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의 2심 판결에 대해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의 발판이 마련된 것 같다”며 반겼다. 그는 2002년 의문사위 한상범(韓相範) 위원장 등 다섯 명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소송을 낸 목적은 돈도 명예도 아니다”며 “32년 군 생활의 명예와 잃어버린 부권(父權)을 되찾기 위해서다”고 했다.
노씨는 1970년 군에 입대, 32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1998년 1월 원사로 전역했다. 그는 1970년 5월 6일, 백마부대 28연대 박격포 반장(하사)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크고 작은 27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인헌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다. 귀국한 그는 1971년 3월 1일 7사단에 부임해 1998년 전역 때까지 7사단에 근무했다.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수도통합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은 뒤 전역하게 됐다.
노씨는 “중대장이 전령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해 키가 헌칠하고 잘생긴 원근이를 추천했었다”며 “중대장과 동향(同鄕)이었지만, 괴팍한 성격을 가진 중대장 밑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회식자리에서 중대장과 말다툼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노씨는 “중대장이 회식 때면 자잘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회식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며 “다만, 여덟 살 아래인 중대장의 사생활에 대해 꼭 충고하고 싶은 것이 있어 중대장 체면도 있고 해서 회식자리를 택해 말씀을 드렸더니, ‘싸가지 없는 놈, 하사관이 건방지다, 자기 일도 똑바로 못하는 놈이 왜 남의 일까지 참견하느냐’고 일방적으로 욕을 먹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제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주제넘게 말씀드려 죄송하다’고 하는데도 펄펄 뛰자, 장 중위가 제 전투복 바지를 서너 차례 잡아당겨 나가라는 신호를 했다”며 “‘죄송하게 됐다,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던 것”이라고 했다. 문을 박차고 나온 사실에 대해서도 “중대장실 문이 본디 잘 안 열려 문고리를 잡고 문짝 아래를 발로 툭 찼던 것”이라며 “중대장실이 얇은 베니어판으로 돼 있어 내부에서 야단맞는 소리를 중대원들이 말다툼 소리로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의문사위가 자신들의 기초조사를 근거로 우리를 신문해야 하는 것이 수사의 기본인데, 수사관은 처음부터 ‘허원근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황당하게 물었다”며 “내가 ‘허원근 자살 사건이요’라고 했더니, ‘자살’ 소리가 나오자마자 책상을 ‘꽝’ 치면서 왜 자살이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노씨는 “만약 내가 허 일병을 쏘았다면, 당시 조사로 고통받았던 중대원들이 나를 찾아오겠느냐”며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본 국민들은 어떻게 살인혐의가 있는 사람을 조사도 하지 않고 1998년까지 군 생활을 하게 했느냐고 하는데, 그때 정말 전화벨 소리도 싫었다”고 했다.
허원근 일병의 유족 측과 국방부는 각각 2심 판결에 불복, 상고해 대법원의 확정판결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다.
2000년 11월 출범한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는 법적 시한을 연장해 가며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는 사건에 무려 9년간이나 조직을 유지했다. 그 사이,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로 내몬 의문사위 수사관들은 훈장을 받았다.
받아쓰기식 언론과 문제투성이 의문사위가 억지와 조작으로 허 일병은 타살됐으며 군이 이 사실을 은폐했다고 주장한 지 11년. 마침내 이에 거의 종지부를 찍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