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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책으로 세상 읽기

해리 J. 마이하퍼의 《허드슨강에서 압록강까지》

“기록되지 않으면 잊히고, 그 희생을 감사히 여기지 않을 것”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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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대장으로 한국전 치른 웨스트포인트 1949년도 졸업생들의 이야기
⊙ 1949년도 졸업생 중 17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하고, 8명이 실종(1951년 6월18일자 《뉴스위크》)
⊙ “이 젊은이들의 생명이 이 보잘것없는 한국이란 나라를 위해 바칠 만한 것이었다고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 “남한은 번영하는 동맹국이 되었으며 추하고 빈곤한 독재국인 북한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마이하퍼)
  “독일 육사(陸士)는 군(軍)의 리더들을 길러내는 곳이고, 미국 육사는 국가·사회의 리더들을 길러내는 곳이다.”
 
해리 J. 마이하퍼
  독일 육사에서 공부한 한 예비역 장성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미국 육사를 흔히 웨스트포인트라고 하는데, 이는 육사가 뉴욕주 허드슨강 변 웨스트포인트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해리 J. 마이하퍼(Harry J. Maihafer)의 《허드슨강에서 압록강까지》(법문사, 2010년 펴냄. 원제 From the Hudson to the Yalu; West Point ’49 in the Korean War)는 그 부제(副題)에서 보듯이 6·25전쟁에 참전한 웨스트포인트 1949년도 졸업생들의 이야기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지상전(地上戰)에서 가장 큰 희생자를 내는 계급이 소위(少尉)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들이 최전선에서 부하들을 지휘해야 하는 일선 소대장이기 때문이다. 웨스트포인트 1949년도 졸업생들은 바로 6·25전쟁 초기 1년여 동안 미 육군부대의 소대장을 맡았던 이들이다. 이들이 4년간의 사관학교 생활을 마치고 임관한 뒤 병과(兵科)학교 등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할 무렵 6·25가 터졌다.
 
 
  웨스트포인트 1949년도 졸업생
 
웨스트포인트 1949년도 졸업생들의 입교 모습과 1949년도 졸업생들의 엠블럼. 사진=트위터(웨스트포인트)
  1949년도 졸업생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던 1945년 7월 웨스트포인트에 입교했다. 입교 인원은 1200여 명에 달했지만 혹독한 사관학교 과정을 마치고 임관한 사람은 절반이 조금 안 되는 574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다. 더그 부시 같은 사람은 병사로 입대해서 혁혁한 무공(武功)을 세우고 중위까지 승진했지만, 웨스트포인트에 입교해 4년간의 생도 생활을 마친 후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후일 공군으로 전군(轉軍),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戰死)했다. 저자 마이하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로 참전, 부사관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 소위였다는 것은 그들이 새파란 청춘이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웨스트포인트 1949년도 졸업생 가운데 상당수는 사랑하는 애인이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아내, 갓 태어나거나 태중(胎中)의 아이를 놓아두고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한국으로 향해야 했고, 목숨을 던졌다. 예컨대 먼로 매그루더 소위는 미국을 떠나기 불과 열흘 전인 1950년 6월 결혼했지만, 낙동강 방어전의 와중에 대구 북쪽의 한 고지에서 전사했다. 그는 ‘장군의 아들’이었다. 저자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참전했다.
 
  저자는 부대 대항 테니스 경기에 출전했다가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주일미군으로 배속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육군 중령 한 사람은 그에게 한국전쟁에 투입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 중령은 “웨스트포인트 출신 소위들을 전투에 내보낸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라면서 “자네들은 소대장쯤으로 쓰기에는 너무 큰 인재들”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네는 ‘푹신푹신’ 안락한 본부 일이나 하게 될 것”이라던 그 중령의 장담과는 달리 공항에서 울고 있는 아내를 뒤로하고 미국을 떠난 저자는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투입됐다.
 
 
  기갑장교에서 보병소대장으로
 
  저자는 영산(경남 창녕군의 일부)에 있는 제24사단(대전 인근에서 북한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고,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북한군의 포로가 된 부대) 78중전차대대에 배속됐다. 하지만 이 부대에는 전차가 없었다. 결국 원래 기갑장교였던 저자는 제21보병연대의 보병 소대장이 되어 낙동강 방어전을 치렀다. 인천상륙작전 후에는 잔적(殘敵)들을 소탕하면서 북진(北進), 압록강까지 갔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두 차례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몇 달은 부관장교로 근무하다가 1년 만에 귀국했다.
 
  저자와 그의 동기들이 치러야 했던 전쟁 이야기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같은 전쟁 시리즈물로 만들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흥미롭다. 생사(生死)가 엇갈리는 순간에 비범한 희생정신을 발휘해 동료와 부하들을 구하고 산화(散華)하거나, 부상당해 쓰러진 부하를 구하기 위해 참호 밖으로 나갔다가 전사한 지휘관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시리게 한다.
 

  반면에 무기력한 지휘로 부하들의 사기를 꺾거나 부하들을 사지(死地)로 내보내면서도 책임을 면피(免避)할 궁리부터 하는 졸렬한 지휘관도 등장한다. ‘즉각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사람들이 지옥까지 따라갈 장교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교가 있는가 하면,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전혀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아주 분명한’ 장교도 나온다.
 
  낙동강 변의 진흙탕이나 참호 속에서 싸우다가 어느 곳에서 전선이 뚫렸다고 하면 허겁지겁 달려가거나 중공군에게 쫓기면서 혹한 속에서 사투(死鬪)를 벌이는 병사들의 모습은 참 안타깝다. 미소를 짓게 하거나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에피소드들도 나오지만, 책의 전반적인 색채는 회색빛이다.
 
 
  출산 다음 날 산을 타고 피란길 오른 산모
 
카투사와 마이하퍼. 사진=《허드슨강에서 압록강까지》
  한국인이나 한국군에 대한 서술은 그리 많지 않다.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징집되어 일본으로 보내져 단기간의 교육을 받은 후 미군부대에 배속되었으나 영어는 한두 마디 떠듬거릴 뿐이고 전투가 벌어지면 도망치기에 급급한 카투사, 중공군의 공세가 있을 때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바람에 미군을 위기에 빠뜨리는 한국군 사단 이야기들을 보면 민망하다. 저자는 “많은 수의 중공군에게 공격을 받을 때마다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했던 남한군들은 대개 아무런 경고 없이 무너졌다”고 개탄한다.
 
  한국인의 강인함을 보여준 것은 군인들보다는 오히려 민간인들이었다. 1951년 1월 후퇴의 와중에 저자는 피란민들이 모인 방에서 한 임신부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것을 목격했다. 저자는 군의관과 신부를 데리고 와서 도와주려고 하지만 “남자들은 가!”라는 산파(産婆)의 호통에 쌀자루만 건네주고 쫓겨났다. 그 산모의 일이 못내 마음에 걸린 저자는 다음 날 부하에게 그들에 대해 물었다. 부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 못 들으셨습니까, 중위님? 그 마을 주민들 모두가 새벽녘에 길을 나섰습니다. 새로 엄마가 된 여성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녀는 아기를 등에 업고 나머지 무리와 함께 산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 씩씩한 한국인들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룬 것이리라.
 
 
  밥 기다리다가 학살당한 미군 포로들
 
  저자는 자신이 자칫 민간인들을 학살(?)할 뻔했던 아찔한 사건도 소개하고 있다. 북진 중 어느 마을 산속에서 동굴에 북한군이 은신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반동총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는데, 백기를 든 민간인 100여명이 동굴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쏜 무반동총탄이 저 동굴 속에 떨어졌더라면 어찌 되었을까’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자는 피란민 속에 무기를 숨긴 북한군이 숨어 있다는 소문, 전선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는 수상한 민간인들을 목격한 기록들도 남겨놓았다.
 
  저자의 동기생인 비처 브라이언의 중대는 북한군 요새를 공격, 50여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농부처럼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라는 노근리사건 같은 것이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북한군이 저지른 미군포로 학살에 대한 기술(記述)도 있다.
 
  〈제1기갑사단 부사단장인 알렌 준장은 그의 부관인 잭 호데스와 함께 187연대전투단과 연합해 소문에 들었던 포로 기차를 요격하고자 했다. 알렌과 잭은 적군이 있는 지형을 지프로 지나온 후 터널에 있는 기차를 발견했다. 근처에서 그들은 공포스럽게도 많은 미군 시체들을 발견했다. 죽은 척해서 위기를 모면했던 울고 있는 한 생존자에 따르면, 포로들은 무리별로 기차에서 내리게 됐다. 음식을 먹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획적으로 살해당했다. 한곳에서는 열다섯명의 미군이 반원을 이룬 채 죽어 있었다. 많은 이가 아직도 손에 밥공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밥을 기다리다가 총격을 당한 것이었다. 전부 합해 예순여섯 구의 미군 시신이 있었다. 그 외에도 일곱 구의 수척한 시신이 있었다. 이들은 터널 안 철로 옆에 놓은 짚 위에 놓인 채 발견됐다. 이들은 아사하거나 병으로 죽은 이들이었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입니다”
 
레슬리 W. 커크패트릭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말하고 싶어 한 이야기는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던진 동기생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생도 시절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면서 장래가 기대되던 동기, 같은 내무반에서 고락을 같이했던 동기,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우연히 만나 한때나마 즐거움을 나누었던 동기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난다.
 
  〈한 영현(英顯)등록 장교가 내 웨스트포인트 졸업반지를 보고 “커크패트릭이라는 사람을 아는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는 내 동기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입니다. 그가 왜요?”
 
  “글쎄, 그가 이틀 전에 죽었어. 오늘 아침에야 그의 시신을 발견했네.”
 
  이 사건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아연케 된 나는 홀로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주위를 배회했다.
 
  몇 달 후 나는 커크의 중대에 있던 한 장교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봐, 커크패트릭은 내가 알아 온 장교 중 가장 훌륭한 장교였다네. 좋은 장군감이었어.”
 
  아주 짧은 기간 커크와 함께 있었던 그 누군가도 그의 가치를 깨닫고 나와 함께 슬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좀 위로가 되었다.〉
 
  레슬리 W. 커크패트릭은 부상당해 쓰러진 부하를 구하기 위해 참호 밖으로 나갔다 전사했다. 사관학교 시절 가장 우수한 생도였으며 늘 부족한 동료들을 도왔고, 유머 감각과 활기찬 성격으로 사랑받던 데이브 반즈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격추당해 적의 포로가 됐다. 저자는 ‘전쟁포로가 된 그의 모습은 그리기 힘들었다’고 탄식했지만, 데이브 반즈는 결국 포로가 된 지 두 달 만에 포로수용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런 희생을 보면서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은 한국에서의 희생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懷疑)한다. 잭 매디슨이라는 장교가 고향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심정이 응축되어 있다.
 
 
  “한국에 평화가 온다면…”
 
사무엘 스트레이트 코르센
  〈죽거나 부상당한 동기들 소식이 하나하나 들어옵니다. 그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는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장 절친한 친구 중 몇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죽었다는 것을 아직도 믿기 어렵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멋진 사람 중 한명이었던 1기갑의 로저 쿨만과 포트 릴리에서 룸메이트였던 훌륭한 친구 먼로 매그루더, 그는 미국을 떠나기 열흘 전에 결혼했습니다. 아주 좋은 친구인 빌 윌버, 저는 그를 시카고에서 만나서 같이 시애틀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3만 달러짜리 보험에 가입했습니다.
 
  펜톤 오델, 좋은 녀석이었죠. 아버지, 그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동기입니다. 그는 한국으로 떠나기 2주 전에 결혼했습니다. 톰 하더웨이는 미래가 크게 촉망되던 좋은 녀석입니다. 데이브 볼테, 테드 스웨드, 짐 숄츠, 조지 타우(사실 조지는 전사했다), 컬리 린더만은 부상자 명단에 있습니다. 빌 마슬렌더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저는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를 바랍니다. 그는 로저의 죽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젊은이들의 생명이 이 보잘것없는 한국이란 나라를 위해 바칠 만한 것이었다고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북진 중 개성 인근의 고지에서 북한군의 함정에 빠진 부하들을 구하려다가 처절한 육박전 끝에 전사한 사무엘 스트레이트 코르센 소위의 아내 에비 코르센은 남편의 동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에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한국에 평화가 온다면, 샘과 톰과 또 다른 이들이 바쳐야만 했던 희생이 전 세계를 위해서 가치 있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만약 평화가 오지 않는다면, 저는 절망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6·25가 시작된 지 1년이 가까워지는 1951년 6월18일자 《뉴스위크》는 ‘웨스트포인트 사망자 통계’라는 기사를 실었다. 1951년도 졸업생들이 졸업한 직후였다.
 
  〈한국전쟁 사상자 명단은 독자들을 우울하게 한다. 이에 따르면 1949년, 1950년도 졸업생 중 육군 소위의 절반이 한국으로 급히 배치받았고, 이들 중 3분의 1이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작전 중 실종됐다. 1949년도 졸업생 중 17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하고, 8명이 실종됐다. 한국전쟁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의 수가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닌 장교들의 수보다 20대 1의 비율로 적지만, 사망한 530명의 장교 중 거의 100명이 웨스트포인트 출신이었다. 이는 노병들에게는 놀랄 일이 아니다. 모든 미군이 참전한 전쟁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은 그들의 몫 이상을 감당해왔다. 그들의 한국전쟁 사상률은 역대 최고일지도 모른다.〉
 
 
  “한국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저자 마이하퍼는 1951년 가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해 12월 그는 아내와 딸과 해후했다. 하지만 많은 그의 동기가 그의 뒤를 이어 한국으로 파병됐고, 그들 중 상당수는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저자는 20년간 복무하면서 대령까지 진급했고, 예편 후에는 은행가·자유기고가로 활동하다가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 내 동기들의 기억을 통해서 한국전쟁을 위해 바친 희생과 수고를 돌아보면서 나는 역사상 모든 참전용사가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 분명한 동일한 질문을 나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친구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우리 중 많은 이는 “한국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자유인이 용납할 수 없는 세계적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과 우리 조국에 대한 봉사”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빌 페닝톤이 죽음을 얼마 앞두고 적은 글을 읽었던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 냉소하지 않았다. 그는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매일 한국에서 바쳐진 나나 다른 이들의 희생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알아주오”라고 적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이 그 모든 희생을 치를 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남한은 번영하는 동맹국이 되었으며 활발한 무역 파트너이다. 추하고 빈곤한 독재국인 북한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남한이든 다른 어디든 만약 미국이나 유엔이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에 대해 강력한 입장을 견지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다만 헤아려볼 수 있다.〉
 
  저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미국의 번영하는 동맹국’이라는 한국의 좋은 모습만 보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주미한국대사라는 사람이 “한국이 70년 전에 미국을 선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미국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소리를 하고, 한국 외교부 산하 싱크탱크의 수장이라는 이가 “한국은 한·미 동맹에 중독돼왔다. 압도적인 상대에 의한 가스라이팅 현상과 닮아 있다”는 따위의 소리를 해대는 상황을 그가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힌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기록되지 않는다면 어떤 행위들은 잊힐 것이고, 그러므로 그 희생을 감사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저자는 대한민국의 배은망덕(背恩忘德)을 예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자가 어릴 때만 해도 6·25 당시 서울탈환 전투에서 19세의 나이로 전사한 월터 모네간이라는 미군 병사의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이제 그런 이야기들은 다 사라지고 노근리사건 같은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미군을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배척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오랜 세월 동안 획책해온 세력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것이다. 6월을 맞아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배은망덕한 것은 아니다. 그 좋은 예가 이 책의 번역자 김만종이라는 분이다. 젊은 시절 도미(渡美)해 미국에 정착한 그는 매년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그들의 친지들을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 초청해 ‘보은(報恩)의 만찬’을 대접해왔고, 이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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