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훈 서거, 안창호 체포에 애도시 남겨
⊙ 미국에서 흥사단 활동, 귀국 후 아버지와 함께 수양동우회사건으로 日警에 被逮
⊙ ‘白色 殉國’의 정신으로 抗日… 광복 후에는 지방문화운동의 선구자
⊙ 미국에서 흥사단 활동, 귀국 후 아버지와 함께 수양동우회사건으로 日警에 被逮
⊙ ‘白色 殉國’의 정신으로 抗日… 광복 후에는 지방문화운동의 선구자
- 1957년 무렵 포항수산대(現 포항대) 교수 시절의 한흑구 선생.
시적(詩的)인 수필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진 한흑구(韓黑鷗·1909~1979). 그는 이미 1930~1940년대에 시인이자 평론가로 명망이 높았다. 시와 수필, 소설, 평론, 그리고 논문을 쓰면서 영미문학을 국내에 소개했다. 특히 흑인문학(평론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을 통해 당대 흑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일제하 우리 민족의 상황과 비교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한흑구는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親日)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로 살아왔다. 친일 문장을 남기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고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시와,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작품을 썼다. 그가 남긴 많은 시편이 이를 증명한다.
필자는 지난 수년간 우리 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한흑구의 시(詩) 수십 편을 찾아냈다. 그중 많은 시가 조국이 처한 슬픈 현실의 극복과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려고 한다.
한흑구(본명 한세광)는 독립유공자 한승곤(韓承坤·1881~1947)의 아들이다. 미주 흥사단의 의사장을 지낸 그의 부친은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고, 한글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겪었다.
한흑구 역시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며, ‘자주의식에서 출발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3월 흥사단에 입단해 시카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사회(討究會)를 개최하기도 하고, 법의 정신과 인권 문제에 관하여 연구하기도 하였다. 시카고 국민회 지방회 주최 대한독립선언 12주년 기념식에서 충혼위로문을 낭독하고, 하와이 시국강연에서 ‘대중적 혁명’을 강론하였다. 코즈모폴리턴 클럽(International Institute) 초청 ‘코리안 나이트’에서는 ‘조선의 정치와 문화사’ ‘조선인이 본 만주 문제’ 등을 강론하는 등 청년들의 의식을 드높이고, 나아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문학과 문화를 통한 청년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승훈 추모시
1930년 5월, 주체적인 근대교육의 선구자요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1864~1930) 선생이 서거하자 전 조선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를 추모하는 분위기는 전국적으로 번져갔고, 이를 계기로 우리 동포들이 더욱 단결할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우리 민족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그의 서거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해지자 한인교회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예배가 열렸다.
마침 시카고 한인사회에서 그를 추모하는 물결이 일었고, 교회에서도 추모 예배가 열렸다. 그날 예배를 다녀온 한흑구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교육에 헌신한 남강 선생의 서거를 애통해하며, 한 편의 추모시 ‘고 남강 선생을 도상함’(출전 《新韓民報》 1930년 10월 9일)을 바쳤다. 그중 한 부분을 보면 이러하다.
선생은 가시고 못 오셔도
뜨거운 선생의 사랑은 끝없어
바람이 되고 냇물이 되어
쓸쓸한 뜰 밖에서 부르실 걸-
가슴 복판에 우러나는 정을
붓으로 다 할 수 없사오니-
태평양의 물결아 잠잠하여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정을 전하여라!
-‘고 남강 선생을 도상함’ 중에서
(현대문 필자)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남강은 신민회 운동(이른바 105인 사건) 및 3·1운동 등으로 모두 세 차례의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가장 늦게 출옥한 후에도 민립대학기성회 운동 등에 헌신한 분이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내 뼈는 표본으로 만들어 학교에서 사랑하는 학생들에게도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경성제대 병원으로 옮겨져 살을 바르고 뼈를 표백해 표본으로 만드는 절차에 들어갔으나 일본 총독부는 이를 강권으로 금지시켜 표본 제작을 저지하였다. 그의 남은 뼈조차도 일제는 두려워한 것이다.
이 사실이 미주사회에도 알려지게 되고, 그를 추모하는 예배가 미주 전역으로 퍼져갈 때, 그의 정신을 본받으려는 마음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유언도 지키지 못하게 된 슬픔을 담아 한흑구는 ‘뜨거운 선생의 사랑은 끝없어/ 바람이 되고 냇물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 것이라고 노래하였다. 남강 선생을 향한 그 정을 붓으로 다 적을 수가 없기에 ‘태평양의 물결아 잠잠하여/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정을 전하여라!’라고 노래하며 멀리 미국 땅에서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남강의 마음과 같지 않다면 한흑구가 어찌 이런 시를 바칠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그의 시를 읽는 동포의 마음에 조국 독립을 향한 뜨거운 불이 어찌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떠단기는 나의 님이매…’
한흑구는 남강 선생의 서거뿐만 아니라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1878~ 1938) 선생의 피체(被逮) 소식에도 가슴을 치고 통탄하며 시를 썼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가 있던 날, 안창호는 상하이의 우리 동포 소년들이 조직한 소년단에 기부금을 주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로 일본의 경계가 더욱 강화된 상하이, 체포 위험이 높았던 그때, 안창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시 흥사단원인 이우필(李祐弼·1885~1945)의 집을 방문하였다. 도산이 그를 기다리는 동안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도산은 피할 겨를도 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안창호를 조선의 경성(서울)으로 압송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했다.
이런 사실이 미국 동포사회에도 알려지게 됐고, 당시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하던 한흑구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의 한인사회와 흥사단의 모든 단우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한승곤과 함께 흥사단 단우로 활동하면서 안창호를 자주 대면하던 한흑구에게 안창호의 수감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땅을 치며 울분에 싸여 한동안 슬픔에 빠져 있던 한흑구는 비통한 마음으로 시 ‘잡혀간 님’(《新韓民報》 1932년 10월 6일)을 써서 도산에게 헌사했다.
떠단기는 나의 님이매
내 맘도 떠단기었나이다.
괴로우신 나의 님이매
내 맘도 괴로워하였나이다.
외로우신 나의 님이매
내 맘도 외로워하였나이다.
오! 그러나 옥중에 계신 님이매
우리 맘도 그러하오리까?
옥중에 드신 님이매
맘은 더욱 나와 같이 하나이니까?
전에 같이 하던 맘이
오늘 더욱 같이 하나이니까?
님의 몸은 옥중에 계셔도
주고 간 님의 맘, 어이 그러하오리까?
벌써 벌써 주고 간 님의 뜨거운 맘-
-아! 나를 어찌 떠나리이까?
-‘잡혀간 님-도산 선생께 드림’ 전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
한흑구는 ‘님’이라는 단어를 대상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했다. 이 시에서 안창호에 대한 한흑구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이 단어 하나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한흑구는 안창호의 마음과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비롯한 흥사단 단우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이의 슬픔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안창호가 자기에게 주고 간 그 뜨거운 마음, 즉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굳은 의지와 애국심이 결코 자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도 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에 쓴 그의 시가 오늘의 우리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선열들의 붉은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잡혀간 님’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난 한흑구의 비통함이 미주 동포나 조선에 살고 있는 동포에게 어찌 전해지지 않았겠는가? 그의 시 한 편이 동포 가슴에 물결이 일게 하고, 그 물결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화석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후 안창호가 석방되어 평안남도 대보산 송태산장에 머물 때, 1934년 조선으로 귀국한 한흑구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안창호를 만났다. 두 사람은 미주 한인사회의 근황을 공유하며, 조국의 미래에 대한 근심과 독립을 위한 결의를 다졌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동우회 활동을 계획하고 동포들의 뜻을 모으기도 하였다. 1936년 귀국한 한승곤 목사도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미국 흥사단의 상황을 전했다. 세 사람은 함께 동우회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모두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통을 겪기도 했다.
‘조선, 나의 고국이여!’
남강의 서거와 도산의 피체 이후 일제의 강제 지배 아래 놓인 고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럴수록 조국의 독립을 향한 민족적 의지는 더욱 높아졌고, 한흑구 또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고국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높아갔다. 그는 시 ‘고국’(《新韓民報》 1932년 10월 13일)에 그런 마음을 그려놓았다.
조선, 나의 고국이여!
조선 사람, 나의 동포여!
산 높고, 물 맑은 네 품.
그러고 그리운 한 겨레여!
……
아! 나의 조선!
아! 나의 동포여!
새벽 항구, 종소리 포구에 울 때까지
성좌를 쳐다보고, 나가고 나가소서!
……
오! 나의 조선!
오! 나의 동포!
그러고 높은 산!
밤낮 흐르는 시냇물!
고국이 그립구나!
-‘고국’ 중에서
이 시는 한흑구가 만 22세 되던 1932년에 쓴 것으로 ‘8월 29일을 맞고’라는 부제가 달렸다. ‘8월 29일’이 어떤 날인가? 이는 1910년 8월 29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다. 그는 조선을 떠나 미국에 머물렀기 때문에 고국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8월 29일이라는 부제를 명기한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국권피탈 전 온전했던 고국을 생각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이 작품을 《동광》 제38호(1932년 10월)에 다시 발표할 때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고국’을 복자(伏字)를 사용하여 ‘故×’라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흑구는 그의 산문집 《인생산문》(1974)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의 검열이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1931년 시카고에 있을 때 ‘대륙방랑시편’이라는 제목 아래 시 열 편을 써서 《동광》지의 주요한(朱耀翰)씨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조국’이라는 일 편을 써놓았으나, 빼앗긴 조국을 그대로 조국이라고 쓰면 검열통과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고, 나를 잡아 가두려고 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선수를 써서 ‘故×’라고 시제를 한 자 ×자를 넣어서 카무플라즈해 버렸다. 요행히 통과를 하면 ‘고향’이라고 읽든지 ‘고국’이라고 읽든지, ‘조국’이라는 이미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통과되었다.〉 -산문집 《인생산문》 중에서
이런 배경을 지닌 이 시에는 고국산천의 아름다움과 국권 상실의 비감이 혼연되어 있다. 우리 역사가 어디로 흘러갈지를 고민하는 마음과 젊은이들이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물으며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조국은 나의 애인’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다. 한흑구가 ‘대륙방랑시편’이라는 제목 아래 보낸 10편의 시 중, 그가 말한 ‘故×’라는 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다르다. 필자는 그가 처음부터 “‘조국’이라는 일 편을 써놓았으나 빼앗긴 조국을 그대로 조국이라고 쓰면 검열통과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고, 나를 잡아 가두려고 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그 ‘조국’이라는 시를 비록 전문은 아니지만 하나의 독립된 시로 분류하고 소개한다.
그대여, 실연(失戀)하였거든
바다 밖으로 나오라,
그때 그대는 새로운 애인(愛人)을
만날 것이오니
그이에게는 실연(失戀)이 없고
오직 뜨거운 사랑만이 있도다,
그대의 생명을 다 바치는
뜨거운 사랑과 정열(情熱)도
그이에게는 외이려, 외이려
부족할 뿐이다.
얼핏 보면 남녀의 사랑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흑구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실연’(주권을 상실한 조국)과 ‘새로운 애인’(광복된 조국)이라는 상징적 단어를 사용하여 조국 독립의 마음을 노래하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애인에게는 실연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새로운 애인에게 생명을 바치는 정열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라는 강렬한 조국애를 설파(說破)하였다.
당시 분위기에선 이런 방법으로 시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박해 강도는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강의 표면처럼 차갑고 단단했지만, 그 아래로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가는 강물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한흑구의 마음은 결코 얼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흑구의 마지막 시로 추정되는 ‘동면’에서 그가 ‘눈 감지 않은 나의 동면’이라고 말한 것처럼 결코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
한흑구는 많은 영미문학 작품을 소개하였다. 그는 영미문학 작품을 소개할 때도 조국의 독립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았다. 미국 노스팍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0년, 3·1절을 며칠 앞둔 2월 23일에 그는 스코틀랜드의 민족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시 두 편을 번역하여 《신한민보》에 소개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과 ‘나의 쟌(My Jhan)’이다. 그는 두 작품을 소개하며 이렇게 부기(付記)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열정적 애국시인 로버트 번스의 시는 우리의 맘속에 부대끼는 정서가 적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3·1기념일을 몇 날 앞두고 옛날을 회상하고 끝에 그의 시 두 편을 역초하게 되었다. 평화스러운 옛날의 내 집을 늘 그리고 있는 우리들은 이 애국시인의 노래를 가슴 깊이 들을 것이다. 우리가 늘 읽는 그의 시이지만 오늘을 당하여 다시 한 번 불러보는 것도 무의한 일은 아닐 줄 안다.〉
-《신한민보》 1930년 2월23일자
참으로 가슴 뜨거운 일이 아닌가? 단순히 외국 시를 소개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통하여 잃어버린 조국을 생각하고, 그 고국을 되찾는 일에 우리 마음을 각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을 “평화스러운 옛날의 내 집을 늘 그리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가 말하는 ‘내 집’은 곧 ‘조국’이 아닌가? 한흑구가 1934년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 발표한 시편 가운데 ‘내 집’(《新韓民報》 1934년 1월 4일)이라는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 집은 헐어지고,
뜰 앞은 쓸쓸하노라.
내 집을 두른 성벽은
비바람에 굴러나느라.
과학자는
그것을 ‘자연 도태’라 하고,
내 심장은
비운에 울 뿐이노라!
내 집은 헐어지고
나는 외아들이노라.
헐어지는 내 집을 바로잡을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
-‘내 집’ 전문
‘내 집’은 자신의 집, 고향에 있는 집을 말하기도 하지만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집, 즉 ‘내 조국, 조선’을 상징하기도 한다. 1남 3녀의 외아들로서 가정을 돌봐야 하는 마음과 내 조국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 마음을 중의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과학자들은 집이 허물어지고 비바람에 성벽이 굴러 내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지만, 자기의 심장은 “비운에 울 뿐”이라는 한흑구,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고 외치는 그의 비장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나의 집, 나의 조국을 그리워하던 ‘조선의 외아들’ 한흑구는 1933년 가을이 저물어갈 무렵, 고국에 계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1934년 귀국하였다. 어머니를 돌보며 잡지 《대평양》을 주재하고, 이어 《백광》 창간에 참여하여 문학운동을 벌이던 중,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일제로부터 강력한 탄압을 받았지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한흑구는 1945년 광복 이후 고향을 떠나 서울과 포항에서 생활하다가 1979년 타계하였다.
‘백색 순국’의 마음으로 투쟁하던 시인
그가 귀국할 때 주제별로 분류하고 엮어둔 시들이 지금은 소실되고 없다. 일부 작품이 신문과 잡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작품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을 기원하며 쓴 것들이다.
일제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 육체적 목숨을 내어놓는 ‘피의 순국’은 못 하였지만, 일생 문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하여 노력한 작가, 임종국의 말대로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 한흑구는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한 줄 시에도 나라를 생각했던 우국시인이요 민족시인이었다.
한흑구는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기만의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의 그날까지 ‘백색 순국’의 마음으로 투쟁한 시인이다. 해방 이후 청명하게 빛나는 언어를 바탕으로 시적 수필을 통하여 민족 부흥의 정신적 가교 역할을 하며, 정신적 가치의 숭고함을 노래하였다.
국민 계몽을 위하여 문학을 통한 지방과 지역의 문화운동을 선도하는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점에서 한흑구를 우국시인이요 민족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우리 문단사의 중요한 일이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신사와 교육사에도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지난 수년간 우리 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한흑구의 시(詩) 수십 편을 찾아냈다. 그중 많은 시가 조국이 처한 슬픈 현실의 극복과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려고 한다.
한흑구(본명 한세광)는 독립유공자 한승곤(韓承坤·1881~1947)의 아들이다. 미주 흥사단의 의사장을 지낸 그의 부친은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고, 한글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겪었다.
한흑구 역시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며, ‘자주의식에서 출발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3월 흥사단에 입단해 시카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사회(討究會)를 개최하기도 하고, 법의 정신과 인권 문제에 관하여 연구하기도 하였다. 시카고 국민회 지방회 주최 대한독립선언 12주년 기념식에서 충혼위로문을 낭독하고, 하와이 시국강연에서 ‘대중적 혁명’을 강론하였다. 코즈모폴리턴 클럽(International Institute) 초청 ‘코리안 나이트’에서는 ‘조선의 정치와 문화사’ ‘조선인이 본 만주 문제’ 등을 강론하는 등 청년들의 의식을 드높이고, 나아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문학과 문화를 통한 청년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승훈 추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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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구문학관(포항 북구 호미곶 소재)에 전시된 한흑구 선생의 노트. |
마침 시카고 한인사회에서 그를 추모하는 물결이 일었고, 교회에서도 추모 예배가 열렸다. 그날 예배를 다녀온 한흑구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교육에 헌신한 남강 선생의 서거를 애통해하며, 한 편의 추모시 ‘고 남강 선생을 도상함’(출전 《新韓民報》 1930년 10월 9일)을 바쳤다. 그중 한 부분을 보면 이러하다.
선생은 가시고 못 오셔도
뜨거운 선생의 사랑은 끝없어
바람이 되고 냇물이 되어
쓸쓸한 뜰 밖에서 부르실 걸-
가슴 복판에 우러나는 정을
붓으로 다 할 수 없사오니-
태평양의 물결아 잠잠하여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정을 전하여라!
-‘고 남강 선생을 도상함’ 중에서
(현대문 필자)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남강은 신민회 운동(이른바 105인 사건) 및 3·1운동 등으로 모두 세 차례의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가장 늦게 출옥한 후에도 민립대학기성회 운동 등에 헌신한 분이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내 뼈는 표본으로 만들어 학교에서 사랑하는 학생들에게도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경성제대 병원으로 옮겨져 살을 바르고 뼈를 표백해 표본으로 만드는 절차에 들어갔으나 일본 총독부는 이를 강권으로 금지시켜 표본 제작을 저지하였다. 그의 남은 뼈조차도 일제는 두려워한 것이다.
이 사실이 미주사회에도 알려지게 되고, 그를 추모하는 예배가 미주 전역으로 퍼져갈 때, 그의 정신을 본받으려는 마음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유언도 지키지 못하게 된 슬픔을 담아 한흑구는 ‘뜨거운 선생의 사랑은 끝없어/ 바람이 되고 냇물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 것이라고 노래하였다. 남강 선생을 향한 그 정을 붓으로 다 적을 수가 없기에 ‘태평양의 물결아 잠잠하여/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정을 전하여라!’라고 노래하며 멀리 미국 땅에서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남강의 마음과 같지 않다면 한흑구가 어찌 이런 시를 바칠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그의 시를 읽는 동포의 마음에 조국 독립을 향한 뜨거운 불이 어찌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떠단기는 나의 님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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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의 시 ‘잡혀간 님’ 원본. |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가 있던 날, 안창호는 상하이의 우리 동포 소년들이 조직한 소년단에 기부금을 주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로 일본의 경계가 더욱 강화된 상하이, 체포 위험이 높았던 그때, 안창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시 흥사단원인 이우필(李祐弼·1885~1945)의 집을 방문하였다. 도산이 그를 기다리는 동안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도산은 피할 겨를도 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안창호를 조선의 경성(서울)으로 압송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했다.
이런 사실이 미국 동포사회에도 알려지게 됐고, 당시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하던 한흑구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의 한인사회와 흥사단의 모든 단우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한승곤과 함께 흥사단 단우로 활동하면서 안창호를 자주 대면하던 한흑구에게 안창호의 수감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땅을 치며 울분에 싸여 한동안 슬픔에 빠져 있던 한흑구는 비통한 마음으로 시 ‘잡혀간 님’(《新韓民報》 1932년 10월 6일)을 써서 도산에게 헌사했다.
떠단기는 나의 님이매
내 맘도 떠단기었나이다.
괴로우신 나의 님이매
내 맘도 괴로워하였나이다.
외로우신 나의 님이매
내 맘도 외로워하였나이다.
오! 그러나 옥중에 계신 님이매
우리 맘도 그러하오리까?
옥중에 드신 님이매
맘은 더욱 나와 같이 하나이니까?
전에 같이 하던 맘이
오늘 더욱 같이 하나이니까?
님의 몸은 옥중에 계셔도
주고 간 님의 맘, 어이 그러하오리까?
벌써 벌써 주고 간 님의 뜨거운 맘-
-아! 나를 어찌 떠나리이까?
-‘잡혀간 님-도산 선생께 드림’ 전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
한흑구는 ‘님’이라는 단어를 대상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했다. 이 시에서 안창호에 대한 한흑구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이 단어 하나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한흑구는 안창호의 마음과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비롯한 흥사단 단우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이의 슬픔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안창호가 자기에게 주고 간 그 뜨거운 마음, 즉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굳은 의지와 애국심이 결코 자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도 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에 쓴 그의 시가 오늘의 우리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선열들의 붉은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잡혀간 님’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난 한흑구의 비통함이 미주 동포나 조선에 살고 있는 동포에게 어찌 전해지지 않았겠는가? 그의 시 한 편이 동포 가슴에 물결이 일게 하고, 그 물결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화석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후 안창호가 석방되어 평안남도 대보산 송태산장에 머물 때, 1934년 조선으로 귀국한 한흑구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안창호를 만났다. 두 사람은 미주 한인사회의 근황을 공유하며, 조국의 미래에 대한 근심과 독립을 위한 결의를 다졌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동우회 활동을 계획하고 동포들의 뜻을 모으기도 하였다. 1936년 귀국한 한승곤 목사도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미국 흥사단의 상황을 전했다. 세 사람은 함께 동우회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모두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통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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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의 시 ‘고국’ 원본 중 일부. |
조선, 나의 고국이여!
조선 사람, 나의 동포여!
산 높고, 물 맑은 네 품.
그러고 그리운 한 겨레여!
……
아! 나의 조선!
아! 나의 동포여!
새벽 항구, 종소리 포구에 울 때까지
성좌를 쳐다보고, 나가고 나가소서!
……
오! 나의 조선!
오! 나의 동포!
그러고 높은 산!
밤낮 흐르는 시냇물!
고국이 그립구나!
-‘고국’ 중에서
이 시는 한흑구가 만 22세 되던 1932년에 쓴 것으로 ‘8월 29일을 맞고’라는 부제가 달렸다. ‘8월 29일’이 어떤 날인가? 이는 1910년 8월 29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다. 그는 조선을 떠나 미국에 머물렀기 때문에 고국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8월 29일이라는 부제를 명기한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국권피탈 전 온전했던 고국을 생각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이 작품을 《동광》 제38호(1932년 10월)에 다시 발표할 때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고국’을 복자(伏字)를 사용하여 ‘故×’라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흑구는 그의 산문집 《인생산문》(1974)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의 검열이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1931년 시카고에 있을 때 ‘대륙방랑시편’이라는 제목 아래 시 열 편을 써서 《동광》지의 주요한(朱耀翰)씨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조국’이라는 일 편을 써놓았으나, 빼앗긴 조국을 그대로 조국이라고 쓰면 검열통과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고, 나를 잡아 가두려고 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선수를 써서 ‘故×’라고 시제를 한 자 ×자를 넣어서 카무플라즈해 버렸다. 요행히 통과를 하면 ‘고향’이라고 읽든지 ‘고국’이라고 읽든지, ‘조국’이라는 이미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통과되었다.〉 -산문집 《인생산문》 중에서
이런 배경을 지닌 이 시에는 고국산천의 아름다움과 국권 상실의 비감이 혼연되어 있다. 우리 역사가 어디로 흘러갈지를 고민하는 마음과 젊은이들이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물으며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조국은 나의 애인’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다. 한흑구가 ‘대륙방랑시편’이라는 제목 아래 보낸 10편의 시 중, 그가 말한 ‘故×’라는 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다르다. 필자는 그가 처음부터 “‘조국’이라는 일 편을 써놓았으나 빼앗긴 조국을 그대로 조국이라고 쓰면 검열통과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고, 나를 잡아 가두려고 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그 ‘조국’이라는 시를 비록 전문은 아니지만 하나의 독립된 시로 분류하고 소개한다.
그대여, 실연(失戀)하였거든
바다 밖으로 나오라,
그때 그대는 새로운 애인(愛人)을
만날 것이오니
그이에게는 실연(失戀)이 없고
오직 뜨거운 사랑만이 있도다,
그대의 생명을 다 바치는
뜨거운 사랑과 정열(情熱)도
그이에게는 외이려, 외이려
부족할 뿐이다.
얼핏 보면 남녀의 사랑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흑구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실연’(주권을 상실한 조국)과 ‘새로운 애인’(광복된 조국)이라는 상징적 단어를 사용하여 조국 독립의 마음을 노래하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애인에게는 실연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새로운 애인에게 생명을 바치는 정열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라는 강렬한 조국애를 설파(說破)하였다.
당시 분위기에선 이런 방법으로 시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박해 강도는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강의 표면처럼 차갑고 단단했지만, 그 아래로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가는 강물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한흑구의 마음은 결코 얼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흑구의 마지막 시로 추정되는 ‘동면’에서 그가 ‘눈 감지 않은 나의 동면’이라고 말한 것처럼 결코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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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의 시 ‘내 집’ 원본. |
〈스코틀랜드의 열정적 애국시인 로버트 번스의 시는 우리의 맘속에 부대끼는 정서가 적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3·1기념일을 몇 날 앞두고 옛날을 회상하고 끝에 그의 시 두 편을 역초하게 되었다. 평화스러운 옛날의 내 집을 늘 그리고 있는 우리들은 이 애국시인의 노래를 가슴 깊이 들을 것이다. 우리가 늘 읽는 그의 시이지만 오늘을 당하여 다시 한 번 불러보는 것도 무의한 일은 아닐 줄 안다.〉
-《신한민보》 1930년 2월23일자
참으로 가슴 뜨거운 일이 아닌가? 단순히 외국 시를 소개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통하여 잃어버린 조국을 생각하고, 그 고국을 되찾는 일에 우리 마음을 각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을 “평화스러운 옛날의 내 집을 늘 그리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가 말하는 ‘내 집’은 곧 ‘조국’이 아닌가? 한흑구가 1934년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 발표한 시편 가운데 ‘내 집’(《新韓民報》 1934년 1월 4일)이라는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 집은 헐어지고,
뜰 앞은 쓸쓸하노라.
내 집을 두른 성벽은
비바람에 굴러나느라.
과학자는
그것을 ‘자연 도태’라 하고,
내 심장은
비운에 울 뿐이노라!
내 집은 헐어지고
나는 외아들이노라.
헐어지는 내 집을 바로잡을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
-‘내 집’ 전문
‘내 집’은 자신의 집, 고향에 있는 집을 말하기도 하지만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집, 즉 ‘내 조국, 조선’을 상징하기도 한다. 1남 3녀의 외아들로서 가정을 돌봐야 하는 마음과 내 조국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 마음을 중의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과학자들은 집이 허물어지고 비바람에 성벽이 굴러 내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지만, 자기의 심장은 “비운에 울 뿐”이라는 한흑구,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고 외치는 그의 비장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나의 집, 나의 조국을 그리워하던 ‘조선의 외아들’ 한흑구는 1933년 가을이 저물어갈 무렵, 고국에 계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1934년 귀국하였다. 어머니를 돌보며 잡지 《대평양》을 주재하고, 이어 《백광》 창간에 참여하여 문학운동을 벌이던 중,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일제로부터 강력한 탄압을 받았지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한흑구는 1945년 광복 이후 고향을 떠나 서울과 포항에서 생활하다가 1979년 타계하였다.
‘백색 순국’의 마음으로 투쟁하던 시인
그가 귀국할 때 주제별로 분류하고 엮어둔 시들이 지금은 소실되고 없다. 일부 작품이 신문과 잡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작품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을 기원하며 쓴 것들이다.
일제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 육체적 목숨을 내어놓는 ‘피의 순국’은 못 하였지만, 일생 문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하여 노력한 작가, 임종국의 말대로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 한흑구는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한 줄 시에도 나라를 생각했던 우국시인이요 민족시인이었다.
한흑구는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기만의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의 그날까지 ‘백색 순국’의 마음으로 투쟁한 시인이다. 해방 이후 청명하게 빛나는 언어를 바탕으로 시적 수필을 통하여 민족 부흥의 정신적 가교 역할을 하며, 정신적 가치의 숭고함을 노래하였다.
국민 계몽을 위하여 문학을 통한 지방과 지역의 문화운동을 선도하는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점에서 한흑구를 우국시인이요 민족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우리 문단사의 중요한 일이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신사와 교육사에도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