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8월호에서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 사장은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했었다.

“웨스팅하우스와의 막판 협상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막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협상이라는 게 임진왜란과 같아요. 외부가 아닌 내부의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건데… 어떻게든 협상이 끝났잖아요. 이제는 다시 병자호란이에요. ‘원자력 을사오적이 어쩌고 저쩌고…’, 아이고…. 돌아보니 (한미) FTA를 체결할 때도 비슷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 사장의 8월호 인터뷰 내용을 유추해보면 이미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의 협상을 두고 내부 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자력 을사오적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비판이 정권 교체 후 여권에서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간조선》 8월호 이후 ‘원전(原電) 매국(賣國) 협상’ 기사가 보도됐다. 황 사장의 말대로 발발한 ‘병자호란’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지난 8월 18일 《서울경제》는 “K원전 50년 족쇄”라는 제목으로 한수원과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굴욕 협상’을 보도했다. 협상 내용은 ▶원전 1기당 약 2400억원 상당의 로열티 지급 ▶웨스팅하우스 제품을 9000억원어치(원전 1기당) 구매 ▶수출 제한(EU, 일본, 미국 등) ▶기술 사용 제한(한국이 독자 개발한 APR1400 모델) 등이었다.

보도 직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일부는 “기술 주권을 팔아넘긴 매국 행위”라며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황주호 사장을 질타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윤석열 정부와 산자부, 한수원·한전은 웨스팅하우스와 지난 1월 국가의 이익과 주권을 송두리째 내어주었다”고 했다.

민주당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 소속 박지혜·권향엽·김원이·김성환 의원은 22일 “사실상 원자력 기술 주권을 내려놓는 매국적 협정이자,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족쇄를 채우는 행위”라고 했다. 또한 황주호 사장이 임기 만료 상태에서 계약을 주도했다는 점도 권한 남용이란 비판이 나왔다.

이후 원전 주가가 요동쳤다. 첫 보도 이후 8월 19일 원전 관련 회사인 두산에너빌리티 주가가 -8.6% 하락(6만5100원→ 5만9500원)했고 이튿날에는 -14.12%까지 급락했다가 다시 반등해 종가는 –3.53% 하락(5만9500원→5만7400원)으로 장을 마쳤다. 두산에너빌리티 주가가 종가 기준 5만원대를 기록한 것은 한 달여 만(7월 7일)이었다.

다음날인 8월 21일에는 주식이 7.14%(6만2200원) 상승했다. 거래량도 8월 19일 3468주에서 다음날은 6295주로 직전 거래일 대비 3~6배 이상 폭증했다. 초기 보도가 “기술 주권 포기”라는 강한 표현으로 투자 심리를 급격히 악화시켰지만, 이후 긍정적 전망(美 진출, 합작회사 설립)이 보도되면서 낙폭을 줄이고 반등한 것이다.

또한 ‘굴욕 협상’을 반박하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나왔다. 예를 들어 “우선 원전 1기당 기자재 9000억원어치 사는 건 ‘어차피 사야 하는데 누구 걸 사느냐’ 문제다. 유럽제든 중국제든 아무거나 사도 되는데 우리랑 오래 관계를 맺어온 미국 웨스팅하우스 걸 사기로 했다”(경희대 정범진 교수)는 것이다.

관련 보도도 잇따랐다. 《조선일보》는 8월 21일 <원전 수출, 웨스팅하우스와 ‘불평등 계약’? 이슈 따져보니>라는 해설 기사에서 ‘체코 두코바니 원전 1기 사업비가 13조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WEC에 주기로 한 원전 1기당 기술 사용료 2400억원은 전체 사업비의 약 1.85%다. WEC로부터 9000억원어치 기자재를 사야 해 수익성이 떨어지는 측면은 있지만 원천 기술이 없는 한국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EU나 북미에 원전 수출을 할 수 없다는 문제도 “‘단독 수주’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이 시장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게 아니다”라는 지적이 나온다. 즉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공동으로 원전 건설에 나설 경우 ‘굴욕 협상’에 전혀 방해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양측 간에 합자법인(조인트벤처, JV) 설립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당장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지어야 하지만 미국은 1979년 이후 30여 년간 신규 원전을 지은 적이 없다. 한수원의 도움 내지 협력이 절실하다. 또한 체코를 제외한 유럽의 경우도 웨스팅하우스와 공동 수주에 나설 수 있다. 황주호 사장은 “한국은 개발-설계-건설-시운전-운전 등 원전 운영의 전체 과정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라고 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매일신문》 유튜브와의 인터뷰에서 “원전을 한국이 독자적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는 외국 기술과 그들의 지적 재산권을 토대로 중간에 진입해 지금의 원자력 기술을 갖추게 됐다. 원천 기술도 지적 재산권도 없었고 가질 만한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다 가질 만한 투자도 한 적도 없었다”며 “(이번 협상을 계기로) 우리는 이제 넘어질 것이냐 아니면 잘 피해 나가는 방법을 찾을 것이냐를 놓고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수원이 신규 원전을 건설할 체코 두코바니 원전 단지 모습. 사진=한수원

어쩌면 이재명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에 관련 희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관 산자부 장관과 황 사장이 미국으로 떠난 이유도 원전 관련 업무협약(MOU)을 맺기 위한 것이란 보도가 나오고 있다. 

벌써부터 정부가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과 원전 협력을 논의할 예정이란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팀 코러스(KORUS·Korea+US)’를 꾸려 세계 원전 시장 공략에 나설 것이란 얘기다.

과거 탈(脫)원전으로 원전 산업을 고사시키려던 민주당이 이 대통령의 방미에 앞서 원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집중적으로 불러일으킨 의도가 뭘까. 일련의 ‘굴욕 협상’ 논란이 이 대통령의 방미를 통해 해소하려는 숨은 의도가 담겨 있을까.

이 대통령의 방미로 한미 간에 원전 협력이 강화되고, ‘굴욕 협상’ 논란이 해소된다면 다행스럽지만 원전 관련 주가 폭락으로 피해를 본 투자자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줄까. 오랫동안 한미 간에 쌓아올린 원전 ‘팀 코러스’ 협력이 여권의 ‘굴욕 협상’ 공세로 흔들리게 된 책임은 또 누가 질까. 이 대통령의 첫 방미에 여러 국정 과제가 즐비하지만 원전 협력만큼은 절대 미루거나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