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5일 밤,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겨울 초입의 찬 기운이 극장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웅산(52·雄山·본명 김은영)이 첫 소절을 내뱉는 순간 객석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공연 제목은 〈올 댓 재즈(All That Jazz)〉. 이름처럼, 장르의 경계는 첫 순간부터 무의미해졌다.

첫 곡을 마친 뒤, 웅산은 짧은 숨을 고르며 관객을 향해 말했다.

“저는 웅산입니다. 추운 날씨에 눈도 온다 해서 걱정했는데… 재즈 공연 처음 보러 오신 분도 계시죠? 오늘 가장 짜릿한 공연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말 공연은 설레기도 하고, 또 긴장도 많이 돼요.”

긴장감이 담긴 말투였지만, 그마저도 공연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객석을 끌어당겼다.

국악·재즈·라틴이 한 무대에서… “이건 장르 파괴가 아니라 장르 폭발”

이날 무대는 재즈, 록, 블루스, 라틴, 그리고 거문고·장구를 품은 국악까지—그야말로 ‘크로스오버의 총합’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콘(Kon)이 등장해 활을 켜자, 극장 안에는 익숙한 가을의 멜로디가 흘렀다. 최백호의 명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웅산의 목소리가 바이올린 선율 위에 얹히는 순간, 12월의 공간은 만추의 정취로 바뀌었다. 낙엽이 스치는 듯한 분위기가 객석 전체를 감쌌다.

이어진 ‘Los Pajaros Perdidos’는 공연의 백미였다. 웅산의 자연스러운 스페인어 발음과 블루지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탱고의 감성을 재해석하며 객석을 압도했다. 즉흥 연주가 이어질 때마다 객석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현대무용가 이루다의 출연은 공연의 색감을 확장시켰다. 웅산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울 때, 이루다의 움직임은 음표가 시각화된 듯 공중에서 풀리고 이어졌다. 노래와 춤이 하나의 서사처럼 엮였다.

전통악기인 거문고 연주자 이재하, 장구 연주자 방지원의 악기 대결은 또 다른 재즈 연주의 정점을 만들었다. 웅산의 목소리를 타고 국악의 울림이 재즈의 리듬과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즉흥 연주는 심벌즈(이재하)와 꽹과리(방지원)가 가세하면서 폭발적인 에너지로 확장됐다.

색소포니스트 이정식의 연주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한국 재즈의 중흥기를 이끈 거장의 톤과 테크닉은 극장을 압도했다. 재즈 기타리스트 최우준의 그루브 역시 관객의 탄성을 끌어내기 충분했다. 특히 최우준이 작곡한 연주곡 ‘아리랑 블루’는 강렬함과 블루지함이 느껴져 객석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국립극장에서 재즈 공연은 흔치 않죠”… 기자가 확인한 8년 만의 무대

공연 중간, 객석에서 “잘한다!”는 외침이 터져 나오자 웅산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3대째 복을 받으실 겁니다.”

관객이 웃음으로 화답하자, 웅산은 이날 무대의 의미를 짧게 언급했다. 사실 국립극장에서 재즈 아티스트의 단독 공연은 매우 드문 일이다. 국립극장에서 재즈 보컬리스트의 단독 공연이 열린 것은 2017년 나윤선 공연 이후 8년 만이다.

따라서 이날 무대는 국립극장에서 재즈 보컬리스트가 다시 홀로 무대의 중심에 선 특별한 순간이었다. 웅산은 이런 의미를 알고 있기에 더욱 진심을 담아 관객에게 말했다.

“국악과 재즈를 접목한 공연을 만들려고 정말 고민했고 애를 많이 썼어요. 어제 명상을 하려고 산에 올랐는데… 이 추운 날 귀한 시간을 내서 공연장까지 오실 관객 여러분을 생각하니까 마마음이 먹먹해지고 행복감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짐했어요. 내일은 온몸이 녹아내리도록, 부셔지도록 노래하겠다고요.”

그의 말이 끝나자 객석은 한층 더 큰 박수로 응답했다. 이어 웅산의 자작곡 'I'm not a butterfly'가 흐르자 극장이 다시 침묵에 쌓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겁니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예상 밖의 장면 중 하나는 웅산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대표곡인 ‘Hound Dog’를 재즈 스타일로 재해석해 불렀던 순간이 아닐까. 웅산의 목소리가 처음 낮게 깔리자 관객은 잠시 멈칫했다. 원곡의 거칠고 직선적인 로큰롤 분위기 대신, 그녀는 곡의 리듬을 유연하게 풀어내며 블루스와 재즈의 색채를 한 겹씩 입혀갔다.

특유의 중저음은 곡의 첫 구절을 더 묵직하게 만들었고, 뒤이어 밴드가 리듬을 밀어 올리자 그녀의 보컬은 다시 탄력 있게 튀어 오르며 ‘Hound Dog’의 장난기 많은 에너지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흡수했다.

기타 최우준이 거칠게 긁어 올린 리프는 원곡의 로큰롤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재즈 편곡의 여백 속에서 새로운 숨결을 만들어냈다. 드럼 심동진의 스윙 리듬, 베이스 신동하의 단단한 그루브가 더해지며 무대는 재즈 클럽 특유의 ‘즉흥성’으로 가득 찼다.

웅산은 절정 구간에서 특유의 애드리브를 과감히 펼쳤는데, 프레이즈를 뒤틀고 늘렸다 줄이며 관객의 호흡을 쥐락펴락했다. 원곡의 직진성을 유지하면서도, “웅산식 블루스”의 여운을 남기는 해석이었다.

경북 문경 가은초 악대부에서 트럼펫을 불던 소녀가 재즈 무대의 ‘디바’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이 극장의 무대 위에 온전히 담겨 있었다. 18세에 출가해 단양의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에서 2년간 수행생활을 했던 웅산은 그 속에서 “노래가 내 길”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때 받은 법명 ‘웅산’은 이후 그의 예명이 되었다.

“눈화장 때문인가요?”… 재즈 특유의 여백 있는 유머

웅산은 무대 곳곳에서 재치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가 “내년에 데뷔 30년이 된다”고 하자 객석에서 “익었어요”라고 반응해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어 웃었다.

“아직도 긴장하고 계시나요? 제 짙은 눈화장 때문에 그런 건가요? 하지만 이 눈화장은 남을 해치진 않습니다.”

객석은 폭소로 뒤흔들렸다. 연주자들과의 호흡도 완벽했다.

웅산이 연주자들에게 “나쁜 남자 성향이 있느냐”고 묻자, 연주자들은 각자의 악기로 답하며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대는 잠시 음악으로 나누는 유머와 대화의 장이 됐다.

앵콜곡 ‘Caruso’… “가수 웅산”이 아닌 “장르 웅산”의 완성

앵콜 무대는 칸초네 ‘Caruso’였다.

웅산 특유의 깊은 중저음이 곡의 정서와 장엄함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원곡의 감정선을 유지하면서도 그녀만의 해석이 더해져 전혀 다른 울림으로 재탄생했다. 이어 그의 히트곡 ‘Yesterday’가 극장을 가득 채우며 공연은 마무리됐다.

이날 무대에는 기타, 통기타, 드럼, 베이스, 콘트라베이스, 전자키보드, 바이올린, 거문고, 장구, 심벌즈, 꽹과리, 색소폰, 하모니카, 셰이커, 여기다 현대무용까지 가세했다. 각기 다른 장르의 개성들이 하나의 파도로 합쳐져 웅산이라는 장르를 완성했다.

초겨울밤, 해오름극장을 가득 채운 박수 소리 속에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오늘 우리는 재즈 공연을 본 것인가, 아니면 ‘웅산’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본 것인가.”

그 답은 이미 관객이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