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오늘

조선의 世子교육을 통해 보는 조현아 사건

  • 글 :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  hwlee@chosun.com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 國初부터 書筵 설치하고 世子교육에 힘썼으나, 世子가 왕위 계승한 경우는 많지 않아
⊙ 체계적인 世子교육 받은 첫 世子는 燕山君… 연산군의 실패는 成宗이 솔선수범하지 못한 탓
⊙ 조선말기의 中興 군주 肅宗… 顯宗의 솔선수범에 영향 받아
⊙ 正祖, “내가 지금 대강이라도 義와 利를 구별할 줄 아는 건 스승 덕분”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행사를 담은 〈孝明世子入學圖帖〉.
지난 연말연초 때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의 두 딸 조현아 조현민 자매의 무절제한 말과 행동이 한파를 녹일 만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할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갑(甲)과 을(乙)의 권력관계, 고질적인 재벌가(財閥家)의 폐쇄성과 권위주의 등이 민낯을 드러내면서 공분의 크기는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다.
 
  어찌 보면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은 이들 자매의 말과 행동은 두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 곳곳에 형성되고 있는 파워그룹의 세습이라는 그림자의 한 단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심도 있는 진단과 처방이 요구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이런 일은 수시로 반복되면서 가뜩이나 2대8이니 1대9니 하는 양극화(兩極化) 혹은 빈부(貧富)격차 심화의 폭발성을 더욱 키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선 전제해야 할 것이 자식교육의 어려움이다. 이는 가진 부모나 없는 부모도 똑같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선조(先祖)들의 자녀교육법에서 지혜를 얻는 것 말고 달리 왕도(王道)가 없는 것이 바로 이 자녀교육이다.
 
  우리는 흔히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을 하고 행실이 안 좋은 사람을 비판할 때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번 ‘조현아 사건’ 때도 그의 나이가 40세임을 감안해 오히려 비난의 화살이 그의 부모에게 향하기도 한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지도층의 자녀교육 문제를 짚어 보기 위해 조선시대 세자(世子)교육을 둘러볼 참인데 그에 앞서 밥상머리 교육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와 관련된 지침을 우리는 《맹자(孟子)》에서 얻을 수 있다. 《맹자》에 이런 지침이 나온다는 말은 곧 조선시대 지식층이 모두 공유했던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그 책 ‘이루장구(離婁章句)’에서 맹자의 제자인 공손추(公孫丑)가 묻는다.
 
  “군자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이에 대해 맹자는 “일의 형편상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면 과연 일의 형편(勢)이 어떻기에 맹자는 자식을 부모가 직접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일까? 맹자의 대답을 이어 간다.
 
 
  孟子, “군자들은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
 
맹자는 “군자는 자식을 바꾸어 가르친다”고 말했다.
  “가르친다는 것은 반드시 바름(正)으로 행해야 한다. 그런데 바름으로 가르치는데도 (자식이 그 가르침을) 행하지 못하면 (부모는) 이어서 화를 내게 되고 (이처럼 부모가) 이어서 화를 내게 되면 도리어 (자식의 감정을) 상하게 된다. (자식이 생각하기를) ‘당신께서는 바름으로 저를 가르치면서 정작 당신께서는 바름에 입각해 행하지 않으시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감정을) 상하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군자들은) 자식을 서로 바꿔서 가르쳤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선한 쪽으로 이끌기 위해 나무라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나무라다 보면 서로 멀어지게 되고 서로 멀어지게 되면 이보다 좋지 못한(不祥) 일도 없다.”
 
  맹자의 이 말은, 공자(孔子)와 맹자를 도덕군자로만 보아 왔던 독자라면 다소 충격일 수 있다. 맹자의 말은 한마디로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게 되면 자식은 속으로 ‘당신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라는 마음을 품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군자들은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자식을 나무라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 봤자 결국은 서로 감정만 상해 멀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맹자가 밥상머리 교육을 하지 말라고 했단 말인가? 다소 모순처럼 보일 수 있는 이 문제를 풀어 가는 길은 ‘밥상머리 교육’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 그대로 밥상 앞에서의 가르침으로 본다면 당장 그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가정교육으로 이해하고 다시 가정교육을 부모의 (말이 아닌) 솔선수범(率先垂範)으로 본다면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부모의 솔선수범이 없는 가운데 아무리 좋은 말과 좋은 기능을 배웠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조현아 사건과 관련해서도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사과해야 할 대목은 어쩌면 이 점과 관련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조선의 선비들은 어려서 무엇을 배웠나
 
  조선에서 자녀교육은 여러 계층별로 다양하게 이뤄졌겠지만 아무래도 국왕의 아들, 그중에서도 왕위(王位)를 잇게 될 세자에 대한 교육에 온 나라의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세자교육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런데 세자의 교육제도를 상세하게 살피기에 앞서 조선 식자층(識者層)의 자제라면 반드시 배워할 것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도와 교육 내용은 서로 얽혀 돌아가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주희(朱熹)가 편찬한 《소학(小學)》은 그 같은 기본적인 교육내용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된다.
 
  먼저 자식이 혼자 힘으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면 오른손을 쓰도록 가르치고, 남자 아이는 속히 대답하고 여자 아이는 천천히 대답하게 가르쳐야 했다.
 
  이어 여섯 살이 되면 숫자와 동서남북을 가르치고, 일곱 살이 되면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는 자리를 같이하면 안 되고 함께 식사를 해서도 안 되었다. 여덟 살이 되면 집을 드나들고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윗사람 뒤에 하도록 하여 사양하는 마음을 가르쳤다. 아홉 살이 되면 초하루와 보름과 육십갑자(六十甲子)를 가르쳤고, 열 살이 되면 집 밖의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를 해야 했다. 즉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면 《맹자》에 나오듯이 부모가 아닌, 집 밖의 스승에게 나아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灑掃와 應對
 
  이렇게 해서 스승에게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쇄소(灑掃)와 응대(應對)다. 모든 이치는 바로 이 두 가지에서 나온다는 것이 주희의 생각이었고 조선시대 내내 강조되었던 것도 이 두 가지다.
 
  유감스럽게도 이를 번역하는 데 문제가 있어 그 중요성이 우리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먼저 쇄소를 말 그대로 ‘물 뿌리고 빗자루로 쓴다’로 풀이하면 쇄소라는 말이 원래 하고자 하는 교육내용이 생략된다. 이 말은 ‘하다못해 빗자루로 마당을 쓸 때도 (먼지가 일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가 있으니 반드시) 그전에 물을 뿌려야 한다’로 풀어야 한다. 이렇게 옮기는 순간 타인(他人)에 대한 배려(仁)가 정확히 포착될 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폭넓게 확대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응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이를 ‘응대하고’ 혹은 ‘응하고 대하며’ 정도로 풀이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역시 그 교육하고자 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생략된다. ‘응’은 작용(作用)이고 ‘대’는 반작용(反作用)이다. 즉 윗사람이 뭔가 액션이 있었으면 반드시 아랫사람은 그에 관해 리액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윗사람의 작은 표정 하나까지 신경 써서 반응해야 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말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들었다 해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응에 올바르게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응대 또한 타인의 존재에 대한 감안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인(仁)을 가르치려는 내용이다.
 
  물론 조선시대 엘리트들은 쇄소나 응대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과정에서도 이 점이 누차 그리고 분명하게 강조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 보자.
 
 
  조선의 첫 世子 李芳碩
 
  고려 때에도 중국 제도를 모방한 세자교육 기관으로서 서연(書筵)이 있었지만 그다지 체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려 말기는 몽골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세자교육은 불가능했고 각자가 적당한 스승을 찾아 옛 글을 배우는 정도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경우도 어린 이방석을 세자에 앉혔지만 그를 체계적으로 교육시킬 생각은 없었고 그저 글방에 보내는 기분으로 신하들 중에 경서(經書)에 뛰어난 자들로 하여금 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 또한 별 효과는 없었던 것인지 태조 4년(1395년) 9월 18일 자 실록(實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간관(諫官)이 세자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상언(上言)하니, 임금이 세자에게 분부하여 매일 서연(書筵)에 나아가 강습을 게을리 말라고 하였다.〉
 
  이듬해 1월 24일 자에는 보다 흥미로운 기록이 등장한다.
 
  〈세자가 서연에서 강(講)을 마치자, 여러 강관(講官)이 모두 나갔는데 우보덕(右輔德) 함부림(咸傅霖)이 나와서 말하였다.
 
  “들은 바가 있사온데 고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세자가 대답하였다.
 
  “할 말은 다 하시오.”
 
  함부림이 말하였다.
 
  “창기(娼妓)가 궁중에 출입한다는데 참말이옵니까?”
 
  세자가 무안한 얼굴로,
 
  “다시는 가까이하지 않겠소.”
 
  하였다.〉
 
  이 두 가지 기록을 통해 볼 때 세자 이방석은 공부도 게을리하는 데다가 행실 또한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이런 것을 한마디로 실덕(失德)이라고 했다. 세자의 세자다움(德)을 잃었다는 뜻이다. 실덕을 하게 될 경우 세자라는 자리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다. 왜냐하면 실덕하면 임금도 임금 자리를 잃게 된다고 본 것이 유학(儒學)교육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자에 대한 교육제도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다. 건국 직후 발표된 문무백관(文武百官)의 관제(官制) 중에 세자관속(世子官屬)이 바로 세자의 교육기관이었다. 여기에 대체적인 골격이 마련되었다.
 
  세자관속은 모두 강학(講學)과 시위(侍衛) 등의 일을 겸해 관장하고 있는데, 좌사(左師) 1명 우사(右師) 1명 정2품이고, 좌빈객(左賓客) 1명 우빈객(右賓客) 1명 종2품이고, 좌보덕(左輔德) 1명 우보덕(右輔德) 1명 종3품이고, 좌필선(左弼善) 1명 우필선(右弼善) 1명 정4품이고, 좌문학(左文學) 1명 우문학(右文學) 1명 정5품이고, 좌사경(左司經) 1명 우사경(右司經) 1명 정6품이고, 좌정자(左正字) 1명 우정자(右正字) 1명 정7품이고, 좌시직(左侍直) 1명 우시직(右侍直) 1명 정8품이고, 서리(書吏) 4명은 8품인데, 거관(去官)하게 한다.
 
  조선의 세자교육이 본격 궤도에 오른 것은 태종(太宗)이 태종5년(1405년) 관제개혁을 단행하고 예조 산하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설치하고서다. 세자시강원은 세자의 공부와 경호 이외에도 행실과 마음가짐을 단속하는 직책들이 많았다. 보덕이나 필선이 바로 그런 쪽을 담당하던 관리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태종의 세자교육은 한마디로 실패였다. 세자는 결국 이 과정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해 폐세자(廢世子)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고 전혀 세자교육을 받은 바 없는 세종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그나마 세자교육의 효과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임금은 문종(文宗)이다. 하지만 문종은 재위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의 아들인 단종(端宗) 또한 비명에 가야 했고 역시 세자교육을 받은 바 없는 세조(世祖)가 왕위를 이어 간다. 세조는 의경(懿敬)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나 어린 나이에 잃었다. 그후 역시 세자교육을 제대로 받은 바 없는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이 뒤를 이어 간다.
 
 
  燕山君의 실패
 
조선 중기의 文臣 金仁厚가 세자 시절의 仁宗을 가르치는 모습. 전남 장성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조선 건국 이래 원자(元子)로 태어나 세자교육을 고스란히 받고 마침내 왕위에 올라 일정 기간 통치를 한 임금은 놀랍게도 연산군(燕山君)이 처음이다. 연산군은 누가 보아도 철저하게 실패한 임금이다. 그렇다면 그의 실패는 세자시강원의 실패일까?
 
  여기서 우리는 앞서 맹자의 지적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좋은 공부를 하더라도 부모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공부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성종의 행태를 보면서 어린 세자는 분명 마음속으로 ‘당신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라는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연산군을 광기(狂氣)로 설명하는데 실은 어린 시절의 이 같은 트라우마가 결국 연산군을 권력 니힐리즘으로 몰아갔고 실패한 임금의 길을 걷도록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연산군의 실패는 아버지 성종의 그릇된 처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종 중국의 황태자교육이나 조선의 세자교육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교육제도의 뛰어남만을 강조하는 책들을 본다. 그것은 현실을 감안하지 못한 공리공담(空理空談)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교육을 받는다 한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음을 간과한 주장일 뿐이다. 조현아씨의 경우도 외적(外的)인 학력과 관계없이 부모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다시 조선시대 세자교육을 좀 더 살펴보자.
 
  중종(中宗)은 연산군의 이복(異腹)동생으로 박원종(朴元宗) 등이 일으킨 반정(反正)으로 인해 전혀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세자교육을 받은 바 없지만 끈질긴 정치력으로 왕위를 지켜 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인종(仁宗)은 연산군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로 태어나 세자교육을 받고서 왕위에 오르지만 불과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교육의 효과를 확인할 수가 없는 셈이다. 이어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소생인 명종(明宗)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만 세자교육은 받지 못했다. 나이 또한 열두 살에 불과해 사실상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재위기간을 다 보내고 만다. 게다가 그의 아들인 순회(順懷)세자가 어려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조선 왕실의 적통(嫡統)이 끊어지고 만다.
 
 
  傍系承統
 
  선조(宣祖)는 중종과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 사이에서 난 덕흥군(德興君)의 아들로 명종의 뒤를 이었다. 흔히 말하는 방계승통(傍系承統)이다. 이때부터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때마침 당쟁(黨爭)이 시작됐다. 여기에 임진왜란까지 겹치며 조선 왕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광해군(光海君)이 전란(戰亂) 때 일시적으로 세자책봉을 받지만 체계적인 세자교육은 받지 못했다. 선조의 뜻은 적자에게 왕위를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목(仁穆)왕후 김씨를 맞아들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지만 왕위는 광해군에게 넘어갔다. 광해군을 둘러싼 북인(北人) 세력은 결국 영창대군을 제거함으로써 적통의 씨앗을 없애 버린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인조(仁祖)는 선조와 인빈(仁嬪) 김씨 사이에서 난 정원군(定遠君)의 아들로 역시 방계승통에 해당한다. 물론 그 또한 세자교육을 받은 바 없다. 그의 아들 중에 정식 세자교육을 받은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의문사(疑問死)했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조의 뒤를 이으니 그가 효종(孝宗)이다. 이후 조금씩 왕실이 안정되어 세자교육을 받은 적통 현종(顯宗)이 왕위를 잇고 다시 숙종(肅宗)이 왕위를 잇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임금이 바로 숙종이다. 연산군, 인종에 이어 조선에서는 세 번째로 원자로 태어나 세자교육을 받고 열네 살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태종에 버금가는 강력한 왕권(王權)을 확립하게 되고 재위(在位)기간 또한 46년에 이른다. 조선 임금 27명 중에서 모든 것이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라 끝까지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간 인물은 어쩌면 숙종 단 한 사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종7년(1666년) 당시 여섯 살이던 숙종이 세자로서 어떤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에게 배운 肅宗
 
숙종의 스승이었던 尤庵 宋時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를 겸 세자사로, 좌의정 홍명하(洪命夏)를 겸 세자부로, 송시열(宋時烈)을 이사(貳師)로,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를 찬선으로, 김수항(金壽恒)을 겸 좌빈객으로, 박장원(朴長遠)을 겸 좌부빈객으로, 이정기(李廷夔)를 겸 우부빈객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진선으로, 이단상(李端相)을 겸 보덕으로, 홍만용(洪萬容)을 겸 문학으로, 김익렴(金益廉)을 필선으로, 김석주(金錫胄)를 문학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사서(司書)로, 이숙(李)을 보덕으로, 이단하(李端夏)를 겸 사서로, 신익상(申翼相)을 설서로, 윤경교(尹敬敎)를 겸 설서로, 이익(李翊)을 집의 겸 필선으로 삼았다.〉
 
  당대 최고의 정치인은 물론 송시열·이유태·김수항·김만중·이익 등 그 시대를 대표하던 최고의 학자들이 세자의 교육을 맡았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숙종은 경연(經筵)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서 남인(南人) 계통의 허목(許穆)과 윤휴(尹鑴) 등에게 배움을 이어 갔다. 숙종1년(1675년) 10월 8일 승정원은 경연청(經筵廳) 공사로 인해 당분간 경연을 중단하는 게 좋겠다는 청을 올렸다. 이에 대한 열다섯 살 숙종의 답변이다.
 
  “하루 경연을 정지하면 학문 공부가 중단된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道)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고 하였다. 내가 밤낮으로 생각하며 이를 마음에 새겼기 때문에, 밤중에 비로소 잠을 자고, 닭이 처음 울면 곧 책을 펴고 성현(聖賢)을 대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혹시 옛사람의 일컬은바, ‘오늘 배우지 아니하여도 내일이 있다고 이르지 말라’는 경계에 어긋남이 있을까 봐 두려워한 것이었다. 역사(役事)를 마칠 동안 단지 주강(晝講)만 여차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
 
  필자는 실록을 통해 조선의 중흥(中興)을 일으킨 군주는 영조(英祖)나 정조(正祖)가 아니라 숙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흔히 숙종을 치마폭에 둘러싸인 향락군주로 생각하는데 이는 환국(換局)정치를 통해 힘을 잃게 된 서인(西人)이나 노론(老論)세력이 만들어 낸 이미지 조작일 뿐이다. 숙종은 선조 이래 무너져 내린 조선 왕실의 권력을 처음으로 강화하여 신하들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강력하게 전개해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회복하고 조선을 화폐 사회로 전환시켰다. 태종이나 세종도 여러 차례 시도하려다가 실패한 화폐 도입이 마침내 숙종에 의해 이뤄짐으로써 조선은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영·정조 르네상스란 바로 이 같은 숙종의 치적에 힘입은 바일 뿐이다.
 
 
  현종과 숙종
 
  이렇게 본다면 정신적으로 강명(剛明)한 사람이 올바른 세자교육을 받는다면 분명 제대로 된 리더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아버지 현종의 솔선수범이다. 현종은 조선 임금 중에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았고 명성(明聖)왕후 김씨만을 사랑했다. 이 같은 현종의 모습은 왕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숙종 또한 45년의 재위에도 불구하고 후궁은 두어 명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숙종도 큰 오점(汚點)을 남겼다. 장희빈(張禧嬪)을 죽인 일이다. 이는 성종이 윤씨를 폐비시키고 이어 사약(賜藥)을 내린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가운데 세자교육을 어렵사리 받은 경종(景宗)이 뒤를 잇지만 노론과 소론(少論)의 정쟁(政爭)에 시달리다가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역시 세자교육은커녕 대궐 밖에서 살던 영조가 왕위에 오른다. 아마도 경종이 강한 성품에다가 재위기간이 길었다면 연산군 못지않은 피의 정치가 나타났을지 모른다. 그리고 노론은 이 점이 두려웠기 때문에 결국 영조를 추대해 임금의 자리에 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조는 조선 임금들 중에서 재위기간도 가장 길고 가장 장수했다. 51년7개월이나 왕위에 있었고 여든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효장세자가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를 이어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도세자가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 버렸다.
 
  아마도 다른 후궁에게서 아들을 얻었다면 영조는 왕위를 정조에게 물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조는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만 두었고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도 아들 하나만 두었다. 나머지 귀인 조씨나 폐숙의(廢淑儀) 문씨와의 사이에 딸들은 있었지만 아들은 없었다. 싫건 좋건 영조의 후사(後嗣)는 손자인 정조가 이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원래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 의소세손이 있었지만 일찍 죽는 바람에 정조가 세손(世孫)의 지위를 계승했다.
 
 
  正祖의 스승 남유용
 
英祖는 《소학》을 수백번 읽을 만큼 《소학》을 중시했다.
  정조는 영조28년(1752년) 9월 22일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울음소리가 큰 쇠북소리처럼 우렁차 궐내 사람들이 다 놀라서 웅성거렸으며 ‘우뚝한 콧날에 눈자위가 펑퍼짐한 눈, 크고 깊숙한 입’ 등 의젓한 모습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영조는 직접 와서 손자의 이마를 만지며 “꼭 나를 닮았다”고 좋아하면서 “이 아들을 낳았으니 종묘사직에 대한 걱정은 없게 되었다”고 했다.
 
  백일도 채 안 되어 서고 1년도 안 되어 걸었으며 그때부터도 문자만 보면 좋아라 했고 공자처럼 제물 차리는 놀이를 즐겼다. 두 살 때인 계유년(1753년) 인원왕후(숙종비)에게 휘호를 올릴 때는 유모의 부축 없이 절하고 꿇어앉고 오르고 내리는 예를 행하자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해마지 않았다.
 
  세 살 때인 갑술년 8월에 보양청(輔養廳)이 설치돼 학문 수련을 시작했다. 이때 보양관으로 선임된 사람은 민우수와 남유용(南有容)이다. 세손의 첫 번째 스승들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정신적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중 남유용(1698년 숙종24년~1773년 영조49년)은 돈녕부 동지사를 지낸 남한기(南漢紀)의 아들로 탕평책(蕩平策)을 정면으로 부정한 노론 강경파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영조16년(1740년)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간관은 시비를 끝까지 따지는 것을 임무로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영조의 탕평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때는 영조가 탕평책을 국시(國是)로 생각할 정도였기 때문에 남유용은 해남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2년 후인 1742년에 유배 생활을 끝낸 남유용은 이후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거쳐 승지(承旨), 대사성(大司成), 예조참판, 예문관 및 홍문관 제학(提學)을 거쳐 이때 원손보양관으로 선발됐다. 이후 세손이 열 살이 될 때까지 유학의 기초를 가르쳤다. 따라서 세손의 기본 정신세계에는 노론 강경파(준론)의 시각이 깊이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스승에 대한 正祖의 감사
 
  이후 남유용은 대사헌, 호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지냈고 1767년 봉조하(奉朝賀)로 임명됐다. 문장과 시(詩)에 뛰어났으며, 청렴하여 그가 죽은 후에도 집이 가난하여 자신의 문집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훗날 정조가 알고서 《뇌연집(雷淵集)》을 출간해 주고 직접 서문까지 써 주었다.
 
  그 서문에서 정조는 남유용으로부터 세 살과 네 살 때 《효경》과 《소학》을 배웠다면서 당시 공부하던 장면을 회고하고 있다.
 
  〈공은 언제나 공복(公服) 차림으로 강석(講席)에 들어와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는 입으로 일러 주고 손가락으로 쓰면서 음과 뜻을 깨우쳐 주었는데 조금도 권태로워하지 않고 지성스럽게 말해 주었으니 지금도 그때 일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정조는 “내가 지금 대강이라도 의(義)와 이(利)를 구별할 줄 알고 치(治)와 난(亂)이 어떻게 하여 갈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때 귀에 먼저 들어온 그 말 때문인 것이 대부분이다”며 남유용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회고했다. 당시 영조는 “원손(元孫)이 강(講)을 마치고 나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지금 겨우 네 살인데도 얼굴 생김이나 그 기상이 보통 아이들과는 크게 다르니 하늘이 혹시 우리에게 복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라며 늘 기뻐했다.
 
  왕세손이 다섯 살이 되던 영조32년(1756년) 1월 25일 남유용은 세자(사도세자)에게 글을 올려 보양관 증원을 요청했고 2월 14일 당시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천거로 예조판서 이태중(李台重)이 보양관을 겸하게 된다. 이태중도 노론 강경파에 속한다.
 
 
  正祖의 世孫수업
 
  이처럼 원손의 학문 지도는 남유용이 주도했고 원손은 영조35년(1759년) 여덟 살이 될 때까지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 《논어(論語)》 등을 독파했다. 그때마다 영조는 원손을 불러 자기 앞에서 외워 보도록 한 다음 남유용에게 큰 선물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윤(閏)6월 22일, 원손은 세손(世孫)으로 책봉된다. 이때부터는 공식 사부(師傅)를 두어 보다 체계적인 학문 연마에 들어가게 된다. 세자의 경우 시강원이라고 했고 세손의 경우 강서원(講書院)으로 부르게 했다.
 
  그런데 영조는 그에 앞서 2월 19일 세손에 책봉될 원손의 교육을 맡게 될 좌우 유선(諭善)과 좌우 권독(勸讀)을 강서원에 설치토록 하고 좌우 유선에는 대제학 김양택과 부제학 서지수, 좌우 권독에는 전 집의 김원행과 전 장령 송명흠을 임명했다. 그리고 “세손 책봉 전이라도 직무를 수행토록 하라”고 명했다. 유선은 행실을 일깨우는 자리이고 공부는 권독이 맡아서 가르쳤다. 남유용에 이어 김원행과 송명흠이 세자의 학문을 돕게 된 것이다.
 
  왕세손의 《소학》 공부는 영조36년(1760년) 6월 21일 끝난다. 이날 강서원에서는 《대학》을 시작하고 동시에 《사략(史略)》도 일부 병행하겠다는 뜻을 영조에게 밝혔다. 이에 영조는 《대학》의 경우 아직은 어려울 수 있으니 주석(註釋)은 빼고 본문의 뜻만 가르치라고 명하면서 틈틈이 《소학》을 반복해서 읽도록 하라고 덧붙였다. 영조는 《소학》을 수백 번 읽을 만큼 《소학》을 중시했다.
 
  왕세손은 열 살 때인 영조37년(1761년) 3월 10일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했다. 공식적으로 학생이 된 셈이다. 3월 18일에는 관례를 행했다. 그해 말에는 김시묵(金時默)의 딸을 세손빈으로 골라 혼례를 올린다. 이 무렵 세손의 학문은 《논어》나 《맹자》 정도는 자유자재로 외우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사실 이때 사도세자의 비행(非行)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조는 더욱더 세손에게 집착했다. 수시로 세손을 불러 공부의 진도를 확인하고 또 그 뜻을 제대로 새기고 있는지를 점검했다.
 
 
  正祖, 醫學書까지 공부
 
好學 군주였던 正祖.
  사실 세손의 학문은 세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세자의 광포(狂暴)한 행위가 점점 심해 가자 영조는 세손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것은 간접적으로나마 세자의 명을 단축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훗날 정조가 의식의 밑바닥에서나마 자신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인지 모른다. 영조가 세자의 죽음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결과적으로는 똑똑한 세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날의 대화가 있고 두어 달 후인 윤5월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게 된다.
 
  영조38년(1762년) 7월 24일 영조는 세손을 동궁(東宮)으로 칭하도록 명한다. 세손이면서 사실상 ‘세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세손강서원도 이제 세자시강원으로 바뀌고 사부나 빈객의 수준도 한 단계 올라간다.
 
  이때 시강원의 관원들은 이강, 신천금, 이희, 정술조 등이었다. 그리고 11월 7일에는 영조가 특명을 내려 황인검도 빈객으로 세자의 학문 수련에 도움을 주도록 조치했다. 이때부터 동궁의 학문은 《서경(書經)》 《시경(詩經)》 등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공부를 가르치는 업무는 여전히 박성원이 맡았다.
 
  한편 칠순을 훌쩍 넘긴 영조는 병술년(영조42년, 1766년)부터 잦은 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때 동궁의 나이 열다섯으로 어지간한 경사(經史)는 다 읽었다. 문리(文理)가 트인 지는 이미 오래였다. 영조의 병수발을 하게 된 어린 동궁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펴 놓고 직접 의약(醫藥)에 대한 지식을 넓혀 가기 시작한다. 정조가 그 어떤 임금보다 의약에 밝게 된 까닭은 이 당시 할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면서 의약서를 집중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병수발은 영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1년 동안 이어졌다.
 
  정조는 《동의보감》을 반복해 읽으며 의학의 기본지식을 익혔고 이어 증상과 처방별로 분류를 하여 4권의 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후 탕약(湯藥)에 대해서만 별도로 정리하여 5권의 책으로 만들어 두기도 했다. 훗날 정조는 이를 《수민묘전(壽民妙詮)》이라고 이름 지었다. 백성들의 고통을 종종 질병에 비유하곤 했던 정조는 당시를 회상하며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백성들을 곤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전반적으로 정조는 세손 및 동궁 시절 4서5경과 《자치통감(資治統監)》을 비롯한 역사책에 대한 공부는 거의 마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공부의 힘이 있었기에 정조는 아버지의 비극을 극복하고 임금다운 임금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 이후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본격화하였기 때문에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 순종(純宗)의 경우 세자 공부를 탐색한다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조선 세자교육의 성공과 실패를 되짚어 보면 성공적인 리더의 탄생은 어느 하나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듯하다. 타고난 성품에 가정의 분위기 및 부모의 솔선수범이 있어야 하고 이어 그게 걸맞은 학습이 이뤄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본인이 그 제반 사항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떠맡으려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어쩌면 조현아 사건을 지켜보면서 누구도 자신 있게 자식은 이렇게 키워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현아나 조양호 회장에 대한 비난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 또 자기 자식을 돌아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숙종이나 정조의 경우에서 보듯이 좋은 스승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때나 지금이나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임을 확언할 수 있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