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시절 지역차별 경험한 후 DJ 대통령 만들기 통해 지역차별 없애기로 결심
⊙ DJ, 1968년부터 黨權·大權 도전 대비해 전국 조직 구축 착수
⊙ DJ, “내 주변에 한화갑 빼면 대학 나온 사람 있나?”라면서도 거리 둬
⊙ 1979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됐을 때 박철언 검사에게 조사 받아
한화갑
⊙ 75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14~16대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 국회운영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총재특보단장,
同사무총장,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同대표, 민주당 대표 역임.
⊙ DJ, 1968년부터 黨權·大權 도전 대비해 전국 조직 구축 착수
⊙ DJ, “내 주변에 한화갑 빼면 대학 나온 사람 있나?”라면서도 거리 둬
⊙ 1979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됐을 때 박철언 검사에게 조사 받아
한화갑
⊙ 75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14~16대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 국회운영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총재특보단장,
同사무총장,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同대표, 민주당 대표 역임.
1963년 어느 날, 당시 목포 동광고등학교(현 홍일고등학교) 교감으로 있던 제갈현용 선생님이 서울에 올라왔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 출신인 제갈 선생님은 DJ의 목포상고 선배이기도 했다. 내 고향인 우이도에 멸치잡이 어장을 갖고 있어 우리 집안과도 친분이 있었다. 제갈 선생님은 “김대중 의원을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DJ는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지만, 그 직후 발생한 5·16쿠데타로 등원(登院)하지도 못하는 불운(不運)을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는 신안이나 목포의 젊은이들에게는 우상(偶像)이었다. 때문에 나는 선뜻 제갈 선생님을 따라나섰다.
사실 나는 그보다 2년쯤 전에도 DJ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대학 3학년이던 1961년, 목포에서 올라온 친지 분이 DJ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교동에 있는 DJ 자택을 찾아갔는데, 마침 DJ가 외출 중이어서 뵙지는 못했다.
제갈 선생을 따라 DJ를 처음 뵙는 자리에서 우이도 출신의 서울대 졸업생이라고 말씀드렸다. DJ가 물었다.
“전공이 뭐지요?” “외교학입니다.”
그날 DJ와 나눈 얘기를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든 소신을 가지라는 것, 지향하는 바 목표가 뚜렷해야 지성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DJ의 인상은 강렬했다.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흡인력 있게 말하는 열정적인 태도, 타는 듯한 눈빛, 용광로 같은 열기…. 어쩌면 그때 내 운명이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라도 사람은 쓰지 않는다”
내 고향은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 DJ의 고향인 하의도에서는 10km쯤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나는 그 섬에서 신식교육을 받은 첫 학생이자, 대학에 들어간 첫 학생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화목(火木), 즉 땔감용 나무를 베어다가 목포에 내다파는 일을 하셨다.
그런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할 일은 마땅치 않았다. 외무고시를 보려 했지만, 병역(兵役)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기회를 놓쳤다. 낙도(落島)까지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고, 병역 자원은 넘쳐나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몇 년 지나는 사이에 나는 병역면제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고시(高試)에 합격해 현직 공무원으로 있던 사람도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으면 군대에 가야 했던 5·16 직후의 살벌한 상황 속에서 외무고시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1965년에는 잠시 목포에 있던 자기(瓷器)회사인 행남사(현 행남자기)에 취직했지만, 기존 직원들의 텃세에 밀려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막연하게나마 정치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대학 시절 경험한 지역차별 때문이었다. 어렵게 가정교사 자리를 구했는데, 고향이 어디냐고 묻기에 전라도라고 했더니, “미안하지만 우리집에서는 전라도 사람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았다. 재일(在日)동포들은 일본 땅에서 차별받는다지만, 나는 내 나라 땅에서 사투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다니!
‘이런 지역차별의 악습(惡習)은 내 대(代)에서 끝내자’는 생각과 함께, 떠오르는 분이 있었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부통령을 지내면서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인촌 선생은 당시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인촌 선생은 전라도 출신이지만, 아무도 그분의 출신지역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좋은 정치를 하면, 전라도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없어지지 않겠나?’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그러면 누가 있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DJ를 떠올렸다. 그와 함께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에 내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수시로 DJ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7대 총선 때 DJ의 선거운동원으로 일해
1967년 제7대 총선(總選)은 DJ를 전국적 스타로 만든 선거였다. 1963년 제6대 총선에서 처음 등원한 DJ는 사실상 초선(初選) 의원이었지만, 날카로운 대(對)정부질문 등으로 박정희(朴正熙) 정권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DJ를 낙선시키기 위해 예비역 장성 출신으로 내각사무처장(총무처 장관)을 지낸 김병삼(金炳三)씨를 공천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을 이끌고 목포에 내려와 국무회의를 주재하는가 하면,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가 내려와 삼학도다리 기공식을 갖는 등 노골적인 관권(官權)선거를 했다. 박 대통령은 “공화당 의원 10명, 20명이 안 돼도 좋으니, DJ는 반드시 떨어뜨려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DJ는 “유달산과 영산강과 심학도가 넋이 있고 뜻이 있으면 나를 보호해 달라”는 연설로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결국 DJ는 압도적 표차로 김병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나는 DJ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했다. 캠프의 정식 비서나 참모는 아니었고, 요즘 말로 하면 자원봉사자였다. 하여튼 이게 내가 DJ를 위해 일한 첫 사건이었다.
제7대 총선 후 유진오(兪鎭午) 신민당 당수는 DJ를 원내총무로 지명했지만, 의원총회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 당내 다수(多數) 세력이었던 진산(珍山)계 의원들이 김영삼(金泳三·YS) 의원을 밀었던 것이다.
하지만 DJ는 낙담하지 않고 1968년 말부터 전국 조직 구축(構築)에 들어갔다. 장차 당권(黨權)이나 대권(大權)에 도전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경상남도를 맡았다. 신민당 대의원으로 있거나 장차 대의원을 할 만한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사실상 전당대회 때 현역 의원이나 계파 보스의 거수기(擧手機)에 불과하던 그들은 중앙정치무대의 떠오르는 신성(新星)인 DJ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대의원들의 집에까지 찾아가면서 밑바닥을 공략(攻略)한 것은 우리(DJ측)가 최초였다.
당직(黨職)에서 소외되어 있던 DJ는 ‘강연정치’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 ‘3선(選) 개헌(改憲)의 부당성’ 같은 주제를 가지고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시국(時局)강연을 자주 열었다. 대개 그런 행사가 있을 때에는 현지 지구당에서 비용을 부담하고, 포스터 등을 준비하는 게 당시의 관례였다. 하지만 DJ가 강연을 할 때에는 비용을 DJ가 전부 부담했다. 포스터도 우리가 인쇄해서 가지고 내려갔다. 현지 당원들을 행사 준비에 동원할 때에는 일당을 줬고, 막걸리라도 대접했다. 때문에 다른 정치인들은 “DJ가 당원들 망쳐 놓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시국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DJ는 “3선 개헌은 역사의 반역”이라고 규탄했고,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난 후에는 “경부고속도로도 누워 있으니 그렇지, 서 있었으면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군중들은 DJ의 통쾌한 연설에 열광했다.
DJ 지지바람 느껴
사실 DJ는 민주당 시절부터 소장파(少壯派)의 대표주자였던 이철승(李哲承) 의원이나, ‘진산계의 황태자’ 소리를 듣던 YS에 비하면 후발(後發)주자였다. YS가 ‘40대(代) 기수론(旗手論)’을 내세우며 대권 도전을 선언한 후 DJ도 대권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현역 의원 중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은 김상현(金相賢) 의원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DJ는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대선(大選) 후보가 됐다.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유진산(柳珍山) 당수는 후보로 나선 YS, DJ, 이철승 세 사람에게 후보 결정은 자기에게 일임해 달라고 했다. YS와 이철승 의원은 동의했지만, DJ는 거절했다. 그때 나는 부산에서 DJ를 위한 조직을 만들고 있었는데, 대의원들 사이에서 “사내가 저래야지, 어떻게 사쿠라에게 운명을 맡기나” “YS가 의원 오래 하고 총무(원내총무)도 했지만, DJ가 훨씬 똑똑하다”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DJ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태평양에서 DJ 지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DJ를 후보로 만들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뛰었다. 대의원들의 성명과 주소를 외우고 다녔다. 절대 대의원들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DJ에게 여비를 받아 내려갔다. 내가 밥과 술을 샀다. 인사를 갈 때에는 3kg짜리 백설표 설탕을 짊어지고 갔다. 무조건 큰절을 올리며 ‘선생님’ ‘사모님’이라고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왜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 와서 이러느냐”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자네가 꼭 경상도 사람 같다”며 반겨 주었다. 이런 노력이 주효해서 DJ는 경남의 70여 표 가운데 50표 이상을 얻을 수 있었다. DJ가 신민당 경선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일찍부터 바닥표를 다져 온 덕분이었다.
YS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면서 “김대중 후보를 위해서라면 무주 구천동까지 가서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유세장에서 YS는 DJ 지지를 호소하면서도 “언젠가는 김영삼이도 대통령 후보가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토를 달았다.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1971년 4월 대선에서 DJ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94만여 표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결혼
1971년 대선이 끝난 직후, 나는 DJ의 개인사무실인 내외문제연구소로 출근했다. 직함은 전문위원. 여론조사 같은 것을 했지만,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정철기 동지가 말했다. 정 동지는 DJ의 후보 비서실 기획비서로 일했었다.
“자네나 나나 지금은 별 볼 일이 없네만…. 그래도 자네한테 미인(美人)이 생긴다면 먹여살릴 수는 있겠지?”
며칠 후 그는 자기의 사촌 여동생을 소개해 주었다. 제 눈에 안경이었는지는 몰라도, 잉그리드 버그먼과 소피아 로렌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미인이었다. 그녀는 중학교 미술교사였다. 사랑을 키워 나가던 우리는 결혼 날짜를 잡았다. 1972년 11월 3일.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날벼락이 떨어졌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평소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던 야당 정치인들이나 DJ와 가까운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로 잡혀 가 고초를 겪었다. 마침 DJ는 신병(身病)치료차 일본에 가 있었다. 나는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자마자 정철기 동지와 함께 도망을 쳤다. 서울 교외를 떠돌면서 한 달여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검거 선풍이 한풀 꺾일 즈음인 11월 말 예비 처가(妻家)의 담장을 넘었다. 거기서 몇 달을 눌러 지냈다.
그리고 1973년 4월, 나는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야당 원로인 홍익표 선생이 맡아 주셨다. 인기 있는 여선생님이었던 아내의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학생과 학부모들이 몰려왔지만, 요시찰(要視察) 대상인 신랑 측 하객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아내에게 “신랑 될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면서 결혼을 만류했다고 한다.
공보비서 시절
1971년 대선이 끝나면서 DJ캠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자기 갈 길을 찾아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DJ 비서실의 일원이 됐다. 사실 1987년까지 DJ의 비서실 조직은 단출했다. 비서실에 상근하는 사람이라고는 권노갑(權魯甲), 김옥두(金玉斗) 선배와 나 정도였다.
유신 시절 나는 공보비서 역할을 했다. 외신(外信) 기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DJ는 “이 사람이 내 공보비서인데, 서울대를 나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주로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일본대사관 관계자들과 만나 정보를 교환하거나,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일본대사관, 문화원 등을 드나들면서 한국 관련 외신보도들을 복사해 오는 일을 했다. 당시에도 외국의 신문이나 잡지들이 국내로 들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정부를 불편하게 하는 기사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부분을 지워서 시중에 배포했다. 때문에 정보에 굶주렸던 DJ는 나를 시켜서 외신보도들을 구해 오게 했다. 권노갑 선배도 비슷한 일을 많이 했다. 김옥두 선배는 주로 동교동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몇 안 되는 비서진 안에서 서울대 출신은 나 하나뿐이었다. DJ도 “내 주변에 한화갑 빼면 대학 나온 사람이 있나?”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조금만 잘못하면 ‘서울대 출신이 뭐 그러냐?’는 눈총을 느낄 수 있었다. DJ도 학력 콤플렉스 때문인지 조금은 내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한참 후일의 얘기지만, 한번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DJ는 “일류대 나왔다고 재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2류·3류 대학 나온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을 잘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기에도 일류대 나온 사람이 하나 있구먼”이라고 했다. 꼭 나를 두고 하는 얘기 같아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럴수록 나는 ‘내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잊자. DJ는 무오류(無誤謬)다’라고 다짐하곤 했다.
“한화갑은 사쿠라라는데…”
납치사건 이후 귀국한 DJ는 재야(在野)세력과 연대(連帶)해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76년의 3·1 구국선언사건(명동선언) 등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에서 나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재야인사들과의 비밀스러운 접촉 같은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어쩌면 DJ는 내가 그런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속상한 얘기지만 동교동 안에는 나를 미덥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다. 내가 서울대 출신 지식인이라 대가 약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정권이 교사인 아내에게 압력을 가하면 내가 굴복하기 쉽다고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중앙정보부 계장이라는 사람이 학교로 아내를 찾아가서 “남편이 학벌도 좋은데 고생하고 있다. 마음만 바꾸면 좋은 데 취직시켜 주겠다”고 회유한 적도 있다. 또 외무고시에 합격한 동생(한화길 전 주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도 나 때문에 인사상 불이익을 많이 받았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는 동교동을 지켰다. 남들은 그런 나를 ‘동교동 가신(家臣)’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외로웠다. 자기들끼리 쏙닥거리다가 내가 들어서면 입을 다무는 일도 있었다. “한화갑이는 사쿠라다. 수상쩍은 사람들과 만난다”는 말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DJ도 목포의 지인(知人)에게 “한화갑이가 사쿠라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몇 명 안 되는 동교동 안에서 나는 비주류(非主流)였다.
명동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던 DJ는 1977년 말 지병(持病)인 관절염이 도져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수인(囚人) 신분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김대중 선생이 오셨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1978년 1월 1일 DJ에게 새해인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종로5가 서울대병원으로 몰렸다. 김옥두 비서가 세배객들을 DJ가 있는 병실로 안내하려 했지만, 교도관들에게 저지당했다. 김옥두 비서는 “김대중 선생님이 병실 유리문으로 얼굴만 보여주시면, 세배객들은 복도에서 세배 드리도록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날 현장에 늦게 도착한 나는 김옥두 비서의 말에 따라 교도관에게 서울구치소 상급자에게 우리 뜻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교도관은 구치소로 전화를 걸어 보더니, 역시 안 되겠다고 했다. 그날 있었던 일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게 며칠 후 ‘특수공무집행방해’로 둔갑해 버렸다. 나와 김옥두 비서가 계획적으로 세배인파를 조직적으로 모았다는 죄목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오히려 몰려드는 세배객들을 달래고 저지했었다. 하지만 교도관은 우리가 세배객들을 이끌고 밀고 들어왔다고 진술했다. 뒤늦게 현장에 온 김종완(전 국회의원)도 주모자로 몰렸다. 이 사건으로 나는 8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박철언 검사
출감한 지 3개월 후인 1978년 12월 29일 나는 다시 투옥됐다. 그해 12월 27일 박정희 정권은 제9대 대통령취임식을 앞두고 서울대병원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DJ를 석방했다. DJ는 내외신 기자들에게 출감소감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28일에는 ‘김대중 선생 출감 환영 기도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희호 여사의 제안으로 우리는 출감성명서를 기도회 참석자들에게 배포하기로 했다. 비서진이 밤새워 성명서를 등사기로 인쇄했다. 나는 기도회장에 나가 성명서를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이것을 ‘긴급조치 9호 위반, 유언비어 유포’로 몰아 나를 구속해 버렸다. 당시 나를 담당했던 검사가 바로 박철언(朴哲彦)씨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선생, 이것은 정치적인 사건이요. 한 선생이 입건되느냐 안 되느냐, 입건이 되면 어느 정도나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한 선생에게 달렸소. 한 선생이 재범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오. 그렇기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것이 싫소. 그러나 감옥에 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그곳 생활이 고달프다 해서 지금까지 쌓아 온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싶지는 않소.”
박 검사는 조사를 마친 후 내게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조서를 보니 ‘지금도 제가 한 일을 자성(自省)하고 있고…’ 운운하는 식으로 둔갑해 있었다. 나중에 그와 의원생활을 같이한 것은 물론, DJP연대에 따라 사실상 한솥밥을 먹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구치소와 법원을 오고가는 호송버스 안에서 운전기사는 당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광복30년>을 틀어 주었다. 그는 “여러분이 지금 이리 고생하지만, 곧 여러분 이야기도 방송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고등법원에서 내 항고(抗告)를 기각(棄却)하고 1심 형량을 확정한 날이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그보다 1주일 전에 교도소에서 운동시간에 마주친 김종완씨가 “박정희가 죽는 꿈을 꾸었다”면서 “박정희가 곧 죽을 모양”이라고 말했다. 10·26 직후 김종완씨를 다시 보았는데, “박정희가 죽었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면회를 왔는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니까 교도관들이 황급하게 못하게 막더군. 박정희가 죽은 거야!”
그해 12월 3일 나는 감옥 문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서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DJ는 “고생했다. 무얼 느꼈느냐?”고 묻더니, “곧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될 것이다. 그러면 바로 동교동에 들러라”라고 말했다.
12월 8일, 악명 높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됐다. 동교동으로 DJ를 찾아갔다. DJ는 “내가 구금되어 있을 때 만났던 라마자 주한 미국대사관 1등서기관을 만나 보라”고 했다. 주한미국대사관을 찾아갔더니 라마자는 휴가 중이었다. 라마자 대신 스티븐슨 1등서기관을 만났더니, DJ와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와의 만남에 대해 얘기했다. 두 분은 도청을 우려해 대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게 12월 17일 경이었다.
‘서울의 봄’은 왔지만…
새해로 접어들면서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나날이 높아 갔다. YS는 “‘서울의 봄’이 왔다”고 반겼지만, DJ는 “정말 봄이 온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무렵 DJ는 우리 비서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내게는 조강지처(糟糠之妻)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러분이 실력이 있어야 나중에 일을 시킬 수 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라.” 옳은 얘기긴 하지만 조금 서운했다. 나는 “기관이 실력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자리를 주면 일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DJ는 화를 내면서 “그건 내가 할 일이니, 자네들은 실력이나 쌓으라”고 말했다. 나중에 권노갑 선배가 “고맙네. 우리는 말을 못하는데…”라고 말했다.
한번은 DJ에게 “YS 비서들은 국회의원도 하고 그러는데…”라고 투정(?)을 부렸다. DJ는 “내가 원내총무를 해 봤나, 총재를 해 봤나? 내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만들어 주나?”라고 역정을 냈다.
5월 들면서 학생시위가 격화되었다. 5월 13·14일 경, DJ는 비서들에게 “데모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살펴보고 오라. 아무래도 군부(軍部)가 나올 구실을 주게 될 것 같아 걱정이다”고 말했다. 덕수궁 근처에서 학생들이 시위하는 것을 보았다. 시위는 평화로웠지만, 열기는 뜨거웠다. 뭔지 모를 불안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보고를 받는 DJ도 걱정스러워했다. 나중에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으로 잡혀 들어간 후, 중앙정보부는 DJ가 학생들을 사주(使嗾)해 폭력혁명을 일으키려 했다는 진술을 얻어내려 고문(拷問)을 가했다. 어쩔 수 없이 이때의 일을 얘기했더니, 그들은 “학생들의 데모가 격렬하더라고 보고했더니 김대중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운운하는 식으로 나의 진술을 왜곡해 버렸다.
《동아일보》 남중구 정치부장은 DJ에게 “군부의 동향이 수상하다. 인터뷰를 통해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하는 얘기를 해 주면 신문에 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DJ는 기꺼이 수락했다. 하지만 그 인터뷰 기사는 결국 나가지 못했다. 정치개입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군부는 학생들과 DJ를 과격세력으로 몰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 자정 무렵, 나는 집에서 DJ 안내 책자에 들어갈 DJ연보(年譜)를 정리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갑자기 벨이 울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군인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몇 가지 조사할 것이 있으니 가자”고 했다. 그 길로 나는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끌려갔다. 조사관들은 군복으로 갈아입히더니 정갱이를 군화발로 걷어차면서 “공산당 놈의 ××들!”이라면서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공보와 외신을 담당했기 때문에 특별히 감출 일이 없었다. 그들도 내가 하는 일은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진술했다. 조사관들은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했지만,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고문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사관들로서는 DJ를 ‘빨갱이’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옆방에서는 김옥두 선배가 고문을 당했다. 김 선배는 동교동을 지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사관들은 누가 DJ를 찾아왔는지를 캐기 위해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나를 겁주기 위해서인 듯, 김 선배를 고문할 때에는 방문을 반쯤 열어 놓았다. 김 선배가 토해 내는 단말마적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고문을 당할 때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하면서 분개했지만, 나중에는 무덤덤해졌는지 ‘아이고, 저 양반 또 맞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목에 척추 맞아 지금도 아파”
한번은 조사관들이 함께 체포된 문동환 교수의 논문을 들이대면서 “여기 나오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는 말이 공산당의 용어가 아니냐?”고 했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교양을 쌓는 전인격적 교육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가지고 공산당으로 몰려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아는 전인교육의 개념을 이야기했더니 조사관들은 “전인교육을 공산당식으로 해석해 보라”고 했다. “내가 쓴 글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대꾸했다.
그러자 조사관들은 야전침대 각목으로 나를 마구 구타했다. 한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각목이 부러져 나갔다. 각목에 척추가 맞은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나를 각목으로 두들겨 팼다.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나는 지금도 허리를 잘 쓰지 못한다. 그해 7월 11일까지 55일간 나는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은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선의 독립”이라고 했다지만, 그때 나의 소원은 첫째도 서울구치소행, 둘째도 서울구치소행, 셋째도 서울구치소행이었다. 중앙정보부 조사실만 벗어나면 살 만할 것 같았다.
그해 12월 육군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나는 “김대중 선생에 대한 나의 일편단심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지금이 바로 새벽의 시작이라는 확신을 갖고 담담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37개월간 감옥살이
나는 징역 4년을, DJ는 사형(死刑)을 선고받았다.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늘이 김대중 선생을 네 번이나 살리신 것은 크게 쓰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결코 돌아가시지 않는다. 하늘은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좋은 정치를 하게 할 것이다’ 하는 신앙과 같은 확신이 내게 있었다.
2심 재판이 끝난 후 서울구치소 맞은편 방에 수감되어 있던 한완상 교수는 “아내가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났는데, 대사가 ‘재판이 끝나면 김대중 선생은 미국으로 갈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1981년 1월 대법원은 사건 관련자들의 상고(上告)를 기각(棄却)했다. 이어 전두환 정권은 DJ를 무기(無期)징역으로 감형(減刑)했다. 나는 그해 8월 광복절 특사(特赦)로 석방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과 전두환 정권 시절을 통틀어 나는 총 37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DJ는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지만, 그 직후 발생한 5·16쿠데타로 등원(登院)하지도 못하는 불운(不運)을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는 신안이나 목포의 젊은이들에게는 우상(偶像)이었다. 때문에 나는 선뜻 제갈 선생님을 따라나섰다.
사실 나는 그보다 2년쯤 전에도 DJ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대학 3학년이던 1961년, 목포에서 올라온 친지 분이 DJ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교동에 있는 DJ 자택을 찾아갔는데, 마침 DJ가 외출 중이어서 뵙지는 못했다.
제갈 선생을 따라 DJ를 처음 뵙는 자리에서 우이도 출신의 서울대 졸업생이라고 말씀드렸다. DJ가 물었다.
“전공이 뭐지요?” “외교학입니다.”
그날 DJ와 나눈 얘기를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든 소신을 가지라는 것, 지향하는 바 목표가 뚜렷해야 지성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DJ의 인상은 강렬했다.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흡인력 있게 말하는 열정적인 태도, 타는 듯한 눈빛, 용광로 같은 열기…. 어쩌면 그때 내 운명이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라도 사람은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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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서울에서 생활하며 지역차별을 처음 경험했다. |
그런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할 일은 마땅치 않았다. 외무고시를 보려 했지만, 병역(兵役)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기회를 놓쳤다. 낙도(落島)까지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고, 병역 자원은 넘쳐나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몇 년 지나는 사이에 나는 병역면제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고시(高試)에 합격해 현직 공무원으로 있던 사람도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으면 군대에 가야 했던 5·16 직후의 살벌한 상황 속에서 외무고시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1965년에는 잠시 목포에 있던 자기(瓷器)회사인 행남사(현 행남자기)에 취직했지만, 기존 직원들의 텃세에 밀려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막연하게나마 정치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대학 시절 경험한 지역차별 때문이었다. 어렵게 가정교사 자리를 구했는데, 고향이 어디냐고 묻기에 전라도라고 했더니, “미안하지만 우리집에서는 전라도 사람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았다. 재일(在日)동포들은 일본 땅에서 차별받는다지만, 나는 내 나라 땅에서 사투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다니!
‘이런 지역차별의 악습(惡習)은 내 대(代)에서 끝내자’는 생각과 함께, 떠오르는 분이 있었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부통령을 지내면서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인촌 선생은 당시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인촌 선생은 전라도 출신이지만, 아무도 그분의 출신지역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좋은 정치를 하면, 전라도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없어지지 않겠나?’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그러면 누가 있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DJ를 떠올렸다. 그와 함께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에 내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수시로 DJ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7대 총선 때 DJ의 선거운동원으로 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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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제7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환호하는 김대중 후보. 이때의 승리로 DJ는 전국적 정치인으로 떠오른다. |
이 선거에서 나는 DJ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했다. 캠프의 정식 비서나 참모는 아니었고, 요즘 말로 하면 자원봉사자였다. 하여튼 이게 내가 DJ를 위해 일한 첫 사건이었다.
제7대 총선 후 유진오(兪鎭午) 신민당 당수는 DJ를 원내총무로 지명했지만, 의원총회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 당내 다수(多數) 세력이었던 진산(珍山)계 의원들이 김영삼(金泳三·YS) 의원을 밀었던 것이다.
하지만 DJ는 낙담하지 않고 1968년 말부터 전국 조직 구축(構築)에 들어갔다. 장차 당권(黨權)이나 대권(大權)에 도전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경상남도를 맡았다. 신민당 대의원으로 있거나 장차 대의원을 할 만한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사실상 전당대회 때 현역 의원이나 계파 보스의 거수기(擧手機)에 불과하던 그들은 중앙정치무대의 떠오르는 신성(新星)인 DJ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대의원들의 집에까지 찾아가면서 밑바닥을 공략(攻略)한 것은 우리(DJ측)가 최초였다.
당직(黨職)에서 소외되어 있던 DJ는 ‘강연정치’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 ‘3선(選) 개헌(改憲)의 부당성’ 같은 주제를 가지고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시국(時局)강연을 자주 열었다. 대개 그런 행사가 있을 때에는 현지 지구당에서 비용을 부담하고, 포스터 등을 준비하는 게 당시의 관례였다. 하지만 DJ가 강연을 할 때에는 비용을 DJ가 전부 부담했다. 포스터도 우리가 인쇄해서 가지고 내려갔다. 현지 당원들을 행사 준비에 동원할 때에는 일당을 줬고, 막걸리라도 대접했다. 때문에 다른 정치인들은 “DJ가 당원들 망쳐 놓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시국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DJ는 “3선 개헌은 역사의 반역”이라고 규탄했고,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난 후에는 “경부고속도로도 누워 있으니 그렇지, 서 있었으면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군중들은 DJ의 통쾌한 연설에 열광했다.
DJ 지지바람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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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선 당시 전북 전주에서 유세하는 김대중 후보. |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유진산(柳珍山) 당수는 후보로 나선 YS, DJ, 이철승 세 사람에게 후보 결정은 자기에게 일임해 달라고 했다. YS와 이철승 의원은 동의했지만, DJ는 거절했다. 그때 나는 부산에서 DJ를 위한 조직을 만들고 있었는데, 대의원들 사이에서 “사내가 저래야지, 어떻게 사쿠라에게 운명을 맡기나” “YS가 의원 오래 하고 총무(원내총무)도 했지만, DJ가 훨씬 똑똑하다”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DJ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태평양에서 DJ 지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DJ를 후보로 만들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뛰었다. 대의원들의 성명과 주소를 외우고 다녔다. 절대 대의원들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DJ에게 여비를 받아 내려갔다. 내가 밥과 술을 샀다. 인사를 갈 때에는 3kg짜리 백설표 설탕을 짊어지고 갔다. 무조건 큰절을 올리며 ‘선생님’ ‘사모님’이라고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왜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 와서 이러느냐”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자네가 꼭 경상도 사람 같다”며 반겨 주었다. 이런 노력이 주효해서 DJ는 경남의 70여 표 가운데 50표 이상을 얻을 수 있었다. DJ가 신민당 경선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일찍부터 바닥표를 다져 온 덕분이었다.
YS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면서 “김대중 후보를 위해서라면 무주 구천동까지 가서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유세장에서 YS는 DJ 지지를 호소하면서도 “언젠가는 김영삼이도 대통령 후보가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토를 달았다.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1971년 4월 대선에서 DJ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94만여 표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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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함께 DJ를 모시던 정철기 동지의 사촌동생이었다. |
“자네나 나나 지금은 별 볼 일이 없네만…. 그래도 자네한테 미인(美人)이 생긴다면 먹여살릴 수는 있겠지?”
며칠 후 그는 자기의 사촌 여동생을 소개해 주었다. 제 눈에 안경이었는지는 몰라도, 잉그리드 버그먼과 소피아 로렌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미인이었다. 그녀는 중학교 미술교사였다. 사랑을 키워 나가던 우리는 결혼 날짜를 잡았다. 1972년 11월 3일.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날벼락이 떨어졌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평소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던 야당 정치인들이나 DJ와 가까운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로 잡혀 가 고초를 겪었다. 마침 DJ는 신병(身病)치료차 일본에 가 있었다. 나는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자마자 정철기 동지와 함께 도망을 쳤다. 서울 교외를 떠돌면서 한 달여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검거 선풍이 한풀 꺾일 즈음인 11월 말 예비 처가(妻家)의 담장을 넘었다. 거기서 몇 달을 눌러 지냈다.
그리고 1973년 4월, 나는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야당 원로인 홍익표 선생이 맡아 주셨다. 인기 있는 여선생님이었던 아내의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학생과 학부모들이 몰려왔지만, 요시찰(要視察) 대상인 신랑 측 하객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아내에게 “신랑 될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면서 결혼을 만류했다고 한다.
공보비서 시절
1971년 대선이 끝나면서 DJ캠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자기 갈 길을 찾아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DJ 비서실의 일원이 됐다. 사실 1987년까지 DJ의 비서실 조직은 단출했다. 비서실에 상근하는 사람이라고는 권노갑(權魯甲), 김옥두(金玉斗) 선배와 나 정도였다.
유신 시절 나는 공보비서 역할을 했다. 외신(外信) 기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DJ는 “이 사람이 내 공보비서인데, 서울대를 나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주로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일본대사관 관계자들과 만나 정보를 교환하거나,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일본대사관, 문화원 등을 드나들면서 한국 관련 외신보도들을 복사해 오는 일을 했다. 당시에도 외국의 신문이나 잡지들이 국내로 들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정부를 불편하게 하는 기사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부분을 지워서 시중에 배포했다. 때문에 정보에 굶주렸던 DJ는 나를 시켜서 외신보도들을 구해 오게 했다. 권노갑 선배도 비슷한 일을 많이 했다. 김옥두 선배는 주로 동교동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몇 안 되는 비서진 안에서 서울대 출신은 나 하나뿐이었다. DJ도 “내 주변에 한화갑 빼면 대학 나온 사람이 있나?”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조금만 잘못하면 ‘서울대 출신이 뭐 그러냐?’는 눈총을 느낄 수 있었다. DJ도 학력 콤플렉스 때문인지 조금은 내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한참 후일의 얘기지만, 한번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DJ는 “일류대 나왔다고 재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2류·3류 대학 나온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을 잘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기에도 일류대 나온 사람이 하나 있구먼”이라고 했다. 꼭 나를 두고 하는 얘기 같아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럴수록 나는 ‘내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잊자. DJ는 무오류(無誤謬)다’라고 다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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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 앞뜰에서 DJ와 함께. |
속상한 얘기지만 동교동 안에는 나를 미덥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다. 내가 서울대 출신 지식인이라 대가 약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정권이 교사인 아내에게 압력을 가하면 내가 굴복하기 쉽다고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중앙정보부 계장이라는 사람이 학교로 아내를 찾아가서 “남편이 학벌도 좋은데 고생하고 있다. 마음만 바꾸면 좋은 데 취직시켜 주겠다”고 회유한 적도 있다. 또 외무고시에 합격한 동생(한화길 전 주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도 나 때문에 인사상 불이익을 많이 받았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는 동교동을 지켰다. 남들은 그런 나를 ‘동교동 가신(家臣)’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외로웠다. 자기들끼리 쏙닥거리다가 내가 들어서면 입을 다무는 일도 있었다. “한화갑이는 사쿠라다. 수상쩍은 사람들과 만난다”는 말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DJ도 목포의 지인(知人)에게 “한화갑이가 사쿠라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몇 명 안 되는 동교동 안에서 나는 비주류(非主流)였다.
명동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던 DJ는 1977년 말 지병(持病)인 관절염이 도져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수인(囚人) 신분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김대중 선생이 오셨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1978년 1월 1일 DJ에게 새해인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종로5가 서울대병원으로 몰렸다. 김옥두 비서가 세배객들을 DJ가 있는 병실로 안내하려 했지만, 교도관들에게 저지당했다. 김옥두 비서는 “김대중 선생님이 병실 유리문으로 얼굴만 보여주시면, 세배객들은 복도에서 세배 드리도록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날 현장에 늦게 도착한 나는 김옥두 비서의 말에 따라 교도관에게 서울구치소 상급자에게 우리 뜻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교도관은 구치소로 전화를 걸어 보더니, 역시 안 되겠다고 했다. 그날 있었던 일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게 며칠 후 ‘특수공무집행방해’로 둔갑해 버렸다. 나와 김옥두 비서가 계획적으로 세배인파를 조직적으로 모았다는 죄목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오히려 몰려드는 세배객들을 달래고 저지했었다. 하지만 교도관은 우리가 세배객들을 이끌고 밀고 들어왔다고 진술했다. 뒤늦게 현장에 온 김종완(전 국회의원)도 주모자로 몰렸다. 이 사건으로 나는 8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박철언 검사
출감한 지 3개월 후인 1978년 12월 29일 나는 다시 투옥됐다. 그해 12월 27일 박정희 정권은 제9대 대통령취임식을 앞두고 서울대병원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DJ를 석방했다. DJ는 내외신 기자들에게 출감소감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28일에는 ‘김대중 선생 출감 환영 기도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희호 여사의 제안으로 우리는 출감성명서를 기도회 참석자들에게 배포하기로 했다. 비서진이 밤새워 성명서를 등사기로 인쇄했다. 나는 기도회장에 나가 성명서를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이것을 ‘긴급조치 9호 위반, 유언비어 유포’로 몰아 나를 구속해 버렸다. 당시 나를 담당했던 검사가 바로 박철언(朴哲彦)씨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선생, 이것은 정치적인 사건이요. 한 선생이 입건되느냐 안 되느냐, 입건이 되면 어느 정도나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한 선생에게 달렸소. 한 선생이 재범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오. 그렇기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것이 싫소. 그러나 감옥에 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그곳 생활이 고달프다 해서 지금까지 쌓아 온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싶지는 않소.”
박 검사는 조사를 마친 후 내게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조서를 보니 ‘지금도 제가 한 일을 자성(自省)하고 있고…’ 운운하는 식으로 둔갑해 있었다. 나중에 그와 의원생활을 같이한 것은 물론, DJP연대에 따라 사실상 한솥밥을 먹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구치소와 법원을 오고가는 호송버스 안에서 운전기사는 당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광복30년>을 틀어 주었다. 그는 “여러분이 지금 이리 고생하지만, 곧 여러분 이야기도 방송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고등법원에서 내 항고(抗告)를 기각(棄却)하고 1심 형량을 확정한 날이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그보다 1주일 전에 교도소에서 운동시간에 마주친 김종완씨가 “박정희가 죽는 꿈을 꾸었다”면서 “박정희가 곧 죽을 모양”이라고 말했다. 10·26 직후 김종완씨를 다시 보았는데, “박정희가 죽었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면회를 왔는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니까 교도관들이 황급하게 못하게 막더군. 박정희가 죽은 거야!”
그해 12월 3일 나는 감옥 문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서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DJ는 “고생했다. 무얼 느꼈느냐?”고 묻더니, “곧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될 것이다. 그러면 바로 동교동에 들러라”라고 말했다.
12월 8일, 악명 높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됐다. 동교동으로 DJ를 찾아갔다. DJ는 “내가 구금되어 있을 때 만났던 라마자 주한 미국대사관 1등서기관을 만나 보라”고 했다. 주한미국대사관을 찾아갔더니 라마자는 휴가 중이었다. 라마자 대신 스티븐슨 1등서기관을 만났더니, DJ와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와의 만남에 대해 얘기했다. 두 분은 도청을 우려해 대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게 12월 17일 경이었다.
‘서울의 봄’은 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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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의 재판 모습. 나는 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한번은 DJ에게 “YS 비서들은 국회의원도 하고 그러는데…”라고 투정(?)을 부렸다. DJ는 “내가 원내총무를 해 봤나, 총재를 해 봤나? 내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만들어 주나?”라고 역정을 냈다.
5월 들면서 학생시위가 격화되었다. 5월 13·14일 경, DJ는 비서들에게 “데모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살펴보고 오라. 아무래도 군부(軍部)가 나올 구실을 주게 될 것 같아 걱정이다”고 말했다. 덕수궁 근처에서 학생들이 시위하는 것을 보았다. 시위는 평화로웠지만, 열기는 뜨거웠다. 뭔지 모를 불안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보고를 받는 DJ도 걱정스러워했다. 나중에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으로 잡혀 들어간 후, 중앙정보부는 DJ가 학생들을 사주(使嗾)해 폭력혁명을 일으키려 했다는 진술을 얻어내려 고문(拷問)을 가했다. 어쩔 수 없이 이때의 일을 얘기했더니, 그들은 “학생들의 데모가 격렬하더라고 보고했더니 김대중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운운하는 식으로 나의 진술을 왜곡해 버렸다.
《동아일보》 남중구 정치부장은 DJ에게 “군부의 동향이 수상하다. 인터뷰를 통해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하는 얘기를 해 주면 신문에 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DJ는 기꺼이 수락했다. 하지만 그 인터뷰 기사는 결국 나가지 못했다. 정치개입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군부는 학생들과 DJ를 과격세력으로 몰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 자정 무렵, 나는 집에서 DJ 안내 책자에 들어갈 DJ연보(年譜)를 정리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갑자기 벨이 울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군인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몇 가지 조사할 것이 있으니 가자”고 했다. 그 길로 나는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끌려갔다. 조사관들은 군복으로 갈아입히더니 정갱이를 군화발로 걷어차면서 “공산당 놈의 ××들!”이라면서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공보와 외신을 담당했기 때문에 특별히 감출 일이 없었다. 그들도 내가 하는 일은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진술했다. 조사관들은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했지만,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고문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사관들로서는 DJ를 ‘빨갱이’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옆방에서는 김옥두 선배가 고문을 당했다. 김 선배는 동교동을 지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사관들은 누가 DJ를 찾아왔는지를 캐기 위해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나를 겁주기 위해서인 듯, 김 선배를 고문할 때에는 방문을 반쯤 열어 놓았다. 김 선배가 토해 내는 단말마적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고문을 당할 때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하면서 분개했지만, 나중에는 무덤덤해졌는지 ‘아이고, 저 양반 또 맞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목에 척추 맞아 지금도 아파”
한번은 조사관들이 함께 체포된 문동환 교수의 논문을 들이대면서 “여기 나오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는 말이 공산당의 용어가 아니냐?”고 했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교양을 쌓는 전인격적 교육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가지고 공산당으로 몰려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아는 전인교육의 개념을 이야기했더니 조사관들은 “전인교육을 공산당식으로 해석해 보라”고 했다. “내가 쓴 글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대꾸했다.
그러자 조사관들은 야전침대 각목으로 나를 마구 구타했다. 한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각목이 부러져 나갔다. 각목에 척추가 맞은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나를 각목으로 두들겨 팼다.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나는 지금도 허리를 잘 쓰지 못한다. 그해 7월 11일까지 55일간 나는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은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선의 독립”이라고 했다지만, 그때 나의 소원은 첫째도 서울구치소행, 둘째도 서울구치소행, 셋째도 서울구치소행이었다. 중앙정보부 조사실만 벗어나면 살 만할 것 같았다.
그해 12월 육군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나는 “김대중 선생에 대한 나의 일편단심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지금이 바로 새벽의 시작이라는 확신을 갖고 담담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37개월간 감옥살이
나는 징역 4년을, DJ는 사형(死刑)을 선고받았다.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늘이 김대중 선생을 네 번이나 살리신 것은 크게 쓰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결코 돌아가시지 않는다. 하늘은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좋은 정치를 하게 할 것이다’ 하는 신앙과 같은 확신이 내게 있었다.
2심 재판이 끝난 후 서울구치소 맞은편 방에 수감되어 있던 한완상 교수는 “아내가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났는데, 대사가 ‘재판이 끝나면 김대중 선생은 미국으로 갈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1981년 1월 대법원은 사건 관련자들의 상고(上告)를 기각(棄却)했다. 이어 전두환 정권은 DJ를 무기(無期)징역으로 감형(減刑)했다. 나는 그해 8월 광복절 특사(特赦)로 석방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과 전두환 정권 시절을 통틀어 나는 총 37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