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의 비교 評傳 (8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非常國民會議와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 글 : 손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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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촉중협(獨促中協)은 1946년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돈암장(敦岩莊)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임시정부 산하의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託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와 준비 중인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를 독촉중협과 통합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와 임시정부의 비상정치회의는 비상국민회의로 통합되어 2월 1일에 명동성당에서 좌익정파를 제외한 각 정당 및 사회단체와 지방대표, “저명한 민중지도자” 등 197명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식을 거행했다. 대회에서는 최고정무위원(最高政務委員)을 두되 원수(員數)와 인선(人選)은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에게 일임한다는 긴급결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두 사람은 2월 13일에 최고정무위원 28명을 선정하여 발표했는데, 이들은 이튿날 미군정청(美軍政廳) 제1회의실에서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발족시켰다. 독촉중협과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는 2월 8일에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로 통합되었다.
 
  민주의원이 개원된 이튿날 좌익정파(左翼政派)들은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했다.
 
  이승만은 3·1절을 맞으면서 <과도정부당면정책>(過渡政府當面政策)33항을 직접 작성하여 발표했다.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는 1월 22일에 미국을 출발하여 2월 21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1. 獨促中協에서 非常國民會議로
 
  온 국민의 이목이 1월 16일부터 서울에서 열릴 미소양군사령부 대표회의로 쏠려 있는 1월 14일 오후에 이승만은 불편한 몸으로 돈암장(敦岩莊)의 정례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의 회견에는 외국기자들도 참석했다. 이날 이승만이 발표한 담화는 이튿날의 독촉중협(獨促中協) 중앙집행위원회를 앞두고 파탄에 직면한 5당회의, 임시정부와의 관계, 미소공동위원회 대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지(John R. Hodge) 사령관의 새로운 구상 등을 의식하면서 중요한 당면문제에 대한 소신을 밝힌 것이었다.
 
 
  파괴자와 건설자는 합동할 수 없어
 
   이승만은 먼저 “나는 내외국인에 대하여 대한민족이 통일을 실지로나 형식으로나 완성된 것을 선언한다”는 말로 담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통일은 ‘공산분자’ ‘극렬분자’는 배제한 통일이었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을 통하여 공산주의자들과 협동하려고 그동안 시도했던 일을 외국의 사례를 들면서 길게 설명했다.
 
  “중앙협의회(中央協議會) 조직 이후로 공산분자와 협동되기로 노력하다가 시일을 허비하였으나, 이것은 사실상 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성의를 다한 것이다. 중국에 있어서 장개석(蔣介石) 총통 세력과 연안(延安) 세력이 다년간을 두고 성공치 못하였던 것이고, 유럽 각국에서 역시 백방으로 시험하여 보았으나 다 실패한 것이거늘, 유독 우리 한국에서 어찌 홀로 성공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부족한 나로서 한가지 바라던 것은 우리 한인은 지혜나 애국심이 다른 인종과 다른 것을 알고, 그뿐만 아니라 또 한가지는 40년간 왜적의 학대를 받은 반감이 있으므로 과거 우리는 이 쓰라린 경험에 비추어 나라의 독립을 위하는 때에는 극렬분자까지도 예외 없이 한 뭉치가 될 것을 희망하고, 적은 뜻이나마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우리도 아직까지는 실패라고 하기에 이르렀나니,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극렬분자는 유럽에서나 미주에서나 중국에서나 또한 한국에서까지 자주독립을 저해하고 남의 노예됨을 감심[甘心: 달게 받음]하는 결심이 있는 것을 지금은 세상이 다 알게 되었으니,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한길을 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은 확실히 결정해서 각 단체나 정당을 물론하고 독립만을 위하여 사생을 우리와 같이할 사람이라면 우리는 물론 다 함께 제휴하여 한 구덩이로 들어갈 결정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저의 원대로 해보라고 방임하는 것이니 … 그러므로 한족정신(韓族精神)을 가진 한인들은 모두가 38도남북을 불관하고 정신적으로도 합동이고 사실적으로도 합동이다.”
 
  이승만은 이처럼 독촉중협이 “전 민족을 대표한 기관”으로서 통일을 이루었음을 강조하고, 독립정부가 수립되면 공산주의자들도 친일분자와 같이 처벌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앙협의회가 전 민족을 대표한 기관으로 애국동포를 다 이리로 집중하여 통일을 이루었나니, 일후에 우리가 국권을 회복한 후에는 이 분자들에게도 친일분자와 같은 대우 아래 우리 민족 재판마당에서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물을 말이 있을 것이다. …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지지하여 성충을 다할진대 혹 장차 속죄할 희망은 있을지언정 종시 고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독립운동에 장애되는 물건은 다 용납치 않을 결심이다.”
 
  이승만의 이날 담화 가운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소련은 “우리 정부조직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밝힌 점이었다.
 
  “그리고 탁치에 대하여서는 한인들이 다만 시위운동에만 한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든지 절대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분투하라는 것이니, 미소양국의 연합위원(미소공동위원회)이라는 것부터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은 우리 원수와 싸워서 우리를 해방시킨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하여 무슨 이익을 요구하는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환영하여 합작하는 터이나,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에 관계가 없으니 우리 정부조직에 무슨 간섭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1)
 
 
  “민주적 自主政府” 또는 “국회 같은 國民組織”
 
  1월 15일 오후 3시에 돈암장에서 독촉중협의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렸다. 1945년 12월 15, 16일 이틀 동안 제1회 회의가 열리고 나서 한 달 만에 열린 회의였다. 제1회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공산당, 인민당 등 좌익 인사들은 모두 불참하고 김성수(金性洙), 안재홍(安在鴻), 김석황(金錫璜), 김여식(金麗植) 등 한국민주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한국독립당 등 우익 정당대표 18명이 모였다. 와병 중인 이승만을 대신하여 회의를 진행한 윤치영(尹致暎)은 회의 소집 목적이 임시정부 산하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와 추진 중인 비상정치회의를 독촉중협에 “어떻게 연결하느냐”하는 문제와 독촉중협의 인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안재홍과 장덕수(張德秀)는 하지 사령관이 “민주적 자주정부”를 수립하라고 권유했다고 말했고, 김성수는 “하지가 자주정권 수립에 자신이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2)
 
  한민당 총무의 한 사람이었던 백남훈(白南薰)은 이 무렵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서둘러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한 것은 독촉중협이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하여 독촉중협을 해체할 것을 주장하여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리하여 한민당 간부들은 돈암장과 경교장(京橋莊) 사이에 무슨 불화나 있는 듯이 전파되고 또 이 소문이 국민들에게 알려지면 큰일이라고 하여 이 문제가 표면화되기 전에 해소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는 것이다.3) 한편 한민당의 정략가 장덕수는 이승만에게 경교장을 민족통일전선의 센터로 보고 비상정치회의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4)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는 1월 21일까지 계속되었는데, 회의 소집의 배경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승만 자신은 1월 18일의 회의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민의가 탁치를 절대 반대하고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미국무성과 군정청에서 솔직히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탁치문제에 관하여 미국무장관 번즈(James F. Byrnes) 씨도 한인이 원치 않는다면 탁치를 실시치 않아도 좋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 낙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서울에서 미소 간에 회담이 개최되어 물자교류를 위한 38도선에 대한 협의가 진행 중이며, 또한 소련 측에서 3상회의를 이유로 하여 공동위원회의 설치를 요구해 오면 미군으로서는 이를 거부하기 곤란한 입장에 처하여 있으므로, 이 공동위원회를 배척하자면 요구가 있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단합하여 우리의 통일을 중외에 성명함으로써 미국 측에 소련의 요구에 불응할 이유를 제공하여야 하겠다.
 
  이에 대한 양책(良策)이 있다. 그것은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의 의사를 띠고 굿펠러(Preston M. Goodfellow) 대령이 가지고 온 안이다. 즉 우리 힘으로 규합할 수 있는 각 정당과 단체 및 지명인사와 공산주의자까지도 망라하야 국회 같은 국민조직을 완성하고, 회장에 내가 되고 부회장에 김구 주석을 추대하야 그 조직을 임시군정청 고문부와 같은 형식으로 해나간다면 하지 중장과 러취(Archer L. Learch) 군정장관은 이에 절대 찬의를 표할 것이며, 또한 국내 국외에 선포하면 미국무성과 중국, 프랑스, 기타 영국까지라도 엄연한 이 사실을 승인하게 될 것인즉, 소련이 아무리 야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별 수 없이 양보하게 될 것이다.
 
  이 안에 대하여는 이미 김구 주석과 김규식(金奎植) 부주석과 조완구(趙琬九) 재무부장은 전폭적 찬의를 표하였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자리에서 이를 가결하여 내일 곧 실행코자 한다.”5)
 
 
  하지는 美蘇共委 성공 믿지 않아
 
  이승만의 이 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자세히 톺아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1월 초순에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부임해 온 굿펠러 대령의 활동에 대한 언급이다. 이승만이 귀국길에 도쿄(東京)에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을 비롯한 극동군사령부 장군들과 하지 사령관에게 굿펠러를 주한미군사령부의 고문으로 추천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2010년 9월호, <33년만에 歸國한 ‘國民的英雄’> 참조). 하지는 이승만의 추천에 따라 1945년 11월 11일에 전쟁부에 굿펠러의 한국배속을 신청했고, 굿펠러는 12월 26일에 워싱턴을 떠났다.6) 이승만이 말한 “국회 같은 국민조직”이 과연 굿펠러가 “트루먼 대통령의 의사를 띠고” 가지고 온 안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가 1월 28일에 번즈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전문에서 굿펠러가 지난 한 달 동안 한국의 정치단체들과 접촉하면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이미 김구와 이승만은 그들의 이른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하지 장군과 공동위원회와 같이 활동할 통합집단(united group)을 구성하려는 노력에 협조하기로 동의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베닝호프는 또 좌익과 공산주의 지도자들도 비슷한 행동을 취하려고 서두르고 있어서 “우리는 머지않아 한 통합자문단을 발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7)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하지가 장덕수와 안재홍에게 말했다는 “민주적 자주정부”나 이승만이 말하는 “국회 같은 국민조직”이란 미소공동위원회가 수립하기로 되어 있는 임시 한국 민주정부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 징조는 1월 16일부터 시작된 당면 경제문제와 행정통합문제에 관한 양군사령부대표회의에서도 드러났다. 하지는 1월 22일에 맥아더에게 현재의 경제문제 토의가 결말이 날 때까지 정치회의의 소집을 미룰 것을 제의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러시아인들의 태도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과도정부에 대한 모종의 통일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정치회담은 자신의 주도하에서 개최되기보다는 정부 간 교섭의 결과로 개최하는 것이 낫겠다고 건의했다. 그러한 접근이 한층 더 권위 있는 결과를 낳고, 우리가 한국이나 다른 극동국가들에 대한 공약을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소련인들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8)
 
  그러므로 이승만과 하지가 구상하는 “국회 같은 국민조직”, 나아가 “민주적 자주정부”는 미군정부의 고문부 같은 기능을 하면서 미국, 중국, 프랑스, 영국 등의 승인을 얻음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를 무력화시키고 소련에 의한 한반도공산화를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美軍政府는 임시정부 그룹을 해체하기로
 
  이승만의 발언에서 마지막으로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점은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비상정치회의와 독촉중협의 관계문제이다. 5당회의가 1월 16일에 끝내 결렬되자 임시정부는 1월 17일부터 경교장에서 연일 비상국무위원회의를 열고 1월 4일에 김구가 제의한 비상정치회의소집문제를 논의했다.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 제2회 회의는 외국의 국가건설 때의 사례에 따라 독촉중협을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로 개칭하기로 합의했었는데, 이승만이 직접 주재한 1월 18일의 제5회 회의에서 이승만의 제의로 정식으로 결정했다.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비상정치회의와의 통합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우익세력의 양분을 염려하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승만은 “조리는 그러하다. 그러나 독립이 조리보다 더 중요하다”면서 서둘렀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을 해체하고 비상정치회의에서 결정하는 대로 이행함도 무방하나 임시정부 인사들과 군정부 당국 사이에 호의가 없고, 따라서 비상정치회의를 한다 하여도 또한 군정부의 호의를 얻지 못하고 대치할 것”이므로, “사실상 임시정부가 군정부에 가서 말한다 하여도 별로 신기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9) 이승만의 이러한 단정적인 주장은 그가 굿펠러와 장석윤(張錫潤)을 통하여 미군정부의 방침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육군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에서 한국인 책임자로 활동했던 장석윤은 1945년 12월 17일에 귀국하여 미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G-2)에서 근무하고 있었다.10) 실제로 하지 장군은 1월 18일에 러취 군정장관에게 하달한 지시에서 미군정부는 이제 임시정부 그룹을 해체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미군사령부는 임시정부 그룹이 그들 자신의 과도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비상정치회의(National Congress)’를 소집하는 것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는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는 어떤 과도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들이므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덧붙였다.11)
 
 
  非常國民會議의 最高機關 조직 서둘러
 
  이승만은 토요일인 1월 19일 오후에도 비상국민회의 집행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이날은 임시정부가 남북한의 21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을 경교장으로 초청하여 비상정치회의주비회(非常政治會議籌備會)를 발족시키기 하루 전날이었다.
 
  이승만은 일단 결정한 것은 쇠뿔도 단김에 빼는 기질이었다. 회의가 열리자마자 그는 비상국민회의의 최고기관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각 당 대표와 임시정부 각원(閣員) 중에서 4, 5인가량 넣어가지고 전국인민대표기관으로 선거하는 양으로 해서 저이들(미군정부 인사들)에게 제시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국민총동원위원회의 부위원장이기도 한 안재홍이 독촉중협과 임시정부가 분열될 것을 염려하여 주저하자 이승만은 “그러면 독립의 말은 폐지하는 것이 가하오”하고 핀잔했다. 이승만은 자기에게 두 가지 방침이 있다면서 하나는 기한 내에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발표하는 것, 다른 하나는 군정부가 정하여 공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그는 서둘렀다. 그리하여 다른 참석자들은 일어서서 나가고 이승만과 인선보좌역인 한민당의 김성수, 국민당의 안재홍, 신한민족당의 권태석(權泰錫) 세 사람만 남아 다음과 같이 23명을 선정했다.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김규식(金奎植)        이시영(李始榮)
  안재홍(安在鴻)        김법린(金法麟)
  김동원(金東元)        홍명희(洪命憙)
  함태영(咸台永)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유동열(柳東說)
  조만식(曺晩植)        이영(李英)
  김여식(金麗植)        이의식(李義植)
  정백(鄭栢)          백남운(白南雲)
  원세훈(元世勳)        서상일(徐相日)
  김준연(金俊淵)
 
 
  非常政治會議를 非常國民會議로 개칭하기로
 
  임시정부가 소집한 비상정치회의 주비회는 1월 20일 오전 9시부터 경교장에서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초청된 21개 정당과 사회단체 및 종교단체 가운데에서 남한의 조선공산당과 인민당, 북한의 독립동맹을 제외한 18개 단체 대표 한 사람씩과 임시정부에서 조소앙, 장건상(張建相), 최동오(崔東旿) 3명이 옵서버로 참가했다. 그 밖에도 임시정부 쪽에서 조완구, 성주식(成周寔), 김붕준(金朋濬), 김성숙(金星淑), 유림(柳林) 5명이 각각 중경혁명단체인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신한민주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무정부주의자연맹의 대표자격으로 참석했다. 재미혁명단체 대표로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한시대(韓始大)와 동지회 대표자격으로 장덕수가 참석했다.
 
  조소앙이 임시정부의 의견으로 (1)비상정치회의는 대한민국의 과도적 최고입법기관으로서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계승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은 당연직 의원이 되며 (2)비상정치회의는 정식 국회가 성립할 때까지 존속한다는 등 5개항의 의견을 제출했다.12) 그것은 비상정치회의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었다. 비상정치회의 주비회는 안재홍을 회장으로, 한시대를 부회장으로 선출하고 서기로 박윤진(朴允進)과 장준하(張俊河)를 선임했다. 주비회는 이튿날 <조직조례> 기초위원으로 북한의 조선민주당 대표 이종현(李宗鉉)을 포함한 김붕준, 서상일, 유림, 권태석 5명을 선정했다.13)
 
  그런데 1월 21일의 회의에서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대표자격으로 참석한 임시정부의 김성숙이 “좌익을 제외한 우익만의 회합과 통일은 … 민족의 분열을 초래하고 그 결과는 연합국으로 하여금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구실을 주는 것”이라면서 탈퇴를 선언하고 퇴장했다.
 
  그러나 김성숙이 퇴장한 뒤에도 회의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회의 명칭을 독촉중협의 새 명칭인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고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14) 주비회는 이튿날 이승만과 김구의 공동명의로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가 1월 19일에 행한 라디오연설 내용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빈센트는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관계열국과 합치된 미국의 견해라고 말하고, 그러나 한국에는 90여 개의 정당과 정파가 있어서 임시정부 수립을 곤란하게 만든다고 말했는데, 성명서는 빈센트 발언의 앞부분에 대해서는 환영하면서 뒷부분은 최근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15)
 
1946년 2월 1일에 明洞聖堂에서 開幕된 非常國民會議를 보도한 《東亞日報》 지면과 明洞聖堂 입구에 내걸린 ‘非常國民會議’ 현수막.
 
  “나는 둘째, 셋째도 좋다 …”
 
  1월 16일의 제3회 회의에서 새로 선정된 중앙집행위원들까지 함께 소집된 1월 21일 오후의 돈암장 회의는 이승만의 물밑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틀 전인 1월 19일 오후에 김구를 비롯하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비상정치회의가 독촉중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추진되고 있는 것임을 확인했는데, 21일 오전에 돈암장을 방문한 김구는 “어제 협의한 결과 원만히 결정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김구로 하여금 임시정부 내부의 좌익정파들과의 결별을 각오하고 이승만과의 합동을 결단하게 하는 데에는 한민당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김성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박사께서 김구 주석은 염려없다 하신 말씀은 여러 번 들었다. 어제 김구 주석의 말씀을 듣고 저는 감격의 눈물이 흐를 듯하였다. 김 주석 말씀이 나는 안악(安岳) 김존위(金尊位)의 아들로서 오늘 이름이 참으로 과람(過濫)한 줄 알고 있다, 나는 이 박사를 영수로 추대하고 나는 둘째, 셋째 아무렇게 해도 좋다 하시더라.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이 박사의 말씀과 상조(相照)하야 두 분의 합작은 완전무결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완성은 반드시 되겠다고 확신하였다. 모든 것을 두 선생께서 알아 해주심 바란다.”16)
 
  이날 회의에서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와 관련하여 1월 18일 회의에서 한 말과 좀 다르게 언급하면서 정부수립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밖에 누설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 말이지만 … 군정사람들의 말한 것은 소련 측과 결렬되는 형편은 불가하다 한다. 이는 만일 결렬이 있으면 종내에 있어서 공동위원회라든가 신탁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원컨대 여러분은 일어나서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조직하야 정부를 세운 후에 북쪽을 소청(掃淸: 소제)하여야 하겠다. 우리의 통일은 전에 비하면 사실상 더욱 공고하니까 우리가 직접으로 북선(北鮮)의 관계를 해결하겠다고 했다.”17)
 
  이승만은 모스크바 외무장관회의의 결정에 따른 임시 한국 민주정부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하여 수립되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운 뒤에 북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공언한 것이다. 이것은 소련군사령부가 2월 8일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북한에 “민주주의의 근거지”를 창설한다고 한 이른바 민주기지론과 비견되는 주장이었다.
 
 
  左翼 두 단체의 이탈로 임시정부 분열돼
 
  1월 23일에 속개된 비상국민회의 주비회는 전문 12조로 된 <비상국민회의 조직조례>를 의결하고, 이어 <조직조례> 제9조의 규정에 따라 국민회의에 참석할 지방대표와 저명한 민중지도자를 선정할 심사위원으로 만주독립운동단체인 조선혁명당 대표 김돈(金燉)을 비롯하여 조선민주당의 이종현, 한민당의 서상일, 신한민주당의 김붕준, 신한민족당의 권태석, 기독교 대표 김관식(金觀植), 천주교 대표 남상철(南相喆) 7명을 선정했다. 그리고 비상국민회의를 2월 1일에 소집하기로 하고 소집준비위원으로 안재홍, 장덕수, 권태석, 남상철 및 유교 대표 이재억(李栽億) 5명을 선정했다.18)
 
  그러나 같은 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탈퇴함으로써 잡다한 이념의 “보자기를 끄르지 않고” 귀국했던 임시정부는 마침내 분열되고 말았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이자 임시정부 군무부장인 김원봉(金元鳳),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같은 당의 성주식,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총서기이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김성숙 세 사람은 2월 23일에 기자회견을 갖고 두 단체는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성명서는 “임시정부는 당면정책 제6항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좌우 양 진영의 어느 한쪽에 편향 혹은 가담하지 않고 엄정 중립의 태도를 취하여 양 진영의 편향을 극복하면서 단결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우익으로 편향하고 있는 국세(局勢)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우리 두 단체는 먼저 임시정부의 우익 편향화를 지적하며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성명서는 이어 조선공산당과 인민당이 비상정치회의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결성을 준비하고 있는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에 대해서도 “이것 역시 비상정치회의와 같이 우리 민족의 분열 형태를 더욱 명백히 표시하는 데 불과한 것이므로” 단연 반대한다고 주장했다.19) 그러나 세 사람은 모두 비상국민회의에 뒤이어 결성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여 김원봉은 의장단에, 김성숙과 성주식은 부의장단에 포함되었다.20)
 
 
  “李承晩, 金九 領袖 추대는 국민여망에 의함이다”
 
  비상국민회의주비회는 그날로 세 사람의 성명서에 대한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주비회는 좌우양익의 일치협력을 위해 인민당과 공산당 및 북한의 독립동맹에도 초청장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소집될 비상국민회의에도 좌우양익의 제단체를 초청하여 완전한 민족통일의 결성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비회의 경과에 대해 첫째로 비상정치회의라는 명칭을 비상국민회의로 변경한 것은 비상정치회의의 국민적 성격을 한층 명료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로 독촉중협의 사업을 비상국민회의로 합류하게 한 것은 성질이 대동한 두 기관을 통일하기 위함이며, 셋째로 이승만과 김구를 주비회의 영수로 추대한 것은 “일반민중의 여망에 의함이다”라고 석명했다. 그러면서 두 단체는 속히 복귀하라고 촉구했다.21)
 
  김원봉, 성주식, 김성숙에 이어 1월 24일에는 무정부주의총연맹 대표이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유림도 주비회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유림은 바로 복귀하여 비상국민회의의 노농위원장으로 선정되었다.
 
  주비회는 1월 24일에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할 국내외의 15개 혁명단체 및 정당, 남북한의 10개 종교단체, 좌우익을 망라한 6개 청년단체, 교육단체, 5개 노동단체, 4개 부녀단체, 7개 재외교민단체 및 일반 애국단체 등 61개 단체 대표들과 지방대표, 저명한 민중지도자에게 초청장을 발송하기로 하고 업무를 끝냈다.22)
 
  같은 날 한국민주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3당은 공동으로 “비상정치회의를 중핵으로 하는 건국사업”에 좌익정파들이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23) 이튿날에는 독립촉성청년연맹, 국민총동원위원회 등 50여 개 사회단체 인사들이 정동교회에 모여 비상국민회의 지지를 결의했다.24)
 
 
  굿펠러가 朴憲永과 呂運亨 만나
 
  좌우익 정파의 확연한 분열과 대립으로 정국이 어런더런한 속에서 1월 25일 오후에 반도호텔의 하지 사령관 집무실에서 하지와 김구, 그리고 이승만을 대리한 윤치영 세 사람이 비밀리에 회동한 사실은 정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비상국민회의의 준비상황, 특히 좌익단체들의 회의 참가문제 등을 논의하는 회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자유신문(自由新聞)》은 1면 머리기사로 “이번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잠정적인 과도정권으로서의 임시정부도 수립할 것을 한 의제로 하는 만큼, 이 과도기적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소위 ‘인망 높고 충실한 조선인’을 좌우양익에서 총망라하야 미국 측에서 이 위원회에 제안할 원안을 상의한 것이 어제 3인회동의 내용이 아닌가 한다”고 추측하고, “3인회동의 결과는 굿펠러 대령의 동향으로 곧 구체화될 것이 아닌가 하야 정계에 던지는 파문은 또한 커지고 있다”하고 궁금증을 증폭시켰다.25)
 
  굿펠러는 또 3인회동이 있던 바로 그날 반도호텔에서 박헌영(朴憲永)을 만났다. 굿펠러는 박헌영에게 하지 중장의 자문위원회를 조직하는 데 공산당에서도 대표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자문위원회는 여성을 포함한 각 정당 정파 대표 35명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고문기관으로서 앞으로 임시정부로 발전할 수도 있고 국민대회를 소집할 수도 있으며, 신탁통치문제도 이 기관에서 결정한다고 그는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굿펠러의 제안에 대해 조선공산당은 1월 28일에 그것은 3국외무장관회의에서 결정한 임시 한국 민주정부 조직과 모순되며, 이 제도는 군정제도를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26)
 
  굿펠러는 이어 여운형에게도 하지의 자문위원회에 인민당도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인민당은 1월 28, 29일 이틀 동안 열린 확대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토의하고 간부회에 일임했다. 이어 1월 31일에 황진남(黃鎭南)과 여운홍(呂運弘)이 굿펠러를 만나 (1)자문위원회가 당면한 민생문제에 한해서만 자문하고 (2)결의제를 택하지 않으며 (3)임시정부 수립 등의 정치문제는 다루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백상규(白象圭), 여운홍, 황진남, 이정구(李貞求) 네 사람이 참가하겠다고 통고했다.27)
 
  굿펠러의 자문위원회안이 알려지자 반대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이승만을 ‘매국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하는 의견마저 있었다.28)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이론가 조소앙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그러한 반응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일찍이 조선에 외국인고문제도를 가져올 때에 그 조약에 조인한 자를 국적(國賊)이라 규정하였었다. 주권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을 돕기 위한 외국인고문을 가져오는데도 국적이라 하였거늘 하물며 주권이 외국인에게 있는 정부에 우리가 고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 말인가.”
 
  그것은 망국의 지식인 조소앙의 의식속에 잠재한 불행한 역사의 왜곡된 교훈이었다.
 
 
  타스통신의 해명을 다시 반박
 
  비상국민회의가 박두한 1월 28일에 이승만은 출입기자단에게 “최근에 신문에 보도된 몇 가지에 대하여 약간의 견해를 말씀드리겠다”면서 소련의 타스(Tass)통신이 1월 25일에 모스크바 3국외무장관회의에서 신탁통치를 먼저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다고 해명한 것과 김원봉 등이 비상국민회의주비회에서 탈퇴한 사실을 둘러싼 항간의 이러저러한 풍설에 대하여 언급했다. 신탁통치문제에 대한 타스통신의 해명과 관련하여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소련이) 탁치를 먼저 주장하지 아니하였다고 제창하는 타스통신이 우리의 반대운동이 일부 반동분자의 선동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또 10년탁치를 제의한 미국의 군정청이 도리어 남조선의 반탁운동을 충동 조장했다 하니, 이는 커다란 모순이라 하겠다. … 소련은 탁치를 주장하지 않았다 하면서도 보도로써 또는 기타 행동으로써 탁치를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완성하려는 우리의 통일운동을 지장 있게 함은 실로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
 
  그리고 김원봉 등의 주비회 탈퇴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비상국민회의주비회가 우리 임시정부의 엄연한 존재 아래 독촉중협과 완전히 일치되고 있으며 경향의 정치, 종교, 각층 각계를 망라한 전 민족통일의 장엄한 운동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동포의 정확한 판단을 방해하고 소수의 음모로써 대중을 끌어보려 하는 퇴보적 민주주의자가 있다. …
 
  또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정당한 대중의 의견이 총의로써 표명되는 것이며, 그 표현된 총의에는 모두가 순종해야 한다. … 과반 임시정부에서 몇 분이 비상정치회의에서 다소 반대의견을 표명한 것도 하등 기이한 바가 아니며, 그분들의 임시정부 요원으로서의 입장은 확고불변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악선전하고 마치 임시정부가 분열하였느니, 모씨가 속한 민족혁명당과 그 당원 전부가 총퇴하느니, 이분들이 소위 좌파회합에 참석하였느니 운위하여 목전에 도달한 우리의 통일을 장해하고 망상된 자가세력을 부식하게 압박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나, 나는 비상국민회의에 다소 불만을 가진 의원도 불원간에 다시 협력하여 궤도에 오른 통일을 조장하고 본회를 선도할 줄 믿는다. …”
 
  이승만은 그러한 “소수 반동분자”의 책동을 봉쇄하여 일로 매진하면 독립 완성이 목전에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29)
 
 
  지도자 비판한 하지의 성명서
 
  이튿날 하지 사령관도 “조선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이례적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적이 모멸적인 내용이었다. 성명서는 먼저 “유수한 정치지도자와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네의 개인적 세력과 이익을 얻기 위하여 대중을 그릇 인도하지 않나 하고 나는 걱정한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외국사정과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이 적은 듯하며 더구나 그들의 이기적 행동이 열국에 주는 악영향이 얼마나 될까를 판단하는 능력이 없어 보인다. … 나는 사욕을 가진 정치적 지도자 자신의 반성과 민중의 지도자에 대한 검토를 권한다. 쌍방은 상대방을 신중히 검토하여야 하겠다”라고 전제한 다음, 모스크바 외무장관회의의 결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통치가 조선에 남긴 모든 훼손을 회복하려면 조선은 국외에서 약간의 원조를 받아야 될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시리라고 나는 믿는다. … 최근의 모스크바회의는 조선의 통일과 진정한 민주주의 수립과 독립에 대한 안을 구비했다. … 이 안은 조선이 붙잡고 올라가면 꼭대기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넓은 구름다리이다. … (그런데) 최근에 일어난 불합작, 혼란, 무질서의 방법으로 이 구름다리를 파괴하려면 할 수 있는 처지에 여러분은 있다. 만일 사리(私利)만 아는 정치지도자들이 소위 당록(黨祿)이니 정권이니의 쟁탈이 생기면 필연코 불통일, 비협동, 무질서 상태가 올 것이요 이때야말로 완비된 그 구름다리를 조선인들이 파괴하고 불살라버리는 것이다.”30)
 
  이러한 성명서는 하지가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좌익정파들도 참여하는 자문위원회의 구성을 절박하게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미소공위라는 중대한 행사를 앞두고 있는 점령군사령관으로서 정치력이 결여된, 너무나 직설적인 위압이었다.
 
 
  2. 最高政務委員會를 國民代表民主議院으로
 
  비상국민회의는 예정대로 2월 1일 오전 11시부터 명동천주교회당 대강당에서 열렸다. <조직조례>에 따른 “저명한 민중지도자”로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오세창, 권동진, 조만식, 김창숙(金昌淑), 홍명희 8명, 임시의정원 의원 14명, 정당 및 단체대표 94명, 지방대표 65명, 주비회 18명 등 209명(자연인의 중복으로 실제 수는 201명)의 초청자 가운데에서 197명이 참석했다.
 
  안재홍의 사회로 개회된 회의는 먼저 김병로(金炳魯)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김윤진의 경과보고에 이어, 남상철과 유엽(柳葉)이 각각 임시정부에 대한 감사 결의문과 연합국에 대한 감사 결의문을 낭독하고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와 개회 중인 미소군사령부 대표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 중인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장군의 축사 낭독으로 오전 회의는 끝났다. 러취는 축사에서 “나는 이 모임으로 한국민족통일은 완성되었다고 보며, 이것을 세계에 자랑하고 싶다. 오늘의 이 회합은 물론 정치적 회합이겠으나 나는 또 한편 이 회합은 한국사람의 피로 결합한 정신적 통일을 기했다고 본다”라고 비상국민회의에 대한 미군정부의 기대를 표명했다.
 
 
  最高政務委員 선출 위한 緊急決議案 제출
 
  회의는 오후 2시에 속개되었다. <의사규정>과 <비상국민회의 조직대강>을 가결한 다음, 정부의장 및 <조직대강>에 따른 위원선거를 실시할 순서가 되었을 때였다. 권동진을 비롯한 참가자 101명의 연서로 “한국의 자주적 민주주의의 과도정권 수립과 기타 긴급한 제문제의 해결에 관하여 관계 열국과 절충하며 필요한 제조치를 행하기 위하여 최고정무위원들을 두되, 그 원수와 선정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에게 일임함”이라는 긴급 결의안이 제출되었다.31) 이 긴급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방금 통과시킨 <조직대강>에도 없는 중대한 기구를 설치하는 결의안이 개회 첫날에 101명이라는 참석자 과반수의 연서로 전격적으로 제출되고, 더구나 그 원수와 인선을 이승만과 김구에게 일임한다고 한 것은 사전에 면밀한 준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연서한 인사들 가운데에는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등 원로들과 안재홍, 허정(許政), 임영신(任永信), 김여식, 남상철, 고희동(高羲東), 송필만(宋必滿), 배은희(裵恩希) 등 독촉중협인사들, 김성수, 백남훈, 김도연, 김준연, 원세훈, 김병로, 백관수, 장덕수 등 한민당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굿펠러 대령의 하지 사령관 자문위원회 구성 공작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위의 결의안에 이어 조선어학회 대표 이극로(李克魯)를 비롯한 23명의 연서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인민당, 공산당, 독립동맹 등에 참가교섭을 하자는 건의안이 제출되어 만장일치로 가결되고, 교섭위원으로 홍진(洪震), 최동오, 이극로, 최범술(崔凡述), 이단(李團) 등 7명을 선정했다.
 
  이어 정부의장과 위원 선거에 들어가서 의장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인 홍진, 부의장에는 역시 임시의정원 부의장인 최동오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비상국민회의가 임시의정원의 직능을 계승한다는 규정의 취지에 따른 조치였다. 다음으로 13개 분야의 위원선거는 의장 및 부의장과 전형위원 7명을 선출하여 이들로 하여금 이튿날 회의까지 전형해서 발표하게 하고 전형위원으로 김성수, 안재홍, 이종현, 김관식, 김붕준, 김여식, 김법린을 선정했다. 첫날 회의는 이것으로 끝났다.32)
 
 
  “임시정부 法統 계승한 建國的會議”
 
  이틀째 회의는 2월 2일 오후 12시15분에 개회했다. 먼저 13개 분야의 위원 103명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10개 분야의 위원장격인 책임위원으로 임시정부 인사들이 선정되었다.
 
  제2일의 회의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역시 초미의 관심사인 헌법 기초를 위한 헌법 및 선거법 기초위원 선정방법 문제였다. 논란 끝에 신익희(申翼熙)를 책임위원으로 하여 선정된 7명의 법제위원들에게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을 기준으로 한 수정위원을 선정하되, 그 선정 방법은 현 대의원 중에서나 또는 사계의 권위자 중에서 선정하도록 하자는 김병로의 제안이 가결되었다.
 
  이어 한민당의 백남훈, 조선민주당의 김병연(金炳淵) 등 23명의 연서로 현재 진행 중인 미소군사령부 대표회의에 비상국민회의 명의로 38도선 장벽을 철폐할 것을 요망하도록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 제1차 회의를 폐막했다.33)
 
  비상국민회의 제1차 회의가 끝나자 한민당의 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은 비상국민회의는 각계 각층의 대다수가 일당에 모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완전히 계승한” “건국적 회의”라고 말하고, “그리고 더 중대한 것은 최고정무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이승만, 김구 양 영수에게 일임하였는데, 이 두 분은 최고정무위원을 선임하여 우리 정부수립 및 미소공동위원회와의 교섭의 중대 소임을 다할 것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34)
 
  이처럼 비상국민회의의 가장 중대한 결정은 최고정무위원을 설치하기로 하고 그 인선을 이승만과 김구에게 위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실질적으로는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기관에 의하여 임시정부가 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로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도 공식으로는 열리지 않았다.
 
 
  獨促中協과 總動員委員會 통합
 
  이승만과 김구가 최고정무위원을 선정하는 데에는 열흘이 넘어 걸렸다. 돈암장과 경교장과 임시정부 요인들 숙소인 한미호텔은 정계 인사들과 미군정청 관계자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바야흐로 이승만과 김구의 정치적 허니문에 의한 과도정권이 곧 수립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단합은 독촉중협과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독촉중협 선전총본부 주최로 2월 6일 오후에 서울 인사동의 중앙교회에서 열린 독촉중협 지방도지부 대표회의는 이승만과 김구가 두 단체의 통합문제에 대하여 전폭적으로 찬성한다는 보고를 듣고 만장일치로 무조건 통합할 것을 결의했다. 그동안 독촉중협은 남한의 6개도뿐만 아니라 함경남북도에 걸쳐서 80개 지방지부가 조직되어 있었다.35) 그리고 지방에 따라서는 두 단체조직원이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독촉중협과 총동원위원회는 이승만, 김구 두 영수의 승인으로 2월 8일에 중앙교회에서 다시 열린 독촉중협 지방도지부회의에서 무조건 통합을 단행하고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로 새로 발족했다.36)
 
  독촉국민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회의를 열고 회의 성격을 국민운동 추진단체로 규정하고 진용을 대폭 강화했다. 이승만, 김구 두 영수를 비롯하여 권동진, 김창숙, 함태영, 오하영(吳夏英), 조만식을 고문으로, 김성수, 안재홍, 남상철, 이규갑(李奎甲), 이극로, 김법린, 배은희 등 18명을 참여(參與)로 추대하고, 오세창을 회장으로, 방응모(方應模)를 부회장으로 선출함과 동시에 11개부 23개과의 책임자들도 선임함으로써 단시일 안에 방대한 조직을 새로 출범시켰다.37) 독촉국민회는 부회장을 이내 이갑성(李甲成)으로 교체하고, 2월 11일부터 새로 마련한 사무실에서 활동을 시작했다.38)
 
 
  李承晩은 趙素昻 포함시키기 꺼려
 
  최고정무위원 선정작업은 김구가 거의 매일 돈암장을 방문하여 진행되었다. 굿펠러도 이승만을 매일 같이 찾았다.39) 독촉중협은 앞에서 보았듯이 1월 19일의 중앙집행위원회의에서 ‘최고기관’을 구성할 23명의 명단을 작성해 놓고 있었는데, 김구도 별도의 명단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두 사람은 양쪽 명단을 놓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전형해 나갔다. 그 자리에는 이승만과 김구와 붓을 들고 기록하는 윤석오(尹錫五) 비서뿐이었다. 일본점령기 때의 친일행적을 이유로 이승만과 평생동지였던 신흥우(申興雨), 여성지도자 김활란(金活蘭) 등의 이름이 지워져 나갔다.
 
  최종적으로 명단을 확정하는 날, 임시정부 인사들을 전형할 때였다. 조소앙의 차례에 이르자 이승만이 주저했다.
 
  “넣읍시다.”
 
  김구가 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그 사람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신익희처럼 더럽지는 않지 않습니까.”
 
  김구의 이 말에 이승만은 말없이 한참 생각하다가 윤석오를 보고 말했다.
 
  “쓰게.”40)
 
  이승만은 일찍이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자신의 비밀통신원이었고, 1925년에 임시의정원이 위헌적인 방법으로 자신에 대하여 탄핵 결의를 했을 때에는 동지회 상해지부를 결성하고 비상수단을 써서 국면을 뒤엎자고 건의하기까지 했던 조소앙이었으나(《月刊朝鮮》 2005년 10월호, <彈劾되는 臨時大統領>참조), 1940년대의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서의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뒤에는 조소앙이 “임시정부의 정치포부는 자본주의를 고수하려는 것도 아니고” “영국의 노동당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등 좌경지식인들에게 영합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도 이승만은 마뜩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굿펠러의 군정자문위원회 구성 작업을 을사조약 체결 뒤의 ‘고문정치’에 빗대어 반대하는 발언을 공언하는 것을 보고 이승만은 여간 괘씸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정부는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이 확정되면 바로 그들로 군정부의 자문위원회를 겸할 기관을 발족시킬 계획이었다. 이 기관의 국민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운형을 비롯한 인민당의 참가가 필요했다. 인민당은 이미 조건부로 자문위원회에 인민당의 대표로 백상규, 황진남, 여운홍, 이정구 네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
 
  굿펠러는 2월 12일에 여운형을 만나 여운형 자신도 자문위원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고 자기와 동행하여 이승만과 김구를 만나 협의하자고 종용했다. 여운형은 황진남을 대동하고 굿펠러와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고는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하여 자문위원단 문제를 협의했다.41)
 
  이승만과 김구가 오랜 시일을 두고 선정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은 임시정부의 주요인사들을 비롯하여 인민당을 포함한 주요 정당과 종교단체 및 여성계 대표 등 다음과 같은 28명이었다.
 
  ㆍ임시정부요인=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ㆍ한국민주당= 백남훈 김도연(金度演) 원세훈 김준연 백관수(白寬洙)
  ㆍ국민당= 안재홍 이의식 박용의(朴容義)
  ㆍ신한민족당= 권동진 김여식 최익환(崔益煥)
  ㆍ인민당= 여운형 백상규 황진남
  ㆍ기독교= 함태영 ?천주교= 장면(張勉) ?불교= 김법린 ?유림= 김창숙
  ㆍ3·1운동 33인= 오세창 ?국학= 정인보(鄭寅普)
  ㆍ여성계= 김선(金善) 황현숙(黃賢淑)42)
 
  1월 19일의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의에서 선정된 명단에서 제외된 사람은 김동원, 홍명희, 이시영, 백남운 등 9명이었고, 새로 선정된 사람은 여운형, 김창숙, 김붕준, 장면, 정인보 등 14명이었다.
 
 
  嚴恒燮은 임시정부가 존속한다고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파를 망라하기 위하여 각 파를 안배한 28명의 최고정무위원은 “인물의 관록과 경중이 너무나 등차 있음”43)은 사실이었다. 이들의 명단은 정무위원장 안재홍, 외무위원장 조소앙, 산업경제위원장 김성수, 국방위원장 유동열, 법제위원장 김병로, 교통위원장 백관수, 노농위원장 유림 등 새로 선정된 11개 상임위원회 위원장 명단과 함께 2월 13일에 발표되었다.
 
  비상국민회의의 선전위원장 엄항섭(嚴恒燮)은 최고정무위원회의 성격과 임무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최고정무위원회의 임무는 한국 각 민주주의정당들과 사회단체로서 구성된 비상국민회의의 의견을 따라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진력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주한미군사령관과 합작하는 의미하에서 한국의 자주적 과도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노력에 자문 자격으로 협조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위원회는 능력과 노력을 다하여 한국인민의 현상을 개선시키며 한국의 완전독립을 촉성함을 그 임무로 한다. 최고정무위원회를 혹은 과도정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없지 아니하나 이것은 과도정권 수립에 한 산파역을 함에 불과하다.”
 
  엄항섭은 그러면서 “임시정부는 장래에 자주적 과도정권이 확립될 때까지는 해체되지 않을 것임을 부언한다”라고 임시정부가 존속할 것임을 강조했다.44) 그러나 엄항섭의 이러한 정의도 정확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루 만에 國民代表民主議院으로
 
1946년 2월 14일에 軍政廳 제1회의실에서 발족한 國民代表民主議院을 보도한 《朝鮮日報》 지면.
  이처럼 “과도정권 수립의 산파역”을 임무로 하고 탄생한 비상국민회의는 이튿날로 “하지 미군사령관의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이 되었다.
 
  민주의원의 결성식은 2월 14일 오전 10시에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거행되었다. 의장석에는 이승만, 두 부의장석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좌정했는데, 이들은 의원들이 선출할 사이도 없이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회에 앞서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 있었다. 개회식에서 연설을 하기로 하고 연설문까지 배포했던 여운형이 회의장 문 앞까지 왔다가 몇 사람과 함께 갑자기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45) 그리하여 민주의원 결성식에는 선정된 28명 가운데에서 여운형을 비롯한 김창숙, 조소앙, 정인보, 함태영 다섯 사람이 불참했다. 여운형과 같은 인민당의 백상규와 황진남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승만의 연설은 감격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동포 여러분! 나는 오늘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기회에 여러분을 대하게 되었다. 나의 가슴은 과거 다년간 우리가 지내온 망명과 노예적 생활의 쓰라린 추억으로 가슴이 가득하다. … 이제야 우리는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우리에게 희망 있는 장래와 번영이 약속되었음에 대하야 감축할 수 있게 되었다.”
 
 
  “前途는 多難하나 問題는 明瞭해”
 
  이렇게 감회 어린 소감을 피력한 이승만은 민주의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나는 오늘날 개인의 자격으로 제위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왜그러냐 하면 나는 국민을 대표하야 국민의 소리를 전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은 까닭이다. … 오늘이야말로 한국의 발전과 주권국가로서 독립한 자주정부의 복구를 향하야 비약하는 신기원을 짓는 날이다. 오늘 나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성립을 발표함에 대하야 깊이 영광을 느끼는 바이다. 고문자격으로서 하지 장군에게 협조하려는 이 의원은 한국의 독립과 한국을 급속히 독립국가로 만들려는 여러 정당 수뇌자들과 오랫동안 협의하고 신중히 고려한 나머지에 성립된 것이다. 이 의원의 성립은 한국에 대하야 지대한 의의와 이익이 있고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통일된 독립한국의 목적 달성의 전조가 될 것이다. … 금후 의원에서는 금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긴급한 문제에 대하야 하지 중장과 군정부와 협의하는 데 있어서 한국국민을 대표할 것이다. …”
 
  이승만은 의원들에 대한 칭송도 잊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참석하신 지도자와 정치가는 우리 국가를 분열시키는 사리사욕을 버리는 데 대하야 위대한 아량을 보여주었다. 이 의원이 일치단결함으로써 제위는 각자와 각 당을 초월하야 한국의 목적을 옹호하기 위하야 이미 우리에게 호례(好例)를 보여주었다. …”
 
  이승만은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민주의원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한 다음, “제위 중 한 사람이라도 이 전무후무한 기회에 실패하였다는 말을 듣도록 하지 마시오. 전도는 다난하나 문제는 명료하다. 자유와 독립이여!”라고 역설했다.46)
 
 
  金九는 非常國民會議의 역할을 강조
 
  이승만의 연설에 이어 김규식의 ‘선언문’ 낭독과 하지의 성명서 낭독이 있었다. 하지는 성명서에서 “이 순간은 남한에서 한국인대표가 국사에 진정으로 참가하기 시작하는 획기적 시대의 개시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민주의원 발족의 의미를 한껏 높이 평가했다.
 
  뒤이은 연설에서 김구는 이승만이 언급하지 않은 비상국민회의를 강조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다시 강조했다.
 
  “이제 민주주의 민족통일기구로서의 비상국민회의의 결의로 인하여 여기에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이 성립되었으니, 이로써 국민의 의사를 구전(俱全)하게 대표하여 되도록은 빠른 기간에 남북 합치한 통일정권을 수립하여 38도선의 철폐, 교통 행정의 통일, 산업경제의 재건 건설, 사회질서의 재정립 등으로 국민을 도탄에서 건져내는 건국대업을 한걸음 한걸음 실천하여 정식정부의 완성을 지향하는 온갖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공작을 단행할 것이다. 그동안에는 공산주의의 편향한 방향과도 견실한 협동이 있을 것이요, 전 민족의 총의와 총역량을 집결하여, 민족자주독립국가체제를 완성하도록 모든 장해와 기반(羈絆)을 철저히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
 
  김구는 마지막으로 하지 장군과 미소양국의 군정당국이 우리의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많은 원조를 아끼지 않는 것을 감사한다고 말하고, “나는 비록 재덕이 부족하나 이 중대한 시국에 돌아보아 스스로 안위를 탐할 수 없으므로 성심성의로 전력을 기울여 훼예포폄(毁譽褒貶: 꾸짖음과 칭찬의 평정)을 불구하고 이 건국대업에 매진하려고 한다”하고 다짐했다.47)
 
  한편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전선 조직체를 결성할 것을 준비해 온 좌익정파들은 국민대표 민주의원이 출범한 다음 날인 2월 15일과 16일 이틀 동안 서울 YMCA회관에서 회의를 열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48)
 
 
  德壽宮石造殿을 議事堂으로
 
民主議院 개원식에서 연설문을 낭독하는 金九 부의장과 李承晩 의장.
  민주의원의 의사당은 임시로 유서깊은 덕수궁(德壽宮)의 석조전(石造殿)으로 결정되었다. 이 건물은 그동안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수리 중이었다. 2월 18일 오전 10시부터 열린 제1차 회의는 먼저 비상국민회의의 모든 전문위원회를 민주의원으로 계승시키기로 하는 사무처리방식을 토의한 다음, 민주의원의 성격을 일반에게 천명하기 위한 성명서 기초위원으로 안재홍, 김준연, 정인보, 조완구, 원세훈 5명을 선정했다.
 
  다음으로 심각한 현안문제인 쌀값문제를 논의한 끝에 안재홍, 원세훈, 김도연, 최익한, 김여식 5명으로 미곡문제연구회를 구성했다. 회의는 이어 민족독립운동의 기념일인 3월 1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3·1절을 국경일로 제정할 것을 하지 사령관에게 제의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는 이 제의를 바로 승인했다.49)
 
  이날 부의장 김규식은 자기가 주석으로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50) 같은 날 인민당 대표의 최고정무위원 백상규도 인민당을 탈당했다.51)
 
  쌀값 및 생활필수품 가격에 대한 대책과 <민주의원규범> 제정과 관련하여 연일 열띤 토론을 벌이던 민주의원은 2월 23일의 제5차 회의에서 전문 32조로 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규범>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날 회의에는 그동안 칭병하면서 불참했던 외무위원장 조소앙도 참석했다. 조소앙은 전날 한미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남북을 점령한 각각의 군정하에서 남북을 통일한 자주독립을 하는 방법은 그 군정과 합작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면서 군정부와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김일성(金日成) 장군이 소련 점령지역 내의 그 형태 속에서 정권을 수립한 것도 그 군정과의 합작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52)
 
 
  金九는 部長會議의 首班인 總理로
 
  제5차 회의는 먼저 전국적인 조직인 민주의원의 정식 명칭에 “남조선”이라는 제한적인 말이 붙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삭제했다. <규범>은 민주의원의 임무를 “한국의 자립적 민주주의의 과도정권 수립과 기타 긴급한 제문제의 해결에 관하여 관계방면과 절충하며 필요한 제조치를 취하기로 함”이라고 천명하고, 입법부와 행정부와 미군정부에 대한 자문기구의 기능을 뭉뚱그려서 애매하게 규정하면서 의장 1명, 부의장 1명과 함께 총리 1명을 두되, 총리는 내무부, 외무부, 국방부, 문교부, 법무부, 치안부, 농림부, 후생부 등 15개 부의 “부장회의의 수반이 되며 일반행정의 통일”을 담당한다고 하여, 행정부의 직제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53)
 
  새 <규범>에 따라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규식, 그리고 총리에는 김구가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국무위원회 비서장이었던 조경한은 김구가 민주의원의 총리가 된 것은 하지가 그에게 5만명의 경비군 조직을 맡길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54) 미군정청은 해방 이후에 민간군사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해 있는 상황과 경찰력의 부족에 따른 치안유지의 어려움 등을 감안하여 일찍부터 군대 조직을 서둘러, 1945년 11월 13일에 군정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Defence)를 설치했다. 국방사령부는 부내에 군사국을 두고 그 밑에 육군과 공군의 2부를 두고, 또 10월 21일에 발족한 경무국을 국방사령부 산하로 통합시켰다. 국방사령부는 육군은 3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1개 군단을 편성하고 공군은 2개 비행중대로 편성하여 모두 4만5000명, 해군 및 해안경비대는 5000명으로 편성한다는 국방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병력을 2만5000명으로 축소한 경찰예비대로 수정되었고,55) 이 계획은 1946년 1월 9일에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았다.56) 그리고 군정청 경무국은 1월 21일에 국방경비대를 제외한 일체의 사설 군사단체에 해산명령을 내렸다.57)
 
  중국에 있을 때에 광복군의 창설과 훈련에 열성을 쏟았던 김구는 귀국한 뒤에도 여러 군사단체들의 활동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 26일에 좌익계의 국군준비대 전국대회가 열렸을 때에도 김구는 직접 참가하여 축사를 했다.58)
 
  한편 1946년 2월 4일에는 중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한국광복군 장정 550명이 전재민 귀환동포들에 섞여 서울과 인천으로 귀국했다.59) 하지가 김구에게 5만명의 경비군 조직을 맡길 것을 약속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 것이었을 것이다.
 
 
  <過渡政府當面政策>을 직접 작성
 
1946년 2월 21일에 金浦비행장에 도착한 부인 프란체스카女史를 마중하는 李承晩.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으로서 한 작업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 3·1절을 맞으면서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을 직접 작성하여 서울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발표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지나간 수삭(數朔) 동안을 신병으로 인하여 직접으로 말하지 못하고 윤치영으로 대신 방송하다가 지금은 신병이 거의 다 쾌차되어 방송국의 주선으로 우리 집에서 말한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3·1기념일이 임박한 이날에 한족의 복리를 위하여 진행할 대정방침(大政方針)의 대략을 설명하는 것이 적합할 줄로 믿는다. 우리 민국이 부강하며 세계의 존경할 만한 나라를 이루자면 우리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정책이 여러 가지이다. 오늘 저녁에 이 모든 정책의 대강만 말하고 일후에 상세한 조건을 해석하여 알리려 한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모범적 독립국을 건설하자”는 제목으로 된 <당면정책>을 한가지씩 읽어 내려갔다.
 
  “우리 독립국의 건설은 민중의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국법상에는 다 평등대우를 주장할 터입니다(제1항)”라는 항목으로 시작되는 이 문서는 <당면정책>이 아니라 그의 국가경영의 비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말하자면 헌법 초안과 같은 것이었다. 18세 이상자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 언론 집회 종교 출판 및 정치운동의 자유 등 국민기본권의 보장에서부터 중요 산업의 국유화, 모든 상공업에 대한 국가검열제, 토지개혁, 쌀값과 생활필수품 가격의 통제,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제도, 최저임금제와 8시간 노동제, 의약과 위생상 편의의 국가관할 등의 사회복지제도 등 당시의 국민적 요구를 감안한 사회주의적 평등사회의 구현을 표방한 것이었다. 가장 뜨거운 논쟁점이 되어 있는 토지개혁에 관해서는 세 항목에 걸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모든 몰수한 토지는 다시 나누어 민간의 이익을 증진시키되, 토지소재지에 있는 농민에게 부쳐서 경작하게 할 것이고 먼 데 있는 지주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농민이 자기 땅을 경작하면 소출을 많이 늘릴 수 있는 연고이다.(제9항)”
 
  “큰 농장은 나누어 여러 사람이 경작하게 하되 소재지 농민에게 맡겨서 소출이 늘게 장려하며, 그 토지의 가격을 상당하게 마련하여 매년 얼마씩 분배하여 여러 해를 두고 지주에게 갚기로 계획을 정하려 한다.(제10항)”
 
  “다만 적몰(籍沒)한 땅을 농민에게 분배할 때에는 그 보수를 정부에 판납(辦納)하여 국민공용에 보충하리니, 이는 새 국가건설에 많은 경비를 요구하는 이유이다.(제11항)”
 
  <당면정책>에는 또 “빈민의 사정에 큰 폐단이 되는” 고리대금(高利貸金)과 “일남일부(一男一婦)의 가정법을 보호하기 위하야” 축첩을 금지하는 법 제정도 포함되어 있었다(제12항, 제31항).
 
  이승만은 끝으로 공직자 및 경찰, 군인, 각급 공립학교 교사나 교장이 되는 사람은 취임할 때에 반드시 선서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선서의 대지는 대략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라고 선서문의 내용까지 예시했다. 그것은 “나는 대한시민의 자격으로 이에 선서하노니, 우리 헌법과 국법을 복종하며, 우리 정부를 옹호하며, 국내에 있는 민국의 원수를 항거하여 나라를 보호하기로 맹서함”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직자들이 취임할 때에 충성맹세를 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의식을 본뜬 것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있을 때에 동지회의 선서문도 직접 작성하여 시행했었다. 민주의원의 개회식 때에 김규식이 ‘선서문’을 낭독한 것도 그러한 의식을 본뜬 것이었을 것이다.
 
  <과도정부당면정책33항>은 문장만 다듬어서 거의 그대로 3월 19일에 민주의원의 <임시정책대강(臨時政策大綱)>으로 의결되었는데,60) 이 <임시정책대강>은 1948년에 대한민국헌법을 제정할 때에 중요한 참고문건이 되었다.61) 민주의원은 3월 5일부터 회의장을 창덕궁(昌德宮)의 인정전(仁政殿)으로 옮겨서 회의를 계속했다.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가 서울에 오는 데도 곡절이 많았다. 미국정부의 출국허가가 나고도 몇 주일 동안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그녀는 1946년 1월 22일에 미군수송선편으로 시애틀을 출발하여 23일 동안 태평양을 항해하여 일본에 도착했고, 2월 21일에 항공편으로 서울에 왔다.62) 부부는 넉 달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3월 11일에 임영신의 한국여자국민당 주최로 명월관에서 프란체스카 환영회가 열렸다.63)⊙
 

  1) 《大東新聞》1946년 1월15일자, <吾族은 統一하였다>;《東亞日報》1946년 1월16일자, <民族統一은 完成된다>. 2) <獨立促成中央協議會中央執行委員會 第2回會議錄>(1946. 1.15),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建國期文書 1》, 延世大學校現代韓國學硏究所, 1998, pp. 184~188. 3) 白南薰, 《나의 一生》, 解?白南薰先生紀念事業會, 1968, p. 165. 4) 李敬南, 《雪山張德秀》, 東亞日報社, 1981, p. 312.
 
  5) <獨立促成中央協議會中央執行委員會 第5回會議錄>(1946. 1. 18),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pp. 293~295. 6)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 한국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사비평사, 2005, p. 531. 7) Benninghoff to Byrnes, 28 Jan. 194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6, vol. Ⅷ,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1, p. 627. 8) Hodge to MacArthur, 22 Jan. 1946, FRUS 1946, vol. Ⅷ, p. 613.
 
  9) <非常國民會議執行委員會 第2回會議錄>(1946. 1.19),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pp. 319~320. 10)《中央新聞》 1945년 12월21일자, <在美同胞消息傳하는 張錫潤氏談>; 張錫潤, 《나의 回顧錄》(未刊行校訂本), pp. 72~74. 11) 《駐韓美軍政史(2)》(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HUSAFIK 2), 돌베개影印版, 1988, p. 182. 12) 《朝鮮日報》 1946년 1월21일자, <非常政治會議籌備會議開幕>;《東亞日報》1946년 1월21일자, <非常政治會議準備會今日開幕> 13) 《朝鮮日報》 1946년 1월22일자, <組織條例起草키로>;《東亞日報》 1946년 1월22일자, <準備會幹部選定>.
 
  14) 《中央日報》 1946년 1월23일자, <非常政治籌備會 非常國民會議로 改稱>. 15) 《朝鮮日報》 1946년 1월24일자, <빈氏放送에 對하야 籌備會서 聲明發表>. 16) <非常國民會議代表會 第3回會議錄>(1946. 1.21),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pp. 406~408. 17) <非常國民會議執行委員會 第3回會議錄>(1946. 2.21),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三)》, pp. 361~362.
 
  18) 《東亞日報》 1946년 1월25일자, <二月一日에 國民會議召集>. 19) 《朝鮮日報》 1946년 1월24일자, <左右翼團結目標코 兩政黨籌備會離脫>. 20) 民主主義民族戰線 編, 《朝鮮解放一年史》, 文友書館, 1946, p. 129. 21) 《朝鮮日報》 1946년 1월25일자, <速히 復歸하기 希望>. 22) 《朝鮮日報》 1946년 1월26일자, <政界依然混沌狀態>. 23) 《東亞日報》 1946년 1월26일자, <左翼에 合流勸告>. 24) 《서울신문》 1946년 2월1일자, <‘非國’會議를 支持>. 25) 《自由新聞》 1946년 1월26일자, <政局動向極注目. 金九氏 李博士(代理), 하中將과 重大會談>.
 
  26) 《自由新聞》 1946년 1월29일자, . 27) 《朝鮮日報》 1946년 2월2일자, <하지中將諮問委員會에 人民黨, 代表四氏派遣決定>. 28) 心山記念事業準備委員會 編, 《?翁一代記 ─ 心山金昌淑先生鬪爭史》, 太乙出版社, 1965, pp. 266~268. 29) 《朝鮮日報》 1946년 1월29일자, <自主獨立의 指針을 李承晩博士가 表明>.
 
  30) 《東亞日報》 1946년 1월30일자, <朝鮮國民에게 告함>;《朝鮮日報》 1946년 1월30일자, <指導者여 猛省하라>. 31) 《東亞日報》 1946년 2월4일자, <緊急決議案>. 32) 《朝鮮日報》 1946년 2월2일자, <三千萬環視속에 非常國民會議開幕>;《東亞日報》 1946년 2월4일자, <政權樹立에 總力凝結>.
 
  33) 《朝鮮日報》 1946년 2월4일자, <法制委員을 選任>. 34) 咸尙勳, <非常國民會議에 對하야>, 《東亞日報》 1946년 2월6, 7일자. 35) 《東亞日報》 1946년 1월11일자, <八十餘處에 支部設置>. 36) 《朝鮮日報》 1946년 2월8일자, <두團體完全握手>. 37) 《朝鮮日報》 1946년 2월21일자, <國民運動에 推進力>. 38) 《서울신문》 1946년 2월12일자, <大韓獨立促成國民會서 初委員會를 開催>. 39) 《東亞日報》 1946년 2월10일자, <政界의 軸心은 敦岩莊으로 集中>. 40) 尹錫五 證言, 孫世一, 《李承晩과 金九》, 一潮閣, 1970, p. 221.
 
  41) 위의 책, p. 254 ;《朝鮮日報》 1946년 2월14일자, <呂運亨氏臨時政府訪問>. 42) 《朝鮮日報》 1946년 2월 14일자, <非常國民會議最高政務委員28人을 選定>. 43) 《東亞日報》 1946년 2월15일자, <社說: 表裡一體의 統一體 ─ 國議의 最高委員과 民主議院> 44) 《東亞日報》 1946년 2월14일자, <政務委員會性格과 任務>.
 
  45) 《大東新聞》 1946년 2월16일자, <呂運亨式場門에서 突變>; MacArthur to Byrnes, 24 Feb. 1946, FRUS1946, vol. Ⅷ, p.640.46) 《朝鮮日報》 1946년 2월15일자, <過渡政權의 母體 ─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成立>;《大東新聞》 1946년 2월15일자,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宣言式>. 47) 《朝鮮日報》 1946년 2월15일자, <一步一步實踐>. 48) 《朝鮮人民報》 1946년 2월16일자, <《民線》 結成大會歷史的開幕>.
 
  49) 《朝鮮日報》 1946년 2월19일자, <非常國民會議의 專門委員會繼承?>;《東亞日報》 1946년 2월20일자, <常任 ·專門委員選定>. 50) 《朝鮮日報》 1946년 2월19일자, <金奎植博士脫黨>. 51) 《東亞日報》 1946년 2월19일자, <白象圭氏人民黨脫黨>. 52) 《朝鮮日報》 1946년 2월22일자, <當面의 南北情勢는 遺憾>. 53) 《朝鮮日報》 1946년 2월24일자, <非常國民會議의 政務委員繼承>;《東亞日報》 1946년 2월24일자, <韓國自主的民主主義의 過渡政權樹立에 邁進>. 54) 趙擎韓 證言, 孫世一, 앞의 책, pp. 223~224. 55) 戰史編纂委員會, 《韓國戰爭史(1) 解放과 建軍》, 國防部, 1967, pp. 256~257. 56) Joint Chiefs of Staff to MacArthur, 9 Jan. 1946, FRUS 1945, vol. Ⅵ, p. 1156. 57) 《朝鮮日報》 1946년 1월22일자, <國防警備隊만은 認定>. 58) 《서울신문》 1945년 12월27일자, <新國家軍隊로 訓練>. 59) 《東亞日報》 1946년 2월5일자, <光復軍五百五十名戰災同胞와 함께 還國>.
 
  60) 《東亞日報》 1946년 3월19일자, <民主議院의 臨時政策卄七項을 發表>. 61) 柳永益, <李承晩國會議長과 大韓民國憲法制定>, 《歷史學報》, 제189집, 歷史學會, 2006, pp. 101~135 참조. 62)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 Company, 1960, p. 221 ;《朝鮮日報》 1946년 2월23일자, <李博士夫人프女史倒着>. 63) 《東亞日報》 1946년 3월13일자, <李博士夫人歡迎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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