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인터뷰] 홍콩의 기자들

돈과 정보가 모이는 곳에서 120개 언론社가 취재중

  • : 함영준  jmedi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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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TV의 저녁뉴스 「아시아 투나잇(Asia Tonight)」을 진행하는 여성 앵커 카루나 신쇼(Karuna Shinsho)는 뛰어난 미모, 정확한 영어발음, 차분한 진행 솜씨로 아시아에서 가장 얼굴이 잘 알려져 있는 언론인이다.
 
  1999년 2월 홍콩 소재 CNN 아시아본부에 입사, 매일 2시간짜리 아침뉴스 프로 「CNN 오늘 아침(CNN This Morning)」을 진행해 오다 올들어 프라임 타임帶 저녁뉴스 앵커로 「승진」했다. 주말 30분짜리 프로 「인사이드 아시아(Inside Asia)」도 맡고 있다.
 
  그녀는 1968년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系 미국인이다. 13세 때 일본으로 와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도쿄 소피아大(Sophia Univ.)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녀의 저널리즘 입문은 우연하게 이뤄졌다. 대학 4년 때 NHK-TV를 방문했다가 PD의 눈에 뜨인 것이다. NHK 국제방송서 시사·경제프로 진행을 맡다가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컬럼비아大 국제행정대학원에서 국제문제를 전공했다. 유학중 NHK 뉴욕지사 기자로 활약했다.1994년 석사학위를 받고는 싱가포르 소재 경제전문채널 「아시아 비즈니스 뉴스(지금의 CNBC 아시아)」 앵커 겸 기자로 활동했다. 1997년 10월부터 다시 도쿄 NHK에서 일하다 2년 뒤 CNN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녀가 NHK를 두 번씩 떠난 이유는 『그저 뉴스만 읽어 주는 여자 앵커 역할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4월 하순 오후 홍콩 CNN 사무실에서 만난 그녀는 『한국도 비슷한 처지겠지만 일본방송에선 여성 앵커가 아직 예쁜 꽃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카루나의 외모는 화면보다 실제가 더 낫다. 168㎝ 정도의 훤칠한 키에 큰 눈망울,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웬만한 연예인을 뺨친다.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낸 탓인지 서구·아시아적 분위기가 접목된 듯한 느낌이다. 미국 토종 여성 앵커라면 도전적이고 강인하게 보이겠지만 그녀는 보다 겸손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뉴스앵커를 하다 보니 항상 깨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언제 어떤 나라에서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정확하고 차분하게 뉴스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그러기 위해선 각 나라 동향 등 시사문제를 평소 잘 알아야 되고 공부도 많이 해야 되지요』
 
  저녁뉴스 앵커라 아침은 늦게 시작된다. 오전 10시쯤 일어나 신문을 읽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근한 뒤 각종 정보, 통신 내용 등을 파악한 뒤 본격적으로 저녁방송 준비를 한다. 오후 7시부터 7시30분까지, 밤 10시부터 10시30분까지 두 차례 생방송 진행을 하며 오후 8시 프로에는 가끔 끼어들어간다. 퇴근 시각은 11시 이후 자정 무렵.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특별하진 않아요. 평소 제 자신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는 주의예요. 때로 실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취미생활로는 독서, 영화보기, 먹기, 여행 등입니다』
 
  그녀는 저널리즘에서 일하는 것이 매우 도전적이고 재미있는 일이라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작년 7월 중국계 미국인 외교관과 결혼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토머스 크램튼
 
  『저널리스트의 매력은 자유』

 
  파리에 본사가 있는 세계적인 영자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의 토머스 크램튼(Thomas Crampton·33)은 약간 꺼벙해 보이나 일욕심이 넘치는, 전형적인 사건기자 스타일이다. 지난 3월 어느 날 점심을 나눌 때 그는 잠을 설친 듯 부스스한 머리와 얼굴로 나와 단 5분 만에 음식접시를 비워버렸다. 한국 경찰서 출입기자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어젯밤 뉴욕 캘리포니아 파리와 전화 통화 취재를 계속 하느라 아침 5시까지 잠을 못 잤습니다』
 
  『무슨 내용인데 날밤을 샙니까. 조금 내용을 맛볼 수 없을까요』
 
  『지금은 안 됩니다. 오늘 저녁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피곤한 가운데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뭔가 한 건 했구나」 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음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홍콩의 「빌 게이츠(Bill gates)」로 불리는 러처드 리(Richard Li·李澤楷·34) PCCW 회장이 미국 스탠포드大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졸업한 것으로 행세해왔다는 내용을 크게 보도했다. 홍콩 매스컴과 재계는 이 소식에 난리가 났다.
 
  리처드 리는 세계 華商(화상) 최고갑부인 李嘉誠(리카싱) 長江(청콩)실업 회장의 차남이자, 홍콩 제일의 정보통신업체인 「퍼시픽 센추리 사이버 웍스」(PCCW)를 설립, 운영하는 인물 아닌가. 홍콩 매스컴은 물론 세계 유수 매스컴들이 앞다투어 이 사실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리처드 리는 『실수로 중퇴가 졸업으로 와전됐다』며 사실상 학력 변조 사실을 시인했다.
 
  토머스 크램튼은 작년 7월 홍콩으로 발령받고 와서 아시아 담당특파원으로 활약한 지 8개월 만에 이 기사 한 건으로 멋진 장외홈런을 날린 스타가 됐다.
 
  아일랜드系 미국인으로서 대학 졸업 후 아일랜드 더블린 소재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정치철학 및 문학을 공부한 그는 프랑스 파리가 좋아 그곳에서 머물며 영어강사,비즈니스 컨설턴트 등을 하다가 1991년 우연히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본사 논설위원실 촉탁직원으로 채용되어 기자가 됐다. 1995년 태국으로 가 신설된 영자紙 「아시아 타임스」에서 근무하다 1997년 6월 홍콩주권 회복 취재차 홍콩에 머물던 중 회사 파산소식을 들었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태국에서 시작됐는데 공교롭게도 제 신문사가 먼저 날아갔죠. 말하자면 저는 금융 위기의 최초 목격자가 된 셈입니다』
 
  출장중 신문사가 망해버려 오갈 데가 없어진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쳤다. 바로 친정격인 IHT에서 태국 바트貨 폭락 관련 기사를 써달라는 제의가 왔다. 이후 再입사, 방콕특파원으로 근무하다 홍콩으로 왔다.
 
  『저널리스트로서 만족하고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 직업은 돈으로 보상받는 직업은 아닙니다. 또 「9~5(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일반 샐러리맨 생활)」도 아닙니다. 항상 생각하고 고민해야 됩니다. 그러나 매력은 자유라고 할까? 예를 들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영화감독이건, 배우건…. 매우 자유롭죠.
 
  일요일은 이론상 존재합니다. 한국기자들도 마찬가지죠? 기자직은 고강도 직업이라 때로 머리를 쉬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단시간內 격렬한 운동이 되는 스쿼시를 즐기고 시간 나면 프랑스 소설이나 역사책을 읽으면서 머리를 식힙니다』
 
  그는 자신의 기사쓰기나 기자로서의 능력에 대해 항상 불만이라고 토로했다. 기자로서 욕심도 많고 물이 오르려는 그 연배의 기자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듯 말이다.
 
  『존경하거나 본받고 싶은 기자는 누구냐』고 묻자, 잠시 생각하더니 『「뉴욕 타임스」의 마크 랜들러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브루스 길리』라고 답했다.
 
 
 
 NYT 홍콩지국장 마크 랜들러
 
  『호기심이 없다면 기자가 아니죠』

 
  토머스 크램튼이 지목한 「뉴욕 타임스」(NYT)의 홍콩지국장 마크 랜들러(Mark Landler·35)는 첫 인상부터 깔끔하고 엘리트적이며 빈틈이 없어보였다.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大에서 국제문제를 전공했다. 이 대학 국제문제분야는 세계적 수준이다. 클린턴 前 대통령도 이곳을 나왔고 각국 많은 외교관들이 이 학교를 거쳤다.
 
  『원래 국제정치, 외교에 관심이 많았죠. 그러나 대사는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자리라 외교관의 길을 포기하고 기자직을 택했습니다. 제가 글쓰기를 좋아하거든요』
 
  지방신문 기자를 거치는 통례 대신 그는 대학을 졸업한 1987년 6월 바로 뉴욕타임스의 기자補(보)로 입사했다. 뉴욕을 거점으로 경제부에서 미디어와 통신업계 담당 기자로 활약하다 1998년 3월 홍콩으로 왔다. 언젠가는 국제정치무대의 본거지인 워싱턴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호기심(curiosity)이라고 봅니다. 호기심이 없다면 기자가 아니죠. 기자라는 직업의 장점은 결코 지겹지 않다는 거예요.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고 멋진 사람들도 만나고…. 그러나 가정과 직업 간의 균형이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죠』
 
  그의 부인은 중국系 미국인 변호사로 홍콩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홍콩을 거점으로 한달 반은 아시아 지역 출장을 간다. 홍콩에서는 주로 투자은행가, 법률가, 학자들을 만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조깅을 하거나 와인을 마신다고 했다.
 
  『위대한 신문사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 행운이죠. 때문에 책임, 평판이 아주 중요합니다. 늘 제 기사의 공정성과 정확성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자다운 말이다.
 
 
 
 「타임」 아시아版 편집인 아디 이그네셔스
 
  『가장 나쁜 기사는 공정성을 가장한 나열식 기사』

 
  美 시사주간지 「타임(Time)」 아시아版 편집인 아디 이그네셔스(Adi Ignatius·43)는 아시아통 국제기자다. 원래 아시아에 관심이 많아 1970년대 후반 중국 여행을 하고 온 뒤 중국통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981년 홍콩에서 잡지기자로 출발한 그는 곧 「아시안 월 스트리트」로 자리를 옮긴 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北京(베이징)지국장을 지냈다.이후 美 컬럼비아大에서 연수하면서 러시아 문제를 공부한 뒤 1992년~1995년까지 「월 스트리트 저널」의 모스크바지국장을 역임했다.
 
  1996년 홍콩으로 와 시사 주간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경제부장을 거쳐, 「타임」 아시아부국장으로 일하다 2000년 9월 편집인으로 승진했다. 그의 부인 도린다 엘리옷은 자매지 「아시아 위크」의 편집인으로 한 건물에서 일한다.
 
  그가 지휘하는 기자는 본부에 35명, 아시아 각국에 배치된 특파원 통신원 15명 등 약 50명. 취재기자에서 편집인의 지위에까지 오른 그는 좋은 기자가 되기 위해선 첫째 (떠들지 말고) 남의 얘기를 열심히 듣고, 둘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본능적 판단을 신뢰하라고 말한다.
 
  『가장 나쁜 기사는, 예컨대 특정인에 대해 「누구는 좋다고 하고, 누구는 나쁘다고 하더라」는 식의 공정성을 가장한 나열식 기사입니다. 기자는 스스로 많은 지식을 교육받고 정통한 견해(informed view)를 가져야 합니다. 스마트하고 개방적이며 열심히 일하는 기자가 돼야 합니다』
 
  『대부분의 취재기자는 생리상 편집간부 역할과 맞지 않죠. 보통 기자들은 독립적이며 다소 미친 성향들이 있지 않습니까. 반면 편집인들은 팀 플레이 중심입니다. 뛰어난 취재기자일수록 팀플레이와는 거리가 멀죠』
 
  현재 「타임」은 오는 6월 특별판을 목표로 대대적인 지면 쇄신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80년 전통이지만 늘 앞서가는 변화를 통해 세계 정상의 시사주간지로서 입지를 지키고 있는 「타임」이기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새로운 포맷, CD 램, 바코드 시스템 등이 선보일 겁니다. 요즘 잡지들은 신기술(technology) 분야에 역점을 둡니다. 그러나 역시 좋은 기사(good writing)가 최고죠. 지난 3월5일자 커버 스토리처럼 기자가 직접 체험한 마약기사라든가, 인도 지진피해지역 르포 같은 생생한 현장체험기사말입니다. 보통 정형화되고 재미없는 기사는 「궁지에 몰린 와히드 대통령(Wahid in Trouble)」 같은 기사들입니다』
 
  이그네셔스 역시 스포츠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다. 매주 토요일엔 소프트 볼, 평일에는 회사 근처 테니스장에서 땀을 흘린다.
 
  『술은 되도록 적게 마시려고 합니다. 한국 갔더니 참 많이 마시더군요』
 
 
 
 「프리덤 포럼」 아시아 센터 소장 아놀드 자이틀린
 
  『기자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첫째 호기심, 둘째 회의심』

 
  미국에 본부를 둔 非영리언론관련단체인 프리덤 포럼(Freedom Forum)의 아시아 센터 소장 아놀드 자이틀린(Arnold Zeitlin)은 69세의 노인인데도 50代처럼 젊게 보인다.
 
  『나는 평생 언론과 관계된 일만 하고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글 쓰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校誌를 만들고 대학에선 대학신문기자로 활약했죠. 평생 다른 분야 일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기자라는 직업에 매우 만족하며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도 많이 사귀고 돈은 별로 없지만 자녀들 3명 교육도 잘 시켰다고 자부합니다』
 
  대학 졸업 후 1955년부터 1987년까지 대부분 AP통신사 기자로 활약했다. 1961년 당시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창설된 평화봉사단 제1기 요원으로 아프리카 가나지역에 파견된 전후 3년 정도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인연으로 1966년 AP가 아프리카 지역에 첫 상설지국을 개설할 때 나이지리아 특파원으로 파견돼 3년 간 비아프라 內戰 등 아프리카 19개국 취재를 했다. 1969년부터 4년 간은 파키스탄 지국장으로 근무하며 당시 동-서 파키스탄 내전상황을 취재했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필리핀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비판해오다가 필리핀 정부에 의해 사실상 강제추방되기도 했다. 1987년 AP를 떠나 보스턴에서 국제문제잡지 발간을 도왔으며 1990~1993년에는 UPI 통신사의 亞-태평양 지사 부사장 겸 전무로 근무해 왔었다.
 
  자이틀린이 강조하는 기자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첫째가 호기심, 둘째가 회의심(Skepticism)이다. 반대로 나쁜 기자의 특징은 누가 말하면 이를 그대로 믿고 나이브하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요즘 자주 쓰이는 조사-추적 보도(Investigative Reporting)란 용어를 나는 싫어합니다. 어느 취재도 그런 식으로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요즘 기자들은 옛날 선배기자들보다 사생활을 중시하고 사생활과 직업은 분리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가 많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그런 풍조가 있다는 것조차 이해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저널리즘은 불가능한 일을 하는 직업(impossible job)이요, 결코 끝이 없는 직업(never finishing job)입니다. 하루 24시간 일하는 직업입니다. 나를 구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같은 기자 직업관은 인터넷 시대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지금 CNN 백악관 출입기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존 킹(John King)은 제가 보스턴 지국장으로 일할 때 데리고 일한 친구입니다. 그는 항상 일하는 친구였어요. 그것도 아주 열심히…』
 
 
 
 홍콩의 한국系 기자들:李象赫·徐祥源·尹瑞景·林紋卿
 
  홍콩에는 한국계 기자들도 있다. 확인된 사람만 해도 CNN에 한 명, 시사주간지 「아시아 위크」에 두 명,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에 한 명이 일하고 있다.
 
  이중 맏형격은 「아시아 위크」(Asiaweek)의 수석특파원 찰스 리(Charles S. Lee·李象赫·36)다. 1965년 서울에서 출생하고 197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갔다. UCLA에서 정치경제학 학사, 국제정치학의 명문 텁츠(Tufts)大 플레처 스쿨(Fletcher School)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실력파다. 美 워싱턴 의회도서관과 프랑스 파리 소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한 뒤 1992년 뉴욕 뉴스위크 본사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96년 한국에 와 시사주간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서울특파원-지국장으로 일하다 『너무 한국 근무를 오래 해 시각이 좁아질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 홍콩 본사 근무를 자청했다. 2000년 9월 홍콩으로 온 뒤 지난 2월 경쟁지인 「아시아 위크」로 자리를 옮겨 주로 아시아 전반의 비즈니스 및 기술분야 취재를 맡고 있다.
 
  「아시아 위크」에는 홍콩교포인 徐祥源(서상원·30) 기자가 함께 일하고 있다. 1971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이듬해 아버지를 따라 홍콩으로 온 그는 홍콩소재 영국인 학교를 마치고 미국의 명문 펜실베이니아大에서 유럽사를 전공했다.
 
  이후 시카고 소재 노스웨스턴大 법과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 중퇴하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중문대에서 1년 간 중국어 공부를 한 뒤 1994년 9월 「아시아 위크」에 입사,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아직 미혼이다.
 
  『역사를 공부한 데다 글쓰기를 좋아하다 보니 기자직을 택하게 됐습니다. 편집하는 것도 재미있구요. 취재기자들은 대부분 유명인사들 만나 네트워크를 조성하고 이들로부터 신속한 정보를 빼내 특종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지만 저는 문자 그대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때문에 나가서 취재하는 것보다 안에서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기사를 쓰거나 편집하는 업무가 저한테 맞는 것 같습니다』
 
  라이벌 주간지인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의 尹瑞景(윤서경·26) 기자는 아버지가 필리핀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일하는 관계로 어려서부터 필리핀에서 살았고 대학은 미국에서 나왔다.
 
  1997년 한국 영자지 「코리아 타임스」(Korea Times) 문화부·사회부에서 근무했고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약, 미국 싱가포르 신문사 등에 기사를 제공했다. 작년 6월부터 지금의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가 다루는 기사는 인터넷, 통신, 벤처기업 등과 같은 소프트 비즈니스 분야. 원래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교수를 지망했으나 공부를 하다 보니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깨닫고 가장 현실과 밀접한 분야인 언론사에 몸담게 됐다는 것이다.
 
  『제가 1년여 간 일한 「코리아 타임스」에는 젊은 교포나 외국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한국적 직장 분위기와 간혹 갈등이 있었지요. 한국적 분위기는 상하서열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어 젊은이들에게 답답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도와 주는 네트워크는 잘 돼 있어요. 모르는 것을 부장께 물어보면 잘 가르쳐 주십니다. 반면 서구적 직장 분위기는 모든 것을 제 스스로 알아서 해야 됩니다. 자유스럽고 독립적이긴 하지만 썰렁한 때도 많습니다』
 
  CNN 아시아본부에서 아침방송 뉴스 원고를 맡고 있는 林紋卿(임문경·Esther Lim·26)기자는 한국에선 낯익은 얼굴이다. 한국 국제용 채널인 아리랑 TV에서 뉴스앵커로 4년 간 일해 왔었다.
 
  홍콩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미국 사립여자명문 웨슬리(Wellesley)大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한 그녀는 1996년 홍콩 CNBC에서 잠시 일하다 그 해 7월 신설된 아리랑 TV 창립멤버로 들어갔다. 작년 11월 CNN으로 옮겨와 아침 방송 일반뉴스 라이터를 담당하고 있다.
 
  『아침 방송을 해야 되기 때문에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3시까지 출근합니다. 밤새 들어온 기사를 읽고는 앵커가 다룰 기사와 말해야 될 내용 등을 취합, 정리해 주는 것이 제 역할이죠. 일반뉴스 아침팀은 총 7명입니다. 보통 오전 9시반 뉴스 끝나면 일이 끝납니다. 한국에서 앵커로 일하다가 이곳에 와서 체계적으로 배우고 기자로서 소양을 닦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재미있다고 봅니다』
 
  매우 새벽 2시에 일어나는 근무시간 때문에 늘 잠이 부족하다고 한다. 회사에서도 이 점을 감안, 1주일에 4일 일하고 3일을 쉬게끔 한다. 방송이 있는 날은 보통 낮에 들어가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 활동하다가 밤에 서너 시간 잠을 잔다고 한다. 서서히 기자 물이 들어가는지 『몸은 피곤하지만 기자직은 매우 다이나믹한 직업』이라고 예찬론을 폈다.
 
 
 
 홍콩 정부 신문처 신문주임 폴 브라운
 
  『홍콩 특파원의 역할은 아시아 지역 취재 쪽으로 바뀌어 갈 것』

 
  20세기 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로 평가받는 홍콩에는 많은 외국기자들이 상주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勃發(발발) 전까지 홍콩에는 전설적인 중국전문가(China Watcher)들이나 아시아통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내전상태의 중국 대륙은 물론, 일본제국주의의 발호로 서서히 전쟁 상황으로 치닫는 아시아-태평양의 긴박한 분위기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2차대전 종료 후 공산화된 중국대륙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홍콩은 저널리즘 영역에서 새로운 동-서 냉전 상황의 최전선으로 부상했고 이에따라 미국 영국 등 서구 각국 아시아 특파원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인 윌리엄 홀덴-제니퍼 존스 주연 「慕情(모정·Love is a many splendid things)」도 이 당시 홍콩 특파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49년 공산화된 중국대륙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홍콩에서 활동하는 윌리엄 홀덴이 제니퍼 존스와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1950년 터진 한국전쟁 상황을 취재하러 종군기자로 파견됐다가 사망하는 내용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이웃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의 독립 움직임과 공산 게릴라들의 활동은 또다른 시각에서 홍콩특파원들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결국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으로 홍콩은 태국·방콕과 함께 베트남戰 후방 취재본부로서 입지를 굳혔다. 베트남戰에 종군한 기라성 같은 취재기자들이 홍콩을 통해 거쳐갔고, 모처럼 맞은 휴가 때는 영국 통치하에서 영어도 통하고 물적·인적 인프라가 완비된 홍콩에서 머물며 전쟁터의 피로를 씻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중국이 서서히 개방-개혁 노선으로 선회하면서 홍콩이 그 창구 역할을 맡게 됐다. 외국 언론들도 당연히 對중국 취재 강화 측면에서 홍콩을 더욱 중시하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들도 1980년대 들어 홍콩특파원들을 두기 시작했다.
 
  당시 홍콩은 한국 싱가포르 대만과 더불어 「떠오르는 네마리 용」으로 부상, 본격적인 경제적 발전이 따르면서 홍콩은 무역-국제금융 등 경제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취재 도시로 부각됐다.
 
  1990년대 들어선 중국의 홍콩 주권 회복(1997년7월)을 앞두고 떠오르는 中華(중화)경제권의 장래와, 영국 식민세력의 퇴진을 통한 西勢東漸(서세동점) 역사의 종말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全세계 미디어들은 홍콩을 주목했다.
 
  이에 따라 홍콩에 상주한 외국 언론기관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다. 홍콩 정부 신문처에 따르면 정부에 등록한 외국언론기관 수는 1990년 총 115개社에서 주권회복이 이뤄진 1997년 8월에는 173개社로 절정을 이뤘다. 이후 외국 언론사 숫자는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 지난 3월 현재 120개社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콩 정부 신문처 해외공보담당 신문주임(우리 식의 외신과장)으로 일하는 폴 브라운(Paul Brown·54)은 『주권 회복 이후 외국 언론사들의 움직임에는 浮沈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우선 중국이 더욱 개방화되면서 많은 언론기관들이 베이징에 직접 사무소를 개설하면서 홍콩사무소를 폐쇄했다는 것이다. 홍콩에서 중국을 관찰하는 「차이나 워처」가 아니라 호주 일간지 「더 오스트렐리언(The Australian)」처럼 베이징에 상주하면서 가끔 홍콩으로 출장와 기사를 쓰는 「홍콩 워처(Hongkong Watcher)」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과거 식민종주국 영국의 경우 아시아 거점인 홍콩을 넘겨 준 뒤 아시아에 대한 흥미가 반감, BBC를 비롯한 많은 영국 매체들이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특파원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반면 홍콩이 뉴욕 런던 도쿄와 함께 4大 국제금융 중심지로 부상되면서 금융기관들은 물론 국제미디어들의 아시아 본부도 홍콩에 설치되고 있다. AOL 타임 워너 그룹의 아시아 본사도 홍콩에 있어 CNN, 타임, 포천, 아시아위크 등 계열사가 같은 빌딩에 입주해 있다. 아시안 월 스트리트도 홍콩에서 발행된다. 홍콩 관련 뉴스도 이에 따라 과거 정치 이슈에서 금융 등 경제뉴스 위주로 바뀌어가고 있다.
 
  홍콩 태생의 영국인 폴 브라운은 10년간 라디오 기자를 하다 홍콩 정부 신문처로 들어와 활동한 지 24년이 넘었다. 그는 『홍콩에 외국매체수가 조금씩 준다는 의미는 홍콩의 주권회복이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모든 상황이 정상화되고 있음을 뜻한다』면서 『앞으로 홍콩관련 기사는 점차 비즈니스 스토리 위주로 갈 것이며 홍콩특파원의 역할도 단순한 홍콩 취재라기 보다 아시아 지역취재 쪽으로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분석했다.
 
 
 
 前 로이터 통신 홍콩지국장 다이안 스토먼트
 
  태권도가 취미인 知韓派 언론인

 
  외국기자로 홍콩의 터줏대감격으론 前 로이터 통신 홍콩지국장을 역임한 다이안 스토먼트(Diane Stormont;Hongkongnow.com.Ltd. 대표)를 꼽을 수 있다. 영국 태생으로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홍콩에 온 그녀는 대학만 영국에서 나왔을 뿐 홍콩에서 대부분 생활했다. 1981년 홍콩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1991년부터 1992년 말까지 로이터통신의 서울특파원으로 근무한 知韓派(지한파)다.
 
  취미가 태권도일 정도로 태권도를 좋아하고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도 지냈다. 이후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지국장 등을 지낸 뒤 『24시간 사실상 쉬기 어려운 통신기자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유로 통신사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에 취미가 많아 웹사이트 디자인·관리·출판 주선·아시아 뉴스 발췌 공급 등을 하는 닷컴 회사를 만들어 운영중이다.
 
  그녀는 『과거 기자들은 금융을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정반대』라면서 『요즘 젊은 기자들은 더 교육을 잘받고 금융·정보·신기술 관련 지식으로 잘 무장돼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홍콩의 장점으로 『국제적 도시며 자유롭고 교통·통신·음식이 좋은 데다가 결코 잠을 자지 않는 바쁜 도시』라는 점들을 꼽았다. 단점으로는 『물가가 비싸고 오염이 심하며, 최근 들어 생긴 일이지만 중국에 알랑거리고 아첨하는 풍조』를 들었다.
 
  일반적으로 그녀를 비롯한 많은 외국기자들이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이후의 상황을 『괜찮다』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중국이 홍콩을 다루는 태도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그들은 침착했고 一國兩制(일국양제)를 존중했으며 홍콩에 간섭하지 않았죠. 문제는 일부 홍콩 엘리트들이 중국에 잘보이려고 괜히 나서서 설치고 구두 광을 내는 역할 등을 하는 것이죠.
 
  요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중국 정부의) 구두를 닦아 주려고 난리를 칩니다. 그동안 홍콩 관료사회의 代母(대모)역할을 하던 앤손 찬(Anson Chan·陳方安生) 정무장관이 은퇴하는 것이 걱정이 되긴 하지만 아직까지 홍콩 관료제도 상층부는 탄탄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겸 사업가 스테판 바인즈
 
  『저널리스트와 사업을 함께 할 수 있는 비결은 비즈니스의 천국 홍콩이기 때문』

 
  다이안과 함께 닷컴회사를 공동운영하는 스테판 바인즈(Stephen Vines) 역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이다. 1950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한 그는 1974년부터 언론계 생활을 시작했고 홍콩에서만 14년을 살았다. 1987년 홍콩으로 옮긴 뒤 영국 「옵서버」(The Observer)지의 동남아시아 특파원, 「가디언」(the Guardian)지 홍콩 특파원을 거쳐 1993년 설립된 홍콩 영자지 「동방쾌보」(Eastern Express)의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비즈니스를 병행한 이색 전력의 소유자다. 1993년 대학 등을 상대로 음식 케이터링 서비스 사업을 벌이는 「샌드위치 클럽(The Sandwich Club)」이란 회사를 만든 데 이어 주방용구 판매회사인 「팬 핸들러(Pan Handler)」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저널리스트와 사업을 함께 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비즈니스의 천국, 홍콩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25년 이상 저널리즘에 종사하면서 간혹 지겹다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비즈니스를 막상 해보니까 제 저널리즘에도 상호 연관돼 도움을 주더군요. 예컨대 제가 저널리스트 일만 한다면 이곳서 만나는 사람들도 사실 한정돼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도 나를 저널리스트로서만 대할 거구요. 그러나 사업이 포함되면 여러 사람을, 여러 목적으로 만나게 되며, 더욱 중요한 것은 감춰진 뒷얘기나 실상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자지 「아이 메일(i-mail)」에 고정 시사칼럼은 물론 음식, 음식점, 와인 등과 관련된 기사도 쓴다. 때때로 방송매체에도 출연, 코멘트를 해 주는 등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그가 홍콩에 사는 이유는 『한 가지 이상 일을 할 수 있고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콩은 낙관적인 사회입니다. 반면 제 고향인 영국은 음울한 비관적 사회입니다. 홍콩이 낙관적인 사회인 이유는 이민자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민자 사회는 삶의 목적이 뚜렷한 사람들이 모여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다아니믹한 사회입니다. 한국도 사회를 더 다이나믹하게 만들기 위해 외부로부터 이민자를 받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지 않습니까』
 
  영국에서 발행되는 세계적인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의 홍콩지국장 라울 자콥(Rahul Jacob)은 인도系다. 1964년 인도 캘커타에서 출생, 델리大 성스테판 칼리지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미국 일리노이大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미국 경제전문잡지 「포천大(Fortune)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1996년 「타임」 홍콩지국으로 옮겼고 1998년부터 지금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홍콩 경제 예찬론자다. 홍콩 경제는 아시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하고 특히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 더욱 好시절을 맞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주권 회복 이후 홍콩 경제는 더 강화됐으며 싱가포르나 상하이와는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홍콩 경제는 13억 인구 중국시장과 연계된 반면 싱가포르는 동남아와 연계돼 있다는 이유에서, 또 상하이는 최근 멋진 빌딩이 많이 들어섰지만 국제금융센터로서 홍콩을 따라잡기에는 여러 가지에서 역부족이라고 했다.
 
 
 
 아사히 홍콩지국장 우카이 사토시
 
  『左派는 비판만 할 뿐… 右派신문들이 해결책 찾겠다고 나서고 있어』

 
  홍콩에는 일본기자들이 많이 나와 있다. 아사히(朝日) 요미우리(讀賣) 마이니치(每日) 산케이(産經) 등 주요신문과 NHK 등 4개 TV社, 2개 통신사 기자들이 한 명에서 서너 명씩 파견돼 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이 눈에 띄는 편은 아니다. 홍콩외신기자클럽(FCC)에도 자주 나타나는 편이 아니고, 특히 서양 기자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일수록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의 국력이나 국제적 위치로 볼 때 일본 기자들의 활약은 너무 소극적이 아닌가 싶다. 이번 취재를 할 때 여러 매체의 일본 기자들과 접촉했으나 대부분 인터뷰를 사양했다.
 
  특히 요미우리 신문의 경우 회사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된다며 기사의 성격, 질문할 내용 등등을 미리 알려 줄 것을 요구했다. 마치 신문기자가 아니라 관료 내지 재벌그룹 홍보관계자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바로 이런 식의 신중함, 지나친 보신주의 등이 21세기 지금 일본의 경쟁력과 활기를 저해하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기자가 아사히 신문 홍콩지국장 우카이 사토시였다. 만 31세의 그는 1993년 입사, 지방부 외신부를 거쳐 작년 6월 홍콩지국장으로 왔다. 일본 기자 중 지국장급으로는 최연소다. 때문에 상대방에게 보다 노숙하게 보이기 위해 최근 턱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기자치고는 드물게 영어를 잘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고교 재학 중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 1년을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대학 초년시절 동구권-소련 붕괴 등을 보면서 이를 직접 체험하고 싶은 생각에 일찌감치 기자생활을 지망했다고 말했다.
 
  『현재 9년차 생활인데요. 일본 기자들도 한국 기자들처럼 소속사를 잘 바꾸지 않습니다. 아직 회사 내에서는 주니어인데, 아사히 신문기자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800만 독자가 제 기사 쓰는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사명감을 느낍니다. 스스로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그가 미국 연수 중이었던 1987년 일본은 경제면에서 사실상 세계 넘버원이었다. 미국의 상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일본 회사에 팔리고 일제 자동차와 전자제품들이 미국을 휩쓸 때였다.
 
  ―왜 그런 일본이 지금 불황과 무기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나요.
 
  『아직도 제조업은 세계 1위인데…. 솔직히 저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분위기 탓도 있다고 봅니다. 하도 경제가 나쁘다 나쁘다 하니까 신뢰도가 상실되고 株價는 자꾸 떨어집니다. 정치 지도력도 하락하구요』
 
  ―일본인들의 불만은 점점 커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그 불만이 폭발해버린다면, 인접국가로서 걱정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부는 그렇겠지만 다수 국민은 별 관심도 없어요. 지금 일본인들은 민족주의자나 국가주의자들이 아닙니다. 물론 일부 극우파 출현을 걱정하지만 대세는 아닙니다』
 
  ―소위 일본의 좌파들은 무엇을 합니까.
 
  『그들은 비판만 할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어요. 그래서 산케이나 요미우리 같은 우파적 신문들이 자기들이 해결책을 찾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10년 후 일본의 장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봅니까.
 
  『밝게 보이지 않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모두 가난했을 때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지금은 기본적인 것은 다 갖고 삽니다. 청년들의 성취욕과 야망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위크」의 마크 클리포드
 
  『정부의 現代 지원은 나쁜 선례』

 
  美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BusinessWeek)의 아시아 부장격인 마크 클리포드(Mark L. Clifford)는 美 버클리大에서 史學을 전공하고 컬럼비아大에서 연수과정을 밟은 경력 만 20년의 정통 경제전문기자다. 뉴욕 소재 경제잡지 「포브스」(Forbes)誌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한국에서 민주화 투쟁이 절정에 달한 1987년 6월 초 시사주간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서울특파원으로 한국에 왔다. 그가 아시아를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이후 金泳三 정권 초기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그는 민주화 과정에서부터 문민정부 수립까지 한국 현대사상 가장 활력 넘치고 변화를 이루던 상황을 지켜봤다.
 
  1994년 그는 개발독재, 재벌, 정경유착 등 한국의 문제점을 면밀하게 파헤친 「고난에 빠진 호랑이: 한국주식회사에 대한 비공인 전기(Troubled Tiger: An Unauthorized Biography of Korea Inc.)」란 제하의 저서를 발간했다. 이 책은 이후 1997년 우리가 IMF 위기에 봉착할 때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 언론들의 「한국 교과서」 같은 구실을 했다.
 
  1995년 「비즈니스 위크」로 자리를 옮긴 그는 팀을 이끌고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취재를 성공리에 마치고 뉴욕 소재 「해외프레스클럽 상(Overseas Press Club Award)」을 수상했다.
 
  한국 사회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지난 3월 말 기자와 만났을 때 『한국의 개혁 정책은 스톱됐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재벌들의 리스트럭처링을 봅시다. 삼성그룹은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는 대신 회장 아들에게 3代째 상속시키려고 합니다. 나쁜 징조죠.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과거 10년 실패까지 한국이 답습하려는 것 같습니다. 작년 11월 현대그룹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에서 제일은행이 응하지 않으니까 정부가 나서서 강제로 지원하게끔 한 것도 예전 그대로 아닙니까.
 
  이러고도 무슨 금융자율화며 구조조정입니까. 현대가 1998년인가 LG 반도체를 사실상 半강제적으로 인수한 뒤 결과가 어땠습니까. 현대전자는 더 휘청거리지 않습니까. 정부의 현대지원은 나쁜 선례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 정보-기술관련 회사들이 많이 생기고 대덕단지도 더 바빠졌으며, 상당한 과학기술제조 베이스를 구축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이 지난 14년에 걸친 민주화 과정은 다른 나라들에게 모델 케이스라고 말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한 다음에도 경제성장을 계속한 나라는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착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미국도 300년 걸린 것 아닙니까. 필리핀을 보세요. 자유만으로 민주화가 이뤄집니까.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한국도 강건한 제도와 기관이 완비돼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한국인들은 기대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DJ의 햇볕정책은 기본적으로 개방적이며 지속적으로 이뤄질 정책인데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이에 대한 기대욕구도 너무 큽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도 20년이 걸렸습니다』
 
 
 
 『DJ가 북한을 돕는 것은 전임자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기 때문』(다이안 스토먼트)
 
  로이터 서울특파원 출신의 다이언 스토먼트는 金大中 정권에 대해 사뭇 비판적이다.
 
  『햇볕정책만 봐도 북한의 변화가 없는데 매우 회의적입니다. 金대통령이 그렇게 북한을 도와 주는 이유는 전임자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 신문사들에 대한 세무조사 소식을 접하면서 그도 결국 독재자의 길로 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너무 심해요』
 
  『제가 서울에서 근무한 시기가 盧泰愚 정권 말기에서부터 金泳三 정권 초기까지 입니다. 제 견해로는 역대 한국 대통령 중 盧泰愚 대통령이 가장 낫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盧泰愚는 군사독재정권 출신의 지도자인데 스스로 많이 양보하고 건네 줘 민주화가 부드럽게 이뤄지는 데 기여를 했습니다.
 
  金泳三 대통령도 시작은 잘했는데 사실 본인 스스로 민주적인 리더는 아니죠. 金大中씨도 본질적으로 YS와 같은 사람이구요. 이제 金씨 시대는 끝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장래는 계속 밝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우카이 사토시는 『홍콩TV를 보면 한국 노조의 과격시위 보도가 많다』고 지적했다.
 
  『1960~70년대 일본 노조도 과격했다고 하는데 한국 노조는 정말 심하더군요. 우리가 볼 때 한국은 선진국 수준으로 갔는데 왜 노동문제는 저렇게 심한지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가끔 만나는 일본 사업가들 중에는 「한국에선 노조 때문에 사업하기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아시아 위크」의 서상원 기자는 『한국인들은 너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며 외국인에 대한 컴플렉스도 강하다』고 평했다.
 
  『우리같이 밖에서 배우고 자란 한국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비판적 그룹을 구성하고 일해야 서로 발전이 되는데 현실은 반대입니다. 한국에서 자란 분들은 우리를 낮춰 보고 배타적으로 대하죠. 그래서 한국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인들은 또 합리적인 면이 부족해요. 반면 미국인들은 너무 냉정한 편인데 한국인들은 감정적입니다』
 
  그는 『DJ의 햇볕정책도 처음에는 좋게 봤으나 지나친 면도 적지 않다』며 『엄격할 때는 엄격해야 되는데 지금처럼 부드럽게만 대해 주려는 자세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리덤 포럼」의 아놀드 자이틀린은 햇볕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과거 대립정책 중 성공한 것이 있었습니까. 지난 40년 간 미국의 쿠바정책을 보십시오. 시간만 낭비하고 관계개선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입정책에도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대립보단 개입정책이 낫다고 봅니다.
 
  지금 부시 정책은 과거 1980년대 냉전시절로 돌아가는 분위기입니다. 1992년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 再選(재선)에 실패한 뒤 그 유업을 아들 부시가 계승하려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이라크 전쟁의 결과는 무엇이죠. 사담은 더욱 건재하지 않습니까』
 
  그가 1970년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길가에서 남-북한 공관원들끼리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한다. 당시 양쪽 공관이 서로 가까운 곳에 있어 지나가다가 서로 마주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길거리에서 얼굴을 붉히며 다투었다고 한다.
 
  『그때 한국인들이 격하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들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죠. 지금은 서로 그런 식으로 싸우진 않겠죠?』
 
 
 
 『홍콩에서는 기자들의 시각 폭이 다르다』(찰즈 리)
 
  미국에서 자라고 한국과 홍콩에서 각각 기자생활을 경험한 「아시아 위크」의 찰즈 리는 서울보다 홍콩이 편하다고 했다. 생필품도 한국에선 제한돼 있는데 여기선 세계 각국 물건이 다 있어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는 데다가 이곳에는 중국·영국·인도·호주 등 각국 사람들이 다 모여 살기 때문에 全아시아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기자들의 시각 폭도 다릅니다. 한국에선 한국 얘기만 하죠. 한국도 중국과 가까우나 한국에선 중국의 돌아가는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선 앉아 있어도 알게 되죠』
 
  『홍콩이 서울보다 떨어지는 점은 기후가 나쁘고 습하다는 점 외에 별로 없습니다. 홍콩 현지인들은 그렇게 친절하진 않지만 외국인에 대한 배타의식이 적어 불쾌한 일을 당한 기억이 없습니다. 배타적으로 말하자면 도리어 서울이 심하지요』
 
  『솔직히 20년 만에 서울에 가니까 말도 서툴고 매사 어렵더군요. 사람들은 저를 교포인 줄 금방 알고요. 저를 감싸 주기 보다는 비판하고 혼내 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택시 운전기사도 함부로 대하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불쾌했는데 이후 적응하니까 괜찮더군요. 또한 오래 사니까 플러스 알파 서비스도 있더라구요』
 
  그는 한국이 IMF 위기를 맞을 때 한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한국이 교육수준, 인터넷 등 정보화 수준 등 선진국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요인들을 갖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전망이 밝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넘어야 할 고비가 여러개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全세계가 불경기인데 한국의 대외의존도는 높아 타격받을 수 있다는 점, 둘째, IMF 위기를 맞을 때 문제된 단기외채 위기문제는 극복했지만 위기를 가져온 근본적 요인들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너무 정치가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너무 민심, 선거에 민감했습니다. 개혁은 어차피 고통을 수반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1998년 말 한국 경제가 조금 나아지니까 정부는 금방 경기부양책으로 U-턴하더군요.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개혁정책 자체가 흐지부지돼버렸습니다.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시기였는데 놓쳐버린 것입니다. 큰 실수입니다. 일본 꼴 날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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