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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공작원 金用珪씨 증언

『나는 前 중앙정보부장 李厚洛 납치조 조장이었다』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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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用珪씨는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공작원이었다
● 金日成 군사정치대학 지도핵심반에는 과거 對南 공작에서 성공한 경험과 실패한 사례들을 수록한 「공작 경험집」이 극비 문고로 비치되어 있다
● 통혁당 사건 후에도 북한은 끊임없이 再建을 시도했다
● 북한은 8·15 기념 리셉션이 열리는 경회루를 폭파, 朴正熙 대통령 등 정부 요인들을 시해하려고 했다
● 李厚洛씨가 옮겼다는 정보 듣고 철수, 귀환

『李厚洛씨가 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난 뒤 충무호텔 2층 특실에서 휴양중이란 정보를 입수한 金日成은 납치를 지령했다. 30명의 특공조가 편성돼 모의훈련을 마친 뒤 공작선을 타고 南下… 나는 조장이었다』
「햇볕」 때문에 「햇볕」 못 보는 소설
  유명인사들의 자서전과 회고록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元珉(원민) 출판사(대표 朴永勳)는 1999년 11월에 「소리없는 전쟁」이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북한의 對南(대남) 침투 공작의 핵심에 있다가 귀순한 공작원 金用珪(김용규)씨가 북한에서 보고 듣고 직접 참여한 對南 공작 사례들을 소설 형식을 빌어 공개한 실화소설이다.
 
  초판 5000부를 찍은 이 실화소설은 출간 1년6개월여가 지난 지금까지 再版(재판)을 찍지 못할 만큼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元珉 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원래 이 소설은 정부 모 기관에서 출판하려고 했던 소설』이라면서 『현 정부 들어 햇볕정책이 본격화하면서 출판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金用珪씨로부터 원고를 받아 내용을 검토한 元珉 출판사측은 상업성보다는 『이런 책은 널리 읽혀야 한다』는 차원에서 출간을 결심하게 됐고, 1999년 11월에 초판을 발행하게 된다. 그러나 『널리 읽히도록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출간했다는 이 책에 대해 출판사측은 별다른 홍보활동을 하지 않았다. 元珉 출판사 관계자는 『외부로부터 「소리없는 전쟁」을 광고하라 말라, 하는 간섭이나 압력은 없었다』면서 『다만 소설 출간 당시 본격화된 햇볕정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軍人들이 읽어야 할 책이라는 판단으로 軍이 운영하는 진중문고에 납품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과거에는 軍에서 일부러라도 이런 책을 구입해 장병들이 읽도록 한 것으로 아는데 왜 납품 신청이 거부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도대체 「소리없는 전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정부 모 기관이 정부의 햇볕정책을 의식해 출판을 취소하고, 책을 출판한 출판사도 정부의 햇볕정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까. 햇볕정책에 反하는 내용, 北의 적화통일을 위한 對南 공작이 얼마나 집요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이 책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또 북한이 1960~70年代의 對南 공작을 통해 政官界(정관계)를 비롯 종교계, 언론계 등 남한사회 요직 내부 깊숙이 親北 인사들을 침투시켜놓았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의 副題(부제)는 「對南공작 秘話소설」이다. 저자 金用珪씨는 이 책에서 통혁당 공작, 朴正熙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정부 요인들의 시해를 목적으로 한 경회루 폭파 기도 사건, 李厚洛 前 중앙정보부장 납치 기도 사건 등 북한의 對南 공작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李厚洛 부장 납치 기도 사건은 金씨가 납치조장을 맡았던 것으로 기술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실존 여부 및 對南 공작사례가 사실인지 여부를 묻기 위해 기자는 金用珪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金씨는 『현재로서는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면서,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나는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간략한 말로, 소설 속의 사례들이 실제 벌어진 사건들이었음을 인정했다. 金씨는 더 이상의 전화통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李厚洛 前 중앙정보부장측에도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李 前 부장의 한 주변인물은 『그분은 지금 경기도 하남에 거주하고 있으며 최근 눈수술을 받았지만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건강이 아주 나쁘지는 않고 주변 사람들과 바둑을 두고 담소를 나눌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는 근황만을 전해 주었다. 북한의 납치 기도 사건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확인을 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기자는 1978년에 李 前 부장이 무소속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할 무렵 金用珪씨와 그의 지역구인 울산에서 만나 자신에 대한 북한의 납치 기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을 주변 취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동료 공작원 두 명 사살하고 귀순한 사람
 
  金用珪씨가 귀순 직후 펴낸 手記 「時效人間(시효인간)」과 對南 공작 비화소설「소리없는 전쟁」에서 金씨가 증언하고 있는 통혁당 사건, 경회루 폭파 기도 사건, 李厚洛 납치 기도 사건 등을 소개한다. 「時效人間」에서는 李厚洛 前 중앙정보부장을 L씨로 지칭하고 있다.
 
  金用珪씨는 1936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토박이다. 서울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51년 3월 敗走(패주)하는 북한군에게 잡혀 강제로 납북됐다. 만 열다섯 살 나이에 가족들과 헤어지게 된 것이다.
 
  납북 후 金씨는 526군부대 루트공작원이 된다. 「時效人間」에서 金씨는 납북 이후의 생활에 대해 『처음에는 그럴 듯한 선전에 넘어가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알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盲從盲動(맹종맹동)하게 되었고, 더욱이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는 천성적 기질로 인해 칭찬을 받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잘한다, 잘한다」하며 추켜세우는 바람에 의기양양, 죽기로 덤벼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죽기로 덤벼든」 결과 金씨는 금강정치학원,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金日成 대학 철학과에 입학을 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승승장구하던 金씨는 金日成 대학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1957년의 남로당 2차 숙청시 문천기계공장 노동자로 좌천된다.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건 충성의 代價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金日成 독재체제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환멸을 감추고 그는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문평工大 기계제작과를 마치게 된다. 黨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인정받은 그는 노동당 연락부 소속 공작원으로 선발돼 金日成 군사정치대학에 들어간다. 평양시 용성구역 북부 외곽지대 부지 300만 평에 자리잡은 이 대학은 對南 공작원 양성 기지다. 金씨가 다시 對南 공작원으로 선발된 때는 1967년 6월이었다. 이후 金日成 군사정치대학 1년을 수료하는 등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1976년 9월까지 10여 년 간 對南 공작활동을 벌이게 된다.
 
  金씨는 귀순할 때까지 10여 년 간 고정간첩 동반 越北 등의 임무를 띠고 일곱 차례 남파된다. 남파공작의 성공으로 이른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지도 핵심만이 될 수 있는 공작조의 조장이 된다. 남한으로 치면 「차관급 대우를 받는」 핵심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노동당 연락부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덕분에 그는 여러 비밀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된다. 金日成 군사정치대학 지도핵심반에는 과거 對南 공작에서 성공한 경험과 실패한 사례들을 수록한 「공작 경험집」이 극비 문고로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金씨는 이 「공작 경험집」을 읽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소리없는 전쟁」에 나오는 여러 공작 사례들도 바로 그 「공작 경험집」에 수록된 것들이다.
 
  「차관급 대우를 받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한 번 좌천의 경험을 갖고 있는 金씨는 늘 불안했다. 주변에서 「이용당할 대로 당하고 버림받는」 남한 출신들의 末路를 수없이 목격했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신의 출신 성분은 「남한 출신」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회를 엿보았다. 일곱 번째 남파 공작 목표는 거제도에 있는 고정간첩의 딸을 帶同(대동)하고 월북하는 것이었다. 金씨는 그 기회를 활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1976년 9월19일 밤 9시30분. 金씨는 다른 공작원 두명과 함께 섬으로 상륙했다. 帶同하고 월북할 고정간첩의 딸이 있는 對象家屋(대상가옥)으로 향했다. 金씨의 머리 속은 복잡했다. 침투를 위해 남포항을 출발할 때부터 이미 귀순을 결심한 金씨로서는 다른 두 공작원도 설득해서 함께 귀순하고 싶었다.
 
  대상가옥에는 손님이 와 있었다. 귀순을 결심한 金씨로서는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帶同 월북은 불가능했다. 안내원과 접선하기로 한 장소로 움직였다. 길을 가며 다른 두 공작원을 설득하기로 했다. 만약을 대비해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걸음을 멈추고 두 공작원을 향해 돌아섰다.
 
  『여기에 함께 남자』고 했다. 어둠 속에 있는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를 덮쳐왔다. 거부의 몸짓이었다. 반사적으로 발로 검은 그림자를 걷어찼다. 동시에 방아쇠가 당겨졌다. 드르륵, 요란한 총소리가 거문도의 밤하늘을 갈랐다. 짧은 연발 사격으로 두 명은 동시에 나동그라졌다.
 
  가방에서 전지를 꺼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두 명의 공작원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고, 金씨는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날 귀순한 金用珪씨는 어머니 등 남한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북한의 對南 공작을 연구하는 전문가로 활동해오고 있다.
 
 
 
 통혁당 사건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남파간첩에게 포섭된 金鍾泰(김종태)가 네 차례 북한을 왕래한 뒤 국내에 잠입, 통혁당을 만들어 학원, 노동, 종교 등 서클 형태의 小조직과 서울시내에 여러 개의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선전·선동활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에 적발된 사건이다.
 
  1968년 8월 적발된 이 사건으로 서울시당 책임자 金鍾泰,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 김질락, 전남도당 창당준비위원장 최영도, 청맥사 편집장 李文奎(이문규) 등 총 158명이 검거됐고 73명이 송치돼 50명이 구속됐다. 金鍾泰가 이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자 북한은 군중대회 등 대대적인 추도식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은 1994년에도 간첩을 보내 金鍾泰의 처 등 유족의 소재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달리 이 사건에 연루돼 복역한 후 출소한 인사들 가운데는 통혁당이 북한 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金用珪씨는 「소리없는 전쟁」과 「時效人間」을 통해 통혁당 조직이 북한 노동당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金씨는 두 책에서 『통일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유지 최영도가 甥姪(생질)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고 밝히고 있다.
 
  최영도는 세 차례에 걸쳐 평양을 다녀오면서 노동당에도 입당을 한다. 전남도당 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 조직망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남로당에서 전남도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돼 10년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을 다시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북한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正조직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이원화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해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 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생질인 김수상을 내세워 金鍾泰를 포섭하기로 한다. 反정부 감정을 갖고 있던 金鍾泰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은 쉽게 이루어진다. 평양으로 밀입북한 金鍾泰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金日成과 만나기도 한다. 간첩 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金鍾泰는 김질락, 이문규, 이진영, 임진영 등 친척, 친우 등 측근들을 손쉽게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한다. 한편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등의 서클 단체 등을 조직, 운영하면서 反정부 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선전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68년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직이 적발됨으로써 통혁당을 적화통일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던 북한의 계획은 일단 좌절된다.
 
  金씨는 자신의 책에서 북한이 통혁당 재건을 위해 계속 공작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73년 7월에는 자신이 직접 통혁당 재건 공작계획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함께 적고 있다. 포섭대상은 과거 金鍾泰와 연계되었던 인물들이었다.
 
  통혁당 재건 계획과 관련해 金씨는 「소리없는 전쟁」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말하고 있다. 북한의 공작망이 우리 사회의 어느 곳까지 뻗쳐 있나를 보여 주는 대목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이 낮과 밤을 이어 지시문을 모두 해독하고 보니 그것은 그동안 평양의 공작팀들이 각각 관리하고 있던 일부 현지조들과의 접선암호와 특정 조직원들의 기록대장이었다.
 
  기록대장에는 발전소, 전신전화국 등 요충부문에 점 형태로 특별 관리하던 개별적 대상도 있었고, 2∼3명 또는 4∼5명으로 구성된 조직도 있었다. 그 중에는 최근에 구성된 조직도 있고, 1960년대 초·중반에 布置(포치)된 교수와 박사들로 구성된 조직, 언론계·종교계·公共기관, 그리고 각 단체에 뿌리박은 조직들도 있었다.
 
  박군은 기록대장에서 몇몇 알 만한 사람들의 이름이 눈에 띄자 놀라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종수! 왜 그렇게 놀라나?』
 
  『이런 분들도 이미 北하고 선이 연결돼 있었습니까? 정말이지 저는 이런 저명인사들이 그런 활동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종수! 지금 우리가 解文(해문)한 이 기록대장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거야. 그리고 종수는 이 몇 사람을 보고 놀라는 거 같은데 그보다 더 중요한 권력 핵심부에도 적지 않게 포진돼 있다는 걸 알면 뒤로 벌렁 자빠지겠네!』>
 
 
 
 李厚洛을 납치하라
 
  朴正熙 대통령 등 정부 요인 살해 공작과, 李厚洛 前 중앙정보부장 납치 기도 공작에 대해서도 金씨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974년 8월13일 밤 12시. 서울에 남파해 있던 북한 공작원들은 「8·15 광복절 행사와 관련, 중앙청 주변에 접근하지 말고 48시간 무휴 상태로 다음 지시를 기다릴 것. 건투를 바람」이라는 비상전문을 받았다. 그때로부터 48시간이라면 8월15일 밤 12시까지를 뜻하는 것으로 광복절 행사를 겨냥한 중대한 일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중앙청 부근에 접근하지 말라는 것은 그 주변 어느 곳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지니까 그 위험으로부터 지하당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파 공작원들이 비상대기하고 있던 8월15일 오전 10시30분. 소식은 평양으로부터가 아니라 KBS라디오로부터 왔다. 문세광이 朴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대신 영부인 陸英修 여사와 여고생 1명이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사건 장소도 중앙청이 아닌 장충동 국립극장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날 저녁에 예정됐던 경회루 리셉션 등의 8·15 경축행사는 모두 취소된다.
 
  경회루 리셉션의 취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金씨의 주장에 따르면 해마다 8월15일 저녁이면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경회루에서 리셉션이 벌어진다는 것을 안 북한 공작 지도부가 그날 노렸던 것은 경회루 폭파였다는 것이다. 朴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계획을 세웠었다는 것이다. 金씨는 책에서 문세광은 다른 루트인 조총련 계통을 통해서 복선으로 배치됨으로써 경회루 폭파 계획이 무산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時效人間」에서 그는 1974년 2월 초부터 요인 암살과 주요 시설 폭파 임무 수행을 위한 「라디오 폭파 훈련」을 받고 있던 중 북한 공작 지도부가 서울 토박이인 자신에게 경회루에 있는 각종 시설의 위치 등을 파악한 사실이 있고, 자신도 경회루 폭파 훈련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훈련 중 그는 다른 특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李厚洛 前 중앙정보부장을 납치해오라는 임무였다
 
  노동당 연락부 중화1지구 5호 초대소에서 라디오 폭파 훈련을 받고 있던 1974년 4월3일, 金用珪씨는 연락부의 A급 공작원 2명과 함께 2호 초대소로 갑자기 불려간다. 연락부 제1부부장 이완기는 당중앙의 지시라며 李厚洛 부장 납치를 지시했다.
 
  金大中 납치 사건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후 해외에 나갔다가 귀국한 李 前 부장이 충무호텔 2층 특실에서 휴양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이 정보가 보고되자 黨 중앙으로부터 납치를 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남포 연락소 전투원 27명을 포함 30명으로 구성된 특수공작조의 조장으로는 金用珪씨가 임명됐다. 金씨는 입수된 정보가 믿을 만한 정보인가를 확인하고 작전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특공대의 임무는 지목된 대상인물을 납치하는 동시에 가능한 범위에서 그의 경호원, 主治醫(주치의)까지도 납치, 호송하라는 것이었다. 金씨는 입수된 정보와 수집된 모든 자료에 근거하여 작전 수행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으로, 납치대상과 2∼3명의 경호원, 主治醫, 운전사 2명 등 6∼8명의 경호역량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또 이들 모두가 태권도 유단자들인 동시에 자아호신용 수단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비상신호장치가 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對象號室(대상호실)은 호텔 2층에 있는 2개의 특실 중에서 해안가 쪽에 위치한 특실로, 그 인접 호실은 경호원과 주치의, 운전사들이 차지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金씨는 이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했다.
 
  마취실습 등 모의훈련에 들어갔다. 남포시 와우도 휴양소를 충무호텔로 가상하고 실전훈련을 벌였다. 유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사회안전부 부부장 이명선(중장)을 실험 대상으로 하고 그 옆방에 7명의 경호원을 배치했다. 최고의 엄호조와 행동조들이 모여 구성된 특수공작조는 시도할 때마다 성공했다. 열흘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소 잘 훈련된 공작원들이었기 때문에 손발이 척척 맞았던 것이다.
 
  이제 결행시기만 남았다. 드디어 공작선 두 척에 분승한 공작원들은 李厚洛 前 중앙정보부장 납치를 위해 충무로 향했다. 공작선이 중국 양자강 하구 중간 거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평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납치대상이 휴양을 마치고 충무호텔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싱겁게 상황이 종료되고 만 것이다.
 
  상황은 싱겁게 끝났지만 이 사건은 북한의 지하조직이 얼마나 우리 사회의 깊은 곳까지 침투해 있는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소리없는 전쟁」에서 두 공작원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김:이후락이라는 인물이 비록 공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신분을 그렇게 노출시키고 다니지는 않았을 텐데 보통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그런 정보가 즉시 평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말고 또 다른 현지당 지도부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정:각급 지하당 조직을 복선으로 포치해야 한다는 것은 지하당의 조직원칙에서도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 말고 또다른 지도부가 두 개 세 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국회로, 교회로 침투시켜라』

 
  金用珪씨는 「소리없는 전쟁」 맺음말에서 金日成이 對南 공작 요원들과 담화 석상에서 역설했다는 말을 소개하고 있다. 그대로 소개한다.
 
  <칠레에서의 아옌데의 경험은 선거를 통해서도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아옌데가 실패한 원인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다음, 너무 급진적으로 개혁을 서두르다가 逆쿠데타를 당한 데 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김○○ 납치 사건으로 말미암아 민심이 기울어지고 있다. 이러한 민심을 잘 유도하여 신망 높은 핵심들을 입후보로 내세우면 국회에도 얼마든지 파고 들어갈 수 있다. 이제부터 對 국회 공작은 프락치 공작에 그치지 말고 의석을 확보하는 공작으로 전환해야 한다>
 
  <유성근(前 서독주재 한국대사관 노무관, 1971년 납북)의 경우를 보면 현재 남조선에는 고등고시에 합격되기만 하면 행정부, 사법부에도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이제부터 검열된 학생들 가운데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들은 데모에 내몰지 말고 考試준비만 시켜라. 열 명을 준비시켜서 한 명만 합격된다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니까 考試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근심걱정 없이 考試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한다>
 
  <요즘 남조선에서 제일 뚫고 들어가기 좋은 곳은 교회이다. 교회에는 이력서나 보증서 없어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성경책이나 열심히 들고 다니면서 헌금만 부지런히 내면 누구든지 신임을 받을 수 있다>
 
  아버지 金日成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金正日이 遺訓統治(유훈통치)를 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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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화    (2012-07-03) 찬성 : 106   반대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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