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全羅道맛의 元祖 「해남 천일식당」의 여주인 막내딸 金正心

어머니 朴成順의 전설 같은 손맛 이야기

손지연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전라도의 맛
  月出山(월출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구름처럼 頭輪山(두륜산)을 이루고 한반도 뭍의 끝인 土末(토말)을 통해 흐르는 海南(해남)반도. 대흥사의 풍경 소리와 고산 尹善道(윤선도)의 얼이 서린 녹우당의 운치에 잠겨 있다가 슬슬 허기를 느낄 때쯤이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천일식당으로 향한다.
 
  「어느 것을 입에 대도 혀에 달라붙는 음식맛이 참으로 각별하다」고 한 백파 홍성유나, 「조선 백반의 진수를 보여주는 3대 한정식집 중의 하나로 맛이 화려하고 푸짐하며 환상적」이라고 극찬한 유홍준 교수의 이름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천일식당의 뛰어난 음식맛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 시대인 1924년부터 한자리에서 맛깔스럽고 푸짐한 음식 맛을 묵묵히 지켜온 터라 해남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이곳으로 안내한다. 천일식당을 모르면 식도락家 축에 들지도 못할 정도다.
 
  맛있다고 소문난 집들이 대개 그렇듯 천일식당도 첫눈에 보기에는 허름하게 느껴졌다. 해남 천일식당을 지키는 사람은 朴할머니의 첫째 며느리인 李正禮씨(1990년 사망)의 둘째 며느리인 吳賢華(오현화·41)씨다. 낡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는 12개의 방 중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노라면 종업원 두 사람이 교자상을 마주잡고 들어온다.
 
  한 상 가득 놓여진 정갈한 음식들 중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감칠맛 나는 젓갈들. 갈치창젓, 토하젓, 돔배젓, 어리굴젓 등 南道(남도) 특유의 젓갈이 식욕을 자극한다. 세발낙지와 게장, 조기 등의 해물도 푸짐하고 불고기와 떡갈비도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홍어애(속) 맛이 아리하게 배어나는 보릿국에서부터 시래기국, 된장국, 감자국 등 철에 따라 다른 국이 번갈아가며 상에 오르는데 제철에 나는 재료를 최대한 이용해 변화를 주는 반찬수가 20여 가지. 한 점씩만 집어먹어도 밥 한 그릇 거뜬히 비울 수 있는, 임금의 수라상 못지않은 진수성찬이다.
 
 
  1924년에 開業
 
 
  그러나 이곳이 해남의 명소로 자리잡은 것은 반찬의 가짓수 때문이 아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朴成順(박성순) 할머니(1973년 작고)의 빼어난 손맛과 3代에 걸쳐서 맛을 代물림하는 가족들의 노력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환상의 여인이라고 불렀어요, 손맛이 너무나 환상적이라고. 어찌나 간을 정확하게 맞추는지 꼭 저울대 같다고 모두들 신기해 했습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해남 천일관」(02-568-7775)이라는 한정식집을 운영하며 朴할머니의 손맛을 재현하고 있는 金正心(김정심·56)씨는 할머니의 3남 4녀 중 막내이다. 사십 넘어 얻은 막내가 그저 예쁘기만 했던 朴할머니는 집에서는 물론 외출할 때도 늘 金씨를 데리고 다녔다. 덕분에 그녀는 좋은 재료를 한눈에 척하고 알아보는 눈썰미에서부터 음식을 만드는 정성까지 朴할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익힐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외갓집이 백제음식 일인자 소리를 듣는 집안이었어요. 정확한 시기는 잘 모르겠지만 해남에 임금님이 내려오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식당이라는 게 없을 때니까 원님이 집집마다 음식을 해서 바치라고 命(명)을 내리신 거예요. 그래서 외갓집에서도 음식을 만들어 원님에게 보냈는데 제일 맛있다고 뽑힌 거예요. 그래서 임금님이 먹을 음식을 외갓집에서 모두 만들어 갔대요. 그때부터 외갓집이 백제음식을 제일 잘하는 집이라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강진의 가난한 양반 집안으로 시집온 朴할머니는 집안 일에는 관심없이 밖으로만 떠돌아다니는 남편을 대신해 家長(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농사를 지어봤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朴할머니는 주위 사람들이 감탄한 음식 솜씨 하나만을 믿고 장에 나가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하더라도 양반 체면에 주막집 주모는 할 수 없는 노릇이라 길가에 좌판을 놓고 앉아서 밥이며 국, 나물, 젓갈 등을 팔았다.
 
  『어머니가 좌판 장사를 십 년도 넘게 했다고 들었어요. 처음엔 시장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주로 음식을 사먹었는데 음식이 워낙 맛있으니까 郡守(군수)며 경찰서장 같이 높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대요. 그때만 해도 군수나 서장이면 제일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체면도 있고 또 시장까지 찾아오는 게 번거로우니까 어머니에게 식당을 내라고 졸라댄 겁니다. 그 바람에 허름한 오두막집을 하나 지어 천일식당이라는 간판을 걸게 됐지요. 그 때가 1924년입니다.
 
  참, 그때는 천일식당이 아니라 천일관이었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올케(李正禮)가 물려받으면서 천일식당이라고 이름을 바꿨지. 요정집 같은 느낌이 난다고 말이야. 처음엔 작고 허름한 집이었는데 내가 일곱 살 때, 그러니까 1950년 즈음에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지금의 집을 지었어요』
 
 
  朴正熙 대통령 네 번 다녀가
 
 
  식당이 생기자 日帝 때 해남을 거쳐간 50여 명의 군수와 서장, 상인들이 맡아놓고 밥을 먹으러 다녔고 해방이 된 후에는 중앙의 고위인사들까지도 천일식당의 음식맛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특히 朴할머니의 감칠맛 나는 젓갈은 5·16 혁명 이후 金鍾泌(김종필)씨를 비롯한 내로라 하는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인기를 끌었고 이들의 입소문으로 천일식당은 더욱 유명해졌다.
 
  이들은 자취는 천일식당의 芳名錄(방명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방명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엉성하게 만들어놓은 노트를 넘길 때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사의 사인이 줄줄이 나온다. 1995년 당시 법무부장관이던 安又萬(안우만)씨는 「정성 들이고 정결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갑니다. 늘 변하지 마시도록」이라는 글을 남겼고 재작년에 다녀간 高建(고건) 서울시장은 「至誠感民」(지성감민)이라고 썼다. 申樂均(신낙균) 전 문화부장관은 특별한 말 없이「申樂均 문화부장관」이라고만 단아한 글씨체로 써놓았다.
 
  「천일식당 떡갈비의 맛은 전국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습니다」라고 쓴 사람은 가수 玄美(현미)씨. 「좋은 집」이라고 간략하게 쓴 사람은 탤런트 崔佛岩(최불암)씨다. 서세원, 전유성, 고두심씨는 두 번 이상 다녀간 단골손님. 마유미 金賢姬(김현희)도 「잘 먹고 간다」는 인사를 남겼다. 임권택 감독이 서편제를 찍을 때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식당을 촬영장소로 빌려달라는 것을 손님이 너무 많아 거절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도 네 번이나 다녀갔어요. 대통령이 오면 다른 손님을 못 받으니까 우린 손해였지만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신경써서 요리를 준비하느라 며칠 전부터 부산하셨죠. 식사값? 나는 그때 어려서 대통령이 돈을 내고 갔는지 그냥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 성격에 아마 공짜로는 안 주셨을 겁니다. 인정이 많아서 어려운 사람도 많이 도와줬지만 계산 하나는 또 칼같이 분명했으니까요.
 
  어머니 음식이 청와대에 들어간 적도 많았어요. 나도 어릴 때 한 번 따라가 봤는데 전라도 군수며 경찰서장 같이 높은 사람들이 일렬로 쭉 서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하는 거야. 어린 마음에 그걸 보면서「이렇게 많은 음식을 언제 다 먹으려고 저렇게 절만 하고 있을까. 우리 엄마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데…」 하고 애태웠던 기억이 있어요』
 
  朴할머니가 정성껏 준비한 푸짐한 음식 중에서 朴 전 대통령이 특히 좋아했던 것은 값비싼 홍어나 갈비, 낙지가 아니라 대갱이포였다. 이것은 이름조차 생소한 「대갱이」라는 생선을 바짝 말려서 구운 것으로 밑반찬은 물론 술안주로 아주 그만이다. 朴할머니가 청와대에 들어갈 때마다 제일 먼저 준비하는 음식이 바로 이 대갱이포였는데 대갱이를 파는 가게가 전라도 전체에서 한두 군데밖에 없을 정도로 귀하다 보니 구하기가 쉽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대갱이로 음식을 만든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아니, 어머니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내셨어요. 학교라고는 국민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지만 음식에 관해서만큼은 많은 상식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어요.
 
  동배추라고 들어봤어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배추를 동배추라고 하는데 이건 해남에만 있어요. 잘 자란 배추를 뽑지 말고 그대로 밭에 놔두면 눈비 맞으면서 저절로 속이 벌어져요. 이걸 정월에 캐서 물김치를 만드는데 그 맛이 어찌나 달고 시원한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어머니는 무를 가지고도 특별한 김치를 만드셨어요. 가을 무를 속 잎사귀는 다 뜯어내버리고 겉잎사귀만 남겨놓은 다음에 이 겉잎사귀끼리 매서 그늘에 말려요. 어머니 표현에 따르면 「늙은이 뱃가죽처럼 쪼글쪼글해질 때까지」말리는 거야. 여기에 고추와 찹쌀, 추자도 멸치젓, 토하젓,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 양념을 하면 고추무김치가 되는데 이 김치는 맛도 맛이지만 영양이 너무나 풍부했어요. 밥하고 김치만 먹어도 한 끼 영양으로 충분할 만큼 칼슘과 비타민 C가 많았지. 칼슘이 얼마 비타민이 얼마 하고 음식을 만든 건 아니지만 어머니의 음식은 늘 이렇게 맛과 영양이 함께 했어요』
 
  ─朴할머니가 제일 잘 만든 음식이 젓갈이었다지요?
 
  『젓갈은 어머니의 음식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一味(일미)였어요. 「젓갈맛의 元祖(원조)」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였으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냄새 난다고 젓갈을 입에도 안 대지만 옛날에는 돔배젓, 토하젓, 갈치속젓 등 예닐곱 가지의 젓갈을 맛깔스럽게 무쳐서 김이 오락가락하는 하얀 밥에 싹싹 비벼 먹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어요. 어머니는 철마다 열 가지 정도의 젓갈을 담갔는데 그 곰삭은 듯한 감칠맛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비결이 뭘까요?
 
  『우선은 생젓이 맛있어야 해요. 어머니는 젓거리를 주로 해창만에서 사오셨는데 그땐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거나 파도가 높으면 배가 못 들어오기 일쑤였어요. 그러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포구에서 기다리다가 배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달려나가셨지요.
 
  멸치젓은 누구나 알다시피 제주 추자도 것을 제일로 치는데 배가 들어오면 보통 1천 옹기가 들어와요. 그러면 작은 국자를 하나 들고 그 1천 옹기의 젓갈을 검사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국자로 옹기 속을 뒤집어보면서 「합격」 그러면 옆에 있던 상인들이 오른쪽에 그 옹기를 가져다 놔요. 「불합격」그러면 왼쪽에 놓고. 이렇게 해서 속젓이 빨갛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젓갈만 사가지고 오는데 보통 5백 옹기 정도를 사오셨어요. 그날 항구에 들어온 멸치젓의 반을 어머니 혼자 사오시는 겁니다.
 
  또 토하젓은 꼭 해금내(흙냄새) 나는 걸로 사셨어요. 해금내가 나야 구수하고 감칠맛이 나거든요. 새우가 싱싱하고 빨간 빛깔을 띠어야 하는 거야 당연한 것이고요. 참, 전어창젓과 깔창젓은 강진에서 샀어요. 이건 해남보다 강진 것이 더 맛있어요. 강진에 「만덕장」이라고 한정식집이 있는데 여기 주인하고 어머니가 친구였어요. 시장에 좋은 물건 나오면 서로 보내주기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셨어요. 그분이 젓갈을 자주 보내주셨지요』
 
  생젓에 소금간을 치고 학독(옹기그릇)에다 갈무리를 한 다음 돌로 눌러놓는 과정은 다른 집하고 크게 틀리지 않다. 다만 중요한 건 소금간의 농도. 언제 먹느냐에 따라 간을 틀리게 해야 되므로 계량컵이나 저울로는 도저히 그 양을 계산할 수가 없다. 저울대처럼 정확한 朴할머니의 손이 그 실력을 발휘할 때다.
 
 
  『젓갈은 세월의 때가 묻어야』
 
 
  좋은 재료와 손맛. 그러나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맛 중의 맛」이라는 朴할머니 젓갈 맛의 秘法(비법)은 다름아닌 「시간」이다.
 
  『김치도 그렇고 홍어도 그렇지만 특히 젓갈은 세월의 때가 묻어야 해요. 오랜 시간 퇴적된, 그 은근한 맛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해요. 어머니는 젓갈을 담아놓은 학독을 적어도 일년이 될 때까지는 절대로 헐지 않으셨어요. 신앙 같은 인내심이셨지요. 어떤 건 3년 이상 삭히기도 했어요. 그런 인내심이 어머니에게 젓갈맛의 元祖라는 이름을 붙여준 거지』
 
  ─할머니가 담근 김치가 또 그렇게 별미라고 들었습니다.
 
  『우리집 김장하는 모습은 다른 집하고 많이 틀렸어요. 원래 김장하는 날이면 가족이나 친척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시끌벅적하게 김치를 담그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무슨 중요한 행사를 진행하는 것 같은 엄숙한 분위기였어요.
 
  일단 배추는 하룻밤 내내 소금에 절였어요. 어떤 사람들은 짜게 해서 빨리 절여야 싱싱하다고 말하지만 어머니는 반드시 하룻밤을 꼬박 재웠지요. 귀찮더라도 꼭 몇 번씩 뒤집어주고. 절인 배추를 건져서 씻은 다음 물기가 완전히 빠지도록 또 하루를 그대로 두셨어요.
 
  모든 준비가 끝나면 커다란 양동이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饌母(찬모)가 마주 앉아요. 어머니 옆으로는 열한 개의 양념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열한 가지 양념이 멸치젓, 마늘, 생강, 깨, 미나리, 쪽파, 갓잎사귀 채썬 것, 무, 당근, 생굴, 그리고 돼지고기예요. 좀더 시원한 맛을 내고 싶을 땐 갈치나 조기 새끼를 믹서에 갈아서 넣기도 하셨어요. 나는 어머니의 김치가 맛있는 이유가 이 돼지고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돼지고기를 갈아서 아무 양념 없이 기름에 살짝 볶기만 하면 되는데 김치 담글 때 돼지고기 넣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이렇게 하면 김치의 맛이 훨씬 깊어지게 되지.
 
  어머니가 양념들을 손으로 집어 그릇에 탁 넣으면 찬모가 밑에서 이걸 버무려요. 다 버무린 양동이를 어머니에게 가져오면 어머니가 맛을 한 번 보고 부족하다 싶은 양념을 또 탁 하고 넣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하는데 이때 어머니의 모습이 마치 여왕처럼 위엄 있었어요.
 
  나는 어머니 바로 옆에 앉아 있었으니까 어떤 재료가 얼마만큼 들어가는지를 확실하게 익힐 수 있었어요.「네가 담근 김치가 어머니 맛하고 제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오빠에게 들을 정도니까 제대로 배운 것이죠』
 
  ─어머니가 음식 만드는 법을 꼼꼼하게 짚어가며 하나씩 자세히 가르쳐 주셨나요?
 
  『어머니는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는 분이셨어요. 옆에 앉혀놓고 하나씩 사근사근하게 가르쳐줄 사람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워낙 많은 사람들에 치이다 보니까 집에서는 거의 말을 안했어요.
 
  하지만 마흔을 넘어 본 막내인 내가 괜히 안쓰러웠는지 늘 곁에 두려고 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부엌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늘상 보는 게 어머니 음식 만드는 모습이었으니 따로 앉아서 배울 필요도 없었죠. 또 그럴 시간도 없었고.
 
  일일이 간을 보지 않아도 눈대중, 손대중으로 척척 맛을 내는 어머니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는데 10년쯤 지나니까 맛이 많이 비슷해졌어요. 시장도 늘 따라다녔으니 물 좋은 생선 고르는 법이나 고기 보는 눈도 트여갔어요. 그게 바로 최상의 교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秘法은 없다
 
 
  「최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어머니 손맛의 秘法을 발견했느냐」고 묻자 김씨는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그런 건 없다』고 담박에 대답한다.
 
  『秘法이란 건 없어요.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귀찮고 번거로워서, 아니면 주위 여건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것들을 어머니는 고집스럽게 지킨 것뿐입니다. 우선 어머니는 좋은 재료를 구하는 데 신경썼어요. 좋은 재료를 사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사오셨어요. 우리 것, 그것도 自然産(자연산)만을 고집하고 조미료는 일절 쓰지 않았어요. 제철에 제땅에서 나는 음식이 몸에 좋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음식 솜씨 좋은 집안에서 보고 배운 손맛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었을 거예요. 왜 손맛은 내림된다고 하잖아요. 남다른 손맛을 지닌 집안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손맛이 좋았을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재료가 좋고 손맛이 좋아도 정성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 음식은 다른 나라 음식에 비해 손이 많이 가는 편이라 안주인의 정성과 수고가 없을 수가 없어요. 물론 귀찮지요. 하지만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함 없이 음식 만드는 과정을 철저히 지켜야지만 제맛이 나는 것이 우리 음식의 특징이에요. 어머니가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고생을 감수하며 먼 곳까지 다녀왔던 것도 바로 이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정성만 가지고는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 손에 익고 입에 익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안목, 이것이 장보기의 요령인데 초보 주부에게는 제일 어려운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장보기를 맡기지 않으셨어요. 아무리 먼 곳이라도 직접 가서 일일이 맛을 보고 가져오셨어요. 이건 결국 자기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부지런히 다니면서 이것저것 사보고 또 어른들이 물건 고르는 것도 유심히 살펴보면서 그 요령을 배워야 합니다.
 
  어머니를 예로 들면 배추는 꼭 나주에 있는 남평들에 가서 사오셨어요. 여의도 면적의 세 배 정도 되는 남평들은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배추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맛이 좋아요. 어머니는 이 남평들 안에서도 좀더 맛있는 배추를 사기 위해 하루종일 그 넓은 들을 돌아다니며 배추를 골랐어요』
 
  朴할머니가 원한 배추는 폭이 짧고 노란잎이 많이 달린 배추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배추가 크면 싱겁기만 했지 맛이 없다. 또 노란잎이 많을수록 단맛도 강하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씹을수록 매워야 한다는 것. 처음엔 달다가 씹을수록 매워지는 배추로 김치를 담가야 익을수록 맛이 좋다. 무도 역시 마찬가지로 매운 무가 익을수록 단맛이 강해진다.
 
  단백질이 풍부한 굴(석화)은 해남과 완도 사이에 있는 오산 바다의 바위에서 채취한 자연산 굴이 최고다. 꼬막은 벌교 꼬막이, 「나갔던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는 해남에서 나오는 가을 전어가 최고다.
 
 
  『요리책 덮어야 손맛이 나온다』
 
 
  『그런데 요즘은 어째 똑같은 재료를 써도 옛날 맛이 나질 않아요. 아마 수입농산물이나 養殖(양식) 때문인가 봐요, 공해도 심하고. 재료를 구하지 못해 아예 만들지 못하는 음식도 있어요. 음식의 맥이 끊긴 것이죠』
 
  그 좋은 예가 참게장이다. 朴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무엇보다 자랑으로 내세울 만큼 별미였는데 지금은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음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참게장을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다. 논에서 긁어잡은 참게를 항아리에 넣고 간장을 붓는데 이때 쇠고기를 몇 조각 같이 넣어준다. 일주일 후에 뚜껑을 열어보면 아기 주먹만하던 고깃덩이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작아져 있다. 그 사이에 게가 고기를 야금야금 뜯어먹은 것이다. 이 게를 꺼내서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장을 담그면 그 맛이 가히 일품이었는데 요즘엔 이 참게장을 담글 수가 없다. 참게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어릴 때 먹었던 맛을 떠올리면서 金씨도 몇 번 담아보았지만 自然産과 달리 養殖 게는 도중에 다 상해버렸다. 만드는 법을 뻔히 알면서도 재료가 없어 만들지 못하는 것이 金씨는 몹시 안타깝다.
 
  대흥사 싸리버섯도 마찬가지다. 대흥사에서 채취한 싸리버섯에 쇠고기를 넣고 볶으면 그 향긋한 버섯내음이 입안 가득 감돌았는데 이젠 그 향긋함도 맛볼 수가 없다. 싸리버섯이 대흥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잘 끓이던 쏘배기국과 한갈국도 이젠 추억 속에나 남아 있는 맛이 되었고, 해남군 山二(산이)면 相公(상송)리 앞 개펄에서 잡히던 사근사근한 세발낙지도 개펄이 줄어들면서 그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재료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손맛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손맛이란 게 너무 추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손맛을 익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똑같은 재료를 써서 똑같은 방법으로 음식을 만들어도 집집마다 음식맛이 다르지요. 이게 바로 손끝에서 혀끝으로 이어지는 손맛 때문이에요. 요즘엔 과학화니 현대화니 해서 재료의 양을 계량컵이나 스푼을 단위로 정확하게 계산하는데 우리 음식은 재료를 저울에 달아가며 만들면 맛이 별로가 되고 말아요. 싱겁게 먹는 집도 있고 짜게 먹는 집도 있는데 무조건 일률적으로 「소금 2스푼, 설탕 3스푼」이라고 딱 규정해 버리면 느낌에 따른 자신만의 손맛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요리책을 보면서 만드는 법을 익히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책을 덮고 자신의 손맛을 개발해 나가야 해요.
 
  시행착오를 거쳐야 진짜 손맛을 낼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왜 손맛 좋은 할머니들을 보면 겉보기엔 특별한 게 없어 보여도 조물조물 무쳐내는 나물맛이 남다르잖아요. 무수한 세월 동안 음식을 만들어 오셨기 때문에 특별한 손맛을 낼 수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고향의 맛이고 어머니의 맛입니다.
 
  또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음식 만들 때 다들 위생장갑을 끼는데 이건 절대 잘못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어머니는 장갑 같은 건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어요. 음식의 맛이란 재료를 썰고, 무치고, 지지고, 볶고 하는 동안 손끝에서 우러나오는 氣(기)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손맛이 있냐 없냐는 바로 이 氣에서 결정된다고 나는 믿고 있어요.
 
  식품학과 교수에게 들은 말인데 음식을 만들 때면 손에서 아미노산이 나온대요. 이 아미노산이 음식의 양념 배합과 잘 맞아들어갈 때 손맛이 나온다는 거예요. 나는 이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갈비는 대흥사 장작 숯으로 세 번 구워야 제맛』
 
 
  ─좋은 재료와 손맛, 이제 여기에 정성만 있으면 되겠군요.
 
  『맛있는 집이라고 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음식을 만드는 곳은 없어요. 한정식은 더더욱 그래요. 유명한 한정식집을 다 돌아다니면서 물어봐도 열이면 열 다 秘法이라는 건 없다고 대답할 거예요. 음식맛은 비결이 아니라 정성이니까요. 제철에 나는 최상의 재료를 지질 것은 지지고, 볶을 것은 볶고 무칠 것은 무쳐 입맛에 맞게 간하고 양념해 정성으로 내놓는 것뿐입니다.
 
  어머니가 음식에 들이는 정성은 정말 대단하셨어요. 멸치생젓을 살 때 1천개의 옹기를 일일이 뒤집어 젓갈 속을 보셨다는 얘기를 아까 했지요? 말이 1천 옹기지 이건 보통 정성 아니고는 못해요. 그 냄새나는 젓갈 앞에 하루종일 앉아 있다가 돌아오면 온 몸에 냄새가 배서 며칠씩 가고 했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재료 하나 구하는 데도 이렇게 정성을 쏟았으니 음식 만들 때야 두말할 필요 없었지요. 어머니는 「이건 내 남편과 자식들이 먹을 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음식을 만드셨어요. 내 자식이 먹는다고 생각하면 정성이 안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어머니가 가장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이 아마 갈비구이였을 거예요. 어머니는 갈비를 구울 때 꼭 대흥사의 장작으로 만든 참숯을 사용했어요. 대흥사 숯으로 고기를 구우면 그 향이 고기에 스며들어가 맛이 훨씬 좋아지거든요. 어머니는 이 갈비구이를 한 번에 구워서 내오는 것이 아니라 세 번에 나눠서 구웠어요. 먹다가 다시 굽고, 또 먹다가 다시 굽기를 세 번 반복한 것입니다.
 
  갈비를 구으면 뼈에 붙어 있는 살이나 힘줄 부분은 익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요. 그런데 이걸 한 번에 다 익히려고 하면 당연히 고기가 질겨질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맛도 떨어지지요.
 
  그러니까 일단 끝부분의 고기가 맛있게 익었다 싶으면 손님에게 가져가요. 손님이 먹다가 피가 나오면 다시 가져가 굽는 겁니다. 이걸 먹다가 뼈 있는 곳에서 또 피가 나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구워요. 번거롭긴 하지만 이렇게 구운 갈비의 힘줄 부분을 뜯어먹으면 입안에서 오돌오돌하게 씹히면서 살살 녹아요. 어머니는 맛에 이만큼이나 정성을 들이셨어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맛이 좋다고 해도 요즘 세상에 누가 번거롭게 고기를 세 번이나 굽겠어요. 이렇게 음식에 정성 들이는 사람은 아마 어머니밖에 없을 거예요.
 
  어머니의 이런 정성은 대구찌개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대구는 살이 워낙 연하니까 찌개를 끓이면 살이 부스러지거나 흩어져버려요. 그래서 어머니는 대구 한 마리 한 마리를 짚으로 살짝 묶었다가 그릇에 담을 때 풀어서 상에 올렸어요.
 
  기본 양념인 간장, 고추장, 된장을 직접 담그는 거야 너무도 당연했고 참기름과 깨소금, 고춧가루도 직접 볶고, 빻고, 짜서 사용했어요. 열 명 정도의 饌母들이 어머니를 도왔지만 어머니의 손길, 하다못해 눈길이 가지 않은 음식은 하나도 없었지요.
 
  참, 어머니는 正月(정월) 보름마다 장광(장독대)에 告祀(고사)를 지내셨어요.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정성껏 고사를 올렸는데 팥으로 만든 찰밥과 무나물, 매생이국 이 세 가지가 상에 올랐어요. 매생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파래보다도 가늘게 생긴 건데 여기엔 피를 맑게 해주는 요드 성분이 미역보다 열 배 정도 더 많이 들어 있어요. 이걸 다진 마늘이랑 참기름 조금 넣고 볶다가 물 붓고 생굴 넣어 끓이면 아주 개운하고 시원해요. 남도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국입니다.
 
  그러니까 매생이국은 깨끗한 피를 만들어주는 매생이처럼 깨끗하라고, 찰밥은 끈끈하게 잘 어우러지라고, 또 무나물은 일년 동안 무사태평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정월 보름이 돌아오면 이 음식들을 정갈하게 그릇에 담아서 정성껏 고사를 올리시던 어머니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김장할 때처럼 진지하고 엄숙하셨습니다』
 
 
  『술마시고 싶으면 기생집에 가라』
 
 
  ─어머니 스스로도 자신이 만든 음식맛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까?
 
  『처음에는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 식당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제맛을 살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아요. 워낙 말수도 없고 또 無學(무학)이다 보니 당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조리 있게 표현하진 못했지만 자라면서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자부심이 있으니까 그 넓은 남평들판을 이끝에서 저끝까지 힘들게 걸어다니면서 배추를 고르고 1천 옹기의 젓갈을 일일이 뒤집어 보신 거겠지요. 어머니는 「천일식당 맛이 최고다」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셨어요. 교통이 불편하던 그 옛날에도 「넥타이 매고 다니면서 어머니 모르면 촌놈」이라는 소릴 들을 정도였으니 그 맛을 지키기 위해서 늘 긴장하고 노력하셨지요.
 
  제가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어머니가 광주에 오시면 둘이서 식당을 찾아다니곤 했어요. 한 번 가봤던 식당은 절대로 가지 않고 매번 다른 식당을 찾아갔었는데 일단 들어가면 메뉴에 나오는 음식을 다 시키는 거예요. 고기, 냉면, 찌개백반 뭐 이런 걸 종류대로 다 시키는 겁니다.
 
  당연히 반도 다 못 먹어요. 배가 너무 불러서 숟가락 한 번 입에 대지 않은 음식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한 번 푹 찔러서 빨아먹고 나왔어요. 그렇게 맛을 보고 와서 직접 만들어 보시기도 했어요. 어떨 때는 「맛도 하나도 없으면서 값만 비싸게 받는다」고 욕까지 섞어가며 중얼대곤 하셨습니다』
 
  ─朴할머니 성품이 괄괄한 편이었지요?
 
  『女傑(여걸)이었어요. 치마만 둘렀다 뿐이지 속은 아주 대장부셨죠. 욕을 많이 해서 별명이 욕쟁이 할머니였어요. 말을 했다 하면 시작부터 끝까지가 다 욕일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천일식당에서 술도 같이 팔고 있지만 어머니는 반주 두 잔 이상은 절대로 팔지 않았어요. 아무리 높은 사람이 와도 절대 술을 내놓지 않으셨어요. 술을 더 달라고 하면 「여긴 밥집이니 술마시고 싶으면 기생집에 가서 마시라」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치셨지요. 원래 타고난 성격도 대범했지만 상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 그것도 군수나 도지사, 경찰서장 같이 높은 사람들이다 보니까 나이 들수록 더 통도 커지고 여장부가 된 것 같아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金씨의 큰오빠, 즉 朴할머니의 첫째 아들이 시비 끝에 싸움이 붙어 감방엘 들어갔다. 그 당시만 해도 법원이 해남에는 없고 장흥이란 곳에 있었는데 아들이 감방에 들어가자 朴할머니는 미련 없이 식당 문을 닫아버리고 장흥까지 따라갔다.
 
  『감방 근처에 방을 하나 얻은 어머니는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무조건 감방으로 찾아가셨어요. 아들 걱정에 잠이 오지 않으면 한밤중이라도 감방으로 달려간 겁니다. 캄캄한 밤에 인기척이 나니까 당연히 간수가 누구냐고 물었겠지. 그러면 태평하게 「누구긴 누구여, 나지」 하면서 담배나 돈을 슬쩍 쥐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간수가 「아이구, 할머니, 또 오셨소」 하면서 감방 문을 열어주곤 했대요. 그렇게 장흥에 머물면서 오빠의 감방 뒷바라지를 한 어머니는 결국 한 달 만에 오빠를 데리고 돌아오셨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나왔는데 입학할 때 면접을 봤어요. 잔뜩 떨면서 면접실에 들어가니까 면접관이 대뜸 「집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요. 그때 내 마음에 「밥장사 한다」고 하면 괜히 얕볼 것 같아서 「사업한다, 농사짓는다」고 둘러댔는데 「무슨 사업이냐, 농사는 뭘 짓느냐」하고 꼬치꼬치 물어보는 거예요.
 
  더 이상 거짓말하면 큰일날 것 같아서 「사실은 천일식당 해요」 하고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면접관이 씨익 웃으면서 「고놈, 참, 그 말이 그렇게 하기 힘드냐」 그러더니 「어머니에게 가서 안부 전해라」 하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보니까 어머니가 교육감에게 직접 전화해서 「우리 딸이 시험보러 간다」고 하니까 교육감이 학교에 미리 전화를 해놓았던 거예요. 전라도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 중에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떡갈비」 유감
 
 
  ─천일식당이 그렇게 유명했으니 돈도 많이 벌었겠습니다.
 
  『돈이야 많이 벌었지만 어머니는 늘 외로우셨어요. 한량인 아버지는 늘 밖으로만 떠돌다가 가끔씩 손님처럼 다녀가셨으니까. 그나마도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돌아가셨지만….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장사가 끝나고 집에 오면 기생을 불러다가 唱(창)을 시키곤 했어요. 기생이 애절한 곡조로 창을 하면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창호지 문을 탁탁 두드리면서 장단을 맞추셨지요.
 
  國劇(국극)도 좋아해서 林春櫻(임춘앵) 국극이 해남에 들어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가서 보셨어요. 어머니는 식당 때문에 일찍 갈 수가 없으니까 국극이 시작하기 두 시간 전쯤에 내가 가서 좋은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거예요. 시작할 시간이 되면 어머니는 식당에 손님이 있건 없건 부채 하나 들고 달려오셨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어요. 남편 사랑도 못 받고 여자 혼자 몸으로 장사하면서 힘든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을까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나와요. 저도 어머니처럼 한정식집을 하다 보니까 어머니 생각이 더 많이 나요. 음식 만들면서 힘들고 사람들 때문에 힘들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해남에 있는 천일식당은 朴할머니의 며느리인 李正禮씨를 거쳐 지금은 손자며느리인 吳賢華씨가 하고 있지요.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해남의 名所(명소)인데 굳이 서울에서 「천일관」이라는 한정식집을 연 이유라도 있습니까?
 
  『결혼하고나서부터 늘 머릿속에 「언젠가는 한정식집을 해야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잠재적으로 있었다고나 할까요.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의 천일식당은 전라도의 향토미각을 이어오는 전통 한정식집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엔 떡갈비집으로만 알려져 있어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어머니를 회상하며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나가던 金씨의 목소리가 이 대목에서 한 톤 높아진다. 지금의 해남 천일식당이 떡갈비집으로 알려져 속이 많이 상한 눈치다. 원래 천일식당의 원조인 朴成順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떡갈비라는 음식이 없었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떡갈비는 전라도의 전통음식이라고 볼 수 없다.
 
 
  떡갈비
 
 
  해남 천일식당 吳賢華씨의 말을 들어보면 떡갈비는 朴할머니의 첫째 며느리인 李正禮씨가 만들어낸 음식이라고 한다. 朴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주위에 식당이 별로 없었고 또 있어봤자 밥집 정도였는데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다 보니 일식집이나 갈비집, 홍어전문점 등 한두 가지 음식만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主流(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로부터 천일식당을 이어받은 李正禮씨가 주위의 이런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니 「지금처럼 이것저것 다하지 말고 우리도 뭔가 특색 있는 음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만들어낸 음식이 바로 떡갈비다.
 
  갈비뼈에 붙어 있는 살점만 발라내 떡처럼 둥글게 만들어 숯불에 굽는 떡갈비는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연하고 부드러워 남녀노소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야말로 「없어서 못판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네 명이 와서 떡갈비를 4인분 시키면 불고기 2인분과 떡갈비 2인분이 나온다. 그래야 저녁식사 시간에도 떡갈비를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달라는 대로 다 주다가는 점심만 팔고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라고 주인 吳賢華씨는 하소연한다. 이 정도로 떡갈비가 유명해지다보니 「천일식당」 하면 이제 「한정식집」이 아니라 「떡갈비집」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MBA보다 가치 있는 일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지금처럼 서민적인 식당이 아니라 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고급 한정식집이었어요. 물론 시대가 변한 탓도 있겠지만 그때는 정말 고관대작들이 드나들었어요. 음식도 지금처럼 한 상에 얼마 하는 게 아니라 요리마다 음식값을 받았어요. 홍어회는 얼마, 농어는 얼마 이런 식이었지. 물론 김치와 젓갈 같은 밑반찬이야 기본으로 나왔지요.
 
  그런데 요즘엔 떡갈비가 너무 인기 있다 보니까 다른 음식 준비에 소홀한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들어요. 상차림이 어머니 때와 비교해서 너무도 많이 달라졌으니까 딸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마음이 아프지요.
 
  어머니는 50년 이상을 오로지 전통 음식 만드는 데에만 정성을 쏟은 분이에요. 어머니의 삶이 곧 음식이었고 어머니는 거기에 최선을 다하셨어요. 어머니가 단지 돈 버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손에 물기 마를 시간 없이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었어요.
 
  돈이야 그때 이미 충분하게 벌어놨으니까. 돈 때문이 아니라 한국 음식의 本流(본류)를 지키는 것이 내 할 일이라는 자존심 하나로 나물 하나를 무쳐도 정성을 다해서 그렇게 손님을 대접했는데 어머니의 그런 뜻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너무 많이 죄송해요. 어머니의 정성과 손맛을 제대로 재현하지도 못하면서 어머니의 後光(후광)만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드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얼마 전에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둘째딸이 金씨에게 전화를 했다. 교수와 친구들에게 우연히 집안 이야기를 했더니 「너는 엄마가 하는 일을 이어받아야지 왜 MBA를 하느냐」며 「엄마의 음식맛을 제대로 이어받아서 그 맛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 MBA보다 훨씬 가치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하더란다.
 
  그 말을 듣자 金씨는 「이제야 비로소 음식 문화가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장사한다고 무시받을 때도 많았고 그때마다 때려치고 싶었지만 전통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온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생겨났다.
 
  『먹는다는 것이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다 보니 文化(문화)라는 말을 붙이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음식은 민족마다 독특한 문화 양식이에요. 꼭 지켜내야 할 전통이고 말이야』
 
  그래서 金正心씨는 이제 천일관의 문을 닫으려고 한다. 어머니의 전설적인 손맛을 이제는 전설 속에만 묻어두고 싶은 마음에서다. 식당으로서의 천일관은 문을 닫고서 어머니의 손맛을 본격적으로 재현하려고 한다. 어머니가 만들던 방법 그대로,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함 없이 차근차근 어머니의 별미 음식들을 만들 계획이다. 어머니의 손맛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바로 내 어머니 朴成順의 손맛」이라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날을 그녀는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