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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역사 ④ 돈, 이자, 그리고 문명

돈이 사라진 자리에는 권력과 특권이 들어선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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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탤런트(talent)는 고대 유대의 화폐 단위 중 하나… ‘돈=능력’임을 보여줘
⊙ 카이사르 암살한 브루투스는 고리대금업자… 카이사르의 고리대업 단속에 대한 반발?
⊙ 알베르투스 마구누스, 도시를 찬양하고 상인과 부자의 역할 긍정
⊙ “금리가 인간을 화합하게 한다”(토드 부크홀츠)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영국 화가 쿠엔틴 메시스의 〈환전상과 그의 아내〉(1514). 사진=퍼블릭 도메인
  ‘영끌’.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를 줄인 말이다. 주택 매입 등을 위해 대출을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하는 걸 일컫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당시 부동산 정책 실패로 주택가(價)가 치솟으면서 ‘영끌족’이 급증했다. 주로 30~40대다. 더 늦기 전에 집을 장만하려는 젊은 층들이 ‘주담대(주택담보대출)’는 물론 신용대출까지 최대한 동원해 주택을 매입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빅 스텝(Big step)’이라는 용어도 있다. 거인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 얘기가 아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기준 금리(金利)를 큰 폭으로 인상하는 걸 일컫는 용어다. 한자어 용어는 점차 낯설어지고 있다. 하지만 ‘영끌족’이라면 ‘빅 스텝’이라는 용어는 다 안다. 미국이 기준 금리를 올리면 한국도 기준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됐고 또 진행 중이다.
 
  한국의 영끌족으로선 탄식을 넘어 열불이 날 일이다. 하지만 어떻든 오늘의 세계는 그렇게 움직인다. 좋든 싫든 그럴 수밖에 없다. 세계는 물리적인 길로만, 그 길을 오가는 상품으로만 연결돼 있는 게 아니다. 돈으로도 연결돼 있다. 세계는 ‘돈의 논리’로 이어져 있다. 그 같은 돈의 논리의 핵심에 있는 게 금리다.
 
 
  돈에도 가격이 있다
 
  돈의 가장 1차적인 기능은 상품 구입의 지불 수단이다. 교환매개의 기능이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는다. 가치 척도의 기능, 가치 저장의 기능도 한다. 그런데 기능적 측면에서는 화폐(貨幣)라는 용어를 쓴다. 같은 말로 여기기도 하지만 엄밀하게는 함의의 차이가 있다. 돈은 화폐의 기능적 의미와 함께 재산, 소득 등의 개념을 포함한 포괄적인 부(富)의 의미를 갖는다. ‘돈 많은 부자’라고 하지 ‘화폐가 많은 부자’라고 하지 않으며, ‘돈을 벌자’라고 하지 ‘화폐를 벌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돈은 가치 척도와 가치 저장에 방점이 있다.
 
  그런데 ‘가치’에는 가격이 있다. 물건에 가격이 있는 것처럼 돈도 자금으로 오갈 때는 가격이 있다. 상품가격이 ‘원가+이익(interest)’인 것처럼 ‘돈의 가격’은 ‘원금+이자(interest)’다. 둘 다 interest이다. 금리는 돈의 마진(margin)이다.
 

  물건을 살 때 그에 상응한 대가(代價)를 지불하지 않으면 구입을 할 수 없음은 모두가 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훔치거나 뺏는 것이다. 문명국가는 이런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단속한다. 이런 일이 만연하면 경제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을 빌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자 없이 돈을 빌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행(善行)일 수는 있어도 경제행위는 아니다. 돈을 빌려주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금리는 다른 기회를 포기한 대가이자 떼일 위험을 감수한 대가다. 선의(善意)로 그것을 계속 무릅쓸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지속되면 선의의 자산 자체가 고갈된다. 그러면 돈을 빌리기는 더욱더 어렵게 된다.
 
  이자가 저주스럽다 하여 이자를 제도적으로 금지해버리면 제도권의 바깥에서 악성(惡性)의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이 판치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다.
 
 
  돈을 없애버린다면…
 
로버트 오웬
  그렇다면 돈 자체를 없애버리면 어떨까? 영국의 로버트 오웬도 그런 꿈을 꾼 사람 중 한 명이다. 1832년 ‘노동중개소’라는 것을 열었다. 물품영수증과 노동증서를 교환했다. 노동가치만의 물물교환으로 돈을 없앤다는 시도였다. 2년도 안 돼 실패로 끝났다. 오웬은 전 재산의 80%를 잃었다.
 
  마르크스는 오웬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부르고 자신은 ‘과학적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그러나 오웬의 ‘공상’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개인적 실패로 그쳤다. 하지만 마르크스를 뒤이은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집요한 시도는 인류 역사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를 안겼으며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역사는 돈을 없앤다는 게 무엇을 뜻하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돈이 사라진 자리에는 권력과 특권(特權)이 들어선다. 원시적 완력과 다를 바 없는 힘의 행세가 사람들의 생사여탈을 쥐게 된다. 경제적 고민이 사라진 자리에 충성심 강요의 공포가 자리한다. 그런 가운데 물질적 삶도 나락으로 치달아 간다.
 
  경제적 어려움이 엄습하면 원망이 앞서기 일쑤다. 그래서 부자를 욕하고 돈에 시달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 떠드는 자들이 행세를 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인들은 적어도 한 가지는 확인하고 있다. 그런 자들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돈을 밝힌다는 것이다. ‘대장동’의 ‘아수라’가 보여주었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범죄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른다. 길을 닦아놓으면 도둑놈과 범죄자도 오간다. 하지만 그것은 길의 탓이 아니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을 없애야 한다는 건 나쁜 놈도 오간다고 길을 없애자는 것과도 같다. 돈에는 죄가 없다. 뿐만 아니라 돈은 문명적 역할을 한다. 돈의 등장과 발전의 역사는 문명적 성숙의 역사이기도 하다. 돈의 역사를 약간이나마 살펴보아도 그 점은 헤아려진다.
 
 
  돈은 능력이다
 
이스라엘의 화폐 단위 ‘셰켈’은 고대 수메르 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사진=이스라엘은행
  고대 중국의 은(殷)나라는 조개껍데기를 대표적 화폐로 사용했다. 자안패(子安貝)다. 다른 쓸모는 없다. 교환의 매개물이요 부의 척도로 사용될 뿐이었다. 나중에는 청동으로 ‘동패(銅貝)’를 만들었다. 중국 최초의 금속화폐다. 그런데 명칭에는 ‘조개 패(貝)’자가 그대로 쓰였다.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재물 재(財)’ ‘재화 화(貨)’ ‘귀할 귀(貴)’ ‘살 매(買)’ ‘품팔이 임(賃)’ ‘바꿀 무(貿)’ ‘재물 자(資)’ 등 돈과 관련된 수많은 한자에는 ‘조개 패(貝)’ 변이 붙어 있다. 부(富)로서의 돈이라는 개념의 형성을 짐작게 한다.
 
  은(殷)보다 오랜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문명은 더 흥미롭다. 수메르는 처음에는 밀 다발을 화폐로 사용했다. 밀은 셰(she) 다발은 켈(kel), 밀 다발은 셰켈(shekel)이다. 셰켈은 그 무게의 단위이자 화폐 단위였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경에는 동전을 제조해 사용했다. 수메르인들은 이 동전도 셰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셰켈은 성경에도 나온다. 구약 창세기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를 위한 묘지를 살 때의 화폐 단위가 셰켈이었다.
 
  큰 거래에는 금과 은을 사용했다. 그 단위도 만들어졌다. 셰켈(shekel), 미나(mina), 달란트(talent) 등이다. 모두 성경에도 나온다. 60셰켈이 1미나, 60미나가 1달란트였다. 고로 3600셰켈이 1달란트다. 달란트는 큰 금액이다. 그런데 달란트는 재능·능력을 뜻하는 탤런트(talent)의 어원이다. 돈은 말하자면 능력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용어가 이어지고 있는 건 탤런트만이 아니다. 셰켈도 그렇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의 성전세 납부 은화의 단위가 셰켈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라엘의 화폐 단위도 셰켈이다. 수메르에서 시작된 셰켈은 최초이자 최장의 화폐 단위인 셈이다. 돈이 문명의 시작 때부터 오늘날까지 항상 함께해왔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예라 하겠다.
 
 
  수메르, 이자와 채권거래 존재
 
  그렇다면 이자는 어떠했을까? 수메르에선 이자가 인정됐다. 수메르의 한참 후대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은 새끼를 낳지 못한다”는 말로 이자를 부정했다. 하지만 수메르인은 달랐다. 수메르인은 이자를 마스라고 했는데 본래 뜻은 송아지였다. 수메르인은 돈의 출산 능력, 즉 이자를 당연시했다.
 
  수메르는 그냥 이자가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채권거래 시스템도 있었다. 수메르인은 채무를 설형(楔形)문자로 기록한 뒤 점토상자에 봉인하고 표면에 채무자의 인장을 찍었다. 채권자는 그 점토상자를 갖고 있다가 채무자가 빚을 다 갚으면 봉인을 뜯어냈다. 그런데 그 전에 채무자의 상환약속 문구와 인장이 새겨진 점토판을 제3자에게 판매하기도 했다. 마치 현대다.
 
  수메르문명의 경제시스템은 주화에만 의존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셰켈이라는 단위 자체였다. 그 단위를 기준으로 거래를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기록하고 약속하여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 같은 거래의 안정성을 국가가 뒷받침했다. 현대적이다. 이것은 후대의 바빌로니아로도 이어졌다. 함무라비 법전의 주된 내용은 거래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이자에 관한 규정도 명시돼 있었다.
 
 
  로마, 브루투스의 고리대금업
 
칼 폰 필로티의 〈카이사르의 살해〉(1865). 카이사르가 암살된 것은 그로 인해 고리대금업에 제약을 받게 된 원로원 기득권자들의 반발 때문일까?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는 금, 은, 구리로 금속화폐를 주조해 널리 사용했다. 그런데 이자와 관련해선 이전의 수메르보다 좀 못했다. 고대 로마는 한때 이자를 금지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자가 없어질 리가 없다. 결국 이자를 허용하면서도 이자율에 법적 제한을 가했다. 하지만 법대로 안 됐다. 카이사르 시대 즈음에는 고리대금업이 판치는 상황이 됐다. 원로원 의원도 상당수가 그랬다.
 
  그중에는 공화정을 수호한다며 나중에 카이사르 암살을 주동한 브루투스도 있었다. 로마사 연구가인 영국 역사가 캐스린 템페스트의 《브루투스: 고귀한 공모자》(2017, 예일대 출판부)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키프로스의 속주민(屬州民)을 상대로 연리(年利) 48%의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키케로가 강하게 비난할 정도였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잡자 이 같은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혁을 단행했다. 이자율을 제한하고 부채(負債)에 시달리던 서민의 빚을 대폭 탕감하기도 했다. 정치적 인기를 높이려는 것이기도 했다. 세율도 낮추었다. 속주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러자 오히려 세금이 더 많이 걷혔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조세회피를 할 필요가 줄어든 덕분이었다. 국립조폐창을 만들어 원로원이 갖고 있던 화폐주조권도 가져왔다. 브루투스 등의 카이사르 암살이 그에 대한 반발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다.
 
  카이사르 이후에도 로마는 오랜 역사를 이어갔다. 영광과 굴곡이 함께했다. 경제적으로도 그랬다. 화폐 정책의 실패로 때로 경제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든 로마의 화폐경제는 서로마제국 몰락(476) 이후의 중세 유럽보다는 현저히 앞서 있었다.
 
 
  중세 유럽, 화폐경제의 후퇴에서 상업혁명까지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는 건 더 이상 적절한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로마 몰락 이후 중세 초기 유럽은 한동안 경제적으로 확실히 후퇴해 있었다. 화폐경제가 후퇴했다. 프랑스의 중세 전문 역사가인 자크 르 고프는 《중세와 화폐》(2010)에서 “중세 초기에는 화폐, 다시 말해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상업과 교역이 쇠퇴하게 된 게 원인이었다.
 
  물론 계속 그대로는 아니었다. 봉건시대가 무르익어가면서 화폐경제는 다시 확산돼갔다. 11~13세기 무렵이다. 가장 큰 변화는 상업의 발전과 도시의 성장이었다. 당시는 십자군전쟁 때이기도 했다. 십자군 원정의 영향으로 물자의 이동도 활발해지면서 그 거점 역할의 도시는 더욱 성장했다.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동로마제국 및 이슬람권과의 교역이 본격화된 것도 중요했다. 해상교역의 요지 역할을 하게 된 베네치아의 성장은 특히 괄목했다. 농토를 갖지 못한 베네치아는 이후 상업에 특화된 도시국가로 급성장이 진행됐다.
 
  이를 일컬어 ‘13세기 상업혁명’이라 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로페즈는 《중세의 상업혁명》(1971)에서 “유럽 역사에 있어 중세의 중요한 기여는 상업경제의 창출”이라고 했다. 그는 이 시기의 경제적 팽창이 18~19세기 산업혁명에 비길 만큼 중요했다고 얘기했다.
 
  상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화폐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경제적 관념에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자에 대한 것이었다. 중세의 가톨릭은 이자를 죄악시하고 금지했다. 상업이 활발하지 않고 화폐 사용도 전면적이지 않았던 중세 초기에는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인과 수공업자가 중심이 된 도시가 성장하고 화폐 사용이 본격화하면서 더 이상 그럴 수만은 없게 되어갔다.
 
  수공업자는 수익이 완전히 실현되기 전에도 일꾼에게 품삯을 지불해야 했다. 상인은 판매이익 실현에 앞서 먼저 판매할 상품을 구매해야 했다. 그 간격을 메꾸기 위해 먼저 돈을 빌리고 나중에 수익이 실현되면서 빌린 돈을 갚았다. 이때 이자를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리대는 과도하게 높은 이자다. 하지만 중세 유럽에선 낮은 이자와 고리대의 구분이 없었다. 고리대금을 뜻하는 영어 단어 유주리(usury)는 우수라(usura)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준 것보다 더 많이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뜻은 그냥 이자 대부 정도다. 그러나 아무리 낮은 이자라도 받는 자체를 부당하게 간주했다. 그래서 그냥 고리대금의 함의를 갖게 됐다.
 
  교회는 이자가 붙는 대부는 모두 그렇게 고리대금이라고 하며 비난하는 태도를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가 천착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며 고리대금을 단죄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이자에 대한 고민
 
알베르투스 마구누스
  그러나 조심스럽게 변화가 나타났다. 중세 신학(神學)을 이끌었던 스콜라 철학자들은 일반적 통념으로는 이자 대부를 죄악시하기만 한 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막은 좀 달랐다. 그들은 탈레반이 아니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교리상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현실에 대해 고민했다.
 
  아퀴나스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구누스부터가 그랬다. 그도 당연히 원칙적으로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도시를 찬양하고 상인과 부자의 역할을 강조했다. 탐욕을 죄악이라 했지만 그것을 첫 번째가 아닌 세 번째 자리에 두었다.
 
  알베르투스의 또 다른 제자 질베르는 《고리대금론》에서 “의구심과 위험이 고리대금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할 때 의구심과 위험은 정의의 형평성과 대등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했다. 고리대금을 비난한 아퀴나스도 결국 그랬다. 그는 대금업이 적법하지는 않으나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스콜라 철학은 이와 관련해 논리를 조심스럽게 다듬어갔다. 첫째, 빌려준 돈은 더 유리한 투자를 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었던 합법적인 이득을 포기(lucrum cessans, 중단된 이익, 즉 기회비용)한 의미가 있다. 둘째, 빌려준 돈은 과거에 힘들게 번 결과물이므로 그때의 노동에 대한 보수(stipendium laboris)가 주어져야 한다. 셋째, 위험을 안고 불확실성을 헤쳐나가는 복잡한 계산을 하는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든 일(ratio incertitudinis, 불확실성에 대한 계산)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중세 가톨릭교회와 스콜라 철학이 공식적으로 이자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거기에는 새로운 단서가 붙었다. 당연한 ‘이익’ 추구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부당하지 않은 ‘보상’으로서는 인정받는 논리였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누가복음 10장 7절)는 원칙이 대부업자에게도 적용되게 된 것이다.
 
 
  결국 이자를 인정하게 되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묘사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는 일종의 습관적 설정이다. 개개인의 소소한 대부거래를 유대인 대부업자가 많이 담당한 것은 사실이다. 이자의 죄악시가 완강했던 만큼 그런 일 자체가 기피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규모 광역 상업과 관련된 금융거래가 유대인의 손에만 맡겨져 있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큰 이익을 수반하는 그런 거래를 기피 대상인 유대인에게 맡길 까닭이 없었다.
 
  중세 상업혁명 이래 유럽의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당연히 유대인이 아니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자로 시작해 부를 축적하고 권력까지 장악하여 오랫동안 유럽 전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근대적 은행의 기초도 닦았다. 피렌체 내의 환전 업무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유럽 곳곳에 지점을 열었다. 메디치 가문도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러다 종교개혁이 왔다. 루터도 ‘고리대금업’에 대해선 반대했다. 하지만 일정한 이자를 받는 것은 인정했다. 칼뱅은 더 나아가 이자의 정당성을 교리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칼뱅은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누가복음 6장 36절)는 예수의 말이 이자의 전적인 금지가 아니라고 해석했다. 모든 이자를 반대한다면 상거래 활동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칼뱅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자를 부과해서는 안 되지만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생산적인 대부에 대한 이자는 정당하다고 했다.
 
  영국 경제사학자 리처드 헨리 토니는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1926)에서 “칼뱅은 영원한 것은 이자를 받지 않는다는 규칙이 아니라 공정과 정의라고 해석했다”고 말했다. 칼뱅은 공정과 정의의 기초를 예수가 언명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는 황금률에서 찾았다. 칼뱅은 이자에 대해서도 그 황금률이 적용돼야 한다고 했다.
 
 
  중국, 전당업에서 지폐의 탄생까지
 
  그렇다면 중국문명권은 어떠했을까? 은나라의 뒤를 이은 주(周)나라는 농업 중심 체제를 확고히 했다. 정전제(井田制)다. 하지만 춘추시대(春秋時代·기원전 770~403년) 각지의 제후국이 성장하고 경쟁과 쟁패도 거듭하는 가운데 상업도 크게 성장했다. 각국에서 화폐를 주조하고 유통했다. 그런 가운데 국가경영과 경제에 대한 인식도 성장했다.
 
  “무릇 화폐가치가 높아지면 물가는 떨어지고,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물가는 높아지며, 양식 가격이 올라가면 황금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군주께서는 양식·화폐·황금을 저울질하는 권력을 통제해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기원전 7세기 제나라 관중(管仲·기원전 725?~645년)이 쓴 《관자(管子)》 제76편의 구절이다. 화폐경제에 대한 인식에선 근대적 면모가 보인다. 전국시대(戰國時代·기원전 403~221년)와 진(秦)과 한(漢)을 거치는 동안 천하쟁패와 정치적 굴곡이 끊이지 않았지만 화폐경제는 계속 이어지고 발전해갔다. 중국 나름의 대금업도 등장했다. 전당업(典當業)이라 했다.
 

  당(唐)나라(618~907년) 시대는 또 한 번 큰 번영을 맞았다. 행(行)이라는 상인조합도 생겼다. 원거리 교역에는 비전(飛錢)이라는 어음까지 사용됐다.
 
  송(宋)나라(960~1279년) 시대가 왔다. 송은 중국의 역사상 가장 허약한 왕조였다. 그러나 송은 다른 한편으로는 당을 능가하는 대단한 번영을 구가했다.
 
  송도 비전을 사용했다. 그러다 드디어 지폐가 탄생했다. 세계 최초였다. 10세기 말 사천(四川) 상인들이 사용한 ‘교자(交子)’였다. 교자 사용이 활발해지자 송은 직접 지폐를 발행했다. 그러자 금나라도 송을 본받아 지폐를 사용했다. 교초(交鈔)라 했다.
 
  송에서 탄생한 지폐는 금(金)을 거쳐 몽골제국의 원(元)으로도 이어졌다. 몽골은 우구데이 칸 때 금나라를 정복한 뒤 금의 화폐제도를 이어받아 1236년에 교초를 발행하였다. 이어 남송을 멸망시키고 원 왕조를 시작한 쿠빌라이는 지폐 사용을 급격히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원나라 교초는 동판으로 인쇄해 황제의 옥새를 날인해 발행되었다. 교초는 고려부터 시리아까지 몽골 영향권에 있는 모든 지역에서 통용됐다. 송 때 지폐를 사용하긴 했어도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지폐가 통용된 것은 원 때가 처음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지폐 통화 체제였다.
 
  당시 원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지폐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동방견문록》에 이에 대한 설명을 남겼다. 당시 유럽인들로선 종이가 돈 구실을 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유럽의 지폐 발행은 1661년 스웨덴이 최초였다. 1694년에는 영국이 잉글랜드 은행권을 설립해 근대적 은행권을 발행했다.
 
 
  윤리와 금리
 
  그러나 화폐경제의 또 다른 중요 측면인 금리에서는 좀 달랐다. 중국의 왕조들은 오래전부터 반복해서 이자제한법을 시행했다. 원(元)·명(明) 때는 연(年) 36%, 청(淸)대에 와서는 24%로 제한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중국의 영향 하에 있던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유럽세계는 좀 달랐다. 중세 이래 유럽의 대금업자는 한편으로는 이자를 인정받길 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부담을 늘 갖고 있었다. 종교적 긴장은 얼핏 보면 경제와 무관한 듯 여겨진다. 그러나 도덕적 압박에 따른 금리이득에 대한 부담감은 경제적으로 긍정적 역할을 한다.
 
  금리가 없으면 금융은 작동을 하지 않는다. 이자를 부정하는 이슬람권의 수쿠크(Sukuk)라는 채권제도도 따지자면 다른 방식의 복잡하게 구사되는 금리제도다. 그러나 금리 이득에 탐닉하게 하는 고금리는 생산적 투자를 외면하게 만든다. 새로운 부의 창출을 추구하지 않는 지대추구(地代追求·rent-seeking) 양상이다.
 
  하지만 유럽세계에선 대금업자들은 죄를 두려워하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교리와 현실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을 했다. 종교개혁가들은 그 긴장을 종교적으로 매듭지었다. ‘기독교적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자제한법이 효력을 발휘했다. 영국은 산업혁명기 전 시기에 걸쳐 최고 이율이 연 5%를 유지하였다. 돈이 생산적 투자로 향하게 했다. 산업혁명기 자본주의는 그러면서 성장했다.
 
 
  돈은 문명적 성취다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는 결코 아름답지는 않다. 수많은 굴곡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결국에는 많은 사람에게 이익과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없었던 적은 없다. 이자에 시달린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며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사는 고리대금업의 횡포의 역사가 아니다. 그 반대다. 이자는 역사적으로 낮아져 왔다. 그리고 금리는 긴 시야로 보면 결국에는 건강한 역할을 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는 《러시!》(2011)에서 “금리가 인간을 화합하게 한다”고 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은행을 매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신용(credit)을 전제로 돈을 빌려주고 받는다. 신용에는 믿음(trust)의 의미도 있다. 부크홀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용은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도 믿음을 형성시키고 화합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게 나쁜 것일까?
 
  밝은 대낮에도 그늘이 있다. 그늘이 사라져야 할까? 밤이 오면 그늘은 사라진다. 그런데 사라지는 건 그늘만이 아니다. 양지(陽地)도 사라진다. 해가 비추는 낮에는 그림자가 드리운 그늘에서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 하지만 어둠이 깔리면 불을 밝혀도 보일 곳만 보인다. 그래서 어두운 밤은 ‘도둑놈’의 세계가 된다. 경제의 이치, 특히 금융도 마찬가지다.
 
  문명(文明)은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의 번역어다. 일본의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1867년 《서양사정 외편(西洋事情 外篇)》에서 ‘civilization’을 문명(文明)으로 번역했다. ‘civilization’은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civitas’에서 비롯된 말이다. 문명은 그 본뜻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많은 걸 헤아리게 하는 매우 좋은 번역이다.
 
  문명은 밝을 명(明)자를 갖고 있다. ‘문명의 빛’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문명세계는 밝은 세계다. 그런데 낮이 그렇듯 문명의 밝음도 항상 그늘을 동반한다. 갈등이 있고 때로는 고통의 신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늘을 없애기 위해 밝음 자체를 없애자는 건 어리석다. 더욱이 돈의 논리는 결코 그늘도 아니다. 오히려 문명적 밝음을 구성하는 핵심의 하나다. 돈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것은 힘에 의한 강탈의 정지를 함축한다. 그것은 문명적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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