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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地의 戰士들

엄상익 변호사가 경험한 정보기관 〈11〉 안기부 감사관 출신의 예언

“특활비 언젠가는 뇌관 될 것”

글 :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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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부 지부 요원들의 불만 “범죄인 된 것 같은 느낌 받는다”
⊙ 특활비에 대한 우려, 이병호 국정원장 구속됨으로써 현실로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 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2017년 11월 10일 국정원 특활비 사건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는 이병호 전 국정원장. 그는 결국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진=조선DB
  1989년 국가안전기획부 청주 지부 요원들이 속리산 관광호텔에 모였다. 나는 그곳에서 그들이 하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부 조직의 책임자는 엄익준씨였다. 그는 정보기관에서 오랫동안 일해오면서 남북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해 일가견을 가진 전문가였다. 엄씨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국정원 2차장으로 재임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다.
 
  엄익준씨가 본부에서 당직을 설 때 야식을 함께 먹으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 같았다. 엄씨가 입을 열었다.
 

  “조직이 건전하게 살아나기 위해서는 정치공작을 하거나 정부기관을 뒤에서 조정하는 월권행위를 우리 스스로 없애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요원들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태까지는 친위대 같은 기관원이 되어 권위적으로 정부조직이나 사람들을 눌렀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은밀히 정보를 수집해야 제대로 된 정보맨이고 그렇게 일해야 조직이 제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저의 생각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자유롭게 발언해주기 바랍니다.”
 
  그가 조직원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의 옆에 있던 정보과장이 말했다.
 
  “우리 조직이 건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부당한 명령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지금 위에서 하달된 지시가 뭔지 아십니까? 노태우 대통령 취임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절이나 불교단체에서 기념 법회(法會)나 기도회를 거국적으로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관장들이나 경찰서장 그리고 저희 조직이 지역의 유지들이나 종교인들을 동원해서 법회를 열고 있어요. 그런 것들이 자발적으로 되어야 하지 이렇게 정치적 성격을 띠고 반(反)강제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호국(護國) 기도회 예산을 고급 공무원들이 횡령하기도 하고 일선의 공무원들은 불만이 가득 차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일들을 합니다. 정보조직이나 일반 공무원들이나 고유의 업무가 있는데 이게 뭡니까?”
 
 
  “왜 도둑놈처럼 정보 훔쳐야 하나”
 
  그가 잠시 말을 끊으면서 뭔가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나는 메모를 하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정보요원들 중에는 영양가 있는 정보는 자기가 가지고 상부에는 마지못해 목표량만 채우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그 요원은 독자적인 사설(私設) 정보기관 노릇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 정보관들이 지역의 토착 세력과 유착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조직 자체로 그런 걸 막아야 합니다. 그런 현상은 지방조직뿐 아니라 서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정보관들이 특정 정치인과 결탁해서 그들의 심복이 되고 정치화되는 현상이 벌어진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 겁니다.”
 
  그 회의에는 조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요원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대학 졸업 후 저는 공채를 통과하고 험한 훈련을 받고 정보요원이 됐습니다. 그런데 1년쯤 근무하면서 느껴지는 건 제가 마치 범죄인이라도 된 것 같다는 겁니다. 어제도 어떤 행사장에 갔는데 그곳에 온 《한겨레》 신문 기자를 보고 숨었어요. 상부에서 《한겨레》 기자를 피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죠. 《한겨레》 신문에 그곳에 정보요원이 있었다고 신문에 나면 정보기관이 사찰(査察)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숨어 있으라는 거였죠.
 
  생각해보니까 참 한심했어요.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왜 도둑놈처럼 각 기관에 스며들어 정보를 훔쳐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럴 거면 정보기관 신분증을 주지 말고 차라리 위장 취업하게 하고 거기서 정보를 뽑아내는 게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비밀정보요원도 아니고 관료도 아니고 우리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어요.
 
  또 정보원이라는 게 사람을 만나는 직업입니다. 차도 마시고 밥도 같이 먹으면서 대화 중에 정보를 얻는 건데 정보활동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어떤 자리에서 저의 신분이 알려진 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저를 뱀을 보듯 하더군요. 정말 이게 뭔가 하고 회의가 들었습니다. 저는 미국의 CIA같이 정말 가족이나 친구에게 자랑할 수 있는 정보기관원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직 신참 요원으로서 하루 생활이 어때요?”
 
  내가 좀 더 상세하게 알고 싶어서 물었다.
 
 
  “따뜻한 방에서 자는 수배자가 부럽더라”
 
  “사무실에서는 아침 회의만 끝나면 무조건 내쫓아요. 그렇다고 내가 담당하는 기관으로 가면 누가 진짜 좋아하겠어요? 모두 경계하고 조심하죠. 처음에는 고등학교 동창이나 친구들 직장으로 찾아갔어요. 반가워하는 것도 한 번이지 벌써 두 번째만 되면 표정들이 별로 안 좋아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싸구려 대중탕에 가서 시간을 죽이는 경우가 많아요. 거기서 한참을 자기도 하고 그러죠. 그것도 몇 달 하면 진력이 나요.
 
  그다음은 공원 벤치에 앉아 가만히 있을 때가 있어요. 아니면 야바위하는 노름꾼들을 구경하거나 하죠. 노인들이 그런 나를 보면서 젊은 놈이 참 한심하다는 표정이에요. 완전히 실업자 취급을 당하는 거죠. 그렇다고 뭐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어요. 우리는 항상 자체 감찰이 있잖아요? 괜히 약점을 잡혀 그나마 승진할 때 지장을 받을 필요는 없죠.”
 
  그곳에 참석했던 또 다른 수사과 직원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운동권 수배자가 지역에 왔다고 하면 감시하는 일을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저는 악질 기관원이죠. 그렇지만 우리가 겪는 고생은 나름대로 말도 못 합니다. 한번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수배 중인 인물이 설을 맞아 집으로 돌아왔다는 첩보가 들어왔어요. 영하의 추운 밤이었어요. 수배자의 집 지붕에 올라가 감시를 했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복해 있으려니까 온몸이 얼어붙는 겁니다. 손발이 마비되고 오줌이 마려워도 갈 수가 없고 그 고통은 말도 못 해요. 따뜻한 방 안에서 자는 그 수배자가 부럽더라고요. 그런 수배자를 검거하면 조사실에서 오랫동안 같이 먹고 자고 하죠. 그들보다 더한 고통을 우리가 받는 거란 말입니다.”
 
 
  ‘절대적인 聖域’ 특수활동비
 
  이어 부산 지부를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의 옆자리에는 오랫동안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한 요원이 앉아 있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예산감사를 오랫동안 해왔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정보조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관 안에 있는 돈에 유의해야 합니다. 정부 예산 중 수천억을 정보기관에서 관리하면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 돈을 여야 정치인에게 풀기도 하고 청와대도 뒷받침하고 있죠. 정보조직이 쓰는 거액의 돈이 힘의 원천(源泉)입니다. 그런데 정보나 수사 활동, 대북 사업을 위해 쓰는 돈은 저 같은 감사관들이 철저히 감사를 합니다. 그런데 감사관인 우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절대적인 성역(聖域)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내가 물었다.
 
  “정보기관 내부에는 대통령과 안전기획부장만 쓸 수 있는 기밀예산인 특수활동비가 따로 책정되어 있어요. 그 돈은 대통령과 정보기관 책임자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입니다.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영수증도 첨부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런 돈들이 관행으로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게 언젠가는 정치권의 뇌관이 될 겁니다.”
 

  부산의 터미널 앞에서 지부 요원이 차를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로얄살롱에 탔다. 기사 옆 좌석에 앉은 요원이 무전기로 잠시 통화를 하더니 우리를 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정보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전남도지사 관사(館舍)가 극렬 대학생들의 화염병 공격을 받고 관사와 승용차가 전소(全燒)했다고 합니다. 며칠 전 농민 수만명이 화염병과 죽창을 들고 여의도에서 시위를 했는데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뒷좌석의 내 옆에 있던 지부의 요원이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연일 국민들의 여론만 살피면서 끌려다니는 것 같습니다. 벌써 ‘물 정부’라는 말이 부산까지 돌고 있습니다. 지금 재야세력이 전민련을 구성해 조직적으로 대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그냥 놔두고 있으니 정국이 어디로 갈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대통령이 정보기관을 어떻게 사용할지 의문이었다. 권력자의 눈과 귀가 될 뿐 아니라 돈통이 되기도 하고 손과 발, 때로는 몽둥이 역할까지 해주는 그 기관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궁금했던 것이다. 남산의 지하실을 없애고 그곳에 숨겨놓은 돈을 쓰지 않는 대통령은 훌륭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순수 정보맨’ 이병호 원장이 뒤집어쓴 특활비 오욕
 
  그로부터 32년 후인 2021년 1월 14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312호 법정.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장 세 명이 판결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정원장의 특수활동비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원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최종 형(刑)의 선고를 하는 법정이었다. 촛불정권의 대법원은 그 돈의 성격을 대통령이 받은 뇌물로 보았으며, 그 돈의 일부로 청와대에서 여론 조사한 것을 국정원의 정치 관여로 보았다. 또한 국정원장들을 회계 관계 공무원으로 보아 횡령으로 인한 국고 손실죄로 법을 적용했다. 그 처벌의 실질적 종착지는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재판장이 간단하게 판결 이유를 말했다.
 
  “유죄무죄는 이미 대법원에서 결정이 났습니다. 형량(刑量)만 남은 셈입니다. 전부터 관행에 의해 정보기관의 돈이 청와대로 갔습니다. 국정원장들이 대통령의 요구에 의해 소극적으로 돈을 보낸 사실이 인정됩니다. 그런 국정원장들에게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유용할 목적도 없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재판부로서는 국가예산을 은밀하게 전한 것은 엄벌에 처해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재판장은 그렇게 이유를 설명하고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장들에게 실형(實刑)을 선고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정권의 국정원장들이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적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순간이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순수한 정보원 출신이었다. 그는 정보기관의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정치 관여를 철저히 금지시킨 사람이었다. 특수활동비 역시 철저히 관리하던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가 중앙정보부 역사의 모든 오욕(汚辱)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분노한 이병호 국정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명령으로 국정원 예산이 청와대에 전용됐습니다. 그게 범죄입니까? 그 돈이 뇌물이라고요? 국정원장인 내가 회계직원이라고요? 이건 사법부가 정치에 관여하는 정치재판입니다. 법치주의 역사의 오점이 될 겁니다.”
 
  이병호 원장은 순수한 정보맨이었다. 순수하게 본인의 업무에만 열과 성을 다한 그가 죄인으로 몰린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치 혐오한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왼쪽). 1966년 10월 24일 필리핀 방문 당시의 사진이다. 사진=조선DB
  다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청주와 부산을 둘러본 뒤 일선 요원의 생활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자부심을 가진 프로 정보관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정치 관여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왜 그게 되지 않았을까.
 
  그건 정보부 탄생의 배경에 이미 원죄(原罪)로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5·16혁명 직후 군정의 주체들은 혁명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할 조직이 필요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직접 강력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지고 근거인 중앙정보부법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통과됐다. 법이 규정한 정보부의 권한은 막강했다. 정보부장은 정보와 수사에 관하여 경찰과 검찰, 군(軍) 정보수사기관을 지휘·감독한다고 규정했다. 정보부는 전 국가기관으로부터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보부의 수사는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했다. 무소불위의 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정보부는 탄생부터 정치기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일본 장교의 2·26혁명을 참고하여 5·16혁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혁명을 일으켰던 일본군 장교들은 다이쇼(大正) 시대 국회에서의 정쟁과 분열을 낭비와 무질서로 보았다. 일사불란한 명령 계통에 젖어온 그들은 국회의 지지부진한 논쟁을 답답하게 여겼다. 일본 군국주의 탄생의 배경에는 장교들의 그런 의식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를 혐오했다. 그는 정치인이란 감투나 이익을 좇는 ‘위선의 화신’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한번은 국회에 출석한 총리와 장관들이 야당 의원으로부터 험한 공격을 당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당 의원이 총리를 이놈 저놈 하면서 다그치는 건 양반이 종놈에게 하는 식인데 그건 자유당 때부터 내려오는 못된 습성이야. 야당은 자유와 인권을 얘기하면서 장관이나 총리에겐 그게 없다는 말인가? 어떻게 국회 버릇을 고치지? 내가 보기에 정치하는 놈들은 모두 사기꾼 같아.”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란 시끄럽기만 한 아수라판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개적인 민주정치에 익숙지 못했고 반대의 의미와 존재를 이해하는 데 익숙지 못한 것 같았다.
 
 
  정보부의 무리한 정치 개입
 
1969년 6월 21일 김영삼 신민당 의원은 국회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그 배후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했다. 사진=김영삼민주센터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의 상당 부분을 정보부를 통해서 했다. 초대 정보부장 김종필은 공화당을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정보부장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게 하지 않았다. 1963년 2월 20일 김종필이 물러났다. 1963년 여름경 정보부장으로 김형욱이 임명됐다. 1964년 8월 김형욱 정보부장은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김형욱 정보부는 대통령의 친위대 노릇을 하면서 거칠게 행동했다. 김형욱 정보부장은 3선 개헌의 선봉이 되어 박 대통령 앞에 놓인 정치적 장애물을 제거해나갔다. 야당 의원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박한상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한 발언의 요지다.
 
  “중앙정보부가 공포를 조성하고 선량한 국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런 기관은 폐지해야 합니다.”
 
  그 며칠 후 박한상 의원이 종로예식장 부근에서 괴한 두 명에게 뭇매를 맞았다. 여론이 나빠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정보부의 임무와 기능은 대폭 개편될 것”이라고 공약했다. 중앙정보부는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1964년 4월 29일 정보부의 정치 불간섭이라는 성명과 함께 지방조직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1965년 7월 31일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심사특별위원회가 열리고 있을 때였다. 김대중 의원이 이렇게 발언했다.
 
  “정보기관이 정치에 개입하고 정부 고위 당국자, 정치인 주위에 4중 5중 정보망을 치고 전화 도청하고 미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지금 타파하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는 중앙정보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는 말도 할 수 없고 사람 노릇도 할 수 없을 겁니다.”
 
  1969년 6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김형욱 정보부장의 개헌주도 행위를 이렇게 비난했다.
 
  “정보부가 개헌 음모에 가장 깊이 관여했다.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충고한다. 민족의 영원한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런 무리한 짓을 하지 말라.”
 
  1969년 6월 19일 밤, 김영삼 의원을 태운 승용차가 상도동 자택 입구의 골목에 들어설 때였다. 세 명의 남자가 차를 막아섰다. 그중 2명이 김영삼 의원이 앉은 쪽 문을 열려고 했다. 문이 열리지 않자 초산병을 승용차에 내던졌다. 다음 날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김영삼 의원은 테러 주범으로 김형욱을 지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독재국가를 끌고 나가는 원부(怨部)가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 김형욱은 민족반역자다. 이번 일은 나를 죽이기 위한 정보부의 음모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가 인심을 잃은 걸 알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용한 성격의 김계원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다. 1969년 11월 8일 신민당의 김영삼 원내총무가 40대 기수론을 외쳤다. 1971년 그는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섰다. 김대중, 이철승이 잇달아 대통령 후보 경쟁을 선언함으로써 정가(政街)에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지시했다.
 
  “김영삼이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그런 애송이들하고 싸울 수 있겠나.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그런 엉뚱한 사태는 막아야 해.”
 
 
  ‘陰地의 정당’ 중앙정보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사진=조선DB
  1970년 12월 21일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이후락은 내무장관, 검찰총장, 대통령비서실장, 공화당 의장, 공화당 재정위원장, 공화당 사무총장을 멤버로 하는 회의체를 만들었다. 회의체에서는 경찰, 검찰, 지방공무원 등 선거에 유용한 행정 인력의 효율적 관리와 배분을 총지휘했다. 그 외 선거자금의 모금과 배분도 결정했다. 중앙정보부는 대통령의 권력을 직접 행사하고 돈과 힘으로 여야 정치인을 주무르는 ‘음지(陰地)의 정당’이었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은 수락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의 당선은 정보정치의 마수(魔手)로부터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중앙정보부는 언론을 간섭하고 국회의원들을 지하실에 끌고 가 두들겨 패고 잡으라는 공산당은 잡지 않고 야당 잡는 데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권을 잡는다면 중정의 수사 기능을 분리시켜 소속을 법무부로 환원하고 부장을 국무위원으로 만들어 국회에서 그 비위(非違)를 따지고 불신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1971년 4월 8일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독재의 총본산(總本山)은 중앙정보부입니다. 요즈음 경제인 수백 명을 불러 김대중에게 돈 주지 마라, 만약 돈 주면 사업을 망쳐놓겠다고 협박하고 각서까지 받고 있습니다.”
 
  정보조직이 한층 강하게 국민을 통제하게 된 것은 남북대화와 유신을 전후(前後)해서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도 유신을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탄압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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