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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2

알렉산드로스(하)

리더를 망치는 病, ‘자만과 과욕’

글 : 엄광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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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 페르시아 정복 후 동양적 專制군주로 변모… 근위대장을 비롯해 戰功 세운 측근 武將들 숙청, 살해
⊙ ‘세계의 끝까지’를 외치며 인도로 진군했으나 희생만 치르고 回軍한 후 病死
⊙ 록펠러, 석유산업 독식하며 성공했으나 시한부 인생 선고… 가난한 소녀 도와주면서 보람 얻은 후 회복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알렉산드로스(오른쪽)는 인도에서 포로스왕의 항복을 받았지만, 휘하 장병들의 반발로 회군해야 했다.
  페르시아를 점령한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점차 동양적 전제(專制)군주 통치에 맛을 들였다. 다리우스 3세를 죽인 박트리아 기병대장 베소스가 스스로 페르시아 왕을 칭하자, 알렉산드로스는 휘하 장수 프톨레마이오스를 보내 그를 추격도록 하였다. 그러자 베소스는 박트리아에서 피신해 옥수스강을 건너 소그디아나로 도망쳤으나 결국 추격하던 마케도니아 군대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다리우스 3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준 알렉산드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생포해온 베소스를 페르시아의 관례에 따라 극형(極刑)에 처했다. 페르시아식 극형은 밧줄을 걸어 휜 네 개의 나무에 죄인의 팔다리를 묶은 후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을 끊어 사지(四肢)가 찢겨 사방으로 튀게 하는 형벌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중죄인에게 행했던 거열형(車裂刑)과 흡사한 방법이었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의 시신이 발견된 후 애도하는 알렉산드로스. 이후 그는 전제군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래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생포할 경우 볼모로 있는 그의 가족과 함께 편안한 여생을 보내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리우스 3세가 휘하 장수에게 배신당하여 끝내 죽음을 맞게 되자, 그의 원수를 갚아준다는 명목으로 베소스를 극형에 처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알렉산드로스는 오만한 전제군주로 변하기 시작했다. 투지와 기발한 전략으로 연전연승하여 페르시아를 정복했을 때, 그의 나이는 패기만만한 27세였다. 그는 페르시아 귀족들을 등용하여 통치 기반을 확보하면서 동방의 전제군주제에 매료되었다. 항복한 귀족들이 동방의 왕을 섬기는 예법으로 알렉산드로스를 대하자, 스스로 페르시아의 전통의상을 입는 등 동방의 풍습을 따랐다. 그리스 풍습에 젖은 마케도니아군의 장군들에게도 페르시아의 예법에 따르기를 강요하였다. 부복(俯伏), 즉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동양의 전제군주에게만 있는 풍습이었다. 따라서 그리스 예법에 젖어 있던 마케도니아군의 장군들로서는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兎死狗烹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군의 휘하 장군들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서는 것을 참지 못했다. 더구나 자신을 배반하고 역모를 꾸미는 일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처단하였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군의 2인자라 할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운 필로타스와 파르메니온을 제거하였다. 마케도니아군의 기마군단 총사령관으로 있던 필로타스는 ‘망치’ 작전으로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파르메니온은 보병부대를 이끌고 ‘모루’ 작전으로 적을 분쇄하였다. 즉 마케도니아군의 ‘망치와 모루’ 작전이었다. 필로타스는 파르메니온의 아들로 이들 부자(父子)가 모두 이 작전에 선봉을 서서 마케도니아군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페르시아 공략 후 필로타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전제군주적인 행위에 대해 비판을 하자, 마케도니아군 사이에서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이 났다. 결국 필로타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의 부관인 클레안드로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려 필로타스의 아버지인 파르메니온까지 암살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328년에는 자신의 친구이자 측근의 장군인 클레이토스도 죽였다. 마케도니아 귀족 도로피데스의 아들인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유모인 라니케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부왕(父王)인 필리포스를 섬긴 클레이토스는 페르시아 원정 때는 알렉산드로스의 근위대장을 맡고 있었다. 첫 전투인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클레이토스는 위험에 처해 있던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점령 후 클레이토스의 전공을 크게 치하하며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의 부왕(副王)에 임명했으며, 그가 부임지로 떠나기 전에 근사하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부왕 필리포스보다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필리포스 때부터 왕의 측근으로 있던 클레이토스는 부왕의 편을 들었다. 곁에서 두 왕을 겪어본 그로서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잘난 체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벌컥 성을 내며 감히 자신의 앞에서 반역적인 언사를 하였다며 클레이토스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클레이토스도 지지 않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귀족을 고위직에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페르시아 복장을 하고, 마케도니아 장군들로 하여금 노예처럼 왕에게 머리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도록 했다는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이것은 마케도니아 장군들 누구도 감히 두려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뿐,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가슴속에 품고 있던 가장 큰 불만이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감히 근위대장이 왕에게 항변한다는 이유로 술김에 옆에 있던 근위병의 창을 빼앗아 던졌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이면 클레이토스의 심장에 정확하게 꽂혔다. 클레이토스는 그 자리에서 절명(絶命)하였다. 그 바람에 술이 확 깬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순간적인 실수를 깨닫고 클레이토스의 가슴에 꽂혔던 창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고 했다. 그러자 부하들이 창을 빼앗았고, 알렉산드로스는 절망한 나머지 땅을 치며 울었다. 그는 사흘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자신이 실수로 클레이토스를 죽인 데 대해 통곡을 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중국 한나라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고 나서 한신 등 전공이 뛰어난 명장들을 하나하나 제거한, 이른바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일찍이 알렉산드로스가 실행했던 것이다.
 
 
  무리한 인도 원정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원정을 단행한 것은 실수로 클레이토스를 죽인 사건이 난 지 1년 후인 기원전 327년이었다. 그 직전에 페르시아의 호족(豪族) 출신인 스피타메네스와 옥시아르테스가 반기를 들었는데, 이들은 곧 마케도니아 원정군에게 제압되었다. 이때 스피타메네스는 암살당했고, 옥시아르테스는 딸 록사나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보다 15세가량 연하였던 록사나에게 반해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며, 반기를 들었던 옥시아르테스를 박트리아 동부 지역을 담당하는 총독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록사나는 임신을 해서 나중에 아들을 낳았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생전에 자신의 핏줄을 안아보지 못했다.
 
  기원전 327년 초여름,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원정에 나섰다. 원정군 규모는 정규군 약 4만명을 포함해 보급부대까지 12만여 병력이었다. 이처럼 보급부대가 더 많았던 것은 군사들이 먹을 군량과 마초 등을 운반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보급부대는 페르시아와 그 주변 속국들에서 모집한 인력이었다. 해발고도가 7000m가 넘는 높은 봉우리들이 즐비한 산악지형 곳곳에는 여러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족장들은 마케도니아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모두 대항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했고, 스스로 어깨에 상처까지 입어가며 산악의 부족들을 격추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의 왕을 자처하며 페르시아 복장을 하고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달린 투구를 썼다. 또한 자신이 거처하는 천막 안에 높다랗게 옥좌를 마련해놓고 신하들의 부복을 강요했다. 이는 힌두쿠시산맥의 여러 부족과 그 족장들에게 아시아를 정복한 전제군주로서의 위용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한 과대 전시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휘하 장군들은 그것을 군주의 오만함으로 보았다.
 
  마케도니아 원정군이 인더스강을 건넌 것은 기원전 326년 봄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원정군을 이끌고 탁실라 왕국을 향해 진군했다. 탁실라 왕국을 지배하고 있던 암비 왕은 원정군이 들이닥치자 잔뜩 겁을 집어먹고 황소 3000두와 1만 마리의 양, 30마리의 코끼리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치며 항복했다.
 
  원정군은 암비 왕이 이끄는 5000명의 군사의 안내를 받아 마침내 히다스페스강에 이르렀다. 강폭이 800m나 되는 큰 강이 가로막고 있어 대군이 건너기 쉽지 않았다. 고심 끝에 정찰대를 보내 상류의 강심이 낮은 지역으로 도강을 한 알렉산드로스는, 마침내 히다스페스강 동쪽 벌판에서 인도의 포로스 군대와 만났다. 포로스 군대는 보병 3만명에 기병 4000명, 전차 300대, 코끼리 200두의 군세로 마케도니아 원정군과 맞섰다.
 
  포로스 군대의 전면에는 전투용 코끼리 200두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군세가 자못 위협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코끼리 군단을 만나 전투를 벌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일순간 당황했다. 전투 경험이 많은 원정군 기병대 장군들도 육중한 몸의 코끼리 군단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중기병 대장 코에누스에게 포로스 군대의 오른쪽을 공격하라 명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왼쪽을 공격하여 정면으로 질주해오는 코끼리 군단을 피했다. 앞으로 진격해오던 200여 마리의 코끼리 부대가 적들을 향해 방향 전환을 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속전속결의 전투에 익숙한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코끼리 군단을 양 측면에서 공격해 많은 상해를 입혔다. 그러자 주춤거리던 코끼리 군단이 뒤로 후퇴하면서 오히려 포로스 보병들을 짓밟아 죽는 자가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전투는 장장 일곱 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마케도니아 원정군은 마침내 포로스 대군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 포로스 왕은 포로가 되어 알렉산드로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회군과 허망한 최후
 
알렉산드로스는 휘하 병사가 구해온 물 마시기를 거부하고,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는 리더십을 실천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원정군을 이끌고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격하려고 했으나, 마케도니아 군사들은 8년간의 원정에 지쳐 왕명(王命)을 거부했다. 코끼리 군단과 싸운 히다스페스 전투는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알렉산드로스 원정군으로서는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원정군을 이끌던 크라테로스 장군도 더 이상의 진군은 어렵다는 의견을 알렉산드로스에게 내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알렉산드로스와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장군의 말이므로 무조건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휘하 장군 중에서 신뢰가 가장 두터웠던 코이노스 장군까지 더 이상의 진군은 무리라고 주장하자, 알렉산드로스도 세계의 끝까지 가보겠다던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52년, 알렉산드로스는 히파시스 강변에 올림포스의 12신(神)에 바치는 12개의 제단을 세워 자신의 원정을 기념하였다. 그런 연후 원정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인더스강을 따라 남하해 아라비아해를 통해 귀로(歸路)에 오르도록 했고, 다른 한 부대는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지휘하여 게드로시아 사막을 건너 철군하기로 했다. 철군 도중 라비 강변에서 10만명의 인도 연합군과 혈전(血戰)을 벌여 알렉산드로스는 중상을 입기까지 했다.
 
  사막의 기후는 모든 군사에게 갈증으로 고통을 받게 했다. 한 병사가 어렵게 구한 물을 알렉산드로스에게 갖다 바쳤을 때, 그는 자신의 군대는 지치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는다며 그 물을 모래땅에 쏟아버렸다.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군사들 앞에서 자기 혼자 물을 마실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목이 타는 군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사막을 지나다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인 와디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가 갑자기 홍수가 밀려와 많은 군사가 희생되기도 했다. 그와 동행한 2만명의 군사 중 절반 이상을 사막에서 잃었다.
 
  기원전 323년 초, 알렉산드로스는 가까스로 페르시아의 수사를 거쳐 바빌론에 도착했다. 이로써 약 8년간의 1만8000km에 달하는 동방 원정을 끝냈다.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에서 돌아온 해 6월에 갑자기 열병에 걸렸고, 발병 10일 만에 33세 나이로 요절하였다.
 
 
  영웅 리더십
 
  헬레니즘 문명의 산파역
 
  알렉산드로스는 원정군이 출정할 때 각종 기예와 예술을 보여주는 축제를 열었다. 문화예술단이 총출동하여 동서 문화의 융합을 상징하는 이벤트를 연출했던 것이다.
 
  기원전 324년 인도 원정을 마치고 회군하여 수사에 머물 때,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정식 후계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리우스 3세의 딸인 스타테이라와 결혼했으며, 그의 친구인 헤파이스티온 장군도 스타테이라 언니인 드리페스티와 결혼을 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휘하의 장수와 부관 90명을 페르시아 귀족의 딸들과 결혼시켰으며, 병사 1만명을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하도록 하고 넉넉한 지참금을 주는 등 파격적인 결혼 이벤트 행사를 벌였다. 이는 동서양 인종의 문화를 융합시키는 중요한 기획이었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의 오리엔트 원정은 동서양의 직접적인 문명 교류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즉 그리스 문명,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오리엔트 문명, 페르시아 문명, 인도 문명 등 다양한 동서양 문명의 융합을 통해 헬레니즘(Hellenism) 문명을 탄생시켰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정신’ 또는 ‘그리스풍 문화’라는 뜻인데, 알렉산드로스의 오리엔트 원정으로 ‘동서 문명이 하나로 융합된 새로운 시대와 문명의 출현’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헬레니즘 문명은 동서양의 융합 문명으로 당시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정치·사회·문화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폴리스식 민주체제에서 성장해 왕위에 올랐으나, 오리엔트 원정 이후에는 현지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전제군주 체제를 표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점령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단 ‘알렉산드리아’라는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했는데, 무려 70개소를 헤아렸다고 전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재도 국제적 교역항으로 널리 알려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시리아의 안티오크 등은 헬레니즘 문명의 소산으로 이룩된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헬레니즘 문명의 문화적 융합을 대표하는 것은 인도의 간다라(Gandhara) 불교미술이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가로막고 있는 힌두쿠시산맥을 넘는 대원정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간다라 미술은 좀 더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간다라는 현재 파키스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자리했던 고대 왕국 중 하나인데, 간다라 왕국은 페샤와르 계곡, 포토하르 고원, 카블 강 유역에 있었다. 간다라 미술은 헬레니즘 미술의 양식과 기법으로 불교의 주제를 표현한 불상 조각 위주의 미술을 가리킨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정벌 이후 그리스적인 조각 기법이 간다라 불교 정신을 상징하는 불상에 적용되어, 좀 더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불상에서 물결 모양의 머리카락과 오뚝한 코, 그리고 입체적인 옷 주름 등은 그리스 조각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리더를 패망으로 이끄는 ‘자만과 과욕’
 
존 데이비드 록펠러.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무리하게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 원정에 나서지 않았다면, 33세로 요절하는 액운을 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는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정보가 부족했다. 코끼리 군단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적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무조건 패기만 갖고 원정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욕(過慾)이 병화(病禍)를 부른다’는 말은 알렉산드로스에게도 통했던 것이다.
 
  ‘석유왕’ 록펠러는 석유로 세계를 제패한 사업가다. 그는 석유 사업을 시작한 이후 손대는 일마다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다. 적자(赤字)를 면치 못하는 탄광을 인수했는데,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석탄이 아니라 석유가 솟아나 큰 이득을 보았다. 미국에서 석유 매장량이 큰 유정(油井)이 발견되었는데, 유황 성분이 많아 사업성이 없었다. 그가 그 유정을 저렴한 가격에 인수할 때 직원들은 쌍수를 들며 말렸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유정을 매입했는데, 나중에 원유(原油)에서 유황 성분을 추출해 내는 기술을 개발해 또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록펠러는 어느 날 성경의 출애굽기를 읽던 중 ‘역청’이란 단어를 보고, 그곳에 석유가 있다는 판단을 했다. 그는 곧바로 지질학자와 석유탐사단을 파견해 이집트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그는 세계적인 ‘석유왕’으로 군림했으며, ‘스탠더드 오릴 트러스트’를 탄생시켜 세계 석유산업을 독식하는 ‘과욕’을 행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병원에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와 같은 진단 결과가 나왔다. 과로에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는 우연히 수술비가 없어 완치될 수 있는 병을 고치지 못하는 소녀를 발견하곤, 그 가족 몰래 수술비를 대주었다. 소녀가 수술에 성공하여 병이 완치된 것을 보고 그는 자기 병이 나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그의 몸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록펠러가 55세에 자선사업가로 돌변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그는 ‘과욕이 병화를 부른다’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자신의 ‘욕망’이라는 병도 치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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