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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여인들 〈10〉

두 나라 왕을 남편으로 둔 유화 부인

글 : 엄광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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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花, 河伯의 딸로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와 결혼… 水神 숭배족과 天神 숭배족의 갈등과 통합 상징
⊙ 주몽, 하느님을 믿는 부족 북부여의 해모수와 ‘물의 神’인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나, 동부여 금와왕의 보호를 받고 자라나
⊙ 유화, 동부여 탈출한 주몽에게 비둘기 편에 보리 씨 보내… 고구려의 國母이자 ‘농업의 神’으로 추앙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고구려의 ‘해의 신’. 중국 集安 오회분4호묘의 고구려 벽화로 고구려 건국신화를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국모(國母)는 유화(柳花) 부인이다. 고구려 건국신화 이외에도 그녀가 나오는 신화(神話)는 북부여와 동부여에 걸쳐 두루 있다. 묘한 것은 두 나라 왕 모두가 그녀의 남편이라는 데 있다.
 
  먼저 북부여를 건국한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는 어느 날 압록강가 웅심연에서 물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를 만난다. 첫눈에 반하여 유화를 희롱하자, 하백이 화가 나서 해모수에게 싸움을 걸었다.
 
  여기서 북부여 건국신화에는 하백과 해모수가 도술 대결을 하였다고 나온다. 하백이 잉어로 변하자 해모수가 수달이 되어 쫓아간다. 기겁한 하백이 사슴으로 변하자, 이번에는 해모수가 승냥이로 변한다. 위험을 느낀 하백이 급히 꿩으로 변하자, 해모수는 매로 탈바꿈한다. 이 장면은 가야 건국신화에 나오는 김수로(金首露)와 석탈해(昔脫解)의 싸움 양상과 비슷하다. 어느 쪽이든 신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형식을 차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해모수와 하백의 도술 대결은 부족 간의 전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 부족과 물의 신을 믿는 부족 간의 여러 차례에 걸친 힘겨루기 싸움이었던 것이다. 결국 하느님을 믿는 부족이 승리를 거두어 물의 신을 믿는 부족에서는 족장(族長)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두 부족이 화친을 맺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 부족 간의 전쟁은 혼인을 통하여 서로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방법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모수는 싸움까지 벌여 얻은 유화를 결국 버리고 만다.
 
 
  주몽의 탄생
 
  한편 동부여를 세운 사람은 해부루(解夫婁)다. 원래 해부루는 북부여 지역의 왕이었다가 상제(上帝・하느님)의 명에 따라 동해 인근의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를 세웠다.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해부루는 어느 날 사냥터에서 노루를 쫓다가 곤연이란 곳에서 금빛 개구리 형상을 한 아이를 하나 얻었다. 그가 바로 해부루가 죽고 나서 동부여 왕이 된 금와(金蛙)다.
 
  어느 날 금와왕은 우발수라는 강가에 이르렀다가 유화를 만나 동부여의 궁궐로 데리고 온다. 유화는 자신이 물의 신 하백의 딸이며, 해모수와 결혼했으나 결국 쫓겨났다고 말했다.
 
  이상하게 여긴 금와왕은 유화를 일단 골방에 가두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골방으로 햇빛이 스며들어 유화를 비추었다. 이때 햇빛은 유화의 목덜미와 배에 닿았고, 그녀가 피하면 따라다니며 몸을 비추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곧 유화는 아이를 잉태했고, 열 달 만에 몸을 풀었는데 곡식이 다섯 되는 들어갈 만큼 큰 알이었다.
 
  금와왕은 괴이한 일이라 여겨 그 알을 밖에 내다 버리게 하였다. 신하들이 알을 가져다 개와 돼지에게 던져주었으나, 짐승들은 알을 먹지 않았다. 소가 다니는 길바닥에 버렸으나 밟지 않고 옆으로 비켜 갔다.
 
  신하들이 돌도끼로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알은 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금와왕이 쇠도끼를 가져오라고 해서 직접 내리쳤지만 여전히 알은 그대로 있었다.
 
  뒤늦게 두려움을 느낀 금와왕은 신하들에게 알을 다시 유화가 있는 골방에 넣어주라고 일렀다. 유화가 하얀 천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아랫목에 놓아두었는데, 어느 날 그 알을 깨고 아이가 하나 나왔다. 그 아이가 바로 주몽이었다.
 
  이러한 신화 속의 이야기를 통해 볼 때 주몽의 탄생은 비밀에 싸여 있다. 우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호하며, 알에서 탄생하였다는 신비화된 이야기가 너무 상징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언뜻 보면 유화와 처음 만난 하느님의 아들이자 북부여 왕 해모수의 아들 같기도 하다. 흔히 난생(卵生)설화의 상징은 태양, 즉 해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해는 하늘을 뜻하며, 따라서 주몽은 하느님의 피를 이어받은 천손(天孫)이 되는 것이다.
 
  주몽의 탄생설화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유추해낸다면, 그가 하느님을 믿는 부족의 피를 이어받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을 믿는 부족 북부여의 해모수와 물의 신인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나, 동부여 금와왕의 보호를 받고 자라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몽은 사생아로 태어나 의붓아버지에 의해 키워졌다고 볼 수 있다.
 
 
  명궁 주몽
 
集安의 고구려 고분 벽화 오회분4호묘 묘실 벽면의 귀부인 그림.
  어찌 됐든 아름다운 여인 유화는 해모수와 금와왕 두 남자 사이에서 비련(悲戀)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그런 복잡한 남자관계로 인하여 아들 주몽은 친아버지 해모수와 의붓아버지 금와왕을 두었으니, 유화는 장차 그 아들의 장래를 크게 걱정하게 되었다.
 
  부여 말로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듯이, 어린 시절부터 주몽은 활쏘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고구려 건국에 관한 여러 가지 신화를 종합해보면 그는 태어난 지 불과 한 달 만에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때 그는 어머니에게 “파리가 눈을 빨아서 잠을 잘 수 없으니 저를 위해 활과 화살을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화 부인은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주었는데, 그는 저 혼자 베틀 위에 앉은 파리를 쏘아 백이면 백 명중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일곱 살 때는 직접 활을 만들어 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타고난 명궁(名弓)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한 달 만에 주몽이 말을 하고 활로 파리를 잡았다는 것이나, 일곱 살 때 직접 활과 화살을 만들 줄 알았다는 이야기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영웅화시키기 위해 과장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통하여 그가 어려서부터 활과 화살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타고난 명궁이었음이 입증된다.
 
  동부여의 금와왕은 즐겨 왕자들을 대동하고 사냥을 나갔다. 대소를 비롯한 일곱 왕자와 함께 주몽도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명색이 왕자이므로 함께 사냥에 참여케 하였다. 당시 사냥은 대회의 형식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활을 잘 쏘아 가장 많은 사냥감을 획득하느냐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사냥대회를 하면 타고난 명궁인 주몽이 당연히 최고의 점수를 올렸을 것이다. 금와왕 앞이었으므로 특히 왕자들끼리는 서로 자기 실력을 과시하려는 욕심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심하였다.
 
  그런데 매번 주몽이 가장 많은 사냥감을 포획하기 때문에 일곱 명의 왕자는 그를 미워하였다. 그중에서도 앞으로 금와왕의 대를 이을 태자인 대소는 주몽을 자신의 적수로 생각하여 증오심이 더욱 강하였다.
 
 
  명마 고르기
 
  동부여의 많은 사람이 활을 잘 쏘는 주몽을 칭찬하자, 대소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금와왕을 찾아가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아주 위험한 존재입니다. 일찍 그 싹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니, 그를 아예 죽여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금와왕도 자신의 정실(正室) 소생인 대소보다, 자신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주몽이 활을 잘 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름다운 유화 부인을 계속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에 주몽을 죽이거나 멀리 궁궐 밖으로 내쫓을 수 없었다.
 
  “네 말은 잘 알아들었다. 그러나 일단 내가 주몽에게 말을 잘 기르는지 시험을 해보고 나서 그때 다시 생각해보겠다.”
 
  금와왕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몽을 궁궐 밖으로 내쫓거나 죽일 수가 없어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해 마구간으로 보내 말먹이꾼 노릇을 하게 하였다. 주몽이 마구간에서 말먹이를 주고 있을 때 유화 부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이 나라에는 너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반드시 그들이 너를 해치려고 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멀리 도망가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도록 하여라. 장차 멀리 도망가려면 준마가 필요하니, 네가 탈 말을 골라보도록 하자.”
 
  유화 부인은 마구간에 있는 말들에게 채찍을 가하였다. 그러자 여러 말이 모두 우리 안에서 이리저리 도망가는데, 붉은빛이 도는 말 하나가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어 달아나는 것이었다.
 
  “바로 저 말이 준마로구나. 저 말을 잘 길러 네 말로 만들어라.”
 
  유화 부인의 말대로 주몽은 붉은빛이 도는 말을 눈여겨봐 두었다.
 
  당시 궁궐에서 기르는 말 중 가장 좋은 말은 왕이 타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주몽은 붉은빛이 도는 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일부러 그 말의 혓바닥에 바늘을 꽂아 먹이를 잘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붉은빛이 도는 말은 비쩍 말라 옛날 준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다른 말들은 잘 먹여 살이 찌고 기름기가 흐르도록 길렀다. 그러다 보니 비쩍 마른 붉은빛이 도는 말과 다른 말들은 금세 비교가 되었다.
 
  “이 말은 네가 가져라.”
 
  어느 날 금와왕이 마구간에 와서 보고 비쩍 마른 붉은빛이 도는 말을 주몽에게 상으로 주었다.
 
  그 뒤 주몽은 붉은빛이 도는 말의 혓바닥에서 바늘을 뽑고 좋은 먹이를 주어 잘 길렀다. 그는 수시로 그 말을 타고 달리기 연습을 하며 길들이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보리와 비둘기
 
  《세종실록》 권154 지리지에 보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치다 구사일생으로 강을 건너 대소가 보낸 군사들을 따돌린 직후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개되고 있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두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왔다. 주몽이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신령스러운 재간을 가진 나의 어머니가 보리 씨를 보내는 것이로다” 하고 활을 당겨 쏘니 화살 하나에 두 마리의 비둘기가 맞아 땅에 떨어졌다. 그 비둘기들의 목구멍을 헤쳐보니 보리 씨가 나왔다. 죽은 듯 누워 있는 비둘기들에게 물을 뿜어주니 곧 살아서 날아갔다.〉
 
  이 기록이 나오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주몽신화는, 고려시대에 이규보가 《구삼국사》를 읽고 쓴 우리나라 최초의 영웅시 《동명왕편》의 내용과 기본적으로 같다.
 
  《동명왕편》에 보면 ‘한 쌍 비둘기 보리 물고 날아 신모의 사자가 되어 왔다’라고 되어 있으며, 그 주석을 다음과 같이 달아놓고 있다.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어미 하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하고 오곡(五穀) 종자를 싸주어 보냈다. 주몽이 살아서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 “아마도 신모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 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었다. 그러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들이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이렇게 두 문헌의 내용이 같은 것은 조선시대에 편찬한 《세종실록》이 고려시대에 저술한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참고자료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적 그보다 오래전 시대에 나온 중국 사료들이나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동명왕편》의 주몽신화가 더 내용이 풍부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 《세종실록》을 기록하면서 내용은 더욱 풍부해져서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를 탔고, 따라온 자가 100여 명인데 모두 흰 고니를 탔다〉고 구체적인 숫자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신화는 오랜 시일을 두고 계속 다시 쓰이면서 더 풍부한 내용을 갖게 된다.
 
 
  神母가 된 유화
 
  그렇다면 《동명왕편》이나 《세종실록》은 어떻게 해서 그전에 나온 자료들보다 더 풍부한 내용과 구체적인 기록을 남겨놓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규보가 너무 소략하게 기술된 《삼국사기》의 주몽신화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시까지 전해져오던 《구삼국사》를 참고하여 원래의 내용을 되살렸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세종실록》 편찬 시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원전으로 삼아 주몽신화를 기술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조선시대 초까지 《구삼국사》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처럼 전해져오는 기록으로 볼 때 유화 부인은 주몽에게 오곡 종자를 주었는데, 그중 보리 종자를 하나 빼놓았다. 그래서 나중에 비둘기를 보내 보리 종자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첫째는 당시 농경사회에서 오곡은 아주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을에 씨를 뿌려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여름에 수확하는 보리야말로 춘궁기(春窮期)를 면하게 해주는 오곡 중의 으뜸이 되는 종자였던 것이다.
 
  동부여는 압록강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기후 조건상 벼농사는 거의 안 되고 보리농사 정도가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현재 조선족들이 짓는 벼농사도 해방 전에 북간도로 이주해 간 사람들에 의하여 논이 개간되었고, 그 지역 기후 조건에 맞게 품질을 개량한 조생종 벼를 심어 농사를 지어왔다. 따라서 옛날 동부여 지역에서는 벼농사보다 보리농사가 주종을 이루었을 것이다.
 
  둘째는 당시 비둘기가 비상연락망과 같은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비둘기는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길들였을지도 모르며, 비상연락 할 때 먼 거리까지 편지를 전달하거나 암호를 보내는 목적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유화 부인이 비둘기 입에 보리 씨를 물려 주몽에게 보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신화를 더욱 신비롭게 꾸미기 위하여, 또한 유화 부인을 신모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농업의 神’이 된 유화 부인
 
이만익 화백의 〈해 돋은 나라로(주몽)〉. 동부여를 떠나 신천지를 개척하러 가는 주몽의 모습을 그렸다.
  고구려가 건국된 이후 농업의 비중이 더욱 커지면서 주몽에게 오곡 종자를 준 유화 부인은 ‘신모’라고 불렸다. 또한 국모이자 땅의 신이며, 농업의 신으로까지 섬기게 되었다.
 
  그러면 주몽이 동부여를 떠나 남쪽 땅으로 내려갈 때 유화 부인은 왜 아들에게 오곡 종자를 준 것일까. 당시만 해도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는 조건은 우선 무술과 지략이 뛰어나 적국으로부터 안전하게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농경사회에서 중요한 것이 풍부한 곡식의 생산에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농사가 잘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농사가 잘되는 조건은 기름진 땅과 곡식이 자라는 데 적절한 기후겠지만, 그것은 선택적인 것이 아닌 자연조건이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다만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농사가 잘되는 좋은 씨앗을 농부들에게 공급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유화 부인이 남쪽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오곡 종자를 주었다는 것은, 바로 주몽으로 하여금 새로운 나라를 세워 왕이 되어달라는 부탁에 다름 아니었다. 활을 잘 쏘는 아들은 이미 훌륭한 무예와 지략을 지녔으므로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갖추었다고 보았다. 거기에다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조건만 실현되면 나라를 세워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이 다 갖추어지는 셈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만약 주몽이 깜빡하여 오곡 중 네 가지 씨앗만 가지고 떠나고 보리 씨를 남겨두었는데 나중에 유화 부인이 발견했다면, 아마 인편으로 급히 그것을 아들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둘기의 등장은 신화의 신비화 내지는 신격화의 상징적 존재라고 보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참고로 집안 지역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면 수신(燧神), 신농(神農), 단야신(鍛冶神), 제륜신(製輪神), 마석신(磨石神) 등이 나온다. 특히 6세기경의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손끝에 곡식 이삭을 든 신농이 보이는데, 이것은 일종의 농업신으로 머리는 뿔이 달린 황소이고 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벽화를 볼 때 이미 그때부터 농사를 짓는 데 소가 사용되었으며, 농사가 아주 중요한 생활수단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유화 부인이 주몽에게 오곡 종자를 들려 보낸 것은 농경사회인 고구려에서는 대단히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유화 부인이 고구려 사회에서 ‘신모’로 신격화되어 농사신으로 떠받드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농민들이 그 공헌에 대한 최상의 배려를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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