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아레초,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무대로 유명
⊙ 이곳의 진짜 주인공은 《황금전설》 벽화가 있는 산 프란체스코 성당과 시인 페트라르카
⊙ “만약 서양 시 문학사를 통틀어 수세기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된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이며 시적 정체성을 갖춘 서정시의 규범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이다”
⊙ 정치적 탄압 피해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주… 몽펠리에 대학에서 법률 공부했지만 마음은 로마문학에
⊙ 평생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 사모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연 중세의 門을 닫은 것은 페트라르카였다
⊙ 1327년 아비뇽 성당에서 첫눈에 반해… 1348년 라우라가 사망할 때까지 필생의 戀詩 366편 생산, 마지막 죽을 때도 그는 손에 펜을 쥐고 있었다
⊙ 파리 대학과 로마시에서 동시에 계관시인 추대
⊙ 이곳의 진짜 주인공은 《황금전설》 벽화가 있는 산 프란체스코 성당과 시인 페트라르카
⊙ “만약 서양 시 문학사를 통틀어 수세기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된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이며 시적 정체성을 갖춘 서정시의 규범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이다”
⊙ 정치적 탄압 피해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주… 몽펠리에 대학에서 법률 공부했지만 마음은 로마문학에
⊙ 평생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 사모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연 중세의 門을 닫은 것은 페트라르카였다
⊙ 1327년 아비뇽 성당에서 첫눈에 반해… 1348년 라우라가 사망할 때까지 필생의 戀詩 366편 생산, 마지막 죽을 때도 그는 손에 펜을 쥐고 있었다
⊙ 파리 대학과 로마시에서 동시에 계관시인 추대

-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외벽에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예술가와 학자와 과학자들의 입상(立像)이 있다. 단테–보카치오와 함께 페트라르카가 나란히 서 있고 반대편에는 갈릴레이 입상이 있다.
이탈리아 전역에 보석처럼 점점이 박힌 작은 마을들이 있다. 주로 피렌체가 주도(州都)인 토스카나 지방에 많다. 이번에 찾은 아레초(Arezzo)는 《방랑자의 인문학》 1편에 등장하는 체르탈도와 정반대 쪽이다. 피렌체를 기준으로 체르탈도는 왼쪽, 아레초는 오른쪽에 있다. 이 두 마을을 떠나 다시 남으로 가면 피렌체와 대척점에 시에나(Siena)가 마름모꼴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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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레초에 있는 페트라르카 생가. |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再會)하는 게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일생일진대 감독은 그 허무한 윤회가 ‘(그러기에 더) 아름답다’고 했다. 아레초는 기원전 5세기 오늘날 피렌체의 원조 격인 에트루리아의 사람들이 세운 도시다. 기원전 3세기 로마에 정복된 이후 로마군의 주둔지로 발전했다. 그런 이 도시에는 크게 두 가지 자랑이 있다. 하나가 산 프란체스코 성당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산 프란체스코 성당이 아니라 성당 벽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벽화 〈성(聖) 십자가의 전설〉이 아레초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성 십자가의 전설〉은 보라지네의 야코부스가 쓴 《황금전설》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 《황금전설》은 전 유럽에서 《성서(聖書)》와 함께 온갖 기담, 전설, 민담(民譚)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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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르카의 대표적인 초상화. |
이어서 ‘선지자 예레미아’ ‘선지자 에스겔’ ‘아담의 죽음’ ‘예루살렘에서의 성 십자가 발견과 확인’ ‘구덩이에서 유다라 불리는 유태인의 고문’ ‘성 십자가의 매장’ ‘성스러운 나무에 대한 경배, 솔로몬을 찾아온 시바의 여왕’ ‘헤라클리우스에게 패배하는 페르시아의 호스로 왕’ ‘수태고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등의 순(順)이다.
아레초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아레초 성당이 있고 그 주변은 성곽이다. 도시국가 시절의 궁전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고 푸른 숲이 언덕을 감싸고 있다. 아레초 성당 바로 맞은편이 ‘휴머니즘의 아버지’ 혹은 ‘현대 서정시(抒情詩)의 아버지’이자 ‘인문주의 문명의 아버지’라는 거창한 별명이 붙어 있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가 태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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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르카 가족들이 마셨다는 우물이 그의 생가 앞에 있다. |
“만약 서양 시 문학사를 통틀어 수 세기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된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이며 시적 정체성을 갖춘 서정시의 규범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르네상스 전문가인 로산나 벳타리니(Rosanna Bettarini)이다. 또 이런 평도 있다.
“페트라르카야말로 ‘현대 서정시의 아버지’이자 ‘인문주의 문명의 아버지’”라는 말은 이탈리아의 문학자 비토레 브랑카가 했으며, 미국 학자 해치 윌킨스는 “페트라르카야말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전 인류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페트라르카의 참모습을 한국에서 알기란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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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토의 종탑은 피렌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그 정상에서 본 피렌체의 전경이다. |
페트라르카를 이해하려면 중세(中世)라는 개념을 숙지해야 한다. 사상적으로 중세의 문(門)을 연 사람은 《신국론(神國論)》의 저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이 위대한 철학자이자 종교자가 쓴 《신국론》은 완역본만 1400쪽이 넘어 선뜻 첫 장을 넘기기가 두려울 정도다. 그러니 그의 사상을 요약하는 것이 무모한 짓이지만 독자들을 위해 용기를 내본다.
고대 그리스와 기독교를 지배한 말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예수의 “하느님의 나라는 그대들 안에 있다”였다. 전자(前者)는 탐구와 비판과 양심의 중요성을, 후자(後者)는 인간 영혼의 끝없는 가치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인간은) 평안해질 수 없다”고 단정했다. 신에 의탁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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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르카가 평생 존경했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 예술을 신에 대한 경배로 만들었다. |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神)의 나라’, 즉 기독교가 ‘인간의 나라’, 로마에 궁극적으로 승리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기독교가 승리하자 기독교는 ‘빛’, 로마의 이교도들이 남긴 모든 유산은 ‘어둠’이 됐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중세 1000년간 유럽 문자 문명의 수준은 로마에 비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유럽은 신에 모든 것을 의지했다. 그런 아우구스티누스가 연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연 사람이 바로 페트라르카였다. 혹자는 둘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가 로마에 해(害)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면 페트라르카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이 기독교 세계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페트라르카가 손에서 놓지 않은 책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이었으며 1325년 페트라르카가 처음 산 책이 《신국론》이었다. 그는 《나의 비밀(Secretum Meum)》이란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가상 대화를 한다고 밝혔다. 영성(靈性)의 위기를 겪던 페트라르카는 아우구스티누스·베르길리우스·오비디우스의 책을 읽으며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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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에는 《성경》의 구절구절이 모두 예술의 소재가 됐다. |
유럽의 왕실들은 그를 왕족으로 대우했고 1340년에는 로마시와 파리 대학이 동시에 그를 계관시인(桂冠詩人)으로 추대했다. 페트라르카는 1345년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서한문을 발견한 뒤 키케로체(體)의 편지를 쓰고 한데 묶었다. 왕·왕비·교황·추기경·주교들뿐만 아니라 키케로·호메로스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에게도 수백 통의 편지를 써 ‘편지 열풍’을 일으켰다.
뭐니 뭐니 해도 페트라르카의 대표작은 《칸초니에레(Canzoniere)》다. ‘노래책’이라는 뜻을 가진 이 시집에서 소네트(sonnet) 양식을 완성했다. 소네트란 압운 체계를 지닌 14행 서정시다.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는 릴케·밀턴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모방의 천재’인 셰익스피어는 이에 자극받아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완성했다. 《칸초니에레》의 서두(序頭)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러분, 이제 그대들은 산만한 시들 속에서
내가 지금과는 다소 다른 사람이었던 시절
빗나가던 내 젊디젊은 그 시절에
내 가슴을 가득 채우던 그 탄성들을 들으리오.
부질없는 소망들과 헛된 고통 속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나는 울고 말하면서
체험으로 사랑을 아는 이가 그 어디에 있든
나는 용서만이 아닌, 자비를 빌고 싶소.
그러나 이제는 잘 알고 있다오. 오랜 세월
나 뭇사람의 이야깃거리였음을, 그 때문에 종종 나 마음속으로는 나 자신을 부끄러워한다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은 내 헛된 짓의 열매요
또 속세에서 원하는 만사가 순간의 꿈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과 뉘우치는 것의 열매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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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르카 생가 부근의 아레초 광장은 주변에 기념관과 대학이 많아 고즈넉한 분위기다. |
《칸초니에레》의 주제는 여인에 대한 사랑, 삶, 인생에 대한 성찰, 동생과 친구에 대한 헌시(獻詩), 조국에 대한 사랑, 부패한 교황청에 대한 일침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가장 압도적인 것은 ‘사랑’과 ‘인생’ 두 가지였다. 그 사랑은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보카치오에게 피암메타가 있었듯이 페트라르카에게는 연인 라우라(Laure·Laura)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칸초니에레》는 페트라르카가 평생 짝사랑한 라우라에게 바친 시를 모은 것인데 둘의 만남을 알아보기 전에 페트라르카가 라우라에게 바친 소네트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페트라르카는 1327년 프랑스 아비뇽에 있는 성 클레르(Sainte-Claire)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라우라를 보고 정신이 확 돌아 평생 그녀의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만다.
‘정확히 천삼백이십칠년 사월 여섯째 날 이른 시각, 나는 그 미로에 들어갔으나, 아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네.’(《칸초니에레》 211번)
‘그날 창조주에 대한 동정으로 태양이 빛을 잃었던 바로 그날 그대의 아름다운 두 눈이 나를 사로잡았으니
여인이여 나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 정신을 잃고 말았다오.
성스러운 날인지라 밀려오는 사랑의 충격에
몸을 사릴 때가 아니라 느껴져 믿음으로, 의심없이 받아들였으나 이렇게 나의 재난들은 모두의 고통 속에 시작되었다오.
사랑 앞에 완전히 무기력한 나에게 사랑이 찾아들고 또 심장으로 향하는 길은 두 눈으로 활짝 열렸으니 이 내 두 눈은 눈물의 통로가 되었다오.
하나 그 상태에서 화살로 나를 상처 내고서도
정작 무장한 당신께는 활조차 보여주지 않은 것은 사랑의 영광스러운 행동은 아니라 생각된다오.’(《칸초니에레》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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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르카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주했다. 사진은 아비뇽 교황청의 외벽이다. |
페트라르카의 아버지는 피렌체의 서기이자 공증인이었다. 피렌체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페트라르카 가문은 1302년 피렌체를 휩쓸었던 피렌체 정가(政街)가 백당, 흑당으로 갈리자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피렌체를 떠나 1304년 아레초로 와 페트라르카를 낳았다. 3년 뒤인 1307년 교황청이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할 때 그의 가족도 따라갔다.
이러고 보면 페트라르카의 생가는 아레초이지만 성장 무대는 아비뇽과 그가 대학을 다닌 몽펠리에, 즉 프랑스의 프로방스였다. 페트라르카의 아버지는 그가 법학을 공부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1316년 몽펠리에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4년 뒤 볼로냐 대학에 간 페트라르카는 이미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1326년 부친이 사망했다.
한가로운 시절을 보내던 중 1327년 4월 6일 성 금요일에 페트라르카는 아비뇽의 산타 키아라 성당에서 한 여인을 보게 된다. 그가 그의 영원한 여인이자 뮤즈인 라우라였다. 라우라가 실존 인물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있다. 지금까지 유력한 설로는 그녀가 위그 드 사드(Hugues de Sade) 백작의 부인인 로르 드 노브(Laure de Noves)라는 설이 있다.
로르, 즉 라우라는 ‘사디즘(sadism)’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드 사드 후작의 조상이다. 라우라가 11명의 아이를 낳고 사망하자 남편은 1년도 되지 않아 냉큼 재혼했다. 100년 뒤에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그린 작품 〈봄의 귀환〉의 한가운데 등장하는 비너스의 모델이 라우라라는 설도 있다. 어쨌건 라우라는 페트라르카에게 냉정했던 것 같다.
‘사랑이 내 가슴에 새겨놓은 그대, 그 이름을 부르며 내가 한숨지으니 찬미(Lau)할 때 밖으로 들리기 시작한 것은 달콤한 그대 이름의 첫 글자 소리
다음으로 내가 만난 것은 여왕(re) 같은 그대의 품격이 지고(至高)의 임무를 다하도록 내 힘을 배가시키네 하나 마지막 음절(ta)아 침묵하라, 그리고 소리쳐라. 그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네 어깨보다 더 강한 다른 이의 짐이니
이처럼 이름 자체가 찬미(Lau)하고 존경(re)하는 것을 표하니, 단 한 사람이 그대를 부른다 해도 모든 경배와 영광을 바칠 값진 이름이라네.’(《칸초니에레》 5번)
‘그 아름다운 두 눈에 나는 상처 입었으니 그 두 눈만이 치유할 수 있는 상처이지. 약초나 마법의 힘도, 또는 우리 바다 저 멀리에서 온 보석의 힘이 아니라네.’(《칸초니에레》 75번)
‘내가 한숨지은 지 열네 번째 해의 중간과 끝이 처음에 화답하면 산들바람도 그늘도 이제 나를 더 이상 구할 수 없으니 내 뜨거운 열정이 너무도 커 감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네.’(《칸초니에레》 7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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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뇽 교황청 앞 광장은 아비뇽에서 가장 번화하고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
아들 조반니가 태어나던 해 페트라르카는 교황청 대사(大使) 임무를 수행하러 로마를 방문하던 중 영감을 얻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을 소재로 한 첫 번째 대작이자 걸작인 《아프리카(Africa)》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작품으로 그는 로마시로부터 최초로 계관시인의 영예를 얻게 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35~183) 장군은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겨룬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파한 인물이다. 그는 대(大) 아프리카누스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양자로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소(小) 아프리카누스(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구분하기 위함이다.
딸 프란체스카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341년 페트라르카는 계관시인에 오른다. 파리 대학과 로마시에서 1340년 9월 1일 동시에 계관시인으로 서임하겠다는 제의를 받은 페트라르카는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던 조반니 콜로나 추기경의 자문을 받은 뒤 1341년 4월 8일 로마 캄피돌리오(Campidoglio) 청사에서 성대한 의식을 치르며 계관시인이 됐다.
페트라르카가 평생 사모했던 스승은 앞서 말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기원전 106~43)였다. 페트라르카는 몽펠리에 대학에 다닐 때 책을 통해 키케로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1345년 베로나 대성당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게 된 키케로의 서간문집에서 새로운 내용을 발견한 뒤 인간 키케로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
그것은 “정치적, 심리적 면에서 모순투성이의 키케로였으며, 이전까지 알려졌던 그의 윤리, 철학 작품을 통해 그가 보여준 어떠한 원칙들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점투성이 키케로에 대해 나약하고 불행한 인간의 조건에 대해 늘 관심을 가졌던 페트라르카는 실망하기는커녕 새로운 키케로의 모습을 보고 인생을 더 깊이 성찰했다.
페트라르카는 언젠가 라우라와의 사랑이 결실을 맺으리라고 보고 노년의 가상 소네트도 남겼다. 먼 훗날 늙은 라우라에게 백발이 되어서야 마침내 용기를 내어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를 사랑했는지 고백하고 이때 듣게 되는 그녀의 때늦은 ‘탄성’에 평생 지속되어 온 고통을 위로받겠다는 내용이다.
‘만일 내가 인생의 혹독한 고통과 수많은 번뇌들을 이겨낼 수 있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여인이여, 나는 볼 수 있으리, 그대의 아름다운 두 눈빛이 꺼져 있는 것을,
또 황금빛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어버린 것을, 또 꽃단장과 초록 옷들을 멀리하는 것을, 또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이는 내 비록 고통 속에 있어도 마음을 드러내려 할 때 나를 두렵고 망설이게 하네.
훗날 마침내 사랑이 내게 큰 용기를 주리니
내가 그대에게 고백하리오 내가 고통스러워한 지가 몇 해였고, 며칠이었으며 또 몇 시간이었는지.
또 비록 시간은 아름다운 열망에 반(反)하지만,
그대의 뒤늦은 연민의 탄식 몇 가닥도 내 고통을 어루만져 주리라.’(《칸초니에레》 12번)
평생의 연인 라우라는 1348년 페스트로 사망하고 만다. 이제 페트라르카는 무심한 시간과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무기력함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끝없이 고통스러워하는 이 소네트의 주인공은 라우라의 죽음으로 이제 영원히 어떠한 희망도 기대할 수 없게 된 현실에 고통스러워하면서 마지막 시어(詩語)를 격리시킴으로써 절대 고독을 표출한다.
‘인생은 쏜 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죽음은 힘겨운 나날들 뒤에 찾아드네, 눈앞의 것들, 지난 것들이 내게 고통을 주는데, 미래의 것들 또한 그러하네,
이쪽이나 혹은 저쪽에서, 진리처럼 그렇게, 과거를 떠올리는 것도 미래를 기다리는 것도 날 괴롭히니,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용서치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터라오.
고통스런 마음이 작은 달콤함이라도 맛본 적이 있다면 내게 떠오르게 되고, 이윽고 다른 쪽으로부터는, 내 항해 중에 불어대는 거친 바람을 보네.
항구에서 태풍을 만났을 때, 내 사공은 이미 지쳐 있고, 돛대는 부서지고 밧줄도 끊겨 있고, 게다가 내가 주시하던 아름다운 두 눈빛마저, 꺼졌어라.’(《칸초니에레》 27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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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뇽에 교황청이 있었던 것은 고작 68년에 불과하지만 지금도 벽화 등이 남아 있다. |
마지막으로 《칸초니에레》 16번을 감상해 본다. 삶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백발의 노인, 즉 페트라르카는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될 순례의 길을 떠나 마침내 성도인 로마에 도착한 뒤 하늘나라에서 성녀(聖女)를 만나는 것을 꿈꾼다. 참으로 페트라르카를 낳은 아레초의 조용한 광장은 ‘인생은 아름답고 사랑은 더 아름답다’고 되뇌고 있는 것 같다.
‘백발의 창백한 노인이 떠나네
평생을 살아온 달콤한 고향과
사랑하는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불안해하는 가족을,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 동안
늙은 몸을 이끌며,
세월에 닳고, 여행에 지쳐버린 그 몸을
죽기 살기로, 온 힘을 다해 추스르며,
열망대로, 로마에 도착하였네.
저 멀리 하늘 위에서 또다시 보기를 원하는
그분의 모습을 찾아서,
그렇듯, 여인이여, 가엾은 나는
너무도 열망했던 그대의 참모습을
최선을 다해, 다른 여인들의 얼굴에서
찾고 있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