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춘의 한국사회 읽기 〈3〉 해방 전후 역사와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

  • 글 : 류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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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투쟁뿐 아니라 반공투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건국
⊙ 헌법 전문(前文)의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1919년 건국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임시정부의 정신 계승한다는 의미
⊙ ‘한강의 기적’은 ‘내재적 발전사관’으로는 설명 못해

류석춘
1955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
《전통과 현대》 편집위원,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역임. 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기념재단 부이사장 / 《막스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한국의 시민사회-연고집단, 사회자본》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등 저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으로 대한민국은 비로소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 대한민국 건국 = 항일 + 반공
 
  대한민국을 건국한 동력은 무엇인가? 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국가 정체성 논란의 핵심에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세계 10위권 수준이라는 평가에 우리는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기준이나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기준은 물론이고 복지제도와 같은 사회적 기준, 나아가서 과학기술 및 생활양식으로 대변되는 문화적 기준에서도 우리는 세계 상위권 국가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번영의 기초를 우리는 언제 놓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출발하면서부터다. 전통국가 조선도 아니고 일본이 지배한 식민지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 기본 운영원리로 채택한 대한민국이 국회, 헌법, 정부를 순차적으로 만들어 나간 1948년이 그 출발이다.
 
  그렇다면 이를 만들어 낸 동력은 무엇이었나? 두 가지 힘의 결합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하나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항일’(抗日)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 공산주의와 싸운 ‘반공’(反共)의 힘이다. 이 두 가지 힘 가운데 하나만으로는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없었다. 항일만 해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고 치면 그 나라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가 되었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이 여기에 해당한다.
 
  잠시 역사를 되돌려 보자. 항일의 결과로 1945년 해방되고 나니 한반도에는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다름 아닌 북한 공산 정권, 그리고 이 정권을 뒤에서 사주하고 있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이다. 그러나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 군정은 이러한 사정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소련이 점령한 북한에서 공산 전체주의 국가가 차근차근 만들어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도 미 군정은 신탁통치를 추진했다.
 
  또한 신탁통치를 두고 좌파의 찬성과 우파의 반대가 극렬히 대립하자 미 군정은 다시 좌우 합작을 추진했다. 박헌영과 같은 탈법적 좌파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반공 우파 지도자를 따돌리는 대신 미 군정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좌파인 김규식과 여운형을 군정 파트너로 삼았다. 이승만은 강력히 반발했다.
 
김원봉은 뛰어난 항일운동가였지만, 해방 후 북한정권의 요직을 지냈다. 오른쪽 앞에서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 김원봉, 김달현, 허헌.
  이승만은 동구(東歐)에서의 좌우 합작이 결국 소련의 위성국 건설을 위한 시간 벌기였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46년 6월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하는 등 이미 사실상 공산국가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구의 실패를 겪으며 다행히 미국도 정신을 차렸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팽창하는 공산주의를 마주하며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1947년 3월 소련과의 냉전을 공식 선언했다. 이 선언에 따라 좌우 합작은 동력을 잃었고, 이승만의 반공 노선은 마침내 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유엔은 1947년 11월 한반도에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을 결의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그냥 단순히 거부한 것만이 아니었다. 1948년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북한은 남로당과 좌익 계열을 총동원해 살인, 방화, 파업, 폭동을 일으켰다. 제주의 4·3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대한민국은 건국했다. 그러므로 반공은 항일만큼이나 대한민국을 건국한 동력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힘에서 반공을 지우고 항일만을 내세우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원봉은 해방 전 공산주의 계열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며 임시정부 좌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남한으로 귀국했던 김원봉은 북한으로 넘어가 노동상 즉 노동부 장관을 했다. 그러므로 그는 항일운동을 했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조력자가 되었을 뿐이다. 반공을 뺀 항일만으로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절대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이 이것이다.
 
  김구는 해방 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가장 탁월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임시정부 우파의 중심 인물인 그는 중국에서 외교·군사·의열 등 모든 분야의 항일 투쟁을 지휘하는 최고 지도자였다. 귀국 후에도 1947년까지는 이승만과 더불어 반탁·반공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1948년 1월 이후 대한민국 건국의 최종 단계에서 공산 세력과 남북 협상을 전개하면서, 5·10 선거를 부정했다. 그래서 김구는 대한민국 독립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대한민국 건국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2016년 광복 71주년, 대한민국 건국 논란
 
1948년 8월 15일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는 이승만. 이날 정부수립으로 1945년 해방부터 시작된 건국과정이 마무리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 많다. ‘대한민국’이 언제 태어났는가 하는 문제도 그렇다. 특별히 따져 보기 전까지는 그저 8월 15일 ‘광복절’이 대한민국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대충 생각한다. 그러나 8월 15일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광복절이라고 기념하는 8월 15일은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우리가 해방된 날이 1945년의 그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항복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승리 덕분에 우리는 일본의 통치 즉 식민지로부터 해방됐고, 한반도 남쪽을 관할하는 통치권은 승전국인 미국이 접수했다. 그래서 그날 남한에서 미 군정이 시작됐다.
 
  다른 하나는 해방이 되고 3년간 미 군정을 거치면서 천신만고 끝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과제의 마지막 작업인 정부가 수립된 날이 1948년의 그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자정을 기해 남한의 통치권은 미 군정으로부터 대한민국으로 넘어왔다. 하지 미 군정 장관 대신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국민을 대표해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날이 바로 그날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건국은 해방으로부터 시작해 미 군정이라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구성한 국회, 그렇게 구성된 국회에서 7월 17일 제정한 헌법, 그 헌법에 따라 8월 15일 수립한 정부가 출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어떤 사건을 특정하여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라고 보아야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다. 해방 혹은 정부 수립을 각각 강조할 수 있다. 또한 이 두 선택 가운데 택일이 어려워 두 사건을 나란히 강조하는 방법도 있다. 예컨대 2015년 광복절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표현했듯 ‘해방 70주년, 건국 67주년’으로 두 사건의 의미를 병렬적으로 표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도 시비가 벌어지고 있다. 일부에서 1919년 건국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근거로는 두 가지가 제시된다. 하나는 1987년 개정한 현행 헌법 전문(前文)이고, 다른 하나는 1948년 9월 1일 발행한 정부의 관보(官報) 제1호다. 두 가지 기록을 각각 살펴보자.
 
  1987년 개정된 헌법의 전문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쓰고 있다. 이 표현은 대한민국이 1919년 출범한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이지, 대한민국이 1919년 출발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 둘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현행 헌법을 근거로 1919년 건국을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음 1948년 9월 1일 발행한 ‘관보 1호’를 살펴보자. 거기에는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는 날짜가 박혀 있다. 이로부터 역산을 하면 3·1운동이 벌어지고 상해 임시정부가 출발한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이 관보만 보면 이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생산한 문서에 1919년을 기점으로 ‘민국(民國) ○○년’이란 표현을 즐겨 써 왔다. 당신이 임시정부의 수반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과시하는 전략으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승만 정부의 공보처가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현한 배경이다.
 
  그렇지만 이를 근거로 1919년 건국이 맞다고 주장하려면 동시에 다음과 같은 다른 국가기록은 어떻게 해석할지 답을 제시해야 한다. 예컨대 1953년 공보처가 발행한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에 실린 1949년 8월 15일 기념사의 ‘민국 건설 제1회 기념일’ 혹은 1950년 제2회 광복절 기념사의 ‘민국 독립 제2회 기념일’ 등과 같은 표현이다.
 
  같은 문제는 최근까지도 반복된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 141쪽의 표현이 대표적이다. ‘해방 이후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더불어 채택한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는 보편적 가치로서 산업화, 민주화의 밑바탕이 되어 오늘날의 자유와 국가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라는 표현이다.
 
  같은 문제는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이다. 이는 명백히 1948년 취임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기점으로 계산한 결과다. 또한 2016년 현재의 국회는 대한민국 20대 국회다. 1948년 5월 구성된 국회를 기점으로 계산한 결과다.
 
  1919년 건국을 인정하면, 발생하는 문제의 압권은 그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진행된 독립운동을 적절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독립된 국가가 또 독립운동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2016년 광복 71주년이 저물어 가는 이 시점에서 아직도 대한민국의 탄생에 관한 논란이 벌어질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광복 71주년은 곧 건국 68주년이기 때문이다.
 
 
  3. 한강의 기적, ‘내재적 발전’ 사관으로는 설명 못한다
 
울산 현대자동차 수출부두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자동차. ‘한강의 기적’은 ‘내재적 발전’ 사관만으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 역사에 대한 ‘내재적 발전론’은 일본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일본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조선은 내부적으로 ‘근대’ 즉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라고 규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 즉 일본에 의한 타율적 견인만이 조선을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식민사관에 대항해 우리 국사학계는 조선도 자체적인 역사발전의 동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조선후기 사회가 내부적인, 다시 말해 자생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강조된 개념이 내재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다. 맹아의 실체로는 사회경제적인 차원의 ‘경영형 부농’ 혹은 정치사상적 차원의 ‘실학’이 강조되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그것이 부농의 등장을 강조한 유물론이건 혹은 실학의 등장을 강조한 유심론이건 동일한 논리를 전개했다. 즉 조선은 자생적으로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이 완성되기 전에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여 자생적인 역사발전의 씨앗을 빼앗아 갔다는 논리다. 이와 같이 등장한 ‘민족사관’은 단숨에 학계의 지배적인 사관으로 떠올랐다.
 
  민족사관은 1980년대 학생운동도 뒷받침했다. 일본이 짓밟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생적 자본주의 맹아는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에는 ‘매판’적이고 ‘종속’적인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해석이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국사학계는 물론 사회과학 전체를 휩쓸었다. 매판적 부르주아가 외세의 앞잡이인 국가권력과 결탁해 민중을 수탈하기 때문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운동권의 논리는 민족사관과 샴쌍둥이였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자본주의는 ‘독점을 강화’하고 ‘종속을 심화’시켜 결국 ‘민중을 수탈’하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민중을 수탈하기는커녕 ‘중산층을 양산’했다. 노동자 농민을 도시 빈민으로 내몰기는커녕, ‘마이카’ 그리고 ‘마이홈’을 누리는 도시의 중산층으로 성장시켰다. 1970년대 1980년대 양성된 수백만의 산업전사 노동자들이 오늘날 억대 보수를 받는 ‘노동귀족’으로 변신해 개혁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실정이다.
 
  World Bank 가 인정하듯이 한국 자본주의의 기적은 자본의 지속적인 축적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공평한 분배도 이뤘다는 사실에 있다. 적어도 1997년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우리는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쾌거를 이뤘다. 바로 이 대목이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또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 포인트다. 민족주의 사관이 재단한 역사와 실제 진행되었던 역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어긋난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우선, 조선 후기에 등장한 자생적 맹아가 식민지를 거치며 짓밟혔다면 그 맹아는 언제 다시 우리 내부에 등장하여 한국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는가? 해방과 건국 그리고 전쟁의 와중인 1950년대에 자생적 맹아가 등장할 수 없었다면, 경공업이 발전하던 1960년대 혹은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에 자생적 맹아가 등장한 것인가? 이승만 시대 그리고 박정희 시대를 미국과 일본에 대한 한국의 새로운 종속이 시작된 시기로 보는 민족주의 사관으로는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다음, 식민지가 끝나고 어떻게든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자생적 맹아가 등장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과연 그 맹아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라는 크나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 씨앗의 상태로부터 성숙한 나무로 자라는 과정에 관한 설명도 민족주의 사관이나 운동권의 논리에서는 공백으로 남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1997년 찾아온 경제위기를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을 완성시켜 주는 구세주로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자본주의가 몰락해야만 스스로의 논리적 완결성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는 1997년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고 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한국은 일인당 3만 달러에 가까운 소득을 누리고 있다.
 
  역사발전은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외재적이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설파한 신채호의 말은 다음과 같이 재해석되어야 한다. 내부와 외부의 갈등이 있을 때 그 갈등이 반드시 내부를 향해 혹은 외부를 향해 일방적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이 등장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물론 그 상호작용의 결과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행히 우리 현대사는 이 상호작용을 우리가 적절하게 활용했음을 너무도 생생히 보여준다. 반면, 외부로의 문을 닫은 북한의 내재적 발전은 심각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내재적 발전론은 외재적 발전론인 식민사관만큼이나 일방적인 사관이다.
 
 
  4. 우리나라 학자들은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연구란 무엇인가? 연구란 특정한 현상이 시간 및 공간에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에 더해 그 현상을 만들어 낸 원인은 무엇이고 또 그 현상이 가져올 결과는 무엇일지를 따져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학자’라 부른다. 학자의 관찰 대상은 물론 자연현상일 수도 사회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경우에 따라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동일할 수도 혹은 다를 수도 있다. 또한 현상은 달리 보여도, 결국에는 본질이 같은 경우도 있다. 역으로, 본질이 달라도 현상이 같게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는 남극이나 북극과 같은 극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현상을 관찰할 방법이 없다. 그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가서 연구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연구의 결과로부터 추출된 자연과학적 지식은 우리나라의 자연현상에도 얼마든지 적용이 가능하다. 우리나라가 극지에 과학기지를 운영하는 까닭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만약 계절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에 관심이 있는 학자라면 우리나라는 연구를 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진 셈이다. 사시사철 춥거나 덥기만 한 나라의 학자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여 자신의 나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
 
  연구 대상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비단 자연과학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사회과학에서는 그러한 차이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예컨대 근대화, 다시 말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러한 현상이 벌어진 서유럽, 북미, 일본을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미처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화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선진국 중심의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지식이 축적되어 왔다.
 
  연구 대상의 가치라는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근대화 현상 즉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는 매우 높은 중요성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그리고 가장 빨리 또 최근에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입체적으로 완성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복지제도의 전면적 도입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에서 우리가 비교우위를 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연구의 대상은 바로 한국 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학자들은 한국의 사례가 가지는 연구 대상으로서의 중요성을 애써 외면한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공을 우리나라 학자들은 관찰하고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유럽의 200년에 걸친 산업화와 민주주의에만 주목한다. 30여 년 만에 전면적인 복지를 시행하고 있는 한국은 폄하하고, 100년에 걸쳐 발전한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복지에만 눈을 돌린다.
 
  나아가서 한국의 사회과학을 지배한 연구의 대상은 대부분 한국 현대사의 문제를 지적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유행하던 ‘종속 심화·독점 강화’ 테제가 대표적이다. 만약 당시의 한국이 대외적으로 종속이 심화되고 대내적으로는 독점이 강화되는 사회였다면, 1990년대 혹은 2000년대 한국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한 사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로서 드러난 사실은 대외적인 종속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독점을 규제하는 경제민주화가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학자들은 이런 한국의 현실을 외면한다.
 
  오히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매우 귀중한 연구 대상으로 주목하고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물론이고, 새마을 운동을 공부하러 오는 개발도상국의 학자와 공무원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마치 우리가 자연과학의 발전을 위해 남극에 과학기지를 운영하듯이, 한국을 연구하여 자신들의 발전에 도움을 얻고자 우리나라로 몰려오고 있다.
 
  그런데 막상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성공을 스스로 만들어 낸 대한민국의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작업이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작업을 통해서는 절대 대한민국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연구 대상으로서 한국 현대사가 가지는 가치를 우리나라 학자들만 외면하는 역설이야말로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한 연구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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