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은 부정적 응답이 긍정적 응답보다 2.5배, 박정희는 부정적 응답이 긍정적 응답보다
1.2배 높아
⊙ 대학생들의 현대사 인식은 대학생(45%) 〉 고등학생(39%) 시절 형성
⊙ 현대사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준 것은 인터넷(30%) 〉 교사(24%) 〉 매스미디어(20.4%) 순
류석춘
1955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
《전통과 현대》 편집위원,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역임. 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기념재단 부이사장 / 《막스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한국의 시민사회-연고집단, 사회자본》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등 저술
1.2배 높아
⊙ 대학생들의 현대사 인식은 대학생(45%) 〉 고등학생(39%) 시절 형성
⊙ 현대사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준 것은 인터넷(30%) 〉 교사(24%) 〉 매스미디어(20.4%) 순
류석춘
1955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
《전통과 현대》 편집위원,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역임. 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기념재단 부이사장 / 《막스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한국의 시민사회-연고집단, 사회자본》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등 저술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젊은이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있는 그대로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공부하기는커녕 일부에서는 현대사를 악의적으로 폄훼하여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부정적 인식까지도 확산시키고 있다.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는 건 이 부정적 인식이 교육이나 언론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설문조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해 보는 작업이다. 현대사, 특히 앞의 두 대통령의 업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우리 대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설문으로 조사했다. 조사의 대상이 된 대학생은 총 313명이다.
연세대 116명(37.1%), 인천대 109명(34.8%), 한림대 51명(16.3%), 서울과학기술대 37명(11.8%). 성비는 남녀가 대략 반반(남자 54%, 여자 46%)이고, 남자 응답자 가운데는 군복무를 마친 학생이 절대적으로 많았다(71.0%). 학년은 골고루, 즉 1학년 14.1%, 2학년 24.0%, 3학년 31.6%, 4학년이 29.7%, 전공은 인문사회과학 계열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91.0%).
조사는 2016년 2학기 강의가 갓 시작된 9월 5일부터 9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각각의 학교 강의실에서 교수 및 수강생들의 동의를 얻어 강의에 출석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누어주고 응답자 스스로가 써넣도록 한 후 30분 후에 설문지를 수거하였다. 분석은 SPSS를 이용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
![]() |
|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동부전선 시찰 도중 지프 위에 올라 즉석연설을 하는 이승만 대통령. 그는 전시지도자라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한 호국 대통령이었다. |

이 문항에 313명이 중복으로 응답한 결과 총 1178개의 응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략 응답자 한 사람당 평균 3.7개의 복수응답을 한 셈이다(376.4%). 이 표를 보면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긍정적인 평가를 압도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부정적인 평가의 합은 829개로 응답자 한 사람당 부정적인 응답을 약 2.6개 선택했다(264.9%). 긍정적인 평가의 합은 349개로 응답자 한 사람당 긍정적인 응답을 약 1.1개 선택했다(111.5%). 그러므로 부정적인 응답이 긍정적인 응답보다 약 2.5배 많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응답 결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추가로 실시하였다. 12개의 진술 가운데 처음 6개, 즉 1)부터 6)까지 부정적인 의견에 동의할 때마다 -1을 그리고 7)부터 12)까지 긍정적인 의견에 동의할 때마다 +1의 값을 주어 응답자가 복수로 응답한 결과를 모두 더했다. 이렇게 하면 특정한 응답자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혹은 긍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정도는 어떤지를 종합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특정한 응답자가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 6개에 모두 동의하고 부정적인 진술 6개에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는 +6점을 갖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는 -6점을 갖게 된다. 만약 부정적인 응답에 두 번 동의하고 (-2), 긍정적인 응답에 한 번 동의하면 (+1) 그 응답자는 그 결과를 모두 합해 결국 -1의 값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만들어진 척도는 가장 부정적인 값 -6부터, 긍정과 부정이 균형을 이룬 중립적인 값 0, 그리고 가장 긍정적인 값 +6 사이의 값을 갖는다. 이를 정리한 결과가 표2)이다.

이 척도의 분포를 보여주는 막대그래프는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방향에 치우쳐 있음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2점에 가장 많은 80명이 모여 있고, -1점과 -3점에 각각 47명이 모여 있다. 다음으로 0점, 즉 긍정과 부정이 서로 상쇄되는 경우에 43명이 모여 있다. 나머지 상대적으로 빈도가 적은 경우들도 부정적인 - 값을 가진 경우가 많다. 이 척도의 평균은 -1.53으로 대학생들 사이에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잘 확인해 준다.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사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평가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평가인가? 예컨대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 가운데 가장 높은 75.4%의 동의를 받은 ‘3·15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의 경우를 따져보자. 3·15 부정선거의 총체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이승만 대통령이 져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15선거에서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이 무투표로 당선된 사실을 아는 대학생은 얼마나 될까? 당시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유세 도중 병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경쟁자 없이 무투표 당선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3·15 부정선거는 야당 후보였던 장면을 상대로 여당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저질러진 사건이었다. 그런데 설문에 응한 대학생들은 이승만을 ‘3·15 부정선거로 당선된 사람’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조사 결과는 그동안 ‘역사교육이 문제고, 언론환경이 문제’라는 주장이 너무도 사실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머지 동의를 많이 받은 부정적인 평가 또한 같은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예컨대 이승만이 ‘미군정의 꼭두각시’라는 진술 역시 전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진술이다. 해방이 되어 남한에 들어온 미군정은 소련과 협의하여 한반도를 신탁통치하고자 했다. 이 신탁통치에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자 미군정은 이승만을 따돌리고 여운형·김규식 등을 파트너로 삼아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1946년 내내 반공을 주장한 이승만은 미군정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이승만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심지어 미국을 방문해 미국의 고위층 인사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마침내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1947년 3월 공산주의와의 대결, 즉 ‘냉전’을 선언하면서 이승만의 입지는 비로소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신탁통치 및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미 군정장관 하지와 엄청난 갈등을 빚은 이승만을 ‘미군정의 꼭두각시’라고 보는 대학생들의 인식은 정말이지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황당한 인식이다. 다시 한 번 ‘역사교육이 문제고, 언론환경이 문제’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같은 문제는 다른 부정적인 의견에서도 반복된다. ‘정읍발언으로 분단을 고착시킨 원흉’은 북한이 당시 이미 사실상 정부를 구축하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는 객관적이지 못한 평가이다. 1946년 6월의 정읍발언 이전인 1946년 2월 이미 북한은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으며, 이어 3월에는 정식 국가가 출범한 이후에나 가능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므로 분단의 고착은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북한이 일방적으로 국가를 먼저 수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란 판단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무력화하여 친일파를 비호한 사람’이라는 비난 또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처한 입장을 입체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의견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당시 정치적으로 이미 사망한 친일파를 정리하는 문제보다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부상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이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이라는 비난 또한 마찬가지다. 기습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어 대통령이 거처하고 집무하는 경무대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갈 판인데,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거기 남아 적의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통령이 무사히 후퇴한 덕분에 우리는 나중에 반격을 할 수 있었고 나아가 통일을 향해 북한에까지 진격도 할 수 있었던 사실을 왜 외면하는가?
‘4·19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독재자’라는 비난 또한 마찬가지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 발발에 대한 정치적 및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시위대에 대한 발포는 당시 내무장관 최인규의 독단적 판단이라는 사법당국의 재판 결과에 따라 이승만은 법적 책임을 면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하야했다.
도대체 세상의 어떤 독재자가 국민이 물러나란다고 물러난단 말인가?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독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오히려 ‘국민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하야한 용기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
![]() |
|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통해 경제발전에 성공했다. 사진은 1978년 가을 농촌 수확 현장을 돌아보는 박정희 대통령. |

이 문항에 313명이 중복으로 응답한 결과 총 1403개의 응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략 응답자 한 사람당 평균 4.5개의 복수응답을 한 셈이다(448.2%). 이 표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긍정적인 평가보다 우세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와 비교하여 현저히 약하다.
부정적인 평가의 합은 776개로 응답자 한 사람당 부정적인 응답을 약 2.5개 선택했다(247.9%). 긍정적인 평가의 합은 627개로 응답자 한 사람당 약 2.0개를 선택했다(200.3%). 부정적인 응답이 긍정적인 응답보다 약 1.2배 많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2.5배에 비하면, 박정희의 1.2배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응답 결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앞에서 제시한 이승만과 같은 방법으로 분석을 추가로 실시하였다. 이를 정리한 결과가 표4)이다.

이 척도의 분포를 보여주는 막대그래프 역시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치우쳐 있음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균형을 이루는 0점의 빈도가 가장 많아 62명이다. 다음으로는 부정적인 평가인 -1점이 57명 그리고 -2점이 48명이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긍정과 부정이 대충 균형을 이루면서 분포한다. 예컨대 +1점이 34명으로 그다음 순서를 차지하고, 이어서는 -3점이 28명, 그리고 다시 +2점이 24명 등으로 키를 맞추면서 분포한다. 이 척도의 평균은 -0.48로 대학생들 사이에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그 정도는 평균이 -1.53인 이승만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우호적이기도 하다.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사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평가는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예컨대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 가운데 가장 높은 74.1%의 동의를 얻은 ‘반공을 국시로 삼아 인권을 억압하고 유신을 하여 장기집권을 도모한 독재자’의 경우를 따져보자. 당시 고조되고 있던 남북대결에 대비하여 총력체제인 유신을 단행한 일은 국가의 운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당시 전개되던 국제환경의 변화, 즉 닉슨독트린으로 인한 주한미군의 철수 및 미국과 중공의 수교에 따른 대만의 고립과 월남의 패망 등과 같은 변수는 물론이고, 청와대에까지 침입한 1·21 무장공비 사건과 북한이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고 미국 정찰기 EC121을 격추하는 등과 같은 안보불안이 대통령에게 유신과 같은 비상체제를 추동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능성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옳은가를 객관적으로 따져보는 작업을 마쳐야만 답을 구할 수 있다. 첫째, 그와 같은 상황변화에 대한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유신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그와 같은 상황변화에 대한 인식이 올바른 것이었기 때문에 유신은 단행했어야만 했다. 셋째, 그와 같은 상황변화에 대한 인식이 비록 올바른 것이라 해도 여전히 유신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과연 이 세 가지 대안적 판단 가운데 무엇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인가?
이 글은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글이 아니다. 다만, 10월 유신 나아가 인권탄압이나 장기집권과 같은 쟁점이 매우 논쟁적인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강조하고 싶다. 대학생들이 과연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설문의 응답을 선택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응답자인 대학생들이 성장하면서 겪은 교육과정은 물론 언론이나 인터넷 환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제공받은 단순한 평가를 사려 깊게 생각해 보지 않고 선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10월 유신이라는 매우 복합적인 역사적 쟁점을 입체적으로 접근해 심사숙고한 결과로 이러한 응답이 나온 것이 아닐 것이란 추론이다.
나머지 동의를 많이 받은 부정적인 평가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예컨대 박정희가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여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외면한 사람’이라는 응답 역시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응답이다. 왜냐하면 정신대·위안부 문제는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문제가 제기된 현재의 쟁점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던 시기에는 정신대·위안부 당사자들을 포함하여 누구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문제로 인식되지도 않은 현재의 쟁점을 들어 박정희의 외교를 굴욕외교라고 치부하는 일은 정말이지 반역사적인 인식이다.
또한 ‘정경유착으로 재벌을 살찌우고 노동자를 착취한 독재자’라는 응답도 동일한 문제를 드러낸다. 당시 정치는 경제가 정치논리, 즉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도록 경제를 정치로부터 철저히 분리하는 역할을 제공했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될 수 있었다는 해석이 오늘날 학계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다시 말해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면서 오히려 둘 사이엔 협조적인 시너지가 나타날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 시대는 노동자를 착취한 시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물론이고 농민까지도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층의 상승 이동 사다리가 활짝 열려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는 기업과 노동자가 ‘동반성장’하던 시대였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한 친일파’라는 응답 역시 식민지 시대에 군인이 되기 위해 일본의 군사학교를 다닌 것을 두고 친일파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판단이 우세하다. 동일하게 일본육사를 졸업한 장제스는 물론 지청천을 두고 누구도 그들이 친일파였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박정희에게만 낙인을 찍고 있다.
나아가서 평범한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여대생을 술자리로 부르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박정희는 서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또한 도덕적으로 청렴하여 서거 후 단 한 푼의 부정한 돈도 발견되지 않은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선거에서 지역감정을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된 사이비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문제다. 이런 평가와는 정반대로 박정희는 영호남 농촌의 지지로 도시의 지지를 받던 윤보선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대통령이다. ‘여촌야도(與村野都)’가 당시 선거의 일반적 구도였음을 상기하면 이 문제도 비난을 위한 비난일 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응답자의 의견이 형성된 시기와 영향을 미친 집단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두 대통령에 대한 인식을 대학생들은 과연 언제, 그리고 누구로부터 얻게 되었는가를 각각 살펴보자. 우선 ‘이번 설문조사에서 밝힌 본인의 의견이 형성된 시기는?’이란 질문에 대한 응답은 표5)와 같다.

응답자 313명이 중복으로 응답한 경우를 모두 포함해 응답의 전체 숫자는 317개이다. 이 가운데 ‘대학생이 되어서’라는 응답이 141개인데 이를 313명 기준으로 비율을 구하면 45.0%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라는 응답은 124명인데 마찬가지 방법으로 비율을 구하면 39.6%이다. 따라서 대학생들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85% 정도가 ‘고등학생 시절’ 혹은 ‘대학 진학 후’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 시기는 별 영향력이 없다.
다음으로 ‘이번 설문조사에서 밝힌 본인의 의견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집단은?’이란 질문에 대한 응답 표6)을 살펴보자. 응답자 313명이 중복으로 응답한 경우를 모두 포함해 응답의 전체 숫자는 407개이다. 이 가운데 대학생들의 의견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우는 ‘인터넷 매체를 통한 정보’로 94개(30.0%)이고, 그에 이어 ‘중고교 시절의 교사’가 75개(24.0%), ‘신문과 방송 등 매스미디어의 보도’가 64개(20.4%)이다. 그다음으로는 ‘대학생이 된 후 수강한 과목의 교수’가 47개(15.0%), ‘부모·형제 등 가족’이 36개(11.5%), ‘관련된 주제에 관한 독자적 연구’가 33개(10.5%) 순서였다. 가장 영향이 작은 경우는 ‘가까운 친구들’로 19명(6.1%)이었다. ‘모르겠다’는 응답도 39명이나 되었다(12.5%).

이러한 응답의 결과는 앞에서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문제를 항목별로 깊이 있게 검토할 때 지적한 문제, 즉 ‘역사교육이 문제고, 언론환경이 문제’라는 지적이 사실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다. 역사교육과 인터넷을 포함한 언론환경이 대학생들의 현대사 인식을 부정적으로 유도하고 있음을 이 설문 결과가 명백히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인터넷’(30.0%), ‘교사’(24.0%), ‘매스미디어’(20.4%), 세 종류를 합치면 이들은 무려 74.4%라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모·형제 등 가족’이 미치는 영향 11.5%보다 무려 7배에 가까운 영향력이다.
대학생들은 성공한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인식
대학생 3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는 성공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우리의 젊은이들이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표본을 구성한 학생들이 대부분 인문·사회 전공이고 또한 남학생들 가운데는 군복무를 마친 경우가 많아 이번 조사의 대상이 된 집단은 평균적인 학생들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현대사 문제에 지식과 관심을 가진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유라시아 대륙이 온통 공산주의로 붉게 물들 때 한반도 남쪽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를 온갖 역경을 뚫고 세우고 또한 6·25 남침전쟁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이승만 대통령을 우리 대학생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비록 그가 말년에 실수를 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실수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에게 기여한 공로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학생들의 평가가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다소 우호적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부정적인 경향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천 년 가난을 물리치고 경제를 건설하여 마침내는 북한을 압도하는 국력을 일궈내며 민족중흥을 실현했다. 물질적인 번영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자극으로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대통령이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 또한 잘못이 없는 완벽한 지도자는 아니지만, 그의 기여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모범적인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거쳐 이제는 선진국 문턱까지 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 또한 젊은 대학생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고 있다.
무엇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이런 인식을 갖게 만들었는가? 이 조사 결과는 바로 ‘교육이 문제고, 언론이 문제’라는 그동안의 지적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준 환경이 바로 ‘인터넷’ ‘교사’ 그리고 ‘매스미디어’라는 저간의 주장을 적나라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부정적인 인식이 입력되는 시기가 ‘고등학교 재학시절’ 및 ‘대학생이 되어서’라는 사실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동안 줄기차게 문제가 제기되어 온 ‘교육과 언론’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법원에 의해 ‘법외노조’라는 판결을 받은 전교조의 활동을 더욱 억제하여 우리 젊은이들이 고등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부도덕한 국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 또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현대사 교과서를 적절히 수정하여 있는 그대로의 ‘성공한 현대사’를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매스미디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대한민국을 비방하는 악의적인 여론이 고등학생과 대학생 사이에 퍼지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효순·미선 사건’은 물론이고 ‘광우병 사태’ 그리고 ‘천안함 사건’ 등이 바로 이러한 문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경우다. 다시는 이런 근거 없는 대한민국 폄훼가 우리 사회에 똬리를 틀고 젊은 세대의 영혼을 갉아먹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한 정부는 물론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각각의 가정에서 젊은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부모가 소통하며 확인하여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와 가정이 힘을 합해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다. 물론 ‘교육’이나 ‘언론’ 그리고 ‘인터넷’이 이를 비틀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장치도 만들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