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越)의 도읍지 사오싱, 쑤저우와 함께 ‘중국의 베네치아’
⊙ 사오싱 출신 루쉰의 소설 〈공을기〉 주인공이 즐겨 마시던 황주(黃酒)
모종혁
1971년생.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 사오싱 출신 루쉰의 소설 〈공을기〉 주인공이 즐겨 마시던 황주(黃酒)
모종혁
1971년생.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기원전 6세기 말 오나라 6대왕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를 등용해 국력을 키웠다. 손무는 《손자병법》의 저자다.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기용해 숙적 초(楚)를 대패시키며 춘추오패로 등극했다.
합려는 BC 496년 월의 구천(勾踐)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죽었다. 그는 숨지기 전 아들 부차(夫差)에게 설욕을 당부했다. 부차는 밤마다 장작 위에 누워 자면서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기억했다. 또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군사력을 키웠다. BC 494년 부차는 군사를 이끌고 월로 진격했다. 오의 대군에 구천은 맥없이 패배했다. 산속에서 자결하려 했으나, 범려(范蠡)가 훗날을 도모하자며 말렸다. 구천은 오의 재상 백비에게 먼저 뇌물을 바치고 투항했다.
오자서는 당장 구천을 죽여야 한다며 진언했지만 부차는 백비의 말을 받아들여 구천을 살려줬다. 대신 구천 부부를 쑤저우로 압송해 3년 동안 고된 노역에 종사토록 했다.
오월동주·와신상담·토사구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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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박물관에 전시된 구천 동상. 수많은 한자성어를 낳은 주인공이다. |
이 이야기들에서 ‘오월동주’ ‘와신상담’ 같은 사자성어가 나왔다. 오월전쟁 이후 중국은 춘추시대를 마감하고 전국시대에 진입했다. 전쟁에는 유명한 미인들도 등장한다.
그 첫 번째가 서시(西施)다. 서시는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고대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힌다. 서시의 고향은 사오싱 서남쪽의 주지(諸曁)다. 서시는 범려의 애첩이었다. 하지만 범려는 미인계를 위해 애첩을 부차에게 과감히 바쳤다. 서시의 교태와 간청으로 구천은 사오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가 멸망한 뒤 서시의 종적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첫째는 애인 범려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사라졌다는 설이다. 둘째는 자살한 부차에 대한 미안함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범려는 구천의 복수를 도운 뒤 사오싱을 미련 없이 떠났다. 이때 재상인 문종에게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말을 남겼다. ‘토사구팽’의 유래다.
사오싱은 유구한 역사와 흥미로운 스토리를 지닌 고도(古都)다. 사오싱의 지형은 동서가 산이고 중간이 언덕이다. 도시 내외에 여러 강이 흘러, 예부터 쑤저우와 함께 ‘중국의 베네치아’로 명성이 높았다. 사오싱 시내 곳곳에 놓인 석조 다리 아래나 전통 민가 옆으로 물이 흐르고 나룻배가 지나간다. 이 배는 우펑촨(烏蓬船)으로 배 위에 검은 천으로 만든 지붕이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우펑촨은 800년 전부터 사용됐던 배다. 사공은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해 노를 젓는다.
사오싱은 저장성의 2급 도시다. 저장성 성도인 항저우와 항구도시 닝보의 중간에 있다. 자동차로 항저우에서 1시간, 상하이에선 2시간 걸린다. 2014년 상주인구는 495만명이고, 1인당 GDP는 8만6135위안(약 1550만원)이다.
사오싱 출신인 《아큐정전(阿Q正傳)》의 저자 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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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고리에 있는 루쉰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집의 입구. |
그 뒤 도쿄로 가서 외국 작품을 번역했다. 그때 동생이자 수필가인 저우쭤런(周作人)과 함께 번역집을 내기도 했다. 1909년 중국으로 돌아와 교사가 됐지만, 학교 고위층과 갈등으로 사직과 복직을 되풀이했다. 1912년부터 교육부 관리로 일했고 이듬해 거처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수년간 루쉰은 허무주의에 빠져서 고전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한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18년에는 《신청년》에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광인일기(狂人日記)〉를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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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미서옥에는 루쉰이 평소 지각하지 않기 위해 썼다는 글자가 새겨진 책상이 남아 있다. |
루쉰은 이로 인해 파면당했다. 국민당 정권이 반정부 지식인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루쉰은 여제자 쉬광핑(許廣平)과 함께 베이징을 떠나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1930년 좌익작가연맹을 결성했고, 1932년 민권보장동맹을 조직했다. 1936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임종하면서 “원수들이 나를 증오하게 하라. 나도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루쉰의 유해는 ‘민족혼’이라 쓰인 천에 덮여져 매장됐다.
루쉰은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남긴 작품은 중편 1편, 단편 32편 등이 전부다. 또한 작품마다 수준 편차가 심하고 문장이 난해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중국인들은 “루쉰의 소설은 재미없다”며 잘 안 읽는다. 반면 번역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여 1938년 간행된 《루쉰 전집》의 절반이 번역 작품이었을 정도다.
사오싱의 최대 관광지, 루쉰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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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천의 지붕이 설치된 우펑촨은 사오싱을 대표하는 명물 중 하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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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공을기〉를 형상화해 문을 연 상점 공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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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을기〉에 등장하는 술집 함형주점. 루쉰이 귀향할 때마다 즐겨 찾았다. |
황주 중 가장 유명한 술, 사오싱주
황주는 구천이 부차에게 복수하려 출정하기 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마시게 했다는 술이다. 이런 기록이 있어 포도주, 맥주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손꼽힌다.
황주는 쌀을 쪄 식힌 다음 보리누룩을 섞어 발효해 빚는다. 색깔은 짙은 황색이며 알코올 도수는 15~20도에 불과하다. 맛이 진하면서 부드럽고 가격이 싸 서민들이 즐겨 마셨다. 각종 요리 맛을 내는 조미주로 쓰이기도 한다. 황주 중 가장 유명한 술이 사오싱주다.
사오싱주는 찹쌀을 쪄 보리누룩과 발효시킨다. 누룩 외에 신맛이 나는 재료나 감초를 넣는다. 물은 사오싱 교외에 있는 젠후(鑒湖)에서 떠서 사용한다. 젠후의 물은 미네랄이 풍부하다.
사오싱주는 진흙으로 빚은 항아리에 3년 이상 숙성시킨다. 오래 숙성할수록 향기가 좋아지고 빛깔은 암홍색을 띠게 된다. 사오싱에는 여러 종류의 황주가 있다. 제조 방식과 원료에 따라 위안훙주(元紅酒), 자판주(加飯酒), 샹쉐주(香雪酒), 산냥주(善釀酒) 등으로 나뉜다.
위안훙주는 사오싱주의 전통 방식에 따라 빚는다. 숙성시키는 술항아리 안을 붉은색으로 칠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술맛은 약간 쓴맛이 돈다. 보통 시중에서 판매되는 값싼 사오싱주는 거의 다 위안훙주로, 전체 사오싱주 생산량의 80%나 된다.
자판주는 다른 사오싱주보다 찹쌀을 10%가량 더 넣는다. 술맛은 위안훙주처럼 약간 쓰지만 더 부드럽고 짙다. 최근에는 브랜드의 고급화가 진행되며 자판주의 생산량이 급격히 늘고 있다. 샹쉐주는 맛이 달고 향이 진하다. 도수는 20도 이상으로 사오싱주 가운데 가장 높다. 따라서 숙성기간이 가장 길다.
산냥주는 위안훙주를 1~3년 묵혔다가 빚기에 맛이 달고 진하다. 산냥주는 1664년에 문을 연 선융허(沈永和) 양조장이 개발해 빚었다. 선융허 양조장은 처음에 간장을 생산했었다. 한 간장 기술자가 수백 년 동안 전승해 온 전통기술을 원용해 술을 제조해서 지금처럼 독특한 산냥주를 생산하게 됐다. 여기서 냥(釀)은 ‘주모(酒母)’를 뜻한다.
사오싱황주그룹이 세운 황주박물관
옛날 사오싱 외곽에 한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아내가 임신하자 남편은 아들이 태어날 때 마실 술을 빚었다. 기대와 달리 딸이 태어나자 화가 나서 술을 마당 한편 나무 밑에 묻었다. 딸은 장성해 용모가 아름답고 효성이 지극했다. 딸이 시집갈 때가 되자 아버지는 이전에 묻어놓았던 술이 생각났다. 꺼내보니 술은 맛있게 숙성돼 있었다. 그 술을 ‘뉘얼훙(女兒紅)’이라 불렀고 그 뒤 사오싱에서는 딸을 낳으면 술을 빚어 땅에 묻어놓는 관습이 생겼다.
주민들은 겨울철에 사오싱주를 살짝 데운 다음 저민 생강을 넣어 마시며 한기를 쫓아낸다. 여름철에는 얼음을 넣어 마신다. 시내 곳곳에는 홍등을 내건 황주 파는 술집이 즐비하다. 황주의 본고장답게 일정한 규모를 갖춘 수십 개의 주류업체들이 경쟁하고 있다. 이 중 구웨룽산(古越龍山)은 중국 최대의 생산규모를 자랑한다. 구웨룽산은 사오싱황주그룹의 상장회사다. 사오싱황주그룹은 선융허 양조장을 기원으로 한다.
선융허는 직계 후손에게만 술 제조비법을 전수했다. 특히 위안훙주의 양조술은 다른 술도가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탁월했다. 여기에 산냥주까지 개발했다. 선융허의 6대손인 선모천(沈墨臣)은 사오싱주를 중국을 대표하는 술로 발돋움시킨 주인공이다.
19세기 말 선모천은 중국 전역에 판매망을 구축했다. 인재 양성에도 힘써 젊고 유능한 품주사(品酒師)를 키워냈다. 품주사란 술을 개발하고 품질을 유지하는 양조 기술자를 말한다. 이런 선모천의 노력 덕분에 사오싱주는 황주의 대표주자로 발돋움했고, 해외로까지 명성을 떨쳤다.
사오싱황주그룹은 1992년 선융허 양조장과 국유기업인 사오싱시황주를 합병한 회사다. 2014년 현재 자산규모는 55억9000위안(약 1조62억원), 직원 수는 4100여 명에 달한다. 이 회사는 중국 정부가 오랜 역사를 지닌 상품에 수여하는 중화라오쯔하오(中華老字號) 브랜드를 4개나 보유하고 있다.
2008년에는 구웨룽산이 4억2000억 위안(약 756억원)을 들여 황주박물관을 열었다. 황주박물관은 황주 및 사오싱주의 역사와 제조 과정을 다양한 문물과 자료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루쉰고리와 황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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