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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⑬ 申叔舟

士林의 명분론에 매몰된 언어 천재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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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언어 능력, 학문적 깊이, 통찰력을 바탕으로 對日외교에서 활약
⊙ 《해동제국기》 지어 일본의 정치·군사·습속 등에 대해 記述
⊙ 세조, 한명회에게 內治, 신숙주에게 外治 맡겨
⊙ 임종 시 성종이 유언을 묻자,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시옵소서”라고 대답

張哲均
⊙ 65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신숙주는 뛰어난 재상이자 외교관이었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는 한글 창제를 비롯해 학문과 정치, 외교, 안보 등 다양한 국정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많은 업적을 남긴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名臣)이다. 하지만 세조 반정(反正)에 가담하여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표상인 듯이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훗날 등장한 사림(士林) 세력의 명분론에 의해 변절자로 폄하된 이후 지조와 신의가 강조되는 조선사회에서 나물 중에서도 가장 빨리 쉬어버리는 ‘숙주나물’에 비유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쓰인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해방 후에는 교과서에 실렸지만, 그의 부정적 이미지는 끝내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신숙주는 국내적 문물정비와 대외적 안정이 필요했던 조선 전기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자신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를 토벌하여 안보 분야에서도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리고 폭넓은 해외 경험과 국제적 안목을 바탕으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안보상황을 극복하면서 대외관계 외치(外治)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는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한글 창제뿐 아니라 외교에 혁혁한 공헌을 했는데, 일례로 그가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대일외교의 지침서로서 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세계화시대를 맞아 신숙주의 변절에 관한 ‘불편한 진실’과 변절의 이름 아래 묻혀버린 그의 여러 실적을 재조명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公人 신숙주의 경력서
 
  신숙주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덕린(德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포시(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별칭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보한재(保閑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공직 경력을 오늘날의 직책(괄호 안-필자 의견)과 비교하여 재구성해 보자. 1438년(세종 20) 21세에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생원·진사(고등고시 양과 합격-사무관)로 공직생활을 출발해서, 1439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으로, 1441년 집현전(集賢殿)에 배속되어 부수찬(副修撰-서기관)으로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 1442년에는 일본 사신단의 일원인 서장관(書狀官)으로 대일외교에 종사하고, 귀국 후 1447년에는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 응교(應敎)로 재직하면서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제작에 참여했다.
 
  1451년(문종 1) 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이사관)을 역임하고, 145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했다. 귀국 후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차관보), 우부승지·좌부승지(차관)를 역임하고 세조반정(계유정란·癸酉靖難)이 성공하자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455년(세조 1) 예문관대제학 고령군(高靈君)에 올라 주문사(奏聞使)로 명에 사행하고 귀국하여 1456년 병조판서(국방장관)와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임하였다. 1457년 우찬성에 대사성을 역임하고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제2부총리), 1459년 좌의정(제1부총리) 직을 수행했다. 이어 1460년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로 부임해 여진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1462년 귀국해 영의정(국무총리)에 취임하고, 1467년에는 예조(외무장관)도 겸임했다.
 
  1468년(예종 1) 승정원 원상(院相·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을 맡았다가 예종이 단명하자 1469년(성종 1)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여러 번 사직을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조선 초기 세종~성종의 여섯 왕을 모시고 30여 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후, 1475년(성종 6)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글 창제에 크게 공헌한 언어의 귀재
 
신숙주의 생가가 있는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의 쌍계정. 신숙주를 비롯해 많은 선비가 공부하던 곳이다.
  〈신숙주 졸기(卒記)〉는 그가 “자라면서부터 보통 어린이들과 달랐고, 자라서 공부를 시작하자 모든 경서와 역사책을 한 번 읽으면 기억할 정도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신동(神童)으로 불린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과거에 합격했고, 처음으로 실시된 진사시험에는 서울에서 장원을 차지한 후 생원시험에도 합격하고, 또한 이듬해에는 친시문과(親試文科)에도 급제하였으며 집현전에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연구에 종사하게 된다.
 
  세종은 “올바른 정치는 올바른 도리에서 나오며, 올바른 도리를 모르고서는 성인지도(聖人之道)를 따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신숙주는 평소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 새로운 책을 열심히 읽고 동료들 대신 숙직을 하면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했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졌으며, 하루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든 그를 발견하고 세종이 직접 어의(御衣)를 하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참조)
 
  그는 타고난 신동, 노력하는 수재이자 또한 언어 천재였다. 한글 창제와 표준화의 성공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신숙주의 뛰어난 언어 실력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그는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 등의 말에 능통해서 때로 통역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뜻을 통했다. 뒤에 공이 손수 모든 나라의 말을 번역하였는데 통역들이 이에 힘입어서 스승에게 일부러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보통 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 언어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오는 기록을 보면 신숙주는 종래 설총(薛聰)이 사용했던 이두(吏讀)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는 통역이 필요 없었고, 몽골어·여진어에도 능통했고, 인도어와 아라비아 문자까지 7~8개의 언어를 터득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숙주는 당시 만주의 요동에 유배되어 있었던 명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이자 음운학자인 황찬(黃瓚)을 13번이나 찾아가 음운(音韻)과 어휘에 관해 의논하고 관련 지식을 얻었다.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은 신숙주의 한어(漢語) 수준이 상당히 높아 막힘없이 대화하고 말을 들으면 빨리 깨닫는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명의 학자가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도 함께 운서(韻書)와 음운을 연구했는데 그의 학문 열정에 감복한 명 사신은 잔치도 마다하고 그와 토론, 담론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대조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내 한글 창제를 도왔다. 또한 한글 창제 후 중국 한자음을 새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는 표준 말글 사업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443년(세종 25) 훈민정음의 해설서를 집필하고 1445년에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보완했으며 1446년에는 《훈민정음해례본》을, 그리고 1448년에는 우리나라의 전승 한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설정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였다.
 
 
  언어 천재의 외교 입문
 
  언어 천재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은 자연히 외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세종 원년 대마도를 정벌한 뒤 소원했던 일본은 외교관계를 재개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달라고 조선에 요청해 왔다. 1442년(세종 24)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 세종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기로 하고 글 잘하는 선비를 서장관으로 삼기로 하였다. 집현전 학사로서 일본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신숙주가 선택된 것은 당연했다.
 
  이때 신숙주는 과로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일어난 직후였으나 자청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세종도 그의 건강을 염려했으나 마침내 승낙했다. 세종이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뽑아 보낸 뜻은 단순히 그의 언어 능력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외교도 고려한 것이었다. 왜구(倭寇)에 시달려온 세종은 그들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교린(交隣)의 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우리의 앞선 학문과 문화를 일본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적임자가 신숙주였고 그를 외교관으로 등용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서장관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면서 사행(使行)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 사신단의 서열 3위에 해당하는데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서장관은 외교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특히 뛰어난 사람이 임명되는 직책임을 감안할 때 세종은 집현전 학자로 있던 신숙주를 신뢰하고 높게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신단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자 가는 곳마다 일본의 문사와 승려들이 찾아와 신숙주에게 시나 글씨를 요청하고, 학문을 논의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서슴없이 부탁을 들어주고 거침없이 답변해 그들을 감탄하게 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때 신숙주는 ‘문화외교’를 전개하면서도 냉철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일본을 관찰하고 그들의 동정을 살펴 일본 지도를 작성하고 제도·풍속도 기록했다. 신병을 무릅쓰고 출발했지만, 신숙주는 장기간 동안의 외교적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성공적인 외교관으로서의 출발이었으며, 외교 분야에서 많은 치적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통찰력과 외교적 안목으로 저술한 《海東諸國記》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
  신숙주는 일본에 다녀온 이후 보고 듣고 관찰한 일본의 풍물과 관습, 언어, 정치 세력, 일본의 기후, 자연조건 등을 상세하게 견문록으로 남겼다. 그는 이후 일본을 몇 번 왕래하면서 그동안의 일본 사행과 대일외교의 경험, 그리고 당시의 외교 관례 등을 정리하여 1471년(성종 2) 《해동제국기》를 완성, 간행했다. 신숙주는 책의 서문에 “이웃 나라와 사신이 왕래하고, 풍속이 다른 사람들을 어루만져 접대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형편을 알아야 한다”라고 저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해동제국’은 일본 본토와 구주, 대마도,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 등을 말한다. 신숙주의 서문과 7장의 지도, 〈일본국기(日本國紀)〉, 〈유구(琉球)국기〉, 〈조빙(朝聘)응접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일본국기〉에서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지도로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와 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과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우리 측 관궤(館餽·객사로 보내는 음식)의 형식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의 일본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목판본 지도로서 현재 전해지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랜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일본국기〉의 ‘국속(國俗)’ 항목에는 “일본 천황의 아들은 그들의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음식 할 적엔 칠기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를 사용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으며, 사람마다 단검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로써 이어 그 길이가 땅에까지 닿았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그 이빨을 검게 물들였다. …남녀의 의복은 모두 얼룩지게 물들였고, 푸른 바탕에 흰 무늬가 있다”고 일본의 풍속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조선의 대일외교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능숙하게 쓰고 배 부리기에도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을 진무(鎭撫)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면 예를 갖추어 조빙(朝聘)하지만, 법도에 어긋나게 하면 곧 방자하게 노략질을 합니다”고 일본을 평가한 뒤,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책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으며, 변어(邊禦)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에 있으며, 전쟁에 있지 않고 기강(紀綱)을 진작하는 데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그의 대일외교 방향을 다시 정리해 보면, 1. 일본은 바다를 경계로 하지만 거리상 지척에 있는데 2. 성격이 사납고 배 부리기에 익숙하며 무력이 강하여 전란 발생의 경계심을 나타내고 3. 그 대비책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며 그들을 어루만져 달래는 ‘선린유화외교’가 상책(上策)이고 4.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문제는 밖에도 있지만 안에도 있기 때문에 국내 정치를 충실히 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숙주는 임종하기 직전에도 성종(成宗·재위 1469~1494)에게 ‘일본과의 화평(和平)을 잃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책은 1471년에 1차로 완성된 이후 일본과의 외교적 내용이 계속 보완되었다. 예를 들어 왜인들이 거주하던 삼포(일본에 개항한 세 항구)의 상황에 관한 자료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후 대일외교에 있어 중요한 준거가 되어 외교협상에서 자주 활용되었다. 후대에 이르러서도 이수광(李晬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도 인용되어 있고 이후 조선 후기까지 일본으로 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외교 지침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이후에 일본 사행을 떠나는 통신사들의 필수 서책이 되었다.
 
 
  東方巨擘으로 불린 신숙주의 문장과 시문
 
  신숙주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고, 뒤에 윤회(尹淮)와 정인지(鄭麟趾)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다.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고 한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리자 그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찬문(贊文)을 썼는데 이 글씨가 그림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 그림은 현재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여러 언어에 능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다양한 책을 편찬하고 역사적, 학문적 소양이 깊어 학문 교육에도 업적을 남겼다. 세조의 문화 통치를 위해 역대 왕들의 귀감이 될 치적을 엮은 《국조보감(國朝寶鑑)》,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을 총괄하였다. 그의 많은 시와 다양한 저작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다수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앞서 소개한 《해동제국기》는 그 내용은 물론 수려한 문장, 그리고 정확하고 세밀함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저술로 오늘날에도 외교 분야 종사자들에게는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등은 신숙주의 학식에 관한 행적을 전하고 있다. 1450년(세종 32) 명의 사신 예겸(倪謙) 등이 조선에 왔을 때 그를 당할 자가 없어 조선의 학문이 짧다고 무시당하게 되자, 세종은 신숙주와 성삼문을 보내 글을 겨루게 했다. 〈졸기〉는 “예겸이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를 짓자 신숙주가 바로 그 자리에서 보운(步韻)으로 이에 화답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예겸은 그에게 탄복해 신숙주를 굴원(屈原)과 송옥(宋玉·굴원의 제자)에 비유하여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 문인으로 당시 명나라에서 가장 높이 추앙받고 있는 문인이었다.
 
  세종은 이러한 신숙주를 신뢰하여 그 뒤에 그를 집현전 학사의 우두머리인 직제학으로 삼았는데 불과 서른세 살의 나이였다. 세종은 늘 “신숙주는 큰일을 맡길 만한 자이다”고 말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1451년(문종 1) 예겸이 다시 조선에 왔을 때 신숙주는 시 짓기에 나서 예겸으로부터 동방거벽(東方巨擘·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수양대군과의 인연, 사육신과 생육신 사이에서
 
  신숙주에게 있어 인생의 중요한 전기는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과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고 그들의 운명적 만남은 35세 때였다. 1452년(문종 2) 단종(端宗·1441~1457)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단종 폐위 반정을 도모하던 한명회(韓明澮)는 수양대군에게 이번 중국 사행에 신숙주를 동행하도록 조언했다. 수양대군도 세종대부터 신숙주의 높은 기량을 익히 알고 있었다.
 
  〈실록〉은 수양대군과 신숙주의 만남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수양대군이 신숙주를 집으로 초대해 “옛 친구를 어째서 찾지 않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신숙주는 “장부가 아녀자의 손 안에서 죽는다면 ‘집에서 세상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만합니다”고 화답했다. 세조는 즉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명나라로 갑시다.”
 
  명에 간 수양대군 일행은 공식적인 일을 끝내고 명 영락제(永樂帝·1360~1424)의 장릉(長陵)을 찾아갔다. 영락제는 건문제(建文帝)를 내쫓고 반정에 성공하여 황제가 되었는데 이를 ‘정난의 역(靖難之役·1399~1402)’이라고 한다. 이 장릉에서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영락제가 반정을 성공해 융성하는 명을 건설한 데 대해 교감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귀국 후 둘 사이가 급속히 가까워졌다는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귀국 후 신숙주는 문종의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죽음을 앞둔 문종으로부터 어린 왕자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종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눈치채고 신숙주·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 출신들에게 어린 왕을 부탁한 것이다. 세종도 만년에 병환이 깊어지자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후에 단종)의 앞날을 부탁했는데 이때 신숙주 외에 성삼문과 박팽년 등도 함께 있었다.
 
  야심 찬 수양대군은 조부 태종(太宗)이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이어 맏아들이 아닌 셋째 왕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일을 목격한 바 있다. 세종이 태종처럼 둘째인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거나 문종이 정종(定宗)처럼 아우인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은 조부 태종처럼 반정을 작정했다. 1453년(단종 1) 13세의 단종을 폐위시키고 수양대군은 세조(재위 1455~1468)로 즉위했다. 계유정난이다. 반정 후 신숙주는 성삼문으로부터 단종 복위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한명회 등 반정세력에게 이 사실을 고변하지는 않았다.
 
 
  국내 정치는 한명회, 대외관계는 신숙주
 
명나라 수군(왼쪽)과 교전하는 왜구(오른쪽). 왜구는 당시 조선은 물론 명나라에도 최대의 안보위협이었다.
  세조의 정난은 대의명분(大義名分)의 잣대로 볼 때 비도덕적인 정치적 야심의 소산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역성(易姓)혁명으로 창건된 조선왕조, 이어지는 왕자의 난과 ‘궁중 쿠데타’는 조선왕조의 태생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명 영락제의 정변도 세조 반정의 정당성에 일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적 도덕과 현실적 정치의 사이에서 조선의 역사는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주역은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신숙주를 한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를 정치적 혁명 동지가 아닌 능력 있는 국정 수행의 적임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숙주가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던 사실은 그의 재능이 그런 무력적 거사에는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명회는 주도면밀하면서도 행동하는 정치적 혁명가이자 책략가로 세조 집권 이후 최고의 실세로 조선 조정을 장악하고 모든 권력과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신숙주의 행보는 달랐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1등 공신 고령군으로 봉군되었지만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어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책봉(冊封) 주청사(奏請使)의 소임을 띠고 명에 가서 고명을 받아들고 1456년(세조 2)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전라남도와 다도해 해안가를 침략하는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1458년(세조 3년) 좌찬성으로 평안도도체찰사를 겸하고, 1458년 말 의정부우의정, 1459년(세조 5년)에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1458년(세조 4)에 우의정이 된 뒤에도 그는 10년간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겸하여 명, 일본과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를 총괄하는 조선 외교의 책임자로서 활약했다.
 
  병조와 예조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는 신숙주가 외교·안보 분야에서 그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으로 그의 저술 대부분도 이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사대교린의 대외관계 외교문서는 거의 대부분 그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외교에 있어서 큰 업적을 세웠다. 한명회가 내치(內治)를 담당했다면, 신숙주는 외교와 안보의 외치(外治)를 담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정 수행에 많은 공적을 남긴 신숙주에 대해 세조는 “당 태종에게는 위징(魏徵), 나에게는 숙주”라고 하여 당 태종의 명신인 위징에 견주어 그를 격찬했다. 한편 한명회에 대해서는 “한명회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고 했다. 세조도 둘의 성품과 재능을 알고 그에 적합한 역할을 나누어 맡겼다고 볼 수 있다.
 
 
  北虜南倭의 안보 위협을 극복
 
  신숙주는 세조 즉위 후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국방과 안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의 고질적인 안보 위협은 북로남왜(北虜南倭), 즉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였다. 오래도록 변방을 약탈하던 여진족과 해안가를 통해 충청도까지 올라오는 왜구들에 대한 강경 진압과 엄한 처벌이 필요했지만 조정의 의견은 일치되지 않았다. 신숙주가 나섰다. 그가 직접 자신이 출정하여 앞장서 정벌할 수 있다고 강경 토벌을 주장하자 세조는 동의하였다.
 
  신숙주는 1460년(세조 6) 마침내 강원도·평안도·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가 되어 병력을 이끌고 동북방면에 자주 출몰하여 약탈하던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을 소탕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그는 북방의 오진(五鎭)에 이르러 직접 강을 건너 산악지대로 들어가 여진족을 유인하는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고 군사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토벌을 감행했다.
 
  그날 저녁 여진족이 밤을 타서 뒤를 공격해 오자 그는 영중(營中)에서 당황하지 않고 누운 채 막료를 불러 시 한 수를 읊었다. ‘오랑캐 땅 서리 내려 변방은 찬데, 철기는 백리 사이를 누비네. 밤 싸움은 그치지 않았는데 날이 새려 하네. 누워서 북두성 보니 영롱히 반짝인다’는 내용이었다. 야밤의 기습공격이었지만 장수들이 신숙주의 대응 태세를 보면서 용기를 내어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진족을 추격하여 그 다음날 여진족의 소굴을 완파하였다.
 
  그가 여진을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고 개선하자 세조는 그의 탁월한 군사 전술을 기록에 남기도록 했다. 1461년(세조 7)에 완성한 《북정록(北征錄)》이다. 또한 남해안에도 병력의 파견을 건의하여 남해안을 약탈하는 왜구를 토벌하게 하고 해안가와 변방의 성곽을 수축, 개보수하고 화포류를 설치하여 미구에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에도 성곽을 쌓고, 각 군의 성곽도 개보수해 나갔다. 북로남왜의 위협에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로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 신숙주는 병력 1만 이상을 양성하여 국방력을 증강하도록 상주하기도 하였다.
 
 
  《懲毖錄》에 등장하는 신숙주의《해동제국기》
 
  조일 7년전쟁(壬辰倭亂)을 몸소 경험한 유성룡은 사직한 후 낙향하여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징비록은 책이지만 국보(제132호)로 지정되어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징비(懲毖)’는 ‘징전비후(懲前毖後)’, 즉 “지난 잘못을 거울삼아 후일을 대비한다”는 의미로 《시경(詩經)》의 소비(小毖) 편에 나온 구절(予其懲而毖後患)에서 연유한 것이다. 즉 우리가 겪은 임진난(壬辰亂)을 기록함으로써 훗날 다시 올지 모르는 우환을 경계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유성룡은 책의 본문을 시작하면서 먼저 신숙주의 일화를 기술하고 있다. 성종이 죽음을 앞둔 신숙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소?”라고 묻자 신숙주는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시옵소서”라는 말을 남겼고 이 말을 들은 성종이 일본에 화친을 위한 사신을 파견했다는 대목이다. 유성룡은 일본의 침략을 겪은 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떠올리면서 《징비록》을 남긴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숙주는 이 책을 통해 첫째, 일본이 일으킬지도 모를 전란에 대한 경계심과, 둘째 대비책으로 무력 사용보다는 평소 그들을 어루만져 달래는 외교, 셋째 나라 안의 정치를 충실히 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하는 국론통일과 국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특히 세 가지를 명심하라고 했다. 첫째, 한 사람의 정세 오판으로 천하의 큰일을 그르침을 경계하는 것, 둘째 지도자가 군사를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는 것, 셋째 유사시 믿을 만한 후원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이 말하는 요지는 ‘자강(自彊)과 유비무환’이다. ‘환란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힘을 길러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신숙주의 외교 유화책과 국론통일 지적에도 불구하고 120년 후에는 결국 임진전란을 맞게 되고, 유성룡은 다시는 이런 환란을 겪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징비록》을 남겼지만 훗날 조선은 일본의 강제병합을 막지 못했다.
 
 
  신숙주와 숙주나물의 불편한 진실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조 반정에 동참해 변절자로 후세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신숙주에게는 나물 중에서도 가장 쉽게 변질이 잘 된다는 ‘숙주나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따라다닌다.
 
  한국어 사전에 의하면, 숙주나물은 ‘녹두를 그릇에 담고 물을 주어 싹이 나게 한 나물’인데 금방 썩거나 말라 버려서 신선한 상태로 팔기가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2년》에는 “숙주나물은 신숙주가 집현전 동료였던 사육신을 배반하고 세조의 공신이 되었으며, 죄없는 남이(南怡)장군을 죽이고 거듭 공신의 호를 받은 사람이 되자 서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성(姓) 자체를 박탈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세조에게서 극진한 총애를 받던 신숙주가 평소에 녹두나물을 즐겨 하여 밥상에 이 나물 반찬이 끊일 때가 없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세조가 앞으로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부르라고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또한 세조가 좌의정 신숙주에게 기근이 들어 배고파하는 백성들을 위해 빨리 성장하고 쉽게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서 영양이 풍부한 녹두 열매의 수입을 권장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상반된 이야기들은 출처나 근거가 모두 분명치 않은 야사나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들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숙주에 대한 세상의 비난이 글로 나타난 것은 -현재까지 조사된 것으로는- 조선 말 이건창(李建昌)의 장편 시 〈고령탄(高靈歎)〉이 처음이다. 신숙주가 죽음에 임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후회와 한(恨)을 스스로 탄식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신숙주와 숙주나물을 관련지어 묘사한 문헌은 1920년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단종을 보위하지 않고 세조의 편에 선 신숙주를 녹두나물에 비유하여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고, 만두소로 넣을 때 변절자 신숙주를 으깨듯 숙주나물을 으깨어 넣는다”는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숙주나물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밝혀진 바 없어 숙주나물이 신숙주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숙주나물이란 이름이 먼저 있었고 후대에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인지, 분명치 않다. 글로써 신숙주를 배신의 대명사처럼 자리매김시킨 데에는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한몫했다. 일제 강점기에 출판된 이 책은 널리 읽혔고, 해방 이후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후 자주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이 소설에서 특히 독자의 관심과 분노를 자극하는 결정적 대목이 신숙주 아내의 ‘자살 설화’이다. 신숙주가 사육신이 죽은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가 신숙주에게 침을 뱉으며, “어찌 죽지 않고 비겁하게 살아왔느냐?”며 꾸짖고는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윤씨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미 자연 병사하였기 때문이다.
 
 
  변절자인가, 유능한 재상인가
 
  이제 우리는 ‘변절자 신숙주’와 ‘유능한 재상 신숙주’의 평가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 고민에 앞서 신숙주는 왜 배신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본다. 그의 변절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고 수양과 반정세력에 의한 ‘피동적 선택’이었다. 물론 자의가 아닌 타의에 강요받은 선택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변절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다만 30대의 비정치적 성향의 ‘선비형 천재’에게 그런 선택은 운명으로 여겨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숙주는 반정을 거부해 사육신이 되는 삶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동시에 반정 참여를 대가로 권력과 부귀영화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은 그가 “항상 대체(大體)를 생각하고 소절(小節)에는 구애되지 않았으며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강하(江河)를 자르듯 하여 조야(朝野)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고 적고 있다. 실록을 쓴 사신(史臣)도 “세종이 ‘신숙주는 국사(國事)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 세조는 ‘경은 나의 위징(魏徵)이다’라고 하였다”고 기록해 전하고 있다.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는 성삼문 등으로부터 단종 복위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한명회 등 반정세력에게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金礩)이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단종 복위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출처 불명의 소문이 퍼지면서 후에 ‘생육신’이 된 김시습(金時習)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로 규탄했다.
 
  성종대에 들어 대의명분에 입각한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한명회 등 반정의 공신들을 훈구파(勳舊派)로 배척했고, 중종(中宗·재위 1506~1544)대에는 주류세력이 되어 사육신과 생육신의 용어를 만들고 사육신의 성삼문은 충절의 표상으로, 신숙주는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매도했다.
 
  신숙주는 훈구 공신의 지위에 있었으나 평생 사치스럽게 행동하지 않았고, 위세를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세인들의 칭송과 덕망 높은 인물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장례는 지극히 간소하게 하고 무덤에는 몇 권의 책을 넣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사후 사림세력이 정치적 주류를 이루면서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도 함께 묻혀버렸다.
 
  그는 명분보다 현실을 택한 현실주의자였다. 한편 사육신이 된 성삼문은 현실보다는 명분을 택한 이상주의자였다. 신숙주는 현실과 결과를 중시했고, 성삼문은 이상과 과정을 중요시했다. 조선의 개국을 주도한 현실주의자 정도전(鄭道傳)과 충절의 표상인 정몽주(鄭夢周)를 신숙주와 성삼문에 비교하면 지나친 것일까?
 
  신숙주를 평가함에 있어서 역사의 평가는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신숙주의 반정 가담은 사실이지만, 이를 숙주나물에 비유하는 것은 소문이 구전으로 전해져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만들어낸 이야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또 하나의 사실 왜곡이다.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신숙주를 재조명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500년 전 공자(孔子)도 이러한 진실의 왜곡을 경계하면서 “소문은 우자(愚者) 앞에서 커지고, 현자(賢者) 앞에서 멈춘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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