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신저, “북한문제 해결 못 하면 미국 슈퍼파워라 할 수 없어”
⊙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불러온 북한 핵무장 가속화
⊙ 김진우 전 美 국무부 선임보좌관,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서 발견된 북한 계좌로 북한 더 압박할 수 있었다”
⊙ 글렌 밴허크 美 북부 사령관, “2017년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했다”
⊙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불러온 북한 핵무장 가속화
⊙ 김진우 전 美 국무부 선임보좌관,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서 발견된 북한 계좌로 북한 더 압박할 수 있었다”
⊙ 글렌 밴허크 美 북부 사령관, “2017년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했다”
-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로 향하는 소련 선박을 검색하는 미국 구축함. 사진=조선DB
다시 북핵(北核)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북핵에 대한 입장을 대략적으로 표명했다. 출범 100일 만인 지난 4월 30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젠 사키 대변인이 확인해줬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실용적 접근’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북한이 양보할 수 있는 게 뭔지 알아내 단계적으로 합의를 추진한다.”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이나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을 참고하면 그렇다.
북한이 비핵화(非核化) 트랙에서 10만큼 양보하면 10만큼 제재(制裁)를 완화하는 식이다. 오바마 정부 시절의 ‘전략적(戰略的) 인내’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바마 정부는 제재라는 압박을 통해 북한의 핵 개발 의지를 꺾겠다는 입장이었다. 처음부터 장기전(長期戰)을 각오한 셈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북핵은 결국 미국과 북한 간의 문제였다. 예를 들면, 처음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할 때부터 북한은 핵(核) 문제에 미국을 결부시켰다. 북한은 1985년 12월 12일 NPT에 가입한 후 발효일로부터 18개월 안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전면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북한은 미국에 협정을 체결하는 대신 남한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수하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오가면서 핵실험을 해왔다. 플루토늄과 우라늄 모두 핵폭탄 재료다. 고농축 우라늄을 충분히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이 플루토늄에 다시 눈을 돌린 건 핵탄두를 소형화하기 위해서였다. 핵탄두를 소형화하려는 이유는 자명하다. 대양 너머에까지 폭탄을 날려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키신저, “미국이 北核 해결해야”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북핵 문제를 앞에 둔 미국의 신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북한처럼 작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 건가. 말만 슈퍼파워인 게 되는 거다.”
김진우 세르모 대표(전 미 국무부 선임보좌관)가 키신저와 나눈 대화의 일부다.
1985년부터로 보자면, 이제 36년째다. 돌아보면 북한 핵 문제는 꾸준히 심각해져 왔다. 북핵 문제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난 순간은 언제일까. 다섯 장면을 꼽아봤다.
첫 번째는 쿠바 미사일 위기다. 1962년 10월 16일부터 28일까지 세계는 숨을 죽이고 카리브해를 바라봤다. 그곳에서 미소(美蘇) 냉전이 최고조에 치닫고 있었다. 발단은 이랬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 정찰기가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 건설현장을 포착했다. 소련이 쿠바에 핵탄두까지 옮겨놓고 미사일 기지를 짓고 있었다. 쿠바는 미국 플로리다 반도 바로 밑에 붙어 있다. 그야말로 미국 전역이 소련의 미사일 기지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게 생겼다.
소련 측에도 명분은 있었다. 미국이 먼저 소련 부근에 핵 미사일을 배치했다. 소련과 국경을 맞댄 터키에 주피터(사거리 2410km·탄두 위력 1.45메가톤) 핵 미사일을 배치했다. 소련 전역이 미국 미사일의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다.
게다가 쿠바가 미사일 기지 건설을 요청해왔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총리는 1961년에 피그(Pigs)만 침공 사건을 겪은 터였다. 미국이 재차 공격해올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피그만 사건은 미군의 훈련을 받은 1400명의 쿠바 망명군이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바에 상륙한 사건을 말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배후로 지목됐다. 망명군은 격퇴됐다. 카스트로는 소련에 군사협정 체결을 요청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바꾼 세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 도발에 해상봉쇄와 외교적 대응으로 맞섰다. 워싱턴과 모스크바 모두 핵전쟁 발발을 우려했다. 열흘 넘게 이어진 대치 끝에, 결국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공개 제안을 해왔다. 터키의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하면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겠다는 거였다. 그렇게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게 됐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3일 만에 봉합됐지만 그 영향력은 오래갔다. 핵무기를 개발 중인 나라도, 핵무기가 없는 나라도 핵의 위력을 깨닫게 됐다. 당시 프랑스는 샤를 드골 대통령 주도로 핵무기 개발을 하는 중이었다. ‘미국이 뉴욕을 희생하면서 파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한 핵 개발이었다.
미국 자체도 바뀌었다. 케네디 정부 시절 핵전략은 유연반응 전략이었다. 소련이 유럽 전선에 배치된 전술핵을 1기 투하하면 미국도 1기 사용하겠다는 식이다. 쿠바 사태 이후 ‘확증 파괴(Assured Destruction)’로 돌아섰다. 공격을 해오면 확실히 대응해주겠단 얘기다. 여기서 파괴란 소련의 산업시설 절반 이상과 국민 25% 이상이 절멸하는 걸 뜻한다.
공산권 국가들의 위기감은 또 달랐다. 소련이 자국(自國)의 이해관계에 따라 ‘핵우산’을 얼마든지 치워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스크바를 희생하면서 하바나를 구원해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북한은 행동에 나섰다.
‘북한은 소련 못 믿는다’
미국의 연구 단체인 우드로윌슨재단에서는 냉전(冷戰) 시대 역사 기록을 발굴·재해석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냉전사 프로젝트(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다. 냉전 후 기밀이 해제되고 있는 옛 소련과 동구권 문서들을 통해 역사를 재해석한다. 북한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북한에 대한 기록물을 발굴해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아예 따로 진행 중이다.
2012년엔 이런 연구물이 나왔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북한의 자주 국방 정책의 기원(The Cuban Missile Crisis and the Origins of North Korea’s Policy of Self-reliance in National Defense)’. 제목 그대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북한 국방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다.
여기에 6개 문서가 나온다. 그중 주(駐)북한 헝가리대사가 헝가리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가 등장한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64년) 12월 중순 주조선 소련대사 바실리 모스코프스키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왔음. 소련 수상인 코시긴 동무와 북한 대표단 간에 있었던 협의 내용을 알려줬음. 대표단의 단장 김일은 코시긴 동무 앞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함.
첫째, 조선의 지도자들은 소련공산당과 소련 정부를 불신(不信)한다. 조선의 국방과 관련해 소련 정부가 조소우호협력및상호원조조약에 명시된 의무를 다할 거라고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조선은 70만명의 군사와 20만명의 경찰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군대와 경찰을 유치하느라 조선 경제에 막대한 부담이 된다. 지난 2년간 공업과 농업에 진력을 다하지 못한 이유다. (국방비 때문에) 충분히 투자할 수가 없다.
코시긴 동무는 불신의 이유가 뭔지 물었음. 김일은 소련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를 배신했고, 나중엔 베트남을 배신했다고 답했음.〉
이런 이유로 북한은 소련에 원자로 기술 지원을 졸랐다. 보고서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결국 북한 핵 무장화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南阿共의 핵무기 포기
북핵 문제에서 결정적 순간 두 번째는 1994년 북한의 IAEA 특별 사찰 거부다. 1993년에도 IAEA는 북한이 핵 폐기물을 저장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두 곳을 특별 사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북한은 3개월 안에 NPT에서 탈퇴하겠다고 대응했다. 1994년엔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그해 1월 CIA는 북한이 핵탄두를 이미 생산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같은 해 3월 IAEA 조사관들이 북한에 도착했다. 3월 21일 북한은 조사팀이 영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조사하는 걸 막았다. 5월 19일, IAEA는 북한이 감시망이 없는 채로 5메가와트 연구용 원자로에서 사용후 핵연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는 걸 확인했다. 그때까지 미국과 IAEA는 북한이 사용후 핵연료를 옮길 땐, 어떤 상황에서든 조사관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상황이었다. 사용후 핵연료를 어디로 빼돌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개발이 국제 감시망에서 더욱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이다.
북한이 IAEA의 사찰을 극구 거부하는 건 이유가 있다. 한번 IAEA의 조사를 받으면 핵무기 개발 현황을 숨기기 힘들어진다.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스스로 포기한 나라다.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것도 핵무기를 폐기한 후에야 알려졌다. 사실 당시 남아공 정부는 핵무기의 개발과 폐기 자체를 은폐할 생각이었다. 핵무기 관련 시설과 자료는 물론, 뭘 폐기했는지 기록한 자료조차 모두 일찌감치 없애버렸다.
그랬는데 NPT에 가입한 후 받게 된 IAEA의 조사가 문제였다. IAEA 조사단이 우라늄 사용 현황을 조사하다 남아공 정부의 주장과 다른 수치를 발견했다. 결국 남아공 정부는 핵무기를 개발한 것과 은폐까지 국제사회에 모두 밝혀야 했다.
北, ICBM으로 미국 본토 타격 가능
세 번째 순간은 1998년 8월 31일이다. 이날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 1호를 발사했다.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발사했다. 핵무기를 갖추기 위해선 핵탄두뿐 아니라 그걸 옮기는 투발체(投發體)도 필요하다. 특히 북한의 경우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 미국을 목표로 삼는다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날 북한이 처음으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것이다.
대포동1호는 동해와 일본 북부 상공을 지나 4~5분간 약 1500km를 날다 태평양에 추락했다. 1단계 로켓은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공해상에, 2단계 로켓은 고도 65km로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다. 첫 발사에 이미 2단계까지 성공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연구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왔다. 2017년 11월 29일엔 화성15호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미군은 화성15호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미국 전역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게 됐다.
2019년 12월 7일엔 평안북도 동창리 서해 위성 발사장에서 신형 ICBM용 엔진 연소 시험을 두 차례 진행했다. 북한 국방과학원 대변인은 이날 “2019년 12월 7일 오후 서해 위성 발사장에서는 대단히 중대한 시험이 진행되었다”고 발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대변인은 “국방과학원은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이번 시험의 성공적 결과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하였다”며 “이번에 진행한 중대한 시험의 결과는 머지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략적 지위를 또 한 번 변화시키는 데서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주장대로 신형 ICBM용 엔진 연소 실험에 성공했다면, 북한 장거리 미사일 개발사에 또 다른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예정된 실패, 6자 회담
네 번째 결정적 순간은 6자 회담이다. 6자 회담은 2003년 8월 27일 시작됐다. 한반도 주변 6개국인 한국,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참가했다. 2007년 10월까지 여섯 차례 회담이 열렸다. 모두 알고 있듯 6자 회담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북한을 제외한 다섯 나라의 의견을 맞추는 것부터 문제였다. 김진우 전 미 국무부 선임보좌관은 6자 회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6자 회담을 앞두고 미국에서 큰 토론이 벌어졌어요. 중국도 북핵 문제에 책임지게 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나왔어요. ‘북한 문제는 중국 문제’라는 게 당시 인식이었어요. 저는 아니라고 싸웠어요. 이건 미국 문제라고요. 처음부터 저는 6자 회담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선 6자 회담이 실패하면 다섯 국가가 실패하는 거지, 미국의 실패가 아니거든요. 실패하더라도 미국의 실패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게 중요했던 거예요. 베이징에서 회담을 연 것도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회담이 열린 후에는 회담의 목표가 중간중간 흔들렸어요. 북핵 동결인지, 폐기인지 왔다 갔다 했어요.”
처음부터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6자 회담 당사자국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2002년 10월 4일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에서 강석주 제1부상을 만났다. 켈리가 북한에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었다. 강 부상은 “(북한은) 이런 것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이보다 더욱 강한 것도 있다”고 말했다. 켈리가 재차 확인하자 강 전 부상은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담판으로 해결 가능하다” “최고 지도자급 회담으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를 시사하면서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을 제의했단 얘기다.
회동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추궁이 이어지자,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HEU) 같은 건 없다면서 다시 말을 바꿨다. 6자 회담이 진행되면서 미국이 증거 자료를 들이밀자 비로소 인정했다. HEU 프로그램의 핵심 장비인 원심분리기 부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고강도 알루미늄관 등의 장비 수입 자료 등의 증거였다. 북한의 핵 개발 상황조차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6자 회담이 진행됐단 얘기다.
김정일의 개인 자금?
북핵 협상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몇 번 있긴 했다.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건이 그중 하나다. 회담이 열리는 중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2005년 9월, 미국은 애국법 제311조에 근거해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을 북한 불법자금 세탁의 주요 우려 대상으로 지정했다. BDA는 은행에 예치되어 있던 2500여만 달러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고, 북한에 금융거래 중단을 통보했다.
북한의 반발은 엄청났다. 북한은 ‘BDA 문제의 우선적 해결’을 요구하며 직전에 합의한 9·19공동성명 이행을 거부했다. 2006년 7월 5일엔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고 10월 9일엔 첫 핵실험을 강행했다. 김진우 전 선임보좌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 2500만 달러면 김정일 입장에선 그렇게 큰돈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격렬하게 반응했잖아요. 다른 제재로는 큰 손해를 봐도 끄떡도 안 했으면서요. 누가 미팅에서 저에게 의견을 묻더라고요. 그래서 둘 중 하나라고 답했어요. 그 자금이 중요한 척 거짓 반응을 보이는 것이거나, 자기 돈인 거다.”
― 김정일의 개인 돈이란 얘긴가요.
“증거는 없어요. 저의 분석이었어요. BDA 계좌는 미국이 우연히 발견했어요.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북한이 6자 회담에서 나가겠다고 협박했잖아요. 너무 이상했어요. 그건 김정일의 스타일이 아니에요. 북한이 이렇게까지 약점을 보인 건 처음이었어요. ‘이거다, 처음으로 김정일의 개인 계좌를 찾은 거다, 이걸로 북한을 압박하자’. 그런데 결국 제재를 풀었지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조슈아 스탠턴 변호사와 이성윤 미국 터프츠대학 교수는 2014년 《워싱턴포스트》에 공동으로 칼럼을 기고했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BDA 제재를 두고) 북한의 한 외교관이 미국 측 카운터파트에게 ‘당신들이 마침내 우리를 아프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털어놨다.”
결국 미국은 30일 안에 BDA 문제를 해결하기로 북한에 약속했다. 2007년 중반기 북한은 자금을 모두 인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7년 10월 3일 6자 회담국은 10·3 합의를 발표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2007년 말까지 북한은 핵 시설을 불능화하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한다.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적성국무역법에 따른 제재를 해제한다. 중유 100만t 상당의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이미 전달된 중유 10만t 포함)이 북한에 제공된다.”
6자 회담이 끝나고 불과 5년 후, 북한은 헌법을 개정했다. 헌법에서 스스로를 ‘핵 보유국’으로 명시했다.
‘北, 수소폭탄 실험 성공’
다섯 번째 결정적 순간은 2017년 9월 3일이다. 이날 북한은 6차 핵실험을 했다. 핵실험에선 핵폭탄의 폭발 위력(yield)이 중요하다. 핵실험 직후엔 6차 핵실험의 위력이 약 100kt(킬로톤)에서 140kt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리틀보이’의 위력은 15kt급이다.
이후 6차 핵실험의 위력이 그보다 훨씬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타크루즈대학의 손 레이 박사 연구진은 2019년 북한 6차 핵실험의 위력이 250kt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이 미국의 과학 학술지 《지구물리학 연구저널》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면, 1차부터 5차까지 비슷한 북한의 핵 역량이 마지막 6차 실험에서 비약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레이 박사는 “북한은 2006년부터 2016년까지 핵실험 규모를 1kt에서 20kt까지 꾸준히 증가시켰는데 불과 1년 만에 250kt으로 대폭 증가시켰다. 이 정도 증폭은 핵분열탄(boosted fission bomb)이나 수소폭탄에서 나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말을 뒷받침해주는 게 지난 3월 16일 글렌 밴허크 미국 북부사령관이 미국 국회 상원 군사위원회에 답변한 것이다. 그는 서면답변에서 이런 언급을 했다.
“2017년에 북한은 성공적으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In 2017, North Korea successfully tested a thermonuclear device).”
당시 한국 언론엔 밴허크 사령관이 북한 ICBM에 관해 한 언급만 주로 부각됐다. 북한의 ICBM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이 리틀보이의 15배가 넘는 위력을 가진 핵폭탄을 보유하게 됐다는 건 부각되지 않았다.
이제 임기가 1년 남은 문재인 정부와 이제 출범한 미국 바이든 정권이 북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현실을 외면한 평화쇼나 외교적 접근으로 미루기엔, 이제 북핵 문제는 임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
“북한이 양보할 수 있는 게 뭔지 알아내 단계적으로 합의를 추진한다.”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이나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을 참고하면 그렇다.
북한이 비핵화(非核化) 트랙에서 10만큼 양보하면 10만큼 제재(制裁)를 완화하는 식이다. 오바마 정부 시절의 ‘전략적(戰略的) 인내’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바마 정부는 제재라는 압박을 통해 북한의 핵 개발 의지를 꺾겠다는 입장이었다. 처음부터 장기전(長期戰)을 각오한 셈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북핵은 결국 미국과 북한 간의 문제였다. 예를 들면, 처음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할 때부터 북한은 핵(核) 문제에 미국을 결부시켰다. 북한은 1985년 12월 12일 NPT에 가입한 후 발효일로부터 18개월 안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전면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북한은 미국에 협정을 체결하는 대신 남한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수하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오가면서 핵실험을 해왔다. 플루토늄과 우라늄 모두 핵폭탄 재료다. 고농축 우라늄을 충분히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이 플루토늄에 다시 눈을 돌린 건 핵탄두를 소형화하기 위해서였다. 핵탄두를 소형화하려는 이유는 자명하다. 대양 너머에까지 폭탄을 날려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키신저, “미국이 北核 해결해야”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북핵 문제를 앞에 둔 미국의 신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북한처럼 작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 건가. 말만 슈퍼파워인 게 되는 거다.”
김진우 세르모 대표(전 미 국무부 선임보좌관)가 키신저와 나눈 대화의 일부다.
1985년부터로 보자면, 이제 36년째다. 돌아보면 북한 핵 문제는 꾸준히 심각해져 왔다. 북핵 문제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난 순간은 언제일까. 다섯 장면을 꼽아봤다.
첫 번째는 쿠바 미사일 위기다. 1962년 10월 16일부터 28일까지 세계는 숨을 죽이고 카리브해를 바라봤다. 그곳에서 미소(美蘇) 냉전이 최고조에 치닫고 있었다. 발단은 이랬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 정찰기가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 건설현장을 포착했다. 소련이 쿠바에 핵탄두까지 옮겨놓고 미사일 기지를 짓고 있었다. 쿠바는 미국 플로리다 반도 바로 밑에 붙어 있다. 그야말로 미국 전역이 소련의 미사일 기지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게 생겼다.
소련 측에도 명분은 있었다. 미국이 먼저 소련 부근에 핵 미사일을 배치했다. 소련과 국경을 맞댄 터키에 주피터(사거리 2410km·탄두 위력 1.45메가톤) 핵 미사일을 배치했다. 소련 전역이 미국 미사일의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다.
게다가 쿠바가 미사일 기지 건설을 요청해왔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총리는 1961년에 피그(Pigs)만 침공 사건을 겪은 터였다. 미국이 재차 공격해올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피그만 사건은 미군의 훈련을 받은 1400명의 쿠바 망명군이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바에 상륙한 사건을 말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배후로 지목됐다. 망명군은 격퇴됐다. 카스트로는 소련에 군사협정 체결을 요청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바꾼 세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 도발에 해상봉쇄와 외교적 대응으로 맞섰다. 워싱턴과 모스크바 모두 핵전쟁 발발을 우려했다. 열흘 넘게 이어진 대치 끝에, 결국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공개 제안을 해왔다. 터키의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하면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겠다는 거였다. 그렇게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게 됐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3일 만에 봉합됐지만 그 영향력은 오래갔다. 핵무기를 개발 중인 나라도, 핵무기가 없는 나라도 핵의 위력을 깨닫게 됐다. 당시 프랑스는 샤를 드골 대통령 주도로 핵무기 개발을 하는 중이었다. ‘미국이 뉴욕을 희생하면서 파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한 핵 개발이었다.
미국 자체도 바뀌었다. 케네디 정부 시절 핵전략은 유연반응 전략이었다. 소련이 유럽 전선에 배치된 전술핵을 1기 투하하면 미국도 1기 사용하겠다는 식이다. 쿠바 사태 이후 ‘확증 파괴(Assured Destruction)’로 돌아섰다. 공격을 해오면 확실히 대응해주겠단 얘기다. 여기서 파괴란 소련의 산업시설 절반 이상과 국민 25% 이상이 절멸하는 걸 뜻한다.
공산권 국가들의 위기감은 또 달랐다. 소련이 자국(自國)의 이해관계에 따라 ‘핵우산’을 얼마든지 치워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스크바를 희생하면서 하바나를 구원해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북한은 행동에 나섰다.
‘북한은 소련 못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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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윌슨재단의 기록물 모음집 ‘쿠바 미사일 위기와 북한 자주 국방정책의 기원’. 출처=우드로윌슨재단 |
2012년엔 이런 연구물이 나왔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북한의 자주 국방 정책의 기원(The Cuban Missile Crisis and the Origins of North Korea’s Policy of Self-reliance in National Defense)’. 제목 그대로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북한 국방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다.
여기에 6개 문서가 나온다. 그중 주(駐)북한 헝가리대사가 헝가리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가 등장한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64년) 12월 중순 주조선 소련대사 바실리 모스코프스키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왔음. 소련 수상인 코시긴 동무와 북한 대표단 간에 있었던 협의 내용을 알려줬음. 대표단의 단장 김일은 코시긴 동무 앞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함.
첫째, 조선의 지도자들은 소련공산당과 소련 정부를 불신(不信)한다. 조선의 국방과 관련해 소련 정부가 조소우호협력및상호원조조약에 명시된 의무를 다할 거라고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조선은 70만명의 군사와 20만명의 경찰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군대와 경찰을 유치하느라 조선 경제에 막대한 부담이 된다. 지난 2년간 공업과 농업에 진력을 다하지 못한 이유다. (국방비 때문에) 충분히 투자할 수가 없다.
코시긴 동무는 불신의 이유가 뭔지 물었음. 김일은 소련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를 배신했고, 나중엔 베트남을 배신했다고 답했음.〉
이런 이유로 북한은 소련에 원자로 기술 지원을 졸랐다. 보고서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결국 북한 핵 무장화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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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영변 핵 시설. |
같은 해 3월 IAEA 조사관들이 북한에 도착했다. 3월 21일 북한은 조사팀이 영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조사하는 걸 막았다. 5월 19일, IAEA는 북한이 감시망이 없는 채로 5메가와트 연구용 원자로에서 사용후 핵연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는 걸 확인했다. 그때까지 미국과 IAEA는 북한이 사용후 핵연료를 옮길 땐, 어떤 상황에서든 조사관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상황이었다. 사용후 핵연료를 어디로 빼돌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개발이 국제 감시망에서 더욱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이다.
북한이 IAEA의 사찰을 극구 거부하는 건 이유가 있다. 한번 IAEA의 조사를 받으면 핵무기 개발 현황을 숨기기 힘들어진다.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스스로 포기한 나라다.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것도 핵무기를 폐기한 후에야 알려졌다. 사실 당시 남아공 정부는 핵무기의 개발과 폐기 자체를 은폐할 생각이었다. 핵무기 관련 시설과 자료는 물론, 뭘 폐기했는지 기록한 자료조차 모두 일찌감치 없애버렸다.
그랬는데 NPT에 가입한 후 받게 된 IAEA의 조사가 문제였다. IAEA 조사단이 우라늄 사용 현황을 조사하다 남아공 정부의 주장과 다른 수치를 발견했다. 결국 남아공 정부는 핵무기를 개발한 것과 은폐까지 국제사회에 모두 밝혀야 했다.
北, ICBM으로 미국 본토 타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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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사진=조선DB |
대포동1호는 동해와 일본 북부 상공을 지나 4~5분간 약 1500km를 날다 태평양에 추락했다. 1단계 로켓은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공해상에, 2단계 로켓은 고도 65km로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다. 첫 발사에 이미 2단계까지 성공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연구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왔다. 2017년 11월 29일엔 화성15호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미군은 화성15호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미국 전역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게 됐다.
2019년 12월 7일엔 평안북도 동창리 서해 위성 발사장에서 신형 ICBM용 엔진 연소 시험을 두 차례 진행했다. 북한 국방과학원 대변인은 이날 “2019년 12월 7일 오후 서해 위성 발사장에서는 대단히 중대한 시험이 진행되었다”고 발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대변인은 “국방과학원은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이번 시험의 성공적 결과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하였다”며 “이번에 진행한 중대한 시험의 결과는 머지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략적 지위를 또 한 번 변화시키는 데서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주장대로 신형 ICBM용 엔진 연소 실험에 성공했다면, 북한 장거리 미사일 개발사에 또 다른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예정된 실패, 6자 회담
네 번째 결정적 순간은 6자 회담이다. 6자 회담은 2003년 8월 27일 시작됐다. 한반도 주변 6개국인 한국,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참가했다. 2007년 10월까지 여섯 차례 회담이 열렸다. 모두 알고 있듯 6자 회담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북한을 제외한 다섯 나라의 의견을 맞추는 것부터 문제였다. 김진우 전 미 국무부 선임보좌관은 6자 회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6자 회담을 앞두고 미국에서 큰 토론이 벌어졌어요. 중국도 북핵 문제에 책임지게 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나왔어요. ‘북한 문제는 중국 문제’라는 게 당시 인식이었어요. 저는 아니라고 싸웠어요. 이건 미국 문제라고요. 처음부터 저는 6자 회담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선 6자 회담이 실패하면 다섯 국가가 실패하는 거지, 미국의 실패가 아니거든요. 실패하더라도 미국의 실패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게 중요했던 거예요. 베이징에서 회담을 연 것도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회담이 열린 후에는 회담의 목표가 중간중간 흔들렸어요. 북핵 동결인지, 폐기인지 왔다 갔다 했어요.”
처음부터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6자 회담 당사자국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2002년 10월 4일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에서 강석주 제1부상을 만났다. 켈리가 북한에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었다. 강 부상은 “(북한은) 이런 것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이보다 더욱 강한 것도 있다”고 말했다. 켈리가 재차 확인하자 강 전 부상은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담판으로 해결 가능하다” “최고 지도자급 회담으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를 시사하면서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을 제의했단 얘기다.
회동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추궁이 이어지자,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HEU) 같은 건 없다면서 다시 말을 바꿨다. 6자 회담이 진행되면서 미국이 증거 자료를 들이밀자 비로소 인정했다. HEU 프로그램의 핵심 장비인 원심분리기 부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고강도 알루미늄관 등의 장비 수입 자료 등의 증거였다. 북한의 핵 개발 상황조차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6자 회담이 진행됐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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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전 미 국무부 선임보좌관. |
북한의 반발은 엄청났다. 북한은 ‘BDA 문제의 우선적 해결’을 요구하며 직전에 합의한 9·19공동성명 이행을 거부했다. 2006년 7월 5일엔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고 10월 9일엔 첫 핵실험을 강행했다. 김진우 전 선임보좌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 2500만 달러면 김정일 입장에선 그렇게 큰돈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격렬하게 반응했잖아요. 다른 제재로는 큰 손해를 봐도 끄떡도 안 했으면서요. 누가 미팅에서 저에게 의견을 묻더라고요. 그래서 둘 중 하나라고 답했어요. 그 자금이 중요한 척 거짓 반응을 보이는 것이거나, 자기 돈인 거다.”
― 김정일의 개인 돈이란 얘긴가요.
“증거는 없어요. 저의 분석이었어요. BDA 계좌는 미국이 우연히 발견했어요.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북한이 6자 회담에서 나가겠다고 협박했잖아요. 너무 이상했어요. 그건 김정일의 스타일이 아니에요. 북한이 이렇게까지 약점을 보인 건 처음이었어요. ‘이거다, 처음으로 김정일의 개인 계좌를 찾은 거다, 이걸로 북한을 압박하자’. 그런데 결국 제재를 풀었지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조슈아 스탠턴 변호사와 이성윤 미국 터프츠대학 교수는 2014년 《워싱턴포스트》에 공동으로 칼럼을 기고했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BDA 제재를 두고) 북한의 한 외교관이 미국 측 카운터파트에게 ‘당신들이 마침내 우리를 아프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털어놨다.”
결국 미국은 30일 안에 BDA 문제를 해결하기로 북한에 약속했다. 2007년 중반기 북한은 자금을 모두 인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7년 10월 3일 6자 회담국은 10·3 합의를 발표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2007년 말까지 북한은 핵 시설을 불능화하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한다.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적성국무역법에 따른 제재를 해제한다. 중유 100만t 상당의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이미 전달된 중유 10만t 포함)이 북한에 제공된다.”
6자 회담이 끝나고 불과 5년 후, 북한은 헌법을 개정했다. 헌법에서 스스로를 ‘핵 보유국’으로 명시했다.
‘北, 수소폭탄 실험 성공’
다섯 번째 결정적 순간은 2017년 9월 3일이다. 이날 북한은 6차 핵실험을 했다. 핵실험에선 핵폭탄의 폭발 위력(yield)이 중요하다. 핵실험 직후엔 6차 핵실험의 위력이 약 100kt(킬로톤)에서 140kt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리틀보이’의 위력은 15kt급이다.
이후 6차 핵실험의 위력이 그보다 훨씬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타크루즈대학의 손 레이 박사 연구진은 2019년 북한 6차 핵실험의 위력이 250kt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이 미국의 과학 학술지 《지구물리학 연구저널》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면, 1차부터 5차까지 비슷한 북한의 핵 역량이 마지막 6차 실험에서 비약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레이 박사는 “북한은 2006년부터 2016년까지 핵실험 규모를 1kt에서 20kt까지 꾸준히 증가시켰는데 불과 1년 만에 250kt으로 대폭 증가시켰다. 이 정도 증폭은 핵분열탄(boosted fission bomb)이나 수소폭탄에서 나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말을 뒷받침해주는 게 지난 3월 16일 글렌 밴허크 미국 북부사령관이 미국 국회 상원 군사위원회에 답변한 것이다. 그는 서면답변에서 이런 언급을 했다.
“2017년에 북한은 성공적으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In 2017, North Korea successfully tested a thermonuclear device).”
당시 한국 언론엔 밴허크 사령관이 북한 ICBM에 관해 한 언급만 주로 부각됐다. 북한의 ICBM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이 리틀보이의 15배가 넘는 위력을 가진 핵폭탄을 보유하게 됐다는 건 부각되지 않았다.
이제 임기가 1년 남은 문재인 정부와 이제 출범한 미국 바이든 정권이 북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현실을 외면한 평화쇼나 외교적 접근으로 미루기엔, 이제 북핵 문제는 임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