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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전쟁 70주년

‘비목’ 한명희의 6·25 연가곡 詩 최초 공개

DMZ 잡초 속에 녹슨 철망 한두 가닥…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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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육군 소위 시절, 무명병사 돌무덤과 나무 비(木碑) 보고 ‘비목’ 구상
⊙ ‘비목’을 주제로 ‘녹슨 철조망’ ‘백암산 별곡’ ‘산 목련 여인’ ‘산정의 GP 풍경’ 등 作詩
⊙ 10년 전부터 호국영령 상징하는 세 촛불(‘호국의 불’ ‘영원의 불’ ‘평화의 불’) 지켜와

韓明熙
1939년생. 서울대 국악과, 同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 카자흐스탄 알마티음악원 명예박사,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음악원 명예박사 / 동양방송 프로듀서, 서울시립대 교수, 국립국악원 원장, 한국문화예술위원장(직대),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역임. 現 이미시 문화서원 대표
‘비목’을 작시한 한명희 선생. 경기도 남양주 덕소의 집에 ‘호국의 불’ ‘평화의 불’ ‘영원의 불’을 밝히고 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초연(硝煙): 화약 연기
  -‘비목’ 1절

 
  포성이 멎은 지 70년. 6·25전쟁 70주년이다. 전쟁의 비극을 담은 우리 가곡 ‘비목’만큼 한국인의 마음을 위로한 노래가 또 있을까. 기자는 지난 4월 29일 경기도 남양주에서 ‘비목’을 작시(作詩)한 한명희(韓明熙·81) 선생을 만났다. 선생을 만나본 소감은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고 고집이 벽창호처럼 세다고 할까.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시대에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삶에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한명희 선생은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연가곡(連歌曲) 공연을 준비 중이다. 국내에선 연가곡이 낯설지만,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주제가 통하는 일련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의 모음을 연가곡이라 부른다. 선생은 ‘비목’을 주제로 연가곡 시(詩)를 쓰고 있었다. 현재 6편을 완성했다. 곡은 한예종 음악원장을 지낸 이영조(李永朝) 선생이 만들고 있다. 그는 ‘섬집 아기’ ‘바우고개’ ‘어머님 마음’을 작곡한 고(故) 이흥렬(李興烈) 선생의 차남이다.
 
  한명희 선생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처녀시 6편을 《월간조선》에 공개했다. ‘비목’처럼 큰 울림을 주었다. 시 ‘녹슨 철조망’을 소개한다.
 
  애당초 부질없는 짓들일랑 하지 말자고
  금단의 줄 철조망은 미리 말을 했지요
  하지만 몽매한 소인들이 알리 있나요
  산하의 한 허리가 두 동강 난 후에야
  피 묻은 후회만이 허공에 나부낌을
 
  DMZ 잡초 속에 녹슨 철망 한두 가닥
  산화한 영령들과 눈짓 표정 건네며
  사생이 별거런가 *벽공의 구름인 걸
  자탄인지 해탈인지 선문답 운을 떼니
  백골만 원통하여 말없이 눈물짓네
 
  *벽공(碧空): 푸른 하늘
  -시 ‘녹슨 철조망’ 전문

 
  시 ‘녹슨 철조망’은 마치 ‘비목’을 연상케 한다. 한명희 육군 소위(ROTC 2기)가 백암산 무명고지 초소(GP)장으로 근무할 때는 정전(停戰) 후 11년이 지난 뒤였다. 당시만 해도 인근 산과 강에는 온통 전쟁 상흔들이 즐비했다. 벌거숭이 비탈에 수통과 탄피며 철모 등이 그대로 있었다. 죽은 나무는 파편투성이였다. 어느 골짜기엔 노란 M1 실탄이 무더기로 묻혀 있고, 강변 둔덕에는 105밀리 포탄 껍질이 패총(貝塚)처럼 쌓여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해 다감하던 그때 과거 격전지였던 백암산 고지에서 18개월 동안 근무하며 목격한 숱한 전쟁의 상흔들은 하나하나 가슴속 깊이 잔영을 남겼죠. 막사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 따위를 심으려 삽질하면 인골이 나왔어요. 땔감 하려고 나무를 켜다 보면 그 속에 박힌 파편 때문에 톱날이 망가지고…. 녹슨 철모나 썩어 빠진 탄띠 따위는 흔했죠.”
 
 
  애닯다 녹슨 철모 가슴 먹먹 한숨짓네
 
무명용사의 돌무덤에 세워진 나무 비(木碑). ‘비목’은 목비의 문학적 표현이다.
  금성천 갈대밭에 노을이 짙어지니
  짝 잃은 외기러기 서천으로 날아가고
  자주구름 무늬 속에 임의 모습 아련하니
  애닯다 녹슨 철모 가슴 먹먹 한숨짓네
 
  백암산 별빛 속에 풀벌레 울어 예고
  유성우 밤하늘에 낙화되어 이우는데
  무슨 사연 못내 잊어 산새마저 잠 못 드니
  참호 속 백골들은 고향 그려 탄식일세
 
  -시 ‘백암산 별곡’ 전문

 
  강원도 화천군과 철원군의 경계에 자리한 산이 백암산(해발 1179m)이다. 남방한계선과 휴전선을 가로지르며 남북을 넘나드는 강이 북한강의 지류인 금성천. 그곳이 철의 삼각지대와 함께 중부 전선 최대의 격전지였다.
 
  어느 날 한(韓) 소위가 순찰길을 따라 걷는데 돌무더기 앞에 팻말 비슷한 나무가 썩어 드러누워 있고 탄피며 철모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를 따라 하얀 산 목련이 달빛 속에 서 있었다.
 
  “전쟁의 비애로 가슴앓이하던 그때, 무명병사의 돌무덤과 나무 비(木碑)를 보고는 만감이 떠오르더군요. 죽은 이는 누굴까, 고향은 어딜까, 아내는 있었을까, 죽기 전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때 본 산 목련은 산화한 연인의 무덤가를 지켜주는 여인의 소복(素服)이었습니다. 긴 세월을 기다리다 지친 순애보 아낙의 돌아오지 않는 낭군의 무덤가를 지켜주는 망부석(望夫石)이었어요. 그날의 감흥을 훗날 ‘비목’이라는 시로 엮었지요.”
 
1960년대 백암산 무명고지 초소(GP)장으로 18개월 근무할 당시 한명희 소위.
  한 소위가 북한강변 백암산 줄기, 이름 모를 능선에서 근무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비목’도 탄생하지 않았으리라.
 
  “격전지에서 근무할 기회가 없었다면 ‘총탄이 비 오듯 한다’라든지, ‘포탄에 벗겨진 대머리 산’ 등의 표현을 소설 속 문장으로만 치부했을 거예요.
 
  화약 연기(초연)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 녘의 이름 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새하얀 산 목련을 순절한 여인으로 상정하고 가곡 형식에 맞춰 엮어봤던 겁니다.”
 
  선생은 56년 전 감흥을 살려 ‘산 목련 여인’이란 시를 최근 지었다.
 
  팔부능선 바위틈에 안타까이 누운 병사
  찢긴 군복 주머니엔 클로버 꽃 편지 한 장
  독수공방 신혼댁을 차마 잊지 못해설까
  낙엽 덮인 흙 틈새로 쌓인 한만 읊조리네
 
  오매불망 기다리던 애모의 정 이런 걸까
  순애보의 정절 여인 전사통지 받아 들곤
  망연자실 혼절한 채 소복하고 달려가서
  임의 무덤 지켜주는 산 목련이 되었다네
 
  -시 ‘산 목련 여인’ 전문

 
  ‘산 목련 여인’은 ‘비목’보다 더 은유적이다. 화자(話者)는 팔부능선 병사의 시신에 쌓아 올린 돌무덤가에 핀 산 목련을 ‘산 목련 여인’이라 칭한다. 독수공방 신혼댁, 순애보의 정절 여인, 망연자실 혼절한 소복 등이 바로 산 목련 여인을 의인화한 표현들이다. 선생은 “시를 새롭게 쓰다 보니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20대 한 소위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숨죽여 총 겨누며 죽을 각오 다져가지’
 
매복 훈련 중인 한명희 소위(가운데).
  한명희 선생이 GP장으로 근무하던 1964년 무렵 툭하면 북한군이 아군 GP를 습격해왔다. 당시 GP는 적들의 수류탄 투척을 막기 위해 지붕까지 철망을 둘렀고 군화를 신은 채 잠을 자야 했다.
 
  그러나 삼엄한 GP 분위기와 달리 눈앞에 펼쳐진 DMZ의 대자연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봄이면 선명한 등고선을 그으며 성큼성큼 위로 차오르는 신록의 조화도 신기했고, 가을이면 단풍의 물결이 반대로 하강하는 자연의 변모도 진기했다.
 
  선생은 “높은 산만 섬처럼 띄워놓고 하얀 구름바다를 이룬 새벽녘의 운해(雲海)도 장관이었고, 궁노루 울어 예는 교교한 달밤의 정경도 감탄과 신이(神異), 그 자체였다”고 한다. 당시를 회상하며 시 ‘산정의 GP 풍경’을 지었다.
 
  계곡 구름 바다가 된 교교한 달밤
  섬처럼 우뚝 솟은 검은 산정 초소에선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구성진 확성소리 적진으로 흘러들고
  애잔한 메아리만 가슴 속을 적셔오지
 
  산천초목 휘이도록 비바람 불면
  철조망의 깡통소리 불길하게 울어대고
  막사의 창문들도 덩달아 방정 떠니
  생사를 함께 하는 애티 나는 병사들도
  숨죽여 총 겨누며 죽을 각오 다져가지
 
  -시 ‘산정의 GP 풍경’ 전문

 
  ‘비목’ 2절은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으로 시작한다. ‘궁노루 산울림’이란 표현이 낯설다. 그의 설명이다.
 
  “비무장 인근은 그야말로 날짐승, 길짐승의 낙원이었어요. 한번은 순찰길에서 궁노루, 즉 사향노루를 한 마리 잡았어요. 우황청심환에서 프랑스 향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값비싼 재료로 쓰인다는 노루여서 향기가 진했죠. 내무반 전체가 향기로 가득했지요.
 
  하지만 수놈을 잡은 뒤 홀로 남은 암놈이 매일 밤 울어대는 겁니다. 목멘 듯 캥캥거리며 애타게 울어대니 정말 며칠 밤을 철없는 살생의 후회로 잠을 못 이뤘어요.”
 
  선생은 그때 그 궁노루를 연상하며 ‘외로운 사슴’이란 시를 지었다.
 
  목이 길어 안쓰러운 사슴 한 마리
  망연한 그리움에 홀로 숲을 나서서
  산 그림자 드리운 강물 홀짝 마시곤
  짙푸른 창공 향해 천년 밀어 되새기네
 
  눈이 맑아 애처로운 사슴 한 마리
  영마루 흘러가는 구름 한 점 바라보며
  어미 그린 묵상일까 백사장에 우뚝 서서
  칡 내음 미풍 속에 백일몽을 꾸는구려
 
  -시 ‘외로운 사슴’ 전문

 
 
  화전민 폐가 터엔 복사꽃이 한창인데 수줍던 가시나는…
 
한명희 선생은 ‘비목’과 6·25전쟁을 추념하는 6·25문화단지 조성을 추진 중이다.
  깊은 강원도 골짝, 언덕 너머에는 화전민이 살던 폐가가 많았다. 그 화전민 터가 피아(彼我) 간 뺏고 빼앗기는, 피로 얼룩진 싸움터였다. 적과 아군의 시체로 메워졌을 화전민 폐가에 핀 복사꽃을 보며 이런 시를 썼다.
 
  격전의 산골에도 세월이 쌓여가니
  포탄 터진 구덩이엔 오랑캐꽃 피어나고
  파편 박힌 수목에도 새 가지는 무성하네
  구절양장 돌아드는 양지바른 산모롱이
  화전민 폐가터엔 복사꽃이 한창인데
  수줍던 가시나는 가고 아니 오누메나
 
  생사의 아비규환 아련히 흘러가니
  종다리는 높이 떠서 곡예비상 재롱떨고
  소쩍새도 소쩍소쩍 한해 풍년 전갈하네
  보리고개 허기 품고 따비밭을 일군 터엔
  산딸기 붉게 익고 뽕 향기는 짙푸른데
  인적은 간곳없고 잡초만이 졸고 있네
 
  -시 ‘화전민의 폐가’ 전문

 
  선생의 집이자 문화공간인 ‘이미시 문화서원’에는 10년째 봉안해온 ‘호국의 불’이 있다.
 
  이 불은 6·25전쟁 60주년인 2010년 6월 25일 강원도 화천군 동촌리 ‘평화의 댐’ 주변에 조성된 비목공원에서 추념예술제를 열었을 때 참가자들이 분향한 향불을 채화한 것이다. 선생은 이 불을 10년간 끄지 않고 ‘호국의 불’로 보관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휴전 60주년인 2013년 현충일에는 강원도 양구 도솔산에서 평화음악회를 열면서 채화한 ‘평화의 불’과 2010년 개천절날 화천 해산[日山] 정상에서 천제를 지내면서 나라와 민족의 영원함을 염원하는 뜻으로 채화한 ‘영원의 불’도 보관하고 있다. 10년 동안 이 세 불을 지키고 있다. 놀라운 집념이다.
 
  “우리 동이민족(東夷民族)의 문화코드라고 할 태양 속의 세 발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를 상징하는 세 가지 불을 계속 살려나갈 생각입니다. 지금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어나자마자 세 얼이 담긴 불, 즉 ‘호국의 불’ ‘영원의 불’ ‘평화의 불’ 앞에서 호국영령들의 은덕을 기리고 국운창성을 기원하는 묵념을 합니다.”
 
  ― 6·25 발발 70주년인데 어떤 느낌이 드세요.
 
  “‘비목’은 호국영령의 상징이에요. 사실, 우리 삶이란 게 늘 형식에 치우치기 쉽잖아요. 바삐 살다 보니 일상에 매몰되어 자기 앞 닦을 겨를도 없었던 겁니다. 이제는 밥 세 끼 먹을 형편은 됐으니꽃다운 청춘이 목숨 바쳐 지켜온 나라, 전장의 폐허 속에 젊음을 불사른 한 많은 백골들을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해요.”
 
 
 
〈가곡의 오솔길〉과 작곡가 장일남과의 만남

 
‘비목’과 ‘비목문화제’를 소개한 기사 스크랩. 많은 언론이 가곡 ‘비목’에 얽힌 사연을 보도했다.
  ― ‘비목’을 작곡한 장일남 선생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고 장일남(張一男)은 평양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월남해, 창덕여고·숙명여고·서울사대부고의 음악교사를 거쳐 한양대 음대 작곡과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했다. 2006년 9월 24일 별세했다.
 
  한명희 선생은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 가곡에 관심을 쏟던 시절, 작곡가 장일남을 만났다.
 
  “PD 시절, 우리 가곡의 중흥운동을 할 때 장일남 선생을 만났어요. 가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면 단조로워서 변화를 주려고 작은 오케스트라로 편곡을 했어요. 그때 선생에게 전속으로 편곡을 맡겼어요.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숙명여고 음악교사를 했는데 교사 자리를 잃고 어렵게 지내고 있었죠. 그러나 재능은 천재적이어서 멜로디가 술술 나왔어요. 그의 선율은 오선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효되어 흘러넘치는 가락이었죠.”
 
  ― PD 시절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TBC 근무할 때 나는 우리 가곡에 관심이 많았어요. 라디오 국장에게 가곡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더니, 국장 왈 ‘미스터 한, 어젯밤 먹은 술이 덜 깼어?’ 그래요. 팝송, 유행가만 틀 때입니다. 나는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프로를 만들자’고 국장을 졸랐지요. 하도 조르니까 ‘일요일 20분을 줄 테니 해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곡 프로가 탄생한 겁니다.
 
  애청자 엽서가 오고… 반응이 뜨거웠어요. 그래서 〈가곡의 오솔길〉이란 생방송 프로를 매일 하게 됐어요.”
 
  〈가곡의 오솔길〉은 1967년부터 선생이 TBC를 떠난 1974년 말까지 이어졌다. 가곡 프로를 통해 ‘비목’은 물론 ‘얼굴’ ‘기다리던 마음’ 같은 가곡도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한번은 장일남 선생에게 창작 가곡을 의뢰했더니 나더러 직접 가사를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더군요. 망설이다가 ‘화약 연기’가 쓸고 지나간 백암산 깊은 계곡에서 가슴을 쳤던 돌무덤과 이끼 낀 나무 비(碑)가 떠올랐던 겁니다.”
 
  ― ‘비목’과 관련한 또 다른 감회가 있을까요.
 
  “언젠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갔더니 잔잔하게 ‘비목’이 울려 퍼지더군요. 기분이 묘했어요. 20여 만 호국영령을 위로하는 느낌이랄까. 그날은 현충일도 아니었거든요.
 
  한번은 지리산을 등정했다가 전남 구례로 내려갔어요. 시골 작은 전파사 앞을 지나는데 스피커에서 ‘비목’이 흘러나왔습니다. 명산 지리산을 바라보며 듣는 맛이 색다르더군요.
 
  ‘비목’의 노래비가 전국에 있어요. 백암산 산정에, 그리고 ‘평화의 댐’에도 있고, 충남 보령의 시비(詩碑)공원에도 있습니다. 제 고향 충주시 주덕읍사무소 마당에도 있고, 전남 순창에도 있어요. 순창은 6·25 때 공비토벌로 희생자가 많은 곳입니다.”
 
 
  ‘청빈한 선비’에서 ‘덕소 재벌’이 되다!
 
경기도 남양주 덕소에 있는 한명희 선생의 자택 주변. 지금은 전원을 배경으로 멋진 집을 지었지만, 처음 정착할 무렵인 1973년만 해도 외떨어진 시골이었다.
  선생의 거처인 이미시 문화서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에 있다. 지금은 전원을 풍경으로 멋진 집을 지었지만, 그가 처음 정착할 무렵인 1973년만 해도 외떨어진 한적한 시골이었다. 일그러진 슬레이트집에 개미가 대열을 짓는 맨 흙바닥에서 살았다. 그래도 마음은 안온하고 포근했다. 마을엔 전화도 없었고, 비가 올 때면 장화를 신고 한길까지 1km를 걸어야 했다.
 
  “덕수궁 부근 방송사까지 가려면 편도만 2시간 가까이 걸렸어요. 그때는 서울서 느끼는 ‘덕소’란 아스라이 지평선 저쪽의 후진 골짝이었죠.”
 
  합리보다 유행을 추종하는 세태에서 그의 역설적 선택은 옳았다. 탈(脫)서울을 막는 자녀교육, 생활편의, 의료시설 등도 막상 살아보니 대동소이요 오십보백보였다. 자잘한 불편이 있어도 내밀하게 즐기는 자연과의 동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땅값이 비쌀 리 없었다. 700평(2314m2)짜리 논을 평당 1500원을 주고 샀다. 손수 집을 지었다. 물론 맞벌이 월급으론 조족지혈이었다. ‘딸라 이자’를 빌려서 임시변통해갔다. 벽체가 올라가고 지붕이 덮이자 슬레이트집 개미 흙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말을 타면 권마성을 잡히고 싶다던가요? 700평 집터에 나무 심고 잔디도 가꾸다 보니 일종의 욕심과 허영 같은 것이 자라더군요. 이를테면 앞집 너른 땅을 모두 아울러서 울창한 정원으로 가꾼 다음 개성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집 앞 논을 사들였다. 빚에 빚을 더 진, 진짜배기 만용을 저질렀다. “집안 식구들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등을 챙기기는커녕 출퇴근 버스비가 없을 때는 연로한 어머니를 앞세워 동리 분들에게 차비를 꿔대야 했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집 주위 환경은 상전이 벽해가 되었습니다. 경계 겸 논두렁에 심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우람한 거목이 되었고, 인근 지역에서 솎아오기도 하고 선물로 받기도 했던 갖가지 나무들은 무심한 세월 덕에 여름이면 수림을 방불케 우거졌어요.”
 
  정년을 대비해 지은 선생의 3층짜리 서재도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상사 모두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옛말이 실감나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 초엽까지만 해도 내방하는 친구들이 ‘청빈한 선비’라 불렀지만 요즘은 ‘덕소재벌’”이라 부른단다.
 
  “비록 연금생활로 세속적 궁색은 떨지언정 마음만은 빌 게이츠를 능가하는 ‘덕소 재벌’입니다. 직접 심고 50년의 세월이 가꿔준 풍성한 그 대자연의 수목들 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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