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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전쟁 70주년

激戰地를 찾아서

목숨 걸고 지킨 조국 대한민국… 현실은 참전용사 87%가 생활고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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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남침 은폐하기 위해 남한이 북한 공격했다고 방송
⊙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 위해 목숨 바친 유엔군
⊙ 인천상륙작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부동 전투’
⊙ 맥아더 장군의 위대한 결정이 한국전쟁 승리로 이끌어
⊙ 전설의 영국군, 자신들 희생하며 중공군 공격 막아
⊙ 6·25 참전용사들 참전비 32만원 받아… 일반 군인보다 적어
1950년 7월 5일부터 5일간 치러진 개미고개 전투 기념비.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순간 ‘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밖으로 나가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산 너머에서 불길이 치솟고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북한이 쳐들어온 거죠.”
 
  6·25전쟁에 참전한 한 학도병의 말이었다. 당시 17세던 학도병은 현재 구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다. 포성은 멈췄지만 아직 우리 곁에는 대한민국 영토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고 처절한 전투를 치러야 했던 참전용사들과 그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기자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당시 치열했던 전투 현장을 찾아가 봤다.
 
 
  3일 만에 서울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지상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서울을 목표로 정한 북한군의 조공 1군단은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하였다. 춘천, 강릉을 목표로 한 조공 2군단은 화천과 춘천 접근로에 중점을 두고 계획된 축선을 따라 일거에 남한의 38도선을 돌파했다.
 
  북한 정권은 그들의 남침 기습이 성공하자 평양방송을 통해 “북한 인민군은 자위조치로써 반격을 가하여 정의의 전쟁을 시작하였다”는 표현으로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후 김일성은 “남한이 북한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하였으며, 이는 북한의 반격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남침을 은폐하기 위한 각본을 만들어냈다.
 
  무방비 상태에 있던 한국은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6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7월 3일,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계속 남진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제24보병사단이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해 방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승리하면서 북한군은 포위되고 전세가 역전됐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중공군 참전으로 인해 우리 군은 다시 밀려 내려오게 된다. 이때부터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1951년 7월부터 휴전협상을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된다.
 
 
  이름도 모르는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고귀한 희생
 
  기자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당시 격전지들을 방문했다. 물론 6·25전쟁 시 어느 한 곳도 격전지가 아닌 곳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승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격전지 7곳을 찾았다. 그곳은 ▲개미고개 전투 ▲다부동 전투 ▲인천상륙작전 ▲설마리 전투 ▲파로호 전투 ▲펀치볼 전투 ▲백마고지 전투지이다.
 
  먼저 개미고개 전투는 1950년 7월 5일부터 11일 까지 6·25전쟁이 발발하자 최초로 미군이 투입된 전투였다. 미 24사단의 스미스 부대가 거침없이 밀고 내려오는 3만명의 북한군을 막으러 왔다. 당시 미군은 자신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북한군이 도망칠 것으로 오판했다.
 
  7월 5일 북한군과의 첫 접전지 오산 죽미령 전투(개미고개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가 무너져버렸고, 다시 보강해 투입된 34연대까지도 7월 6일 천안에서 퇴각당하는가 하면 연대장 마틴 대령마저 전사하고 만다. 잇달아 비보를 접한 24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은 북한군 탱크를 저지할 대전차포를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에 긴급히 요구하며 전선을 뛰어다녔다. 7월 6일, 천안이 무너지자 딘 장군은 ‘개미고개’(지금의 세종시 전의면 소재)의 미군 667명으로 하여금 적의 남하를 결사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한국전쟁 중 한 전투에서 가장 많은 미군 전사자를 낸 개미고개 전투는 7월 11일까지 5일간이나 치열하게 전개된다. 개미고개는 차령산맥을 가로지르는 분수령이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거기다 국도 1호선이 지나고 경부선 철도가 상·하 행선 나란히 긴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철도가 지나는 깊은 계곡과 터널, 모두 전략적으로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안개가 자주 끼는데 그때도 그랬다. 미군이 터뜨리는 조명탄으로는 안갯속을 움직이는 적을 구별할 수 없었다.
 
  결국 5일간의 사투 끝에 미군은 667명 중 517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내고 조치원으로 퇴각했으며, 지금의 세종시를 에워싸고 흐르는 금강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그마저 무너지고 포위된 대전을 탈출하던 딘 장군은 북한군에 포로가 되고 만다.
 
  미군 517명의 목숨을 앗아간 개미고개, 지금 그곳에는 알지도 못하는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한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미군들을 기념하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는 3명의 미군 병사와 쓰러진 전우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병사, 그리고 한 켤레의 흙 묻은 군화와 철모가 얹혀진 총검 조형물 등이 반원형으로 펼쳐져 있어 당시 처절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희생은 헛된 것이었을까? 아니다. 개미고개에서 517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5일간 버텨낸 것이 결국 인민군의 남진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했다. 미24사단이 비록 패퇴했지만 대전 전투에서 시간을 끌었고, 그것은 다시 낙동강 전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줬다. 만약 그때 낙동강 전선이 구축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참전용사들은 말한다.
 
 
  6·25전쟁의 마지노선 ‘다부동 전투’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 사진=대한민국 정부 기록 사진집
  다부동 전투는 8월 13일부터 30일까지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선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전투다.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제1군단과 제2군단은 김천과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7월 20일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한 직후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가용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다. 따라서 8월 공방전의 승패는 대구 북방의 전투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면 그 지역 아군의 방어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제1, 6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뿐이었으며, 인접 사단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적의 주접 근로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부근으로 도하하는 적을 몇 차례 격퇴했으나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제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물러났다. 왜관 일대의 미 제1기 병사단은 역습을 전개해 낙동강을 건너려는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 다부동, 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다부동 방어전투에서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제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이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적은 다부동 전선을 더는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제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위기는 해소되었다.
 
  다부동 전투지 인근에 마련한 박물관에서는 추모비와 당시 치열했던 전투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박물관은 운영하지 않고 있었다. 기념비를 둘러보다 보면 특별한 추모비가 있다. ‘구국경찰충혼비’인데, 다부동 전투에 참전한 경찰들을 기리기 위한 명각비로, 총 1100명의 이름이 새겨 있으며 이 중 전사자는 197명이다. 6·25전쟁 당시 경찰들은 전황 불리에 따른 미군의 부산 철수 요청을 뿌리치고 전국의 경찰관 1만5000여 명을 낙동강 방어전투에 투입해 대구를 사수했다. 이 밖에도 전투 당시 전사자가 계속 발생해 인원이 부족하자 인근 마을 주민들도 함께 싸웠다고 한다.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

 
6·25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은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기념비에서 부태삼 참전용사가 기념비를 살펴보고있다.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냄에 따라,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공격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우리 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발목을 잡는 동시에 해상에선 대담한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인천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계획한 가장 위대한 작전으로 평가받는다.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 상륙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 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7월 첫주 참모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준비시켰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미 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선택했고, 그의 예상대로 인천의 적 방비 태세는 엉성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뿐이었다. 10월은 기후 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라 가장 적절한 시기는 9월 15일로 결정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 계획을 확정하고 상륙부대 편성에 착수했다. 8월 26일 인천상륙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했다.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이었다.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와 기간요원들이 차출당해 병력이 부족해지자 한국 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해 일본에서 훈련한 후 배치시켰다. 이들이 바로 카투사(KATUSA)의 시초였다. 한편 국군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연대와 국군 제17연대였다.
 
  맥아더가 예상한 대로 인천에 대한 적 방비 태세는 엉성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해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70년 전 대승을 거둔 인천상륙작전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기자는 지난 5월 1일 한국전쟁 당시 한국 해병 1연대 소속이던 부태삼 참전용사와 함께 현장을 방문했다. 부태삼씨는 해방 전 일본에서 살다 해방 이후에 제주도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그때 부태삼씨는 17세였다. 부태삼씨는 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해병대에 입대하려 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이 됐다. 하지만 부태삼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혈서(血書)를 써서 해병대 4기로 입대했다. 곧바로 1연대에 배속됐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인천상륙작전 시 그가 상륙한 부두에서는 당시 전투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1950. 9. 15 인천상륙작전 상륙 지점(적색해안)’이라는 표시 비석만 초라하게 세워져 있었다.
 
  부태삼씨는 이를 보고 “참으로 안타깝다. 국가에서 조금만 관심 가지면 역사적 전적지로 잘 활용이 될 텐데” 하며 “요즘 ‘양키 고홈’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25전쟁에서 미국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린 김정은이 밑에서 짐승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인천상륙작전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남쪽의 낙동강 전선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3일 전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천 소식이 알려지면서 적의 사기가 한없이 떨어지게 되고 도주병이 나오더니 드디어 전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륙작전 개시 후 약 보름 만에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다. 적은 약 10만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북으로 도주한 자는 3만명이 채 안 됐다.
 
 
  전설의 글로스터셔 大隊 영국군 영웅들
 
  북한군이 도주하면서 전선은 국군과 유엔군이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당시 북진 통일의 꿈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에게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10월 1일 국군은 3사단을 선두로 하여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해 들어갔다. 공격받던 전쟁에서 공격하는 전쟁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북진했으나 중국군의 공세에 부닥쳐 11월 말에서 1951년 1월 사이에 후퇴가 시작된다. 중공군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 북한이 유리해졌다. 북한은 중공군을 앞세워 거세게 밀고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전설의 글로스터셔 대대(大隊)가 또 한 번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해준다. 영국군 글로스터셔 대대가 영웅적으로 싸운 전투가 ‘설마리 전투’다.
 
  한국전쟁 당시 경기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235고지와 인근 계곡에서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벌어진 전투다. 한국에서는 설마리 전투로, 영국에선 ‘임진강 전투’로 각각 부른다. 영국군 29보병여단 4000여 명이 서울로 향하는 중공군 63군 소속 7만여 병력의 전진을 나흘간 저지한 전투다.
 
  영국군 3개 대대 중 글로스터셔 대대의 피해가 가장 컸다.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워털루 전투에도 참가한 유서 깊은 부대인데 설마리에서 붕괴 직전까지 갔다. 전투 중 58명, 탈출 중 30명이 전사했다. 대대장 카네 중령을 포함한 나머지 530명은 대부분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됐다. 포위망을 빠져나간 병력은 63명에 불과했다.
 
  언뜻 패전으로 보이지만 영국에선 ‘영광의 글로스터셔’라며 이들을 칭찬한다.
 
  첫 번째 이유는 불굴의 투혼이다. 235고지에 포위됐던 글로스터셔 대대는 총알과 박격포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싸웠다. 중대장으로 참전한 패러호크리 대위는 중공군 피리 소리에 맞서 나팔수에게 “진격 나팔을 불어라”고 명령했다. 나팔수 부스 하사는 후퇴 신호를 제외한 모든 레퍼토리를 연주하며 전우들을 격려했다.
 
  두 번째는 이 작은 전투가 제2의 1·4후퇴를 막았다는 것이다.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지만 중공군은 속공으로 재점령한다는 작전 아래 4월 춘계 공세에 나섰다. 하지만 영국군에게 발목이 잡히면서 작전은 무산됐다. 그동안 유엔군은 서울 북부에서 반격 준비를 마쳤다. 중공군은 그 뒤 다시는 대대적인 공세를 펴지 못했다.
 
  세 번째는 지휘부의 희생정신이다. 대대장 카네 중령은 4월 25일 오전 6시 배터리가 거의 떨어져 가는 무전기를 통해 철수 명령을 받았다.
 
  현재 설마리 전투 현장에는 영웅적 희생정신을 보여준 영국군을 기리기 위한 추모공원을 조성해놓았다. 그곳에는 당신 희생된 영국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 있었다. 그리고 한쪽 잔디밭에는 6명의 영국군이 행군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유엔군의 3차 반격 ‘파로호 전투’

 
  1951년 유엔군의 제3차 반격작전 기간 중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국군 제6사단이 화천저수지 일대에서 전개한 공격 전투가 ‘파로호 전투’다. 지난 4월 공세 이후 공산군 측은 계속해서 중동부 전선의 돌출된 국군을 섬멸한다는 작전계획하에 2개 병단 54만명을 동원해, 5월 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하고 인제 방면으로 조공을 투입해 국군 제3군단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 결과 국군 제3군단이 현리 전투에서 와해되었지만, 속사리까지 근접한 중공군도 작전 한계점에 도달해 퇴로 차단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친 공산군 측의 공세를 분쇄한 유엔군은 5월 20일부터 문산, 연천, 화천저수지, 양구, 간성을 잇는 캔사스선 탈환을 위한 제3차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유엔군의 제3차 반격작전 계획에 따라 중서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은 5월 20일 화천 탈환을 목표로 왼쪽부터 미 제24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6사단, 미 제7사단으로 병진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9군단에 부여된 임무는 신속한 화천 점령으로 중공군의 5월 공세 때 속사리까지 진출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화천을 향해 진격하던 미 제9군단은 5월 25일 춘천 방면과 속사리 방면에서 후퇴하는 중공군이 화천 일대에 집결하고 있다는 항공 관측 보고를 받았다.
 
  미 제9군단장은 적이 통과할 군단의 최종 목표인 화천저수지 서쪽의 도로 교차점을 조기에 점령,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 제24사단 제21연대, 미 제7사단 제17연대,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를 투입했다. 5월 26일 3개 연대는 춘천-화천 간 도로와 가평-지암리 간 도로, 그리고 지암리 남쪽의 국군 전선으로 형성된 삼각형 우리 속에 중공군을 몰아넣었다.
 
  5월 27일부터 중공군은 대대 단위로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으나 퇴로를 봉쇄한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격멸되었다. 특히 5월 28일 미 제17연대가 화천을 점령하고 국군 제6사단 주력이 화천저수지 남쪽에서 구만리발전소-병풍산을 연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하게 되자 화천저수지로 퇴로가 차단된 적은 저수지에 빠져 익사하거나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1951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최소한 2만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았다. 이 전투 이후 화천저수지가 ‘파로호(破虜湖)’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이름 붙인 것에서 유래하였다.
 
  지금도 그곳에는 중공군이 퇴로가 차단돼 어쩔 줄 몰라 하던 장소가 남아 있다. 그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져 있고, 인근에는 기념관을 비롯한 파로호 전투와 관련된 전적비들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기념관은 현재 운영하지 않는다.
 
 
  한 종군기자가 붙여준 마을 이름 ‘펀치볼’
 
  ‘펀치볼 전투’는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가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펀치볼(해안분지)을 공격한 전투다. 펀치볼 마을 이름은 원래 해안면(亥安面)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한 종군기자가 해안분지의 지형을 보고 펀치(Punch·주스와 포도주, 설탕 등을 섞은 칵테일 종류)를 담는 그릇(볼·bowl)을 닮았다고 붙인 이름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이곳이 왜 펀치볼 마을인지 실감나게 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름과 달리 전쟁 당시 이곳은 치열한 격전지였다. 아군과 적군이 뺏고 빼앗기며 수차례 전투를 치른 곳이다. 미 제10군단장은 8월 중순 군단 정면 해안분지 북측 고지군에 연한 작전통제선을 설정한 다음 각 사단에 공격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의거 군단예비로 있던 미 제1해병사단이 해안분지를 공격하게 됐다.
 
  해병 제1사단은 8월 30일까지 국군 해병 제1연대와 미 제7해병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나머지 2개 연대를 예비로 확보한 채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사단이 부여받은 공격목표는 해안분지 북쪽 일련의 횡격실 능선상의 1026고지와 924고지, 해안분지 북동쪽의 702고지와 660고지군이었다. 이 무렵 이곳에는 적도 부대 교대를 실시하여 인민군 제3군단이 제2군단 지역을 인수했으며, 그중 제1사단이 해안분지 북쪽 방어선에 투입됐다.
 
  8월 31일 국군 제1해병연대는 제3대대가 793고지에서 출발하여 월산령에서 전초중대와 합류한 다음 924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다음 날 9월 1일 미 제7해병연대 제3대대는 09시에 702고지 공격을 재개하여 견고한 진지에서 집요하게 저항한 적을 격퇴하면서 전진을 하다가 백병전 끝에 10시55분 702고지를 점령했다. 대대는 다음 날 공격 개시 3일 만에 702고지 전방의 602고지도 점령함으로써 사단 목표를 모두 점령했다.
 
  국군 해병대의 목표 점령이 늦어지자 미 제1해병사단장은 미 제5해병연대로 하여금 국군 해병이 담당한 캔사스선 방어임무를 인수하도록 하고 국군 해병 제2대대도 공격에 운용하도록 조치했다.
 
  국군 해병과 미 해병은 해안분지 북쪽과 동쪽의 고지군을 탈취하고 해안분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많은 사상자를 냈고, 특히 이 전투에서 국군 해병은 지형의 특징상 기동로가 없어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측방으로 우회하여 좁은 공간에서 목표를 공격, 해안분지 확보에 가장 중요한 고지인 1026고지(모택동 고지)와 924고지(김일성 고지)를 점령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9월 8일에 하달된 9월의 제한공격 지침에 따라 부여된 북측 간무봉에서 사단 정면으로 뻗은 능선상의 749고지를 점령할 목적으로 공격작전을 재개하게 됐다. 이 목표는 간무봉 일대의 적을 견제할 뿐만 아니라 해안분지에 대한 적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전술적 의미가 있었다.
 
  사단은 1단계 작전을 끝낸 후 한 주간쯤 부대정비를 한 다음 9월 11일부터 공격작전을 펴 9월 20일까지 격전한 끝에 749고지를 점령하고 해안분지 북쪽 5km 812고지까지 탈취했다. 사단은 812고지 탈취로 작전목표를 달성하고 해안분지를 완전히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때 군단으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자 펀치볼 작전을 종료했다.
 
 
  휴전협정 기간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
 
강원도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다. 현재 DMZ 내 우리 군 GP가 있는 곳이라 출입이 불가능하다.
  미군은 1951년 7월부터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간에 휴전 협상을 진행했다. 이때 시작된 협상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맞게 된다. 하지만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순간에도 어디선가 전투는 계속됐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초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의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 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해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였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0월 6일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 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km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 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했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제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0월 12일 아침 반격해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됐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했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했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됐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 전투로서는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 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 지휘 능력을 과시하게 됐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해 닌호아·투이호아·캄란 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했다.
 
 
  영웅들의 목숨값은 32만원
 
  당초 6·25전쟁 70주년 격전지와 관련된 기사를 기획한 의도는 해당 전투에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을 모시고 생생한 얘기를 듣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외출을 자제하시는 한편, 연세(年歲)가 있으셔서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많았다. 그래도 각 지역에 있는 6·25참전유공자회를 통해 해당 전투에 참가한 분들은 아니지만 몇 분의 참전용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재 생존 중인 6·25전쟁 참전용사들은 국내에만 8만여 명 정도다. 이들의 나이는 80대 후반에서 90대 중반 사이다. 취재 기간 만난 참전용사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기껏 살아야 5~6년 정도다. 그런데 만약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들이 모두 죽으면 이 나라는 6·25전쟁에 대해 관심도 안 가질 것이다. 그게 제일 걱정이다.”
 
  이들은 80~90세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6·25전쟁에 대해 알리는 데 노력을 하고 있다. 그에 하나로 전국 초·중·고등학교를 돌면서 6·25전쟁 당시 생생한 얘기를 들려주며 후대들이 잊지 않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몇몇 학교에서는 ‘우리가 왜 그런 교육을 해야 되냐’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박덕용 6·25참전유공자회 칠곡군지회장은 “6·25 참전용사를 영웅이라고 해주는데 말로만 영웅이라고 하고 그에 맞는 대접은 해주지 않는다. 큰 대접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죽는 날까지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박 회장은 “지금 생존자 중에는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치료비를 국가에서 너무 적게 지원해주다 보니 자비로 더 내야 한다”며 “특히 현재 참전용사들은 참전 수당을 32만원 정도 받고 있다. 그것도 작년에 오른 것이 이 정도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영웅이란 이름에 맞는 보상은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재권 참전용사는 대한민국 최초 카투사였다. 자원입대 이후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곧바로 작전에 투입됐다. “대한민국 참전용사들은 참으로 불만이 많다. 지금 일반 병사도 한 달에 40만~50만원 정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32만원이다.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말했다.
 
  2018년 보훈교육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80세 이상의 고령 참전용사의 87%가 생활고를 겪고 있다.
 
  전국에 생존해 있는 6·25전쟁 참전 용사가 8만9000여 명임을 감안할 때, 7만6000여 명의 참전용사가 고된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2019년 들어 정부가 1인당 참전명예수당을 22만원에서 30만원으로 올렸지만, 1인 가구 최저 생계비 66만원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지자체에서도 별도로 재원을 마련해 참전용사에게 지원을 하고 있지만 지역별 편차가 크고 해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주재용 참전용사는 고향이 북한 함경남도 혜산이다. 북한 혜산시가 지금은 양강도에 속하지만 해방 이전에는 함경남도에 속했다. 주 용사는 인민군에 강제로 징집됐지만 도망쳐 나와 남으로 내려와 군에 입대했다. 그는 “아마도 지금 학생들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것이다. 해방 이후 5년간 공산당 밑에서 살아본 나로서는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잘 알겠더라. 그래서 남으로 내려왔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박성환 참전용사는 17세에 군에 입대했다. 무작정 입대를 한 박성환씨는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 전역했다. 박성환씨는 “내가 직접 봤고, 내가 경험을 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논쟁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한 남침이다. 그리고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아직 대한민국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전쟁을 잠시 쉬는 ‘휴전’ 상태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당시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어떻게 싸워 이 땅을 지켜냈는지 되새겨보려 한다.⊙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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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승기    (2020-06-25) 찬성 : 0   반대 : 0
좌파 운동권 87%는 호의호식 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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