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청년동맹 황색사건’ 관련자 전부 처형
⊙ 김정은 정권 인사권 최룡해가 가지고 있다
⊙ 김정일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최룡해 형 최룡택
⊙ 김정은 정권 인사권 최룡해가 가지고 있다
⊙ 김정일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최룡해 형 최룡택
- 2014년 7월 27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 참관식에서 최룡해(왼쪽)가 김정은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조선중앙TV
북한의 2인자는 최룡해다. 최룡해는 빨치산 혈통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950년 1월 황해북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북한의 대표적인 금수저다. 그의 부친 최현(1982년 사망) 전 인민무력부장은 일제강점 시기 중국의 동북항일연군에서 싸운 이름난 빨치산 지휘관이다.
당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맹위를 떨친 최현의 명성은 김일성을 훨씬 뛰어넘었고, 다른 빨치산들과 급이 달랐다. 그런 최현이 김일성에게 충성했고, 특히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 힘을 보탰다는 점에서 김정일의 신임이 컸다. 특히 군부 내에서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모친 김철호 역시 최현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1세대다.
북한 공식 2인자 자리 오른 최룡해
최룡해는 지난 4월 11일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직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에 올랐다. 북한에서 국무위원회는 김정은이 직접 담당하는 핵심 국정기구이다. 특히 최룡해가 이번에 맡은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그동안 북한 직제상 없던 직위다. 기존 국무위원회 편제에서는 최룡해와 박봉주 전 내각총리가 함께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북한이 헌법을 ‘수정보충’하면서 새로 만든 자리로 보인다. 최룡해가 노동당에 이어 국가기구에서도 2인자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특히 그동안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최룡해의 몫이 됐다. 올해 91세인 김영남 전 상임위원장은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은 지 21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북한 ‘빨치산 혈통’의 대표 인물인 최룡해는 2017년 노동당 제7기 제2차 전원회의 이후 노동당 간부·당원을 포함해 전 주민에 대한 장악·통제와 인사권을 가진 당 조직지도부장을 맡아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최룡해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2선으로 물러났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앞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았던 김영남은 유명무실했다. 김영남은 북한 정권의 ‘얼굴마담’이었다. 하지만 최룡해는 김영남과 달리 많은 성과를 내놓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모 책임연구원은 “먼저 최룡해가 2인자냐 3인자냐를 떠나서 김정은 유일통치 구조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고, 가장 필요한 조연”이라고 말했다.
“최룡해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간 것은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언젠가는 갈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선임자인 김영남처럼 얼굴마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북한 구조를 보면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를 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인적 자원이다. 북한은 김일성 시절부터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 한 명씩 있었다. 김정일 때도 있었고, 김정은을 보좌할 2인자는 최룡해다.”
북한은 김일성을 시작으로 2인자 역할을 했던 사람이 한 명씩 있다. 김일성 옆에는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이 있었다. 오 부장은 1917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일찍이 중국에서 김일성과 함께 항일혁명투쟁을 했다. 이후 김일성의 경호대장을 시작으로 북한 군 주요 요직들을 거치며 김일성의 오른팔로 성장했다. 일각에선 오 부장에 대해 능력은 부족하나 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승승장구한 인물로 분석한다.
김정일 옆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있었다. 조 부위원장은 1928년 함경북도 출생으로 열 살 때부터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빨치산 활동을 한 인물이다. 해방 이후 김일성을 보좌하며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0년 조명록 사망 당시 김정일이 직접 장의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시대 들어 이 역할을 최룡해가 하는 것이다. 오진우와 조명록은 빨치산이라는 배경을 가졌지만, 실무 능력은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최룡해는 빨치산 출신인 부모에 더불어 실무 능력까지 모두 갖췄다는 평가다.
상임위원장 자리에 서둘러 간 이유… 건강 때문
최룡해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에 간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 때문으로 알려졌다. 최룡해는 고질적인 당뇨병을 앓고 있다. 이로 인해 한쪽 다리가 짧아 걸음걸이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에 비해 짧다는 것이다. 최룡해는 2014년부터 당뇨병과 척추질환으로 한쪽 다리를 절면서 김정은을 수행해왔다. 이는 북한이 공개한 여러 영상에서 포착됐다.
한 고위 탈북민은 “최룡해는 예전부터 당뇨병으로 고생했다. 다행히 봉화산 진료소에서 치료를 잘 받아오고 있어서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다. 당뇨병으로 인해 여러 차례 입원도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최룡해가 14기 2차 회의에서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갈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고 보고 있다.
김 책임연구원은 “3~4년 뒤에야 상임위원장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갔다. 최룡해는 예전부터 당뇨병으로 인해 고생했는데, 이것이 최근 당 조직지도부장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건강이 더 악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최룡해의 건강은 1997년 ‘청년동맹 황색사건’으로 인해 자강도 랑림군으로 혁명화하러 가면서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최룡해는 랑림군에 내려가 6년간 콩으로 된 음식을 먹고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병세가 조금 호전된 적이 있었지만, 다시 평양으로 복귀하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최고인민회의 기관 직원들은 최룡해를 반기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최룡해가 와병으로 인해 김영남 자리로 가긴 했지만, 내부 직원들은 김정은 이외 북한의 최고 실세가 온다고 다들 좋아하고 있다”고 전했다.
1997년 북한 청년조직에 불어닥친 칼바람
1990년대 북한은 ‘혼돈의 시기’였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게다가 김일성 사망과 경제난으로 인해 김정일 체제는 심하게 흔들렸다. 김정일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선 1990년대 초 발생한 ‘프룬제 아카데미’ 사건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1992년 북한군 내 프룬제 아카데미 유학파 출신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사건이다.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는 러시아 군사종합학교다. 프룬제 출신 북한군 장교들은 조선인민군 창설 60주년 기념행사가 예정된 1992년 4월 25일 쿠데타를 실행하기로 했다. 이들은 당일 사열식이 열릴 때 전차포(탱크)를 몰고 가다가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서 있는 주석단을 향해 포탄을 발사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정보 유출로 실패했다.
더 큰 문제는 쿠데타 모의에 최룡해 매형도 있었다. 당시 사건 처리 과정을 지켜본 한 고위 탈북민은 “당시 최룡해가 김정일에게 불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래서 매형은 물론 최룡해의 누나까지 숙청돼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에 최룡해가 이끌고 있던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서 발생한 어떤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중앙당 근로단체부의 검열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사노청 검열은 조직지도부와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안전보위성) 검열로 확대된다. 당시 최룡해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사건의 시작이다. 청년동맹의 부위원장급 이하 직원들은 최룡해의 권력을 믿고 보위부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정일이 대로하여 철저히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가 시작되자 최룡해는 2개월간 정직 상태에서 거의 집에 감금된 상태로 지냈다. 당시 김정일은 모든 권력을 동원해 자신의 체제 유지에 힘썼다. 반면 중앙당 간부들의 권력 다툼까지 벌어졌다. 그동안 최룡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간부들은 청년동맹에 대해 낱낱이 수사하게 된다. 당시 수사로 인해 최룡해의 실체가 드러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 있는 곳에는 추문이 따라다녔다. 최룡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룡해 뒤에는 성 관련 추문이 항상 따라다녔다. 먼저 최룡해는 자신이 1인자로 있는 청년동맹에 예술단을 만들어 향락을 즐겼다. 이에 대해 당시 평양에서는 김정일의 ‘기쁨조’를 따라 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또 최룡해는 김정일의 ‘기쁨조’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전국에서 미모의 여성들을 뽑아 별장과 청년동맹에서 관리하는 호텔 등에서 섹스 파티를 즐겼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변태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의 치아를 뽑게 했고, 한 대당 100달러에 값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룡해는 ‘5과’에 선발된 여성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5과는 조직지도부 소속으로 김씨 일가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여성과 남성들을 뽑는 업무를 담당한다. 여기서 여성들은 미모가 뛰어나고 출신 성분이 좋아야 한다. 5과에 뽑힌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당의 관리를 받게 되고, 학교 졸업과 동시에 평양으로 올라간다. 경쟁률이 치열하다. 평양에 올라간 여성들은 미모 순서대로 김정일의 기쁨조가 되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수발을 들게 된다. 최룡해는 5과에 뽑힌 여성들까지도 자신의 성 노리개로 삼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청년동맹 간부들이 남한의 당시 안기부와 내통했다는 죄까지 뒤집어씌워 반체제, 정치적 문제로 번졌다. 이로 인해 북한 전역의 청년동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진다. 당시 청년동맹에서 지도원으로 근무했던 한 탈북민은 “자고 일어나면 누가 잡혀갔고, 누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이 일명 ‘청년동맹 황색사건’이다. 최룡해는 이 사건의 ‘주모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친인 최현의 공로 덕분에 사형은 면했다. 최룡해는 이후 출당(黜黨)당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제됐다. 그리고 그동안 누려오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혁명화를 시작하게 된다.
최룡해 6년 만에 혁명화서 복귀
1997년에 청년동맹 황색사건으로 자강도 랑림군으로 내려간 최룡해는 6년 만에 평양에 복귀했다. 최룡해 인생에 6년이라는 기간은 뼈에 사무치게 김씨 일가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한 시기일 것이다. 특히 북에선 김씨 혈육이 아닌 한 누구라도 철저히 몸을 낮춰야 산다는 교훈도 얻었을 것이다.
최룡해가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체험기다. 최룡해가 6년간 랑림군에 있으면서 쓴 〈혁명체험기〉가 김정일 손에 들어가게 된다. 김정일은 이를 보고 중앙당 과장 이상급 간부들에게 배포해 무조건 읽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후 김정일의 지시로 최룡해가 복귀하게 된다. 일각에선 최룡해 복귀에 항일 빨치산 1세들이 도움을 줬다는 말도 있다.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인 황순희와 당시 정무원 총리였던 연형묵, 김정일 동생 김경희가 그의 복귀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김정일이 북한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황순희는 항일 빨치산 1세로 김정일 모친인 김정숙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김정숙이 1949년 병환으로 죽으면서 황순희에게 김정일과 김경희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까지 남길 정도다. 연형묵은 당시 북한에서 일 잘하는 일꾼으로 김정일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김경희는 김정일의 분신 같은 존재다. 이들이 최룡해 사면을 김정일에게 여러 번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도움과 〈혁명체험기〉로 인해 최룡해는 2002년 다시 평양으로 복귀하게 된다. 최룡해가 평양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평양 상하수도사업소 당비서로, 말단직부터 시작한다. 이후 조선노동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승진한다.
한 고위 탈북민은 “최룡해가 처음에 상하수도사업소 당비서로 복귀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최룡해가 쫓겨갈 당시 상황이 심각했다. 먼저 중앙당 청년동맹 부위원장 9명 중 2명만 제외하고 모두 처형시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밑에 하급 기관 지도원급까지 관련자들을 모두 색출해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당시 최룡해는 빨치산 가문이기 때문에 혁명화로 끝났다. 하지만 최룡해를 추방하면서 출당은 물론 사진까지 모조리 수거해갔다. 북한에선 정치적인 범죄를 저지를 경우 당사자 추방은 물론 관련자 사진까지 태워 없애거나 사진에서 얼굴을 도려낸다.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북한에서 사진을 없애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정치적 범죄를 저질러서 조용히 어디론가 데려가 처형시킬 사람과 대남 공작원으로 파견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없앤다. 대부분 정치범일 경우 수용소로 끌려가지만 심할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 북한은 어릴 때부터 공작원을 선발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당에선 그 부모들에게 ‘아들을 나라에 바쳤다고 생각하라’는 말과 함께 아이가 나온 사진을 모조리 수거해 소각한다.
최연소 황해북도 책임비서… 다시 출세 가도 달려
최룡해는 3년간 노동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일한 뒤 2006년 황해북도 당위원회 책임비서(도지사)로 가게 된다. 당시 북한 시·도당 책임비서 중에 최룡해가 가장 어렸다고 한다. 그만큼 김정일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한 고위 탈북민은 “한번은 김정일이 참석하는 행사가 있었다. 책임비서들이 기다리고 있고, 저 멀리서 신형 벤츠 한 대가 와서 멈춰 섰다.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은 최룡해였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고 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책임비서들은 김정일이 선물한 ‘216’ 구형 벤츠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최룡해는 김정일에게서 직접 선물받은 신형 벤츠에 군 번호가 찍힌 차를 타고 다녔다. 이 사건은 최룡해가 다시 부활했고, 김정일에게 신임받고 있다는 증거가 됐다.”
북한의 216 선물 차량은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을 의미하는 번호판을 달고 다닌다. 이 차량에 대해선 누구도 함부로 세울 수 없다. 과거 김정일의 차량도 216 번호판을 달고 다녔다.
최룡해는 황해북도 책임비서를 하면서 여러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황해북도는 북한에서도 가장 가난하기로 소문난 지역이다. 최룡해 부임 이후 황해북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로 인해 김정일도 여러 차례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정일은 평안도, 함경도, 자강도 등 다른 지역은 방문이 잦았지만, 황해북도는 좀처럼 방문하지 않았다.
그가 황해북도를 선택한 이유도 따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최룡해의 아버지인 최현은 생전에 항상 김일성과 김정일을 받드는 길에서 제1선에서 보위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최룡해가 북한의 첫 관문인 황해북도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한 고위 탈북민은 “당시 당 총무부 부부장을 하면서 김정일이 여러 번 불러 의견을 물어봤는데, 최룡해가 이때 자신이 남한으로부터 첫 관문인 황해도로 내려가 충성을 다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충성맹세를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룡해의 황해북도 생활은 4년 만에 끝이 난다. 후계구도가 김정은으로 짜이자 김정일은 곧바로 최룡해를 불러들여 인민군 대장 칭호를 준다. 파격적이다. 북한에서 민간인이 대장 칭호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최룡해는 김정은 정권에서 요직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했다. 이는 최룡해가 김정은 체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얘기다. 최룡해는 황해북도 책임비서에서 평양으로 복귀하고, 북한군 총정치국장과 조직지도부장 등 주요 요직에서 활동했다. 단 2년 정도의 짧은 시간이다. 특히 민간인 신분에서 군 총정치국장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다. 최룡해는 총정치국장과 조직지도부장으로 일하면서 내부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먼저 파격 인사를 단행해 물갈이를 했다. 이는 김정은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김정은은 최룡해를 믿는다는 단편적인 예다.
최룡해 집안 대대로 김씨 일가 정권창출 일등 공신
최룡해는 김정은 정권의 일등 공신이다. 앞서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정권이양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장성택과 이영호 등 공신들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인물은 최룡해뿐이다. 최룡해는 김정은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시기에 민간인으로 군을 장악하기 위해 대장 칭호와 함께 총정치국장으로 활동했다. 이는 군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잠재우며 안전한 권력 이양을 도왔다.
그의 아버지 최현도 김정일의 숨은 킹메이커였다. 최현은 1960년 후반 김일성 후계자 문제를 놓고 치열한 권력싸움을 벌일 때 김정일 옹립에 앞장섰다. 당시 분위기는 김일성과 둘째 부인 김성애 사이에 태어난 김평일에게 유리했다. 김일성도 김성애의 입김 탓에 누구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최현은 권총을 들고 다니면서 김평일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협박했다. 하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김일성의 귀에 얘기하는 것이었다. 당시 절대권력을 쥔 김일성의 마음을 돌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다들 김일성의 눈치를 보던 시절에 최현이 나선 것이다. 최현은 김일성과 사적으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현의 말은 귀담아듣는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첫 장에 최현과 찍은 사진을 게재했고, 4권에는 ‘백전노장 최현’이라는 제목으로 35페이지를 할애해 그를 추억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1933년 9월 중국 왕청현 소왕청 마촌에서 처음 만났다. 둘 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장 왕더타이(王德泰) 밑에 있을 때였다. 《세기와 더불어》 4권에는 최현이 비록 다섯 살 위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 ‘김일성 대장님’이라고 불렀다고 써 있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전우애를 나누었고, 최현은 ‘김일성의 남자’가 됐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최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최현은 매우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보는 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는 사나이다. 최현은 일평생 비관을 모르고 살아온 낙천가였으며, 어떤 폭풍 속에서도 앞으로만 돌진해온 탱크 같은 사나이였다.”
최현은 김일성의 최대 위기였던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김일성을 결사 옹위했다. 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최현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그를 ‘충신’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최현 집안을 ‘충신 집안’으로 부르는 이유다. 이런 깊은 관계로 최현은 1972년 김일성에게 독대를 신청해 김정일의 실력을 하나둘씩 열거했다.
김정일은 1967년 노동당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를 숙청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 회의를 계기로 조선노동당 내에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유일사상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심이 됐다고 그를 띄웠다.
그 외에도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문화예술 부문을 지도해 ‘백두산 창작단’ ‘피바다 가극단’ ‘만수대 창작사’ 등을 창설해 북한 문화예술계의 돌풍을 일으켜 1970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한 점도 내세웠다. 김일성 역시 이런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70년 11월에 열린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세워야 한다는 원로들의 주장을 일단 보류시켰다. 김일성은 둘째 부인 김성애를 삐딱하게 대하는 김정일이 거슬렸다.
하지만 최현의 완강한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후계자로 김정일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정일의 최현에 대한 마음은 어땠을까? 은인이자 평생 보답해야 할 고마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혁명가〉라는 영화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다. 그의 감사하는 마음은 최현의 아들 최룡해로 이어졌고, 김정일 사망 이후는 김정은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아 최룡해를 곁에 두고 있다.
김정일 동생 ‘슈라’ 죽음에 연루된 최룡택
최룡해는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바로 위의 누나는 프룬제 아카데미 사건에 개입한 매형의 잘못으로 죽었다. 큰형인 최룡택도 중앙당 간부과 과장으로 일하다 일찍 사망(1940년)했다. 최룡택은 동생 최룡해와 달리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여러 얘기가 있지만 다수의 고위 탈북민은 “최룡택이 김일성의 눈 밖에 나면서 출세 길이 막혔다”고 증언했다.
최룡택이 김일성의 미움을 사게 된 사건이 있었다. 김정일에겐 쌍둥이 ‘슈라(소련 이름)’라는 동생이 있었다. 슈라의 한국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슈라는 해방 이후 자신의 집 연못에 빠져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김일성은 해방 이후 소련의 도움으로 북한 정권을 잡으면서 1인자가 됐다. 당시 김일성은 집 앞에 연못이 있는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김정일과 최룡택, 그리고 슈라가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슈라가 연못에 빠지게 됐다.
연못에 빠진 슈라가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김정일과 최룡택은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집 뒤뜰에 숨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정원을 관리하던 사람이 그 상황을 목격하고 슈라를 건졌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이 상황을 들은 김일성은 대로하여 김정일과 최룡택을 불러 따졌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빨치산 동지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는 시기였다. 여기서 최현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한 이유로 최룡택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도 아버지 김일성의 미움을 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라고 한다.
한 고위 탈북민은 이 사건에 대해 “김일성이 이 사건으로 인해 김정일과 최룡택을 끝까지 미워했다. 당시 최현이라는 혁명동지의 자식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후 최룡택은 동생인 최룡해가 승승장구할 때도 앞에 나서지 못하고 낮은 직책에서 조용히 살아갔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맹위를 떨친 최현의 명성은 김일성을 훨씬 뛰어넘었고, 다른 빨치산들과 급이 달랐다. 그런 최현이 김일성에게 충성했고, 특히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 힘을 보탰다는 점에서 김정일의 신임이 컸다. 특히 군부 내에서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모친 김철호 역시 최현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1세대다.
북한 공식 2인자 자리 오른 최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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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3일 북한 최룡해가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대 경축 중앙군중대회에서 경축보고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조선중앙TV |
특히 그동안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최룡해의 몫이 됐다. 올해 91세인 김영남 전 상임위원장은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은 지 21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북한 ‘빨치산 혈통’의 대표 인물인 최룡해는 2017년 노동당 제7기 제2차 전원회의 이후 노동당 간부·당원을 포함해 전 주민에 대한 장악·통제와 인사권을 가진 당 조직지도부장을 맡아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최룡해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2선으로 물러났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앞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았던 김영남은 유명무실했다. 김영남은 북한 정권의 ‘얼굴마담’이었다. 하지만 최룡해는 김영남과 달리 많은 성과를 내놓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모 책임연구원은 “먼저 최룡해가 2인자냐 3인자냐를 떠나서 김정은 유일통치 구조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고, 가장 필요한 조연”이라고 말했다.
“최룡해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간 것은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언젠가는 갈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선임자인 김영남처럼 얼굴마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북한 구조를 보면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를 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인적 자원이다. 북한은 김일성 시절부터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 한 명씩 있었다. 김정일 때도 있었고, 김정은을 보좌할 2인자는 최룡해다.”
북한은 김일성을 시작으로 2인자 역할을 했던 사람이 한 명씩 있다. 김일성 옆에는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이 있었다. 오 부장은 1917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일찍이 중국에서 김일성과 함께 항일혁명투쟁을 했다. 이후 김일성의 경호대장을 시작으로 북한 군 주요 요직들을 거치며 김일성의 오른팔로 성장했다. 일각에선 오 부장에 대해 능력은 부족하나 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승승장구한 인물로 분석한다.
김정일 옆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있었다. 조 부위원장은 1928년 함경북도 출생으로 열 살 때부터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빨치산 활동을 한 인물이다. 해방 이후 김일성을 보좌하며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0년 조명록 사망 당시 김정일이 직접 장의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시대 들어 이 역할을 최룡해가 하는 것이다. 오진우와 조명록은 빨치산이라는 배경을 가졌지만, 실무 능력은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최룡해는 빨치산 출신인 부모에 더불어 실무 능력까지 모두 갖췄다는 평가다.
상임위원장 자리에 서둘러 간 이유… 건강 때문
최룡해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에 간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 때문으로 알려졌다. 최룡해는 고질적인 당뇨병을 앓고 있다. 이로 인해 한쪽 다리가 짧아 걸음걸이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에 비해 짧다는 것이다. 최룡해는 2014년부터 당뇨병과 척추질환으로 한쪽 다리를 절면서 김정은을 수행해왔다. 이는 북한이 공개한 여러 영상에서 포착됐다.
한 고위 탈북민은 “최룡해는 예전부터 당뇨병으로 고생했다. 다행히 봉화산 진료소에서 치료를 잘 받아오고 있어서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다. 당뇨병으로 인해 여러 차례 입원도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최룡해가 14기 2차 회의에서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갈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고 보고 있다.
김 책임연구원은 “3~4년 뒤에야 상임위원장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갔다. 최룡해는 예전부터 당뇨병으로 인해 고생했는데, 이것이 최근 당 조직지도부장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건강이 더 악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최룡해의 건강은 1997년 ‘청년동맹 황색사건’으로 인해 자강도 랑림군으로 혁명화하러 가면서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최룡해는 랑림군에 내려가 6년간 콩으로 된 음식을 먹고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병세가 조금 호전된 적이 있었지만, 다시 평양으로 복귀하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최고인민회의 기관 직원들은 최룡해를 반기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최룡해가 와병으로 인해 김영남 자리로 가긴 했지만, 내부 직원들은 김정은 이외 북한의 최고 실세가 온다고 다들 좋아하고 있다”고 전했다.
1997년 북한 청년조직에 불어닥친 칼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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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에 게재된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부고. 사진=《로동신문》 |
더 큰 문제는 쿠데타 모의에 최룡해 매형도 있었다. 당시 사건 처리 과정을 지켜본 한 고위 탈북민은 “당시 최룡해가 김정일에게 불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래서 매형은 물론 최룡해의 누나까지 숙청돼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에 최룡해가 이끌고 있던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서 발생한 어떤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중앙당 근로단체부의 검열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사노청 검열은 조직지도부와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안전보위성) 검열로 확대된다. 당시 최룡해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사건의 시작이다. 청년동맹의 부위원장급 이하 직원들은 최룡해의 권력을 믿고 보위부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정일이 대로하여 철저히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가 시작되자 최룡해는 2개월간 정직 상태에서 거의 집에 감금된 상태로 지냈다. 당시 김정일은 모든 권력을 동원해 자신의 체제 유지에 힘썼다. 반면 중앙당 간부들의 권력 다툼까지 벌어졌다. 그동안 최룡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간부들은 청년동맹에 대해 낱낱이 수사하게 된다. 당시 수사로 인해 최룡해의 실체가 드러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 있는 곳에는 추문이 따라다녔다. 최룡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룡해 뒤에는 성 관련 추문이 항상 따라다녔다. 먼저 최룡해는 자신이 1인자로 있는 청년동맹에 예술단을 만들어 향락을 즐겼다. 이에 대해 당시 평양에서는 김정일의 ‘기쁨조’를 따라 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또 최룡해는 김정일의 ‘기쁨조’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전국에서 미모의 여성들을 뽑아 별장과 청년동맹에서 관리하는 호텔 등에서 섹스 파티를 즐겼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변태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의 치아를 뽑게 했고, 한 대당 100달러에 값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룡해는 ‘5과’에 선발된 여성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5과는 조직지도부 소속으로 김씨 일가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여성과 남성들을 뽑는 업무를 담당한다. 여기서 여성들은 미모가 뛰어나고 출신 성분이 좋아야 한다. 5과에 뽑힌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당의 관리를 받게 되고, 학교 졸업과 동시에 평양으로 올라간다. 경쟁률이 치열하다. 평양에 올라간 여성들은 미모 순서대로 김정일의 기쁨조가 되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수발을 들게 된다. 최룡해는 5과에 뽑힌 여성들까지도 자신의 성 노리개로 삼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청년동맹 간부들이 남한의 당시 안기부와 내통했다는 죄까지 뒤집어씌워 반체제, 정치적 문제로 번졌다. 이로 인해 북한 전역의 청년동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진다. 당시 청년동맹에서 지도원으로 근무했던 한 탈북민은 “자고 일어나면 누가 잡혀갔고, 누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이 일명 ‘청년동맹 황색사건’이다. 최룡해는 이 사건의 ‘주모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친인 최현의 공로 덕분에 사형은 면했다. 최룡해는 이후 출당(黜黨)당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제됐다. 그리고 그동안 누려오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혁명화를 시작하게 된다.
1997년에 청년동맹 황색사건으로 자강도 랑림군으로 내려간 최룡해는 6년 만에 평양에 복귀했다. 최룡해 인생에 6년이라는 기간은 뼈에 사무치게 김씨 일가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한 시기일 것이다. 특히 북에선 김씨 혈육이 아닌 한 누구라도 철저히 몸을 낮춰야 산다는 교훈도 얻었을 것이다.
최룡해가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체험기다. 최룡해가 6년간 랑림군에 있으면서 쓴 〈혁명체험기〉가 김정일 손에 들어가게 된다. 김정일은 이를 보고 중앙당 과장 이상급 간부들에게 배포해 무조건 읽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후 김정일의 지시로 최룡해가 복귀하게 된다. 일각에선 최룡해 복귀에 항일 빨치산 1세들이 도움을 줬다는 말도 있다.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인 황순희와 당시 정무원 총리였던 연형묵, 김정일 동생 김경희가 그의 복귀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김정일이 북한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황순희는 항일 빨치산 1세로 김정일 모친인 김정숙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김정숙이 1949년 병환으로 죽으면서 황순희에게 김정일과 김경희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까지 남길 정도다. 연형묵은 당시 북한에서 일 잘하는 일꾼으로 김정일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김경희는 김정일의 분신 같은 존재다. 이들이 최룡해 사면을 김정일에게 여러 번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도움과 〈혁명체험기〉로 인해 최룡해는 2002년 다시 평양으로 복귀하게 된다. 최룡해가 평양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평양 상하수도사업소 당비서로, 말단직부터 시작한다. 이후 조선노동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승진한다.
한 고위 탈북민은 “최룡해가 처음에 상하수도사업소 당비서로 복귀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최룡해가 쫓겨갈 당시 상황이 심각했다. 먼저 중앙당 청년동맹 부위원장 9명 중 2명만 제외하고 모두 처형시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밑에 하급 기관 지도원급까지 관련자들을 모두 색출해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당시 최룡해는 빨치산 가문이기 때문에 혁명화로 끝났다. 하지만 최룡해를 추방하면서 출당은 물론 사진까지 모조리 수거해갔다. 북한에선 정치적인 범죄를 저지를 경우 당사자 추방은 물론 관련자 사진까지 태워 없애거나 사진에서 얼굴을 도려낸다.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북한에서 사진을 없애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정치적 범죄를 저질러서 조용히 어디론가 데려가 처형시킬 사람과 대남 공작원으로 파견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없앤다. 대부분 정치범일 경우 수용소로 끌려가지만 심할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 북한은 어릴 때부터 공작원을 선발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당에선 그 부모들에게 ‘아들을 나라에 바쳤다고 생각하라’는 말과 함께 아이가 나온 사진을 모조리 수거해 소각한다.
최연소 황해북도 책임비서… 다시 출세 가도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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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5일 김일성 생일을 맞아 열린 군사학교 간 교직원 체육경기가 열린 가운데,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왼쪽)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함께 관람하고 있다. 사진=조선중앙TV |
한 고위 탈북민은 “한번은 김정일이 참석하는 행사가 있었다. 책임비서들이 기다리고 있고, 저 멀리서 신형 벤츠 한 대가 와서 멈춰 섰다.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은 최룡해였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고 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책임비서들은 김정일이 선물한 ‘216’ 구형 벤츠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최룡해는 김정일에게서 직접 선물받은 신형 벤츠에 군 번호가 찍힌 차를 타고 다녔다. 이 사건은 최룡해가 다시 부활했고, 김정일에게 신임받고 있다는 증거가 됐다.”
북한의 216 선물 차량은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을 의미하는 번호판을 달고 다닌다. 이 차량에 대해선 누구도 함부로 세울 수 없다. 과거 김정일의 차량도 216 번호판을 달고 다녔다.
최룡해는 황해북도 책임비서를 하면서 여러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황해북도는 북한에서도 가장 가난하기로 소문난 지역이다. 최룡해 부임 이후 황해북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로 인해 김정일도 여러 차례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정일은 평안도, 함경도, 자강도 등 다른 지역은 방문이 잦았지만, 황해북도는 좀처럼 방문하지 않았다.
그가 황해북도를 선택한 이유도 따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최룡해의 아버지인 최현은 생전에 항상 김일성과 김정일을 받드는 길에서 제1선에서 보위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최룡해가 북한의 첫 관문인 황해북도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한 고위 탈북민은 “당시 당 총무부 부부장을 하면서 김정일이 여러 번 불러 의견을 물어봤는데, 최룡해가 이때 자신이 남한으로부터 첫 관문인 황해도로 내려가 충성을 다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충성맹세를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룡해의 황해북도 생활은 4년 만에 끝이 난다. 후계구도가 김정은으로 짜이자 김정일은 곧바로 최룡해를 불러들여 인민군 대장 칭호를 준다. 파격적이다. 북한에서 민간인이 대장 칭호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최룡해는 김정은 정권에서 요직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했다. 이는 최룡해가 김정은 체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얘기다. 최룡해는 황해북도 책임비서에서 평양으로 복귀하고, 북한군 총정치국장과 조직지도부장 등 주요 요직에서 활동했다. 단 2년 정도의 짧은 시간이다. 특히 민간인 신분에서 군 총정치국장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다. 최룡해는 총정치국장과 조직지도부장으로 일하면서 내부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먼저 파격 인사를 단행해 물갈이를 했다. 이는 김정은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김정은은 최룡해를 믿는다는 단편적인 예다.
최룡해는 김정은 정권의 일등 공신이다. 앞서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정권이양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장성택과 이영호 등 공신들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인물은 최룡해뿐이다. 최룡해는 김정은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시기에 민간인으로 군을 장악하기 위해 대장 칭호와 함께 총정치국장으로 활동했다. 이는 군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잠재우며 안전한 권력 이양을 도왔다.
그의 아버지 최현도 김정일의 숨은 킹메이커였다. 최현은 1960년 후반 김일성 후계자 문제를 놓고 치열한 권력싸움을 벌일 때 김정일 옹립에 앞장섰다. 당시 분위기는 김일성과 둘째 부인 김성애 사이에 태어난 김평일에게 유리했다. 김일성도 김성애의 입김 탓에 누구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최현은 권총을 들고 다니면서 김평일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협박했다. 하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김일성의 귀에 얘기하는 것이었다. 당시 절대권력을 쥔 김일성의 마음을 돌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다들 김일성의 눈치를 보던 시절에 최현이 나선 것이다. 최현은 김일성과 사적으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현의 말은 귀담아듣는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첫 장에 최현과 찍은 사진을 게재했고, 4권에는 ‘백전노장 최현’이라는 제목으로 35페이지를 할애해 그를 추억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1933년 9월 중국 왕청현 소왕청 마촌에서 처음 만났다. 둘 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장 왕더타이(王德泰) 밑에 있을 때였다. 《세기와 더불어》 4권에는 최현이 비록 다섯 살 위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 ‘김일성 대장님’이라고 불렀다고 써 있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전우애를 나누었고, 최현은 ‘김일성의 남자’가 됐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최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최현은 매우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보는 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는 사나이다. 최현은 일평생 비관을 모르고 살아온 낙천가였으며, 어떤 폭풍 속에서도 앞으로만 돌진해온 탱크 같은 사나이였다.”
최현은 김일성의 최대 위기였던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김일성을 결사 옹위했다. 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최현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그를 ‘충신’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최현 집안을 ‘충신 집안’으로 부르는 이유다. 이런 깊은 관계로 최현은 1972년 김일성에게 독대를 신청해 김정일의 실력을 하나둘씩 열거했다.
김정일은 1967년 노동당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를 숙청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 회의를 계기로 조선노동당 내에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유일사상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심이 됐다고 그를 띄웠다.
그 외에도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문화예술 부문을 지도해 ‘백두산 창작단’ ‘피바다 가극단’ ‘만수대 창작사’ 등을 창설해 북한 문화예술계의 돌풍을 일으켜 1970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한 점도 내세웠다. 김일성 역시 이런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70년 11월에 열린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세워야 한다는 원로들의 주장을 일단 보류시켰다. 김일성은 둘째 부인 김성애를 삐딱하게 대하는 김정일이 거슬렸다.
하지만 최현의 완강한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후계자로 김정일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정일의 최현에 대한 마음은 어땠을까? 은인이자 평생 보답해야 할 고마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혁명가〉라는 영화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다. 그의 감사하는 마음은 최현의 아들 최룡해로 이어졌고, 김정일 사망 이후는 김정은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아 최룡해를 곁에 두고 있다.
김정일 동생 ‘슈라’ 죽음에 연루된 최룡택
최룡해는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바로 위의 누나는 프룬제 아카데미 사건에 개입한 매형의 잘못으로 죽었다. 큰형인 최룡택도 중앙당 간부과 과장으로 일하다 일찍 사망(1940년)했다. 최룡택은 동생 최룡해와 달리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여러 얘기가 있지만 다수의 고위 탈북민은 “최룡택이 김일성의 눈 밖에 나면서 출세 길이 막혔다”고 증언했다.
최룡택이 김일성의 미움을 사게 된 사건이 있었다. 김정일에겐 쌍둥이 ‘슈라(소련 이름)’라는 동생이 있었다. 슈라의 한국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슈라는 해방 이후 자신의 집 연못에 빠져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김일성은 해방 이후 소련의 도움으로 북한 정권을 잡으면서 1인자가 됐다. 당시 김일성은 집 앞에 연못이 있는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김정일과 최룡택, 그리고 슈라가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슈라가 연못에 빠지게 됐다.
연못에 빠진 슈라가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김정일과 최룡택은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집 뒤뜰에 숨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정원을 관리하던 사람이 그 상황을 목격하고 슈라를 건졌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이 상황을 들은 김일성은 대로하여 김정일과 최룡택을 불러 따졌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빨치산 동지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는 시기였다. 여기서 최현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한 이유로 최룡택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도 아버지 김일성의 미움을 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라고 한다.
한 고위 탈북민은 이 사건에 대해 “김일성이 이 사건으로 인해 김정일과 최룡택을 끝까지 미워했다. 당시 최현이라는 혁명동지의 자식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후 최룡택은 동생인 최룡해가 승승장구할 때도 앞에 나서지 못하고 낮은 직책에서 조용히 살아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