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권의 책

러시아 내전-혁명 그 이후 1917-1921 (앤터니 비버 지음 | 눌와 펴냄)

러시아 혁명과 내전, 그 야만의 기록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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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계급은 현실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굶주리고, 산업이 완전히 무너지고, 수송에 차질이 생길 것이며, 계속되는 피투성이 무정부 상태에 이에 못지않게 피투성이인 끔찍한 반동이 뒤따를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의 지도자가 프롤레타리아를 끌고 가는 곳은 바로 이런 미래다. 레닌은 전능한 마법사가 아니라 명예도 프롤레타리아의 삶도 안중에 없는 냉혈한 사기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고리키의 예언
 
  볼셰비키혁명 직후인 1917년 11월 7일,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가 일간지 《노바야 지즌》에 쓴 글이다. 아마 이런 글을 쓰고서도 고리키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레닌과 무척 친한 사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리키는 같은 해 초 2월 혁명 직후에는 불타는 오흐라나(제정 러시아의 비밀경찰) 본부를 둘러보면서 “혁명이 아시아의 야만성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고리키의 말들은 이내 현실이 됐다. 이 책은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에서 1921년 내전 종식에 이르는 시기에 대한 ‘야만의 기록’이다.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내전은 레드아미 코러스가 부르는 볼셰비키 혁명가요나 돈 코자크 합창단이 부르는 백군(白軍·제정 지지 군대) 군가처럼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병도로 난도질하고, 칼로 베고, 산 채로 끓이고 태우고, 머리 가죽을 벗겨내고, 견장을 못으로 어깨에 박고, 눈을 파내고, 겨울에 피해자들을 흠뻑 얼려 죽이고, 거세하고, 장기를 적출하고, 신체를 훼손하는’ 야만의 향연(饗宴)이었다. 적군(赤軍·공산혁명군)이고 백군이고 할 것 없이 누더기 한 장 달랑 걸친 채로 추위와 굶주림에 떨었고, 그들 사이에 낀 민중들의 삶은 더 비참했다.
 
 
  백군, 경직성과 분열 때문에 패배
 
  결국 4년간의 내전에서 승자가 된 것은 레닌과 공산주의였다.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백군이 내전에서 진 가장 큰 이유는 토지개혁을 거부하다 때늦게 고려하거나, 러시아제국 내 민족들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 것을 포함한 그들의 경직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역설적으로 20년이 채 지나기 전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좌파와 매우 비슷한 이유로 패배했다. 스페인에서 공화국의 분열된 반파시스트 연합은 프랑코의 규율 잡히고 군사화된 정권에 맞서 도저히 승리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사회혁명당과 보수적인 제정복고파의 동맹은 한 가지 목표에 전념하는 공산당의 독재에 맞서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베를린함락》 《스페인내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등 묵직한 역사서들을 써낸 저자는 이 책에서도 국가와 군의 최고 지도부에서부터 말단 병사, 민중들에 이르는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서 장대한 서사(敍事)를 완성한다. 무능한 차르, 나르시시즘에 빠진 케렌스키, 잔인하고 단호한 레닌, 산적과 다를 바 없는 부패한 백군 군벌들, 자포자기한 러시아 장교들, 카오스의 와중에 피맛을 보려는 광인들, 그 와중에도 명예를 지키거나 자신을 희생하는 소수의 영웅 등 수많은 사람이 출연하는, 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에서 노동자·병사로 일하던 중국인 중 수십만 명이 적군이나 체카의 병사로 활동한 사실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도 많이 소개하고 있다. 또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 폴란드 등의 독립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러시아인들의 집착을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의 뿌리가 어디 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념적 내전’을 넘어 ‘물리적 내전’의 문턱에 이른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내전’이니 ‘내란’이니 하는 말들은, 책임 있는 정치인이나 지식인이라면,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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