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문산 언덕에서 처음 만난 2학년 위인 손중근 선배… ‘4월의 노래’를 부르던
⊙ 500환을 빌리며 머리 긁던 손 선배… 4·19 당시 사망
⊙ 성금 걷어 서울대 사범대학 캠퍼스 머리에 동상 세워
⊙ 500환을 빌리며 머리 긁던 손 선배… 4·19 당시 사망
⊙ 성금 걷어 서울대 사범대학 캠퍼스 머리에 동상 세워

- 4·19혁명 당시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4학년이었던 손중근이 서울대생 첫 희생자가 되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4·19 공원에 있는 손중근 동상 앞에 선 김광휘. 사진=김광휘
그때 국어선생님은 읽기를 할 때, 책을 반듯이 들고 제대로 읽지 못하면 곧바로 끌고 나가 당시 선생님들이 신고 다니던 타이어샌들(자동차 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로 사정없이 볼을 후려갈겼다.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 아주 정신없이 맞았다. 칠판에 맞춤법 쓰기를 하다가 틀리면 뒤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선생님의 슬리퍼가 그대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학생들을 때리기 전에 반드시 묻는 것이 있었다.
“너희 아버지 뭐 하는 분이고?”
그 대답이 어찌 됐든 얻어맞는다는 것을 지금 독자들은 다 알고 계실 것이다. 돈 잘 버는 아버지라고 하면 ‘이 새끼, 아버지 돈 믿고 이렇게 공부를 잘 못하냐?’, 아버지 직업이 시원찮으면 ‘야 이놈아, 너희 아버지는 그렇게 고생을 하시는데 네가 이렇게 농땡이를 치면 어찌 되겠냐?’ 이러면서 매타작을 놓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의 별명은 ‘말대가리’였다. 영어선생님도 특이했다. 툭하면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영자지를 꺼내 들고 과시했다. 그리고 수업은 제쳐두고 우리를 끌고 《타임》지 안에 있는 베트남이라는 나라로 끌고 갔다.
그 시절에는 월남(越南)이라는 국호를 썼다. 그 월남이라는 남방 나라의 북쪽 고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프랑스 최정예 공수단원들이 3개의 고지에서 사투를 벌이다 고지를 잃고 결국 사령관은 손을 들고 떠나게 됐다. “조국 프랑스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 프랑스 사령관이 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스릴 있게 들려주시니 수업이 될 턱이 없었다.
이종학 선생님 그리고 손 선배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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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학 화백의 그림. 지금 시각으로 봐도 전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진=김광휘 |
당시 대전중학교에는 서울에서 피란을 오신 미술선생님이 계셨다. 이종학 선생님. 그분은 아주 쉽게 미술을 가르쳐주셨다. 늘 창밖의 보문산을 바라보며 풍경화를 그리게 했다. 그러고 그날 그린 그림을 칠판에 쭉 세워놓고 그림 평을 해주셨다.
“봐라, 이런 것을 제대로 된 색상이라고 하는 거야. 색에서 색상이 되려면 이 정도의 색감은 나와야 되는 거야. 봐라. 이 파란 초록색깔은 노란 배경 색깔과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거냐. 이런 선명한 대조와 확실한 자기주장에서 자기 그림이라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건 김광휘의 그림이야.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김광휘의 것이야. 미술에는 잘나고 못난 그림은 없어.”
지금 생각해봐도 명강의셨다. 이런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학교에서 가까운 보문산에 스케치를 나갔다. 그 스케치 나들이를 위해 오른 보문산 언덕에서 선배를 처음 만났다. 나보다 2학년 위인 손중근(孫重瑾) 선배였다. 키가 크지 않고 몸도 호리호리했다. 말도 잘 하지 않았다. 지금 내 기억으로 손중근 선배는 늘 전교 30등 내외를 지켰다. 그래서 우리는 손중근 선배를 어려워했다. 그리고 그 선배가 어느 대학으로 진학하느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충남 대덕군 유천면 내동리라는 대전 외곽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탄천을 지나 유성 가는 쪽에 있는 비행장 근처였다. 학교까지 거리가 족히 12km는 되었다. 아침저녁 30리씩을 걸어 다녔으니 다리운동은 잘 됐을 것이다. 그 무렵에 나는 해군사관학교로 진학한 박용식이라는 선배와 단짝이 되어 등교를 하였다. 가끔 서대전 근처 용두동에 살던 손중근 선배를 찾아갔다. 언제나 살갑게 맞아주던 선배는 비행장 부근부터 땀 흘려 오는 우리를 생각해서 뜨끈뜨끈한 누룽지를 나눠준다든지, 봄철에는 형수님들이 만드셨다는 쑥떡이나 절편 같은 것을 신문지에 싸뒀다가 주었다. 용식이 형과 나는 그것을 간직해두었다가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나눠먹었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용식이 형은 당당히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하였다. 그해 겨울, 그는 멋진 해군사관학교 제복을 입고 내가 다니는 대전 변두리에 있는 인동장로교회로 찾아왔다. 손중근 선배도 함께 왔다. 까만 해군 정복에 까만 코트까지 갖춰 입은 용식이 형의 모습은 정말 같은 남자가 봐도 어깨가 으쓱해질 만큼 멋진 모습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손중근 선배의 모습은 다소 왜소하였다. 키도 작지만 몸 자체가 작아서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걸치고 있는 열쇠 달린 파란 교복, 서울대학교 교복은 알 수 없는 아우라를 우리에게 뿌리고 있었다. 그때가 마침 크리스마스 때였다. 내가 학생회장으로 있는 그 변두리 교회에서도 한창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난롯가에서 밤새워 십대 소녀들이 크리스마스 행사를 진행하는 중 나는 즉석에서 용식이 형에게 노래를 청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 박용식 형에게 노래를 청합니다!”
그는 절도 있게 일어나 좌중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말했다.
“제가 최근에 배운 노래입니다. 빙 크로스비라는 가수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노래입니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Just like the ones I used to know…’”
이어서 손 선배도 노래를 했다. 내가 그때까지 배우지 못한 노래였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
그때 우리 교회 학생회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으니까, 1957년 겨울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그때 들었던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박목월 작시의 ‘4월의 노래’는 커다란 문화 충격이자 우리 소년·소녀들의 가슴을 치는 복음성가와도 같았다. 손 선배가 부른 그 ‘4월의 노래’는 또 다른 함의가 있었다. 4월이 생명의 등불을 밝혀주는 계절이라고 노래했고, 빛나는 꿈의 계절이라고 외쳤다. 그런데 끝에 가서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이라는 알 듯 말 듯한 가사를 전했다.
우리 교회의 학생회에는 대전여고 학생들도 있었고, 미션계인 호스톤여고 학생, 그리고 간호여고 학생들도 있었는데, 모두들 두 노래를 듣고 감동해서 두 선배에게 가사를 받아 적었다.
또 4월의 노래를…
나는 한 해 재수를 하여 1960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합격하였다. 나를 제일 반겨준 선배가 우리 과에 2년 먼저 들어온 손 선배였는데 그 선배는 내가 1년을 재수했기 때문에 그해에 4학년이 되어 있었다. 제일 고참 선배가 되어 새로 들어간 우리 새내기들을 위해 막걸리 파티를 열어주었다.
“잘 왔어. 광휘야, 잘 왔다. 좋은 선생님도 되고, 좋은 작가도 되거라. 우리 함께 노력하자. 우선 오늘 저녁에는 막걸리 좀 마시고!”
우리 사범대학 가까이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개울이 나오고, 그 개울가에는 고만고만한 주점들이 있었다. 그중에 관록이 있어 보이는 노포가 있었는데 선배들은 그 집을 ‘곰보추탕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얼굴이 얽은 주인은 없었다. 생글거리는 아주머니가 나오고 질펀한 막걸리 자리가 마련되었다. 비교문학을 전공하여 근대문학계에 이름을 날리고 계시던 이하윤 교수님께서 환영사를 해주셨다.
“사실 나는 대전고등학교 졸업생도 아닌데 초청을 받았어. 원님 덕에 나팔을 분다고 나는 대전고등학교 신입생들 덕분에 막걸리 좀 마시겠어. 충청도 여러분, 입학을 축하합니다.”
환영사가 끝나자마자 살갑게 생긴 대전고등학교 신철수 선배가 우리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대학생들은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해. 선생 하려면 술 좀 마셔야 하는 거죠?”
이하윤 교수님이 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럼그럼, 광부들이 탄을 캐고 목에 탄이 걸리면 막걸리를 마시고 돼지비계를 먹어 목을 씻어내듯이, 평생을 분필가루 속에서 살아가는 교사들은 막걸리도 잘 마셔야 하고 흥도 있어야 점잖고 적막한 교직 세계를 이겨낼 수 있는 거야. 아, 자칭 국보라고 호령하며 명강의로 유명한 무애 양주동 교수는 9세 때부터 아버지 술심부름을 다니다가 술을 조금씩 훔쳐 마시고 결국 주당이 됐다는 거 아니야? 술 잘 마시는 교사나 교수가 훌륭한 선생이 되는 거지. 허허.”
그날 손중근 선배는 또 4월의 노래를 불렀다.
정말 4월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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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손중근이 직접 쓴 글씨와 그림. 손중근은 데모에 나서기 한 달 전에 새 시대를 예감하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을 썼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한 개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1941년생으로 만 19세였고, 손중근 선배는 만 21세가 되던 해였다. 전후의 배고픈 시절이었으며 당시 서울 사대에 다니던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당시의 아르바이트는 입주가정교사거나 시간제 가정교사였다. 그때, 서울시내 중산층의 형편이 요즘에 비하면 그렇게 윤택하지가 않아서 대개는 입주과외를 하거나 부자 동네에 가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생들은 잠이 부족했고, 큰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고시공부를 하는 법대생이나 상대 계통은 아르바이트를 삼가는 편이었고, 문리대나 사대생들이 주로 맹렬히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다.
4월 18일 오후였다. 화창한 초여름이라 사범대학 입구의 녹음이 싱그러웠고, 사범대학생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청량대, 사대생의 언덕이라고 부르던 그 언덕에도 분홍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곳 벤치에 신철수 선배와 손중근 선배가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두 선배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때 손중근 선배가 일어서며 신철수 선배에게 쭈뼛쭈뼛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 했다.
“… 내가 아직 아르바이트 자리를 못 구해서 그러는데, 철수야, 500환만 빌려줘.”
“어디다 쓰려고?”
“음… 머리 좀 깎고, 목욕 좀 하고 싶어.”
철수 선배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며 말했다.
“너도 참… 뭘 500환을 꾸면서 힘들게 말해. 너는 너무 깔끔해서 탈이야. 하기야 네가 구질구질하게 하고 다니면 안 되지. 이제 조금 있으면 교생실습도 하고 교사가 될 테니까. 무엇보다 마드모아젤 윤에게 잘 보여야 하잖아. 어서 가!”
손중근 선배는 머리를 긁적이며 청량대를 내려갔다. 한데 아래 운동장을 언뜻 보니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강의실에 대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모두 모여! 지금 공부할 때가 아니야!”
모두 공부를 끝내는 둥 마는 둥 하며 우물쭈물거리자 함성이 올라왔다.
“야 이 새끼들아,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빨리 내려와! 고대생들이 어제저녁 깡패들한테 얻어맞았대. 우리 나가서 그 새끼들을 박살 내자!”
누군가가 이미 깃발을 마련해왔고, 그 깃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자유당 정권을 끝내자!’ ‘이기붕 일가를 박살 내자!’
경찰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카빈총을 던지며
누가 말하지 않았지만 평소 운동 좀 했다는 친구들, 그리고 태권도나 유도를 해서 단증을 받은 친구들이 앞줄에 섰다. 나도 고등학교 때 틈틈이 태권도 2단을 따놓은 터라 앞줄에 섰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누가 선창을 하면 무조건 따라 부르고 밑천이 떨어지면 아무 노래라도 이어서 불렀다. ‘성불사 깊은 밤에 주승은 잠이 들고’ 선창이 잘못되자 발이 맞지 않았다. 군가나 동요가 아니면 발이 맞지 않았다. 암튼 우리는 이렇게 신나게 외쳐대며 동대문으로 해서 종로로 들어섰다. 종로3가쯤에서 방향을 틀어 을지로로 들어섰다. 그러고 내처 달리자 을지로 입구의 내무부가 나왔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이 갑자기 밀려드는 인파를 보고 어깨에 메고 있던 카빈총을 담 너머로 던지며 정신없이 도망갔다.
이미 시청 앞에는 청파동 쪽에서 숙대 학생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달려오는 동안 어느새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뒤에 고대생들이 몰려오고, 이내 서울 상대생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문리대생들은 이미 종로를 거쳐 종로 네거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신촌 쪽에서는 연대생들과 이대생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화끈한 이대생들이 연대생들의 목에 올라타 그 목 위에서 플래카드를 흔들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언제 이런 플래카드를 준비했을까? 연대생들과 이대생들은 호흡이 딱딱 잘 맞아 보였다. 그때 광화문 네거리에는 탱크부대가 들어와 있었다. 처음에는 그 탱크부대가 태산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 탱크부대도 밀려오는 학생들의 파도 속에서 고도처럼 고립되어갔다. 이런 중 탱크병들이 답답했던지 해치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학생들이 빵을 던지기 시작했다. 탱크병들은 처음에는 해치를 닫고 들어가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곤 빵을 받아 먹기 시작했다. 모두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탱크병은 탱크에서 내려 갑자기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이승만도 물러가라!”
총구의 불꽃과 함께 갈라진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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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경무대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 이들의 발포로 유혈 비극이 시작되었다. 사진=조선DB |
내 나이 지금 만 82세이다. 이런 세월을 사는 동안 나는 지금까지 그런 인간의 해일(海溢)을 구경한 일이 없다. 해방되던 날이 그랬을까? 그건 아니다. 문헌 자료를 보면 해방 당일에는 아무도 그날이 해방의 날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성능이 나빴던 그 시절의 라디오에, 지지직거리는 소음에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일왕이 중얼거리는 그 항복의 소리를 그때는 아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눈치 빠른 사람이 알아듣고 ‘이게 무슨 소리야?’ 일단 귀를 의심했고, 그다음에는 ‘이 말이 항복했다는 말이지?’ 거기까지 유식한 사람들이 알아들었고, 그다음 단계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해방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 당일에는 서울 거리가 죽은 듯이 조용했고, 수상한 정적만 가득하다가 소문이 퍼져 그다음 날 아침부터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태극기가 있을 턱이 없었다. 모두 집에 있던 일장기를 꺼내 거기에다가 먹물로 태극을 덧칠하고 곁에 있는 괘는 그릴 수가 없어서 대충대충 ☰ ☲ ☵ ☷로 맞춰 나갔다는 것이다. 8월 16일 낮 12시, 정오에 맞춰 서대문형무소의 문이 열리고, 애국지사들이 쏟아져 나오며 거기에 모든 감옥의 수감자들이 풀려나오면서 서울 거리는 감격의 거리로, 인간의 해일로 하나가 됐다고 한다.
1960년 4월 19일, 그날의 인간 해일은 학생들의 행렬로 서울 거리는 인간의 바다로 변했다. 그 시절 고등학생들도 모두 거리로 나왔다.
나는 선두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밀려 밀려 중앙청 쪽으로 가게 됐다. 그때 우리는 모두 여름 하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하얀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학생들의 행렬이 효자동으로 밀려들자 중앙청 안에 대기하고 있던 소방서의 고무호스가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 꿈틀거리며 올라온 호스들은 일제히 물을 내뿜었다. 그 물 속에는 붉은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여학생과 남학생들의 하얀 여름옷이 삽시간에 불그죽죽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외쳤다.
“상관하지 마! 이까짓 옷이 문제야? 그래, 빨갛게 뿌려라!”
모두 악에 받쳤다. 행렬은 효자동으로 들어섰다. 나도 밀려 밀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입구)가 보이는 지점까지 가게 됐다. 200m쯤…. 선두는 아마 문에 근접한 듯싶었다. 까만 동복을 입은 경찰들이 무릎 쏴 자세를 취했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우리 시선과 그들의 시선이 일직선이 되었을 때 타다다다!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화약 냄새가 훅 하고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학생들은 파도가 갈리듯 양쪽으로 퍼졌다. 그러나 오른쪽은 중앙청 담장으로 막혀 있었다. 왼쪽만이 트여 있었는데 그곳은 모두 민가였다. 어느새 뛰어들어 갔는지 내가 코를 박고 있었던 곳은 어느 집 아궁이였다. 효자동의 문화주택이었는데 시골집처럼 그을음이 있는 아궁이는 아니었다. 그 움푹 꺼진 부엌의 바닥과 아궁이가 마주한 자리에 학생들의 머리가 오글오글 모여 있었다.
“거기 누구 없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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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 시위를 벌이는 군중. 계엄군은 시민들의 편에 섰다. 사진=조선DB |
“학생들이 쓰러졌다! 빨리들 나와! 거기 누구 없어? 없어?”
나는 바로 뛰쳐나갔다. 경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경찰들은 한바탕 사격을 하고 나서 자신들도 망연자실한 듯 총을 거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젊고 어린 학생들이 질펀하게 널브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때 흰옷 입은 의대생들이 튀어나왔다.
흰 가운을 입은 그 의대생들과 간호학과인 듯한 학생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누가 준비해온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는데 분명 쓰러진 학생들을 옮길 수 있는 담가(들것)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달려갔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담가에 부상당한 학생들을 올리고 뛰었다. 앞에서는 흰옷 입은 의대생 두 명이 뛰고, 나는 친구와 함께 그 담가의 한쪽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의대생들은 부산하게 뒷수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담가는 오던 길을 뒤돌아 내무부 쪽으로 향하였다. 팔이 너무 아파 을지로 앞 명동 입구의 치안본부 앞에서 잠시 쉬었다.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숨을 헉헉거리며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바가지에 물을 담아 달려왔다. 앞에 있던 의대생들과 친구는 함께 물을 마셨다. 그때 담가 위에 있던 학생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화들짝 놀라 담가를 다시 들고 뛰기 시작했다. 앞의 의대생들이 소리쳤다.
“메디컬센터로! 메디컬센터 응급실로!”
우리는 돌진했다. 19세, 그리고 20세가 조금 넘은 학생들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막힘 없이 을지로6가의 메디컬센터까지 달릴 수 있었다. 우리는 부상당한 학생들을 들어 올렸고, 달렸고, 그리고 마침내 응급실의 입구에 다다랐다. 마치 철인3종 경기 선수처럼.
젊은 우리는 울지 않았다
부상당한 학생을 응급실로 옮기고 나와 친구는 터덜터덜 걸어 메디컬센터를 나왔다. 온몸이 땀 냄새와 피비린내로 범벅이 되었다. 지나가던 신사가 우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신사가 다가왔다.
“학생들인가?”
“그렇습니다.”
“나를 따라와.”
우리 둘은 멈칫했다. 그 신사는 다시 말했다.
“나 서울대학 교수야. 음대 교수야. 우리 대학이 바로 여기야. 어서 가자. 오늘부터 통금이 시작된다고 라디오에서 알려줬어. 어서 가자. 거리에서 헤매면 잡혀갈 거야.”
우리 두 명은 메디컬센터 뒤에 있는 서울 음대 숙직실로 갔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꼴들이 말이 아니군. 들어가 씻게.”
나와 친구는 숙직실 세면실에 들어가 대충 씻고 거울 앞에 섰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목 주변은 물론 몸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다. 우리는 숙직실에 들어와 앉아서야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어? 김광휘?” “어? 최준명?”
우리는 그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고등학교 동기이며 함께 서울 사대에 들어온 절친이었다. 나는 잘생긴 그 친구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는 영어과를 수석으로 들어간 수재였다. 고등학교 때에도 공부를 잘했던 모범 학생이었다.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손에 봉지를 들고 있었다.
“우선 이것부터 먹게. 자네들, 이 시각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지. 나 음대 성악과 김학상 교수야. 자네들 입학 때 교가 가르쳐준 교수 생각나나?”
내가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멀리 계셔서 잘 기억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은 웃으시며 말했다.
“자네, 교가는 알고 있나. 내가 테스트를 하겠네. 교가 부를 수 있나?”
친구 최준명이 수줍게 말했다.
“전 아직 다 못 외웠습니다.”
그때 내가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슴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 이 세상의 사는 진리 찾는 이 길을….”
교가의 끝 부분에서 김학상 교수님은 울컥하셨다. 젊은 우리는 울지 않았다. 아무튼 그날 교수님 두 분과 우리는 교가 2절을 교수님의 선창으로 마저 부르고 그날 밤은 음대 숙직실에서 눈을 붙였다.
시도 있고, 수필도 있고, 일기문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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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손중근 추모식 모습이다. 사범대학 학장과 국어교육과 이하윤 교수, 고인의 유족들 앞에서 신입생 김광휘가 조시(弔詩)를 읊었다. 사진=김광휘 |
“손중근 학형이 돌아가셨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메디컬센터에?”
내가 물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안암동에 있는 혜화병원이에요.”
지금은 고대부속 안암병원이 됐지만 그 시절에는 혜화병원이었다. 아무튼 신철수 선배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강의실에 들어와 통곡했다.
“중근아, 중근아. 네가 왜 그렇게 갔니…. 새파란 스물두 살에…. 인마, 그렇게 가려면 돈 더 빌려달라고 하지! 겨우 500환이 뭐야? 벌어서 갚으면 되잖아, 이 병신아. 빨리 돌아와서 내 돈 갚아. 아르바이트하는 집 식모 아가씨 힘들다고 도시락 싸지 말라고 한 병신아!”
우리 국어교육과는 일주일 내내 초상집이었다. 교수님들도 모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우셨다. 이하윤 교수님께서 제일 많이 우셨다. 신철수 선배가 울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시도 있고, 수필도 있고, 일기문도 있고, 단편도 있습니다.”
교수님이 말했다.
“대학신문 기자로 있는 권오만 군과 상의해서 유고집을 내보도록 해. 속히! 우리 교정에서 추모식을 열 수 있을 거야. 체육과에서도 희생자가 나와서 서울대학교에서는 우리 사범대학이 두 명의 열사를 낳은 유일한 단과대학이 되었어. 내가 서두르겠어.”
그때 누가 서둘렀는지 성금이 걷히고 사범대학 캠퍼스 머리에 동상이 우뚝 섰다. 그해 10월, 용두동 캠퍼스에 서 있던 단풍나무에 붉은 잎이 들기 시작할 무렵, 우리 사범대학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모두 모여 호곡하며 추모식을 올렸다. 지금도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우뚝 서 있는 그 동상 밑에는 이런 글이 남아 있다.
〈젊은 학도 봉화를 들었으니
사랑하는 겨레여 4·19의 외침을 길이 새기라
희생자 손중근 유재식
1960년 10월〉
너의 눈엔 이제 내가 비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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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작가 김광휘 |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해마다 4월은 오고 있다. 유난히 정이 많았던 손중근 선배의 단짝 친구 신철수 선배는 성실하게 교직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그 젊은 날의 상처를 잊지 못하여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 일전에 부인께 전화를 올렸더니 요양원에 가셨다고 한다. 대전에 남은 형님들은 가장 총명했고 효심이 깊었던 그 막내 아우 손중근이 교단에 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리운 그 아우를 서울 끝에 있는 수유리까지 와서 보기가 너무 멀었던지 지난 1997년에 그 아우를 기리는 추념비를 선산 묘소 입구에 세웠다. 오 형제 막내였던 귀염둥이 중근, 서대전국민학교에서 최우등상을 받고 대전중·고등학교에서도 우등상을 받았던 그 아우를 네 형님은 끝내 못 잊고 계신 듯하다.
살아 있는 우리도 이제는 모두 팔순을 넘겨 인생의 숙연한 경지를 맞고 있다. 손중근 선배는 그의 일기장에 자신이 사모하던 동급생 베아트리체에게 이런 시를 남겼다.
〈너의 눈을
너의 눈만을 크게 그려
冊床 머리벽에 붙여 놓았다.
마주 자릴 잡고 앉으면
네 눈이 얼마든지 화안히
타오르는 것을 본다.
문득 부끄럽다.
너보다 먼저 내가 少女처럼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 으례
너의 눈도 화안히 타오르는 채
긴 속눈섭에 은빛 가루가 내돋힌다.
그때야 나는
눈물을 닦고 조그만 영웅이 되어
너의 눈속으로 들어가 거기 굳게 닫힌 문을 연다. (하략)
57. 11. 10〉
나는 교직 생활을 할 때, 손중근 선배의 그 베아트리체 여선생과 한 학교에서 근무한 일이 있었다. 참으로 조신하고 음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다가 문득 그분에게 물은 일이 있었다.
“지금 어떤 분하고 사십니까?”
선배는 내 물음 속에 감추고 있는 함의를 아셨던지 차분히 대답하셨다.
“평범하고 성실한 은행원이에요.”
그 베아트리체도 풍편에 들으니 요즘에는 비만증이 심해 약을 드시고 계신다고 했다. 우리 인생은 모두 그렇게 늙어가는 모양이다. 손중근 선배는 세상 뜨기 딱 한 달 전에 이런 글을 일기에 남겼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한 개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선배는 정말 아프락사스가 되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