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시민강좌 개최

“현재 대한민국은 박정희 세력 vs. 민주주의로 가장한 세력과 체제 대결 중”

  • 글 : 이상흔 월간조선 기자  hana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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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체제는 1948년(이승만)과 1961년(박정희) 체제의 계승 결과”(김광동)
⊙ “박근혜 탄핵은 이승만-박정희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을 탄핵하는 것”(조갑제)
⊙ “한반도 전체에 자유민주 체제가 작동할 때 자유민주 혁명이 완수”(황성준)
지난 3월 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5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박정희시민강좌’가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3월 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간조선》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연중기획으로 진행 중인 제5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박정희 시민강좌’가 열렸다. 제5회 강연은 ‘박정희, 민주주의 파괴자인가 건설자인가’라는 주제로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이 주제발표를 했고, 이어서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황성준 《문화일보》 논설위원이 토론을 이어갔다.
 
  본 행사에 앞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좌승희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세상에는 다양한 민주주의 정치 행태가 있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은 정치 제도도 많은데 이런 것을 모두 묶어서 ‘독재’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편협한 생각”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을 북한, 중국, 소련의 지도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지구상에 독재했다는 사람치고 국민생활 걱정하고, 경제 발전 걱정하고, 국민교육 걱정한 독재자가 존재한 사례가 없다”며 “박정희는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그 방향으로 국가를 이끈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이어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이 ‘한국 민주주의와 박정희 시대 평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김 원장은 “대한민국 70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정치 발전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본적인 질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며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과연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아주 본질적인 의문이자 질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었다면 이 세상에 민주주의를 하지 못할 국가가 없을 것”이라며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로 강연을 이어갔다.
 
  토론자로 나선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1961년 군사혁명 때부터 박정희는 한국 사회의 당면과제를 ‘봉건 대 근대화’의 시각으로 보았다”며 “봉건적 잔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 전략을 밀고 나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박정희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황성준 《문화일보》 논설위원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절적 혹은 분절적으로 보는 시각은 극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제5회 강연의 요약 내용이다. 본 행사의 전체 동영상은 월간조선 홈페이지(monthly.chosun.com)를 통해 볼 수 있다.
 
  제6회 강연은 오는 4월 4일(화) 같은 장소에서 예정돼 있다.
 
 

  근대체제를 시작한 1876년 이후 140년에 걸친 한국의 정치 발전 과정에는 세 가지 과제가 수행되어야 했다. 그것이 곧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기도 했다. 첫째는 전근대적 왕조질서인 봉건체제를 극복해야 했다. 둘째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식민체제를 탈피해야 했다. 셋째는 전체주의체제인 공산제국주의를 막아내는 일이었다. 오늘 대한민국이 만들어 세우고, 지켜내며 발전시켜 가는 자유민주질서는 바로 ‘봉건주의’ ‘식민주의’ ‘공산주의’를 극복하고 넘어선 결과이자, 그런 지속적 성숙 과정에 있는 것이다.
 
  140년의 근대화 과정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 민주주의를 진단·평가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은 ‘늦어진 근대체제’를 물려받고 넘어서야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늦어진 근대를 바탕으로 근대문명화와 산업화를 만들어 내야 했던 것이고, 그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산업적으로 네덜란드(1581), 영국(1688), 미국(1774) 등과 비교할 때 몇백 년이 뒤늦게 시작된 근대체제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건국체제 역시도 스탈린 공산소비에트에 맞선 대한민국과 미국 등 자유민주국가들과 함께 이뤄낸 공산전체주의의 확산 저지전쟁(6·25)의 결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적 자유민주체제’의 건설이었다는 사실이 공유되어야 한다. 1948년 건국의 ‘혁명적 민주체제’는 민주 투쟁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가장 먼저 평가되어야 한다. 1948년 이미 한국은 봉건왕조제 및 신분제의 철폐, 국민의회 구성 투쟁, 참정권 확대 투쟁은 물론이고, 저소득층과 문맹자 및 여성의 참정권, 법에 의거한 재산권 보장제와 종교, 거주 이전, 결사, 표현의 자유 등 전 영역에 있어서 ‘혁명적 민주체제의 결과’ 소위 ‘민주 투쟁’이 필요 없는 수준의 나라를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 투쟁 과정에서 가장 희생을 요구받고 어려웠던 민주 투쟁이란 바로 ‘공산주의에 대항한 반공(反共)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늦어진 근대와 식민 → 혁명적 민주주의 확립 → 공산주의와의 대결의 본질과 구체성이 확립될 때 1960년 4·19와 1980년 5·18 및 1987년의 소위 ‘민주화 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주 vs 반민주(獨裁)’ 구도의 이분법적이고도 잘못된 민주주의 이해도 해결된다.
 
 
  선거 중심적 민주주의에서 ‘경제 번영’ 요구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민주당). 1960년 일어난 4·19의 시작과 근본 동력은 이미 1956년 선거에서 집약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것이다. 4·19는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성장과 생활 수준의 향상에 대한 열망에서 진행된 것이다.
  한국은 선거 중심적 민주주의가 강조되던 나라였다. 사회경제적 발전보다는 자유민주적 발전이 먼저 도입된 나라다. 그러나 1948년 건국과 6·25전쟁은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의 자유민주제도의 도입과 정착 과정이었다면, 1950년대 중반부터는 민주제도가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했던 ‘경제사회발전’, 즉 삶의 질 향상이 요구받고 열망되던 시대로 전화되었다. 즉 잦은 선거가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가 산업경제와 삶을 발전시키며 가난을 극복·개선시킬 것이라는 ‘선거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 중심 시대로부터 ‘가난 극복’ ‘재건’ ‘번영’ ‘국가’와 ‘민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일본체제와 미국체제를 경험한 이후 상대적 열등을 넘어서고자 하는 민족 번영 및 근대 산업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민족적 열망이 분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4·19 이전의 12년에 걸친 정치 중심, 혹은 선거민주체제를 겪으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근대적 번영체제를 지향하게 되었고, 자유민주체제가 먼저 발전한 결과로 나타나는 당연한 후속적 요구이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못 살겠다, 갈아보자’ ‘빈곤 타파’ ‘기아 극복’ ‘국민재건’ ‘경제계획’ 등이 그것이다.
 
  선거 중심 민주체제로는 극복될 수 없는 무능과 부패, 그리고 가난 극복과 민족주의적 번영체제로의 전환의 물꼬를 튼 것이 ‘선거부정’이 계기가 된 4·19였다. 4·19의 시작과 근본 동력은 이미 1956년 선거에서 집약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것이었다. 그 시작은 1960년 3·15선거와 이승만 정부의 계속이라는 ‘무기력’이 계기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근대화에 대한 요구, 특히 경제적 성장과 생활 수준의 질 향상에 대한 열망에서 진행된 것이다. 나아가 민족적 의거가 질서와 안정, 그리고 상대적 전문성에 기반한 산업화체제로 이전하게 되는 계기가 5·16으로 나타난 것이다.
 
  4·19가 실현하지 못하는 민족주의와 질서 부재 및 주체 부재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5·16이다. 박정희 정부가 간 길은 민족적 선택과 열망의 결과이자 그 실천이었다. 4·19와 5·16체제 및 10·26(1972년 유신)체제는 민주적 제도나 선거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가 만들어야 할 사회경제적 발전이라는 민주주의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실천이었다. 실제 ‘반공 국시’ ‘경제 부흥’을 과제로 한 5·16혁명은 1950년대의 사회경제적 정체 상태와 부정부패에 대한 극복을 의미하는 ‘가난 극복’이라는 민족적 과제이자 시대정신을 기반으로 반공주의에 기반한 사회체제의 안정과 질서를 확립하고 4·19의거로 표출된 국민적 근대체제의 열망을 조직화하고 실천화한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싸우면서 건설’한 결과
 
  특정 시대의 민주주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맞이해야 했던 늦어진 근대체제는 물론이고, 동북아시아에 위치했던 대한민국과 주변국에 대한 민주주의 수준과 연계된 비교 민주주의적 평가가 필요하다. 근대의 길을 일찍 갔던 일본을 제외한다면, 신생독립국, 개발도상국, 사회주의의 길을 갔던 세계의 모든 나라 중에 단 그 어떤 나라도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공산전체주의 및 폐쇄주의가 만든 반민주 독재질서 혹은 전체주의 질서는 소련, 중국, 북한,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봉건질서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사회 불안정과 무질서가 만든 민주주의의 불안정과 실패도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경제적 자유와 개방되고 재산권 보장체제가 만들어진 나라들조차도 제한적 민주주의에 머물고 있고, 그런 형태는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반 공산, 반 전체주의의 확립과 체제안정과 질서의 확립, 그리고 경제적 자유와 개방 및 재산권 보장을 토대로 한 민주제도와 법치주의를 발전시킨 성공 모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민주주의를 못할 나라가 없고, 전 세계가 다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이 오히려 뒤늦게, 악조건에서 주변국과 차원이 다른 민주체제와 번영체제를 만든 것은 평가되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객관적, 균형적 평가이기도 하다. 더구나 민주주의는 자유와 개방에 기반한 ‘도시형성’ ‘산업과 경제기반’ 및 ‘자유선택’ 질서의 연장에 있는 것이다. 개방적 자유시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된 예는 없다.
 
  한국과 박정희 정부가 만든 개방적 시장경제가 곧 민주질서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근원이고, 경제적 자유 없이 정치적 자유가 무의미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1987년 체제의 ‘민주주의 공고화’란 박정희 시대가 만든 업적의 산물이자 그 토대 위에 조성된 것이다. 1987년 전후의 민주주의 성숙은 지속적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 전반의 성숙과 정치적 성숙의 필요의 반영이자, 연속적 계승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지 1987년 이전 체제의 실패에 대한 부정(否定)과 청산(淸算)일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는 ‘싸우면서 건설’한 결과이다. 싸웠다는 것은 봉건, 식민, 공산체제와 싸운 것이고, 건설했다는 것은 시행착오적 자유민주건설, 근대산업화와 개방적 성장으로 이룬 ‘자유선택’ 체제이다. 그것은 공산제국주의 극복과 건국 민주주의의 혁명성, 그리고 자유선택이 가능한 시장경제와 산업 발전으로 만든 민주주의 발전 과정이다. 그 결과가 바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나 경제산업발전, 혹은 공산주의 극복에 있어서 세계사의 이정표를 만들고 모델 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근간이다. 현재 나타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오도와 실패는 1987년 체제를 만든 세력들이 1948년 체제와 1960·61년 체제의 성공적 계승과 연속성에서 보지 않고 단절과 부정 및 청산의 시각에서 대한민국을 본 결과이다.
 
 

  김광동 박사께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말씀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을 넓혀주었다. 김 박사께서는 “한국의 민주주의자는 누구냐? 바로 공산주의자와 싸운 자가 민주주의자”라고 정의했다. 이게 핵심이 아니겠는가? 이승만하고 박정희하고 싸운 이들이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는 이승만이고, 어머니는 박정희인데 이 두 사람하고 싸운 것이 민주주의자가 되고, 김일성 집단하고 싸운 사람은 ‘독재자’로 불리니까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좌승희 이사장께서도 인사말에서 아주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서구식 민주주의 하지 않았다고 해서 ‘독재자’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나는 강연에서 자주 “1950년대 한국에 링컨을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이승만보다 잘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다고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 지식인이 가진 아주 비열한 사대주의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수백 년이나 뿌리내린 영국이나 미국의 기준을 그대로 한국에 들이대면 모든 정치가와 기업가가 ‘독재자’나 ‘부패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의 소위 지식인들은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에 이 기준을 들이대면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지 않으니까 독재라고 비판해 왔다.
 
  이것은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데, 한국 지식인들이 가진 이런 고질적인 사대주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선시대 ‘주자학’과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양반 지식인들이 주자학적 교조주의를 도입하면서 위선적 명분론에 빠져 모든 사물을 재단했듯이, 현재 한국의 지식층도 서구식 민주주의의 잣대로 자기 나라의 현실을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위선적 지식인의 시각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역사 교과서다. 이런 위선자들과 싸우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다. 위선적 사대주의자들이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자기를 독재자로 모는 상황에서 박정희가 얼마나 고독하게 싸웠겠는가? 심지어 나중에는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도 바로 이런 위선적 민주주의론에 넘어간다.
 
 
  유신체제 부정하면 박정희 제대로 평가할 수 없어
 
경기도 가평군 개곡리 새마을사업 현장을 돌아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한국 민주주의는 ‘싸우면서 건설’한 결과이다.
  김광동 박사는 “민주주의가 하고 싶다고 그냥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아주 쉽게 설명해 주었다. 의외로 많은 한국 사람이 민주주의는 하고 싶으면 되는 것인 줄 생각하고 있다. 이는 한국 사람들이 가진 아주 독특한 사고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은 말과 글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진짜 민주주의를 건설한 사람들이 아니라, 무슨 선언문을 쓰거나 “목숨 걸고 싸우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진짜 민주주의자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좋은 말이야 누군들 못 하겠는가? 실천이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가짜 민주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고, 실제로 민주주의를 건설한 사람(이승만・박정희)을 낮추어 보는 것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양반문화’와 연결된다고 본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확신이 매우 강한 사람이자 위대한 사상가였다. 김일성이 ‘주체(主體)’라는 말을 가져가서 그렇지 박정희야말로 ‘주체적’이며 ‘자주적’ 인간이었다. 그는 자조정신·자립경제·자주국방·자유통일 이 네 가지 자(自)를 통해 일류국가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일관되게 실천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쉽게 말하면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해서 복지국가로 가는 기반을 만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이룩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고, 이를 시행하는 데 많은 이의 참여를 불러내는 것이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여성(女性)을 한국 산업화 역사의 주역으로 끌어냈다. 새마을운동 지도자의 절반은 여성들이었다. 한국 역사상 이렇게 많은 여성이 산업의 전 분야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과 박정희의 산업화의 노력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남성과 여성의 힘이 합쳐져서 만들어 낸 결과다.
 
  박정희 시대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견해가 나뉘는 대목이 있다. 바로 유신(維新)체제 문제다. 박정희 시대를 긍정으로 평가하면서도 유신체제는 독재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이 있고, 반대로 유신체제가 한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끌어올렸고, 유신을 통해 중화학공업의 막차를 타지 않았으면 한국은 아무리 잘해 봐야 현재 동남아시아 수준의 경제 발전도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나는 후자(後者)를 지지한다. 유신체제를 부정하고서는 박정희를 절대로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신체제 7년을 부정하면 한국 역사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때 만든 중화학공업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다만 박정희는 자신의 ‘한국적 민주주의’ 혹은 ‘주체적 민주주의’ 사상을 이어받는 정치집단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민주주의는 어렵지만, 실수를 견디는 제도
 
  김광동 박사께서 현재 ‘박정희 노선’이 태극기 집회에서 폭발하고 있다고 했는데 흥미로운 관찰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태극기 집회는 국민혁명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는 이것을 3·1운동과 비슷하다고 본다. 태극기 집회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계층이 없으며, 지역 구분이 없다. 그리고 여성들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8시간, 10시간씩 서서 집회를 한다. 이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겠는가? 나는 이들을 보면서 ‘애국심에 신들린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진짜 국민혁명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국민혁명의 핵심은 우리가 주권자라고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권자 입장에서 우리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선동하는 언론, 월권하는 검사, 인권 유린하는 판사, 반역적 국회, 기업을 망치는 귀족노조, 이 5개 그룹이 완전히 우리 사회의 특권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들 그룹이 바로 법치주의를 유린하는 특권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를 바로잡아야겠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특권층 세력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것이 국민혁명인데, 이 혁명의 주도 세력이 바로 박정희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기 집회는 1989년 동구권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애국심을 바탕으로 모인 집회 중에는 세계 최대의 집회다. 이 집회의 원동력은 박정희 시대를 겪으면서 그와 같이 호흡을 하며 경제 발전을 일으킨 세대로부터 나온다. 박정희는 자신의 이념적 후계 세력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 태극기 집회의 에너지가 표출하면서 박정희 이념을 계승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는 6·25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다. 현재의 갈등은 결국 체제 대결이기 때문이다. 체제 대결은 오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잘못하면 피를 흘리게 될 수도 있고, 민주적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현재 체제 대결의 속성은 박정희 세력이 김일성 세력과 남한의 민주주의로 가장한 세력과 펼치는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박근혜 탄핵은 대통령 개인을 탄핵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박정희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을 탄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5년 8월 15일 한 건국연설에서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악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어렵지만, 실수를 견디는 제도다. 어떤 문제를 노출시킴으로써 해결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에도 선거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가르치려고 했던 분이다. 이러한 저력이 현재 우리가 겪는 위기에서 한국을 살릴 것인가, 혹은 그를 넘어 법치민주주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이고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굳게 믿었던 이른바 ‘386 운동권’ 출신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와 그 이후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 및 그 체제의 지속적 성숙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경험을 필요로 했다. 아무리 현실이 푸르더라도 빨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불그죽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실 그 자체’ 못지않게 ‘인식의 틀’이 중요하다.
 
  이 같은 현상은 젊은 층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헬조선’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현재 대한민국은 경제생활 수준이나 민주화 척도 그 어느 측면에서도 사실상 선진국 수준에 진입해 있다. 물론 사회적 모순이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이 완벽하게 해결된 사회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으며, 만약 대한민국 현실이 ‘지옥’이라면, 이 지구촌에서 지옥이 아닌 곳은 거의 없게 된다.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 이후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 채택 과정에서 잘 보여주는 것처럼 역사 해석의 헤게모니를 ‘대한민국 부정파’에 장악된 상황이다. 이런 사실은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주인공은 희생적인 동시에 성공적 삶을 통해 자신의 후손들에게 번영된 세상을 물려줬으나 막상 자손들은 이러한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 영화는 주인공이 죽은 아버지를 그리며 자신의 삶을 ‘혼자서’ 자긍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런 측면에서 김광동 원장의 발표 ‘한국 민주주의와 박정희 시대 평가’는 그동안 물질적으로 이룩한 대한민국 근대화 민주혁명을 정신사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또 다른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의 시작을 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광동 원장의 ‘평가’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1948년 건국 혁명을 통해 건설된 대한민국의 ‘근대적 자유민주 혁명 체제의 지속적 성숙 과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좌익적 사관은 물론, 대한민국 현대사를 건국-산업화-민주화 단계로 나눠 단계적·분절적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과 궤를 달리한다.
 
  이 시각에 따르면, 대한민국 민주화는 19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 이룩된 것이 아니라, 이미 1948년에 민주체제를 건설했으며, 그 이후 과정은 이러한 ‘건국 혁명’의 성숙 혹은 완성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즉 1948년 건국을 단순한 독립이나 정부 수립이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근대적 ‘자유민주혁명’”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김 원장의 이러한 분석틀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념적 선언이 아닌 사회과학적 분석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몇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절적으로 보는 시각 극복돼야
 
3·1절 태극기 집회는 서울역에서 시작해 남대문 → 광화문 사거리 → 종로1가 → 동대문까지 인원이 이어져 단일 집회로는 유사 이래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사진은 종로2가 부근에 운집한 경남 양산에서 온 참가자들 모습.
  첫째, “1948년 건국의 혁명적 민주체제는 민주 투쟁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고 했는데, 과도한 표현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선, 민주 혁명이란 것이 단 한 번에 완수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프랑스 혁명 과정을 보더라도, 민주 혁명은 1879년 대혁명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전에 1830년 혁명, 1848년 혁명 등이 있었다. 물론 혁명을 어떻게 정의(定義)하느냐에 따라 다른 관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건설된 체제도 타락할 수 있으며, 또 민주체제 틀이 갖춰져 있더라도 성숙되지 않았다면, 민주 투쟁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4·19의 성격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으나, 3·15부정선거 등은 건국 혁명 이념을 타락시킨 행위였으며, 이를 바로잡기 위한 ‘민주 투쟁’이었으며 이는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즉 이런 관점에서 보면 4·19는 ‘이승만 아이들(kids)’의 자유민주 회복 투쟁이었다. 4·19를 주도한 1939년생들은 일제교육을 받지 않고 자유민주 이념으로 교육받고 자란 첫 세대이기도 하다.
 
  둘째, “한국은 선거 중심적 민주주의가 강조되던 나라였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건국 혁명이 내재적 혁명이라기보다는 ‘이식된 혁명’이며, ‘시민(citizen)’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미성숙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영어 네이션(nation)을 민족이라고 오역하면서, 종족(ethnic) 개념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많다. 이에 오용된 종족주의적 좌익 민족주의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네이션은 ‘정치적 공동체’이며, 이는 공통된 정치적 이념과 그 이념을 구현할 ‘시민’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1948년에 과연 그러한 ‘네이션’과 ‘시민’이 존재했을까?
 
  셋째, “현재 나타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오도와 실패는 1987년 체제를 만든 세력들이 1948년 체제와 1960·61년 체제의 성공적 계승과 연속성에서 보지 않고 단절과 부정 및 청산의 시각에서 대한민국을 본 결과이다”란 결론에 공감한다. 단지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1987년 체제를 만든 세력’들을 과연 ‘민주화 세력’으로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다. 1987년 민주화 과정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은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다. 당시 소위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은 다르다. 그들이 추구한 민주화란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1987년 일반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1948년 체제의 완성 혹은 타락된 요소 바로잡기였던 반면, 이른바 운동권 세력이 추구한 것은 민중민주주의 혁명 혹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시대는 그동안 산업화 측면에선 긍정적 평가를 받았으나 민주화 측면에선 부정돼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절적 혹은 분절적으로 보는 시각은 극복돼야 한다. 박정희 시대는 이승만 시대의 자유민주주의 건국 혁명을 계승·완성하기 위한 국민국가(nation state) 건설 시대였으며, 그 결과로 창출된 ‘시민’으로 인해 그 체제가 더욱 성숙·발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자유민주체제는 여전히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형식적 선거민주주의가 아닌, 시민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일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주체가 신민(臣民)이나 군중이 아닌 시민임을 의미한다. 둘째,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절반의 혁명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토 전체에서 대한민국 자유민주체제가 작동할 때 대한민국 자유민주 혁명이 완수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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