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경의 컬처토크 〈23〉 청년 실업,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다!

  • 글 : 임도경 (사)지역문화소통연구원 원장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 자식의 출신대학과 취업 직장에 따라 엄마가 금·은·동 메달리스트 되는 게 현실
⊙ 졸업생은 취업하기 어렵다는데 기업은 인재가 없다고 아우성
⊙ 체면과 허위의식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만의 장기 살려 도전하는 것이 중요

임도경
⊙ (사)지역문화소통연구원 원장,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객원교수.
졸업생 공개 채용을 안내하는 플래카드 앞을 지나는 대학생. 대학 졸업생들은 쏟아져 나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기업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결혼한 친구들을 만나면 대화의 상당 부분이 자식 자랑이다. 이거 아니면 시댁이나 남편 흉이다. 이런 대화로 실없이 웃기도 하고 때론 박장대소하면서 친구와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걸 문뜩 느끼게 된다.
 
  개성이 하나같이 강한 내 친구들은 은근히 경쟁적이다. 아이들의 성적이 그중 쟁점. 그래서인지 대입을 앞둔 시절에는 실력 있는 과외공부 선생 초빙을 놓고 엄청난 신경전을 펼쳤다. 그 시절을 지나면서 1차 승부는 아이들이 간 대학으로 나뉘었다. 2차 승부는 취직이었다. 자식들의 대입과 취업은 엄마에겐 금·은·동의 메달이 갈라지는 중대한 포인트이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 후 좋은 직장까지 들어가 홀로 설 준비가 끝나면, 엄마는 금메달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모임에서 발언권도 은근 강해진다. 아이가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못해내면 은메달리스트고, 둘 다 그저 그런 곳에 간 엄마는 동메달리스트다. 아이들을 번듯하게 키우지 못한 엄마는 좀 주눅이 든 모습으로 모임에 나오거나 아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는 경우도 있다. 자존심 경쟁에서 밀린 게다.
 
  엄마들이 이렇게 실적에 집착을 하다 보니 아이들 역시 명문대 입학과 대기업 취업에 목을 매고 아까운 청춘을 보내게 되는 것 같다.
 
 
  취업난 속 인재난
 
  우리나라 역사 이래 가장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화려한 스펙을 쌓은 청년들이 최근 취업난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2015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청년실업률은 11.1%로 IMF 경제 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취업준비생과 추가 취업 희망자 등 잠재적인 구직자까지 포함하면 체감실업률은 22%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자), 오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내 집, 인간관계 등 다섯 가지를 포기한 세대), 인구론(인문계열 졸업생 중 90%는 논다), 실신상태(실업 상태에서 신용불량자까지 됨) 등 자조적인 신조어도 생겨나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청년실업의 원인을 대기업-중소기업의 격차, 정규·비정규직 간 차별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고용 흡수력의 저하, 그리고 우리 경제의 성장속도 둔화 등으로 분석하며 다각도의 해법을 내놓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에서는 우선 발등의 불이라도 꺼보겠다는 심산으로 재벌기업의 목을 죄며 일자리를 늘리라고 난리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거 하나만으로 풀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남편은 불과 1년 전까지 대기업 임원으로 일했다. 임원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신입사원 선발에 관여했다. 대기업들은 좋은 직원을 선발하기 위해 해외 유명대학 졸업 예정자들을 채용하기 위한 원정 스카우트에까지 나설 정도로 인재개발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그런데 취업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제 발로 찾아오는 취업 지원자들의 수준이 나날이 낮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몇 해 전부터 소위 명문대 출신은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고 중위권 대학 지원자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다. 명문대 출신들은 아마 대기업 중에서도 좀 더 유력한 기업으로 몰리는 탓에 벌어지는 현상 같다는 이야기였다. 취업자들이 참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또 유망 의료기 수출업을 하는 지인의 친구는 “대기업만큼 월급도 보장해 줄 수 있고, 해외근무도 가능한데, 중소기업이라고 일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취업박람회에라도 나가봐야겠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한쪽에서는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을 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좋은 사람을 못 구해서 아쉬워하는 업주들이 공존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까?
 
 
  좋다는 대기업 몇 곳으로만 몰려가야 하나
 
베를린에 있는 디자인 전문 직업학교 베스트자벨.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예술대학으로 진학하거나 관련 업계로 진출한다.
  그래서 실업률의 근본 원인에 대해 좀 더 솔직한 대화를 나눠봐야 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우선, 청년들이 남의 눈에 번듯한 일자리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만 가지 일이 있는데, 능력대로, 혹은 특기대로 자신의 일을 찾아가면 안 되는 건지 답을 해줬으면 한다. 대학은 실력에 따라 천차만별로 입학하면서 왜 직장은 알려진 몇 곳만을 목표로 삼아 사회문제인 실업자로 남아 있는지 난 궁금하다.
 
  내가 던지고 싶은 보다 솔직한 질문은 사실 이거다. 굳이 학문에 뜻이 없다면, 일반대학 졸업장에 연연하지 말고 좀 더 일찍 전문적인 업종에 취업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 방법으로 취업난을 뚫고 나갈 용기는 없느냐는 것이다. 일반대학보다는 특성화 학과를 갖고 있는 전문대학 취업률이 훨씬 높은 건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상위권 학생 대상 중견 전문 기술인력 육성을 위한 특성화 고등학교인 마이스터고(Meister School)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일반대학 졸업장이 성공을 보장하던 시대는 지났다. 일반대학 졸업장에 갖가지 화려한 스펙을 얹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한들 보통사람들의 삶을 벗어나지도 못한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젠 시대가 바뀌어서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은 것이 목표라면, 뭐 하나만이라도 똑 부러지게 잘하면 된다. 요리를 하든, 매니큐어 아트를 하든, 헤어 디자이너가 되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 한 가지만 찾아서 정상급 실력자가 되면 ‘선생님’ 소리 듣고 잘살 수 있다. 실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왜 정작 진로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일반대학의 문 앞으로만 몰려드는지 계산이 안 나온다.
 
  이런 현실적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모나 자식이나 좀 더 현실적인 선택을 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널려 있는 다양한 일자리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 화려한 스펙의 고학력자들이 양산되는 구조적인 불일치가 해결되지 않는 한 취업난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0% 예비실업자 양산하는 대학
 
  우리나라는 고교 졸업자의 7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 논 팔고, 소 팔아서 얻은 대학 졸업장이 사회적 성공가도를 보장하는 1960~1970년대 산업화 시대 인식이 아직도 건재한 탓이다. 이 규모는 세계 경제 대국이라는 미국(44%)은 물론 독일(29%)보다도 2~3배나 된다. 그러면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규모에 필요한 대학 졸업자는 얼마나 될까? 아무리 한국 경제가 활성화되어도 현 대학 정원 대비 절반도 안 되는 40% 정도의 인원만이 취업으로 연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결국 현재의 대학교육 시장은 60% 정도의 ‘예비 청년 실업인’을 매해 사회 속으로 쏟아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실업의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 내라는 건 사실 억지다.
 
  선진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대학에서 학문의 길로 들어서거나 고위 전문직에 도전하는 부류 이외에는 없다. 독일 같은 경우는 학비가 전혀 없는데도 대학 진학을 하는 학생 수는 극히 한정적이다. 대부분의 학생은 직업별 ‘마이스터(meister·장인)’의 길로 들어선다. 이런 현실적인 사회 진출 구조가 독일 사회를 선진국으로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해 봤지만, 독일만큼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곳은 없었다. 차를 몰고 가던 중 잠시 쉬려고 들른 시골 동네도 평화로움이 깃들어 보였고, 적은 돈으로도 많은 식품을 살 수 있을 만큼 물가가 안정돼 있는 덕인지 사람들은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게 바로 행복 아닐까.
 
  사무직으로 성공해서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은 극히 한정돼 있다. 그 사람들 수만큼 학력은 보잘것없지만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알려져 있다. 요즘 트렌드는 사실 대기업에 입사해서 그럭저럭 살다가 퇴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스스로 블루오션을 개척해서 일인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사회의 트렌드와는 무관한 길을 걸으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아직도 대학 4년도 모자라 스펙을 쌓고 ‘5학년’까지 다니며 취업을 위한 투자까지 해야 하는 시대에 목매고 있는 건 너무 용기가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기를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나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볼까 한다.
 
 
  여성 잡지에서 출발한 나의 기자생활
 
1985년 《주부생활》 시절의 필자(가운데). 왼쪽이 김중만 사진작가, 오른쪽턱에 손을 괸 사람은 정성일 영화평론가 겸 감독.
  나는 기자생활을 《주부생활》이라고 하는 여성 잡지에서 시작했다. 4학년 1학기 말 무렵에 학과장님(이대 신문방송학과)이 입사시험 요강이 왔으니 응시해 보라는 조언에 따랐을 뿐이었다. 언론통폐합 이후 기자가 되는 길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일단 첫 번째 연락 온 곳부터 시험을 보라는 말씀이었다.
 
  100 대 1의 관문이었다. 여의도 중학교 교실 여러 곳에 분산 배치돼 시험을 봤고, 4차에 걸친 시험에 최종 합격을 한 후 4학년 2학기를 다녔다. 회사에서 졸업예정자를 기자로 뽑았으니 일단 학교생활에 충실하고 졸업할 때까지 인턴 식으로 회사를 다녀도 월급 전액을 지불하겠다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월급 역시 그 당시 신문, 방송사 수준과 같을 만큼 여성지가 호황이던 시절이었다.
 
  취업지원을 하기 전까지는 여성지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가 《주부생활》 기자가 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주부생활》에서는 내가 신문방송학과 출신이라는 이유로 방송국 담당 기자로 발령냈다. 한마디로 연예부 기자였다. 처음엔 흥미로 시작했던 일이 나중에는 기운 빠지고 지치는 일이 됐다. 남들이 아직도 이야기하는 연예부 특종기사를 몇 개 썼지만, 그것이 위안이 되진 않았다. 그 당시는 정치 등 사회 비판성 기사가 다 죽어 있던 시절이라 연예부 기사가 상종가를 치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슬슬 여성지에서 기자생활을 한 일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기자가 된 지 5~6년 정도 지난 시절이다. 다시 시험을 봐서 신문이나 방송사로 옮기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다. 그때 마침 회사에서 《일요신문》이라는 주말 종합신문을 창간했다. 좋든 싫든 연예부에서 빨빨거리며 기사를 건져낸 실력을 눈여겨봤던 국장이 나를 정치부에 갖다 놨다. 연예 기사 쓰는 식으로 불모지를 돌파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해서 1987년 6·29 선언이 나던 당시 민정당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일간지에 정치부 여기자가 전무하던 시절이라 이름도 없는 주간신문 소속이던 나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됐던 것 같다. 나는 그때부터 5개년 계획을 세워 목표를 달성해 나가는 습관을 갖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변신의 노력
 
  첫 번째 5개년 목표는 정치부 기자로서 입지를 다지는 일이었다. 미용실에서나 읽는 여성지 출신이 정당 출입기자가 된 데 대해 모두 의아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여성지 출신’은 내가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쫓아다녔던 일종의 ‘낙인’이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나를 분발하게 만든 요인도 됐으니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중에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으로서 폭넓은 기사를 선택하고 만들어내는 일을 할 때는 그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됐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정치조직의 면면과 정치면 기사 작성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때 기사 한 개를 쓰기 위해 100개 이상의 관련 기사를 읽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기사를 써나갔다. 기자들에게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던 원고지 기사 시절이라 신문 스크랩을 찾아서 100개의 기사를 읽는 건 정말 힘든 고역이었지만,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이와 함께 출입기자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춰야 했다. 당시 정당의 분위기는 당 출입기자가 나올 경우 당대표가 회사로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게 상례였다.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당대표가 된 윤길중 대표가 나를 응원해 주겠다며 김중위 대변인과 함께 회사를 찾아와 휘호를 남기고 간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돼 갔다.
 
  사세가 확장된 회사는 몇 해 뒤 일간 신문 《민주일보》를 창간했고, 난 정치부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일요신문》 정치부에서 세워놓은 정치부 기자로서 입지를 다지는 일은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주일보》 생활은 회사의 경영난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노조와 경영진의 대립으로 일하는 여건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때 《경향신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자리를 옮겼다. 10년 만의 이직이었다.
 
  1991년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뒤 공채기자와 나같이 중간에 입사한 기자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심각한 대립양상이 어려웠다. 그때 내가 세운 두 번째 5개년 계획은 해외 유명 대학 연수프로그램에 다녀와 경력을 좀 더 보강하자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기업에서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중견기자들의 해외대학 연수를 지원해 주고 있다. 이 기회는 소위 잘나가는 기자들이 갖는 일종의 특혜였다. 공채도 아닌데다가 여기자인 내가 이 자리에 도전하는 건 사실 무모했다.
 
  하지만 난 회사와 가까운 종로의 한 외국어학원 새벽반을 끊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부를 마치고 부랴부랴 회사로 출근하며 토플을 준비했다. 그런 지 8개월 만에 회사가 지원하는 영어회화반이 생겨서 다행히도 좀 더 편하게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토플성적을 가지고 회사 전무를 면담해 담판을 지은 끝에 지원자격을 얻어냈다. 그 후 대우언론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됐고, 1995~1996년 동안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대학으로 떠나 초빙연구원으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자신의 계획을 세워 도전하라
 
1995년 정치부 여기자 1세대 모임에 함께한 김대중 전 대통령. 왼쪽부터 필자, 조은희 《영남일보》 기자(현 서초구청장), 최광숙 ‘불교방송’ 기자(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명숙 《시사저널》 기자(현 제주올레 이사장).
  세 번째 5개년 계획은 정치 전문기자로서 기자생활 20년이 넘기 전에 책을 하나 쓰자는 생각이었다. 당시 《경향신문》 차장 시절이었는데, 가장 바쁜 시기에 책을 쓰는 일은 휴식이 없는 일상을 각오해야 했다. 대상포진까지 앓으면서 1999년에 내놓은 책이 정치인 캐릭터 분석집 《그들 속의 神》(도서출판 한송)이다. 이 책을 계기로 방송 MC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게 됐는데, Food 채널의 〈거인들의 저녁식사〉라는 토크쇼 진행을 맡게 됐다. 이 자리에 노무현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를 비롯한 많은 정치인과 각계 유명 인사들이 출연해 준 덕분에 프로그램을 2년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이에 모교인 이대 정책과학대학원의 언론학 석사 과정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석사 학위를 시작한 건,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벗어나 한 번쯤 내 일을 학문적으로 재정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2년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겨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으로서 일하면서 한국 언론에서 주는 모든 상을 다 받는 영광도 누려보았다. 석사를 마친 뒤 나의 네 번째 5개년 계획은 기자생활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그동안의 경험을 학문의 얼개 속에서 재정리하며 일종의 ‘자격증’ 같은 걸 내게 주는 일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2006년에 경희대 박사 과정에 입학해 2008년에 학위를 마쳤다. 박사 학위 논문으로 쓴 ‘정치부 기자들의 정치인에 대한 인식과 뉴스생산에 관한 연구’는 20년간 뛰었던 정치부 기자로서의 활동을 종합정리하는 의미로 6개월 만에 완성한 논문이다. 박사 학위를 마친 뒤 바로 언론사 일을 마무리하고 경희대에서 후배를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나의 바빴던 청춘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해도 계속 도전하면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 시작부터 너무 큰 것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실제 경험담을 들려주기 위해서이다. 물론 여성지 출신 기자로 나와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은 아직까지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여성지에 첫 발을 디딘 잘못으로 그만큼 어려운 길을 헤쳐나온 것은 맞다. 그래도 목표를 세우면 움직일 수 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서 다른 행복에 만족하면서 살 수도 있다. 여성지 기자 출신으로 유능한 잡지 경영인이 된 능력자들도 적지 않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직업이 나날이 분업화되고 전문화되고 있으니 내가 어떤 장기를 갖고 태어났는지 먼저 살펴보고 그걸로 승부를 해도 얼마든지 정상에 설 수 있다. 만약 내가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됐다면, 아마 난 헤어드레서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머리 만지는 걸 좋아하고 곧잘 한다는 소리도 듣는다. 헤어드레서가 됐다고 해도 난 5개년 계획을 세우며 계속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전진했을 것 같다.
 
  체면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부모 바라보지 말고 젊은이들이 먼저 자신만의 길을 찾는 데 좀 더 용감해지길 바란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