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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경의 컬처토크 〈22〉 어떻게 죽을 것인가

글 : 임도경  (사)지역문화소통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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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동생, 호스피스 병동, 임종실, 응급실 전전하며 암 투병 하다가 설날 연휴에 세상 떠나
⊙ 입원한 가족들 상대로 납골당 사기 분양도…, 상조회사 버스기사는 커미션 받고 특정 식당으로
    유가족 유도
⊙ 혜정 스님이 준 《티베트 死者의 書》보며 ‘잘 죽는 방법’에 대해 생각

임도경
⊙ (사)지역문화소통연구원 원장,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객원교수.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에서 수녀가 임종환자가 들어올 병실을 정돈하고 있다.
  지난 설 연휴에 시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말기 암 환자였던 시동생의 기나긴 투병을 지켜보며 나 또한 언젠가는 맞게 될 죽음의 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됐다. 세상에 오는 것과는 달리 떠나는 순간을 맞는 일에는 순서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말에 약해지는 듯하다. 인간이 가장 피할 수 없는 운명은 바로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숭고한 모습으로 지인들에게 작별을 하고 떠나고 싶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사망하는(9988234) 복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들어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선택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고 떠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과정과 비참한 마지막 모습만은 함께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
 
  말기 암 환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한다. 오장육부가 암세포에 의해 공격당해 기능을 다 잃는 순간까지 본능적으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고통이 신경세포를 통해 온전히 다 전달되기 때문에 환자는 차라리 안락사를 시켜 달라는 애원을 하는 상황으로까지 간다. 시동생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늦은 밤 응급실에 처음 도달했을 때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임종하기 36일 전의 모습이었다.
 
 
  죽음을 버티는 인간의 의지
 
  시동생은 담도염에서 시작된 패혈증으로 인한 고통에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 통증을 이겨내느라 악문 치아의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인공호흡 호스를 집어넣기 위해 몇 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와서 온 힘을 다해도 입을 벌리지 못했다. 이 고통은 새벽을 넘겨 계속됐다. 모르핀도 듣지 않는 상황이었다.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으니 전문의가 출근을 해서 염증으로 인해 폐쇄된 담도를 열어 주는 수술을 해 주지 않으면 대책이 없다고 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식구들은 고통으로 눈동자까지 돌아간 시동생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며 밤을 새웠다.
 
  수술이 잘 끝나 담도가 열리고 염증 반응도 잡았지만, 간암 말기였던 시동생의 간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의사들은 한 시간을 못 버틸 것이라며 준비하라고 했다. 시부모님한테 이 상황을 알려야 했다. 마지막 인사를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 서둘러 오시라고 연락을 했다. 미국에 있는 시누이한테도 급박한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시동생은 버텨 냈다. 의사가 이야기한 시한을 넘기자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에 들어가라고 했다. 연명치료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시동생은 식구들도 못 보고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중환자실행을 거절했다. 환자가 중환자실을 거부하자 암 말기 환자들을 입원시키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 병원 꼭대기 층에 치료를 포기한 암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입원실 가운데 두 개의 임종실이 따로 준비돼 있는 정말 마지막 단계의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담당의사는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을 못 넘길 것이라고 했다. 통증을 덜어 주는 약만 처치할 뿐 치료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의사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말 기적같이 시동생은 나날이 회복했다. 벽을 보고 웅크린 채 펴지도 못했던 앙상한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밥도 먹었으며, 식구들과 웃으며 대화까지 나누는 정도로 회복됐다. 얼굴이라도 한 번 보겠다고 미국에서 서둘러 들어온 시누이가 간호를 하는 상황이 됐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다. 의사의 진단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환자 1명에 얽매인 가족들
 
  병실을 찾았을 때 우리 부부를 보고 환하게 웃던 시동생의 수척한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기처럼 천진했던 그 웃음. 마치 죽음에서 생환한 사람의 모습같이 티 없이 맑았던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동했었는지. 평소 어렵기만 했던 시동생을 끌어안고 정말 한참을 울었다. 시동생은 이때 죽음을 예견한 듯 식구 한 사람씩 불러 유언을 남겼다. 나한테도 많은 일을 부탁했다. 이 순간이 유일하게 임종 기간 중 정신이 맑았던 시기인 것 같다.
 
  병실에서 열흘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병원 측에서 퇴원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치료를 중단한 환자에게 대학병원 병상을 오랫동안 내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거주지 근처에서 모르핀을 주사해 줄 수 있는 협업 의원을 소개해 줄 테니 병상을 비워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연락처를 손에 쥐고 소변 주머니를 찬 채 시동생은 퇴원을 했다. 시동생이 말기 암으로 일에서 손을 완전히 놓은 뒤 생계를 책임진 동서는 운영 중인 조그마한 가게마저 돌볼 수 없었다. 병원에서 먹고 자는 동안 초췌해진 모습이 딱했다. 20대 두 딸들도 아버지의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 몸살로 누워 버렸다. 미국에서 온 시누이만 씩씩하게 버텼다.
 
  시동생이 퇴원해 집에 있는 동안 가족들은 모두 비상 태세로 지내야 했다. 울산에 있는 대학에 근무 중인 남편 역시 울산에서 언제든 떠나올 수 있게 준비하면서 일을 하느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언제 변고를 알릴 연락이 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조용한 일상이었지만 하루하루는 초조하게 흘러갔다. 주변 식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조회사를 알아서 예약해 놓고 납골당을 알아보는 일 정도였다.
 
  납골당을 알아보면서 얻은 정보도 있었다. 자치단체별로 지역주민을 위해 건립한 납골당이 있기 때문에 주소지만 확실하면 지역에 따라서는 아주 싼 가격에 납골당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납골당은 사용료만 내면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서울은 워낙 인구가 많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나 국가보훈 유공자에게만 시립 납골당을 제공하고 있다. 반면 다른 지역은 거주자와 비거주자의 사용료에 차이를 두어 관내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인천 시립 납골당은 망자가 6개월 이상 거주한 주민이면, 10년에 10만원의 사용료를 내면 된다. 5년씩 6번 연장할 수 있고, 연장 시 10만원씩만 내면 된다. 수원 납골당도 15년간 30만원으로, 15년씩 두 번 연장 가능하다. 다른 지역도 이런 관내 주민 서비스를 하는 곳이 적지 않으니 미리 알아보면 경황없이 나가는 쓸데없는 장례비를 줄일 수 있다.
 
  물론 시립 납골당은 가격이 싼 대신 이용기간이 한정돼 있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보통 40~45년을 보관할 수 있으니 그 이후에 대해서는 가족 간에 충분히 의논해서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주어지므로 경제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보통 민간 납골당은 1단에서 9단까지 층마다 가격이 제각각인데, 서 있을 때의 눈높이가 가장 좋은 자리다. 이 자리를 차지하려면 600만~1000만원까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 상을 치르려면 상조회사 비용과 장례식장 비용에 납골당 비용까지 합해 보통 3000만원이 든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 이런 과도한 지출을 막으려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부분은 준비를 하는 것이 현명하다.
 
  두 주간 집에서 머무는 동안 시동생 부부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만일 다시 나빠지는 일이 생기면, 응급실로 가지 말고 동네 의원의 도움을 받아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자고. 하지만 막상 상황이 벌어지니까 두려움이 앞섰던 것 같다. 우리 부부가 잠시 동네 앞산을 산책하고 있을 때 시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열이 오르고 있어서 응급실에 가야겠으니 앰뷸런스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동생은 다시 거주지에서 멀고 먼 그 대학병원 응급실로 돌아갔다. 응급실에서의 조치는 체력이 떨어져서 한없이 같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혈압을 끌어올리고 열을 내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의사들은 혈압을 올려놓으면 환자가 그때처럼 고통에 시달리며 임종을 하게 되니 혈압상승 조치를 하지 않는 것이 고통을 덜어 주는 길일 수도 있다고 했다. 혈압상승 조치를 안 하게 되면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고통 없이 임종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상황을 이야기해 줄 뿐 선택은 환자와 가족의 몫이었다.
 
 
  임종실에서도 삶의 의지를 불사른 시동생
 
  혈압상승 조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문제로 가족들 간에도 입장 차이가 생겼다. 이 상황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가족 중에 누구 한 명이라도 마지막 조치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면 결국 그 사람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가해자’처럼 인식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간 의견의 불일치로 시동생은 혈압상승제를 매단 채 응급실을 떠나 임종실로 들어갔다.
 
  담당 간호사는 임종실에 약 매달고 들어온 환자는 처음이라고 했다. 혈압상승제에 포도당까지 맞으며 의식을 회복한 시동생은 모르핀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 보였지만 고통은 없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환자가 식사로 미음을 먹겠다고 해서 받아 두었다. 임종실에서 환자식을 받는 느낌이 묘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치고는 너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인 시동생이 다시 임종실에 들어가자 교회에서 나와서 마지막 예배까지 치렀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대학병원 임종실은 사용시간이 입실 후 48시간으로 한정돼 있다. 다른 임종 환자들을 위해 자리를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시동생은 하루 23시간을 자면서 병마와 싸웠다. 결국 48시간을 넘겼고, 다시 2인 병실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임종실에서 병실로 옮기면서 가족 간 이견 없이 혈압상승제를 뗐는데, 다행히도 혈압이 떨어지지 않고 수치를 지켜 줬다. 단맛을 좋아한 시동생의 마지막 입맛은 아이스크림이었다. 잠깐 의식이 있는 시간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직계가족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임종’에도 惡한 인간들은 여전
 
서울시립 벽제화장장 화장로들 앞에 유가족들이 줄지어 서서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2인 병실 생활을 하면서 임종실에 자리가 나길 기다렸다. 1인 임종실에는 가족들을 위한 소파형 베드가 있기 때문에 임종을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는 훨씬 견디기 수월한 환경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다시 임종실에 들어갔고, 또 다시 나와야 하는 48시간이 다가오기 직전에 시동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숨을 거뒀다. 설 전날 저녁이었다. 이 병원 응급실에 온 지 꼭 36일 만이었다.
 
  임종실 생활을 하는 동안 시동생 가족들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기도 했다. 임종실 가족들을 상대로 납골당 사기 분양을 하는 사람들이 병실 복도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던 모양이다. 어린 조카가 일반 사설 납골당에 비해 턱없이 비싼 납골당을 놓고 10% 할인해 준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계약을 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야 이 상황을 알게 돼서 상복 입고 해결사 노릇까지 하는 웃지 못할 경험도 했다.
 
  상황을 알고 보니 상조회사와 연결된 납골당 분양 업체에서 납골당 측과 커미션 계약을 하고 분양에 열을 올리면서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 것 같다. 이들에겐 임종실 복도가 영업장소다. 가족의 임종 앞에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니 씁쓸할 뿐이다.
 
  설날 전날 장례식장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설날 조문 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결국 4일장을 치르기로 했다. 계약한 상조회사에 연락을 하니 마치 컨베이어벨트에서 물건 뽑아내듯 절차가 진행됐다. 가족들은 장례식장을 선택하고 대접할 음식만 준비하면 됐다. 기독교식으로 치르니 교회 주도로 몇 차례 예배를 진행하면서 4일장을 마쳤다.
 
  서울시립승화원으로 이름을 바꾼 벽제화장터는 1992년에 할머니 상으로 들른 이후 처음 가 봤는데, 깔끔하고 엄숙하게 화장식을 치를 수 있게 새단장돼 있었다. 망자가 서울 시민이면 9만원에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데, 외지인들은 100만원을 내야 한다. 이것도 정보가 될 것 같다. 보통 화장터는 납골당과 가까운 곳을 선택하는데, 유가족들이 선택한 납골당이 근처라 이곳을 이용했다.
 
 
  납골당 주변에서의 불쾌한 기억
 
조계종 원로의원을 지낸 혜정 스님.
  납골당에 안치한 후 동행한 가족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화장터 식당에서 곰탕 끓이는 냄새를 맡은 이후 속이 편치 않았지만, 동행한 가족끼리 마지막으로 행사를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는 일은 필요할 것 같았다. 화장터 식당에서 꼭 그런 음식을 팔아야 하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납골당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식구들을 상조회사 버스기사 아저씨가 막고 나섰다. 이곳은 맛이 없으니 좋은 식당으로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저씨의 안내를 받으면서 들어선 식당 주차장은 각종 상조회사 버스들로 인산인해였다. 아마 관광버스 기사 아저씨들처럼 상조회사 기사들이 식당에 손님 풀어놔 주고 커미션을 받는 구조로 운영되는 식당이었던 듯하다. 식당에 일반손님은 한 명도 없고 모두 상복을 입고 모여 앉아 있어 장례식장으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상조회사 버스가 장례식장으로 태워다 주는 것으로 모든 행사를 마무리지었다.
 
  임종이라고 처음 연락을 받은 지 꼭 40일 만에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한바탕 몸살을 앓았다. 긴장 상황이 오래 끌면서 몸에 무리가 갔던 듯하다.
 
  시동생의 임종을 겪으면서 이와는 전혀 달랐던 또 하나의 슬픈 죽음이 생각났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조계종 원로의원이었던 대종사 혜정 스님의 열반이다. 1985년 북한산 문수사 주지스님으로 알게 된 스님은 언제나 웃는 모습이셨다. 가끔씩 저잣거리에서 차 한 잔 하러 만날 때마다 좋은 불교 서적을 한 권씩 주셔서 그동안 모인 책이 책꽂이에 한 면을 다 채울 정도이다. 난 주말이면 스님을 뵙기 위해 북한산 등산을 했고, 문수사에서 스님과 겸상 점심을 먹는 특별대우도 받았다. 할머니 유해를 그곳에 모신 것도 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격려해 주시는 분이라 1998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정신적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의지했다. 그런 분과 2010년경부터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었다. 마침 내가 뒤늦은 결혼을 한 뒤 변화한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살고 있어서 스님을 잠시 잊었다고 하는 게 더 솔직한 마음일 듯하다.
 
 
  똑같은 책을 두 번 주신 원로 스님
 
  결혼 이후 주거지를 강남으로 옮기면서 북한산 산행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말 오랜만에 스님한테 연락이 왔다. 식사나 하자는 이야기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갔고, 언제나 그러했듯 스님은 내게 책을 한 권 또 건네셨다. 제2의 붓다라고 불리는 성자 파드마삼바바가 지은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였다. 이 책은 심리학자 칼 융도 격찬할 정도로 심오한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라 더 감사하게 받았다.
 
  이 책의 원제는 티베트 어로 《바르도 퇴돌》이다. 바르도는 ‘둘 사이’, 퇴돌은 ‘듣는 것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라는 뜻이다. 즉, 사후세계의 중간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자신이나 가족 또는 친구의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는 안내서이다.
 
  다소 빠르고 늦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죽음의 과정을 고통 없이 지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등을 이 책에서는 불교적 관점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잘 죽는 방법을 개발하고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이 책은 그곳에서 가장 보편적인 죽음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즈음이었던 것 같다. 스님으로부터 또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정말 친아버지처럼 나의 앞날에 대해 여러 가지 염려를 하시더니 헤어지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책 한 권을 주셨다. 받고 보니 놀랍게도 또 그 책이었다. 그날 분위기가 “스님, 저 이 책 주셨잖아요?”라고 질문을 던질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날 난 또 《티베트 사자의 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연세가 있어서 나한테 그 책을 준 걸 잊으신 게지’ 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 봤지만 느낌은 여전히 안 좋았다. ‘왜 자꾸 죽음에 대한 책을 주시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난 어떤 모습으로 떠날까?
 
  그 3개월 후인 2011년 11월, 스님이 세수 81세로 열반하셨다는 보도를 접했다. 스님은 전립선암을 앓고 있었고, 떠나기 전에 그동안 아꼈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을 이 책에 담아 전해 주는 일을 마지막 과정으로 생각하고 실행하셨던 것 같다. 죽음이 끝이 아니니 슬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그 책에 담으신 게다. 내게 같은 책이 두 번 전달된 것은 그 과정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반인 선묵혜자 스님이 주지를 맡고 계셨던 정릉 도선사 요사채에서 조용히 정리하셨다.
 
  뉴스를 보고 스님의 입적을 알게 된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불효를 저지른 것 같은 마음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시엔 정말 많이 울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의 스님은 고통 받는 초췌한 암 환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늘 편안하게 웃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 주셨던 큰스님의 인자한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모습이 그리우면 북한산 문수사로 올라가 스님의 사리탑을 바라보고 내려온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기같이 웃던 스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머릿속엔 병마로 고통 받는 스님의 모습은 없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남기신 책들과 나를 염려해 주던 목소리와 인자한 미소만 기억이 날 뿐이다. 난 어떤 모습을 남기고 떠날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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