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황·이현보 등 활동한 ‘강호문학의 산실’ 임강사 복원
⊙ “이제는 받는 불교가 아니라 주는 불교가 돼야”
⊙ “불교 신자가 교회 가서 기도할 수도 있고, 기독교인이 절에 와서 합장할 수도 있어야”
⊙ 매일 아침 똑같은 노스님 말씀, “머리 만져봤느냐”… 수행자가 맞는지 확인하라는 가르침 깨달아
⊙ 출가 후 만난 노모가 등 다독이며 하신 말씀, “수행 열심히 하시게”
⊙ “민심? 지금은 보수냐 진보냐를 따질 때가 아냐”
⊙ “기도는 마음 챙김, 흔들리는 마음 붙잡는 게 신앙. 불교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상관없어”
智賢 스님
1957년생. 1971년 선찰대본산 범어사에서 소천 큰스님 문하, 법종 스님을 은사로 출가 / 조계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함께하는시민행동 공동대표, 봉화 청량사 주지 역임. 現 안동 임강사 주지 / 2000년 조계종 포교대상 수상
⊙ “이제는 받는 불교가 아니라 주는 불교가 돼야”
⊙ “불교 신자가 교회 가서 기도할 수도 있고, 기독교인이 절에 와서 합장할 수도 있어야”
⊙ 매일 아침 똑같은 노스님 말씀, “머리 만져봤느냐”… 수행자가 맞는지 확인하라는 가르침 깨달아
⊙ 출가 후 만난 노모가 등 다독이며 하신 말씀, “수행 열심히 하시게”
⊙ “민심? 지금은 보수냐 진보냐를 따질 때가 아냐”
⊙ “기도는 마음 챙김, 흔들리는 마음 붙잡는 게 신앙. 불교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상관없어”
智賢 스님
1957년생. 1971년 선찰대본산 범어사에서 소천 큰스님 문하, 법종 스님을 은사로 출가 / 조계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함께하는시민행동 공동대표, 봉화 청량사 주지 역임. 現 안동 임강사 주지 / 2000년 조계종 포교대상 수상
스님은 경운기를 몰아 까까머리 어린이들을 태우고 어린이 법회를 열었으며, 하나씩 천천히 지어 청량사가 천년고찰의 위용을 되찾게 했다. 골짜기마다 불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산중에 어린이 웃음소리가 울렸다.
“사람이 모여야 절이 살아납니다”
지현 스님은 “도시 사람은 농촌과 연결돼야 하고 그 역할을 절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어느 해 산사(山寺) 음악회를 열던 날, 6000여 명의 사람이 청량사에 모였다. 안치환이 노래를 불렀고 장사익이 소리를 풀었다. 행사를 위해 따로 꾸며 놓은 무대는 없었다. 산 전체가 무대였고, 조명은 암봉과 암봉 사이를 비추며 장엄한 풍경을 연출했다.
2024년 10월 31일, 지현 스님은 청량사와 맺은 41년의 인연을 뒤로하고 사찰 운영 권한을 소속 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에 이양했다. 이후 흔적만 남은 폐사 임강사(臨江寺)를 복원하기로 결심하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기자는 지난 3월 29일 안동에서 지현 스님을 만났다.
— 청량사를 떠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제 생의 마지막으로 임강사를 복원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 임강사는 어떤 절인가요?
“단순한 절이 아닙니다.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1467~1555년)와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년) 같은 선비들이 머물던 곳이고, 강호문학(江湖文學)이 태어난 자리예요. 조선 중기 문인들이 문학을 매개로 교류했던 공간이라 문학적으로도 의미가 큽니다. 건물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모여 문화를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공동체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사람이 모여야 절이 살아나요.”
― 농촌 문제를 강조하시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지금 농촌은 아주 심각합니다. 초등학교도 사라지고, 병설 유치원에 아이가 한두 명 있는 수준이에요. 지금 농사짓는 분들이 돌아가시면 농촌은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 사찰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콩을 재배해서 된장을 만드는 체험을 하고, 배추와 무를 길러 김장을 직접 해 보게 하면 됩니다. 가족 단위로 내려와서 체험하고 소비까지 이어지게 해야 해요. 그러면 농민은 판로 걱정이 없고, 도시 사람은 농촌과 연결됩니다. 그 역할을 절이 할 수 있다고 봐요.”
된장 한 항아리와 김장 한 포기로 영성(靈性)을 구현하는 일. 초월을 향하던 공간이 땅과 사람을 잇는 실용의 매개로 스스로를 내어놓자는 발상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조선시대 江湖문학의 산실 임강사
이현보·이황이 ‘어부가’ 지은 곳
새롭게 복원된 임강사 대웅전.임강사는 조선시대 강호문학이 태동하고 구현된 대표적 공간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농암 이현보 선생이 만년에 이곳에 은거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고, 자연과 하나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시로 노래했다. 퇴계 등 당대 명현(名賢)들과의 교유(交遊) 속에서 새로운 문학 지평이 열렸다.
강호문학은 자연 속에서 삶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찾는 문학이다. 임강사는 그 문학이 실제 삶과 결합해 꽃핀 현장이었다. 이현보는 이곳에서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를 노래하며 ‘농암가’와 ‘어부가(漁父歌)’를 창작했다. 특히 1549년 퇴계 이황,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1517~1563년) 등과 함께 완성한 ‘어부가’는 문학과 음악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으로 조선 강호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분강과 ‘자리바위’ 일대는 풍류와 교유의 장이었다. 이현보와 황준량 등은 시와 술, 노래와 춤을 함께하며 감흥과 미의식을 나눴다. 이 공간에서 문학은 기록을 넘어 현장에서 향유되는 문화로 자리 잡았고, 이는 이후 영남가단(嶺南歌壇)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임강사는 세월 속에 자취를 감췄다. 조선 후기 이후 기능이 쇠퇴하고 관리 주체가 약화되면서 점차 폐허가 되었고, 결국 실체가 사라졌다. 문헌과 기억 속에만 남은 채 오랜 기간 잊힌 문화유산으로 머물렀다.
부활은 영천 이씨 농암종택 종손 이성원(李性源)과 지현 스님의 오랜 교유에서 비롯된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이성원 종손은 청량산과 분강 일대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며 복원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지현 스님이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옛 터를 바탕으로 사찰이 중창되면서 임강사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 복원까지 30%가 남았단다.
이 과정은 단순한 건축 복원을 넘어선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강호의 풍류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과거 농암과 퇴계가 나누었던 정신적 유산을 오늘의 문화로 잇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람 사이 관계가 끊어져”
지현 스님의 고향은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룡사(金龍寺) 아래 사하촌(寺下村)이다. 마을과 절이 맞닿아 있어 생활과 신앙의 경계가 따로 없던 곳이었다.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모였고, 꽹과리를 치며 막걸리를 나눴다. 그것이 곧 공동체였다.
상여꾼들도 있었다. 그들은 망자(亡者)의 집안 내력을 알고 즉흥적으로 사설을 엮었다. 상여소리가 울리면 마을 전체가 함께 울었다. 장례를 넘어 공동체가 하나로 묶이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 농촌 공동체 붕괴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예전에는 밥이 없으면 옆집 가서 솥뚜껑 열고 같이 먹었어요. 그게 문화였죠. 지금은 고추 하나만 따도 분쟁이 생기는 세상이 됐어요. 단순히 생활이 바뀐 게 아니라, 사람 사이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 전통문화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종가 장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예전에는 어른이 돌아가시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죠. 사흘 동안 같이 울고, 같이 돕고, 같이 일했어요. 장례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 되는 과정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거의 다 사라졌어요. 그냥 간단히 치르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장 법회
― 음식문화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종가 음식도 마찬가지예요. 제 생각에는 한 80%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몸이 아프면 산에 가서 약초 뜯어다가 죽 끓여 먹였어요. 그게 다 생활 속 문화였는데, 지금은 다 끊어졌죠.”
― 복원 작업을 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까?
“최소한 알고 선택하게는 해야죠. 모르고 안 하는 거랑 알고도 안 하는 건 다르거든요. 그래서 장례도 가르치고, 음식도 발굴해서 종부(宗婦)들한테 다시 전해 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지현 스님은 불교가 시대 변화에 둔감해졌다고 진단했다. “종교는 앞에서 끌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뒤따라가는 형국”이라고 했다.
“세상은 자고 나면 바뀝니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변하고 있어요. 그런데 불교는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대 흐름에도 둔해요. 단순히 느리다는 문제가 아니라 방향을 놓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종교는 원래 앞에서 끌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뒤에서 따라오도록 해야 하죠. 길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입니다. 세상이 가는 방향을 보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어요.
― 지금 불교의 모습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그냥 기존 방식대로만 가고 있습니다. 전통은 중요하지만, 그걸 그대로만 붙잡고 있으면 안 됩니다.”
― 앞으로 불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이제는 받는 불교가 아니라 주는 불교가 돼야 합니다. 사람들이 절로 오기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출장 법회를 시작했어요. 마을로 직접 찾아가서 고추도 같이 심고, 김도 같이 매고… 그렇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절 안에서만 기다리면 안 돼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 어린이 법회는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셨나요?
“초등학생 하나를 제대로 불자로 키우려면 한 20년은 걸립니다. 당장 결과를 보려고 하면 안 돼요. 아이들이 절을 무서워하지 않게, 스님이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것, 그 정도만 돼도 충분합니다. 나중에 크면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면 되는 거죠. 억지로 시키는 건 오래 못 갑니다.”
물 위에 비친 달처럼
지현 스님은 허물어진 청량사를 아름다운 천년고찰로 복원시켰다. 사진은 청량사 주지 시절 모습. 사진=조선DB강가를 걷다가 떠올렸다는 스님의 은유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달이 강에 비쳐 있더라고요. 걸어가면 따라오고, 멈추면 같이 멈추고… 욕을 해도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끝까지 같이 있어요. 그걸 보면서 참 많은 걸 느꼈습니다.”
― ‘달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군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달처럼 곁에 있어 주고, 같이 울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내가 달이 아니면, 내 곁에 달 같은 사람도 없어요.”
― 이 표현은 전통적인 불교사상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불교에는 마음을 비추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 수행자의 삶이 더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그걸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 알아야 합니다. 모르고 안 하는 것과 알면서 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고기를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고기를 안 먹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건 못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먹을 줄 아는 사람이 안 먹으려고 참는 것은 다릅니다. 그건 고통이 따르는 겁니다.”
“기도는 자비의 씨앗 하나 심는 것”
2007년 청량사 산사 음악회엔 신자를 포함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사진=조선DB― 수행은 결국 욕망을 억제하는 과정이라는 말씀이군요.
“억제가 아니라 극기(克己)입니다. 자기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힘든 겁니다.”
― 그렇다면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수행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스님이 담배를 하루 두 갑씩 피우다가 끊었는데, 끊는 데만 1년이 걸렸어요. 그런데 20년이 지난 뒤에도 담배꽁초 하나를 보고 두 시간을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게 수행이에요. 오랜 시간 고통도 겪고, 고민도 하고, 갈등도 겪으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는 겁니다.”
스님은 기도를 씨앗에 비유했다.
“기도는 씨앗 심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내 마음속에 자비의 씨앗 하나를 심는 거예요. 그게 싹이 났는지, 잎이 났는지, 혹시 말라 죽지는 않았는지 계속 살펴보고 돌보는 게 기도입니다.”
― 스님께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종교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서로를 인정하는 겁니다. 불교 신자가 교회 가서 기도할 수도 있고, 기독교인이 절에 와서 합장할 수도 있어야 해요. 그게 진짜 신앙이라고 봅니다.”
― 실제로 그런 시도를 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사랑과 평화’라는 주제로 음악회를 한 적이 있어요. 스님, 신부, 목사, 수녀가 다 같이 모였습니다. 스님이 찬송가를 부르고, 신부가 찬불가를 부르고… 그렇게 서로의 경계를 넘었죠. 그 자리에는 종교가 따로 없었습니다. 사람만 있었고, 평화만 있었습니다.”
스님은 조계사 주지 시절, 종로 거리에서 수녀와 비구니 스님이 손을 잡고 웃으며 지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스님은 그 장면을 지금도 기억하며 “참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 종교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람을 살리는 겁니다. 사람을 위로하고, 사람을 하나로 묶는 거예요. 종교가 자기 것만 옳다고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갈등이 생깁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신앙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벽을 세우는 게 아니라 길을 열어 주는 것. 그게 종교의 역할입니다.”
수녀와 비구니가 손을 잡고 걷는 장면이 그토록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그것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해석하면, 종교와 생각의 화합이 아직 그만큼 먼 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동생이 넷이었던가…”
― 출가하시기 전 형제자매는 어떻게 되십니까?
“제가 장남입니다. 밑으로 동생들이 있습니다. 여동생이 넷이었던가… 하도 오래돼 가지고.”
누이 숫자를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며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서, 현생(現生)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초월자의 기운 같은 것이 감지됐다.
스님의 출가(出家)는 선택이 아니었다. 인천 송도의 흥륜사에 있던 삼촌인 스님이 집안을 설득했다. 시골보다 도시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집에서는 좋아했다. 그렇게 유학 가는 줄 알고 보낸 아홉 살 아이는 두 달 만에 절로 들어갔다. 방학이 돼도 아이가 오지 않자 부모가 올라왔다. 그제야 알게 됐다.
스님은 자신의 출가를 “선택받았다”고 표현한다. 주어진 삶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특별한 일인지조차 몰랐다고 했다. 그냥 원래 삶이 그런 것이라 여겼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사춘기가 왔다. 인천 선인고에 다닐 때였다. 학교에 갈 때는 학생복을 입고 절로 돌아오면 승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스님이야 학생이야?’라는 질문이 여섯 달 내내 흔들었다.
“머리 만져 봤느냐?”
비 오는 날 길을 걸으며 정리되기 시작했다. 학생복을 입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수행자라고.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졌단다.
“제가 어릴 때 절에 있을 때입니다. 노스님이 매일 아침 저를 보시면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머리 만져 봤느냐?’”
노스님은 소천(韶天·1897~1978년) 스님이다. 스님은 15세 때 서울 종로 한남서림에서 우연히 《금강경》을 접한 뒤 깊이 심취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북간도로 탈출해 북로군정서에서 항일운동에 몸담았다. 1952년 범어사에서 출가했으며, 《금강경》 번역·강설과 호법구국운동을 펼쳤다. 서울 대각사·경주 불국사·구례 화엄사 주지를 지내고 인천 보각선원을 창건했다.
― 매일 같은 질문이었습니까?
“예, 거의 매일입니다. 아침마다 만나면 그 말씀부터 하셨습니다.”
― 그때는 그 의미를 이해하셨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머리를 왜 만지라는 거지?’ 그 정도였습니다.”
― 특별한 설명은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설명도 안 해 주시고 그냥 물으시기만 했습니다.”
― 그 말의 의미를 언제 깨닫게 되셨습니까?
“한참 지나서입니다. 제가 스물여섯 살쯤 됐을 때 비로소 알게 됐죠. 머리는 수행자의 상징입니다.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이미 세속(世俗)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나는 수행자로 살겠다’는 표시입니다. 너는 지금 어떤 사람이냐, 그걸 묻는 말씀이었어요. ‘머리를 만져 보라’는 것은 ‘너 수행자 맞느냐’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 그 말이 언제부터 화두(話頭)가 되었습니까?
“그 의미를 알고 나서부터요. 그때부터 그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나는 수행자인가’ 그것을 먼저 보게 돼요. 말을 할 때, 행동을 할 때,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그 말이 떠오릅니다.”
― 일종의 기준이 된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행동의 기준이 되고, 마음의 기준이 됩니다. 남이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보는 것이죠.”
― 그 질문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까?
“지금도 이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늘 까까머리를 만져 봐요.”
“보살님 왜 여기 앉아 계십니까”
― 속세의 어머니와 관련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신다면요?
“아홉 살 때 머리를 깎고 출가했잖아요. 부모님과 떨어져 절에서 살게 되자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이후 2년 동안 눈만 뜨면 보따리를 챙겨 일주문까지 도망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서서히 흐릿해졌습니다.”
― 출가 후 다시 어머니를 뵌 것은 언제였습니까?
“스무 살 때입니다. 군 입대하기 전 고향집을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저녁밥을 지어 주시겠다며 부엌으로 가셨는데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방문을 열어 보니 부뚜막 앞에 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수행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음 날 훈련소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어머니’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후회하며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먼저 손을 잡아 드리고 꼭 안아 드리며 ‘어머니’라고 부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 다짐을 이루었습니까?
“제대 후 산속 절에서 지내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절에 오시겠다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며칠 뒤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오셨는데, 정작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 아래 길목에 한복을 곱게 입은 보살님 한 분이 앉아 계셨고, 그분이 어머니였습니다.”
― 그때는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내려가면서 몇 번이나 다짐했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라고, 수행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손도 잡아 드리고 안아 드리며 ‘어머니’라고 부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보살님 왜 여기 앉아 계십니까’라는 말이 먼저 나왔어요.”
― 이후 다시 말씀을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까?
“마을 어르신들이 산을 내려가기 전, 절 뒤 장독대 앞에서 혼자 계신 어머니를 다시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어요. 이번에는 꼭 ‘어머니’라고 부르겠다고 다짐했지만 역시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수행 열심히 하시게’
― 어머니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어머니가 먼저 제 등을 톡톡 다독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수행 열심히 하시게.’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날 이후 그 말씀이 한시도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수행 열심히 하라’는 그 한마디가 평생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손을 잡아 드리지 못한 것은 큰 후회로 남았습니다.”
― 지금의 삶과도 이어지는 말씀입니까?
“아들을 부처님께 보내고 눈물 흘리던 어머니가 다시 웃으실 수 있는 길은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하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 때문에 더 이상 가슴앓이하며 눈물 흘리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 조덕순(趙德順)씨는 올해 아흔여섯이다. 문경에 살고 있다. 지현 스님의 말이다.
“노스님이 ‘머리 만져 봤느냐’ 하신 말씀하고 어머니가 ‘수행 열심히 하라’고 하신 말씀, 이 두 가지가 지금까지 제가 버텨 온 이유라고 생각해요.”
― 제 주위에서도 부모를 어떻게 모시면 좋겠느냐고 흔히들 서로 묻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아흔이 된 어머니가 일흔 가까운 아들 사진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 마음으로 자식이 부모를 대하면 됩니다.”
짧은 답이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부모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뜻이었다. 무엇을 해 드릴 것인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대할 것인가가 먼저라는 이야기였다. 아흔의 어머니가 일흔의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은 조건 없이 주는 마음, 계산하지 않는 마음, 끝까지 놓지 않는 마음이다. 스님은 그 마음을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어 보라고 했다.
“전쟁도 평화도 마음에서 시작”
― 수행자의 시선에서 전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국제정세 이야기가 나오자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나라마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잖아요. 그게 안 맞으면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 전쟁은 어디서 시작된다고 보십니까?
“기본적으로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욕심을 내고,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다 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그게 커지면 전쟁으로 가는 거죠. 그런데 마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국가 간 이익, 경제 문제, 자원, 환경 같은 것들이 다 얽혀 있습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평화가 가능할까요?
“종교인들이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가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함께 평화 메시지를 내야 합니다. 전쟁이 마음에서 시작되듯이 평화도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마음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현실하고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스님은 전쟁이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기름값이 오르고, 물가가 오르고,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들이 다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국가가 있는 한 이해관계가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선하게 살아도 고통을 겪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관계 속에서 상처가 생깁니다. 내 말 한마디가 상대 가슴에 상처가 되면, 그 사람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다 관계에서 생기는 일입니다.”
― 그럴 때 붙들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신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자기 마음을 붙들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 기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기도는 마음 챙김, 즉 마음을 돌보는 겁니다. 사람 마음이 계속 변하잖아요. 그걸 그대로 두면 흔들리니까 붙잡아 주는 게 신앙이고, 그걸 실천하는 게 기도입니다. 내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가정과 사회, 직장에서 살아갈 것인지 돌아보는 과정이죠.”
“결국 내가 가야 하는 길”
따뜻한 목재 향이 배어 있는 임강사 대웅전 안, 지현 스님이 두 손을 모은 채 불상 앞에 깊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안동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국가보훈부 권오을 장관도 안동 벽지 출신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굵직한 인물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는 반드시 이루겠다’는 원, 간절함, 인내… 이런 것들이 훨씬 강해집니다. 내가 가는 길은 누구도 대신 가 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부모도 대신 못 갑니다. 결국 내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결핍은 부족함이 아니다. 스님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오히려 간절함을 날카롭게 갈아 세우는 힘이었다.
― 정치 이야기를 조금 여쭤보겠습니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민심은 어떤가요?
“지금은 보수냐 진보냐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국민의 생각과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정치는 국민의 마음은 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있습니다.”
― 결국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입니다.”
“AI 시대,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는 힘 약해져”
요즘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사람보다 인공지능에 먼저 묻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즉답이 일상이 된 시대다. 검색하면 바로 나오고, 물으면 곧바로 답이 돌아온다. 기다림도, 헤매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그만큼 삶은 편해졌지만, 질문은 남는다. 이렇게 빠른 시대에, 왜 수행은 여전히 느려야 하는가? 돌아 가는 길, 오래 붙잡고 고민하는 길이 왜 필요한가? 스님 역시 이러한 변화를 인지하고 있다.
― 이런 변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요즘은 답을 너무 빨리 얻잖아요. 그런데 빠른 답하고, 천천히 깨닫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 사이 간격이 굉장히 커요. 수행이라는 건 시간이 걸리고, 부딪쳐 보고 스스로 깨달아야 되는 과정입니다.”
그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답을 내놓는데 수행은 여전히 답을 미루고 질문을 붙잡는다. 어쩌면 수행은 시대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고되고 더 외로운 길처럼 느껴진다.
― 수행이 더 어려워지는 시대라고 보십니까?
“훨씬 더 어려워지죠. 쉽게 답을 얻는 데 익숙해지면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는 힘이 약해집니다. 사람은 원래 편해지면 어려운 건 안 하려고 하거든요. 서양 문화 들어오면서 우리 전통문화가 많이 사라진 것처럼, 이것도 비슷한 흐름이라고 보면 됩니다.”
편리함은 선택의 폭을 넓히지만, 동시에 깊이를 얕게 만든다. 스님이 말한 ‘스스로 깨닫는 힘’은 어쩌면 시간을 견디는 힘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답을 바로 얻지 못하는 불편함, 그 시간을 버티는 일이 수행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서로 멀어지는 게 더 큰 문제”
기술은 삶의 방식을 바꾸고, 결국 사람의 자리까지 흔든다. 그러나 스님의 시선은 기술 자체보다, 그 이후의 인간을 향하고 있었다.
― 지금 시대에 기술보다 염려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점점 관계에서 멀어지고 있어요. 아이들도 휴대폰 하나만 주면 울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지하철 타면 책도 보고 신문도 봤는데, 지금은 전부 휴대폰만 보고 있잖아요. 이제는 친구보다 AI가 더 가까운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 그 점이 왜 문제입니까?
“정(情)이 없어집니다. 같이 울고, 같이 사는 세상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서로 멀어지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수행은 마음을 닦는 일이지만, 결국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다시 좁히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스님은 가르친다. 지금은 답을 빨리 찾는 능력보다, 함께 머무는 힘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안동 건지산 임강사. 낙동강이 흐른다. 소나무가 서 있다. 스님은 다시 땀을 흘리고 있다. 40년 전 청량사의 무너진 법당 앞에 섰던 그 마음으로.
“출가 당시 초심으로 다시 돌아간 듯합니다.”
스님은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절을 짓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모으는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문화가 살아나고, 문화가 살아나면 지역이 살아난다. 그것이 스님이 말하는 임강사 복원의 본질이다.
수행은 산속 절간의 일이 아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사람을 이해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 노스님의 질문이 귀에 들린다. “머리 만져 봤느냐?”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을 친다. “수행 열심히 하시게.” ‘하라’가 아닌 ‘하시게’라는 끝맺음은 아들을 붙잡지 않고 부처의 길로 돌려보내는 어머니의 초극(超克)의 힘이 아니겠는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밝히는 연등”
두 분이 남긴 말씀은 딱 두 문장이었다. 궁서체로 쓴 현판 같은 두 문장은 지금도 스님의 수행을 이어 가게 하고, 고희(古稀)의 나이에도 임강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고 있다. 이제 그 질문이 독자에게로 건너온다. “머리 만져 봤느냐?” “수행 열심히 하시게.”
― 《월간조선》 독자님들에게도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연등 하나 밝히며, 세상의 빛이 아닌 마음의 빛을 돌아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서로를 살피고 함께 살아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작은 배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밝히는 연등이 되기를 바랍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마음을 돌보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월간조선》 독자 여러분 모두의 삶에 평안과 자비의 향기가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