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하 송진우,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15분 불의의 참변으로 급서… “고하 살해범 가족에게 舊怨 없어”
⊙ 부인 柳氏 후사 없어 형의 아들 英洙를 후사로 삼아… 온갖 비밀스러운 임무 다 시켜
⊙ 일제 경기도지사 이쿠다, 해방 직전 고하와 4차례 접촉설… “치안 협조 요청했으나 거절”
⊙ 현상윤·김성수 등과 함께 3·1운동 준비… 최린·이승훈 등의 협력 끌어내
⊙ 송상현, “총리, 장관, 대법관, 청와대 수석 등 모두 거절. 할아버지 고하의 비극 탓”
宋相現
1941년생. 서울대 법대, 미국 튤레인대 법학석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학원 상법 Diploma, 미국 코넬대 대학원 법학박사 / 제14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1962),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1963), 서울대 법대 교수·학장, 미국 뉴욕대 법대 석좌교수, 하버드대 법대 방문교수 역임. 국제형사재판소 초대 재판관·2대 소장(연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 부인 柳氏 후사 없어 형의 아들 英洙를 후사로 삼아… 온갖 비밀스러운 임무 다 시켜
⊙ 일제 경기도지사 이쿠다, 해방 직전 고하와 4차례 접촉설… “치안 협조 요청했으나 거절”
⊙ 현상윤·김성수 등과 함께 3·1운동 준비… 최린·이승훈 등의 협력 끌어내
⊙ 송상현, “총리, 장관, 대법관, 청와대 수석 등 모두 거절. 할아버지 고하의 비극 탓”
宋相現
1941년생. 서울대 법대, 미국 튤레인대 법학석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학원 상법 Diploma, 미국 코넬대 대학원 법학박사 / 제14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1962),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1963), 서울대 법대 교수·학장, 미국 뉴욕대 법대 석좌교수, 하버드대 법대 방문교수 역임. 국제형사재판소 초대 재판관·2대 소장(연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 사진=조준우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토대로 대한민국의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야 한다”고 집권 초부터 목소리를 높여왔다. 작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지나친 양극화와 사회 갈등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해방 공간, 좌우 이념의 갈등이 극심할 때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려 했던 지도자가 있다.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년) 선생이다. 혹자는 이 시대의 좌우 갈등을 해방 공간에 빗대기도 한다.
고하는 당시 들불처럼 번지던 사회 주의 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건설의 구심점 역할을 한 애국지사이자 정치사상가였다. 그러나 무뢰한의 흉탄으로 1945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장덕수(雪山 張德秀·1895~1947년), 여운형(夢陽 呂運亨·1886~1947년), 김구(白凡 金九·1876~1949년) 등의 암살이 이어졌다. 어쩌면 고하가 살아 있던 ‘해방 공간 127일’, 8월 15일에서 타계(他界)한 12월 30일까지는 자유민주주의를 씨 뿌리려던 몸부림의 시간이었다.
지난 10월 31일 서울 마포구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사무실에서 송상현(宋相現)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고하의 친손자가 바로 송 교수다. 그는 지난 8월 고하가 남긴 글과 관계자료집을 집대성한 《거인의 숨결》(1128쪽)을 펴냈다. 작년에는 고하의 일대기를 담은 《독립을 향한 집념》(758쪽)을 출간했다.
古下의 손자
윤 대통령의 스승인 송 교수는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법학자다.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재판관 및 재판소장(연임)을 역임했다.
윤 대통령의 신념인 자유와 민주주의는 스승인 송 교수의 가르침에서, 그리고 더 거슬러 가면, 단언컨대, 고하의 강철 같은 자유민주주의 열망이 손자인 송 교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게다가 유년 시절, 송 교수는 조부의 비극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지금도 트라우마로 괴로워하고 있다.
기자는 고신대 석좌교수이자 (재)대한민국역사와미래 김형석(金亨錫) 이사장의 도움을 받아 고하의 사상을 좀 더 들여다보았다. 김 이사장은 《끝나야 할 역사전쟁》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광주, 그날의 진실》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등을 펴낸 역사학자다. 기자는 김 이사장과 송 교수의 대담을 지켜보며 몇 가지 보충 질문을 던졌다.
김형석 “12월 30일은 송진우 선생의 기일(忌日)입니다. 고하는 해방 직후 우파, 즉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시던 분입니다. 비극의 현장에 같이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기억나시는 대로 들려주십시오.”
송상현 “집안 얘기를 꺼내기 면구스러워 잘 얘기하지 않았죠. 충격적인 장면이기에 지금 이 나이가 되어도 견디기 어려운 때가 더러 있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천자문이나 사서삼경 등을 굉장히 엄하게 가르치셨는데, 그때마다 단군, 을지문덕,강감찬, 이순신 등의 얘기를 열성적으로 들려주셨죠. ‘서울 원서동 74번지’ 할아버지 사랑채에서 같이 자고 겸상을 하는 게 손자의 큰 특권이었어요.
이분은 꼭 저를 데리고 같이 주무셨는데 어린아이를 다룰 줄 잘 모르셔서 가령 손자가 떼를 쓰면 굉장히 당황해하시던 기억이 있어요.”
― 또래처럼 떼도 부렸습니까.
송 “그럼요. 보리서리, 참외서리 하던 기억도 납니다. 동네 친구들이 다 나이가 나보다 많았지요. 서리할 때 꼬마인 나를 ‘새니(상현이)’라고 부르며 잘 거두어주었어요. 서리한 보리는 불에 그슬려 먹었는데 먹다 보면 입 주위가 새카매지거든. 내 입을 씻겨주며 형제자매가 없는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었어요.”
‘원서동 74번지’ 고하 할아버지 댁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무네미, 말미, 쌍감리(쌍문동), 벌리(번동)를 지나 창동까지 수없이 뛰어다녔다고 했다.
“무네미는 ‘물 넘어’라는 뜻입니다. 현재 수유동의 가운데 글자가 ‘뛰어넘을’ 유(踰)자거든. ‘물을 뛰어넘는다.’ 왜놈들이 동네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그렇게 된 거지.”
신탁통치 결정과 경교장 회의
송 교수는 곧 1945년 12월 30일 그날의 비극에 대해 털어놨다.
그해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 회의의 결정이 전해지면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조선의 독립을 5년간 유예해 신탁통치(信託統治)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할아버지랑 같이 자는데 그날은 그러지 못했어요.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경교장(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에서 모든 정파(政派)가 다 모여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회의가 늦게까지 열렸거든요.
할아버지도 장택상(滄浪 張澤相·1893~1969년), 김준연(朗山 金俊淵·1895~1971년) 같은 분들과 함께 가셨는데 당시 고도의 감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독립이 겨우 왔는데, 나라를 세우기도 바쁜데, 그걸 막고 신탁통치를 한다’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드센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흥분해 있을 때, 할아버지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좀 흥분을 가라앉혀라. 여기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의문을 내가 가지고 있다. 여기 만당(滿堂)하신 정치 지도자 중 이 결의문을 읽어 본 분도 있겠지만 보지 않았다면 나와서 한 번 읽어봐라. 보지 않고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데 진정들 좀 해라.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지도자답게 대책을 세우자.’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일부 흥분한 정치인이 ‘그럼 고하 당신은 찬탁(贊託)하자는 말이오? 당신 미쳤소?’ 그러자 할아버지가 한 말씀 더 하셨지요.
‘짚신감발을 하고 죽창 들고 미 군정청을 축출해서라도 독립해야 한다고 많은 분이 감정적으로 얘기하시는데 지금 한반도 정세를 보면 박헌영(朴憲永·1900~1955년)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죽창으로 미군정을 쫓아내면 그 즉시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정치인은 없더랍니다.”
강원용의 목격담
고하는 결코 신탁통치에 찬성한 일도 없고 지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미군정하에서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서 정권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독립정부를 세우고 정권을 인수해야 된다는 게 고하의 지론이었다. 이것을 찬탁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송 교수는 역사적인 자료,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선친인 송영수(宋英洙·1912~1988년)의 회고 등을 종합해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더는 얘기가 안 통한다 생각하시고 가만히 앉아 계셨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고하 당신은 찬탁을 하자는 얘기구만. 우리하고는 얘기가 안 되겠네’ 하더랍니다.
당시 경동교회 강원용(姜元龍·1917~ 2006년) 목사님이 직접 이 광경을 목격하셨는데, 그분 회고록을 보면 ‘수백 명의 정치지도자 중에서 참 특이한 한 분’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특이한 분…. 강 목사님은 그때 서른 살이 채 안 되었고 고하가 누군지 관심이 없었지만, 첫인상이 강렬했다고 해요.”
강원용의 회고록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고하는 ‘여러분들이 격한 것을 이해하지만, 3상 회의 결정문을 읽어본 사람이 누가 있느냐, 나도 라디오로 들었는데, 민족의 지도자들이 방송에서 나은(나온) 것만 듣고 이렇게 막 들고 일어나는 것은 신중치 못하다’고 말했지요. 그는 또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과 의논해 5년 이내에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내용이 진짜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좌익 사람들이 ‘역적이다. 너희가 미국과 짜고 하는 게 아니냐’며 욕설을 퍼부어댔습니다.
고하는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튿날 새벽 암살당했습니다. 나도 당시엔 고하를 오해했는데 세월이 지나서 보니까 그분이 정세 판단을 가장 정확하게 한 것임을 깨닫게 됐어요. 사실 정확한 내용도 모른 채 방송만 듣고 전 민족의 지도자들이 나선 것은 경박한 일이었습니다.〉
그날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15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 명예교수가 쓴 〈고하의 혜안〉(2003)이란 논문에도 강 목사의 증언이 나온다. 논문에 인용된 강 목사의 육성은 이렇다.
〈“내게 지금 세월이 흘러갈수록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겨준 사람은 그 사람(송진우-편집자)이고…, 모두들 소리소리 지르고 난장판이 벌어지는데, 모두 그저 흥분해가지고 서로 욕설을 하고 이렇게 야단치는데 이 양반이 가만히 앉았다가 일어서서, 이제 정중하게 그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가 지금도 나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송 교수의 말이다.
“강 목사님 주장은 이정식 교수 등의 연구에서도 확인되고 일치하는 증언입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몰아세워서 갑자기 찬탁분자가 되셨고, 그다음 날 아침에 암살을 당하셨거든요. 손쓸 여지가 없이 이루어진 거죠.”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그날 오전 6시15분인데 그 6명의 무뢰한이 담을 넘어 원서동 집에 들어와가지고 사랑채…. 사랑채라는 게 크지도 않고 방 한 칸인데 보통의 경우라면 저랑 같이 자는데 그날따라 아래층에서 미리 잠들어버렸어요. 경교장 회의가 끝나고 할아버지가 같이 주무실 손님이랑 오셨는데, 이튿날 오전 6시15분쯤 되어 총성이 나서…. 그때 정종근(鄭鍾根)이라고 당시 나이로 26세 먹은 호위 경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뜰 아래채 모퉁이 방에서 잤는데 총성이 울리자 총을 빼 들고 뛰어올라갔어요.
사실 아버지가 12월 초순부터 시내에 이상한 소문이 파다해 할아버지한테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글까요?’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할아버지는 ‘조선 천지에 나 죽일 놈은 없다. 걱정하지 말아라’고 하셨거든요.
미 군정청 하지 사령관도 암살 정보를 미리 입수해 걱정스러워서 ‘경호원을 댁에 파견해드리겠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끝끝내 사양하면서 ‘조선 천지에 나 죽일 사람은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 조짐을 가족들이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다 봤는데 참혹하고…”
이 대목에서 송 교수의 떨리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막상 그런 일이 터지니까…, 아버지도 주무시다가 (사랑채로) 뛰어올라가셨는데 이미 늦었죠. 선혈이 낭자하고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가 스무 살 남짓 새댁인데 홑이불 빨랫감을 잔뜩 들고 가서 피를 전부 다 닦아내고…. ‘애들은 보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려 사랑채 출입을 막았지만, 사태 수습에 정신이 없으니까 내가 쫓아가 보는 것까지 막을 수 없으셨거든요.
다 봤는데 참혹하고…, 병풍에도 피가 많이 튀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어요.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어쩌다가 그 장면이 좀 떠오릅니다.”
김형석 이사장은 송상현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뒤 이렇게 다시 질문했다.
“고하의 죽음이 사실은 거기에 장덕수, 여운형, 김구로 이어지는 일련의 암살 사건의 시작이었기에 당시 암살범 한현우의 배후가 누구냐를 두고 의심하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주변인의 증언과 미군정 자료를 근거로 김구가 배후라는 설, ‘임정봉대론(臨政奉戴論)’을 펴며 임정에 정치자금까지 지원해준 고하를 김구가 왜 살해했겠느냐는 설이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혹시 송 교수께서 들으셨거나 또 판단하시는 고하의 암살 배후를 설명해주실 수 있다면…, 이 부분이 예민한 부분이어서….”
여기서 임정봉대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받들어 임정 요인들을 하루빨리 환국하도록 돕고 임정이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말한다. 몽양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 임정의 환국을 기다리지 않고 독주할 때에도 고하는 꿋꿋이 임정봉대론을 지켰었다. 송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백범 배후설
“《국제신문》 1948년 9월 5일 자에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韓賢宇),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사건 박낙중(朴洛鍾) 옥중 인터뷰〉라는 기사가 실려 있지만, 그건 자기들 입장을 변명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서 쓴 글이기 때문에 어디까지 믿어야 할진 모르겠고….
백범 선생이 암살의 배후다, 뭐다 이런 얘기는 아마 당시 수도청장이 장택상(張澤相)이고 경무부장이 조병옥(趙炳玉·1894~1960년) 박사였는데 수사 책임자로서 주변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몰고 간 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당시 재판 판결문을 보면 그 부분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 김구 배후설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가요?
“네, 다 우물우물하고 넘어갔습니다. 할아버지 암살 때도 김구 배후설이 있었고, 장덕수 선생이 암살돼 재판할 때는 백범이 직접 증인으로 불려 나가 재판정에 섰을 정도입니다. 그 일련의 사정이 사람들에게 ‘아, 백범이 배후에 있었구나’ 하는 인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을 거예요.
심지어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가 출간한 책 있죠? 그 책을 보면 안두희가 백범한테 단도직입적으로 ‘고하는 왜 죽였소?’ 이렇게 물어보는 대목이 있습니다.”
안두희의 고백
송 교수가 언급한 안두희의 책은 2020년에 나온 《나는 왜 김구 선생을 사살했나-안두희의 시역(弑逆)의 고민》(타임라인)을 말한다. 안두희가 백범을 저격 사살한 다음 날인 1949년 6월 27일부터 첫 공판일인 8월 4일을 사흘 앞둔 2일까지 쓴 것으로, 6·25전쟁이 끝나고 소령 예편 후인 1954년부터 1년 6개월여 편집 등의 준비를 거쳐 1955년 10월 단행본으로 나왔다. 2020년에 나온 책은 개정증보판이다. 책에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선생님(백범-편집자)! 제게 8·15 기념일을 전후하여 중대한 지령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비 명령은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나(안두희-편집자)의 음성은 높을 대로 높았다. 선생님도 노기등등한 안색으로 안절부절하시면서 고함을 지르신다.
“무어야? 이놈 죽일 놈!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이제는 피차가 사리를 가릴 이지(理知)의 여유를 잃었다.
“여순 반란은 누가 사주한 것입니까?”
“뭐야? 이놈!”
주먹으로 서안을 치신다.
“표 소령, 강 소령(1949년 5월 부대를 이끌고 월북한 표무원·강태무 소령-편집자 주)과 기거를 같이한 놈은 어떤 놈입니까?”
“저런!”
책 뭉치가 날아온다. 얼굴에 맞았다. 나도 주먹을 부르쥐고 고함을 질렀다.
“송진우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벼루가 날아와서 머리를 스치고 뒷벽에 부딪친다.
“장덕수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이놈! 너 이놈!”(하략)〉(60~61쪽)
송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다.
“안두희가 당대 컨트로버셜(controve rsial·논란이 많은)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한 부분이 있어요. 한마디로 ‘내가 죽일 만한 값어치가 있나.’ 그런 걸 이제 물어보러 간 것 같아.”
― 해방 공간 당시 고하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나요.
송 교수는 “할아버지가 사시던 원서동의 좁고 긴 골목(현 창덕궁길)은 늘 이분을 만나려는 남녀노소로 꽉 메어져 있었다”고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1945년 8월로 시계를 돌려놓고 보면 대한민국의 최대 실력자는 고하예요. 왜 그러냐? 정부도 없던 시절에 《동아일보》라는 신문을 홀로 짊어지고 국민한테 소식을 전하고 민족의식을 높이려고 했던 분입니다. 전국에, 그러니까 함경도에서 제주까지 신문 지국이 다 있어가지고 국내 정보와 돈과 인간관계… 이런 걸 다 쥐고 있었죠.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1875~ 1965년) 박사나 임정(요인들)이 귀국하셨을 그 순간에 돈도 한 닢 없고 너무 궁(窮)하고 국내 정보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김구 선생이나 이승만 박사를 따르는 분들도 있었겠으나 이분들한테 미묘한 정보를 전달해드리고 돈을 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신세를 안 질 수가 없는 건데….”
임정 요인들과의 친일 논쟁
송 교수는 고하가 귀국한 이승만 박사와 임정 요인들을 물심양면 후원했다고 했다.
“이승만 박사가 귀국해 돈암장을 마련해서 거처하셨잖아요. 부인이 서양분이니까 (고하가) 임영신(任永信·1899~1977년) 선생을 보내어 음식이나 옷 부분을 전부 책임지게 하고, 또 윤치영(尹致暎·1898~1996년) 선생을 보내어 대외적으로 대변인 역할을 맡기셨죠. 여기다 이 박사한테도 매달 한 5만~15만원 사이의 생활비 내지는 정치자금을 보내드렸던 게 할아버지입니다.
또 임정(요인들)에도 다 보내드렸는데 임정은 수월하게 받지를 않았죠.
임정에 환국지사후원회(還國志士後援會) 기금 900만원인가를 만들어 딱 드리니까, 임시정부 재정부장 조완구(趙琬九·1880~?)가 더러운 돈이라고 하여 돌려보냈을 때 할아버지가 흥분한 어조로 ‘정부가 받은 세금 속에 양민의 돈도 들어 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오. 앞으로 정부 수립 등 이런 큰일을 앞두고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 아오’라고 말씀해 해결하신 일이 있었어요.”
또 1945년 12월 12일 고하가 수석 총무이던 한민당 측에서 임정 요인들에게 “오랫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하셨는데 위로연을 해드린다”며 국일관에서 베푼 귀국환영연에서 지청천(池靑天·1888~1957년), 조소앙(趙素昻·1887~1958년) 등의 임정 요인들이 “친일하지 않고 국내에서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 왔겠느냐”면서 친일 인사 숙청론을 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송 교수의 계속된 얘기다.
“당시 술상 모퉁이에 앉아 있던 신익희(海公 申翼熙·1894~1956년)가 맞장구를 쳐가지고 ‘국내에서 살면서 친일 안 한 사람이 있었겠나? 그거 다 친일파는 이제 나라가 세워지고 그러면 숙청을 해야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와세다대 동창인 장덕수가 옆에 있다가 ‘해공, 그러면 나도 숙청 대상이겠네’라고 하니 신익희는 ‘어디 설산 자네뿐인가?’라는 식으로 말해 언쟁이 벌어졌다더군요.”
“일절 舊怨이 없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고하가 이렇게 나무랐다고 송 교수는 전했다.
“우리가 일반 국민에게 임정을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을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이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두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도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다음은 계속된 송 교수와 김 이사장의 대화다.
김 “송 교수의 말씀은 귀중한 역사의 증언인데 고하의 서거 문제가 한국 현대사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고, 또 이런 기회가 앞으로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암살범 한현우가 최종 선고 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북한 인민군에 의해 석방이 되었어요. 그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다가 5·16이 일어나자 지지하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런 인연으로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고하를 살해한 전과기록도 말소하고, 외교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어요….”
송 “그 중간에 최서면(崔書勉)씨가 있었어요.”
김 “나중에 한현우의 사위 전병민이 김영삼(金泳三·YS) 정부의 정책기획수석으로 발탁되었다가 장인이 고하 암살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사퇴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혹여 어떤 구원(舊怨)이나 암살범에 대한 소회가 있으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송 “한현우는 기록상으로만 아는 이름일 뿐인데, 남겨놓은 기록에 ‘한현우가 결혼을 해서 포천에 가서 뭘 했고, 강원도에 가서 뭘 하다가 실패하고, 또 서울 와서 이리저리 하다가 정치 깡패들하고 같이 어울리고…’ 하여튼 이런 얘기는 그 기록을 봐서 아는 거고요, 언젠가 해방 전후사를 연구하시는 정치학자 몇 분이 두 번이나 도쿄에 사는 ‘한현우를 만나보겠냐’고 내 의사를 물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막 가슴이 떨려서 만날 수 없었어요. 만난들 무슨 얘기를 할지…. 그래서 거절한 일이 있습니다.
또 YS가 집권하면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의 장인이 고하 암살범이란 사실이 알려져서 물러나고 이화여대 연구원이던 한현우의 딸도 결국 직장을 잃고…, 뭐 그렇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연좌제(緣坐制)도 아니고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일절 구원이나 그런 것(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3·1운동과 고하
김 “독립운동가로서 고하의 가장 큰 공적은 3·1운동입니다. 고하는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고 ‘민족대표 48인’으로 지칭되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3·1운동을 처음 계획하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하는 1년 7개월간 미결수로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습니다. 저는 3·1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고하 송진우와 이승훈(南岡 李昇薰·1864~1930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3·1운동 당시 고하의 역할에 대하여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3·1운동 당시 고하의 역할은…’
송 “주권을 빼앗긴 시절 가장 선진적인 지식인이셨어요. 할아버지는 와세다대를 다녔는데,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죽어도 더러운 적군(敵軍)의 땅에 안 묻히려고 귀국해 자결할 장소를 찾다가 한때 스승이던 기삼연(奇參衍·1851~1908년) 선생을 찾아갑니다. 성리학자로 유명한 선비로서 의병대장까지 하신 분이시죠. 그러나 찾아갔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 부모의 다독임도 있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왜놈한테 나라가 병탄(倂呑)이 된 지 근 10년이 가도 조용하다? 세상 사람들이 조선 민족을 뭐라고 그러겠나? 양같이 순하다 할까, 간이고 쓸개고 없는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까….’
중앙학교에서 선생을 하면서 항상 학생들에게 애국적인 역사를 가르치고 학생 조직을 만드셨어요. 늘 조직을 점검하고, 밤에 찾아가거나 비상소집도 해보면서 민족의식을 심으셨어요. 그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나오고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이 터지면서 이걸 이용해 어떻게든 (독립운동을)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신 겁니다.”
고하가 목이 타게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현상윤(幾堂 玄相允·1893~1950년)과 함께 고민하다가 천도교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천도교가 움직여준다면 기독교도 움직일 거야. 그리고 학생 동원은 내가 맡겠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상윤을 최린(古友 崔麟·1878~1958년)에게 보낸다. 송 교수의 말이다.
“할아버지는 천도교를 동원하자면 먼저 천도교의 교주인 손병희(義菴 孫秉熙·1861~1922년) 선생을 포섭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교주의 세 눈동자라고 하는 권동진(權東鎭·1861~1947년)·오세창(吳世昌·1864~1953년)·최린, 이 세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이런 상황에 기당(현상윤)이 고우(최린)를 만나는 것이 첩경일 거라 판단하셨어요. 기당은 평북 정주(定州) 출신으로 평양 대성학교에 다니다가 백오인사건(百五人事件)으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서울로 올라와 최린이 교장으로 있던 보성학교를 다녔습니다. 기당과 고우는 사제지간이었던 겁니다. 기당은 고우를 찾아가 거사에 가담해줄 것을 종용했으나 처음 고우는 회의적인 태도로 말끝을 흐렸다고 해요. 할아버지가 기당을 앞세워 일주일에 평균 두 번꼴로 찾아다니며 권유했고 마침내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접촉해야 3·1운동의 범위가 커진다는 것도 할아버지의 생각입니다. 일각에 최남선(六堂 崔南善·1890~1957년)의 생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할아버지의 생각인 게 맞을 거예요.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밥을 먹으나 잠을 자나 하여간 3·1운동의 성공만을 생각한 사람이니까요.”
“여보, 우리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기독교의 합류에는 남강의 노력이 컸다. 남강은 인촌(仁村 金性洙· 1891~1955년)의 별채이던 계동 김사용의 집에서 고하와 인촌, 기당의 거사 계획을 다 듣고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바로 승낙했다. 이때 인촌으로부터 노잣돈 1000원을 받은 남강은 질풍노도처럼 관서 지방을 두루 순방하며 기독교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송 교수의 말이다.
“남강 선생이 예수교를 포섭하고, 최린 선생이 천도교를 설득했는데 이게 두 종교가 연결이 잘 안 돼. 감리교, 장로교 자기네들끼리도 의견 조율을 해야 하고 기독교 전체적으로 보면 천도교와 접점이 안 이루어지고… 그래서 삐걱삐걱했어요. 게다가 구한말 원로와 명사들을 모두 접촉했지만 다 거절하니까 기운이 팍 가라앉은 거예요.
육당, 고우가 진이 빠져 뒤로 나자빠졌는데 할아버지가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자다가 기당을 깨우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여보 우리가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모가지 댕강 잘려 죽거나 끙끙 앓다가 죽거나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여기까지 됐으니까 나는 하겠어! 나 혼자라도 하겠어!’
그러니까 기당 선생이 ‘그럼 합시다’ 해서 다시 복기(復棋)해 다 살려가지고 3·1운동이 이뤄진 겁니다.”
송 교수는 잠시 숨을 돌린 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에는 정작 선언문을 작성한 육당 이름이 안 들어갔고, 고하도 물론 안 들어가고, 함태영(咸台永·1873~1964년) 선생도 안 들어가고,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여러 분이 안 들어갔어요.
그 이유가 뭐냐? ‘만세 한 번 불러서 독립이 되겠냐?’며, 그러니까 2차, 3차, 4차 3·1운동 배후에 앉아서 학생이나 시민, 상인들을 다 조직을 해가지고 계속 일본인과의 물품 매매를 거절하는 철시(撤市) 운동, 납세 거부 운동, 무슨 노동자 파업 운동, 온갖 있을 수 있는 모든 운동을 다 하기로 짜놓았는데, 그 지휘자가 고하죠. 33인이 절대로 배후를 안 불기로 했는데, 최린이 불었어.
할아버지는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는데 당시 3월이면요, 많이 추웠습니다. 지하실에다 잡아다 놓고 물고문하고 때리고 그래도 안 되니까 옷을 홀딱 벗긴 다음에 전신주 같은 기둥에다가 꽁꽁 묶어놓고는 컴컴한 밤에 훈련된 경찰견으로 하여금 무차별로 물게도 했어요.
우리 집안에서 내려오는 얘기 중 하나가 할아버지가 그때 생식기관을 다쳐서 생식 능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어. 근데 광경을 누가 본 사람 있어? 알 수가 없는 얘기인데 집안에서는 그렇게 내려와요.
그래도 불지 않으니까 물에다 흠뻑 불린 가죽조끼를 입혀요. 그러고 열이 이글이글 나는 석탄 난로 옆에다 앉혀놓거든. 그러면 조끼가 마르면서 몸을 조이기 시작해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이 온대요. 그런 고문을 가해도 이 양반이 불지를 않으니까 대질심문(對質審問)을 한 거예요.
‘다 불었는데 너 혼자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부인해봐야 소용없다.’
‘그 양반들이 분 대로 알아서 하시오.’
그러니까 지금 3·1운동 공판 기록을 보면 거꾸로 됐어요. 손병희나 이런 천도교, 또 기독교 몇 사람이 주동한 걸로 돼 있고 할아버지는 기껏해야 최남선 불러오고, 최린하고 만나고, 남강 선생하고 왔다 갔다 한 것밖에 없는 걸로 돼 있으니까 완전히 주와 종이 바뀐 것이지요. 훗날 정인보(鄭寅普·1892~1950년)와 문일평(文一平·1888~1936년) 선생이 할아버지에게 서너 번 찾아와 3·1운동 전말을 우리한테 구술해주면 바로잡겠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지금 내가 사실을 얘기하면 우리나라가 홀라당 뒤집어진다. 은퇴한 후에 천천히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라고 하셨는데 56세에 암살당하시니 바로잡을 기회가 없으셨죠.”
고하, 아들을 상업학교로 진학시켜
후사가 없던 고하는 송 교수의 아버지 송영수를 내심 양자로 점찍어 놓고 혹독한 일제강점기에 온갖 비밀스러운 임무를 다 시켰다고 한다. 고하의 4남 4녀 형제 중 손위 큰 형님의 3남이 송영수다. 고하의 급서 후 김병로(金炳魯·1887~1964년) 선생의 법률 자문대로 민법에 규정된 사후 입양 조치로 호적상 정식 입양된 후계자가 되었다고 한다.
“당신이 언제 투옥되거나 무자비한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사실상 아버지를 우리 가족의 유일한 생활 책임자로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실은 아버지가 경기중학교에 입학을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 동지들과 주위 부하들이 전부 벌떼같이 일어나가지고 ‘아니, 독립운동가의 아들을 왜놈들이 세운 관립학교에 보내는 게 말이 되냐’고 소리소리 지르는 바람에 못 다녔어요.
그럼 중앙학교에 갔느냐? 중앙학교에 가려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반대하셨어. ‘너는 온 집안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니까 한가하게 인문학교 가서는 안 되고 상업학교 가서 주판을 배우고 손님한테 인사 잘하는 거나 배우면 된다’고 하는 바람에 남대문상업학교에 갔어요. 그게 지금의 동성고등학교야.
남대문상업학교 담임이 장면(張勉·1899~1966년) 총리입니다. 훗날 장면이 제2공화국 총리가 되니까 우리 아버지에게 장관 자리를 제시했는데 완강하게 사양하셨대요.
부자간 맹세를 했기에 그 양반도 정계 진출을 안 했고, 나도 총리를 두 번이나 제의받았지만 거절했고…. 장관, 대법관, 청와대 수석…. 내가 10번은 더 받았어요. 일절 안 갔어요.”
고하의 비극이 손자 송상현 교수로 이어져
― 그 자리에 왜 안 가셨습니까.
“우리는 정치 근처에도 안 가기로 아버지하고 아주 금석맹약(金石盟約)을 했거든. 할아버지의 비극적인 최후를 보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은 할아버지가 걸으신 방법 외에 다른 방법도 많이 있을 거다’고 생각한 거지요.”
― 고하의 비극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네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약주를 좋아하셨거든. 억 병이 되도록 술을 마시곤 통행금지가 지난 시간에도 온 집 안을 다 돌아다니면서 문을 잠그는 거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문을 안으로 걸까요?’라고 여쭸는데 결국 암살당하셨거든. 그게 천추(千秋)의 한(恨)이 돼가지고….
나는 별로 그런 게 없었는데 이제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가끔 자다가 당시 꿈을 꿔요.”
― 고하의 피습 이후 어머니도 굉장히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요새 같으면 스무 살 남짓의 새댁인데 나를 낳고 나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하셨어요. 당시 먹을 게 있나요? 무슨 의사가 있었어요? 복막염으로 항상 고름과 피를 짜내고 복대를 두른 채….”
젊은 며느리로서 13발 중 6발의 총탄을 맞으신 시아버지의 낭자한 피를 말끔히 닦아내고, 현장을 정리한 일, 강추위 속에서 진행된 그 큰 초상을 포함하여 전통적 제례의식의 3년상까지 치러낸 어머니의 초인적 상황 관리는 송 교수에게 한없는 외경의 마음을 갖게 한다고 했다. 어머니 김현수(金賢洙) 여사는 아흔을 맞이한 지난 2009년 여름 세상을 떠났다.
계속된 김 이사장과 송 교수의 대화다.
김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인해 대다수의 지도층 인사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지만, 누구보다도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고하는 총독부의 강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친일 논설이나 친일단체 가입은 물론 많은 사람이 참여했던 친일 강연과 인터뷰조차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처럼 고하는 자기 주관과 소신이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었기에 해방이 되자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세력을 이끄는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습니다.”
“친일 관련 흠결 전혀 없다”
송 “(친일과 관련한 흠결이) 전혀 없었습니다.”
김 “학계에서 관심거리가 되는 게 조선총독부가 1945년 8월 15일, 여운형과 접촉하기 전인 8월 11일에 경기도지사 이쿠다 기요사부로(生田清三郎·1884~1953년)를 통해 고하를 접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쿠다가 고하한테 치안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는데, 이후에도 경기도청으로 초청하거나 집으로 찾아가서 여러 차례 부탁했으나 거절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결국 8월 15일 몽양에게 부탁한 것이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설이 있어요.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엔도 류사쿠(遠藤柳作·1886~1963년)가 1957년에 《국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송 교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송 교수는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무척 격앙되었다.
“고 송건호 선배가 편집 책임을 맡아서 일부 대학 교수들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여러 권 펴냈는데 거기에 보면 ‘고하한테 일제가 접촉했다는 것은 완전히 우익의 조작이다.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 조선총독부 조선인 고관을 했던 이에게 일일이 인터뷰를 해 ‘그때 고하와의 접촉에 대해 소문이라도 들어봤냐’고 물었더니 ‘들어본 일도 없다고 했다’고 썼어요.
내가 하도 우스워서 참…. 반론을 하고 싶지만 합리적으로 반박을 해야지…. 만약 정권을 비밀리에 넘기려면 비밀리에 찾아가서 신속하게 넘기지, 조선인 총독부 고관이라는 게 일개 사무관 정도인데, 식민지 백성인 그런 자들에게 정권 인수 접촉이 알려지게 했겠어? 아니, 당시 우리나라 현실에 놓고 한 번 생각해봐요. 그 사람들이 못 들은 게 그게 당연하지.”
“엉덩이 걷어차면서 ‘不逞鮮人 새끼’ 운운하며…”
계속된 송 교수의 말이다.
“그때가 1945년 8월 11일입니다. 경기도지사인 이쿠다가 왔어요. 서울이 포함된 경기지사입니다. 일본 내각에서 대신을 2~3차례 지낸 정치원로를 보내는 자리입니다. 이쿠다가 조선인 경찰 중에서 제일 높은 자와 함께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통치권의 4분의 3을 줄 테니까 우리가 물러나 80만 재조선 일본인이 떠날 때 그 생명과 재산을 좀 잘 보호해주시오.’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 대일본 제국이 왜 패망을 해? 맨날 승승장구하는데 왜 지나? 그런 말씀 마시오’라고 엉뚱하게 얘기하신 거야. 패전(敗戰) 소식을 다 듣고 있으면서….
그다음에 ‘우리 조선인들은 문화민족이어서 당신네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당신네 재산이고 생명을 빼앗는 그런 야만인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조선 사람들을 믿고 알아서 가세요’ 이러셨어. 그러니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다음에 또 왔어요. 네 번째도 할아버지가 거절을 하거든.”
― 그때도 이쿠다가 왔습니까.
“왔었다고 해요. 근데 1945년 8월이니 굉장히 더울 때 아니에요? 제가 다섯 살인데 하도 더우니까 속옷만 입고 안채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따라온 정복 입은 경찰이 또 거절을 당해 화가 나니까 내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불령선인(不逞鮮人) 새끼’ 운운하며 큰소리로 욕을 했어요. 날씨가 더웠지만 가죽 장화에 긴 칼을 차고 있었어요.
어린 나는 무방비 상태로 걷어차여 앞으로 고꾸라져가지고 토방 댓돌에 턱을 부딪치는 바람에 크게 다쳤습니다. 여기가(턱이) 다 없어졌어. 당시 약이 있어요? 굶어 죽을 판인데. (종로구) 재동 부근 김웅규 외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데 소위 빨간 소독약을 바르는 것밖에 없지. 여러 해 동안 치료를 받았거든요. 오래갔어요.”
― 송 교수께서 그렇게 턱을 다친 것도 굉장히 중요한 1차 사료거든요.
“강○○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해방 공간을 묘사하는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 나를 찾아왔어. ‘바로 그 점이 어떻게 됐냐’고 물어서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이야기했거든. 열심히 얘기를 했는데 이자가 소설을 쓰면서 그 부분을 우물우물 흐려버렸어.”
송 교수는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찬 이가 일제 총독부에서 관리(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편집자)를 했던 전봉덕(田奉德·1910~1998년)”이라고 했다.
― 어린 나이였는데 그 이름을 어떻게 안 겁니까.
“아버지가 나중에 얘기를 해줬지. 나이가 (아버지와) 아마 비슷할 거예요.”
― 현장에서의 기억이 생생하신 거군요.
“경찰복 정장 차림에 칼도 차고….”
송 교수는 “고하의 해방 전 일제에 의한 정권 인수 교섭은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깝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런 교섭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고하를 깎아내린다. 물론 이 교섭이 일제가 고하에게 ‘통째로 정권을 내줄 테니 어서 받아라’는 식의 교섭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송 교수는 몇 가지 정황을 들어 설명한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일본 경찰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되기 며칠 전부터 우리 집 주위의 감시망에 이상한 움직임이 보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총독부 고위인사들이 할아버지와 면담하고자 자주 몰래 원서동 집에 드나든 것, 할아버지를 따르는 다른 분들, 예컨대 김준연(전 법무장관), 설의식(薛義植·1900~1954년) 등에게도 일본인들이 할아버지의 생각과 동향을 면밀하게 물어본 것 외에도 내가 직접 봉변을 당했으니까요.”
‘내가 결국 장물아비가 되고…’
해방 직전 일제가 조선의 지도자를 모두 죽이고 철수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고하는 미리부터 병이 깊어 운신을 못 하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송 교수의 계속된 설명이다.
“할아버지는 삼복더위에도 사랑채에서 솜이불을 겹겹이 둘러 싸매고서 아픈 게 아니라 아픈 척을 하신 거야. 그러고 한약을 달여. 근데 풍로에 부채질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야. 20대 여자가 말이야. 당시 집안에 찬모, 청지기가 수두룩한데도 왜놈들한테 매수됐을지 몰라 못 맡겼던 거지.
한번은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쿠다가 찾아오니까 할아버지가 딱 일어나서 이랬대요. ‘당신네가 우리한테서 주권을 빼앗아 간 강도인데 그 주권을 나한테 일부고, 전부고 간에 넘겨주면 내가 결국 장물아비가 되는 거고, 나중 우리 국민을 볼 면목이 사라진다. 해방이 되면 정부도 수립해야 하고, 한일 간에 국교도 터야 하는데, 나같이 일본을 잘 아는 지도자 하나쯤은 남겨두는 게 너희한테도 유리할 거다.
그리고 권력은, 통치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서 행사하지 않으면 부적법하다. 너희가 무슨 권한이 있어 나한테 무슨 통치권을 주고 말고 하느냐.’
이쿠다가 듣고 보니 그 말이 옳거든. 그러니까 할 말이 없는 거야.”
제헌의원인 이상돈(李相敦·1912~ 1997년)이 1990년 4월 4일 자 《조선일보》 10면에 기고한 〈내가 겪은 체험 내가 본 사건〉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70 노령인 경기도지사 이쿠다(生田)로 하여금 고하를 초청, 경기도지사실에서 고하와 김준연(金俊淵)을 만나게 주선했다.
그들 역시 일본이 항복한 후에 조선의 치안과 통신·방송·신문 등을 맡아서 평화적으로 일본 거류민이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하는 초지일관,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이와 같은 뚜렷한 사실에 대해 8·15 해방 전후사를 연구하는 일부 젊은 학자 중에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총독부에서 고하에게 정권 인수를 교섭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그 논거로 당시 총독부 사무관(과장)으로 있던 조선 사람 최(崔)모의 증언과 그때 정무총감 원등(遠藤)의 증언을 들고 있다. 일개 총독부 사무관인 조선 사람에게 치안권 인수 교섭을 추진 하기에는 사안이 너무도 중요한 만큼 일인 수뇌부에서 은밀히 직접 교섭했었음은 상식에 속할 것이다.〉
이 전 의원은 1949년 제헌의원이 된 후 5대, 6대 국회의원을 거치면서 줄곧 야당의 길을 걸은 강골 정치인이었다. 그는 “고하, 설산, 몽양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의 전횡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독재도 못 했을 것이며, 김구 선생 등 임정파와의 사이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정치의 비극의 시작”이라고 했다.
역사책에서 사라진 고하
송 교수는 어린 시절 고하의 원서동 집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찬 일제 헌병의 실체에 대해 고백했다.
“내 엉덩이를 찬 전봉덕, 이자가 1960년대 대한변협 회장도 하고, 딸이 시인 전혜린이야.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LA에서 살다가 89세에 죽었어. 내 젊은 시절 육군본부 법무관을 할 때 국가 소송사건 기록 보따리를 짊어지고 서소문 법원에 갔는데 변호사 공실(控室)에 그가 있더라고. 그 사람은 내가 고하의 손자라는 사실을 몰랐고, 나 역시 그런 말을 안 했어.”
김형석 이사장의 말이다.
“지금 역사학계에서 나온 논문은 대부분 좌파적인 입장에서 쓴 논문이기 때문에 고하로부터 시작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하는 좌익까지 포함하는 포용적 인물이었고,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굳이 얘기하자면 중도 우파 정도의 입장에서 좌파까지 다 포용하는…. 그래서 저는 윤석열 정부의 국민 통합적 관점에서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국민통합적 모델로 볼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 고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송 교수의 답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 이름이 곧잘 역사책에 나왔고, 역사시험에 출제되기도 했어요. 그러나 지금 역사책을 보면 할아버지 이름이 없어. 전혀 없어요.”
“민족적 민주주의자”
고하의 사상은 온건한 자유민주주의자였으나 이념에 갇혀 있지 않고 포용력이 넓었다. 테러의 흉탄에 맞아 숨지기까지 불과 127일간 그의 정치 행적은 왜정 인계 거부-중경 임정 추대-법통주의 건국-미군정과의 협조-이승만 초대 건국의 기초 구축 등으로 연결된다. 송 교수의 말이다.
“박명림이라는 정치학자(연세대 교수)가 있는데 할아버지를 ‘중용적 진보주의자’라고 평하더군요. 또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학준 전 의원은 ‘민족적 민주주의자’라고 평합니다.
정치인 중에 포용력이 그렇게 큰 사람은 없을걸요? 항상 하시는 말씀이 ‘야, 천연두로 얼굴이 빡빡 얽은 여자도 잘 들여다보면 예쁜 구석이 있어.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고 자꾸 배제하면 안 돼’였어요.
요새 식으로 하면 ‘덧셈 정치’를 하신 분이죠. 한국민주당을 만들 때 사회주의자들인 북풍회, 화요회 계통의 인사들도 들어왔어요. 뿐만 아니라 전진한(錢鎭漢·1901~1972년)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일평생을 노동운동만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 있는데 정문헌 종로구청장의 외할아버지예요. 그 노동운동가가 한민당 발기인이야. 그렇게 고하가 리더십을 발휘할 때는 박헌영이 만든 조선남로당의 당원만 아니면 다 한민당에 들어오다시피 했어요. 고하의 생각이 몹시 선진적이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기간산업의 국유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 사형제 폐지 등 요즘에는 상식화된 입장이지만 그때는 파격적인 주장이었어요.
할아버지가 포용력이 있고 프로미넌트(prominent·유명)했거든요. 그러니까 다 할아버지한테 매달렸어요. 해방 이후 127일까지 완전히 고하의 정치판인데 인촌은 거기에 없습니다. 일부 학자가 고하의 활동 기간과 돌아가신 후 인촌이 한민당 당수를 이어받아 쭉 활동한 것을 훗날 믹스를 해가지고….”
― 해방 공간 행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말씀이군요.
“해방이 될 그 무렵에 인촌과 고하 두 분이 만났을 때 고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인촌. 자네는 주렁주렁 사업이 많아. 괜히 여기 있다가 퇴각하는 왜놈들이 우리(조선 지도자들)를 몰살시킬 때 죽거나 붙잡히면 안 돼. 그런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피해 있어.’
인촌 선생이 ‘고하, 자네는 어떡하려고’ 하니까 고하는 ‘난 원래 몸뚱이밖에 없고 몸뚱이 하나로 이렇게 해온 사람이니까 몸뚱이로 버티고 있으면서 조국이 해방되는 걸 봐야지.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자네는 낙향이라도 하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촌이 낙향하시고 서울에 안 계셨어요. 그렇게 8·15 날부터 12월 30일까지 ‘해방 공간 127일’은 완전히 고하의 정치판으로 이 기간 동안 인촌은 대부분 서울에 없어요
인촌 기록이 나오는 게 그해 9월 4일, ‘임정 및 연합군 환영회’를 고하가 조직하며 위원장에 권동진 선생을, 부위원장에 인촌을 시키고 그리고 또 부위원장 하나를 좌파를 시켜야 되니까 허헌(許憲·1885~1951년)을 시키고… 그때 한 번 인촌 이름이 나옵니다. 인촌은 서울에 많이 안 계셨어요. 고하는 당시만 해도 국회가 없으니 국민대회를 열어 국민이 위임을 해주면 적법하게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9월 6일 국민대회 준비회를 만들어요. 그때도 인촌의 이름이 없습니다.”
“우남이 제일 먼저 輓章 써서 보내”
김형석 이사장이 고하와 이승만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 고하는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했다가 이승만과 인연을 맺습니다. 1945년 10월 20일 환국지사 환영위원회를 결성하고 이승만이 귀국하자 독지가들과 사재를 모아 돈암장을 거처로 마련해줍니다. 두 분 관계를 어떻게 바라봅니까.
송 교수는 고하의 입장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이 박사가 귀국하신 후 돈암장을 마련해드리고, 자기 사람들을 보내어 수발을 들고 대변인 역할을 맡겼으며 한 달에 한 5만~15만원씩을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또 ‘한국민주당의 당수로 취임을 좀 해주십시오’라고 했지만 ‘조선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정당을 합해서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라. 내가 의장이고 제 정당은 다 들어와라’ 해서 한민당과 여운형, 안재홍(安在鴻·1891~1965년)까지 다 들어갔는데 될 리가 있어요? 잡탕을 다 막 그렇게 모아놓고 아무 원칙도 없이 그게 됩니까? 안 되지.
그러니까 이 박사가 그냥 죽을 쑨 거야. ‘내가 나다’ 하면 다 따라올 줄 알았는데 아니거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돈암장에 드나들지를 않아 한순간에! 그게 세상인심이거든. 그러니까 우남이 고하를 찾아왔어. 그해 11월 하순, 낙담을 하며 그간 자신의 행태를 좀 반성하듯이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무 욕심을 많이 내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나이가 70이 넘었고 눈이 파란 사람이 부인이니 국민들이 이걸 제대로 수용하겠나. 그러니까 연부역강(年富力強)한 고하가 맡아서 하시면 내가 뒤에서 도와드릴 테니 책임지고 하시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이고,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그 전보다 더 잘 모시고 더 보살펴드릴 테니 절대로 주눅 들지 말고 꿋꿋이 나가십시오.’
할아버지는 나름 현재 시국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로는 이승만이 최선이라고 평소 믿어 왔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사이가 괜찮았어요.
이미 그때도 따르는 사람 중에 할아버지 듣기 좋으라고 ‘이승만이 호랑이인 줄 알았더니 고양이만도 못하다’고 깎아대는 놈이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이승만한테 가서는 ‘고하가 저래도 자기 욕심이 꽉 찬 사람’이라고 막 깎아내리는…. 그래도 두 분은 그런 말에 현혹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우남이 제일 먼저 한시 만장(輓章)을 써서 보내셨어. 서울어린이대공원(서울 광진구 능동로 216)의 고하 동상 앞에 이 박사의 만장을 새겨 놨거든. 그게 1983년인데 한민당 할아버지 일부가 ‘이승만 독재자 것을 해놨다’고 욕하고… 참 민망하더라고.”
“의인은 예부터 자기 명에 죽는 경우가 드물고…”
고하를 추모하며 쓴 우남의 만장은 이렇다.
〈의인은 예부터 자기 명에 죽는 경우가 드물고(義人自古席終稀)
한번 죽는 것을 심상히 여겨 마치 제집으로 돌아가듯 한다.(一死尋常視若歸)
나라 안이 모두 슬퍼하고 처자들도 우는데(擧國悲傷妻子哭)
섣달그믐 망우리에는 눈만 부슬부슬 뿌리는가.(臘天憂里雪罪罪)〉
고하는 망우리에 묻혔다가 훗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김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독립운동한 분들을 더 우월적으로 평가하고 국내에서 탄압과 감시를 무릅쓰고 지조를 지키면서 2000만 조선 민중을 지키기 위해 애쓴 분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가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송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다가 귀국하신 분들은 ‘혹독한 일제 탄압을 받으며 조선 땅에 살면서 친일을 안 하고 버텼겠어?’라고 치부하시는 태도를 보이는데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생각해요.
소위 좌파 쪽 사람들이 일부 좌파나 해외파 지도자들의 친일 기록을 감쪽같이 감춰서 아무도 몰라요. 이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지. 언제고 뭐 다 기록 있으면 드러날 건데…. 할아버지의 자료집을 펴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김 “《거인의 숨결》에 고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조병옥 나의 회고록》에 나오는 김규식(金奎植·1881~1950년), 여운형, 안재홍 세 사람의 친일 행적에 관한 얘기를 실은 이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송 “네. 그렇습니다.”
김 “제가 대학에 다닐 때(1970년대)만 해도 국내 민족운동과 국외 무장운동이 5대 5의 평가를 받았다면 요즘은 국내 민족운동가들은 전부 친일 또는 친일과 가까운 무리로 몽땅 넣어버리고 국외의 무장 독립운동만 인정합니다.
‘100년 전쟁’ 프레임을 만들어 대한민국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좌편향적인 사관에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또 우파 민족운동가들의 공적도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독립운동단체에 비밀리에 송금
송 “상하이와 만주 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활동하신 애국지사, 러시아 극동에서 독립 쟁취의 수단으로 공산주의자가 되긴 했으나 독립을 위해 진력한 분들이나, 미주나 하와이로 건너가 한반도 강점은 불법이라고 세계만방에 알린 분들이나 모두 노력하며 업적을 많이 내셨어요.
제가 주장하고 싶은 건 이분들이 해외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하든 국내 독립운동 그룹이나 사람들과 연결이 돼 있었어요. 국내에서 이분들을 돕지 않았다면 해외 독립운동의 효과는 반감되지 않았을까요?
혼자 해외에서 떠들어봤자 국내에서 뒷받침을 안 하면 가능하겠어요? 그 뒷받침한 국내 중심세력의 으뜸이 고하거든요. 정부가 없던 시절에 중심을 잡아줬기 때문입니다.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후 독립운동사 편찬 사업을 주도했던 이강훈(李康勳· 1903~2003년) 전 광복회장은 분명히 고하로부터 거액의 독립자금을 네 차례나 송금받은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증언한 일이 있습니다.”
기자는 당시 기록을 찾아보았다. 이강훈 선생은 ▲1926년 5월 모란역에서 6천원 ▲1928년 9월 돈화현(敦化縣) ‘얼토량쯔’에서 상당 액수 ▲29년 2월 만주의 산시(山市)에서 소만(蘇滿) 국경으로 본부를 이동하려 할 때 1만원 ▲1930년 1월 27일 김 장군이 돌아가자 만장과 함께 일화(日貨) 10원짜리로 1만원 등 확실히 기억하는 것만도 네 차례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이 밖에도 고하가 다른 독립운동단체에도 비밀리에 자금을 송금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증언한 일이 있다.
계속된 송 교수의 말이다.
“당시 국내 세력들은 뭘 했냐? 독립자금을 마련해 해외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해외 한인신문을 낼 때 한글로 읽을 수 있게 금속 한글활자를 보냈어요. 고하는 신문사 사장이어서 이것을 쉽게 구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일본 순사의 뺨을 한 대 때려도 크게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북 치고 장구 치고 대문짝만 하게 신문에 내어주던 언론의 힘도 컸어요. 국내 독립운동 세력이 이 해외에서 풍찬노숙하고 참 애쓰신 분들을 뒷바라지해드린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요즘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다.
―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대한 덕담을 하신다면?
“내가 결혼 주례를 했어요. 한 장관의 아내인 진은정 변호사는 법대 한 해 밑이지. 어떻게 둘이 만나서 가연(佳緣)을 맺어 주례를 하게 됐어요. 제가 아끼고 촉망 받는 제자 부부지요. 한 장관 부모님보다 진 변호사 부모님을 더 잘 알죠. 진 변호사 아버지가 검사장도 하고, 친정어머니는 내 처제와 동창이라서 잘 알죠.”
“윤 대통령, 인재 풀 넓혀야”

― 지금 한 장관이 잘하고 있습니까.
“잘하죠. 그만큼 똑똑한 사람이 또 있겠어? 그러면 똑똑할수록 좀 숙이고, 덕을 쌓고, 살아가면서 그런 게 필요한 거지.
나도 그렇게 못 할지 모르지만 보통 ‘똑똑이’들이 덕을 쌓고 겸손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지. 지금도 잘하지만….”
― 역대 정권이 바뀌고 사정(司政) 정국이 되면 서울 법대 출신들이 이런저런 책임을 지고 우르르 나가고, 새로 들어오는 서울 법대 출신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우리나라 엘리트 충원 과정이 서울 법대 중심으로 너무 이루어졌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내년에는 검사 출신들이 대거 출마한다는 설도 있고.
“윤 대통령이 검사 출신이니까 아무래도 충분히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바깥보다는 검찰 내부에 더 많이 있으니까 팔이 안으로 굽어서 그런 사람을 더 쓸 거 아니겠어요? 근데 노력은 많이 해야 되겠지. 인재 풀을 넓혀서 여러 사람을 쓰면 좋겠죠. 그것이 제일 요체가 아닌가 싶어요.
서울 법대 출신들도 다 똑똑한 건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못지않게 똑똑하니까. 또 특이한 경험도 쌓았을 거고, 전문성도 여러 가지로 있을 거고, 그러면 넓게 보고 넓게 사람들을 등용하고 하는 게 필요하겠죠. 뭐 앞으로 잘하겠죠.”⊙
해방 공간, 좌우 이념의 갈등이 극심할 때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려 했던 지도자가 있다.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년) 선생이다. 혹자는 이 시대의 좌우 갈등을 해방 공간에 빗대기도 한다.
고하는 당시 들불처럼 번지던 사회 주의 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건설의 구심점 역할을 한 애국지사이자 정치사상가였다. 그러나 무뢰한의 흉탄으로 1945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장덕수(雪山 張德秀·1895~1947년), 여운형(夢陽 呂運亨·1886~1947년), 김구(白凡 金九·1876~1949년) 등의 암살이 이어졌다. 어쩌면 고하가 살아 있던 ‘해방 공간 127일’, 8월 15일에서 타계(他界)한 12월 30일까지는 자유민주주의를 씨 뿌리려던 몸부림의 시간이었다.
지난 10월 31일 서울 마포구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사무실에서 송상현(宋相現)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고하의 친손자가 바로 송 교수다. 그는 지난 8월 고하가 남긴 글과 관계자료집을 집대성한 《거인의 숨결》(1128쪽)을 펴냈다. 작년에는 고하의 일대기를 담은 《독립을 향한 집념》(758쪽)을 출간했다.
古下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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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 송진우 선생의 업적과 일생에 대해 대담 중인 (재)대한민국역사와미래 김형석 이사장과 송상현 교수. 사진=조준우 |
윤 대통령의 신념인 자유와 민주주의는 스승인 송 교수의 가르침에서, 그리고 더 거슬러 가면, 단언컨대, 고하의 강철 같은 자유민주주의 열망이 손자인 송 교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게다가 유년 시절, 송 교수는 조부의 비극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지금도 트라우마로 괴로워하고 있다.
기자는 고신대 석좌교수이자 (재)대한민국역사와미래 김형석(金亨錫) 이사장의 도움을 받아 고하의 사상을 좀 더 들여다보았다. 김 이사장은 《끝나야 할 역사전쟁》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광주, 그날의 진실》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등을 펴낸 역사학자다. 기자는 김 이사장과 송 교수의 대담을 지켜보며 몇 가지 보충 질문을 던졌다.
김형석 “12월 30일은 송진우 선생의 기일(忌日)입니다. 고하는 해방 직후 우파, 즉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시던 분입니다. 비극의 현장에 같이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기억나시는 대로 들려주십시오.”
송상현 “집안 얘기를 꺼내기 면구스러워 잘 얘기하지 않았죠. 충격적인 장면이기에 지금 이 나이가 되어도 견디기 어려운 때가 더러 있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천자문이나 사서삼경 등을 굉장히 엄하게 가르치셨는데, 그때마다 단군, 을지문덕,강감찬, 이순신 등의 얘기를 열성적으로 들려주셨죠. ‘서울 원서동 74번지’ 할아버지 사랑채에서 같이 자고 겸상을 하는 게 손자의 큰 특권이었어요.
이분은 꼭 저를 데리고 같이 주무셨는데 어린아이를 다룰 줄 잘 모르셔서 가령 손자가 떼를 쓰면 굉장히 당황해하시던 기억이 있어요.”
― 또래처럼 떼도 부렸습니까.
송 “그럼요. 보리서리, 참외서리 하던 기억도 납니다. 동네 친구들이 다 나이가 나보다 많았지요. 서리할 때 꼬마인 나를 ‘새니(상현이)’라고 부르며 잘 거두어주었어요. 서리한 보리는 불에 그슬려 먹었는데 먹다 보면 입 주위가 새카매지거든. 내 입을 씻겨주며 형제자매가 없는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었어요.”
‘원서동 74번지’ 고하 할아버지 댁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무네미, 말미, 쌍감리(쌍문동), 벌리(번동)를 지나 창동까지 수없이 뛰어다녔다고 했다.
“무네미는 ‘물 넘어’라는 뜻입니다. 현재 수유동의 가운데 글자가 ‘뛰어넘을’ 유(踰)자거든. ‘물을 뛰어넘는다.’ 왜놈들이 동네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그렇게 된 거지.”
신탁통치 결정과 경교장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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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18일 중앙고보 제1회 졸업식 모습이다. 왼쪽부터 김성수, 최두선, 송진우, 현상윤 선생. 사진=송진우선생 기념사업회 |
그해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 회의의 결정이 전해지면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조선의 독립을 5년간 유예해 신탁통치(信託統治)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할아버지랑 같이 자는데 그날은 그러지 못했어요.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경교장(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에서 모든 정파(政派)가 다 모여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회의가 늦게까지 열렸거든요.
할아버지도 장택상(滄浪 張澤相·1893~1969년), 김준연(朗山 金俊淵·1895~1971년) 같은 분들과 함께 가셨는데 당시 고도의 감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독립이 겨우 왔는데, 나라를 세우기도 바쁜데, 그걸 막고 신탁통치를 한다’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드센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흥분해 있을 때, 할아버지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좀 흥분을 가라앉혀라. 여기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의문을 내가 가지고 있다. 여기 만당(滿堂)하신 정치 지도자 중 이 결의문을 읽어 본 분도 있겠지만 보지 않았다면 나와서 한 번 읽어봐라. 보지 않고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데 진정들 좀 해라.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지도자답게 대책을 세우자.’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일부 흥분한 정치인이 ‘그럼 고하 당신은 찬탁(贊託)하자는 말이오? 당신 미쳤소?’ 그러자 할아버지가 한 말씀 더 하셨지요.
‘짚신감발을 하고 죽창 들고 미 군정청을 축출해서라도 독립해야 한다고 많은 분이 감정적으로 얘기하시는데 지금 한반도 정세를 보면 박헌영(朴憲永·1900~1955년)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죽창으로 미군정을 쫓아내면 그 즉시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정치인은 없더랍니다.”
강원용의 목격담
고하는 결코 신탁통치에 찬성한 일도 없고 지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미군정하에서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서 정권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독립정부를 세우고 정권을 인수해야 된다는 게 고하의 지론이었다. 이것을 찬탁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송 교수는 역사적인 자료,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선친인 송영수(宋英洙·1912~1988년)의 회고 등을 종합해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더는 얘기가 안 통한다 생각하시고 가만히 앉아 계셨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고하 당신은 찬탁을 하자는 얘기구만. 우리하고는 얘기가 안 되겠네’ 하더랍니다.
당시 경동교회 강원용(姜元龍·1917~ 2006년) 목사님이 직접 이 광경을 목격하셨는데, 그분 회고록을 보면 ‘수백 명의 정치지도자 중에서 참 특이한 한 분’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특이한 분…. 강 목사님은 그때 서른 살이 채 안 되었고 고하가 누군지 관심이 없었지만, 첫인상이 강렬했다고 해요.”
강원용의 회고록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고하는 ‘여러분들이 격한 것을 이해하지만, 3상 회의 결정문을 읽어본 사람이 누가 있느냐, 나도 라디오로 들었는데, 민족의 지도자들이 방송에서 나은(나온) 것만 듣고 이렇게 막 들고 일어나는 것은 신중치 못하다’고 말했지요. 그는 또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과 의논해 5년 이내에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내용이 진짜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좌익 사람들이 ‘역적이다. 너희가 미국과 짜고 하는 게 아니냐’며 욕설을 퍼부어댔습니다.
고하는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튿날 새벽 암살당했습니다. 나도 당시엔 고하를 오해했는데 세월이 지나서 보니까 그분이 정세 판단을 가장 정확하게 한 것임을 깨닫게 됐어요. 사실 정확한 내용도 모른 채 방송만 듣고 전 민족의 지도자들이 나선 것은 경박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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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말 어느 날. 피습 수일 전의 송진우 선생의 모습이다. |
〈“내게 지금 세월이 흘러갈수록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겨준 사람은 그 사람(송진우-편집자)이고…, 모두들 소리소리 지르고 난장판이 벌어지는데, 모두 그저 흥분해가지고 서로 욕설을 하고 이렇게 야단치는데 이 양반이 가만히 앉았다가 일어서서, 이제 정중하게 그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가 지금도 나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송 교수의 말이다.
“강 목사님 주장은 이정식 교수 등의 연구에서도 확인되고 일치하는 증언입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몰아세워서 갑자기 찬탁분자가 되셨고, 그다음 날 아침에 암살을 당하셨거든요. 손쓸 여지가 없이 이루어진 거죠.”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그날 오전 6시15분인데 그 6명의 무뢰한이 담을 넘어 원서동 집에 들어와가지고 사랑채…. 사랑채라는 게 크지도 않고 방 한 칸인데 보통의 경우라면 저랑 같이 자는데 그날따라 아래층에서 미리 잠들어버렸어요. 경교장 회의가 끝나고 할아버지가 같이 주무실 손님이랑 오셨는데, 이튿날 오전 6시15분쯤 되어 총성이 나서…. 그때 정종근(鄭鍾根)이라고 당시 나이로 26세 먹은 호위 경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뜰 아래채 모퉁이 방에서 잤는데 총성이 울리자 총을 빼 들고 뛰어올라갔어요.
사실 아버지가 12월 초순부터 시내에 이상한 소문이 파다해 할아버지한테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글까요?’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할아버지는 ‘조선 천지에 나 죽일 놈은 없다. 걱정하지 말아라’고 하셨거든요.
미 군정청 하지 사령관도 암살 정보를 미리 입수해 걱정스러워서 ‘경호원을 댁에 파견해드리겠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끝끝내 사양하면서 ‘조선 천지에 나 죽일 사람은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 조짐을 가족들이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다 봤는데 참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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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30일 서울 원서동 74번지 고하의 사랑채 모습이다. 병풍에 핏자국이 보인다. |
“막상 그런 일이 터지니까…, 아버지도 주무시다가 (사랑채로) 뛰어올라가셨는데 이미 늦었죠. 선혈이 낭자하고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가 스무 살 남짓 새댁인데 홑이불 빨랫감을 잔뜩 들고 가서 피를 전부 다 닦아내고…. ‘애들은 보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려 사랑채 출입을 막았지만, 사태 수습에 정신이 없으니까 내가 쫓아가 보는 것까지 막을 수 없으셨거든요.
다 봤는데 참혹하고…, 병풍에도 피가 많이 튀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어요.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어쩌다가 그 장면이 좀 떠오릅니다.”
김형석 이사장은 송상현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뒤 이렇게 다시 질문했다.
“고하의 죽음이 사실은 거기에 장덕수, 여운형, 김구로 이어지는 일련의 암살 사건의 시작이었기에 당시 암살범 한현우의 배후가 누구냐를 두고 의심하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주변인의 증언과 미군정 자료를 근거로 김구가 배후라는 설, ‘임정봉대론(臨政奉戴論)’을 펴며 임정에 정치자금까지 지원해준 고하를 김구가 왜 살해했겠느냐는 설이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혹시 송 교수께서 들으셨거나 또 판단하시는 고하의 암살 배후를 설명해주실 수 있다면…, 이 부분이 예민한 부분이어서….”
여기서 임정봉대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받들어 임정 요인들을 하루빨리 환국하도록 돕고 임정이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말한다. 몽양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 임정의 환국을 기다리지 않고 독주할 때에도 고하는 꿋꿋이 임정봉대론을 지켰었다. 송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국제신문》 1948년 9월 5일 자에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韓賢宇),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사건 박낙중(朴洛鍾) 옥중 인터뷰〉라는 기사가 실려 있지만, 그건 자기들 입장을 변명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서 쓴 글이기 때문에 어디까지 믿어야 할진 모르겠고….
백범 선생이 암살의 배후다, 뭐다 이런 얘기는 아마 당시 수도청장이 장택상(張澤相)이고 경무부장이 조병옥(趙炳玉·1894~1960년) 박사였는데 수사 책임자로서 주변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몰고 간 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당시 재판 판결문을 보면 그 부분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 김구 배후설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가요?
“네, 다 우물우물하고 넘어갔습니다. 할아버지 암살 때도 김구 배후설이 있었고, 장덕수 선생이 암살돼 재판할 때는 백범이 직접 증인으로 불려 나가 재판정에 섰을 정도입니다. 그 일련의 사정이 사람들에게 ‘아, 백범이 배후에 있었구나’ 하는 인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을 거예요.
심지어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가 출간한 책 있죠? 그 책을 보면 안두희가 백범한테 단도직입적으로 ‘고하는 왜 죽였소?’ 이렇게 물어보는 대목이 있습니다.”
안두희의 고백
송 교수가 언급한 안두희의 책은 2020년에 나온 《나는 왜 김구 선생을 사살했나-안두희의 시역(弑逆)의 고민》(타임라인)을 말한다. 안두희가 백범을 저격 사살한 다음 날인 1949년 6월 27일부터 첫 공판일인 8월 4일을 사흘 앞둔 2일까지 쓴 것으로, 6·25전쟁이 끝나고 소령 예편 후인 1954년부터 1년 6개월여 편집 등의 준비를 거쳐 1955년 10월 단행본으로 나왔다. 2020년에 나온 책은 개정증보판이다. 책에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선생님(백범-편집자)! 제게 8·15 기념일을 전후하여 중대한 지령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비 명령은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나(안두희-편집자)의 음성은 높을 대로 높았다. 선생님도 노기등등한 안색으로 안절부절하시면서 고함을 지르신다.
“무어야? 이놈 죽일 놈!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이제는 피차가 사리를 가릴 이지(理知)의 여유를 잃었다.
“여순 반란은 누가 사주한 것입니까?”
“뭐야? 이놈!”
주먹으로 서안을 치신다.
“표 소령, 강 소령(1949년 5월 부대를 이끌고 월북한 표무원·강태무 소령-편집자 주)과 기거를 같이한 놈은 어떤 놈입니까?”
“저런!”
책 뭉치가 날아온다. 얼굴에 맞았다. 나도 주먹을 부르쥐고 고함을 질렀다.
“송진우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벼루가 날아와서 머리를 스치고 뒷벽에 부딪친다.
“장덕수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이놈! 너 이놈!”(하략)〉(60~61쪽)
송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다.
“안두희가 당대 컨트로버셜(controve rsial·논란이 많은)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한 부분이 있어요. 한마디로 ‘내가 죽일 만한 값어치가 있나.’ 그런 걸 이제 물어보러 간 것 같아.”
― 해방 공간 당시 고하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나요.
송 교수는 “할아버지가 사시던 원서동의 좁고 긴 골목(현 창덕궁길)은 늘 이분을 만나려는 남녀노소로 꽉 메어져 있었다”고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1945년 8월로 시계를 돌려놓고 보면 대한민국의 최대 실력자는 고하예요. 왜 그러냐? 정부도 없던 시절에 《동아일보》라는 신문을 홀로 짊어지고 국민한테 소식을 전하고 민족의식을 높이려고 했던 분입니다. 전국에, 그러니까 함경도에서 제주까지 신문 지국이 다 있어가지고 국내 정보와 돈과 인간관계… 이런 걸 다 쥐고 있었죠.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1875~ 1965년) 박사나 임정(요인들)이 귀국하셨을 그 순간에 돈도 한 닢 없고 너무 궁(窮)하고 국내 정보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김구 선생이나 이승만 박사를 따르는 분들도 있었겠으나 이분들한테 미묘한 정보를 전달해드리고 돈을 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신세를 안 질 수가 없는 건데….”
임정 요인들과의 친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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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가 살던 서울 원서동 74번지 사랑채의 모습이다. |
“이승만 박사가 귀국해 돈암장을 마련해서 거처하셨잖아요. 부인이 서양분이니까 (고하가) 임영신(任永信·1899~1977년) 선생을 보내어 음식이나 옷 부분을 전부 책임지게 하고, 또 윤치영(尹致暎·1898~1996년) 선생을 보내어 대외적으로 대변인 역할을 맡기셨죠. 여기다 이 박사한테도 매달 한 5만~15만원 사이의 생활비 내지는 정치자금을 보내드렸던 게 할아버지입니다.
또 임정(요인들)에도 다 보내드렸는데 임정은 수월하게 받지를 않았죠.
임정에 환국지사후원회(還國志士後援會) 기금 900만원인가를 만들어 딱 드리니까, 임시정부 재정부장 조완구(趙琬九·1880~?)가 더러운 돈이라고 하여 돌려보냈을 때 할아버지가 흥분한 어조로 ‘정부가 받은 세금 속에 양민의 돈도 들어 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오. 앞으로 정부 수립 등 이런 큰일을 앞두고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 아오’라고 말씀해 해결하신 일이 있었어요.”
또 1945년 12월 12일 고하가 수석 총무이던 한민당 측에서 임정 요인들에게 “오랫동안 풍찬노숙(風餐露宿)하셨는데 위로연을 해드린다”며 국일관에서 베푼 귀국환영연에서 지청천(池靑天·1888~1957년), 조소앙(趙素昻·1887~1958년) 등의 임정 요인들이 “친일하지 않고 국내에서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 왔겠느냐”면서 친일 인사 숙청론을 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송 교수의 계속된 얘기다.
“당시 술상 모퉁이에 앉아 있던 신익희(海公 申翼熙·1894~1956년)가 맞장구를 쳐가지고 ‘국내에서 살면서 친일 안 한 사람이 있었겠나? 그거 다 친일파는 이제 나라가 세워지고 그러면 숙청을 해야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와세다대 동창인 장덕수가 옆에 있다가 ‘해공, 그러면 나도 숙청 대상이겠네’라고 하니 신익희는 ‘어디 설산 자네뿐인가?’라는 식으로 말해 언쟁이 벌어졌다더군요.”
“일절 舊怨이 없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고하가 이렇게 나무랐다고 송 교수는 전했다.
“우리가 일반 국민에게 임정을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을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이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두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도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다음은 계속된 송 교수와 김 이사장의 대화다.
김 “송 교수의 말씀은 귀중한 역사의 증언인데 고하의 서거 문제가 한국 현대사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고, 또 이런 기회가 앞으로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암살범 한현우가 최종 선고 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북한 인민군에 의해 석방이 되었어요. 그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다가 5·16이 일어나자 지지하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런 인연으로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고하를 살해한 전과기록도 말소하고, 외교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어요….”
송 “그 중간에 최서면(崔書勉)씨가 있었어요.”
김 “나중에 한현우의 사위 전병민이 김영삼(金泳三·YS) 정부의 정책기획수석으로 발탁되었다가 장인이 고하 암살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사퇴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혹여 어떤 구원(舊怨)이나 암살범에 대한 소회가 있으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송 “한현우는 기록상으로만 아는 이름일 뿐인데, 남겨놓은 기록에 ‘한현우가 결혼을 해서 포천에 가서 뭘 했고, 강원도에 가서 뭘 하다가 실패하고, 또 서울 와서 이리저리 하다가 정치 깡패들하고 같이 어울리고…’ 하여튼 이런 얘기는 그 기록을 봐서 아는 거고요, 언젠가 해방 전후사를 연구하시는 정치학자 몇 분이 두 번이나 도쿄에 사는 ‘한현우를 만나보겠냐’고 내 의사를 물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막 가슴이 떨려서 만날 수 없었어요. 만난들 무슨 얘기를 할지…. 그래서 거절한 일이 있습니다.
또 YS가 집권하면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의 장인이 고하 암살범이란 사실이 알려져서 물러나고 이화여대 연구원이던 한현우의 딸도 결국 직장을 잃고…, 뭐 그렇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연좌제(緣坐制)도 아니고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일절 구원이나 그런 것(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3·1운동과 고하
김 “독립운동가로서 고하의 가장 큰 공적은 3·1운동입니다. 고하는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고 ‘민족대표 48인’으로 지칭되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3·1운동을 처음 계획하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하는 1년 7개월간 미결수로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습니다. 저는 3·1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고하 송진우와 이승훈(南岡 李昇薰·1864~1930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3·1운동 당시 고하의 역할에 대하여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3·1운동 당시 고하의 역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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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고하 선생의 장손인 송상현 교수가 미국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관을 방문해 송진우 선생(앞줄 오른쪽 첫 번째)이 함께한 ‘1925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민족회의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의 사진을 옆에 두고 기념촬영을 했다. |
‘왜놈한테 나라가 병탄(倂呑)이 된 지 근 10년이 가도 조용하다? 세상 사람들이 조선 민족을 뭐라고 그러겠나? 양같이 순하다 할까, 간이고 쓸개고 없는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까….’
중앙학교에서 선생을 하면서 항상 학생들에게 애국적인 역사를 가르치고 학생 조직을 만드셨어요. 늘 조직을 점검하고, 밤에 찾아가거나 비상소집도 해보면서 민족의식을 심으셨어요. 그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나오고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이 터지면서 이걸 이용해 어떻게든 (독립운동을)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신 겁니다.”
고하가 목이 타게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현상윤(幾堂 玄相允·1893~1950년)과 함께 고민하다가 천도교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천도교가 움직여준다면 기독교도 움직일 거야. 그리고 학생 동원은 내가 맡겠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상윤을 최린(古友 崔麟·1878~1958년)에게 보낸다. 송 교수의 말이다.
“할아버지는 천도교를 동원하자면 먼저 천도교의 교주인 손병희(義菴 孫秉熙·1861~1922년) 선생을 포섭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교주의 세 눈동자라고 하는 권동진(權東鎭·1861~1947년)·오세창(吳世昌·1864~1953년)·최린, 이 세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이런 상황에 기당(현상윤)이 고우(최린)를 만나는 것이 첩경일 거라 판단하셨어요. 기당은 평북 정주(定州) 출신으로 평양 대성학교에 다니다가 백오인사건(百五人事件)으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서울로 올라와 최린이 교장으로 있던 보성학교를 다녔습니다. 기당과 고우는 사제지간이었던 겁니다. 기당은 고우를 찾아가 거사에 가담해줄 것을 종용했으나 처음 고우는 회의적인 태도로 말끝을 흐렸다고 해요. 할아버지가 기당을 앞세워 일주일에 평균 두 번꼴로 찾아다니며 권유했고 마침내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접촉해야 3·1운동의 범위가 커진다는 것도 할아버지의 생각입니다. 일각에 최남선(六堂 崔南善·1890~1957년)의 생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할아버지의 생각인 게 맞을 거예요.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밥을 먹으나 잠을 자나 하여간 3·1운동의 성공만을 생각한 사람이니까요.”
“여보, 우리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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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원서동 송진우 선생 집터 앞의 이정표다. |
“남강 선생이 예수교를 포섭하고, 최린 선생이 천도교를 설득했는데 이게 두 종교가 연결이 잘 안 돼. 감리교, 장로교 자기네들끼리도 의견 조율을 해야 하고 기독교 전체적으로 보면 천도교와 접점이 안 이루어지고… 그래서 삐걱삐걱했어요. 게다가 구한말 원로와 명사들을 모두 접촉했지만 다 거절하니까 기운이 팍 가라앉은 거예요.
육당, 고우가 진이 빠져 뒤로 나자빠졌는데 할아버지가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자다가 기당을 깨우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여보 우리가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모가지 댕강 잘려 죽거나 끙끙 앓다가 죽거나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여기까지 됐으니까 나는 하겠어! 나 혼자라도 하겠어!’
그러니까 기당 선생이 ‘그럼 합시다’ 해서 다시 복기(復棋)해 다 살려가지고 3·1운동이 이뤄진 겁니다.”
송 교수는 잠시 숨을 돌린 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에는 정작 선언문을 작성한 육당 이름이 안 들어갔고, 고하도 물론 안 들어가고, 함태영(咸台永·1873~1964년) 선생도 안 들어가고,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여러 분이 안 들어갔어요.
그 이유가 뭐냐? ‘만세 한 번 불러서 독립이 되겠냐?’며, 그러니까 2차, 3차, 4차 3·1운동 배후에 앉아서 학생이나 시민, 상인들을 다 조직을 해가지고 계속 일본인과의 물품 매매를 거절하는 철시(撤市) 운동, 납세 거부 운동, 무슨 노동자 파업 운동, 온갖 있을 수 있는 모든 운동을 다 하기로 짜놓았는데, 그 지휘자가 고하죠. 33인이 절대로 배후를 안 불기로 했는데, 최린이 불었어.
할아버지는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는데 당시 3월이면요, 많이 추웠습니다. 지하실에다 잡아다 놓고 물고문하고 때리고 그래도 안 되니까 옷을 홀딱 벗긴 다음에 전신주 같은 기둥에다가 꽁꽁 묶어놓고는 컴컴한 밤에 훈련된 경찰견으로 하여금 무차별로 물게도 했어요.
우리 집안에서 내려오는 얘기 중 하나가 할아버지가 그때 생식기관을 다쳐서 생식 능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어. 근데 광경을 누가 본 사람 있어? 알 수가 없는 얘기인데 집안에서는 그렇게 내려와요.
그래도 불지 않으니까 물에다 흠뻑 불린 가죽조끼를 입혀요. 그러고 열이 이글이글 나는 석탄 난로 옆에다 앉혀놓거든. 그러면 조끼가 마르면서 몸을 조이기 시작해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이 온대요. 그런 고문을 가해도 이 양반이 불지를 않으니까 대질심문(對質審問)을 한 거예요.
‘다 불었는데 너 혼자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부인해봐야 소용없다.’
‘그 양반들이 분 대로 알아서 하시오.’
그러니까 지금 3·1운동 공판 기록을 보면 거꾸로 됐어요. 손병희나 이런 천도교, 또 기독교 몇 사람이 주동한 걸로 돼 있고 할아버지는 기껏해야 최남선 불러오고, 최린하고 만나고, 남강 선생하고 왔다 갔다 한 것밖에 없는 걸로 돼 있으니까 완전히 주와 종이 바뀐 것이지요. 훗날 정인보(鄭寅普·1892~1950년)와 문일평(文一平·1888~1936년) 선생이 할아버지에게 서너 번 찾아와 3·1운동 전말을 우리한테 구술해주면 바로잡겠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지금 내가 사실을 얘기하면 우리나라가 홀라당 뒤집어진다. 은퇴한 후에 천천히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라고 하셨는데 56세에 암살당하시니 바로잡을 기회가 없으셨죠.”
고하, 아들을 상업학교로 진학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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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9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죄로 송진우 선생은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
“당신이 언제 투옥되거나 무자비한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사실상 아버지를 우리 가족의 유일한 생활 책임자로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실은 아버지가 경기중학교에 입학을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 동지들과 주위 부하들이 전부 벌떼같이 일어나가지고 ‘아니, 독립운동가의 아들을 왜놈들이 세운 관립학교에 보내는 게 말이 되냐’고 소리소리 지르는 바람에 못 다녔어요.
그럼 중앙학교에 갔느냐? 중앙학교에 가려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반대하셨어. ‘너는 온 집안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니까 한가하게 인문학교 가서는 안 되고 상업학교 가서 주판을 배우고 손님한테 인사 잘하는 거나 배우면 된다’고 하는 바람에 남대문상업학교에 갔어요. 그게 지금의 동성고등학교야.
남대문상업학교 담임이 장면(張勉·1899~1966년) 총리입니다. 훗날 장면이 제2공화국 총리가 되니까 우리 아버지에게 장관 자리를 제시했는데 완강하게 사양하셨대요.
부자간 맹세를 했기에 그 양반도 정계 진출을 안 했고, 나도 총리를 두 번이나 제의받았지만 거절했고…. 장관, 대법관, 청와대 수석…. 내가 10번은 더 받았어요. 일절 안 갔어요.”
고하의 비극이 손자 송상현 교수로 이어져
― 그 자리에 왜 안 가셨습니까.
“우리는 정치 근처에도 안 가기로 아버지하고 아주 금석맹약(金石盟約)을 했거든. 할아버지의 비극적인 최후를 보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은 할아버지가 걸으신 방법 외에 다른 방법도 많이 있을 거다’고 생각한 거지요.”
― 고하의 비극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네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약주를 좋아하셨거든. 억 병이 되도록 술을 마시곤 통행금지가 지난 시간에도 온 집 안을 다 돌아다니면서 문을 잠그는 거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문을 안으로 걸까요?’라고 여쭸는데 결국 암살당하셨거든. 그게 천추(千秋)의 한(恨)이 돼가지고….
나는 별로 그런 게 없었는데 이제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가끔 자다가 당시 꿈을 꿔요.”
― 고하의 피습 이후 어머니도 굉장히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요새 같으면 스무 살 남짓의 새댁인데 나를 낳고 나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 하셨어요. 당시 먹을 게 있나요? 무슨 의사가 있었어요? 복막염으로 항상 고름과 피를 짜내고 복대를 두른 채….”
젊은 며느리로서 13발 중 6발의 총탄을 맞으신 시아버지의 낭자한 피를 말끔히 닦아내고, 현장을 정리한 일, 강추위 속에서 진행된 그 큰 초상을 포함하여 전통적 제례의식의 3년상까지 치러낸 어머니의 초인적 상황 관리는 송 교수에게 한없는 외경의 마음을 갖게 한다고 했다. 어머니 김현수(金賢洙) 여사는 아흔을 맞이한 지난 2009년 여름 세상을 떠났다.
계속된 김 이사장과 송 교수의 대화다.
김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인해 대다수의 지도층 인사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지만, 누구보다도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고하는 총독부의 강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친일 논설이나 친일단체 가입은 물론 많은 사람이 참여했던 친일 강연과 인터뷰조차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처럼 고하는 자기 주관과 소신이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었기에 해방이 되자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세력을 이끄는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습니다.”
“친일 관련 흠결 전혀 없다”
송 “(친일과 관련한 흠결이) 전혀 없었습니다.”
김 “학계에서 관심거리가 되는 게 조선총독부가 1945년 8월 15일, 여운형과 접촉하기 전인 8월 11일에 경기도지사 이쿠다 기요사부로(生田清三郎·1884~1953년)를 통해 고하를 접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쿠다가 고하한테 치안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는데, 이후에도 경기도청으로 초청하거나 집으로 찾아가서 여러 차례 부탁했으나 거절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결국 8월 15일 몽양에게 부탁한 것이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설이 있어요.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엔도 류사쿠(遠藤柳作·1886~1963년)가 1957년에 《국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송 교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송 교수는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무척 격앙되었다.
“고 송건호 선배가 편집 책임을 맡아서 일부 대학 교수들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여러 권 펴냈는데 거기에 보면 ‘고하한테 일제가 접촉했다는 것은 완전히 우익의 조작이다.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 조선총독부 조선인 고관을 했던 이에게 일일이 인터뷰를 해 ‘그때 고하와의 접촉에 대해 소문이라도 들어봤냐’고 물었더니 ‘들어본 일도 없다고 했다’고 썼어요.
내가 하도 우스워서 참…. 반론을 하고 싶지만 합리적으로 반박을 해야지…. 만약 정권을 비밀리에 넘기려면 비밀리에 찾아가서 신속하게 넘기지, 조선인 총독부 고관이라는 게 일개 사무관 정도인데, 식민지 백성인 그런 자들에게 정권 인수 접촉이 알려지게 했겠어? 아니, 당시 우리나라 현실에 놓고 한 번 생각해봐요. 그 사람들이 못 들은 게 그게 당연하지.”
“엉덩이 걷어차면서 ‘不逞鮮人 새끼’ 운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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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2일, 서울 종로구청으로부터 명예도로명인 ‘고하길’을 부여받았다. (사진은 계동 중앙고 앞) |
“그때가 1945년 8월 11일입니다. 경기도지사인 이쿠다가 왔어요. 서울이 포함된 경기지사입니다. 일본 내각에서 대신을 2~3차례 지낸 정치원로를 보내는 자리입니다. 이쿠다가 조선인 경찰 중에서 제일 높은 자와 함께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통치권의 4분의 3을 줄 테니까 우리가 물러나 80만 재조선 일본인이 떠날 때 그 생명과 재산을 좀 잘 보호해주시오.’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 대일본 제국이 왜 패망을 해? 맨날 승승장구하는데 왜 지나? 그런 말씀 마시오’라고 엉뚱하게 얘기하신 거야. 패전(敗戰) 소식을 다 듣고 있으면서….
그다음에 ‘우리 조선인들은 문화민족이어서 당신네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당신네 재산이고 생명을 빼앗는 그런 야만인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조선 사람들을 믿고 알아서 가세요’ 이러셨어. 그러니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다음에 또 왔어요. 네 번째도 할아버지가 거절을 하거든.”
― 그때도 이쿠다가 왔습니까.
“왔었다고 해요. 근데 1945년 8월이니 굉장히 더울 때 아니에요? 제가 다섯 살인데 하도 더우니까 속옷만 입고 안채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따라온 정복 입은 경찰이 또 거절을 당해 화가 나니까 내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불령선인(不逞鮮人) 새끼’ 운운하며 큰소리로 욕을 했어요. 날씨가 더웠지만 가죽 장화에 긴 칼을 차고 있었어요.
어린 나는 무방비 상태로 걷어차여 앞으로 고꾸라져가지고 토방 댓돌에 턱을 부딪치는 바람에 크게 다쳤습니다. 여기가(턱이) 다 없어졌어. 당시 약이 있어요? 굶어 죽을 판인데. (종로구) 재동 부근 김웅규 외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데 소위 빨간 소독약을 바르는 것밖에 없지. 여러 해 동안 치료를 받았거든요. 오래갔어요.”
― 송 교수께서 그렇게 턱을 다친 것도 굉장히 중요한 1차 사료거든요.
“강○○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해방 공간을 묘사하는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 나를 찾아왔어. ‘바로 그 점이 어떻게 됐냐’고 물어서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이야기했거든. 열심히 얘기를 했는데 이자가 소설을 쓰면서 그 부분을 우물우물 흐려버렸어.”
송 교수는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찬 이가 일제 총독부에서 관리(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편집자)를 했던 전봉덕(田奉德·1910~1998년)”이라고 했다.
― 어린 나이였는데 그 이름을 어떻게 안 겁니까.
“아버지가 나중에 얘기를 해줬지. 나이가 (아버지와) 아마 비슷할 거예요.”
― 현장에서의 기억이 생생하신 거군요.
“경찰복 정장 차림에 칼도 차고….”
송 교수는 “고하의 해방 전 일제에 의한 정권 인수 교섭은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깝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런 교섭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고하를 깎아내린다. 물론 이 교섭이 일제가 고하에게 ‘통째로 정권을 내줄 테니 어서 받아라’는 식의 교섭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송 교수는 몇 가지 정황을 들어 설명한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일본 경찰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되기 며칠 전부터 우리 집 주위의 감시망에 이상한 움직임이 보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총독부 고위인사들이 할아버지와 면담하고자 자주 몰래 원서동 집에 드나든 것, 할아버지를 따르는 다른 분들, 예컨대 김준연(전 법무장관), 설의식(薛義植·1900~1954년) 등에게도 일본인들이 할아버지의 생각과 동향을 면밀하게 물어본 것 외에도 내가 직접 봉변을 당했으니까요.”
‘내가 결국 장물아비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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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0년 4월 4일 자 10면에 실린 제헌의원 이상돈 선생의 회고록 〈고하, 일제 정권 인수 교섭 끝내 거절〉 기사다. |
“할아버지는 삼복더위에도 사랑채에서 솜이불을 겹겹이 둘러 싸매고서 아픈 게 아니라 아픈 척을 하신 거야. 그러고 한약을 달여. 근데 풍로에 부채질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야. 20대 여자가 말이야. 당시 집안에 찬모, 청지기가 수두룩한데도 왜놈들한테 매수됐을지 몰라 못 맡겼던 거지.
한번은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쿠다가 찾아오니까 할아버지가 딱 일어나서 이랬대요. ‘당신네가 우리한테서 주권을 빼앗아 간 강도인데 그 주권을 나한테 일부고, 전부고 간에 넘겨주면 내가 결국 장물아비가 되는 거고, 나중 우리 국민을 볼 면목이 사라진다. 해방이 되면 정부도 수립해야 하고, 한일 간에 국교도 터야 하는데, 나같이 일본을 잘 아는 지도자 하나쯤은 남겨두는 게 너희한테도 유리할 거다.
그리고 권력은, 통치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서 행사하지 않으면 부적법하다. 너희가 무슨 권한이 있어 나한테 무슨 통치권을 주고 말고 하느냐.’
이쿠다가 듣고 보니 그 말이 옳거든. 그러니까 할 말이 없는 거야.”
제헌의원인 이상돈(李相敦·1912~ 1997년)이 1990년 4월 4일 자 《조선일보》 10면에 기고한 〈내가 겪은 체험 내가 본 사건〉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70 노령인 경기도지사 이쿠다(生田)로 하여금 고하를 초청, 경기도지사실에서 고하와 김준연(金俊淵)을 만나게 주선했다.
그들 역시 일본이 항복한 후에 조선의 치안과 통신·방송·신문 등을 맡아서 평화적으로 일본 거류민이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하는 초지일관,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이와 같은 뚜렷한 사실에 대해 8·15 해방 전후사를 연구하는 일부 젊은 학자 중에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총독부에서 고하에게 정권 인수를 교섭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그 논거로 당시 총독부 사무관(과장)으로 있던 조선 사람 최(崔)모의 증언과 그때 정무총감 원등(遠藤)의 증언을 들고 있다. 일개 총독부 사무관인 조선 사람에게 치안권 인수 교섭을 추진 하기에는 사안이 너무도 중요한 만큼 일인 수뇌부에서 은밀히 직접 교섭했었음은 상식에 속할 것이다.〉
이 전 의원은 1949년 제헌의원이 된 후 5대, 6대 국회의원을 거치면서 줄곧 야당의 길을 걸은 강골 정치인이었다. 그는 “고하, 설산, 몽양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의 전횡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독재도 못 했을 것이며, 김구 선생 등 임정파와의 사이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정치의 비극의 시작”이라고 했다.
역사책에서 사라진 고하
송 교수는 어린 시절 고하의 원서동 집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찬 일제 헌병의 실체에 대해 고백했다.
“내 엉덩이를 찬 전봉덕, 이자가 1960년대 대한변협 회장도 하고, 딸이 시인 전혜린이야.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LA에서 살다가 89세에 죽었어. 내 젊은 시절 육군본부 법무관을 할 때 국가 소송사건 기록 보따리를 짊어지고 서소문 법원에 갔는데 변호사 공실(控室)에 그가 있더라고. 그 사람은 내가 고하의 손자라는 사실을 몰랐고, 나 역시 그런 말을 안 했어.”
김형석 이사장의 말이다.
“지금 역사학계에서 나온 논문은 대부분 좌파적인 입장에서 쓴 논문이기 때문에 고하로부터 시작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하는 좌익까지 포함하는 포용적 인물이었고,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굳이 얘기하자면 중도 우파 정도의 입장에서 좌파까지 다 포용하는…. 그래서 저는 윤석열 정부의 국민 통합적 관점에서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국민통합적 모델로 볼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 고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송 교수의 답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 이름이 곧잘 역사책에 나왔고, 역사시험에 출제되기도 했어요. 그러나 지금 역사책을 보면 할아버지 이름이 없어. 전혀 없어요.”
“민족적 민주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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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월 20일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양천구 신정동 지향산록으로 천묘하면서 위당 정인보 선생의 한문 비석을 이희승 선생의 감수하에 한글로 번역한 국문 비석을 추가 건립하며 제막식을 가졌다. 사진=천장추진위원장 최두선 |
“박명림이라는 정치학자(연세대 교수)가 있는데 할아버지를 ‘중용적 진보주의자’라고 평하더군요. 또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학준 전 의원은 ‘민족적 민주주의자’라고 평합니다.
정치인 중에 포용력이 그렇게 큰 사람은 없을걸요? 항상 하시는 말씀이 ‘야, 천연두로 얼굴이 빡빡 얽은 여자도 잘 들여다보면 예쁜 구석이 있어.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고 자꾸 배제하면 안 돼’였어요.
요새 식으로 하면 ‘덧셈 정치’를 하신 분이죠. 한국민주당을 만들 때 사회주의자들인 북풍회, 화요회 계통의 인사들도 들어왔어요. 뿐만 아니라 전진한(錢鎭漢·1901~1972년)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일평생을 노동운동만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 있는데 정문헌 종로구청장의 외할아버지예요. 그 노동운동가가 한민당 발기인이야. 그렇게 고하가 리더십을 발휘할 때는 박헌영이 만든 조선남로당의 당원만 아니면 다 한민당에 들어오다시피 했어요. 고하의 생각이 몹시 선진적이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기간산업의 국유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 사형제 폐지 등 요즘에는 상식화된 입장이지만 그때는 파격적인 주장이었어요.
할아버지가 포용력이 있고 프로미넌트(prominent·유명)했거든요. 그러니까 다 할아버지한테 매달렸어요. 해방 이후 127일까지 완전히 고하의 정치판인데 인촌은 거기에 없습니다. 일부 학자가 고하의 활동 기간과 돌아가신 후 인촌이 한민당 당수를 이어받아 쭉 활동한 것을 훗날 믹스를 해가지고….”
― 해방 공간 행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말씀이군요.
“해방이 될 그 무렵에 인촌과 고하 두 분이 만났을 때 고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인촌. 자네는 주렁주렁 사업이 많아. 괜히 여기 있다가 퇴각하는 왜놈들이 우리(조선 지도자들)를 몰살시킬 때 죽거나 붙잡히면 안 돼. 그런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피해 있어.’
인촌 선생이 ‘고하, 자네는 어떡하려고’ 하니까 고하는 ‘난 원래 몸뚱이밖에 없고 몸뚱이 하나로 이렇게 해온 사람이니까 몸뚱이로 버티고 있으면서 조국이 해방되는 걸 봐야지.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자네는 낙향이라도 하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촌이 낙향하시고 서울에 안 계셨어요. 그렇게 8·15 날부터 12월 30일까지 ‘해방 공간 127일’은 완전히 고하의 정치판으로 이 기간 동안 인촌은 대부분 서울에 없어요
인촌 기록이 나오는 게 그해 9월 4일, ‘임정 및 연합군 환영회’를 고하가 조직하며 위원장에 권동진 선생을, 부위원장에 인촌을 시키고 그리고 또 부위원장 하나를 좌파를 시켜야 되니까 허헌(許憲·1885~1951년)을 시키고… 그때 한 번 인촌 이름이 나옵니다. 인촌은 서울에 많이 안 계셨어요. 고하는 당시만 해도 국회가 없으니 국민대회를 열어 국민이 위임을 해주면 적법하게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9월 6일 국민대회 준비회를 만들어요. 그때도 인촌의 이름이 없습니다.”
“우남이 제일 먼저 輓章 써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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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9월 23일, 서울 광진구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에 고하 선생 동상이 세워졌다. |
― 고하는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했다가 이승만과 인연을 맺습니다. 1945년 10월 20일 환국지사 환영위원회를 결성하고 이승만이 귀국하자 독지가들과 사재를 모아 돈암장을 거처로 마련해줍니다. 두 분 관계를 어떻게 바라봅니까.
송 교수는 고하의 입장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이 박사가 귀국하신 후 돈암장을 마련해드리고, 자기 사람들을 보내어 수발을 들고 대변인 역할을 맡겼으며 한 달에 한 5만~15만원씩을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또 ‘한국민주당의 당수로 취임을 좀 해주십시오’라고 했지만 ‘조선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정당을 합해서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라. 내가 의장이고 제 정당은 다 들어와라’ 해서 한민당과 여운형, 안재홍(安在鴻·1891~1965년)까지 다 들어갔는데 될 리가 있어요? 잡탕을 다 막 그렇게 모아놓고 아무 원칙도 없이 그게 됩니까? 안 되지.
그러니까 이 박사가 그냥 죽을 쑨 거야. ‘내가 나다’ 하면 다 따라올 줄 알았는데 아니거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돈암장에 드나들지를 않아 한순간에! 그게 세상인심이거든. 그러니까 우남이 고하를 찾아왔어. 그해 11월 하순, 낙담을 하며 그간 자신의 행태를 좀 반성하듯이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무 욕심을 많이 내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나이가 70이 넘었고 눈이 파란 사람이 부인이니 국민들이 이걸 제대로 수용하겠나. 그러니까 연부역강(年富力強)한 고하가 맡아서 하시면 내가 뒤에서 도와드릴 테니 책임지고 하시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이고,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그 전보다 더 잘 모시고 더 보살펴드릴 테니 절대로 주눅 들지 말고 꿋꿋이 나가십시오.’
할아버지는 나름 현재 시국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로는 이승만이 최선이라고 평소 믿어 왔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사이가 괜찮았어요.
이미 그때도 따르는 사람 중에 할아버지 듣기 좋으라고 ‘이승만이 호랑이인 줄 알았더니 고양이만도 못하다’고 깎아대는 놈이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이승만한테 가서는 ‘고하가 저래도 자기 욕심이 꽉 찬 사람’이라고 막 깎아내리는…. 그래도 두 분은 그런 말에 현혹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우남이 제일 먼저 한시 만장(輓章)을 써서 보내셨어. 서울어린이대공원(서울 광진구 능동로 216)의 고하 동상 앞에 이 박사의 만장을 새겨 놨거든. 그게 1983년인데 한민당 할아버지 일부가 ‘이승만 독재자 것을 해놨다’고 욕하고… 참 민망하더라고.”
“의인은 예부터 자기 명에 죽는 경우가 드물고…”
고하를 추모하며 쓴 우남의 만장은 이렇다.
〈의인은 예부터 자기 명에 죽는 경우가 드물고(義人自古席終稀)
한번 죽는 것을 심상히 여겨 마치 제집으로 돌아가듯 한다.(一死尋常視若歸)
나라 안이 모두 슬퍼하고 처자들도 우는데(擧國悲傷妻子哭)
섣달그믐 망우리에는 눈만 부슬부슬 뿌리는가.(臘天憂里雪罪罪)〉
고하는 망우리에 묻혔다가 훗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김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독립운동한 분들을 더 우월적으로 평가하고 국내에서 탄압과 감시를 무릅쓰고 지조를 지키면서 2000만 조선 민중을 지키기 위해 애쓴 분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가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송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다가 귀국하신 분들은 ‘혹독한 일제 탄압을 받으며 조선 땅에 살면서 친일을 안 하고 버텼겠어?’라고 치부하시는 태도를 보이는데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생각해요.
소위 좌파 쪽 사람들이 일부 좌파나 해외파 지도자들의 친일 기록을 감쪽같이 감춰서 아무도 몰라요. 이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지. 언제고 뭐 다 기록 있으면 드러날 건데…. 할아버지의 자료집을 펴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김 “《거인의 숨결》에 고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조병옥 나의 회고록》에 나오는 김규식(金奎植·1881~1950년), 여운형, 안재홍 세 사람의 친일 행적에 관한 얘기를 실은 이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송 “네. 그렇습니다.”
김 “제가 대학에 다닐 때(1970년대)만 해도 국내 민족운동과 국외 무장운동이 5대 5의 평가를 받았다면 요즘은 국내 민족운동가들은 전부 친일 또는 친일과 가까운 무리로 몽땅 넣어버리고 국외의 무장 독립운동만 인정합니다.
‘100년 전쟁’ 프레임을 만들어 대한민국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좌편향적인 사관에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또 우파 민족운동가들의 공적도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독립운동단체에 비밀리에 송금
송 “상하이와 만주 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활동하신 애국지사, 러시아 극동에서 독립 쟁취의 수단으로 공산주의자가 되긴 했으나 독립을 위해 진력한 분들이나, 미주나 하와이로 건너가 한반도 강점은 불법이라고 세계만방에 알린 분들이나 모두 노력하며 업적을 많이 내셨어요.
제가 주장하고 싶은 건 이분들이 해외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하든 국내 독립운동 그룹이나 사람들과 연결이 돼 있었어요. 국내에서 이분들을 돕지 않았다면 해외 독립운동의 효과는 반감되지 않았을까요?
혼자 해외에서 떠들어봤자 국내에서 뒷받침을 안 하면 가능하겠어요? 그 뒷받침한 국내 중심세력의 으뜸이 고하거든요. 정부가 없던 시절에 중심을 잡아줬기 때문입니다.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후 독립운동사 편찬 사업을 주도했던 이강훈(李康勳· 1903~2003년) 전 광복회장은 분명히 고하로부터 거액의 독립자금을 네 차례나 송금받은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증언한 일이 있습니다.”
기자는 당시 기록을 찾아보았다. 이강훈 선생은 ▲1926년 5월 모란역에서 6천원 ▲1928년 9월 돈화현(敦化縣) ‘얼토량쯔’에서 상당 액수 ▲29년 2월 만주의 산시(山市)에서 소만(蘇滿) 국경으로 본부를 이동하려 할 때 1만원 ▲1930년 1월 27일 김 장군이 돌아가자 만장과 함께 일화(日貨) 10원짜리로 1만원 등 확실히 기억하는 것만도 네 차례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이 밖에도 고하가 다른 독립운동단체에도 비밀리에 자금을 송금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증언한 일이 있다.
계속된 송 교수의 말이다.
“당시 국내 세력들은 뭘 했냐? 독립자금을 마련해 해외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해외 한인신문을 낼 때 한글로 읽을 수 있게 금속 한글활자를 보냈어요. 고하는 신문사 사장이어서 이것을 쉽게 구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일본 순사의 뺨을 한 대 때려도 크게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북 치고 장구 치고 대문짝만 하게 신문에 내어주던 언론의 힘도 컸어요. 국내 독립운동 세력이 이 해외에서 풍찬노숙하고 참 애쓰신 분들을 뒷바라지해드린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요즘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다.
―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대한 덕담을 하신다면?
“내가 결혼 주례를 했어요. 한 장관의 아내인 진은정 변호사는 법대 한 해 밑이지. 어떻게 둘이 만나서 가연(佳緣)을 맺어 주례를 하게 됐어요. 제가 아끼고 촉망 받는 제자 부부지요. 한 장관 부모님보다 진 변호사 부모님을 더 잘 알죠. 진 변호사 아버지가 검사장도 하고, 친정어머니는 내 처제와 동창이라서 잘 알죠.”
“윤 대통령, 인재 풀 넓혀야”

― 지금 한 장관이 잘하고 있습니까.
“잘하죠. 그만큼 똑똑한 사람이 또 있겠어? 그러면 똑똑할수록 좀 숙이고, 덕을 쌓고, 살아가면서 그런 게 필요한 거지.
나도 그렇게 못 할지 모르지만 보통 ‘똑똑이’들이 덕을 쌓고 겸손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지. 지금도 잘하지만….”
― 역대 정권이 바뀌고 사정(司政) 정국이 되면 서울 법대 출신들이 이런저런 책임을 지고 우르르 나가고, 새로 들어오는 서울 법대 출신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우리나라 엘리트 충원 과정이 서울 법대 중심으로 너무 이루어졌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내년에는 검사 출신들이 대거 출마한다는 설도 있고.
“윤 대통령이 검사 출신이니까 아무래도 충분히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바깥보다는 검찰 내부에 더 많이 있으니까 팔이 안으로 굽어서 그런 사람을 더 쓸 거 아니겠어요? 근데 노력은 많이 해야 되겠지. 인재 풀을 넓혀서 여러 사람을 쓰면 좋겠죠. 그것이 제일 요체가 아닌가 싶어요.
서울 법대 출신들도 다 똑똑한 건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못지않게 똑똑하니까. 또 특이한 경험도 쌓았을 거고, 전문성도 여러 가지로 있을 거고, 그러면 넓게 보고 넓게 사람들을 등용하고 하는 게 필요하겠죠. 뭐 앞으로 잘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