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 더 사랑해서 울었다든지, 어떤 사람은 내가 조금 덜 좋아해서 섭섭했다든지 모두 소중”
⊙ “인간은 불쌍해서 사랑스러운 거예요”
⊙ “사랑, 결혼의 존엄성이랄까, 그 막대한 사업을 배우지 못해”
⊙ “내가 이렇게 늙으면서 하느님도 늙으셨어요. 아주 고령의 하느님…”
金南祚
1927년생.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서강대 명예문학 박사 / 숙명여대 교수(1955~93년),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예술원 회원 역임 / 국민훈장 모란장(1993), 은관문화훈장(1998)
⊙ “인간은 불쌍해서 사랑스러운 거예요”
⊙ “사랑, 결혼의 존엄성이랄까, 그 막대한 사업을 배우지 못해”
⊙ “내가 이렇게 늙으면서 하느님도 늙으셨어요. 아주 고령의 하느님…”
金南祚
1927년생.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서강대 명예문학 박사 / 숙명여대 교수(1955~93년),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예술원 회원 역임 / 국민훈장 모란장(1993), 은관문화훈장(1998)
- 10월 12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김남조 시인의 영결식이 엄수되고 있다. 한국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로 ‘사랑의 시인’이라 불리던 김남조 시인은 지난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진=뉴시스
‘사랑의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김남조(金南祚·1927~2023년)라는 사랑의 별이 10월 10일 졌다. 향년 96세. 생전 고인의 별명은 ‘김 사랑’이었다.
사랑의 시를 즐겨 썼음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사랑 이야기도 즐겨 들었단다. 시집과 수필집은 마개를 딴 사랑의 묘약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 ‘참회’에서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 다오’라고 노래했을 만큼 김남조의 시론(詩論)은 단언컨대 ‘사랑의 시학(詩學)’이었다. 6·25전쟁 와중인 1952년 첫 시집 《목숨》을 펴낸 이래 2020년 《사람아, 사람아》까지 모두 19권의 시집을 펴냈다.
가톨릭문우회 회장을 지냈을 만큼 신앙심도 깊어 사랑의 대상이 초월적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에 대한 애정 또한 무척 깊었다. 겨울이면 성직자들이 추울세라 수백 장씩의 담요를 사 보내고 인세에서 얼마씩을 떼어 성직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보냈다.
“사랑은 자비의 마음”
기자는 지난 2021년 4월 23일 서울 용산구 김세중미술관에서 고인을 뵈었다.
― 취재하러 찾아왔습니다.
“귀중한 만남이 될 것 같은데, 취재 이거는 그냥…”
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사랑 이야기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 여운이 오래갔지만 기사화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싣지 못한’ 인터뷰를 떠올렸고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그를 추억하며 당시 취재를 재구성한다.
― 선생님 작품 중에 ‘그대 세월’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대 헐벗었던 유년기/ 전란의 소년기/ 돌을 져 나르던 청년기/ 형벌의 장년기’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대’는 누군가요? 남편이신 김세중(金世中·1928~1986년)님이신가요?
김남조 시인은 느릿느릿 이렇게 답했다.
“그 시에 이런 문장도 있지요. ‘그러나/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 모든 세월에/ 허리 굽혀 절하는/ 여자 하나 있잖니’.
김세중은 아니고 동시대 모든 연인이겠지요. 돌이켜보면 그리움을 느꼈다든지, 사랑을 느꼈던 사람이 하나가(한 명이) 아닙니다. 한 나무 안에 푸른 가지로 있건 열매로 있건, 그 인생에서 하나(한 명)는 O고 하나는 X가 아니고, 지나간 사람이든 지나온 사람이든 다 소중한 거예요.”
당시 그의 떨리던 음성, 압축된 어휘, 단문의 말씀이 그냥 한 편의 시였다.
“어떤 사람은 내가 조금 더 사랑해서 울었다든지, 어떤 사람은 내가 조금 덜 좋아해서 섭섭했다든지, 이런 모든 게 똑같이 내게 소중한 거예요.”
이런 말도 했다.
“사람의 재산 중에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 이것 큰 재산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성(個性)이란 측은한 것인지 몰라요. 가엾은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랑’이라고 안 하고 ‘자비’라고 하잖아요. 자비…, 슬프고 사랑스럽고…. 인간이 그것 때문에(가여워서) 사랑하는 경우도 많아요.
어린 아기의 귀를 보면 정맥이 보이는데, 빨개야 하는데 색깔이 파랗거든요. 왜 파랄까요? 어렸을 때 할머니와 같이 예배를 보는데 할머니에게 말했어요. ‘할머니, 하느님이 저기(하늘에) 계시는데 왜 (고개를 숙여) 밑을 보세요’라고. (웃음) 인간은 불쌍해서 사랑스러운 거예요.
(사랑은) 측은지심으로 지켜보고 싶은 그런 마음인 거죠. 자비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가 도대체 누구냐?
남편 김세중과의 사랑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을 만든 김세중은 서울대 조소과 교수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인 1986년 6월 24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향년 58세였다.
“우리는 결혼을 했어도 서로 바빠가지고 재미있게 어디를 간다든지 그런 게 별로 없었어요. 그리고 사랑한다는 건 배워도 배워도 안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늘 늦게 귀가했기에, 항상 문밖으로 쫓겨난 것 같은 그런 체념과….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일찍 귀가할 수도 있었는데, 처음(신혼 초)에 (남편이 퇴근하면) ‘오셨어요?’라고 말하곤 조그만 방에서 글 쓴다며 밤낮 이러고. 그런데 쓴 시를 보면 ‘사랑하는 이’가 나오는데 도대체 누구냐…”
― 오해를 하셨던 것이군요.
“거기서 오는 외로움이 있었던 거예요. 가지고는 있었지만, 가지고도 못 준 것…. 서로 사람이… 그러니까 가지고 있으면 주는 공부를 해야 돼요, (사랑을) 주는 공부….
그래서 어긋나고 별로 추억도 없이 떠났죠.”
대화 중에 이런 말도 했다.
“말하자면 부족했던 것이죠. 내가 덜 줬다는 것에 대한 아픔을 느끼는 겁니다. 《바람세례》(1988)라는 시집에 ‘나에게’라는 시가 있어요.
‘이제부턴/ 후회와 둘이 살면서/ 스스로 판결한 벌을 섬길지니/ 즉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손 내밀지 마라’
그러니까 (사랑이) 한 번 끝이 났고, (이후) 누구도 행복하게 할 감(냥)이 못 된다, 인간이 못 된다는 건데, 그런 절실한 느낌에서 ‘이 세상에 손 내밀지 마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의 판단을 하면, 내가 자격이 없다는 것, 한 번의 기회를 썼고, 또 한 번의 기회를 바라지 말라는 혹독한 선고 같은 것이죠.”
‘좋은 꿀물을 마시게 하라’
그는 “연인끼리 애교를 가지고 사랑을 달라고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결혼해 처음엔 사랑을 달라고 해야 한다는 느낌을 안 받아요, 대개. ‘엄마 나 사랑해줘.’ ‘그래? 네가 엄마 사랑이 필요하구나’라고 할 정도의 느낌을 모른다고요.
너의 결점만…, ‘너 왜 모자는 이렇게 삐딱하게 썼니?’ 이러니까 (점점) 선을 긋게 되고.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2020)에 있는 시 ‘성주(城主)’처럼 정말 ‘꿀물’을 타서 나눠 먹어야 돼요, 서로…. 근데 그때는 그 생각을 못 했어.”
그는 시집을 펴서 ‘성주’를 읊어주었다. 읊다가 ‘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는 대목에서 살짝 웃었다.
당신은 성주가 되었다
성 하나에 한 사람뿐인
그가 되었다
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모자를 벗지만
그때 웃음판이 멈추기도 한다
당신의 고독은 깊어 간다
탁월함이 인격인 건 아니고
행복이 가치의 지표도 아니다
재물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멀리 보며 전체를 생각하라
좋은 꿀의 꿀물을 타서
많은 이가 감미롭게 마시게 하라
겸허히 기도하라
-김남조의 시 ‘성주’ 전문
시인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했다.
“사랑한다는 것, 결혼한다는 것에 대한 존엄성이랄까, 그 막대한 사업이라는 걸 전혀 가르치거나 배우지도 못했어요. ‘네가 어떤 이와 살면 그 사람에게 너를 줘야 한다’는 게 결혼의 전(제) 조건이에요. 그걸 (바탕에) 깔아놓고 앉든지 서든지… 사랑을 의무로 알아야 합니다.”
진짜 엄마란…
시인은 20세기 한국 여류 작가들은 대개 불행한 사랑을 나눴다고 했다.
“옛날의 한국 선비들은 ‘그거(사랑)’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일제 때 남자들은 열다섯에 결혼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갔었잖아요. 방학 때 한 번씩 와가지고 웬 낯선 사내아이가 있으면 ‘저 앤 누구냐?’ ‘누구긴 당신 아들이잖아’ 하던 시절이었어요.
여자는 이화여전 정도 나와가지고 ‘이 사람, 괜찮은데…’라고 할 때는 대개 유부남이었어요. 이게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었죠.
작가 김○○과 최○○는 요만한 툇마루에서 해 질 녘 막걸리를 꼴딱꼴딱 마시는데 슬프고, 소설가 임○○는 남편이 의사였는데 (남편이) 죽게 되어 시댁에 갔더니 본처가 머리 풀고 남편 머리맡을 맏아들과 딱 지키고 있는데…. 시인 모윤숙은 안우상과 살 때 죽인다는 협박 편지도 받았어요. 겨우 결혼해서 살았던 게 작가 한무숙씨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도 예외 없이….”
― 김동길 선생이 모윤숙, 노천명, 김남조 선생을 ‘한국 현대사에 등장한 여성 시인 3인’으로 거명하셨더군요.
이 대목에서 모윤숙 시인과 인도 출신 외교관 K. P. S. 메논(Menon) 간의 어떤 ‘섬싱’에 대해 말했다. 메논은 1947년 해방공간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으로 남한에서 총선거 실시를 성사시킨 인물이다.
“언젠가 전숙희, 모윤숙, 조경희 선생이 (국제)펜대회에 나갔다가 인도에 들렀는데 메논 의장 내외가 저녁 만찬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전 선생이 모 선생의 표정을 보니 마치 사춘기 (소녀) 같았대요. 저녁을 잘 들고 호텔로 돌아와 전 선생, 조 선생이 깔깔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욕실에서 쾅쾅 부서지는 이상한 소리가 나더래요. 두 분이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까 욕실에서 (모윤숙 선생이) 머리를 벽에 박으며 울더래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분의 거대한 열정은 내가 따라갈 수 없다’고 그랬어요. 모윤숙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제가 조시(弔詩)도 읽었지만 욕실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운다는 게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존경스러운 열정이었어요.”
슬하의 3남 1녀 자녀들에 대해서도 이런 속내를 털어놨다.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게 많은데, 자식들이 엄마를 물론 사랑하지만은 친밀감이 적은 것 같다고 느끼는데….
비가 주룩주룩 오는 때 남의 집 추녀 밑에서 망가진 우산을 들고 초라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아들이 언제 오나 기다리는 엄마가 진짜 엄마예요. 그런 의미에서 난 진짜 엄마가 아니었던 거죠. 살고 보니까 가질 수 있었는데 못 가진 게 너무 많아요.”
우리나라 만세
선생은 자신의 늙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잔잔한 말씀이 모두 한 편의 감동스러운 시였다.
“내가 이렇게 나이 들어 늙으면서 하느님도 늙으셨어요.
아주 고령의 하느님….
내가 어렸을 때 촛불을 켜고 ‘주님!’ 이렇게 기도하면 눈물이 너무나 많이 솟아서, 그 눈물 중에 행복해서 기도한 기억이 있는데 진짜 영혼성이라는 게 종교 안에 있습니다.
그 종교 안에 차별이 없어요. 연극에서 나는 운전수, 너는 회사 사장으로 배역이 나뉘는 게 아니에요. 각자 위치에서 연기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가치가 이뤄지는 것이죠. 나는 시인이고 너는 시를 읽는 독자고…. 시인의 눈물을 보며 (독자는) 잊고 있던 눈물이 솟는 것이죠.
시는 하나의 촉매일 수 있어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촉매가 되어 시를 쓰지요. 그 사람에게 직접 화살처럼 가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시의 주인공은 (시를) 읽는 사람이야, 항상.”
고인은 마지막 시집인 《사람아, 사람아》의 맨 끝에 실린 ‘애국가’에 대해 말했다.
“시를 쓰고 눈물을 흘렸다기보다 눈물이 솟았다고 해야겠지요. 그 눈물도 하나의 피부에 불과한 것이고. 눈물 안에 실체가 있겠죠.
내 책을 많이 낸 일본의 출판사 사장이 와서 얘기하던 중에 ‘한국은 정말 복된 나라’래요. 일본은 건축허가를 받으려면 건축비의 거의 50%를 땅에다 묻어야 된대. 지진[내진설계] 때문에.
나는 이게 마지막 시의, 우리나라, 우리나라 정말 잘돼야 될 뿐 아니라, 굉장히 많은 복을 타고난 겁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김남조의 마지막 시집의 맨 끝 시 ‘애국가’ 전문⊙
사랑의 시를 즐겨 썼음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사랑 이야기도 즐겨 들었단다. 시집과 수필집은 마개를 딴 사랑의 묘약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 ‘참회’에서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 다오’라고 노래했을 만큼 김남조의 시론(詩論)은 단언컨대 ‘사랑의 시학(詩學)’이었다. 6·25전쟁 와중인 1952년 첫 시집 《목숨》을 펴낸 이래 2020년 《사람아, 사람아》까지 모두 19권의 시집을 펴냈다.
가톨릭문우회 회장을 지냈을 만큼 신앙심도 깊어 사랑의 대상이 초월적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에 대한 애정 또한 무척 깊었다. 겨울이면 성직자들이 추울세라 수백 장씩의 담요를 사 보내고 인세에서 얼마씩을 떼어 성직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보냈다.
“사랑은 자비의 마음”
기자는 지난 2021년 4월 23일 서울 용산구 김세중미술관에서 고인을 뵈었다.
― 취재하러 찾아왔습니다.
“귀중한 만남이 될 것 같은데, 취재 이거는 그냥…”
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사랑 이야기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 여운이 오래갔지만 기사화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싣지 못한’ 인터뷰를 떠올렸고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그를 추억하며 당시 취재를 재구성한다.
― 선생님 작품 중에 ‘그대 세월’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대 헐벗었던 유년기/ 전란의 소년기/ 돌을 져 나르던 청년기/ 형벌의 장년기’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대’는 누군가요? 남편이신 김세중(金世中·1928~1986년)님이신가요?
김남조 시인은 느릿느릿 이렇게 답했다.
“그 시에 이런 문장도 있지요. ‘그러나/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 모든 세월에/ 허리 굽혀 절하는/ 여자 하나 있잖니’.
김세중은 아니고 동시대 모든 연인이겠지요. 돌이켜보면 그리움을 느꼈다든지, 사랑을 느꼈던 사람이 하나가(한 명이) 아닙니다. 한 나무 안에 푸른 가지로 있건 열매로 있건, 그 인생에서 하나(한 명)는 O고 하나는 X가 아니고, 지나간 사람이든 지나온 사람이든 다 소중한 거예요.”
당시 그의 떨리던 음성, 압축된 어휘, 단문의 말씀이 그냥 한 편의 시였다.
“어떤 사람은 내가 조금 더 사랑해서 울었다든지, 어떤 사람은 내가 조금 덜 좋아해서 섭섭했다든지, 이런 모든 게 똑같이 내게 소중한 거예요.”
이런 말도 했다.
“사람의 재산 중에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 이것 큰 재산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성(個性)이란 측은한 것인지 몰라요. 가엾은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랑’이라고 안 하고 ‘자비’라고 하잖아요. 자비…, 슬프고 사랑스럽고…. 인간이 그것 때문에(가여워서) 사랑하는 경우도 많아요.
어린 아기의 귀를 보면 정맥이 보이는데, 빨개야 하는데 색깔이 파랗거든요. 왜 파랄까요? 어렸을 때 할머니와 같이 예배를 보는데 할머니에게 말했어요. ‘할머니, 하느님이 저기(하늘에) 계시는데 왜 (고개를 숙여) 밑을 보세요’라고. (웃음) 인간은 불쌍해서 사랑스러운 거예요.
(사랑은) 측은지심으로 지켜보고 싶은 그런 마음인 거죠. 자비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가 도대체 누구냐?
남편 김세중과의 사랑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을 만든 김세중은 서울대 조소과 교수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인 1986년 6월 24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향년 58세였다.
“우리는 결혼을 했어도 서로 바빠가지고 재미있게 어디를 간다든지 그런 게 별로 없었어요. 그리고 사랑한다는 건 배워도 배워도 안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늘 늦게 귀가했기에, 항상 문밖으로 쫓겨난 것 같은 그런 체념과….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일찍 귀가할 수도 있었는데, 처음(신혼 초)에 (남편이 퇴근하면) ‘오셨어요?’라고 말하곤 조그만 방에서 글 쓴다며 밤낮 이러고. 그런데 쓴 시를 보면 ‘사랑하는 이’가 나오는데 도대체 누구냐…”
― 오해를 하셨던 것이군요.
“거기서 오는 외로움이 있었던 거예요. 가지고는 있었지만, 가지고도 못 준 것…. 서로 사람이… 그러니까 가지고 있으면 주는 공부를 해야 돼요, (사랑을) 주는 공부….
그래서 어긋나고 별로 추억도 없이 떠났죠.”
대화 중에 이런 말도 했다.
“말하자면 부족했던 것이죠. 내가 덜 줬다는 것에 대한 아픔을 느끼는 겁니다. 《바람세례》(1988)라는 시집에 ‘나에게’라는 시가 있어요.
‘이제부턴/ 후회와 둘이 살면서/ 스스로 판결한 벌을 섬길지니/ 즉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손 내밀지 마라’
그러니까 (사랑이) 한 번 끝이 났고, (이후) 누구도 행복하게 할 감(냥)이 못 된다, 인간이 못 된다는 건데, 그런 절실한 느낌에서 ‘이 세상에 손 내밀지 마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의 판단을 하면, 내가 자격이 없다는 것, 한 번의 기회를 썼고, 또 한 번의 기회를 바라지 말라는 혹독한 선고 같은 것이죠.”
‘좋은 꿀물을 마시게 하라’
그는 “연인끼리 애교를 가지고 사랑을 달라고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결혼해 처음엔 사랑을 달라고 해야 한다는 느낌을 안 받아요, 대개. ‘엄마 나 사랑해줘.’ ‘그래? 네가 엄마 사랑이 필요하구나’라고 할 정도의 느낌을 모른다고요.
너의 결점만…, ‘너 왜 모자는 이렇게 삐딱하게 썼니?’ 이러니까 (점점) 선을 긋게 되고.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2020)에 있는 시 ‘성주(城主)’처럼 정말 ‘꿀물’을 타서 나눠 먹어야 돼요, 서로…. 근데 그때는 그 생각을 못 했어.”
그는 시집을 펴서 ‘성주’를 읊어주었다. 읊다가 ‘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는 대목에서 살짝 웃었다.
당신은 성주가 되었다
성 하나에 한 사람뿐인
그가 되었다
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모자를 벗지만
그때 웃음판이 멈추기도 한다
당신의 고독은 깊어 간다
탁월함이 인격인 건 아니고
행복이 가치의 지표도 아니다
재물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멀리 보며 전체를 생각하라
좋은 꿀의 꿀물을 타서
많은 이가 감미롭게 마시게 하라
겸허히 기도하라
-김남조의 시 ‘성주’ 전문
시인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했다.
“사랑한다는 것, 결혼한다는 것에 대한 존엄성이랄까, 그 막대한 사업이라는 걸 전혀 가르치거나 배우지도 못했어요. ‘네가 어떤 이와 살면 그 사람에게 너를 줘야 한다’는 게 결혼의 전(제) 조건이에요. 그걸 (바탕에) 깔아놓고 앉든지 서든지… 사랑을 의무로 알아야 합니다.”
진짜 엄마란…
시인은 20세기 한국 여류 작가들은 대개 불행한 사랑을 나눴다고 했다.
“옛날의 한국 선비들은 ‘그거(사랑)’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일제 때 남자들은 열다섯에 결혼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갔었잖아요. 방학 때 한 번씩 와가지고 웬 낯선 사내아이가 있으면 ‘저 앤 누구냐?’ ‘누구긴 당신 아들이잖아’ 하던 시절이었어요.
여자는 이화여전 정도 나와가지고 ‘이 사람, 괜찮은데…’라고 할 때는 대개 유부남이었어요. 이게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었죠.
작가 김○○과 최○○는 요만한 툇마루에서 해 질 녘 막걸리를 꼴딱꼴딱 마시는데 슬프고, 소설가 임○○는 남편이 의사였는데 (남편이) 죽게 되어 시댁에 갔더니 본처가 머리 풀고 남편 머리맡을 맏아들과 딱 지키고 있는데…. 시인 모윤숙은 안우상과 살 때 죽인다는 협박 편지도 받았어요. 겨우 결혼해서 살았던 게 작가 한무숙씨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도 예외 없이….”
― 김동길 선생이 모윤숙, 노천명, 김남조 선생을 ‘한국 현대사에 등장한 여성 시인 3인’으로 거명하셨더군요.
이 대목에서 모윤숙 시인과 인도 출신 외교관 K. P. S. 메논(Menon) 간의 어떤 ‘섬싱’에 대해 말했다. 메논은 1947년 해방공간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으로 남한에서 총선거 실시를 성사시킨 인물이다.
“언젠가 전숙희, 모윤숙, 조경희 선생이 (국제)펜대회에 나갔다가 인도에 들렀는데 메논 의장 내외가 저녁 만찬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전 선생이 모 선생의 표정을 보니 마치 사춘기 (소녀) 같았대요. 저녁을 잘 들고 호텔로 돌아와 전 선생, 조 선생이 깔깔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욕실에서 쾅쾅 부서지는 이상한 소리가 나더래요. 두 분이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까 욕실에서 (모윤숙 선생이) 머리를 벽에 박으며 울더래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분의 거대한 열정은 내가 따라갈 수 없다’고 그랬어요. 모윤숙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제가 조시(弔詩)도 읽었지만 욕실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운다는 게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존경스러운 열정이었어요.”
슬하의 3남 1녀 자녀들에 대해서도 이런 속내를 털어놨다.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게 많은데, 자식들이 엄마를 물론 사랑하지만은 친밀감이 적은 것 같다고 느끼는데….
비가 주룩주룩 오는 때 남의 집 추녀 밑에서 망가진 우산을 들고 초라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아들이 언제 오나 기다리는 엄마가 진짜 엄마예요. 그런 의미에서 난 진짜 엄마가 아니었던 거죠. 살고 보니까 가질 수 있었는데 못 가진 게 너무 많아요.”
우리나라 만세
선생은 자신의 늙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잔잔한 말씀이 모두 한 편의 감동스러운 시였다.
“내가 이렇게 나이 들어 늙으면서 하느님도 늙으셨어요.
아주 고령의 하느님….
내가 어렸을 때 촛불을 켜고 ‘주님!’ 이렇게 기도하면 눈물이 너무나 많이 솟아서, 그 눈물 중에 행복해서 기도한 기억이 있는데 진짜 영혼성이라는 게 종교 안에 있습니다.
그 종교 안에 차별이 없어요. 연극에서 나는 운전수, 너는 회사 사장으로 배역이 나뉘는 게 아니에요. 각자 위치에서 연기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가치가 이뤄지는 것이죠. 나는 시인이고 너는 시를 읽는 독자고…. 시인의 눈물을 보며 (독자는) 잊고 있던 눈물이 솟는 것이죠.
시는 하나의 촉매일 수 있어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촉매가 되어 시를 쓰지요. 그 사람에게 직접 화살처럼 가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시의 주인공은 (시를) 읽는 사람이야, 항상.”
고인은 마지막 시집인 《사람아, 사람아》의 맨 끝에 실린 ‘애국가’에 대해 말했다.
“시를 쓰고 눈물을 흘렸다기보다 눈물이 솟았다고 해야겠지요. 그 눈물도 하나의 피부에 불과한 것이고. 눈물 안에 실체가 있겠죠.
내 책을 많이 낸 일본의 출판사 사장이 와서 얘기하던 중에 ‘한국은 정말 복된 나라’래요. 일본은 건축허가를 받으려면 건축비의 거의 50%를 땅에다 묻어야 된대. 지진[내진설계] 때문에.
나는 이게 마지막 시의, 우리나라, 우리나라 정말 잘돼야 될 뿐 아니라, 굉장히 많은 복을 타고난 겁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김남조의 마지막 시집의 맨 끝 시 ‘애국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