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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공포의 외인구단〉 출간 40주년 맞은 만화가 이현세

“충만하게 살았고 충분히 행복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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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너 인생인 까치, 메이저로 올라오려 노력하다 부서지지만 타협은 하지 않아”
⊙ “작가의 길은 장거리 마라톤이지 단거리 승부가 아니다”
⊙ “까치를 만든 건 저지만, 캐릭터가 너무 커버리니 못 이기더라”
⊙ “롱런 작가가 되려면 매일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그리면 된다”
⊙ 〈공포의 외인구단〉 성공했지만, 애니메이션 〈아마게돈〉 실패, 〈천국의 신화〉 재판으로 고생
⊙ 44년간 그린 만화책 4174권을 AI에 학습시켜, 이현세 만화를 그리게 하는 ‘AI 이현세 프로젝트’ 추진

李賢世
1954년생, 경주고등학교 졸업 / 한국만화영상컨텐츠진흥원 이사장 역임. 現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 주요작품 〈저 강은 알고 있다〉(1978), 〈공포의 외인구단〉(1983), 〈아마게돈〉(1988), 〈블루엔젤〉(1988), 〈남벌〉(1993), 〈천국의 신화〉(1997), 〈버디〉(2007) / 한국만화문화상 공로상(1995), 아시아 만화대회 공로상(1999), 고바우만화상(2002), 대한민국만화대상 만화부문 대통령상(2007), 네이버웹툰 신인상(2022) 등 수상 / 저서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2014)
  동화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 피노키오의 이야기면서, 그를 만든 목수 제페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 피노키오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집을 떠나 온갖 풍랑을 만나는 피노키오를 무사히 데려오기 위해, 제페토는 죽음의 위기를 감수한다. 제페토와 피노키오는 끝까지 살아남아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만화가와 그가 만든 캐릭터라면 어떨까. 지난 10월 4일 이현세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 서울 양재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 벽 곳곳에 그가 창조한 인물들이 보인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역시 까치다.
 
 
  올해 마흔 살 된 까치
 

  까치의 본명은 오혜성,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1983년에 세상에 나왔으니 올해 마흔이다.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에선 배우 최재성이 연기해 큰 화제가 됐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로 시작하는 영화 주제가 정수라의 ‘난 너에게’ 가사처럼 사랑하는 여자 엄지를 위해 앞만 보며 달려가는 인물이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현세라는 이름과 까치는 붙어 다닌다. 작업실에 마주 앉아 물었다.
 
  — 까치와 엄지 이후 새로운 주연 캐릭터를 만들 생각은 안 했나요?
 
  “여러 번 시도했지요. 다 실패하더라고. 〈블루엔젤〉의 하지란 정도가 예외일까. 제 특유의 그림체 때문인지, 사람들은 누굴 그려도 까치로 인식해버리더군요. 아무리 남자 주인공 이름을 바꾸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그려놔도 ‘언젠가는 사고 치겠지’ 생각하는 겁니다. 이야기가 평범하게 끝나면 엉터리라 평가하고요. 까치를 만든 건 저지만, 캐릭터가 너무 커버리니 못 이기는 겁니다.”
 
  — 그 정도면 캐릭터가 살아 있는 셈이네요.
 
  “까치가 등장하면 무조건 책이 팔리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한창때는 대한민국 만화가 절반쯤을 까치가 먹여 살렸어요. 독자들은 까치가 등장하는 스타일의 만화를 보고 싶은데 제가 그려낼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다른 만화가들이 비슷한 스타일로 그렸지요.”
 
  이현세는 1978년 월남전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공식 데뷔했다. 1983년 대본소(貸本所)용 만화로 출간된 〈공포의 외인구단〉(1983)으로 그야말로 스타가 됐다. 인기에 외모까지 받쳐준 덕에 맥주 광고에도 출연했다. 이후 한동안은 이현세 시대였다. 〈남벌〉 〈블루엔젤〉 〈폴리스〉 〈아마게돈〉 발표하는 작품마다 대히트였다. 연재되는 그의 만화를 보려고 스포츠신문을 사보는 이들도 많았다. 대본소 책장마다 그의 만화책이 즐비했다. 대본소는 만화업계 용어다. 만화방(漫畵房)의 일본식 표현이다.
 
 
  안기부에 모인 만화가들
 
1983년 발간된 〈공포의 외인구단〉
  〈공포의 외인구단〉(이하 〈외인구단〉)은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첫째, 한국 만화가가 그려 성공한 유일한 스포츠 만화다. 〈외인구단〉 이후 야구, 축구 만화가 간혹 나오긴 했지만 〈외인구단〉만큼 성공한 예는 없다. 타이밍이 좋았다. 바로 전해인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야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을 때였다.
 
  둘째, 〈외인구단〉 덕에 성인들도 드러내놓고 당당히 만화를 볼 수 있게 됐다. 스포츠 만화의 틀에 엄지를 향한 까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어우러져서다. 요즘의 시선으로 보면 까치는 스토킹 혐의로 접근금지명령을 받고, 엄지는 ‘어장 관리’로 비판받을지 모른다. 성인도 만화 보는 시대를 여는 건 이 교수의 소망이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만화가들이 소집됐어요. 남산 리라초등학교 옆에 있는 애니메이션 센터에 그때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있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만화가들이 꾀죄죄한 차림으로 안기부 마당에 모여 섰어요. 자정 결의라며 외쳐야 했지요. ‘하나, 불량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하나, 이웃 국가를 폄훼하거나 비방하지 않는다. 하나, 국가 이익에 반하고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웹툰 작가들이 연예인처럼 유명해지고 대우받는 요즘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장면이다. 1980년대까지도 어린이날이 되면 여의도 광장에 ‘불량만화’를 쌓아놓고 불태우는 행사가 열렸다.
 
  “그때 젊은 만화가들이 깨달았어요. ‘만화 독자가 남녀노소로 확대되지 않으면 만화는 언제든 아동을 핑계 대고 없어질 수 있겠구나!’ 만화에 대한 검열도 심했습니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만화가 이현세가 그린 〈공포의 외인구단〉 원화. 사진=이현세
  — 어떤 식인가요.
 
  “제일 황당했던 게 이런 겁니다. 경찰이 도둑을 추격해요. ‘거기 서!’ 도둑이 힐끗 돌아보고 담을 넘어 도망갑니다. 그러면 수정하라고 지침이 와요. 공권력에 반항하는 장면을 넣었다는 거죠. 도둑이 일단 서야 되는 겁니다.”
 
  — 서야 되는군요.
 
  “이런 것도 있어요. 벽에 걸린 액자 속에 그림을 안 그려 넣을 수 있잖아요. 역광이 들어오는 걸 표현하거나 미학적인 묘사를 위해서. 그러면 그림을 그려서 채우라고 하는 겁니다. ‘음침하다, 무서워 보인다’면서요. 이걸 그려 넣어야 되나, 고민하며 앉아 있으면 자괴감이 듭니다. 이 직업을 계속해야 되나 싶었지요.”
 
  셋째, 〈외인구단〉은 그 시대 보통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냈다. 술주정꾼 아버지를 둔 오혜성, 유망주였지만 한쪽 팔을 잃은 최관, 혼혈아 하국상 등 하나같이 사회의 비주류, 실패자로 낙인찍힌 이들. 이들은 말한다. ‘최소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살고 싶다.’ 손병호 감독의 지도 아래 비주류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 재일동포 출신 천재 감독이면서, 선수들에게 지옥훈련을 시키는 손병호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김성근 감독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살아온 동선이며 지도하는 스타일도 비슷하지요. 스토리를 쓴 김민기 작가가 스포츠 마니아였어요. 김성근 감독을 모델 삼았다고 볼 수 있지요. 외인구단 자체는 당시 ‘도깨비 구단’이라 불린 삼미슈퍼스타즈를 모델로 했습니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강하다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인구단〉이 남긴 어록이다.
 
 
 
〈아마게돈〉 실패 후 ‘백서’ 펴내

 
  그런 그가 실패를 만났다. 애니메이션 〈아마게돈〉. 그가 총감독을 맡았다. 2년여간 제작해 1996년 개봉했다. 관객 수는 7만 명을 못 넘겼다. 이후 그는 실패를 복기(復碁)하는 《아마게돈 백서》를 냈다. 백서를 보면 제작비 25억300만원에 수입은 13억8700만원, 순손실이 11억1600만원이다.
 
  — 투자받은 금액도 엄청나지만, 백서를 낸 것도 대단합니다. 그래야 후세가 배우잖아요.
 
  “그런 의미로 한 건데 제 죄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그 뒤로 더 좋아진 것 같지 않거든요. 〈아마게돈〉이 제작될 때가 한국 애니메이션이 부흥할 수 있는 최고의 타이밍이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쥬라기공원〉으로 현대자동차 1년 수익을 벌었다’며 관심이 집중될 때였어요. 대기업들이 애니메이션에 눈을 돌렸습니다.”
 
  — 당시 여러 애니메이션이 제작됐지요.
 
  “대작 애니메이션 5개가 다 실패해 대기업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1번이 〈아마게돈〉, 그다음이 〈헝그리 베스트 파이브〉 〈붉은 매〉 〈홍길동〉이었어요. 〈원더풀 라이프〉가 대미를 장식했지요. 한국 애니메이션이 지금까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제 영향이 제일 큽니다.”
 
  — 실패의 원인은 뭐였나요.
 
  “원작자인 감독의 무능과 무지 때문이지요. 처음 〈아마게돈〉 제작위원회가 만들어질 때는 KBS 50부작 드라마로 기획했어요. 드라마로 방영하고, 그걸 바탕으로 극장판을 만들었으면 〈아마게돈〉이 아주 잘됐을 수 있어요. 그러면 다른 만화들도 계속 애니메이션화가 됐을 겁니다. 그런데 경영 쪽에서 영화로 돌린 겁니다. 그걸 막지 않은 제 잘못이지요.”
 
 
  대작 만화영화들의 실패
 
만화가 이현세가 등장한 OB맥주 광고.
  — 한국 애니메이션계가 극장판을 만들기엔 실력이 부족했나요.
 
  “한 작품을 한 회사에서 제작할 수 없었어요.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애니메이터들을 각 OEM회사가 한 사람씩 잡고 있었어요. 할 수 없이 각 회사에 나눠서 하청을 줘야 했지요. 결과를 보면 당연히 그림 수준이 동일하지 않겠죠?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선 특수 효과 더빙을 못 해 뉴욕에 다녀와야 될 정도였으니, 극장판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안 됐던 거죠.”
 
  — 50부작으로 제작했다면 〈아마게돈〉이 살아남았을까요.
 
  “퀄리티는 좀 떨어져도 이야기는 온전히 전달됐을 테니까요. 그때 제가 〈남벌〉을 그리고 있었어요. 〈남벌〉을 옆으로 밀어 두고 애니메이션에 전력으로 매달렸다면 드라마로 밀어붙였을 수 있었겠지요. 〈헝그리 베스트 파이브〉를 만든 이규형, 〈붉은 매〉를 만든 심상일, 모두 친구입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때 저희에게 시대를 보는 눈이 있었다면 다른 결과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죠.”
 
  — 성공시키려 노력했잖습니까.
 
  “오만했어요. ‘내가 하면 다 돼’… 만화가 계속 히트를 쳤으니까요. 경제적인 타격도 컸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엄청난 부자일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아마게돈〉 다음엔 출판사, 이현세 엔터테인먼트를 차려서 또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도했어요. 전부 말아먹었어요.”
 
  — 애니메이션에 특별한 애착이 있습니까.
 
  “해야 된다는 책무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사실 영화 쪽에는 관심이 적었어요. 애니메이션을 해야 한다는 책무는 느끼는데 애정은 갖지 못한 거죠. 색약 때문이었을까요? 투자했던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빚을 갚으려 하는데 기회가 오지 않네요. 나이 들면서 깨달은 겁니다. 타이밍이 무척 중요하더군요.”
 
  그는 고교 시절 적록색약(赤綠色弱) 판정을 받았다. 적록색약이 있으면 빨강과 녹색이 나란히 있을 때, 색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신호등이나 휴대전화 충전등을 볼 때 제대로 못 알아보는 식이다.
 
 
 
마광수가 이현세를 부러워한 이유

 
2000년 7월 23일 한국만화가협회와 시민단체회원 400여 명이 〈천국의 신화〉 음란물 판정에 항의하며 시위를 했다. 사진=조선DB
  1997년 그의 인생에 〈외인구단〉만큼이나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 출간된다. 〈천국의 신화〉. 그에게 두 번째 실패일까, 또 하나의 성공일까. ‘왜 우리 민족은 창세(創世)신화가 없을까. 한민족의 창세신화를 만화로 그려내겠다’, 만화가의 자존심을 걸고 시작한 작품이었다.
 
  “저보다 몇천 배 더 공부를 많이 한 작가들도 있지만 다들 창세 쪽은 다루기 부담스러워합니다. 남아 있는 자료가 없기도 하고요. 이건 만화가가 해줘야 할 부분이다, 이렇게 생각해 덤볐어요.”
 
  만화에는 문명 시대가 열리기 전 인간이 동물처럼 무리 지어 살던 시기가 등장한다. 집단으로 성교(性交)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게 문제가 됐다. 1997년 7월 검찰에 소환된다. ‘음란폭력물’을 그렸다는 이유였다. 결국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는다. 그러자 그는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출판사는 일찌감치 벌금 내고 빠졌어요. 출판사에 인세(印稅) 2억원도 돌려주고 저 혼자 재판을 시작했지요. 작품 활동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어요.”
 
  법정 밖에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자!’ 만화가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평론가들도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보다 몇 년 일찍 구속까지 된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의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마 교수는 소설 〈즐거운 사라〉를 낸 후 음란 혐의로 1992년 구속됐다. 마 교수는 그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때 마 교수를 만났는데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은 동료들이 같이 싸워주지 않나, 나는 문인협회에서조차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게 너무 서럽다.’ 마 교수는 다치기 쉬운 영혼이었어요. 예민하고 여린 사람이었지요.”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죄였다. 그는 끝까지 싸웠다. 결국 2003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6년이 걸렸다. 작가로서는 한창때인 40대를 재판으로 보낸 결실이랄까, 〈천국의 신화〉 사건을 계기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달라졌다.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2017년 검찰총장 취임 직후 그를 찾아왔다. 〈천국의 신화〉 수사를 두고 검찰을 대신해 사과했다.
 
 
  6년간 무료로 소송 도와준 이정락 전 대법관
 
재판 중인 〈천국의 신화〉를 위해 2001년 일본 만화가들이 보내온 격려 메시지. 사진=조선DB
  —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재판을 시작할 겁니까. 6년이 걸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요.
 
  “해야지요. 만화가로 떳떳하게 살아가려면요.”
 
  — 변호사 비용도 많이 들어갔을 것 같은데요.
 
  “안 썼습니다. 고등학교 15년 선배가 변호를 해주셨어요. 대법관까지 지낸 이정락 변호사입니다. 그분이 묻더군요. ‘후배는 예술가로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가.’”
 
  — 뭐라 답했나요.
 
  “‘그렇습니다’ 그러자 말씀하시더군요. ‘그럼 정식재판해야지. 내가 도와줄게.’ 6년간 무료로 변호해주셨어요.”
 
  당시 이정락 변호사는 이회창 후원회, 일명 부국팀 회장이기도 했다. 그가 2002년 이회창 홍보 만화 〈아름다운 원칙〉을 그리게 된 계기다.
 
  “전 사실 정치색이 없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이름을 올린 경우가 많아요. 김석기 의원(국민의힘)은 경주중 2년 선배라 후원회에 들어가 있지요.”
 
  경찰청 마스코트 ‘포돌이, 포순이’를 그린 것도 김석기 의원과의 친분이 계기였다. 당시 서울청 방범지도과장이었던 김 의원의 제안으로 1999년 탄생한 포돌이, 포순이는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저는 음주운전 하면 안 됩니다. ‘포돌이 아빠가 만취 상태로 음주운전 했다’ 기사가 뜨면 경찰청에선 당장 회의 열리고, 포돌이는 간판에서 사라질 겁니다.”
 
 
  강도 사건으로 노모 잃어
 
  〈천국의 신화〉 재판 기간 그는 여러 가지를 잃어버렸다.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건강이 안 좋아졌다. 그리고 어머니를 잃었다.
 
  1998년 4월 어느 날 새벽 그의 집에 강도가 들이닥쳤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미성년자들이었다. 범인들은 이현세의 노모(老母)가 극렬히 저항하자 살해 후 도주했다. 잡고 보니 상습범들이었다. 몰려다니며 돈을 훔치고, 신고를 못 하도록 부녀자는 강간했다. 나이트클럽에서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노모의 희생 덕에 이현세의 가족은 물론 잠재적인 피해자들이 안전할 수 있었다. 주범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그 사건에서 극복하셨나요.
 
  “극복이 되겠습니까. 안고 사는 겁니다. 그게 극복이 된다면 제가 특강을 하고 다니겠지요. ‘저 사람 진짜 대단해 다 극복하고 멀쩡해’ 밖에선 이렇게 볼 수 있지만 내면은 아닙니다. 그 일을 겪고 죄(罪)와 벌(罰)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 어떻게요?
 
  “강력 범죄를 처벌할 땐 나이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범죄를 자라온 환경 탓으로만 돌리는 것에 관대해지지 않더군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누구나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만화에서 말해왔던 걸 더 확고하게 품게 됐다고 할까요. 마이너 인생인 까치는 메이저로 올라오려 노력하다 부서지지만 타협은 하지 않잖아요. 나쁜 일은 깡패처럼 몰려오는 걸 그 시기에 알았습니다. 한 번에 하나씩 오지 않더군요.”
 
 
  기구한 가족사
 
  그는 두 달 전 어머니를 ‘또’ 잃었다. 여기엔 그의 가족사가 담겨 있다.
 
  그의 조부모는 젊은 시절 생계를 위해 만주로 갔다. 흑룡강변에 정착해 살던 어느 날, 조부가 순사에게 총살을 당했다. 만주인들 풍속대로 남편을 풍장(風葬)한 할머니는 아들 셋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돈을 벌어오겠다며 둘째 아들이 만주로 돌아갔다. 그러고 한국전쟁이 터졌다. 둘째 아들은 인민군 장교가 돼서 나타났다.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나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북으로 후퇴했다. 첫째 아들은 ‘괴뢰군 부역자’로 몰려 헌병대에 끌려가 처형됐다. 셋째 아들이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엄마 젖을 떼자마자 죽은 첫째 아들, 그러니까 큰아버지에게 입양된다. 출생의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누나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그 아이가 바로 이현세다.
 
  “학창 시절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어요. 다락방에 처박혀서 책 읽는 걸 좋아했지요. 학교에서도 항상 뒤에 앉았어요. 늘 눈치를 봤어요.”
 
  — 왜 눈치를 보나요?
 
  “할머니가 늘 당부하셨으니까요. ‘말조심, 사람 조심해야 한다, 절대 잡혀가면 안 된다.’ 둘째 아들은 북에 있지, 첫째 아들은 처형당했지. 할머니는 적(敵)의 나라에 살고 있었던 겁니다.”
 
  — 그럴 수 있겠네요.
 
  “어느 날 일이 터졌어요. 경주에 유물이 많잖아요. 다니던 학교의 음악 교사가 아이들이 도자기, 기왓장 같은 걸 가져오면 돈으로 바꿔줬어요. 그때는 유적지에 담장도 없었어요. 아이들이 밤에 김유신 장군묘 같은 곳에 가서 하나씩 빼오는 겁니다. 그렇게 하도록 교사가 유도한 거죠.”
 
  — 학교에 골동품 가게를 차렸네요.
 
  “옛날 돈도 가져오면 돈으로 바꿔준다고 한 거예요. 제 동생이 다락방에 자루로 있는 희한한 화폐를 생각해낸 거예요. 그걸 10장 가져다 주니 선생이 난리가 났어요. 김일성 얼굴이 그려진 인민군 화폐였으니까요.”
 
 
  연좌제의 그늘
 
  — 그게 왜 집에 있나요?
 
  “삼촌이 퇴각하며 자루로 주고 간 겁니다. ‘어머니 이제 잘살 날이 옵니다’ 말하고. 노인네가 그걸 생명처럼 간직하고 있던 겁니다. ‘이러다 손자들 다 죽이겠다’고 선생이 집에 와서 난리를 치니 할머니가 결단을 내리더군요. 전부 태워버렸어요.”
 
  — 큰 문제는 안 됐나 보군요.
 
  “그래도 눈치는 있어, 동생이 ‘산에서 주웠다’고 둘러댄 겁니다. 선생은 삐라라고 생각한 거지요.”
 
  — 아찔하네요.
 
  “어릴 때 담 너머로 보면 항상 형사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늘 감시 대상이었던 겁니다. 지폐를 태우고 삼촌 제사도 지내기 시작했어요.”
 
  — 삼촌은 그 후 소식이 없었나요.
 
  “조총련을 통해 편지가 왔었어요. 할머니는 글을 모르셨어요. 삼촌 때문에 집안이 박살 났으니 두 며느리한테 말할 순 없잖아요. 가족들 몰래 제게 읽어달라고 하셨지요. 북에서 아이 다섯을 낳고 살고 있다고 했어요. 삼촌은 다 알고 있더라고. 자신 때문에 형이 총살당한 걸요.”
 
  — 이산가족 상봉 때 만날 순 없었나요.
 
  “삼촌 쪽에서 싫다고 했어요. 저희 집안에 자신을 반길 사람이 할머니밖엔 없잖아요. 죄의식이 있었겠죠.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중국 지린(吉林)에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제가 할머니를 모시고 가기로 했는데, 할머니가 그만 대퇴부 골절상을 입었어요. 결국 얼굴을 못 보고 돌아가셨어요.”
 
  빨갱이 집안이라는 연좌제의 그늘이 드리워지긴 했지만, 그는 집안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학창 시절부터 만화는 친구이자 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화가가 되기 위해 서울 모래내에 있던 나하나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막상 만화계로 들어가 보니 미래가 너무 안 보여요. 6개월을 못 버티고 고향으로 내려갔지요. 한데 할머니가 울진에서 열리는 문중 제사에 가자는 겁니다. 거기서 알게 됐어요. 제가 작은어머니, 작은아버지라 부르던 분들이 저의 친부모였다는 걸요. 이 나이쯤이면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하고 집안 친척들이 제게 말해서 알게 됐지요.”
 
  — 그때까지 전혀 몰랐나요.
 
  “몰랐어요. 저 빼고 온 가족이 다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어떻게 그 정도로 둔했나,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삼촌이 왜 그렇게 자주 우리 집에 온 건지 그때야 이해됐어요. 제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감전(感電)으로 돌아가셨어요. 삼일장(三日葬) 내내 저는 학교에 갔어요. 그때는 삼촌이었으니까요.”
 
  — 그분은 아들을 만나러 온 거네요.
 
  “세상에서 우리 작은아버지가 제일 마음씨가 좋은 것 같아, 그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 양반이 보냈을 애틋한 신호가 저한테는 제대로 전달이 안 된 거지요.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기억이 너무 조각조각이라 그걸 그러모으기도 벅찹니다.”
 
  — 아버지를 한번쯤 만날 수 있다면 만나고 싶나요?
 
  “아버지가 술을 엄청 좋아하셨어요. 밤새도록 술 한 잔 하며 얘기해보고 싶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뭐가 그리운지 묻고 싶어요.”
 
 
  “평생 경계인으로 살았다”
 
  — 성인이 되자마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거군요.
 
  “집에서 도망쳐야 했어요. 적록색약이라 미대도 못 가니, 다시 만화계로 돌아갔지요. 숨어 있기 제일 좋은 곳이니까요. 군대 갔다 올 때까지 집에 안 갔어요.”
 
  — 시간이 흐른 후엔 괜찮아졌나요?
 
  “평생 경계인(境界人)으로 살았습니다. 두 어머니가 다 살아계실 땐 큰어머니(법적 어머니) 앞에선 친어머니를 항상 숙모라 불러야 했죠. 친동생들 앞에선 친어머니를 작은엄마라 부를 수도 없었고요. 누님들에겐 뺏기고 싶지 않은 동생으로, 동생들에겐 무심한 형으로 살아왔지요.”
 
  — 〈외인구단〉의 대성공으로, 어릴 때 받은 상처가 어느 정도 낫지 않았나요?
 
  “할머니가 아주 자랑스러워하셨어요. 할머니, 어머니 다 모시고 서울에서 살았지요. 물질적으로는 좋아졌는데, 가슴 속 상처는 낫지 않더군요. 만화가 히트해도 마음 한구석엔 우울한 정서가 남아 있었습니다. 즐거운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고 소음으로 들렸고요. 그나마 술을 마시면 위안이 됐죠.”
 
  — 강도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은 호적상 어머니, 큰어머니셨군요.
 
  “어머니 제삿날이 되면 가족들이 숙연해집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저항을 하셨기 때문에 두 딸이 무사했으니까요. 원래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유명인사는 안 건드립니다. 수사력이 집중되니까요. 주로 약자(弱者)들을 건드리죠. 이 아이들이 그때 안 잡혔으면 지존파 같은 집단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 두 어머니 다 돌아가시고 이제 진짜 고아(孤兒)군요.
 
  “윗세대 간에 얽힌 복잡한 인연은 끊어졌지요. 그 얘기들을 글로 내자는 얘기를 듣는데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 기억과 얽혀 있는 이들의 상처를 헤집고 싶지 않아요.”
 
 
  “저를 키운 건 자부심이 아닌 열등감”
 

  그는 2012년 위암 진단을 받았다.
 
  — 왜 하필 나인가, 왜 나한테만 시련이 닥치나 생각하지 않았나요.
 
  “‘올 게 왔구나’ 암 진단 받고 제일 먼저 든 생각입니다. 술담배를 워낙 많이 했으니까요. ‘나는 60까지만 살아도 충분해! 더 살고 싶지 않아!’ 객기 부리며 했던 말이 있는데, 창피해서라도 ‘왜 하필 나야’ 말 못 하죠. 다가오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낙천적 긍정주의자라 할까요. ‘그래 이건 오게 되어 있었던 거야’ 생각하죠.”
 
  긍정적인 태도 덕일까. 그는 암을 극복했다. 지금도 대학에 강의를 하러 나간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세종대에서 강단에 서고 있다. 젊을 때 다니지 못한 대학을 27년째 다니는 셈이다.
 
  — 〈외인구단〉이 일찌감치 성공했으니 학력 콤플렉스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있었어요. 저를 키운 건 자부심이 아닌 열등감이었습니다. 만화는 예술로 인정해주지 않을 때였잖아요. 대학 안 나온 것도 콤플렉스였죠. 〈외인구단〉이 빵 터지니 갑자기 인터뷰가 들어옵디다. 학력은 어떻게 되냐고 묻기에 그랬지요. ‘대학교 구경은 좀 했습니다.’ 이 대답이 대학 중퇴가 되더니 10년 갔어요.”
 
  — 학력 위조가 됐군요.
 
  “이걸 정정해야 하는데 생각을 해도,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 수도 없잖아요. 마침 골프 만화 〈버디〉를 그릴 때였어요. 3권 소제목이 ‘핸디캡’이었어요. 서문에 썼지요.”
 
  2007년 출간한 〈버디〉 서문의 한 대목이다.
 
  〈‘까치와 엄지’로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됐고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인터뷰에서 우쭐대는 기분에 대학을 중퇴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때부터 학력은 25년간 벗어날 수 없는 핸디캡이 됐다. 나는 유난히 핸디캡이 많은 사람이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 핸디캡이 됐고 철이 들면서는 연좌제가 핸디캡이 됐다. 미대를 가려고 했을 때는 색약이 핸디캡이 됐다. 골프에서의 핸디캡은 배려받을 수 있지만 인생이라는 게임에서의 핸디캡은 평생 어둡게 따라다닐 수 있다. 매일을 인생의 첫날처럼 그리고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고 싶어서 나의 핸디캡을 드디어 인정하고 극복할 생각이다.〉
 
  — 만화책을 통해 공개 고백을 했군요.
 
  “서문을 출판사에 보내고 나니 기자들이 몰려오더군요. 비판 기사가 실리고요. 시원했어요. 내내 마음에 걸려 있었거든.”
 
 
  ‘천재는 보내줘라’
 
  그는 2014년 낸 책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2014)에서 ‘자기 확신’을 강조했다. 자기 확신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이다.
 
  —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이 성공하는 거 봤나요? 그런 사람은 로또에 당첨돼도 그 돈을 관리하지 못할 겁니다. 길게 보면 잘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학교 제자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림 그리는 재능이 뛰어나고, 글 쓰는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오랫동안 작가 활동하는 게 아니에요. 좋아서 하는 아이가 오래갑니다.”
 
  —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생물학적으로 알 수 있어요. 사람 그리면서 눈 코 그리다가 갑자기 배고파서 밥 먹으러 간 적이 있는 사람은 작가 하면 안 됩니다. 섹스하다 갑자기 밥 먹으러 가나요? 깊이 몰입하면 외적(外的)인 건 멈추게 됩니다. 그게 좋아하는 거예요. 롱런 작가가 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합니다.”
 
  — 어떻게요?
 
  “매일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그리면 됩니다. 사람 얼굴을 그리든, 사진을 보고 그리든요.”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회자(膾炙)되는 그의 글이 있다.
 
  〈새 학기가 열리면 천재들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꼭 강의한다. 그것은 천재들과 절대로 정면승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재를 만나면 먼저 보내주는 것이 상책이다. 작가의 길은 장거리 마라톤이지 단거리 승부가 아니다. 천재들은 항상 먼저 가기 마련이고, 먼저 가서 뒤돌아보면 세상살이가 시시한 법이고, 그리고 어느 날 신의 벽을 만나버린다.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신의 벽을 만나면 천재는 좌절하고 방황하고 스스로를 파괴한다.〉
 
 
  “학교는 작가의 무덤”
 
  — 천재를 만난 적이 있나요.
 
  “장태산 작가의 데뷔작은 지금 봐도 정말 잘 그렸어요. 제 데뷔작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지요.”
 
  — ‘이현세는 만화 천재’라고 하는 평가도 있는데요.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만화에 같이 입문한 친구들 10명 중 9명은 아버지한테 다 끌려가다시피 떠났어요. 미래가 없었으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만화를 계속 그릴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안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어요.”
 

  — 교수와 작가를 병행했는데요. 만화에만 전념했으면 더 많은 작품을 그려내지 않았을까요?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자랑스러운 한 시기였던 건 맞아요. 아이들에게 제가 갖고 있는 걸 전해주고, 아이들을 위해 저도 공부를 했겠죠. 그런데 거기에만 만족하기에는 제가 만화를 너무 좋아하는 겁니다. 윤태호 작가 같은 후배들에겐 이렇게 얘기하죠. ‘작가에게 학교는 무덤이다.’”
 
  — 왜 무덤인가요. 시간 여유가 없어져서인가요?
 
  “작품 활동을 하면 사실 가족 눈치를 보게 됩니다. 학교에 있으면 물론 학생들 눈치를 보게 되고요. ‘우리 교수님 작품이다’ 하며 애들은 무조건 찾아 보거든요. 본을 보여야 하니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겁니다. 〈천국의 신화〉 재판 기간에도 자기 검열을 했는데, 그래도 그 검열은 의미가 있지요. 끝까지 싸운 덕에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데 한 역할을 했으니까요. 학교는 좀 달라요. 작가 입장에서 보면 많은 걸 뺏긴 거죠. 그래도 후회는 안 합니다.”
 
 
  “웹툰, 화장실 낙서처럼 신선하고 충동적”
 
  그가 제자들을 기르는 동안 한국 만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웹툰’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일본에선 망가와 애니메, 게임 세 가지가 탄탄히 협력하고 있어요. 미국은 마블 영화 같은 히어로물과 그래픽 노블이지요. 유럽에선 만화의 원화(原畵)가 예술품처럼 거래됩니다. 그 시장이 꽤 커요. 한국은 웹툰으로 치고 나갔습니다.”
 
  — 일본 만화 기업들이 웹툰 시장엔 진출하지 않았네요.
 
  “일본은 인터넷으로 만화를 공급하면 출판 만화 시장이 어떻게 될까 오랫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그사이에 네이버, 카카오 같은 한국 기업들이 일본 시장에 진출해 잘하고 있어요. 조만간 일본의 만화출판사 슈에이샤(集英社)가 웹툰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프랑스나 동남아 국가들도 한국 웹툰을 롤모델로 따라오고 있어요.”
 
  — 요즘 인기를 끄는 영화나 드라마 중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많더군요. 최근에 화제가 된 〈무빙〉 〈경이로운 소문〉 모두 웹툰이 원작이에요.
 
  “당연한 겁니다. 30년 전부터 공무원들에게 얘기한 게 그거였어요. 소설은 문턱이 높지요. 웹툰과 웹소설은 다릅니다. 만화를 좋아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의사가 된 사람이 퇴근하고 그려 올릴 수 있는 게 웹툰이거든요. 그 속도와 자유로움이 다른 매체에는 없죠. 연재할 수 있는 플랫폼 공간도 무한히 열려 있고요. 화장실 낙서처럼 신선하고 충동적입니다. 웹툰이 콘텐츠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어요.”
 
 
  “깔려 있는 진실을 알려면 책을 읽어야”
 
  그는 지난해부터 올해 3월까지 웹툰 〈늑대처럼 홀로〉를 연재했다. 곧 새로운 작품에 들어간다. 70세 현역 작가다. 일본엔 80세가 넘어서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만화가들이 여럿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82세인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는 93세로 사망할 때까지 만화를 그렸다. 18세에 데뷔한 후 62년간 야구 만화를 그린 미즈시마 신지는 81세에 은퇴했다. 한국은 다르다. 현역 활동 중인 만화가 중 그가 최고 원로급이다.
 
  —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이 뭔가요.
 
  “출판 만화에서 웹툰으로 세상이 쓰나미처럼 한순간에 바뀔 줄 몰랐습니다. 자기 각성을 하게 되더군요. 마음을 먹었어요. 작가로서 작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자. 대박을 친다든지, 이정표가 될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편해져요.”
 
  그는 독서가로 잘 알려져 있다. 요즘도 책을 읽는지 궁금했다.
 
  “그럼요. 행간을 짚으며 책을 쭉 읽어가다 보면 내가 생각하는 상념, 내가 만드는 어떤 공간이 존재합니다. 유튜브는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를 보는 거고요. 요즘처럼 책은 안 읽고 유튜브만 보면 사실은 알아도 진실을 모른다고 할까요. 깔려 있는 진실을 알려면 책을 읽어야지요.”
 
  — 돌아보니 지금까지 여러 시련을 마주하셨군요.
 
  “저는 운명론(運命論)에 기대어 생각합니다. 하필 그때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 화나지만 운명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해버리는 거죠. ‘그래, 이건 오게 되어 있었던 거야’… 생각보단 상처를 덜 입습니다. 어릴 때부터 경계인으로 살아오다 보니, 자기 스스로 상처를 핥아 치유하는 능력을 갖게 된 겁니다.”
 
  — 살면서 해온 선택들에 후회는 없나요.
 
  “내가 선택을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른 쪽 길은 가지 않은 길이니까요. 충만하게 살았고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리더는 자기 선수를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안 돼”
 
  문득 그는 ‘낭떠러지’를 입에 올렸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드디어 낭떠러지에 도착했는데 어떡하지? 뛰어내려야 하나,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나?’ 항상 새로운 소재를 찾아 그려왔어요. 그리고 싶은 걸 못 찾아낸 적이 없었어요. 최근엔 달라요.”
 
  — 어떻게 다른가요.
 
  “왜 절벽 끝에 서 있는 느낌일까? 날아야 되나 점프해버려도 되나, 평생 나를 믿고 달려왔는데 이제는 내가 아니라 세월을 믿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디지털 도움을 안 받고 여전히 손으로 그리는 탓도 있겠죠. 안 쓰던 안경을 써야 하고, 지구력이 예전 같지 않아요.”
 
  — 다른 작가들처럼 이제 디지털 프로그램을 쓰시지 그러세요.
 
  “그러면 오랫동안 함께 일한 직원 두 명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 친구들도 벌써 50대인데요. 리더는 자기 선수를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안 되죠. 우리 시대 가장(家長)은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방법은 있겠지요.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항상 열렸으니까요.”
 
  대화를 마치고 그와 함께 작업실을 나섰다. 건물 복도에 커다란 까치(오혜성) 그림이 걸려 있었다. 까치를 마주한 그의 눈길이 편안해 보였다. 돌아보면 그는 자신이 창조한 까치와 함께 집안의 가장 역할을 감당해온 게 아닐까. 운명의 뒤틀림을 까치와 함께 견뎌냈다. 스스로를 ‘까치 아버지’라 부르지만, 까치는 그가 기댈 수 있는 친구, 형제였을지 모른다.
 
  그런 까치에게 그는 생명을 주려 한다. 새로운 도전, ‘AI 이현세 프로젝트’다. 44년간 그린 만화책 4174권을 AI(인공지능)에 학습시켜, 이현세 만화를 그리게 한다는 목표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인공지능의 뇌를 장착한 채 웹툰 속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까치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동화 속 피노키오가 소원대로 인간 소년이 되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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