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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인간탐험 원조 오효진

“감동할 때까지 묻고 또 묻고 또 묻고…”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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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는 결국 그 사람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어야 해요”
⊙ 1985년부터 7월호~90년 5월호까지 〈오효진의 인간탐험〉 연재. 당시 정상급 인물 인터뷰로 독자 사랑 받아… 2001년부터 1년간 인간탐험 재개
⊙ 《월간조선》 재직 당시 발행부수 3만 부에서 46만 부로 늘어
⊙ 기사 제목 하나에 10만 부가 왔다 갔다… “인간탐험을 쓰는 동안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죠”
⊙ “최악의 인터뷰는…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가지고…”
⊙ “성철(性徹) 스님 인터뷰는 실패했어요. 무애(無碍)해야 되거든요, 그 정도 고승(高僧)이시면”

吳效鎭
1944년생. 서울대 국문과, 同 대학원 졸업, 충북대 대학원 문학 박사 / MBC 문화방송 기자, 《월간조선》 《조선일보》 기자·부장대우, SBS 보도국장, 자민련 청원지구당위원장, 정부 공보실 실장 및 정부 대변인, 충북 청원군수 역임
사진=조준우
  기자는 2005년 《월간조선》에 입사해 오효진(吳效鎭)이란 이름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인기 만점의 〈오효진의 인간탐험〉은 인물 인터뷰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가 만난 이도 최정상급 인물이었다. 노태우(盧泰愚), 정주영(鄭周永), 조용기(趙鏞基), 최석채(崔錫采), 박태준(朴泰俊)… 개발연대 시대 거인(巨人)들의 겉과 속을 말과 글로 담았다. 오효진은 ‘인간탐험’ 시리즈를 통해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월간조선》과 《조선일보》에 있으며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곤 글쟁이의 길을 멈추고 SBS 보도국장이 되었고, 정부 공보실장 겸 대변인이 되었다.
 
 
  《사상계》 통해 문장 수련
 
1988년 4월 《월간조선》 기자들이 출근 복장 그대로 봄나들이를 떠났다. 설악산을 넘어 동해로 향했다. 왼쪽부터 오효진, 유정현(편집장), 김종환, 김동현, 박봉현, 박찬희, 서병욱, 정호승, 조갑제, 권영기 기자다.
  2001년 7월, 대한민국에서 말을 가장 잘하고 글을 가장 잘 쓴다는 이어령(李御寧) 선생과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월간조선》에 ‘인간탐험’ 시리즈를 재개했으나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펜을 접고야 말았다. 다행히 충북 청원군수(재임 2002~2006년)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운(運)은 그다지 없었다. 15대 총선(1996년)에서 370표 차로 낙선, 16대(2000년) 총선에서는 17표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미련이 깊이깊이 남을 만한 한 끗 차이였다. 1996년에서 2008년까지 5번 선거에 나가 4번 낙선(落選), 선출직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그사이 혹은 이후에도 틈틈이 책을 펴냈다. 소설집 《인간사육》, 콩트집 《가을만 되면 미치겠네》 《사주팔자 고칩시다》 《톡 까놓고 말합시다》, 르포집 《통일교 그 천사와 총칼》 《재벌들의 전자전쟁》, 시집 《15센티의 태양》 《고운 꽃은 시들지 않으리》, 사진집(영상수필집) 《내가 본 세상, 즐거운 인생》 《개망초의 행복》 《철없는 남편 바보 같은 아내》 등 글쟁이 본업의 끈을 놓진 않았다. 또 충북대 대학원에 입학해 2011년 8월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정치적 압력 대응 양상〉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초사》 굴원 편의 ‘어부사’처럼 세상사, 창랑의 물이 맑으면 얼마나 맑을까. 그는 백면서생(白面書生) 글쟁이 길을 버리고 저 거친 탁류(濁流)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고 머무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그도 석양을 등지고 암소의 등을 타고 귀가하는 늙은 농부의 나이가 되었다. 기자는 오효진의 삶을 탐험해보기로 했다. 최고의 글쟁이를 상대로 글을 쓰는 분별없는 만용이 어리석지만 기왕에 맡게 됐으니 최선을 다해보려 애썼다.
 
  지난 9월 8일 오효진을 만나러 세종시로 내려가며 괜히 맡았다는 후회와 자책, 뻔뻔하게도 쏟은 물을 컵에 담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것도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효진은 서울대 국문과(65학번)와 동(同) 대학원을 나왔는데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잉어와 꼽추〉가 당선돼 일찌감치 작가의 길을 열었다. 글쟁이 수련 과정이 궁금했다.
 
  “글 쓰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하고 청계천 헌 책방에 가서 당시 격조 높은 종합 월간지 《사상계》를 통권 1권에서부터 100권까지 샀어요. 그놈을 짊어지고 와서 뜨거운 여름날 하숙방에 틀어박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읽어재꼈지요.
 
  그걸 다 읽고 나니 어렴풋이 먼동이 터 오는 것 같았어요. 당시 《사상계》에는 시·소설·수필 같은 문학의 여러 장르에 속하는 글에서부터 정치·경제에 관한 기사는 물론 심지어 박사 학위 논문 같은 학술논문까지 실려 있었어요.
 
  한 권의 잡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글을 모두 접할 수 있었어요. 대체로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200자 원고지로 1만 장 분량의 습작을 해야 한다고 하죠. 단편소설로 따지면 100편쯤 되는 분량입니다. 아마 나의 경우도 이보다 적지는 않을 만큼 습작을 했지 싶습니다.
 
  내가 소설가가 되니까 아버님이 너무 기쁘셔서, 친구분들을 모아가지고 국수를 삶고 막걸리를 받아다가 잔치를 하셨대요. 그때 내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안 잊어버려요. ‘얘야. 네가 우리 집 앞 강에서 잉어를 잡았으니 앞으로 태평양에 나가서 고래를 잡아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소설가로 죽자!’, 이 생각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어요.”
 
 
  고3 담임, 방송기자, 그리고 해직기자
 
  서울 숭문고에서 국어 교사가 되어 4년간 고3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MBC 문화방송 기자가 되었다. 만 서른한 살에 전업한 것이다. 그때가 1974년이었다. 응시제한 연령을 넘겨 입사 원서를 받아주지 않아 창구 담당 직원과 말다툼까지 있었지만 입사성적이 워낙 좋아 합격할 수 있었단다.
 
  1980년 광주 5·18 비극 때 취재팀장으로 광주에 다녀온 후 동료 기자들 사이에서 보도 자유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자 ‘언론 자유 선언문’을 썼는데, 이로 인해 포고령 위반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필 그가 그런 선언문을 쓰고 십자가를 진 이유는 묻지 않았으나 운명이고 팔자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4개월 만에 형 집행 면제로 출감했다.
 
  “제가 그 전에 헌병단가를 지어준 적이 있어요. 군사 재판 도중에 변호사에게 이를 알려줬더니, 변호사가 집총한 헌병 중 한 명을 즉석에서 증인으로 신청했어요. 그 헌병에게 헌병 단가를 한번 불러보라고 했어요. 그런 뒤 재판관에게 ‘이 노래를 작사한 이가 본 피고인’이라고 하자, 법정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그 덕분에 형 집행 면제가 됐지요.”
 
  하는 일 없던 해직기자 시절, 잡지 《월간 마당》에 〈문제를 풀고 문제를 내는 문제의 지하철〉(1982년 6월호), 〈고등학교는 시험선수 양성소인가〉 (1982년 4월호)라는 글도 쓰고,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던 잡지 《정경문화》에 〈고(高)여인 여대생 사건 검사 변호사 법정 밖 백열(白熱)공방〉(1982년 8월호), 〈의병장 후예들 정처(定處)는 어딘가〉(1983년 8월호)를 쓰는 프리랜서로 뛰어다녔다.
 

  ― 어떻게 해서 《월간조선》에 입사까지 하게 됐나요.
 
  “1982년 4월 경남 의령에서 우범곤 순경 사건이 일어났어요. 경찰서 출입기자들이 우르르 현지에 내려가 하루 이틀 있다가 다 떠나버렸어요. MBC 기자 시절 알고 지내던 《조선일보》 정규만 기자가 신문사에다 ‘의령에 작가를 보내 르포를 쓰게 하자’고 제안했대요. 당시 제일 잘나가던 작가가 최인호(崔仁浩·1945~2013년)였는데 그분이 너무 바빠가지고 섭외가 안 돼 나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래, 의령에 내려가 한 집, 한 집 전부를 돌아다녔어요. 당시 주민 62명이 사망했는데 넘버링을 하며 1번은 어떻게 죽었고, 2번은 어떻게 죽었고… 끝까지 번호를 매기면서 돌아다녔어요.”
 
  ‘우 순경 총기난사 사건’은 1982년 4월 26일 일어났다. 현직 순경이던 우범곤이 동거인과 말다툼 후 흥분 상태에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소총과 실탄, 수류탄을 들고 의령군 궁류면 내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기를 난사한 끔찍하고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모두 62명이 사망했으며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우 순경은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아이고 참, 나도… 그때 500매인가, 600매를 썼어요. 다 쓴 후에 ‘실으려면 싣고 말려면 마세요’라는 식으로 (원고를) 《월간조선》 계시던 이흥우(李興雨)라는 분에게 갖다 드렸어요. 시인이시기도 한 그분의 정확한 직함은 기억나질 않아요. (인명록을 찾아보니 당시 《월간조선》 주간 겸 《조선일보》 출판편집국 부국장이었다.)
 
  그분이 읽으시다가 막 우시더라고. 300장을 싣고 그다음 달에 나머지 200장인가, 300장을 실었어요. 그걸 보고 많은 사람이 막 울기도 하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조선일보》에서 나를 주목하기 시작한 거예요.”
 
 
  세상천지 사람들아. 이런일이 우짠일고…
 
프리랜서 작가이던 1982년 《월간조선》 6월호에 오효진이 쓴 우범곤 순경 양민 학살 사건 르포 기사 〈세상천지 사람들아 이런일이 우짠일고〉 첫 장이다.
  그때 오효진이 《월간조선》 6월호에 쓴 르포 제목은 〈세상천지 사람들아. 이런일이 우짠일고〉였다. 르포 기사의 첫 문장은 이랬다.
 
  〈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선들선들 봄바람이 불었는데 어제는 하루아침에 여름이 된 듯 날이 찌더니, 오늘은 구름까지 잔뜩 찍어 눌러 후텁지근하기 짝이 없다. 끈끈하고 답답한 날씨였다.…〉

 
  ― 최인호 선생 대신 오효진에게 글을 의뢰한 게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군요.
 
  “내가 감옥에 있다 나오니까 도무지 내게 글 청탁을 안 했어요. 무서워서. 또 내가 반골(反骨)이니까. 근데 내가 감옥 갔다 온 줄 모르고 저축추진중앙위원회에서 홍보물 만드는 사람 하나가 길에서 날 보더니 저축을 장려하는 글 한 편을 써달라고 했어요. 내가 더러 사보에다 콩트를 쓴 걸 기억한 겁니다. 당시 아무 할 일이 없던 때인데 너무 반가워가지고, 진짜 밤을 새워 (200자 원고지) 10장을 써서 갖다 줬어요. 그 저축 홍보물이 하필 잡지 《월간마당》 편집장이던 허술(許鉥) 부장 책상 앞에 간 거예요. ‘어? 이 사람, 글 쓰네’ 했던 겁니다.
 
  그 《월간마당》에 있던 허술, 조갑제(趙甲濟) 기자가 훗날 《월간조선》으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서 나를 떠올렸던 겁니다.”
 
《월간조선》 1984년 7월호에 실린 〈독점 인터뷰 안두희 고백 1부〉 기사(위)와 85년 7월호에 실린 첫 〈오효진의 인간탐험; 이민우 주연인가 조연인가〉 기사다.
  교양잡지로 출발했던 《월간조선》은 1982년 허술 편집장이 부임하면서 종합 시사잡지로 탈바꿈했다. 입사하던 무렵 《조선일보》 방우영(方又榮) 사장(작고)에게 오효진이 ‘저는 전과자인데요’라고 했더니, 방 사장이 ‘우리는 사형수도 불러다 쓴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오효진은 《월간조선》 1984년 7월호에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를 독점 인터뷰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듬해 85년 7월호부터 〈오효진의 인간탐험〉이 연재되었다. 첫 탐험 대상은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였다.
 
  오효진 기자는 이민우 총재의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글을 읽으니, 거창하지 않고 정확하게, 무엇보다 치밀하게 쓰기 위해 애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국회 신민당 총재실에서 이민우(李敏雨·70) 총재를 가까이서 처음 면대하면서 기자는 사진이 진(眞)짜를 제대로 그리지(寫) 못하고 있다는 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총재를 먼발치에서 보거나 스쳐 지나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가까이 마주 앉아 정면으로 마주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신당 바람과 함께 고희(古稀)의 나이에 신인처럼 새롭게 클로즈업된 이 총재의 모습을, 그 클로즈업된 신문의 사진이나 TV의 화면을 통해 봐온 셈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진에서 받은 이 총재의 인상은 솔직히 ‘건장하고 마음 좋게 생긴 충청도 노인’쯤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가까이서 본 이 총재는 그런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부처님의 귀처럼 크고 축 늘어진 귀, 눈 아래 둥글게 매어 달린 와잠(臥蠶), 크고 잘생긴 코와 콧방울, 거기서부터 깊고 힘차게 뻗어나간 법령(法令), 또렷하고 기다란 인중(人中), 무겁게 다물어진 입과 넓은 이마 위를 물결치듯 내 천(川)자를 그리며 흐르는 세 줄기 굵은 주름, 그리고 아까운 듯 아껴가며 조금씩 웃을 때 실눈 끝에 잔잔히 매어달리는 인정. 꼭 삼국지 같은 소설에 등장하는 귀인이나 덕장의 모습이었다.〉

 
 
  원숙한 명사들로 자기 분야에서 정상급에 도달한 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효진 기자가 다시 펜을 들면 지금의 여야 당대표를 이렇게 맛깔스럽게 쓸 수 있을까.
 
  아니, 이렇게 쓸 만한 인물이 요즘에도 있을까. 삼국지의 영웅 같은 인물들이 이 시대에도 있을까.
 
  그가 탐험한 ‘인간’, 아니 ‘거인’을 열거하면 이렇다.
 
  정주영, 조용기, 박찬종(朴燦鍾), 이종찬(李種贊), 최석채, 박태준, 노태우, 함석헌(咸錫憲), 김수환(金壽煥), 김영삼(金永三), 안춘생(安椿生), 김우중(金宇中), 한신(韓信), 김종필(金鍾泌), 이후락(李厚洛), 지학순(池學淳), 윤공희(尹恭熙), 이주일(李朱一), 김정한(金廷漢), 홍남순(洪南淳), 고은(高銀), 김옥길(金玉吉), 변형윤(邊衡尹), 김대중(金大中) 등이다.
 
  2001년 7월 재개한 인간탐험의 인물은 이렇다.
 
  이어령, 이기태(李基泰), 설도윤(薛度胤), 박옥수(朴玉洙), 심재륜(沈在淪), 김훈(金薰), 나훈아(羅勳兒), 이도행(李度행), 김대중(조선일보 주필), 구로다 가쓰히로, 박준철(朴峻喆), 이유종(李有鍾) 등이다.
 
  ― 인간탐험의 주인공들을 섭외할 때 나름 조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책(《정상을 가는 사람들(1~3)》)의 서문에도 썼는데, 그분들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원숙한 명사(名士)들로 자기 분야에서 정상급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둘째, 그분들은 인간적인 흥미가 있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입니다. 셋째, 그분들의 인생과 철학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어야 합니다. 간혹, 뉴스성이 강조된 나머지 이런 점 가운데 한두 가지가 소홀히 된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원칙들을 대체로 지켜왔습니다.”
 
 
  “만났더니 ‘르망 하나를 저기다 세워놨거든. 빨간 거. 오형 주려고’”
 
1985년 여름. 인간탐험 정주영을 취재할 때 현대조선 크레인 앞에서 정주영 현대회장과 기념촬영을 했다.
  ― 인간탐험 한 편 한 편이 산고(産苦)와 후일담이 많겠네요.
 
  “주인공들을 따라, 자동차나 기차 혹은 비행기 속에서, 닥치는 대로 인터뷰를 했고 그들이 가는 곳이면 산이고 바다고 해외고를 가리지 않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우선 내가 먼저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으며, 그다음엔 그들의 특출한 점에 감동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그들을 이해하거나 어떤 점에 대해 감동하지 않고는 독자 여러분이 이해하거나 감동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발을 싫어하는 분을 만나러 갈 때는 머리를 단정히 깎고 갔고, 액세서리를 싫어하는 분을 만나러 갈 때는 결혼반지를 빼놓고 갔습니다. 아무리 기자라지만 며칠간 함께 다니며 얘기할 상대가 비위에 맞지 않는다면 그들이 속엣말을 해주겠습니까?”
 
  ― 기억에 남는 인물은 너무 많겠지만 누구입니까.
 
  “정주영 회장은 ‘오 서방! 서산에나 가지’ 하면서 불러선 헬리콥터에 태우고 그 넓은 논을 내려다보며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던, 소년처럼 천진난만하던 분이셨지요.
 
  하루는 (충남) 서산농장에 가서 자는데 나를 당신 옆방에서 자라고 그러더라고요. 아침에 안 계셔서 물어보니 아침 일찍 나가셨다는 거예요. 다음 날 아침 6시쯤 일어나 보니까 또 나가셨어요. 몇 시에 나갔냐고 물으니 새벽 4시에 나갔다는 거야. 그다음 날 내가 3시에 일어나 기다렸지요. 그랬더니 정 회장이 ‘아이고 이거 백면서생이…’ 그러면서 좋아해요. 그 양반 뛰어다닐 때 나도 뛰어다니고 하니까 마음을 터놓기 시작하는데 그분도 얼마나 외롭겠어요.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서울 계동 사옥 12층에 계실 때 그 앞에 가서 발발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대요. 모든 상황이 어려워서 벌벌 떨면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거야. 나는 거리낄 게 하나도 없잖아요. 마음이 트이니까 그 양반이 답답했던 걸 다 나한테 얘기하는 거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6·25 때 대구에 피란 가서 신문 팔던 시절의 이야기를 신나게 하셨지요. 인간탐험으로 소개했고 내가 《조선일보》 사회부장대우 시절, ‘신문의날’에 한 판 전면을 쓴 적도 있는데, 어느 날 대우빌딩에서 만났더니 ‘르망 하나를 저기다 세워놨거든. 빨간 거. 오형 주려고 내가 저기다 갖다 놨어. 이따 끌고 가’ 그래서 ‘회장님 나 좀 내 식대로 살게 좀 도와주세요’라며 거절했지요.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 있잖아요. 그분이 말을 못 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필담’을 했어요. ‘고향이 어디세요?’ 하면 ‘내 고향은 어디 어디’, 이렇게 필담을 하다 보니 대학노트가 4권이 된 거예요. 인터뷰를 한 보름간 했죠. 여기(충북 청원)서도 하고 서울에 가서도 하고. 내가 한마디 물으면 엄청 많이 써요.
 
  나는 운보 인터뷰를 하면서 그림 달라는 말은 안 했어요. 그렇게 장기(長期) 인터뷰를 하면 하나 주거든요. 근데 난 준다고 하는 것도 싫다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림 한 점보다 대학노트 4권이…. 팔지도 않겠지만 만약에 노트를 공매로 내놓으면 한 권에 1억원 이상 받을 거라고 생각해.(웃음)”
 
 
  “46만 부까지 찍었어요. 5년 사이에”
 
운보 김기창 화백과 인터뷰할 때 ‘필담’을 나눈 대학노트.
  ― 아니, 〈오효진의 인간탐험〉 박물관이 있어야겠네요.
 
  “인터뷰를 몇 날 며칠, 어떨 때는 몇 달간 했는데 아무리 많이 쓴다고 해도 지면에 실리는 건 제한적이죠. 인간탐험을 하며 녹음한 카세트테이프가 큰 박스로 3박스나 됩니다. 하나도 안 버렸어요. 고향집에 놔뒀어요. 엄청난 자료들이죠.”
 
  ― 그 테이프가 다시 빛을 볼 날이 있을까요?
 
  “없으면 말고….
 
  다시, 운보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랑 운보가 불통(不通)하는 대목이 있었어요. 통하지 않는 대목이. 그럼 ‘그게 아니라 말이야’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럼, 녹음기를 얼른 켰어요. 그러면요, 말을 잘 하세요. 내가 알아들을 만큼 (말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 이게 웬일입니까? 그러니까 자기 부인 박래현(朴崍賢)씨가 자기를 가르쳤다는 거야. 부인 입을 보고 배웠다고. 그때 녹음했던 것을 찾아서 CD로 떠놨어요. (서재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 어디 있을지 몰라.”
 
  ― 운보 후손들이 알면 엄청 놀라겠어요.
 
  “아마도…. 《조선일보》에 오래 계셨던 최석채 주필이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나랑 인터뷰를 많이 하셨어요. ‘인간탐험 최석채’로 나갔어요. 돌아가시니까 (유족들이) 나한테 오더라고요. 녹음한 것 좀 달라고. 장례식 때 써먹었어요.”
 
  ― 그 시절 《월간조선》 이야기, 잡지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땐 잡지 전성기였으니까요.
 
  “기억에 의존한 것이니까 정확하진 않은데, 처음 입사했을 때 《월간조선》 발행부수가 약 3만 부쯤 됐어요. 당시 《신동아》가 6만 부 가까이 됐어요. 더블이었죠. 그땐 활판 인쇄를 할 때였어요. 《조선일보》에서 잡지 인쇄를 못 하고 동아출판사인가? 다른 데에 맡겨서 했어요. 나중에 동아출판사에서 옵셋으로 (인쇄)하자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옵셋으로 인쇄하는데요, 옵셋 인쇄는 시간도 빠르고. 편하고. 근데 문제가 뭐였냐 하면….”
 
  ― 그땐 원고지에다 썼겠죠.
 
  “그렇죠. 원고지에다 쓰면 그거를 타이피스트가 일일이 다 쳤어요. 컴퓨터가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던 시절이라 프린트한 (원고가) 시트지에 출력되는데, 오탈자가 나오면 예리한 면도칼로 (오탈자를) 떼어내고 바른 글자를 찾아다가 (시트지에) 갖다 붙였어요.
 
  그런데 한두 글자가 아니라 뭉텅이로 막 빼내야 할 때도 있잖아요. 그럼 그 부분을 다시 쳐서 넣어야 하고, 막…. 얼마나 복잡했던지…. 제가요, 그런 걸 하느라고 나흘 밤을 새운 적이 있어요.
 
  기사는 마감인데, 일은 태산같이 밀리고…. 집에 못 가는 거야, 전 직원이….
 
  그렇게 해서 월간지를 만들었어요. 다행히 허술 부장이 계셨고 조갑제 기자가 있었고, 시인이던 정호승씨가 있었고 서병욱, 권영기…, 《월간조선》 팀 워크가 정말 좋았어요.
 
  허술 부장은 뉴스에 대한 본능적인 육감이 있었어요. ‘이거 된다!’
 
  그때 말이죠, 그 전에는 《월간조선》 필자가 대개 대학교수들이었어요. 특집기사가 〈한국 철학의 무엇에 대하여〉 이런 거였죠.
 
  우리(《월간조선》)가 《사상계》 제호를 사 온 거니까. 허 부장이 들어오면서 일반 대중 독자를 위한 잡지로 방향을 확 틀었죠. 그래서 46만 부까지 찍었어요. 5년 사이에.”
 
 
  “《조선일보》 《월간조선》에서 나를 다 빼먹어가지고요…”
 
학창 시절 오효진은 문학소년으로 이름 날렸다. 1962년 5·16 군사혁명 1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공모전에서 오효진이 지은 노랫말 〈새일꾼의 노래〉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 그 당시에 《신동아》는 어땠나요.
 
  “《신동아》도 우리랑 비슷했는데 우리가 잡지 흐름을 선도하기 시작한 거예요. 허술 부장이 제목을 붙이는데 탁월했어요. 제목 하나에 10만 부가 왔다 갔다 했다니까요. 10만 부! 그리고 조갑제 기자의 근성과 뚝심은 아무도 따라올 수가 없었어요. 한 번 파고들면 지칠 줄을 모르는 분이에요. 조갑제 얘기를 하자면 온종일 얘기할 수 있어요. 그렇게 얘기할 거리가 많은 분이에요.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냐? 스스로 평가할 때 나는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어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조선일보》 《월간조선》에서 나를 다 빼먹어가지고요. 소진할 정도로 내가 지쳐 나가떨어졌어요.”
 
  ― 인터뷰할 때 질문은 몇 개 정도 준비를 했나요.
 
  “혼자 준비할 때 질문을 여러 개 정리하지만 절대 인터뷰이(interviewee)한테 펴놓지 않았죠. 질문지 없이 화자(話者)를 계속 따라갔어요. 안 될 때는 2차 인터뷰할 때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하는 식으로. 왜냐하면 (질문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말이 끊겨요.
 
  질문대로 물으면 (화자가) 이 말을 하고 싶은데 저쪽에서 물으니까 말이 자꾸 끊어져요.
 
  그럼 제대로 (이야기가) 안 나와. 어떤 분은 ‘이런 괘씸한 놈이 있나 어른 말씀하시는데 자르고 들어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질문을) 그냥 덮어두고 했어요.”
 
  ― 하고 싶은 질문을 꾹 참으면 조바심이 생기실 텐데요.
 
  “맞장구 쳐주고, 맞장구 쳐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면서 인터뷰를 끌고 가요. 때로 ‘정말이에요? 나는 그렇게 못 했을 텐데’ ‘잘하셨네요.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 이런 추임새를 넣어가면서 말이죠. 그렇게 하면 다 따라와요.”
 
  ― 인터뷰를 못 한 경우도 있나요?
 
  “성철(性徹) 스님 인터뷰는 실패했어요. 그분께 직접 편지도 쓰고 별짓 다했는데 안 됐어요. 그분 상좌 스님하고는 엄청 친해졌는데 말이죠. 돌이켜보면 참 뭐랄까. 무애(無碍)해야 되거든요, 그 정도 고승(高僧)이시면. 근데 그분이 쌓아놓은 성벽이 너무나 높더라고요.
 
  그러니까 자기가 쌓아놓은, 당신이 쌓아놓은 성벽 때문에 거기서만 계시다 가셨잖아요. 한편으론 안타깝지만, 제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으니까.”
 
  ― 인간탐험 쓸 때 200자 원고지로 얼마나 썼나요.
 
  “200~300매.
 
  쓰는 시간은 3~4일이면 썼어요. 근데 준비 기간이 길어서…, 인터뷰 기획하고 섭외하고, 질문 만들고… 죽죠, 죽어요. 그런데 (인터뷰 대상자) 결정이 또 늦어요.
 
  이 사람 저 사람을 고르다 보니까 누구는 안 돼, 누구는 안 돼, 누구는 안 돼…. 나한테 결정권이 없더라고요. 빠르면 보름 내에 모든 걸 끝냈는데요, 마지막에 막 몰릴 때는 일주일에도 하고 그랬죠.”
 
  ― 인간탐험을 묶은 단행본의 서문에 보니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매월 보통 10시간 이상씩 인터뷰해온 녹음테이프를 성실하게 풀어주어서 제 일을 반 이상 덜어준 박전석 군’ 이야기가 있던데 ‘박군’은 요새 뭐 하나요? 훗날 기자가 됐을까요?
 
  “하하하. 처남이에요. 제조업 쪽으로 수출업을 했어요. 지금은 현업에서 물러났지요. 그때 그 아이도 장가가버리고 어쩔 수 없이 내가 빨리 들으면서 (녹음) 푸는 것을 숙달하게 되었어요.”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취재 後記
 
  ― 최악의 인터뷰라는 게 있을까요.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가지고요, 아주 고생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월간조선》 1984년 7월호) 안두희 인터뷰가 다 안 끝났을 때였어요. 조금 모자랐는데 회사도 모르게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때 《월간조선》이 《신동아》랑 경쟁을 하는데 너무 다급하니까, 어떻게 그걸 알게 됐어요. 내가 안두희를 취재하고 있다는 걸. 위에 불려 가서 ‘어디까지 됐냐? 얼마나 했냐? 당장 써! 당장!’ ‘아이고 안 됩니다.’ 우리 편집국보다 더 높은 데서 나를 불러가지고….”
 
  ― 그때 안두희 사진은 찍었나요?
 
  “찍었죠, 몰래 몰래 찍었어요. (위에서) 막 쓰라고 하는데 내가 안두희씨랑 친할 때 그걸 쓴다고 (회사에) 말을 안 하고, 혼자 준비하고 녹음해서 나중에 역사 자료로 남기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 쓰래요. 도저히 내가 안 쓰고는 못 배길 압력을, 막 위에서 저 높은 데서…. 아이고. 그래서 그걸 썼어요.
 
  1부가 무지막지하게 나갔지. (200자 원고지로) 한 400~500매씩 나갔나? 세 번 나간 걸(연재한 걸) 책 한 권으로 만들었으니까. 아유, 막, 그래가지고 안두희에게 다시 찾아갔어요.”
 
  ― 기사가 나온 《월간조선》을 들고?
 
  “아니, 또 (인터뷰) 하려고.”
 
  ― 인터뷰한 내용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까?
 
  “알리지 않았죠. (보도됐다는 시중 소문을) 전혀 못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안두희씨 집 초인종을 눌렀더니 문을 열고 나오는데 얼굴에 막 상처 자국이 나 있더라고요. 그러곤 말없이 문을 탁 닫더군요. 이튿날 또 갔는데 문을 안 열어줘요.
 
  그다음 날 또 찾아가니 집에 없더라고. 내가 당시 상황을 추리하니 이래요. 안두희씨가 여자랑 사귀고 있었어요. 여자가 《월간조선》 글을 먼저 보고 싸움이 난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여자한테 자신이 안두희라는 걸 속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다음에 어떤 사주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양반을 찾아가 몽둥이 찜질을 한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못 살고, 인천 어디로 갔는데 거기 또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이후 나는 더는 기사를 쓰지 못했어요. 거기서부터 추적을 안 했죠. 내가 너무 잘못했다. 내가 이것… 정말 내 생각만 하고 옳지 않은 짓을 했구나, 이런 생각하고 내 마음이 아파가지고 많이 울었어요.”
 
 
  ‘오 동지요? 우리 점심이나 합시다’
 
SBS 동경지국장 시절인 1993년 2월 24일 오효진 국장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會根康弘) 전 총리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오효진 기자의 슬픔만이 아니라 모든 기자의 숙명일지 모른다. 사실 오효진 기자가 안두희를 만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안두희씨를 섭외하기 위해 편지를 썼어요. 그는 가족도 다 떠나가고, 자기를 이해해주던 여인도 떠나가고, 다정한 말 한마디 나눌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처지였으니까요. ‘안 선생님,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또 얼마나 답답하십니까?’로 시작되는 포근한 편지를 받는다면 목석간장(木石肝腸)이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어요?
 
  제3공화국 시절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이후락씨를 만날 때도 편지를 보내서 목적을 달성했어요. 그때도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나는 진심으로 그의 입장이 돼서 그를 이해하는 편지를 썼지요.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얼마나 할 말이 많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의 그런 마음을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 옆에서 그런 얘기를 편안하게 듣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공과 실패를 한 사람이며 왜 그와 만나고 싶어 하는지를 자세하게 썼지요. 며칠 뒤에 내 책상 위 전화가 따르릉 울리더군요. 이런 말이 들려왔습니다. ‘오 동지요? 우리 점심이나 합시다.’”
 
  오효진 기자는 인터뷰 섭외를 위해 다양한 작전을 구사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신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해서 간단한 메모 전하기, 가벼운 선물, 편지 쓰기, 재차 3차 방문하기, 식사나 술자리 갖기 등등으로 인터뷰이를 파고들었다.
 
  ― 끝내 섭외가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하잖아요. 난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하죠. ‘10번 찍어서 안 넘어가면 넘어갈 때까지 찍어라.’ 내가 (SBS) 보도국장 할 때 기자들에게 ‘누구 좀 가서 만나고 와’라고 하면 금방 전화를 걸어 아무개와 통화한 다음 이렇게 보고하기 십상이더군요. ‘그분, 바쁘다는데요.’
 
  얼마 후 다시 한 번 만나보라면, 이번엔 퉁명스럽게 ‘저번에 전화했을 때 안 만나겠다고 그랬잖아요!’
 
  기자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 기자는 (인터뷰를) 해야 하는 사람이고, 인터뷰를 함으로써 내가 (기자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인데 안 된다? 그럼 안 되죠.”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릴 때까지 물어”
 
1985년 4월 《월간조선》 오효진·조갑제 기자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 등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조선일보》에서 내가 입사시험 문제도 내보고 그랬는데 ‘명 모집’이라면 대개 10명이에요. 공고를 내서 시험을 치면 10명 모두 서울대 출신이 차지해요. 그중 5명은 서울대 법대입니다. 그럼 위에서 ‘연세대도 한 명 끼워 넣어라’ 그러고, 연대만 하면 안 되니까 고려대도 한 명 끼우고, 그럼 다른 사립대도 한 명 넣고, 지방대 중에서도 제일 좋은 사람을 뽑고, 그럼 결국 14명 정도를 뽑아요. 그런데 이 중에서, 나중에 뽑힌 이들 중에 인물이 나와요. 서울대 나와서 도태(淘汰)되는 사람이 많이 나와요.”
 
  ― 바보 같은 질문인데 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건건이 이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집중적인 인터뷰라면 인터뷰이의 심장(心臟) 속에 들어가도록 연구를 해야 합니다.”
 
  ― 심장 속으로?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아, 이것 때문에 이 말을 하는구나’, 저런 말을 하면 ‘뭐 때문에 저런 말을 할까’ 하는 맥락을 파악해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이런 말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겠지? 어? 아니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상대를 가지고 놀아야 되거든요. 그러려면 상대를 집중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할 때도 어느 대목에서 감동을 이끌어낼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예상하면서 그 대목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냥 단답으로 질문을 던지면 절대로 감동이 안 나와요. 내 주장이긴 한데, 모든 인터뷰는 휴머니즘이어야 합니다. 내 인터뷰를 보면 반드시 감동하는 부분이 있어요.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릴 때까지 물어. 감동할 때까지 묻고 또 묻고 또 묻고…. 결국은 그 사람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그 부분을 읽고 사람들도 감동하니까요.”
 
 
  더듬더듬 멈칫멈칫하면서…
 
  ― 좋은 글, 좋은 문장의 원칙은 뭡니까.
 
  “모든 글은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첫째는 재미있어야 되고, 둘째는 감동을 줘야 돼요. 만약에 세 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쉬워야 해요. 어려운 글에 이 두 가지가 나올 수가 없어요.
 
  인터뷰도 상대방을 탐험해서 재미있고 감동적인 걸 써야 해요.”
 
  ― 만나보니 재미없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분은 아예 인터뷰 대상으로 택하지 말아야죠. 사실 모든 사람의 일생은 다 ‘로망’이 있어요. 굴곡(屈曲)이 다 있어요. 그것이 없는 사람이면 인터뷰 대상에 올리면 안 되죠.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휴머니티를 찾아 끌어내서 (독자에게) 감동을 줘야 합니다. 사무적인 문답으로선 이게 안 나와요.”
 
  ― 좋은 인터뷰 전문 기자는 어떤 자질이 필요합니까.
 
  “잘나고 뻔뻔하고 말 잘하고 이런 사람이면 어떨까요?”
 
  ― 기자, 안 할 거 같아요.
 
  “그런 잘난 사람 앞에서 내 마음을 털어놓기가 거북하죠. 경계심이 생기죠. 과거 주변에서 제일 자주 보던 상호가 뭔지 아세요? ‘충청상회’ ‘충북상회’…. ‘충청도’가 들어간 가게가 많아요. 왜 그러냐 하면 어수룩해 보이거든.
 
  표준말로 또박또박 말하려고 하지 말고, 더듬어라! 더듬더듬 멈칫멈칫하면서 나의 허점을 보여줘 가면서 그렇게 물으면 상대방의 경계심이 풀어질 겁니다. 그러니까 잘난 척하지 마라. 겸손하게 하고. 그래서 내가 충청도 사람인 것이 좀 득이 됐다면 득이 됐지 해는 안 됐을 것 같아요.”
 
  인간탐험과 인터뷰 전문 기자로서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어 이후 근황을 듣기 위해 이쯤에서 끝을 맺어야 했다.
 
  1991년 무렵, 오효진은 《조선일보》 사회부장대우에서 물러나 SBS 보도국장으로 옮겼고 95년 자민련 청원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DJP 연합권이 들어서고 1998년 무렵 정부 공보실장이 되었다. 꼭 정치를 했어야 했을까?
 
  “언론사 생활을 늦게 시작해서 그렇지 나이는 어느 정도 찼어요. 내가 시골(고향인 충북 청원)로 내려가게 된 거는, 거기(공직에) 있으면서도 나는 늘 ‘남의 글이 아니라. 내 글을 써야 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무슨 일이 생겼냐면, 내가 장남인데 내 동생이 시골 살림을 맡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계실 때인데 어느 날 갑자기 ‘형님 나 나가요’ 하고 전화를 했어요.”
 
 
  “그게 참 이상한 거예요. 운명적이야”
 
  ― 나가요?
 
  “어딜 나가? 난 어디 갔다 온다는 줄 알았는데 ‘대전으로 나 가요’라면서 ‘내가 나간다면 나가라고 하시겠어요? 열쇠는 장독대 밑에 넣어놨어요.’ 그래요.”
 
  ― 갑자기?
 
  “네. 오랫동안 준비한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람으로서는 또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자기 살림도 아닌데 남의 살림 맡아가지고 시골에서 고생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죠. 그런데 마침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게 참 이상한 거예요. 운명적이야. 그때 자민련 부총재라고 하는 분이 나를 찾아왔어요. JP(김종필)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면서 ‘출마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하고 물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저를 찾아오시게 됐습니까?’ 그러니까 ‘JP가 어제저녁에 《조선일보》 간부들하고 식사를 하셨는데 오형을 추천하더랍니다. 그래서 왔지요’ 그래요.
 
  시골집에 당시 김대중 국장, 편집국 간부, 《월간조선》 기자들도 놀러 와서 천렵(川獵)을 해 물고기도 잡아먹고 그랬는데, 선거 철만 되면 《조선일보》 편집국에 두루마기 입은 영감님들이 와서 나한테 ‘너 이번에 어떡할래?’라고 묻곤 했거든요.”
 

  ― 충북 청원에 오씨(吳氏) 집성촌이 있군요.
 
  “당시 청원군 현도면(現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집성촌에 한 3만 명 정도 오씨가 살았어요.
 
  인근 부용면, 문의면에도, 청주시에도 (오씨가) 상당히 많아서 그때마다 남한테 표를 몰아주니까 ‘네가 한번 우리 집안에서 나와봐라’ 그랬던 것을 신문사 간부들이 봐 왔던 터라 (JP에게) ‘오효진이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추천을 한 거야. 하하하.
 
  그래,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시골집도 돌볼 사람이 없지. 이게 다 운명이야.
 
  내가 가서 출마해서 떨어지든지 말든지, 출마한다고 회사에 사표를 내는 건 남들 볼 때 그래도 면이 서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SBS 국장 하던 사람이 그냥 사표 내고 시골로 내려가 글 쓴다고 하면 미쳤잖아요. 《월간조선》 시절에 정호승 시인이 글 쓴다고 사표를 쓰기에 내가 얼마나 말렸다고. 느닷없이 그만뒀다고. 그래서 자민련 부총재에게 전화를 했어요. ‘다시 좀 뵐 수가 있을까요?’ ‘그러지.’
 
  ‘저를 데려가서 어떡하실 겁니까?’ ‘원하시는 데로 드려야지, 뭐’ 그러더라고요. 곡절이 많지만 그렇게 출마를 했는데요, 당시 거기에 아주 대물(大物)이 있었어요.”
 
 
  375표 차 낙선, 17표 차 낙선, “이게 환장하겠잖아요”
 
‘인간탐험’ 원조 오효진과 부인 박행숙 여사. 올해가 결혼 50주년이다. 거실 벽에 숫자 ‘50’이 적힌 풍선이 보인다.
  그가 선거에 나섰던 결과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15대 총선(1996년) 충북 청원=신한국당 신경식 2만1853표(득표율 37.93%), 자민련 오효진 2만1478표(37.27%). 375표 차이로 낙선 ▲16대 총선(2000) 충북 청원=한나라당 신경식 1만6795표(28.88%), 자민련 오효진 1만6779표(28.85%). 17표 차이로 낙선 ▲제3회 지방선거(2002) 청원군수=자민련 오효진 2만2945표(42.13%) 당선 ▲제4회 지방선거(2006) 청주시장=한나라당 남상우 12만3717표(59.44%), 열린우리당 오효진 8만4417표(40.55%) 낙선 ▲18대 총선(2008년) 청주 흥덕구을=통합민주당 노영민 2만2175표(37.46%), 한나라당 송태영 1만5468표(26.13%), 자유선진당 오효진 9254표(15.63%) 낙선.
 
  선거운동 이야기를 하면서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4시간 넘는 인터뷰중 가장 톤이 컸다.
 
  “본때를 한번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경찰기자 시절처럼 선거운동을 밤을 새우면서 했어요. ‘유권자 집에 적어도 두 번 이상 가자!’ 그런 마음으로. 길목 (유권자) 집엔 세 번 네 번 간 거예요. 저 산골짜기에 혼자 사는 집도 찾아갔어요. 잠도 안 자고.”
 
  ― 사표 쓰고 선거에 나가겠다고 할 때 아내이신 박행숙(朴幸淑) 여사 반응은 어떠셨나요.
 
  “사실 SBS에 있을 때 고민을 많이 했죠. 《조선일보》는 이렇게 막 밀어주는 환경인데 SBS는 여기저기 눈치 보는 거야. 안기부 눈치 봐야지, 청와대 눈치 봐야지, 뭐 어디 눈치 봐야지…. 보도국장이 그런 압력을 한꺼번에 받는 자리 아니에요? 내가 하기 싫은 걸 하니까, 내가 ‘개’인가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거야. 시키는 대로 하고, 짖으라고 하면 짖고 말이야. 그 고민을 하니까 우리 집사람도 보기에 안타까우니까 ‘아이고, 뭐 그냥 하고 싶으면 하지 뭘 그렇게 고민을 하느냐’고 하더라고요.”
 
  잠시 숨을 돌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시골에 내려가 열심히 했는데 280표 차로 떨어진 거예요. 아니 300표? 385표? 여보, 몇 표 차이야? (박 여사가 곁에서 375표라고 하자) 그러니까 이게 환장하겠잖아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기자가 한 번 물 먹으면(낙종하면) 더 열심히 뛰어다니듯이 말이죠.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어떻게 떨어진 줄 아세요? 16표야.
 
  그래서 재검표를 했더니 한 표가 늘어났어. 17표 차.
 
  나중 JP가 나를 불러서 ‘너무 아까우니까 잠시 공보실장을 맡고 있으라’고 해서 2~3년인가 있었어요. JP가 ‘내 불알을 떼서라도 한자리 줄 테니까 기다려라’고 그러는데 나는 그거 싫더라고. 권력의 속성, 말이죠. 그냥 막 아부하는 놈들이 달라붙는 게, 내가 한 무리가 되는 것 같아서 싫더라고요.”
 
 
  “내가 가서는 안 될 데를 간 거예요, 정치판에”
 
  ― 아부하는 무리들이 눈에 보이던가요?
 
  “그럼요. 청와대도 그렇고요. 대통령 연설문의 상당 부분이 내 손을 거쳐갔어요. 총리 연설문의 90 몇 %가 내 손에 거쳐갔고. JP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또 나를 견제하는 무리가 막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했지요.
 
  ‘나 이런 것 싫다. 이런 물에서 놀기 싫다.’ 내가 가서는 안 될 데를 간 거예요, 정치판에. 그래서 시골로 내려왔는데 군수라도 하라고 해서 나갔다가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 군수 때는 참 좋았어요.”
 
  군수 시절 그가 얼마나 신명 나게 일했는지는 《월간조선》 2003년 7월호 기사 〈군수는 별것 아닌 게 아니더라!〉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어 생략한다. 남들이 “나이 60에 능참봉(陵參奉·능을 지키는 종9품의 가장 낮은 벼슬)이라더니 웬 군숩니까”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청원생명쌀’을 전국적인 브랜드로 키웠고, 오창과학산업단지 25만 평에 유채꽃을 심어 100만 명이 다녀가는 축제로 대박을 쳤다. 축제 때 청주시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 군수 재선 대신 청주시장 도전을 택했었군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들어가서 나름대로 그렇게, 그렇게 고향에 대한 봉사라고 열심히 불철주야 일을 했는데요, 정말로…. 당시에 무슨 좌익 성향의 농민회가 시골까지 침투했어요.
 
  그 사람들이 쌀 수매가가 낮다고 군청 마당에서 쌀을 태워서, 불타는 걸 막 군수실에 와서 뿌려버려요.”
 
  ― 저런….
 
  “어떤 노인네는 책상에 올라서가지고 발을 구르며 나한테 막 육두문자를 해요. ‘나는 좋은 일하고 존경받으러 온 사람이지 여러분한테 이런 꼴을 당하려고 온 사람이 아닙니다. 나가세요.’ ‘존경 좋아하네.’ 그 쌍시옷이 막 나와요. ‘아, 여기서 이제 안 하겠다.’ 그리고 처음부터 나는 입버릇처럼 ‘4년만 하고 안 하겠다’고 했었어요. 그래서 미련 없이 나왔는데 그때 청주시장 하던 사람이 도지사로 나가면서 시장으로 나를 추천한 거예요. 그때 인기가 좋아가지고 저기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청주고 출신한테 밀렸어요. 내가 대전고를 나왔거든요. 안 되더라고. 이게 내 숙명이라 생각하고….”
 
 
  죽지 않았다! 오효진이 살아 있다!
 
  ― 머무르지 않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는데 후회는 없으시죠?
 
  “돌아보면…, 돌아보면 후회 없는 인생이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언론계에서 일했던 기간, 또 낙선하면서 상당히 우울해했던 기간, 어디 공무원이 돼서 열심히 일했던 기간, 그 이후에 내가 몸이 다쳐가지고 제대로 걸을 수 없는 기간이 만 10년이에요. 만 10년이 넘었어. 이제 11년 차 들어갔어요. 이 기간 고비, 고비가 다 나한테 선생님입니다.”
 
  ― 외람됩니다만, 그런 시련이, 시련이 아닐 겁니다.
 
  “그럼요. (살아오며) 나는 이것저것 손도 대보고 그랬지만 머릿속이 굉장히 행복해요. 또 지금 내 나이에 뭘 해보겠다고 나처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네~, 아주 머릿속이 꽉 차 있어요. 막 살아서 움직이고 있어요.”
 
  ― 지금도 무언가를 도전하고 계신가요?
 
  “그렇죠. 지금도 도전하고 있죠. 정말 큰 도전을 하고 있죠. 무슨 일이 있어도 90까지는 살아야 되는데….”
 
  ― 걱정하지 마십시오.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끝내놓고 죽어야지, 눈을 감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끝으로 〈오효진의 인간탐험〉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인사를 좀 해주시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인간탐험을 쓰는 동안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죠. 정말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는데 그 후에…, 내 글을 열심히 읽어주시던 분들이 기대하는 만큼, 문필가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늦게나마 내 몸이 이렇게 되고 나서, 다시 글을 열심히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요즘 옛날 생각을 하면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글을 씁니다.
 
  언젠가 그분들한테 보답을 하고 싶고요. 죽지 않았다! 오효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좀 보여드리고 죽더라도 죽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기대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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