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의도광장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스태프로 발탁… 6개월 후 〈모이자 노래하자〉 MC
⊙ 1980년 녹화장에 천식 앓는 제자 데리고 온 선생님의 호소 듣고 수술시켜준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어린이보호회 만들어
⊙ 1996년 횡령 의혹 당시 통장 잔고 40만원
⊙ 박정희 대통령 침실에 들어가 자기 전에 개그한 적도 있어
⊙ 1980년 녹화장에 천식 앓는 제자 데리고 온 선생님의 호소 듣고 수술시켜준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어린이보호회 만들어
⊙ 1996년 횡령 의혹 당시 통장 잔고 40만원
⊙ 박정희 대통령 침실에 들어가 자기 전에 개그한 적도 있어
- 사진=조준우
― 국회의원과 코털의 공통점은?
“뽑을 때 잘 뽑아야 한다.”
― 그럼 국회의원과 석쇠의 공통점은?
“자주 갈아줘야 한다.”
초구(初球)부터 강렬했다. ‘국민 사회자’ 이상용(李相瀧·78) 이야기다. 1944년 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태생. 이한우(李旱雨)・최순례(崔順禮) 부부의 2남 2녀 중 장남이다.
“출생(出生)부터 기구했어요. 누님이 첫째, 제가 둘째죠. 아버지는 서천 분이시고 어머니 고향은 부여입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가지셨을 때 아버지 찾는다고 서천에서 백두산까지 걸어가셨다고 해요.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고 한 달 이상을 걸어가셨다니 배 속의 저는 어땠겠습니까.”
아버지의 직업은 신문사 기자였다. 일제(日帝) 말기, 신문사가 강제로 문을 닫고 가족의 생계가 어려웠던 시절, 새 직업을 찾아 먼 길을 떠나셨을 터이다. 하지만 북행(北行)을 마치고 어머니가 시댁이 아니라 친정으로 혼자 돌아오신 것으로 보아 다른 사정이 더 있었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낳기는 낳았는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딱 보기에도 일찍 죽을 것 같은 아기였던 거지. 외삼촌들이 저를 구덩이에 파묻었답니다. 어차피 일찍 갈 놈인데, 키우다 보면 재가(再嫁)만 늦어지는 것 아니냐고 그러셨답니다.”
당시 8세던 이모가 생명의 은인이다.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냐”며 조카를 파내 산으로 도망쳤다. 그러고 나서 “이 아기 안 키우면 같이 죽어버리겠다”고 버텼다. 어머니의 젖이 말라 살길이 막연했지만, 동네 아주머니 200여 분에게 젖동냥을 하며 또 겨우 살아났다.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다. 3세 때 처음 문고리를 잡고, 5세 때 겨우 걸음마를 했을 정도로 약골이었다. 느리고 약해서 놀이판에는 끼지 못하고, 그 대신 가방 지킴이를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구를 만들었다.
60년 넘게 하루 2시간 운동
대처(大處)로 나온 건 서면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다. 대전의 아버지를 찾아 온 가족이 고향 마을을 떠났다. 어머니와 누나, 나 셋이서 논두렁 물 마시고 고구마 뽑아 먹으며 300리 길을 보름 동안 걸었다.
“아버지는 신문사 대전 지국장이셨는데, 알뜰하게 집을 챙기는 분은 아니셨어요. 어머니는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 하는 분이셨고요. 갑작스러운 이사가 ‘방황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죠.”
병약했던 이상용 소년이 건강체로 거듭난 건 삼촌 도움이다. 11세 때, “장손은 우리 집안의 대들보”라며 아령을 사다 줬다. 가방에 도시락은 없어도 아령은 챙겨갈 정도로 열심히 운동했다. 몇 달 하다 보니 ‘근육이 만들어진다’는 느낌이 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하루 2시간 운동’을 거른 적이 없다. 술, 담배, 청량음료, 커피도 입에 대지 않았다.
엄격한 자기단련의 열매는 달았다. 키도 작고 얼굴도 까무잡잡했던 시골 소년은 1962년 고3 때 ‘미스터 대전고’, 1966년에는 ‘미스터 고려대’에 뽑히며 ‘최고 인기남’ ‘힘 있는 남자’로 신분이동(身分移動)했다.
“몸이 건강해지니 인생에 자신이 붙더라고요. 삼성국민학교, 한밭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명문 대전고(大田高)에 합격한 날 고향 마을 젖엄마들이 ‘우리 동네 상용이 대전고 입학’이라고 격하게 축하해주셨습니다.”
플래카드 제작이 쉽지 않던 시절이다. 신문지를 이어붙이고, 큰 글자를 써서 돼지우리에 붙들어 맨 고향 사람들의 정성과 응원을 이상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모범생 생활은 거기까지였다. 송인준 전 대법관, 서종환 전 문화공보부 차관 등 동기들이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동안 이상용은 500명 중 480등으로 겨우 졸업했다.
‘주먹 서클’ 회장
“근육 하면 이상용이었으니 제안이 많았어요. 두목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죠. 폼생폼사니까 ‘싫다, 못 한다’라는 얘기는 할 수 없잖아요? 동녘회라는 주먹 서클 회장을 맡았습니다. 공부보다 운동, 운동보다 싸움이 중요하다 생각했던 시절입니다.”
지역 최강자 자리를 놓고 대전공고 일진(一陣)과 1대 1 격투를 벌인 적도 있다. 학교당 100여명의 응원단이 운집한 가운데 야간에 격돌한 빅 이벤트였다. 이런저런 일로 경찰서를 들락거릴 때마다 아버지가 ‘신문사 빽’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하지만 고3 때 ‘조직원’(?) 31명을 이끌고 상경(上京), 대한극장에서 〈벤허〉를 보고 귀가했다가 ‘단체 정학’을 맞은 것을 무마(撫摩)하는 것은 아버지의 능력 밖이었다.
“고3 2학기가 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대학 떨어지면 일 나겠다 싶어 두 달을 피나게 공부했습니다.”
대학입학 자격고사를 보고 고려대 임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선생님이나 가족이나, 그 성적으로 고대에 붙으면 ‘기적’이라고 하기에 오기가 생겼다. ‘확 튀고 깊은 인상을 주면 입시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 입시 전날 의상을 마련했다. 소매 없는 상의에 운동 팬티였다. 1963년 2월 20일 영하 25도. 이상용은 턱걸이 102개, 수류탄 던지기 거의 100m, 100m 달리기 12초대로 1등이라는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선보이며 동료 응시생과 시험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떨어지면 가족들 볼 면목이 없어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는데 결과는 합격. 응원차 상경 중이던 아버지와 누나가 만세를 불렀다. 아버지는 대전까지 재건호(再建號) 열차표 4장을 끊었다. 사람은 셋인데 차표는 넉 장?
“고대생은 누워가시게”가 아버지의 답이었다. 불고기를 먹는 것이 명절 행사이던 그때, 한일관에서 합격 턱으로 ‘불고기 5인분!’을 큰소리로 외치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하셨던 아버지의 또 다른 유머였다. 이상용은 대전까지 정말로 누워서 갔다. 어쩌면 유머 감각은 유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군만두가 영어로 뭐게요?”
“몰라.”
“서비스.”
얼마 전 그와 손자 사이에 오갔던 대화다.
은행나무가 적합한 토양은?
대학 입학식 날 일군(一群)의 선배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역도부원들이었다. 반공(反共)의 기수이자 야당의 거목 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 1974년 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테헤란 아시안게임 역도 슈퍼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딴 황호동(黃鎬東) 등 쟁쟁한 선배들이 포진한 끈끈한 조직이었다.
3학년 때는 응원단에 들어갔고, 4학년 때 응원단장으로 뽑혔다. 응원단장은 숫기가 있어야 한다며 여대생 관중 앞에서 펼친 오디션을 당당히 통과한 결과다. 김일, 장영철의 동작을 응용한 레슬링 박수, ‘연대가 지고지고 일백 번 고쳐지고…’ 등 고전을 응용한 만담(漫談) 등이 그의 창작이다.
학내 유명인사였지만, 단체 미팅 사회 등 ‘업무’가 폭주해서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다. 토양학 교수님이 “그래도 한 번은 수업에 들어와라. 질문을 해서 맞히면 종강”이라고 할 정도였다.
“은행나무는 어느 토양에 적합한가?”
어려서 본 고향 마을 풍경에 답이 있었다. “변소 옆 땅입니다”라는 답에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교수님은 정답으로 인정해줬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결혼도 했다.
“1964년 6·3사태 때 역도부가 데모대 맨 앞장에 섰어요. 안암동 하숙집으로 경찰들이 찾아오더라고. 그래서 삼선교 아는 누나 하숙집으로 피신했습니다.”
고향 누나 하숙집에 놀러 가 만났던 1년 연상의 성신여대생이 지금의 아내다. 그 집에서 몇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신세를 졌다. 방이 두 칸이라 숨어 있기 좋았는데, 곁에서 보니 누나가 아니라 여자로 보였다. 그래서 정교하게 작전을 짰다. 역도부 후배들을 동원해 도봉산에 하루 만에 움막을 짓고 누님을 모셨다. “여기도 위험하니 산속으로 잠깐 피해 있겠다. 대신 올라와서 밥 좀 해달라”고 했더니 쌀을 챙겨서 거기까지 와줬다. 움막에서 저녁을 먹고 “간첩이 돌아다닌다 들었다. 밖에 나가면 큰일 난다”고 겁을 줘서 일단은 붙잡아두는 데 성공. 거기서 ‘결혼하자’고 다짜고짜 돌직구를 던졌다. 처음엔 뺨을 때리며 “미쳤냐?”던 누나는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무릎 꿇고 비는 모습에 청혼을 받아들였다.
1967년 2월 25일 졸업, 3월 5일 결혼 후 유성온천으로 신혼여행, 3월 10일 ROTC 5기로 소위 임관. 기갑부대 탱크 소대장이 그의 보직이다. 첫 발령지인 강원도 인제(麟蹄)는 단신으로 부임했다. 1968년 1·21사태 때는 김신조를 잡으러 화진포까지 출동하기도 했다.
― 신혼 생활은 못 한 건가요.
“아내는 대전에서 시어머니 간호를 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그때 많이 아프셨고, 58세에 돌아가셨죠. 대전에서 인제까지는 버스를 타도 하루 이상 걸리던 시절이라 왔다 갔다 하기도 어려웠고…. 1969년 가평으로 임지를 옮기면서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부지런한 이군
제대는 1970년 6월 30일. 농대 졸업생은 산림공무원 말고는 취직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용은 산보다는 평지가 편했고, 평지의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서울이 낫겠다 싶어 일단 상경했는데 일자리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큰 사고(事故)도 일어났다.
“그때 아내가 《중앙일보》 사업부에 다니고 있었는데 택시에 치였어요. 몸이 공중으로 날았다가 추락했으니 여러 군데 부러지고,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막막했죠. 동대문 대동병원에 전신 깁스를 하고 누웠는데 배 속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고….”
도봉동에서 사글세를 사는 처지였지만, 사고를 낸 운전사의 처지는 더 한심했다. “내가 해결할 테니 가라”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여직원은 결혼과 동시에 퇴사가 상식이던 시절, 미혼으로 속이고 근무하던 아내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의료진이 태중(胎中)의 딸은 무사하다고 했다. 당장 생활비와 병원비가 필요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잴 상황이 아니었다.
“모찌떡 하나로 하루를 버티고 노란 양은 냄비에 중국집 짜장면 받아다가 병원으로 날랐습니다. 청계천에서 취객들 택시 대신 잡아주기, 술집 웨이터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신문 배달하다가 남의 집 우유도 많이 훔쳐 먹었습니다. 배달원과 우유 주인들에게 지금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도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맨투맨에서 지역방어로 작전을 바꿨다. 을지로5가 중부시장에 나가 새벽부터 청소를 하고 상인들의 짐을 날랐다. ‘부지런한 이군’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상인들이 불합격품을 ‘갖다 팔라’고 내주기도 했다. 북어 대가리, 다리 뜯긴 오징어 등을 시장 입구에서 ‘한주먹 천원’에 파격 세일하고, 나중에는 고향에서 김을 받아다 팔기도 했다. 비 오는 날 봉투에 구멍이 나서 어물(魚物)이 바닥에 흩어졌는데, ‘물건’이 상할까 봐 되는 대로 집어서 품에 넣었던 기억도 있다.
방송 데뷔
외판원으로 5~6년을 보냈는데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미아리를 찾았더니 “뭘 잘하냐?”고 했다.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다”고 했더니 ‘방향을 바꾸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즉시 실천’은 뽀빠이의 강점. 〈유쾌한 청백전〉 〈웃으면 복이 와요〉 연출자 유수열 PD를 찾아갔다. 대전고 선배라고 했다. 빗자루 20자루를 사다 정동 MBC 방송국 인근 다방 변소에 맡겨놓고 새벽부터 눈을 쓸었더니 방송국 사람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 소문이 나니 당사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호기심은 출연 기회로 이어졌다.
“1973년 〈유쾌한 청백전〉 출연이 제 방송 데뷔입니다. 역도부 후배 40명 동원해서 우동 한 그릇씩 외상으로 사 먹이고 방청석에 앉혔습니다. 너무 표나면 안 되니까 띄엄띄엄 앉히고 제가 나올 때만 박수를 치라고 했죠.”
“다방에 가서 보니 독일 사람은 찻숟가락을 좌우로 젓고 미국 사람은 위아래로 젓고 한국 사람은 찻잔을 돌리더라. 이유를 알려고 3년을 연구했다. 연구 결과는? 설탕 녹으라고.”
박수부대는 물론 방청객까지 모두 정신없이 웃었다. 사회자 변웅전(邊雄田)이 “때리고 넘어지는 코미디 말고 이거 계속하라”며 격려해줬다. 어쩌면 그날이 한국식 스탠딩 개그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유쾌한 청백전〉에서 육체미도 선보이며 이상용은 ‘뽀빠이’라는 별명도 스스로 만들었다.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일간 스포츠》 김유생 기자가 학사 코미디언이 신선한 코미디를 선보였다는 기사를 썼다. ‘이상용’ 이름 석 자가 처음 활자화된 기억이다. 방송 당일, 집에 TV가 없었던 이상용은 아내와 함께 동네 만화 가게를 찾았다. 재미있다고 깔깔 웃는 꼬마들 뒤에서 부부는 서로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 그때부터 살림이 핀 겁니까.
“아닙니다. 일단 첫 출연료 4000원으로는 우동값 5000원을 갚았죠. 스타가 되면 갚겠다고 했거든요. 안 받으신다기에 90도로 인사하고 돈 드리고 왔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을 겹치기로 출연한 날도 있지만, 단역이라 출연료만 가지고는 여전히 생활이 어려웠어요. 이사만 21번 다녔습니다.”
인생 역전 프로그램은 KBS 어린이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1974~ 1990년)다. 여의도광장을 지나가는데 한군데 모여 있는 어린이들이 보였다. 무작정 다가가 ‘줄 맞춰 서’ ‘앞으로 가’ 하며 어울려 놀았다. 잠시 후 모습을 보인 PD가 “누구냐?”고 묻기에 “지나가던 사람”이라고 했다. “따라오라”는 한마디가 운명을 바꿀 줄은 PD도 이상용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게임하는 출연자의 부친상(父親喪)으로 마침 대타(代打)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신인 코미디언’은 즉석에서 채용되어, 녹화 전 방청석 분위기를 달구고 녹화 중에는 게임 도구를 나눠주며 6개월을 일했다.
‘TV에 안 나오던 스태프’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여자 MC가 부친상을 당한 날 PD가 그를 불렀다. ‘할 수 있겠냐?’는 말에 대본을 달라고 해서 밤새 외우고 녹화장에 나갔다.
“정말 재미있고 적성에 딱 맞았어요. 첫날부터 ‘여기가 내 자리다’ 싶더라니까. ‘어린이 대통령’ 소리를 들을 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무려 16년 동안 사회를 봤다. 어린이날은 특히 바빴다. 이동 시간이 부족해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하니 모 지방 도시에서 헬기를 보내오기도 했다. 청와대 앞마당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 사회도 그의 독차지였다. 누구보다도, 어린이들이 그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갈 무렵, 인생의 물꼬를 바꾸는 일이 생겼다.
어린이 심장병 수술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오셨어요.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는 겁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기에 두말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죠.”
문제는 수술비였다. 당시 살던 집 보증금이 600만원이었는데 수술비는 1800만원. 회당 출연료 16만원으로는 감당 불가능한 액수였다.
“덜컥 약속을 하고 바로 아픈 어린이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이미지 관리하느라 야간 업소 출연을 고사하고 있었는데, 오비스 캐빈, 라데빵스, 로즈 가든 세 군데 출연료 석 달 치를 가불(假拂)했어요. 바자회도 하고 지인 돈도 빌리고, 발로 뛰면서 겨우 수술비를 만들었죠.”
본인에게도 1남 1녀 어린 자녀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이상용에게 심장병 어린이의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수술은 성공.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수술을 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감격해 주변에 사연을 전했고,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이 뽀빠이의 사당동 집으로 몰려왔다.
“처음에 아내가 그러더군요.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 우리는 수술비 반도 안 되는 액수의 전셋집에 사는데…’. 나중엔 ‘아이가 죽게 생겼는데 그 부모 마음은 어떻겠냐’며 이해해줬습니다.”
아내의 인정과 격려에 용기를 얻어, 합정동에 ‘한국어린이보호회’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줬다. 그 와중에도 남들 안 하는 걸 하고 싶어 건물 앞에 조그만 잔디밭을 만들고 ‘잔디밭에 들어가서 노세요’라는 팻말을 붙였다.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은 그의 헌신에 대한 나라의 보답이다.
횡령 의혹
―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1996년 11월 여의도 목욕탕에서 잡혀갔어요. 〈우정의 무대〉 화천 군부대 녹화가 있던 날 아침이었죠.”
이른바 횡령 의혹이었다. ‘4500만원짜리 집이 아니라 40억원 호화주택에 산다’ ‘30년 고물차가 아니라 벤츠 승용차를 탄다’ ‘후원금 빼돌려 파주에 땅 1만 평을 샀다’고 했다.
기자가 묻기에 “그런 집, 차, 땅 있으면 찾아서 당신이 가지시오”라고 했다. 수사를 받았지만 1997년 2월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시작부터 함께했던 분신 같은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1989~1997년)는 아예 폐지되었다. 누가 왜 그랬는지 짐작은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 대전역 앞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가 그 충격으로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억울했죠. 한때 왼쪽 눈이 안 보였고, 수면주사 두 대를 맞아도 잠을 못 잤어요. 더 가슴 아픈 건, 수술을 기다리던 심장병 어린이들 중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겁니다.”
평소 그를 아끼던 김수환 추기경이 “하늘이 너를 더 크게 쓰시려고 아픔을 준 거니까 떠나라”고 권했다. 법정 스님과 김동길 박사도 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미국 서부로 건너가 고려대 출신이 대표로 있는 여행사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하루에 관광버스를 13시간 탔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무혐의 판결이 났고 한국 관광객들이 ‘억울하겠다, 우린 다 안다’며 팁을 많이 주셨어요. 팁 받는 사람이 그 돈으로 도박할 순 없잖아요? 라스베이거스를 수없이 갔어도 슬롯머신 한 번 안 했습니다. 2년간 팁 9000만원을 모아 딸을 시집보냈죠.”
“국민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
여담이지만, 아들의 결혼도 그의 작품이다. 천안에 강연을 갔는데 맨 앞줄에 유난히 예쁘고 참한 아가씨가 보였다. 강연 중에 단상으로 불러 “며느리 할래?” 그랬더니 “영광이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애인 있냐”는 확인 질문엔 “없다”는 확답. 청중은 돌발상황에 즐겁게 웃었지만, 포도농장집 딸은 그렇게 진짜로 이상용 가(家)의 며느리로 들어왔다. 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본인까지도 ‘이상용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꼽는 동화 같고 코미디 같은 결혼 스토리다.
다시 미국 생활 이야기다. 그의 버스 탑승 후 후배 회사를 찾는 관광객이 두 배쯤 늘었지만, “국민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아내의 한마디에 귀국을 결심했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서 전남 구례 비닐하우스에서 상추・마늘 농사를 짓고, 경남 일대에서 꽃모종을 심으며 6개월을 보냈다. 일당 3만원. 그 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가족에게 가장의 의무를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후 집에 오자마자 엉엉 울었던 기억도 지워주고 싶었다. 개그우먼 문영미와 녹음한 〈이상용의 폭소열차〉(1999년)는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음반이다.
“CD를 들고 제가 직접 행담도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3년 동안 팔았습니다. 손님들 오시면 몇 분 앞에 두고 즉석 개그도 했죠. 지나가던 분들이 신기해하며 ‘요즘은 잘 지내냐’며 걱정도 해주시고 덕담도 해주셨습니다. 응원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물건도 많이 사주셨어요.”
방송 복귀
현숙, 유지나, 태진아, 조항조, 송대관 등 가수들이 행사장 가는 길에 일부러 들러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같이 CD도 팔고, ‘화장실 앞’에서 노래도 불러줬다.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1985~1986년)를 할 때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다.
CD는 10탄까지 제작할 만큼 대박이 났지만, 생각보다 가계에 보탬을 주지는 못했다. 저작권 개념이 모호하던 시절이어서, 정본보다 복사본 판매량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CD를 만든 건 잘한 일이다. 이상용을 처음 발탁한 유수열 PD(당시 춘천 MBC 사장)가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알아.”
매주 1시간 진행한 〈강원 매거진〉(2000)이 이상용의 방송 복귀작이다. 이후 대전 MBC의 〈주부 가요열창〉, 경인방송의 〈청춘 노래자랑〉, 전주방송의 〈와글와글 시장가요제〉, MBC 〈늘 푸른 인생〉 등을 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한 달에 강의를 50여 차례 다니며 왕성하게 달리던 뽀빠이 열차는 지금 21개월째 발이 묶여 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아직도 보행이 조금 불편한데, 건강과 활력의 상징 뽀빠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아파도 아픈 척을 하지 않는다. 2023년 팔순 기념으로 출간 예정인 자서전 《살아보니 인생 별것 아니더라》 집필도 멈출 수 없다.
“제 방송이나 강연이 다 현장 중심으로 이뤄지잖아요. 그런데 집합금지 조치 때문에 일이 싹 끊겼어요. 거짓말처럼. 먹고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얼마 전에도 소장하고 있던 그림을 팔았죠. 저에게는 지금 일과 돈이 필요합니다. 불러주시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형님, 왜 이렇게까지 애쓰며 사셨습니까?”
왜 그렇게 돈이 없나. 필요하다 싶으면 일단 지르고 보기 때문이다. 심장병 수술만이 아니다. ‘어린이 대통령’이라면 선배가 계시지 않은가.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1899~1931년) 선생 유족은 꼭 챙겨야겠다 싶어 광명시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사드리고 추어탕집 개소에도 힘을 보탰다. 심장병만 해도 수술비 총액만 80억원 남짓. 그래서 곳간에는 쌀이, 통장에는 돈이 늘 부족했다.
횡령 의혹으로 몰렸을 당시 통장 잔고는 불과 40여만원. 담당 수사관이 “형님, 왜 이렇게까지 애쓰며 사셨습니까?” 했을 정도다.
출국 전, 부산에서 신발을 만드는 전라남도 신안 남자 박수관 사장이 멀리서 찾아와 “우리는 형님이 그런 분 아닌 거 압니다”라며 아무 말 없이 현찰 1억원을 주고 간 우정을 잊지 못한다. 회사 행사 때도 꼬박꼬박 불러 다른 사람보다 강연료를 두 배로 챙겨주는 든든한 동생이다. 이상용의 강연 제목은 ‘인생은 아름다워라’. 지금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몇 시간을 얼마든지 웃길 수 있다.
― 수없이 강연을 다녔을 텐데, 생애 최고의 강연은 언제였나요.
“사우디 가서 중동 파견 근로자들과 진행한 위문공연도 인상에 남지만, 딱 하나 꼽으라면 1988년 대우조선 강연입니다. 대규모 파업에 장기 농성, 연이은 분신 등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잖아요. 김우중(金宇中) 회장 초청으로 거제도로 내려갔습니다. 전쟁터 같았어요. 노사(勞使)가 다 지치고 독이 올라서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 같았다니까. 직원 3만명 모인 자리에서 제가 그랬죠. 지금 이 자리에서 회장님과 노조위원장 둘이 의형제를 맺자. 동생, 양동생!”
당시 노조위원장 이름이 양동생. 김우중과 양동생은 서로 어깨동무하고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고 나서 파업이 풀렸다. 전장(戰場)과 다름없는 곳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MBC TV 〈우정의 무대〉
― 그렇다면 본인이 꼽는 대표작, 생애 최고의 프로그램은요.
“1989년부터 진행했던 〈우정의 무대〉죠. 나를 완성시켰고, 나의 모든 것을 녹여 넣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군(軍) 위문 프로그램을 만들 때 제가 만장일치로 사회자 추천을 받았답니다. 장교 출신에 전방에서 제대로 군 생활 했다고, 장병들이 저를 보면 좋아할 거라고요. 〈우정의 무대〉는 부대 내 사고도 줄이고 병영의 즐거움도 늘린 프로그램이었다고 자부합니다.”
군에 대한 그의 사랑은 순도 100%다. 한 번도 본인 입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제대 후 광주 상무대 연병장을 찾아 보병, 포병, 기갑 ROTC 체육대회 응원단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얼굴만 비친 것이 아니라, 행사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서 열정적으로 소리 지르며 후배 장교들에게 웃음을 줬다. 〈우정의 무대〉 출연료가 교통비・숙박비 총액보다 아래인 경우도 있었지만, 사명감과 애국심으로 전국의 군부대를 거의 다 방문한 배경이다.
“뒤에 있는 분이 어머니 맞습니까?”
“예! 제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우정의 무대〉 하면, 장병과 시청자를 울렸던 하이라이트 ‘그리운 어머니’ 코너를 빠뜨릴 수 없다.
“군 위문 프로그램이 너무 딱딱하다고 해서 사람들을 울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죠. 사전에 알려주지 않고 그야말로 깜짝 만남으로 진행했습니다. 해군 아들이 섬에서 훈련 중이라 아무리 찾아도 무대로 나온 장병 중엔 아들이 없어서 헬기로 병사를 공수해 방송 마치고, 촬영 후 그 헬기로 고향까지 어머니랑 둘이 휴가 보낸 적도 있죠.”
〈우정의 무대〉는 한 번에 9000여명이 출연하는 거대한 프로그램이다.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군부대 특성상 낮 녹화는 할 수 없어 늘 저녁 무렵에 카메라를 돌렸다.
“일주일에 책 4~5권 읽어”
― 방송에 안 나오는 사전 녹화가 더 재미있었다는 증언이 많습니다.
“군인들이 군기가 바짝 들어서 반응이 굳어 있잖아요. 방송이 잘 나오려면 녹화 전에 분위기를 띄워놓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야한 얘기도 하고 신나는 쇼도 하고, 흥겨운 분위기를 미리 만들어놓고 촬영을 했죠.”
샘플로 들려준 방송 비적합 ‘19금(禁)’ 유머는 차마 그대로 지면에 옮길 수 없다.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대강의 내용만 전하자면 이런 것이다.
〈신혼부부가 첫날밤을 묵은 호텔 방의 침대 다리는 6개. 그러면 다리는 모두 몇 개?
정답은 12개다. 유추 가능한 11개를 빼고 나머지 한 개가 뽀빠이 유머의 핵심이자 창조적인 부분이다. 예전 어르신들은 터널을 굴다리라고 불렀다. 그래서 12개다.〉
― 모든 유머를 직접 만든다면서요? 독서량도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4~5권은 꼭 책을 읽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메모하고 바로 버리죠. 그렇게 모은 소재 4만 개를 금고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료죠.”
― 〈우정의 무대〉는 7년을 장수한 인기 프로그램이지만 처음엔 방송을 장담할 수 없었다면서요.
“기획안은 나왔는데 첫 방송을 하겠다는 부대가 없었어요. 노태우 대통령의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을 했던 안병호 장군의 주선으로 첫 방송을 9사단에서 했습니다. 방송 나간 걸 보고 노 대통령이 ‘이렇게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더 많은 시청자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 방송 시간대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안병호 장군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24년 동안 진행한 프로그램 〈라디오 위문열차〉 덕분이다. 전국에 모르는 사단장이 없을 정도였다. 나중엔 위관급 장교 때 만난 지휘관을 사단장으로 다시 만나기도 했다.
- 유명인들과도 교분이 많았지요.
“그럼요. 김수환 추기경님 앞에서 ‘신부 하시길 잘하셨어요. 그 얼굴에 누가 시집오겠습니까?’라는 코미디를 했고, 박정희 대통령 침실에서도 개그를 했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
“육영수 여사의 청으로 희극인 김희갑 선배님과 세 차례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각하가 취기가 있고, 힘들어하시니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우스운 얘기 몇 개 해달라는 말씀이셨어요. 품격 있는 19금 이야기도 하고, 잠드시는 것 같다가 깨면 다시 들어가 또 웃겨드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시는 모습을 침실에서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너희가 100살을 알아?’

이상용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남자다. 지난 49년간 단 한 번도 방송사고를 낸 적이 없다. 지각도 없었다. 〈우정의 무대〉 때는 일기예보에서 눈이 많이 온다고 하면 하루 전날 미리 가서 여인숙에서 묵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MC가 안 오면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사고에 가까운 비상사태가 발생, 이를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방식으로 수습한 적이 있다. 1983년부터 9년 동안 진행한 KBS2 TV 〈출발 동서남북〉에서다.
“창녕(昌寧) 부곡하와이에서 하루 종일 야외 녹화를 마치고 터미널에 왔는데 안인기 PD가 급하게 SOS를 쳤어요. 제작진 실수로 녹화 테이프가 다 날아갔다는 겁니다. 방송이 못 나갈 판 아닙니까. 다시 부랴부랴 현장으로 가서 해가 남아 있는 동안 허공에 대고 혼자서 진행을 했죠.”
때로는 몸짓도 섞어가면서 눈앞에 군중이 있는 것처럼 흥분도 하고 소리도 질렀다. “군복 입은 사람 먼저 나오지 마세요, 빨간 옷 입은 할머니가 열심히 뛰어가고 계십니다.”
다음 날 군청(郡廳)의 도움으로 인원을 동원해서 이상용의 사전 녹음 ‘가짜 중계’에 맞춰 옷도 입히고 동선(動線)도 재연해서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방송가에 전해오는 전설 가운데 하나다.
“말하자면 변사(辯士)가 하는 말을 미리 녹음하고 그 말에 맞춰 영화를 찍은 셈인데, 다른 편보다 더 기가 막히게 나왔더라고요. 보면서 웃다가 나중엔 안인기 PD 솜씨에 감탄하면서 넋 놓고 봤다니까요. 우리는 불가능을 모르는 민족입니다. 하면 됩니다!”
‘파란만장’
― 방송가(放送街)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에 공중전(空中戰)까지 다 겪었는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그럼요, 있죠. 100세 이상 어르신들 모시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죠. 제목은 ‘너희가 100살을 알아?’ 전국에 100세 이상 어르신이 1만5000분이 좀 넘어요. 어르신들과 가족들을 모시고 어떻게 100세를 넘겼는지, 가족 분위기는 어떤지, 자손들이 자랑하는 어르신의 모습 등을 방송에 담고 싶습니다. 장날 약장수 말고는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시골 오지마을을 찾는 ‘유랑극단’도 하고 싶어요. 차 한 대에 가수, 코미디언, 마술사, 의료진을 동행하고 전국을 도는 거죠. 동네 사람들이랑 잔치국수 끓여서 나눠 먹고, 상비약, 김치냉장고도 나눠드리는 겁니다.”
10년 이상 진행한 프로그램만 일곱 편이 넘는 전설적 사회자의 소망이 꼭 이뤄지기를 바라며 마무리 질문을 던졌다.
― 이상용은 어떤 사람입니까.
“집은 20평,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 이상용에게 코미디란.
“인생의 단면이죠. 코미디로 인해 내 인생이 좌우로 나뉘었으니까요.”
― 이상용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1억원입니다.”
― 네?
“파란만장(波瀾萬丈)했으니까요.”
‘파란’ 지폐 ‘만 장’이면 1만 × 1만, 그래서 1억원이라는 이야기였다. 초구(初球) 못지않은 강력한 웃음이 터지면서 인터뷰가 끝났다.⊙
“뽑을 때 잘 뽑아야 한다.”
― 그럼 국회의원과 석쇠의 공통점은?
“자주 갈아줘야 한다.”
초구(初球)부터 강렬했다. ‘국민 사회자’ 이상용(李相瀧·78) 이야기다. 1944년 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태생. 이한우(李旱雨)・최순례(崔順禮) 부부의 2남 2녀 중 장남이다.
“출생(出生)부터 기구했어요. 누님이 첫째, 제가 둘째죠. 아버지는 서천 분이시고 어머니 고향은 부여입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가지셨을 때 아버지 찾는다고 서천에서 백두산까지 걸어가셨다고 해요.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고 한 달 이상을 걸어가셨다니 배 속의 저는 어땠겠습니까.”
아버지의 직업은 신문사 기자였다. 일제(日帝) 말기, 신문사가 강제로 문을 닫고 가족의 생계가 어려웠던 시절, 새 직업을 찾아 먼 길을 떠나셨을 터이다. 하지만 북행(北行)을 마치고 어머니가 시댁이 아니라 친정으로 혼자 돌아오신 것으로 보아 다른 사정이 더 있었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낳기는 낳았는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딱 보기에도 일찍 죽을 것 같은 아기였던 거지. 외삼촌들이 저를 구덩이에 파묻었답니다. 어차피 일찍 갈 놈인데, 키우다 보면 재가(再嫁)만 늦어지는 것 아니냐고 그러셨답니다.”
당시 8세던 이모가 생명의 은인이다.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냐”며 조카를 파내 산으로 도망쳤다. 그러고 나서 “이 아기 안 키우면 같이 죽어버리겠다”고 버텼다. 어머니의 젖이 말라 살길이 막연했지만, 동네 아주머니 200여 분에게 젖동냥을 하며 또 겨우 살아났다.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다. 3세 때 처음 문고리를 잡고, 5세 때 겨우 걸음마를 했을 정도로 약골이었다. 느리고 약해서 놀이판에는 끼지 못하고, 그 대신 가방 지킴이를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구를 만들었다.
60년 넘게 하루 2시간 운동
대처(大處)로 나온 건 서면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다. 대전의 아버지를 찾아 온 가족이 고향 마을을 떠났다. 어머니와 누나, 나 셋이서 논두렁 물 마시고 고구마 뽑아 먹으며 300리 길을 보름 동안 걸었다.
“아버지는 신문사 대전 지국장이셨는데, 알뜰하게 집을 챙기는 분은 아니셨어요. 어머니는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 하는 분이셨고요. 갑작스러운 이사가 ‘방황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죠.”
병약했던 이상용 소년이 건강체로 거듭난 건 삼촌 도움이다. 11세 때, “장손은 우리 집안의 대들보”라며 아령을 사다 줬다. 가방에 도시락은 없어도 아령은 챙겨갈 정도로 열심히 운동했다. 몇 달 하다 보니 ‘근육이 만들어진다’는 느낌이 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하루 2시간 운동’을 거른 적이 없다. 술, 담배, 청량음료, 커피도 입에 대지 않았다.
엄격한 자기단련의 열매는 달았다. 키도 작고 얼굴도 까무잡잡했던 시골 소년은 1962년 고3 때 ‘미스터 대전고’, 1966년에는 ‘미스터 고려대’에 뽑히며 ‘최고 인기남’ ‘힘 있는 남자’로 신분이동(身分移動)했다.
“몸이 건강해지니 인생에 자신이 붙더라고요. 삼성국민학교, 한밭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명문 대전고(大田高)에 합격한 날 고향 마을 젖엄마들이 ‘우리 동네 상용이 대전고 입학’이라고 격하게 축하해주셨습니다.”
플래카드 제작이 쉽지 않던 시절이다. 신문지를 이어붙이고, 큰 글자를 써서 돼지우리에 붙들어 맨 고향 사람들의 정성과 응원을 이상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모범생 생활은 거기까지였다. 송인준 전 대법관, 서종환 전 문화공보부 차관 등 동기들이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동안 이상용은 500명 중 480등으로 겨우 졸업했다.
‘주먹 서클’ 회장
“근육 하면 이상용이었으니 제안이 많았어요. 두목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죠. 폼생폼사니까 ‘싫다, 못 한다’라는 얘기는 할 수 없잖아요? 동녘회라는 주먹 서클 회장을 맡았습니다. 공부보다 운동, 운동보다 싸움이 중요하다 생각했던 시절입니다.”
지역 최강자 자리를 놓고 대전공고 일진(一陣)과 1대 1 격투를 벌인 적도 있다. 학교당 100여명의 응원단이 운집한 가운데 야간에 격돌한 빅 이벤트였다. 이런저런 일로 경찰서를 들락거릴 때마다 아버지가 ‘신문사 빽’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하지만 고3 때 ‘조직원’(?) 31명을 이끌고 상경(上京), 대한극장에서 〈벤허〉를 보고 귀가했다가 ‘단체 정학’을 맞은 것을 무마(撫摩)하는 것은 아버지의 능력 밖이었다.
“고3 2학기가 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대학 떨어지면 일 나겠다 싶어 두 달을 피나게 공부했습니다.”
대학입학 자격고사를 보고 고려대 임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선생님이나 가족이나, 그 성적으로 고대에 붙으면 ‘기적’이라고 하기에 오기가 생겼다. ‘확 튀고 깊은 인상을 주면 입시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 입시 전날 의상을 마련했다. 소매 없는 상의에 운동 팬티였다. 1963년 2월 20일 영하 25도. 이상용은 턱걸이 102개, 수류탄 던지기 거의 100m, 100m 달리기 12초대로 1등이라는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선보이며 동료 응시생과 시험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떨어지면 가족들 볼 면목이 없어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는데 결과는 합격. 응원차 상경 중이던 아버지와 누나가 만세를 불렀다. 아버지는 대전까지 재건호(再建號) 열차표 4장을 끊었다. 사람은 셋인데 차표는 넉 장?
“고대생은 누워가시게”가 아버지의 답이었다. 불고기를 먹는 것이 명절 행사이던 그때, 한일관에서 합격 턱으로 ‘불고기 5인분!’을 큰소리로 외치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하셨던 아버지의 또 다른 유머였다. 이상용은 대전까지 정말로 누워서 갔다. 어쩌면 유머 감각은 유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군만두가 영어로 뭐게요?”
“몰라.”
“서비스.”
얼마 전 그와 손자 사이에 오갔던 대화다.
은행나무가 적합한 토양은?
대학 입학식 날 일군(一群)의 선배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역도부원들이었다. 반공(反共)의 기수이자 야당의 거목 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 1974년 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테헤란 아시안게임 역도 슈퍼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딴 황호동(黃鎬東) 등 쟁쟁한 선배들이 포진한 끈끈한 조직이었다.
3학년 때는 응원단에 들어갔고, 4학년 때 응원단장으로 뽑혔다. 응원단장은 숫기가 있어야 한다며 여대생 관중 앞에서 펼친 오디션을 당당히 통과한 결과다. 김일, 장영철의 동작을 응용한 레슬링 박수, ‘연대가 지고지고 일백 번 고쳐지고…’ 등 고전을 응용한 만담(漫談) 등이 그의 창작이다.
학내 유명인사였지만, 단체 미팅 사회 등 ‘업무’가 폭주해서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다. 토양학 교수님이 “그래도 한 번은 수업에 들어와라. 질문을 해서 맞히면 종강”이라고 할 정도였다.
“은행나무는 어느 토양에 적합한가?”
어려서 본 고향 마을 풍경에 답이 있었다. “변소 옆 땅입니다”라는 답에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교수님은 정답으로 인정해줬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결혼도 했다.
“1964년 6·3사태 때 역도부가 데모대 맨 앞장에 섰어요. 안암동 하숙집으로 경찰들이 찾아오더라고. 그래서 삼선교 아는 누나 하숙집으로 피신했습니다.”
고향 누나 하숙집에 놀러 가 만났던 1년 연상의 성신여대생이 지금의 아내다. 그 집에서 몇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신세를 졌다. 방이 두 칸이라 숨어 있기 좋았는데, 곁에서 보니 누나가 아니라 여자로 보였다. 그래서 정교하게 작전을 짰다. 역도부 후배들을 동원해 도봉산에 하루 만에 움막을 짓고 누님을 모셨다. “여기도 위험하니 산속으로 잠깐 피해 있겠다. 대신 올라와서 밥 좀 해달라”고 했더니 쌀을 챙겨서 거기까지 와줬다. 움막에서 저녁을 먹고 “간첩이 돌아다닌다 들었다. 밖에 나가면 큰일 난다”고 겁을 줘서 일단은 붙잡아두는 데 성공. 거기서 ‘결혼하자’고 다짜고짜 돌직구를 던졌다. 처음엔 뺨을 때리며 “미쳤냐?”던 누나는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무릎 꿇고 비는 모습에 청혼을 받아들였다.
1967년 2월 25일 졸업, 3월 5일 결혼 후 유성온천으로 신혼여행, 3월 10일 ROTC 5기로 소위 임관. 기갑부대 탱크 소대장이 그의 보직이다. 첫 발령지인 강원도 인제(麟蹄)는 단신으로 부임했다. 1968년 1·21사태 때는 김신조를 잡으러 화진포까지 출동하기도 했다.
― 신혼 생활은 못 한 건가요.
“아내는 대전에서 시어머니 간호를 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그때 많이 아프셨고, 58세에 돌아가셨죠. 대전에서 인제까지는 버스를 타도 하루 이상 걸리던 시절이라 왔다 갔다 하기도 어려웠고…. 1969년 가평으로 임지를 옮기면서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는 1970년 6월 30일. 농대 졸업생은 산림공무원 말고는 취직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용은 산보다는 평지가 편했고, 평지의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서울이 낫겠다 싶어 일단 상경했는데 일자리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큰 사고(事故)도 일어났다.
“그때 아내가 《중앙일보》 사업부에 다니고 있었는데 택시에 치였어요. 몸이 공중으로 날았다가 추락했으니 여러 군데 부러지고,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막막했죠. 동대문 대동병원에 전신 깁스를 하고 누웠는데 배 속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고….”
도봉동에서 사글세를 사는 처지였지만, 사고를 낸 운전사의 처지는 더 한심했다. “내가 해결할 테니 가라”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여직원은 결혼과 동시에 퇴사가 상식이던 시절, 미혼으로 속이고 근무하던 아내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의료진이 태중(胎中)의 딸은 무사하다고 했다. 당장 생활비와 병원비가 필요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잴 상황이 아니었다.
“모찌떡 하나로 하루를 버티고 노란 양은 냄비에 중국집 짜장면 받아다가 병원으로 날랐습니다. 청계천에서 취객들 택시 대신 잡아주기, 술집 웨이터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신문 배달하다가 남의 집 우유도 많이 훔쳐 먹었습니다. 배달원과 우유 주인들에게 지금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도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맨투맨에서 지역방어로 작전을 바꿨다. 을지로5가 중부시장에 나가 새벽부터 청소를 하고 상인들의 짐을 날랐다. ‘부지런한 이군’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상인들이 불합격품을 ‘갖다 팔라’고 내주기도 했다. 북어 대가리, 다리 뜯긴 오징어 등을 시장 입구에서 ‘한주먹 천원’에 파격 세일하고, 나중에는 고향에서 김을 받아다 팔기도 했다. 비 오는 날 봉투에 구멍이 나서 어물(魚物)이 바닥에 흩어졌는데, ‘물건’이 상할까 봐 되는 대로 집어서 품에 넣었던 기억도 있다.
방송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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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TV 〈모이자 노래하자〉 MC 시절의 이상용. 사진=유튜브 캡처 |
예나 지금이나 ‘즉시 실천’은 뽀빠이의 강점. 〈유쾌한 청백전〉 〈웃으면 복이 와요〉 연출자 유수열 PD를 찾아갔다. 대전고 선배라고 했다. 빗자루 20자루를 사다 정동 MBC 방송국 인근 다방 변소에 맡겨놓고 새벽부터 눈을 쓸었더니 방송국 사람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 소문이 나니 당사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호기심은 출연 기회로 이어졌다.
“1973년 〈유쾌한 청백전〉 출연이 제 방송 데뷔입니다. 역도부 후배 40명 동원해서 우동 한 그릇씩 외상으로 사 먹이고 방청석에 앉혔습니다. 너무 표나면 안 되니까 띄엄띄엄 앉히고 제가 나올 때만 박수를 치라고 했죠.”
“다방에 가서 보니 독일 사람은 찻숟가락을 좌우로 젓고 미국 사람은 위아래로 젓고 한국 사람은 찻잔을 돌리더라. 이유를 알려고 3년을 연구했다. 연구 결과는? 설탕 녹으라고.”
박수부대는 물론 방청객까지 모두 정신없이 웃었다. 사회자 변웅전(邊雄田)이 “때리고 넘어지는 코미디 말고 이거 계속하라”며 격려해줬다. 어쩌면 그날이 한국식 스탠딩 개그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유쾌한 청백전〉에서 육체미도 선보이며 이상용은 ‘뽀빠이’라는 별명도 스스로 만들었다.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일간 스포츠》 김유생 기자가 학사 코미디언이 신선한 코미디를 선보였다는 기사를 썼다. ‘이상용’ 이름 석 자가 처음 활자화된 기억이다. 방송 당일, 집에 TV가 없었던 이상용은 아내와 함께 동네 만화 가게를 찾았다. 재미있다고 깔깔 웃는 꼬마들 뒤에서 부부는 서로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 그때부터 살림이 핀 겁니까.
“아닙니다. 일단 첫 출연료 4000원으로는 우동값 5000원을 갚았죠. 스타가 되면 갚겠다고 했거든요. 안 받으신다기에 90도로 인사하고 돈 드리고 왔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을 겹치기로 출연한 날도 있지만, 단역이라 출연료만 가지고는 여전히 생활이 어려웠어요. 이사만 21번 다녔습니다.”
인생 역전 프로그램은 KBS 어린이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1974~ 1990년)다. 여의도광장을 지나가는데 한군데 모여 있는 어린이들이 보였다. 무작정 다가가 ‘줄 맞춰 서’ ‘앞으로 가’ 하며 어울려 놀았다. 잠시 후 모습을 보인 PD가 “누구냐?”고 묻기에 “지나가던 사람”이라고 했다. “따라오라”는 한마디가 운명을 바꿀 줄은 PD도 이상용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게임하는 출연자의 부친상(父親喪)으로 마침 대타(代打)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신인 코미디언’은 즉석에서 채용되어, 녹화 전 방청석 분위기를 달구고 녹화 중에는 게임 도구를 나눠주며 6개월을 일했다.
‘TV에 안 나오던 스태프’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여자 MC가 부친상을 당한 날 PD가 그를 불렀다. ‘할 수 있겠냐?’는 말에 대본을 달라고 해서 밤새 외우고 녹화장에 나갔다.
“정말 재미있고 적성에 딱 맞았어요. 첫날부터 ‘여기가 내 자리다’ 싶더라니까. ‘어린이 대통령’ 소리를 들을 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무려 16년 동안 사회를 봤다. 어린이날은 특히 바빴다. 이동 시간이 부족해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하니 모 지방 도시에서 헬기를 보내오기도 했다. 청와대 앞마당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 사회도 그의 독차지였다. 누구보다도, 어린이들이 그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갈 무렵, 인생의 물꼬를 바꾸는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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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은 시력이 안 좋은 학생들에게 안경을 기증하는 ‘밝은 세상 보여주기 운동본부’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조선DB |
문제는 수술비였다. 당시 살던 집 보증금이 600만원이었는데 수술비는 1800만원. 회당 출연료 16만원으로는 감당 불가능한 액수였다.
“덜컥 약속을 하고 바로 아픈 어린이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이미지 관리하느라 야간 업소 출연을 고사하고 있었는데, 오비스 캐빈, 라데빵스, 로즈 가든 세 군데 출연료 석 달 치를 가불(假拂)했어요. 바자회도 하고 지인 돈도 빌리고, 발로 뛰면서 겨우 수술비를 만들었죠.”
본인에게도 1남 1녀 어린 자녀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이상용에게 심장병 어린이의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수술은 성공.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수술을 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감격해 주변에 사연을 전했고,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이 뽀빠이의 사당동 집으로 몰려왔다.
“처음에 아내가 그러더군요.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 우리는 수술비 반도 안 되는 액수의 전셋집에 사는데…’. 나중엔 ‘아이가 죽게 생겼는데 그 부모 마음은 어떻겠냐’며 이해해줬습니다.”
아내의 인정과 격려에 용기를 얻어, 합정동에 ‘한국어린이보호회’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줬다. 그 와중에도 남들 안 하는 걸 하고 싶어 건물 앞에 조그만 잔디밭을 만들고 ‘잔디밭에 들어가서 노세요’라는 팻말을 붙였다.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은 그의 헌신에 대한 나라의 보답이다.
횡령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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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은 1996년 11월 4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어린이보호회 공금 유용 의혹을 부인했다. 사진=조선DB |
“1996년 11월 여의도 목욕탕에서 잡혀갔어요. 〈우정의 무대〉 화천 군부대 녹화가 있던 날 아침이었죠.”
이른바 횡령 의혹이었다. ‘4500만원짜리 집이 아니라 40억원 호화주택에 산다’ ‘30년 고물차가 아니라 벤츠 승용차를 탄다’ ‘후원금 빼돌려 파주에 땅 1만 평을 샀다’고 했다.
기자가 묻기에 “그런 집, 차, 땅 있으면 찾아서 당신이 가지시오”라고 했다. 수사를 받았지만 1997년 2월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시작부터 함께했던 분신 같은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1989~1997년)는 아예 폐지되었다. 누가 왜 그랬는지 짐작은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 대전역 앞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가 그 충격으로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억울했죠. 한때 왼쪽 눈이 안 보였고, 수면주사 두 대를 맞아도 잠을 못 잤어요. 더 가슴 아픈 건, 수술을 기다리던 심장병 어린이들 중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겁니다.”
평소 그를 아끼던 김수환 추기경이 “하늘이 너를 더 크게 쓰시려고 아픔을 준 거니까 떠나라”고 권했다. 법정 스님과 김동길 박사도 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미국 서부로 건너가 고려대 출신이 대표로 있는 여행사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하루에 관광버스를 13시간 탔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무혐의 판결이 났고 한국 관광객들이 ‘억울하겠다, 우린 다 안다’며 팁을 많이 주셨어요. 팁 받는 사람이 그 돈으로 도박할 순 없잖아요? 라스베이거스를 수없이 갔어도 슬롯머신 한 번 안 했습니다. 2년간 팁 9000만원을 모아 딸을 시집보냈죠.”
“국민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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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에게 재기의 기회를 만들어준 음반 〈이상용의 폭소열차〉. |
다시 미국 생활 이야기다. 그의 버스 탑승 후 후배 회사를 찾는 관광객이 두 배쯤 늘었지만, “국민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아내의 한마디에 귀국을 결심했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서 전남 구례 비닐하우스에서 상추・마늘 농사를 짓고, 경남 일대에서 꽃모종을 심으며 6개월을 보냈다. 일당 3만원. 그 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가족에게 가장의 의무를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후 집에 오자마자 엉엉 울었던 기억도 지워주고 싶었다. 개그우먼 문영미와 녹음한 〈이상용의 폭소열차〉(1999년)는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음반이다.
“CD를 들고 제가 직접 행담도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3년 동안 팔았습니다. 손님들 오시면 몇 분 앞에 두고 즉석 개그도 했죠. 지나가던 분들이 신기해하며 ‘요즘은 잘 지내냐’며 걱정도 해주시고 덕담도 해주셨습니다. 응원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물건도 많이 사주셨어요.”
방송 복귀
현숙, 유지나, 태진아, 조항조, 송대관 등 가수들이 행사장 가는 길에 일부러 들러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같이 CD도 팔고, ‘화장실 앞’에서 노래도 불러줬다.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1985~1986년)를 할 때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다.
CD는 10탄까지 제작할 만큼 대박이 났지만, 생각보다 가계에 보탬을 주지는 못했다. 저작권 개념이 모호하던 시절이어서, 정본보다 복사본 판매량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CD를 만든 건 잘한 일이다. 이상용을 처음 발탁한 유수열 PD(당시 춘천 MBC 사장)가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알아.”
매주 1시간 진행한 〈강원 매거진〉(2000)이 이상용의 방송 복귀작이다. 이후 대전 MBC의 〈주부 가요열창〉, 경인방송의 〈청춘 노래자랑〉, 전주방송의 〈와글와글 시장가요제〉, MBC 〈늘 푸른 인생〉 등을 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한 달에 강의를 50여 차례 다니며 왕성하게 달리던 뽀빠이 열차는 지금 21개월째 발이 묶여 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아직도 보행이 조금 불편한데, 건강과 활력의 상징 뽀빠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아파도 아픈 척을 하지 않는다. 2023년 팔순 기념으로 출간 예정인 자서전 《살아보니 인생 별것 아니더라》 집필도 멈출 수 없다.
“제 방송이나 강연이 다 현장 중심으로 이뤄지잖아요. 그런데 집합금지 조치 때문에 일이 싹 끊겼어요. 거짓말처럼. 먹고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얼마 전에도 소장하고 있던 그림을 팔았죠. 저에게는 지금 일과 돈이 필요합니다. 불러주시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형님, 왜 이렇게까지 애쓰며 사셨습니까?”
왜 그렇게 돈이 없나. 필요하다 싶으면 일단 지르고 보기 때문이다. 심장병 수술만이 아니다. ‘어린이 대통령’이라면 선배가 계시지 않은가.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1899~1931년) 선생 유족은 꼭 챙겨야겠다 싶어 광명시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사드리고 추어탕집 개소에도 힘을 보탰다. 심장병만 해도 수술비 총액만 80억원 남짓. 그래서 곳간에는 쌀이, 통장에는 돈이 늘 부족했다.
횡령 의혹으로 몰렸을 당시 통장 잔고는 불과 40여만원. 담당 수사관이 “형님, 왜 이렇게까지 애쓰며 사셨습니까?” 했을 정도다.
출국 전, 부산에서 신발을 만드는 전라남도 신안 남자 박수관 사장이 멀리서 찾아와 “우리는 형님이 그런 분 아닌 거 압니다”라며 아무 말 없이 현찰 1억원을 주고 간 우정을 잊지 못한다. 회사 행사 때도 꼬박꼬박 불러 다른 사람보다 강연료를 두 배로 챙겨주는 든든한 동생이다. 이상용의 강연 제목은 ‘인생은 아름다워라’. 지금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몇 시간을 얼마든지 웃길 수 있다.
― 수없이 강연을 다녔을 텐데, 생애 최고의 강연은 언제였나요.
“사우디 가서 중동 파견 근로자들과 진행한 위문공연도 인상에 남지만, 딱 하나 꼽으라면 1988년 대우조선 강연입니다. 대규모 파업에 장기 농성, 연이은 분신 등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잖아요. 김우중(金宇中) 회장 초청으로 거제도로 내려갔습니다. 전쟁터 같았어요. 노사(勞使)가 다 지치고 독이 올라서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 같았다니까. 직원 3만명 모인 자리에서 제가 그랬죠. 지금 이 자리에서 회장님과 노조위원장 둘이 의형제를 맺자. 동생, 양동생!”
당시 노조위원장 이름이 양동생. 김우중과 양동생은 서로 어깨동무하고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고 나서 파업이 풀렸다. 전장(戰場)과 다름없는 곳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MBC TV 〈우정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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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의 대표작 MBC TV 〈우정의 무대〉. |
“1989년부터 진행했던 〈우정의 무대〉죠. 나를 완성시켰고, 나의 모든 것을 녹여 넣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군(軍) 위문 프로그램을 만들 때 제가 만장일치로 사회자 추천을 받았답니다. 장교 출신에 전방에서 제대로 군 생활 했다고, 장병들이 저를 보면 좋아할 거라고요. 〈우정의 무대〉는 부대 내 사고도 줄이고 병영의 즐거움도 늘린 프로그램이었다고 자부합니다.”
군에 대한 그의 사랑은 순도 100%다. 한 번도 본인 입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제대 후 광주 상무대 연병장을 찾아 보병, 포병, 기갑 ROTC 체육대회 응원단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얼굴만 비친 것이 아니라, 행사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서 열정적으로 소리 지르며 후배 장교들에게 웃음을 줬다. 〈우정의 무대〉 출연료가 교통비・숙박비 총액보다 아래인 경우도 있었지만, 사명감과 애국심으로 전국의 군부대를 거의 다 방문한 배경이다.
“뒤에 있는 분이 어머니 맞습니까?”
“예! 제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우정의 무대〉 하면, 장병과 시청자를 울렸던 하이라이트 ‘그리운 어머니’ 코너를 빠뜨릴 수 없다.
“군 위문 프로그램이 너무 딱딱하다고 해서 사람들을 울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죠. 사전에 알려주지 않고 그야말로 깜짝 만남으로 진행했습니다. 해군 아들이 섬에서 훈련 중이라 아무리 찾아도 무대로 나온 장병 중엔 아들이 없어서 헬기로 병사를 공수해 방송 마치고, 촬영 후 그 헬기로 고향까지 어머니랑 둘이 휴가 보낸 적도 있죠.”
〈우정의 무대〉는 한 번에 9000여명이 출연하는 거대한 프로그램이다.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군부대 특성상 낮 녹화는 할 수 없어 늘 저녁 무렵에 카메라를 돌렸다.
“일주일에 책 4~5권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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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은 유명인들과 교분이 많았다. 1994년 3월 31일 ‘김일 선수 후원의 밤’ 행사에 (왼쪽부터) 김종필 민자당 대표, 김일 선수와 함께한 뽀빠이 이상용. |
“군인들이 군기가 바짝 들어서 반응이 굳어 있잖아요. 방송이 잘 나오려면 녹화 전에 분위기를 띄워놓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야한 얘기도 하고 신나는 쇼도 하고, 흥겨운 분위기를 미리 만들어놓고 촬영을 했죠.”
샘플로 들려준 방송 비적합 ‘19금(禁)’ 유머는 차마 그대로 지면에 옮길 수 없다.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대강의 내용만 전하자면 이런 것이다.
〈신혼부부가 첫날밤을 묵은 호텔 방의 침대 다리는 6개. 그러면 다리는 모두 몇 개?
정답은 12개다. 유추 가능한 11개를 빼고 나머지 한 개가 뽀빠이 유머의 핵심이자 창조적인 부분이다. 예전 어르신들은 터널을 굴다리라고 불렀다. 그래서 12개다.〉
― 모든 유머를 직접 만든다면서요? 독서량도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4~5권은 꼭 책을 읽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메모하고 바로 버리죠. 그렇게 모은 소재 4만 개를 금고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료죠.”
― 〈우정의 무대〉는 7년을 장수한 인기 프로그램이지만 처음엔 방송을 장담할 수 없었다면서요.
“기획안은 나왔는데 첫 방송을 하겠다는 부대가 없었어요. 노태우 대통령의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을 했던 안병호 장군의 주선으로 첫 방송을 9사단에서 했습니다. 방송 나간 걸 보고 노 대통령이 ‘이렇게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더 많은 시청자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 방송 시간대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안병호 장군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24년 동안 진행한 프로그램 〈라디오 위문열차〉 덕분이다. 전국에 모르는 사단장이 없을 정도였다. 나중엔 위관급 장교 때 만난 지휘관을 사단장으로 다시 만나기도 했다.
- 유명인들과도 교분이 많았지요.
“그럼요. 김수환 추기경님 앞에서 ‘신부 하시길 잘하셨어요. 그 얼굴에 누가 시집오겠습니까?’라는 코미디를 했고, 박정희 대통령 침실에서도 개그를 했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
“육영수 여사의 청으로 희극인 김희갑 선배님과 세 차례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각하가 취기가 있고, 힘들어하시니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우스운 얘기 몇 개 해달라는 말씀이셨어요. 품격 있는 19금 이야기도 하고, 잠드시는 것 같다가 깨면 다시 들어가 또 웃겨드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시는 모습을 침실에서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너희가 100살을 알아?’

이상용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남자다. 지난 49년간 단 한 번도 방송사고를 낸 적이 없다. 지각도 없었다. 〈우정의 무대〉 때는 일기예보에서 눈이 많이 온다고 하면 하루 전날 미리 가서 여인숙에서 묵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MC가 안 오면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사고에 가까운 비상사태가 발생, 이를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방식으로 수습한 적이 있다. 1983년부터 9년 동안 진행한 KBS2 TV 〈출발 동서남북〉에서다.
“창녕(昌寧) 부곡하와이에서 하루 종일 야외 녹화를 마치고 터미널에 왔는데 안인기 PD가 급하게 SOS를 쳤어요. 제작진 실수로 녹화 테이프가 다 날아갔다는 겁니다. 방송이 못 나갈 판 아닙니까. 다시 부랴부랴 현장으로 가서 해가 남아 있는 동안 허공에 대고 혼자서 진행을 했죠.”
때로는 몸짓도 섞어가면서 눈앞에 군중이 있는 것처럼 흥분도 하고 소리도 질렀다. “군복 입은 사람 먼저 나오지 마세요, 빨간 옷 입은 할머니가 열심히 뛰어가고 계십니다.”
다음 날 군청(郡廳)의 도움으로 인원을 동원해서 이상용의 사전 녹음 ‘가짜 중계’에 맞춰 옷도 입히고 동선(動線)도 재연해서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방송가에 전해오는 전설 가운데 하나다.
“말하자면 변사(辯士)가 하는 말을 미리 녹음하고 그 말에 맞춰 영화를 찍은 셈인데, 다른 편보다 더 기가 막히게 나왔더라고요. 보면서 웃다가 나중엔 안인기 PD 솜씨에 감탄하면서 넋 놓고 봤다니까요. 우리는 불가능을 모르는 민족입니다. 하면 됩니다!”
‘파란만장’
― 방송가(放送街)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에 공중전(空中戰)까지 다 겪었는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그럼요, 있죠. 100세 이상 어르신들 모시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죠. 제목은 ‘너희가 100살을 알아?’ 전국에 100세 이상 어르신이 1만5000분이 좀 넘어요. 어르신들과 가족들을 모시고 어떻게 100세를 넘겼는지, 가족 분위기는 어떤지, 자손들이 자랑하는 어르신의 모습 등을 방송에 담고 싶습니다. 장날 약장수 말고는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시골 오지마을을 찾는 ‘유랑극단’도 하고 싶어요. 차 한 대에 가수, 코미디언, 마술사, 의료진을 동행하고 전국을 도는 거죠. 동네 사람들이랑 잔치국수 끓여서 나눠 먹고, 상비약, 김치냉장고도 나눠드리는 겁니다.”
10년 이상 진행한 프로그램만 일곱 편이 넘는 전설적 사회자의 소망이 꼭 이뤄지기를 바라며 마무리 질문을 던졌다.
― 이상용은 어떤 사람입니까.
“집은 20평,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 이상용에게 코미디란.
“인생의 단면이죠. 코미디로 인해 내 인생이 좌우로 나뉘었으니까요.”
― 이상용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1억원입니다.”
― 네?
“파란만장(波瀾萬丈)했으니까요.”
‘파란’ 지폐 ‘만 장’이면 1만 × 1만, 그래서 1억원이라는 이야기였다. 초구(初球) 못지않은 강력한 웃음이 터지면서 인터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