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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죽음의 美學’을 완성 중인 老스승 이창복

生을 바꾼 인민군 장교의 말 “죽기도 하는데 이까짓 것 뭐라고…”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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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남 중 넷이 독일 유학… 서로 도우며 박사 학위 받고 모두 대학교수
⊙ “아무리 쉽고 빠른 길이라도 양식과 양심에 거슬리면 결코 그 길을 가지 마라”
⊙ 은퇴 후 집필한 3권의 저서가 모두 秀作… “우리의 삶에 은퇴는 없다!”
⊙ “삶의 성숙은 죽음의 성숙. 죽음을 기억하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李昌馥
1937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독일 쾰른대학 박사(독문학) /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교수, 서양어대학 학장·부총장, 한국독어독문학회장 역임 / 독일 쾰른대학·함부르크 대학 연구교수 및 교환교수 역임 / 대표 저서로 《독일 산문과 시》 《독일문학의 소재와 모티브》 《하이너 뮐러 문학의 이해》, 역서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이너 뮐러 문학 선집》 등이 있다.
사진=조준우
  노(老)스승의 신간을 읽으면 설렌다. 살아온 인생의 고갱이가 문장과 행간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외국어대 이창복(李昌馥·83) 명예교수는 작년 6월 《삶을 위한 죽음의 미학》을 썼다. 2015년에는 《고통의 해석》, 2011년에도 《문학과 음악의 황홀한 만남》이란 699쪽 분량의 묵직한 책을 냈다. 모두 이 교수가 정년퇴직 후에 쓴 책이다. 학계에서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란 평가가 나왔다.
 
  스승은 《삶을 위한…》에서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고 썼다. ‘아니, 죽음에 이르는 길이 더 무섭다. 죽음에 이르는 길 또한 내 삶의 한 부분이니 성숙한 삶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삶의 산전수전, 희로애락을 다 겪었을 노교수의 ‘성숙한 삶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표현에 울림을 느꼈다. 그의 말은 괴테가 임종의 시간에 남긴 “더 많은 빛을…”이란 말을 떠올리게 했다. 내공이 탄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간조선》 독자에게 이 교수를 소개하고 싶었다.
 
  지난 6월 5일 서울 개포동의 이 교수 자택을 찾아갔다.
 
  “오늘따라 날씨가 더워서 오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겠네. 보편적인 이야기… 좋은 이야기만 써주세요, 하하하.”
 
 
  형제 다섯 중 넷이 대학교수
 
이창복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정년 퇴임 후 쓴 저서들. 왼쪽부터 《문학과 음악의 황홀한 만남》(2011), 《고통의 해석》(2015), 《삶을 위한 죽음의 미학》(2019).
  ― 형제 교수님들은 다 잘 계십니까.
 
  그러자 물끄러미 기자를 쳐다보았다.
 
  “어제 만났는데 매월 초 첫 번째 목요일마다 만납니다. ‘초목회’라고 해서 형제들이 다 모여요.”
 
  이 교수는 5남 2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5남 중 첫째는 한양대 철학과 이정복(李貞馥·작고) 명예교수, 셋째는 이창복 교수, 넷째는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이정춘(李正春) 명예교수, 다섯째는 베스트셀러 《먼 나라 이웃나라》를 쓴 덕성여대 이원복(李元馥) 전 총장이다. 다섯 아들 중 넷이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 교수는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데…” 하며 크게 웃었다. 둘째 이승복(李承馥·작고)은 공부 대신 사업을 택했다고 한다.
 
  ― 동생들은 다 서울에 사세요.
 
  “네.”
 
  ― 복입니다.
 
  “복이죠. 누님은 우리 집 바로 옆에 살고 동생들은 경기도 죽전, 서울 잠실에 살아요.”
 
  ― 만나면 안 싸우시나요.
 
  “(질문에 놀라며) 아이고… 싸우긴요, 하하하. 평생 살면서 형제들과 싸워본 적이 없어요. 가끔 언쟁은 하지. 막내는 미술 계통을, 가운데는 언론학을, 저는 독문학을 해서 분야가 서로 틀리거든요. 그러니까 학문적 테마가 나오면 서로 의견을 달리하지요.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어요.”
 
  ― 정치 얘기는 안 하세요.
 
  “왜요, 하죠. 정치 얘기는 아줌마들이…. 여러 측면에서 느끼고 판단하고 그렇지, 뭐.”
 
  기왕에 시작한 ‘교수 형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제가 고교 교사직을 버리고 150달러(당시는 정규 유학생에게 50달러만 환전해주었다. 100달러는 암시장에서 환전했다)를 쥐고 배를 타고 독일 쾰른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때 우리 형제들은 부산의 어느 여인숙에서 약속했어요. 제가 1년 후에 아래 동생(이정춘)을, 그리고 그 동생은 막내(이원복)를 독일로 데리고 갈 것을 말이죠.
 
  고통과 시련은 컸지만,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그사이 큰 형님이 독일 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오게 되어, 마침내 4형제의 공부가 독일에서 시작되었죠. 모두가 철학, 독문학, 언론학, 미술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서 정년을 마쳤습니다.”
 
 
  형제의 약속
 
이창복 교수의 형제들. 아랫줄 왼쪽부터 이창복, 이정복, 이정복의 아들 광원(훗날 호서대 교수가 됨). 윗줄 왼쪽부터 이승복, 이원복, 이정춘.
  이창복 교수는 “우리 형제들은 정말 가난했다”고 회고했다. 그 가난은 가족들을 뿔뿔이 헤쳐놓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1955년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당시 이창복은 고2. 1년간 친척 집에 얹혀살았다. 큰형(이정복)은 갓 결혼해 쌍둥이를 키우느라 자기 앞가림에 여념이 없었고, 둘째 형(이승복)은 부산 누님댁에서 살았다.
 
  이사한 지 일 년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두 동생은 그때 초등 6학년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 교수는 “가사 일은 나의 몫이었다”고 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막한 동생들의 앞날을 위해 무엇인가 획기적인 변화가 절실했어요. 돈 없고 ‘빽’ 없는 우리에게 유일한 방법은 유학밖에 없다고 진작부터 생각한 거지요. 196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7개월 후에 150달러를 쥐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독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현해탄을 건너 일본 고베까지 가서 그곳에서 요코하마~마르세유를 운항하는 정기 여객선을 탔다. 부산항을 떠나기 전날 그와 두 아우는 부두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가 동생 정춘이에게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일 년 후에 네 대학입학 허가서와 비행기 표를 꼭 보낼 것이니, 너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오직 독일어 공부만 열심히 해라. 그리고 후일에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
 
  당시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동생 정춘은 군에서 막 제대한 상태였다. 동생은 복학 대신 독일어 공부에 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출발하던 날, 큰형(이정복)이 왔고 형제들은 오후 석양을 뒤로하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1966년 9월 6일 배를 타서 10월 20일 독일에 도착했어요. 독일에 도착한 후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서 열심히 일했죠. 죽기 살기로 했어요. 다른 아시아인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러 다니다 귀국해버렸어요. 솔직히 부러웠죠.”
 
 
  기적
 
독일 유학 시절 이창복과 아내 국순희(鞠淳姬). 배경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다.
  1년 후, 그는 바로 아래 동생의 입학허가서, 초청장, 항공표를 마련했다. 독일에 도착한 동생 정춘은 형이 있는 쾰른대학에서 어학 과정을 거친 뒤 자신의 전공을 찾아 뮌스터대학에 입학했다.
 
  동생 정춘은 주말과 방학 때마다 차범근 선수와 손흥민 선수가 한때 활약했던 레버쿠젠에 있는 바이엘 제약회사와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했다. 1년 후에 형 창복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다. 또 교수 추천으로 6년이라는 유례없는 기간 동안 가톨릭 장학재단의 장학금으로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 무렵 큰형 정복이 독일 훔볼트재단 장학금으로 뮌헨에 도착했다. 이정복은 2년 반 만에 초(超) 스피드로 철학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다.
 
  뒤이어서 몇 년 후, 그러니까 1975년 겨울 학기에 이창복 교수가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봄 학기에 맞춰 귀국하기 전, 몇 개월의 여유가 있었다. 그때 막내 원복이 독일에 왔고, 여행 온 누나와 함께 형제들은 장장 5500km를 달리며 유럽여행을 즐겼다. 이 투어가 바로 이원복 교수가 훗날 쓴 《먼 나라 이웃나라》의 시작이 되었다.
 
  “참으로 꿈같은 일이 현실로 이뤄졌어요. 우리 형제들이 부산 부둣가 여인숙에서 다짐했던 약속이 완전히 실현된 것이죠.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잖아요. 하늘의 도움이 형제들의 운명에 크게 역사했다고 늘 생각합니다. 이젠 모두가 팔십과 칠십을 훌쩍 넘겼어요. 형제들의 약속은 아무리 반추해도 끊임없이 우리의 정서에 촉촉이 배어드는 행복의 즙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선물까지 덤으로 얻었죠.
 
  인생의 한 매듭을 기적이라 말하는 것이 과장 같아 쑥스럽지만, 감히 말하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이 가난과 형제 사랑이 일군 기적이 아니겠는가?’ 하고요.”
 
 
  방황
 
이창복 교수와 아내 국순희씨는 1969년 결혼했다. 신혼 초기 독일 뮌헨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창복 교수는 삶을 뒤돌아보며 기자에게 “자신과 쉽게 타협하지 마라”는 충고를 건넸다.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심 이 교수는 독일로 유학 가 독문학 대신 화학을 공부해 엔지니어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당시 해외 유학시험에 합격한 이에게는 1년의 군 복무를 마치면 제대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그는 일찍 입대했다.
 
  그 무렵 4·19혁명이 일어났고 이듬해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입대한 지 꼭 일주일 만에 5·16이 발발했다”고 한다. 게다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는 미증유의 국제적 위기가 일어났다.
 
  “입대하자마자 쓴 철모를 제대하던 날까지 써야 했어요. 군 복무기간은 연장되었고 유학시험 합격생에게 부여하던 1년 군 복무 혜택도 취소되고 말았죠. 저는 무려 35개월 20일을 복무하면서 육군 하사로 제대했어요.”
 
  크게 실망한 나머지 반항적이고 나태한 생활에 젖어 들었다고 한다. 불투명해진 미래를 수긍하며 자신과 타협해버린 것이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 귀대시간이 늦어 상관에게 야전침대 봉으로 실컷 엉덩이를 맞았다. 꼬박 하루를 걷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누워 뒤척이다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인생에서 3년은 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값지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고통의 순간에 ‘자신과 쉽게 타협하지 마라’는 삶의 철학을 터득하게 되었어요.”
 
  이후 낮에는 사단 의무중대에서 의약품 보급병으로 열심히 타자를 두들겼고, 밤에는 유학시험 필수과목인 ‘한국사’를 외우다시피 했다. 그 결과, 제대 후 유학시험에 곧바로 합격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군 복무 연장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군 시절과 유학 시절을 똑같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쉽게 타협하지 마라
 
  이 교수는 ‘자신과 쉽게 타협하지 마라’는 좌우명이 독일에서 하마터면 잘못된 길로 빠져들 뻔한 삶을 바로잡아주었다고 한다.
 
  독일에 정착한 유학생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식당을 개업하거나 다른 사업을 해서 영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부보다 돈의 유혹이 더 큰 탓이리라.
 
  이 교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쾰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콩’이란 중국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게 되었다. 수입이 짭짤했다. 1년 반을 일하고 나니 동생(이정춘)의 생활비와 항공료가 마련되었다. 공부 대신 일을 계속하고 싶은, 돈을 벌고 싶은 유혹이 대단했다.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무슨 큰 죄나 지은 사람처럼 양심의 가책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초봄의 일요일 오전이었다. 무엇인가에 끌려가듯 쾰른 성당 안으로 들어가 예수의 성화 앞에 설치된 성화대 위에 촛불을 올려놓고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지금 돈의 유혹이 내 이성을 마비시켜 본래 이루려 했던 미래의 꿈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고 한다.
 
  그날로 식당일을 그만두었다. 돈을 벌기 위해 화학 공부를 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과 쉽게 타협하지 마라’는 좌우명 덕분이었다.
 
  “어려운 삶의 고비를 맞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요.
 
  ‘아무리 쉽고 빠른 길이라 해도 네 양식과 양심에 거슬린다면 결코 그 길을 가지 마라. 비록 네가 가는 길이 고통스럽다 해도, 아무리 어렵다 해도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 요령은 결국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쉽게 타협하지 마라’고요.”
 
 
  自鳴鼓, 어느 인민군 장교와의 만남
 
(사진 위) 한국외국어대 교수 시절, 제자들과 울릉도로 여행을 떠났다. 울릉도행 선상에서 이창복 교수. (사진 아래) 이 교수가 정년을 마칠 때쯤의 모습이다.
  이 교수는 6·25 때 겪은 인민군 장교와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인민군 장교가 말한, “총 맞고 죽기도 하는데 이까짓 것 뭐라고…”라는 말은 그의 삶을 바꿔놓으며 일생에 영향을 미쳤다.
 
  6·25 때 그는 누나, 동생과 함께 계룡산에 있는 신원사 근처의 한 암자로 피란을 갔다. 신원사에서 암자까지 족히 1km에 이르는 약 3m 폭의 오솔길 양쪽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산기슭 계곡에는 물웅덩이가 있어 낮이면 수영하며 놀곤 했다.
 
  어느 날 인민군 장교와 위생병인 듯한 병사가 암자로 찾아왔다. 그 장교는 소년 이창복을 보고 미소 지으면서 손짓했다. 약간 겁이 났으나 어쩔 수 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이름과 나이와 부모에 관해서 몇 마디 묻고는 중얼거리듯 나직이 말했다.
 
  “학생 같은데, 빨리 전쟁이 끝나서 공부하게 되어야 할 텐데…. 열심히 하거라!”
 
  무장한 군인답지 않게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였다. 그러고 그는 신발을 벗었다. 양말 대신 그의 발을 싼 광목 같은 흰 천을 펼치니 맨발이 보였다. 발바닥은 크고 작은 물집으로 엉망이었다. 장교는 위생병에게 메스를 달라고 한 뒤 메스로 발에 난 물집을 터뜨렸다. 고통을 참으며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에잇, 총 맞고 죽기도 하는데 이까짓 것 뭐라고….”
 
  그러고 나서 웃으면서 말했다.
 
  “학생, 죽는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게 뭐 있겠어! 그런 의지와 용기만 있다면 큰 사람 되는 것 문제없지.”
 
  계속해서 그는 독백처럼 나직이 혼자 중얼거렸다.
 
  “문제는 나야, 나. 자신과의 싸움이지. 살기 위해서 말이야.”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년 창복은 큰 쇼크와 동시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꿈에 나타난 인민군 장교
 
  이 교수는 독일 쾰른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광경도 떠올렸다. 숙소를 마련하기 전까지 대학 인근의 공동 기숙사에 머물러 있었다. 시내 지리도 모르고 차도 없어 집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새로운 학업 준비와 숙소를 구하느라 몹시 지친 어느 날, 기숙사 2층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그 인민군 장교가 나타나 제게 나직이 말했어요.
 
  ‘저 앞엔 사방에 죽음이 매복해 있지. 그래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해. 죽을 각오와 앞으로 나아갈 용기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지. 그래야만 살 수 있는 거야.’
 
  그 장교는 씩 웃으며 제 어깨를 서너 번 토닥거리곤 뛰어나갔어요. 먼 앞쪽에선 마치 큰 조명등의 섬광처럼 강렬한 빛줄기가 하얗게 비추고 있었고, 그는 그 빛 속으로 뛰어가면서 점점 사라져갔어요. 급기야 하얀 섬광만이 제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문득 잠이 깼는데 기숙사 창밖에서 비치는 하얀 불빛 때문이었어요.”
 
  다시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그를 깨운 것은 흰 가로등이 아니라 대보름달이었다. 순간 왈칵 눈물이 솟아나 뺨과 베갯잇을 적셨다. 그대로 한참을 누워 조금 전의 꿈을 떠올려보았다. 꿈속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후 저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인민군 장교의 말을 떠올렸어요.
 
  사실, 유학 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행운의 여신이 등을 돌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깊은 좌절에 빠졌던 때가 있었어요. 박사 학위 논문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에 지도교수가 갑작스레 암으로 돌아가신 일도 좌절 중의 하나죠.
 
  그때 정말 낙담을 많이 했어요. 독일의 대학 사회는 교수 중심이어서 지도교수가 죽으면, 다른 교수가 안 받아줘요.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 독일어 교사나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10여 명의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동료들은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인민군 장교의 소리가 독백처럼 울려왔다고 한다. “죽기도 하는데 이까짓 것 뭐라고….” 이 교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새 교수를 찾게 되었고 그분의 지도하에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기하게 여겨져요. 어릴 적 한순간에 들은 인민군 장교의 말이 삶의 위기 때마다 올바른 길을 찾게 하는 자명고(自鳴鼓)가 되어 평생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으니까요.
 
  진리란 멀고 깊은 곳에 있지 않고, 가까운 우리의 주변에 있어요. 다만 보지 못할 뿐….”
 
 
  가난
 
2006년 11월 9일 이창복 교수의 고희연 당시 가족, 동료, 제자들이 함께 축하해주었다.
  이창복 교수의 가정은 학창시절 가난했지만 어린 시절엔 부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고무신 공장을 운영했고, 택시 소유주로서 택시조합의 임원이었다고 한다. 주말이면 가까운 온천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고, 아버지는 자가용 대신 말을 타고 다녔다.
 
  어머니는 큰 여관을 경영했다. 요즘으로 치면 호텔인 셈이다. 현관 입구의 포도나무 터널을 지나면, 미음(ㅁ)자형 한옥의 마당이 나오고, 그 가운데 심산유곡을 축소해놓은 것 같은 바위와 큰 분재처럼 가지를 보기 좋게 가꾼 소나무, 화초들이 있었다. 또 그 가장자리를 둘러 도랑처럼 흐르는 물속에서 금붕어들이 놀았다.
 
  “당시 유명한 ‘이해랑 극단’이 지방공연을 위해 우리 집 여관에 머물렀어요. 낮에는 배우들이 모두 모여 연습하는 장면을 구경했고, 밤에는 여배우들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서 낮에 본 연습 장면을 무대 위에서 재연하는 광경을 신기하게 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린 시절 그는 가끔 광에서 홍시나 곶감, 콩고물 갱엿을 서리했다. 명절 때는 일가친척이 모여 윷놀이를 했고,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연옥색 저고리와 연보라 바지의 한복에다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혔다. 학교에선 유일하게 가죽 축구화를 신고 공을 찼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둘째 아들(이승복)을 위해 그가 다니는 학교의 영어 선생님을 가정교사로 모셔와 함께 지내게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호강스럽게 지냈다.
 
  “6·25는 우리 집안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어요. 처음으로 겪는 피란의 고통과 궁경(窮境)이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공장과 집은 완전히 불타버렸고, 사업 기반을 모두 잃은 아버지는 재기불능이 되셨죠.
 
  고무신 공장을 재가동시키려는 노력의 실패로 가정 형편은 더욱 참담해졌고,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직조공장도 얼마 못 가서 문을 닫게 되어 집에는 빚더미를, 가족에겐 ‘가난’을 안겨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아닐 뿐
 
  그는 월사금을 내지 못해 교무실로 불려가 옛날 함께 지냈던 그 영어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종아리를 맞았다. 이것이 지금도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첫 번째 체벌(體罰)이었다.
 
  이후 5남 2녀의 형제들은 제법 긴 세월을 가난과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친숙해질 수 있었다. 이 교수는 “서울 상도동 산등성이 단칸방에서 살 때의 한 에피소드가 가난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놓은 계기였다”고 기억했다.
 
  종로에서 집에 가려고 탄 전차는 막 제일 한강교를 지나고 있었다. 호주머니엔 무일푼. 내일 학교에 갈 차비가 없었다. 갑자기 저 아래 한강 제방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무조건 달려가 십장(什長)에게 사정해서 일자리를 얻었다. 처음으로 열흘간 막노동을 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 같은 것을 얻게 되었다. 썰물처럼 닥쳐오는 온갖 형태의 가난을 “극복해야 할 필연적인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학비 마련, 긴 군대 생활, 눈물겹게 절실했던 유학 준비, 가난에서 탈출하려는 우리 형제의 유학 엑소더스, 독일에서의 어려운 생활의 극복 등이 가난으로 말미암아 가능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난은 싫지만 결코 괴롭거나 두려운 게 아닙니다. 세네카의 말처럼 ‘적게 가진 자가 아니라 많이 원하는 자가 가난한 것’이죠.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직 돈만을 생각하는 부자는 가난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얼마나 돈만을 가진 가난한 사람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어쩌면 가난한 자는 현실이 파괴할 수 없는 많은 꿈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닐까요? 실제로 부자라 할 수 있지요. 지금껏 가난 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은퇴는 두 번째 인생의 시작
 
이창복 교수와 아내 국순희씨의 근래 모습이다.
  이창복 교수는 정년 퇴임한 지가 벌써 18년이 되었다. 나이는 팔순을 훌쩍 넘어섰다. 30년간 몸담았던 대학도 그사이 변해버렸다. “공적, 사적 일로 일 년에 서너 번 학교를 방문하면, 소외감이나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원망도, 감상도, 비관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자연의 엄격한 순리일 뿐이다.
 
  이 교수는 대신 “나이가 들어갈수록 옛 기억들은 아름다워지고 새롭게 다가온다”고 고백했다. 간혹 대학을 떠날 때 읽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러스트레이터 숀 탠(Shaun Tan)의 시 ‘매미’를 떠올려본다.
 
  십칠 년 일한 매미가 은퇴한다.
  파티는 없다.
  악수도 없다.
  상사는 책상을 치우라고 말한다.

 
  매미는 종류에 따라 유충으로 7년에서 길게는 17년까지 땅속에서 살다가 성충이 되면 지상으로 나온다. 여린 몸으로 바깥세상에 나온 매미는 칙칙한 껍질을 벗는 기적 같은 변태의 순간을 갖는다. 나무에 붙어 수액을 빨아먹고 노래 부르며 매미는 겨우 7일에서 한 달 정도 살면서 짝짓기 등을 하고 알을 나무껍질 속에 낳고는 생을 마감한다.
 
  “이런 매미가 우리 인생의 은유가 아닐까요?
 
  교수 생활 30년이란 세월 동안 가졌던 가족을 위한 책임감, 직장과 사회생활에서의 고된 시간들, 일의 틀 속에 갇힌 것 같은 구속감, 연구하고 논문을 써야 하는 긴장감과 안녕을 고(告)했지요. 매미의 변태처럼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과 꿈에 부풀었어요.”
 
  어떤 이는 은퇴 후 그림이나 서예를 연마해서 개인전도 열고, 그림이나 한시로 연하장을 보내기도 한다. 통기타를 배우고 봉사활동도 하는 등 노년의 시간을 멋지게 보내는가 하면, 낙향해서 살거나 산수가 수려한 곳에 집을 짓고 자연인으로 즐겁게 살고 있다.
 
  그 역시 두 번째 인생의 새로운 문화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지겨운 책을 이제 그만 접어버리고, 연구랍시고 해서 억제되었던 욕구를 마음껏 풀어 제치고 자유롭게, 멋있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착각은 자유라 했던가요?
 
  금세 자유는 방종으로, 멋은 추함으로 바뀌면서 제 삶의 모습도 바꾸어놓았습니다. 영락없는 ‘삼식(三食)이’가 되어 아내의 눈치 보기와 비위 맞추기에 익숙해져 갔어요. 쓰레기 버리기, 빈 접시 나르기 등 아내의 잡다한 지시가 어느새 당연해졌고, TV 앞에서의 공허한 시간, 그로 인한 자괴감과 허무감, 그리고 음악 감상으로 자족하려는 낭만적 멜랑콜리에 빠졌어요. 급기야 ‘제발 서재로!’라는 아내의 추상같은 명령을 받기에 충분했죠.”
 
 
  아내의 명령, “제발 서재로!”
 
작년에 이창복 교수가 《삶을 위한 죽음의 미학》을 펴냈을 때 동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이 이정춘 교수, 오른쪽이 이원복 교수.
  이렇게 해서 자유로운 ‘감방(?)’인 서재에서 이 교수만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유학 시절부터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자료들을 꺼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침내 2011년에 《문학과 음악의 황홀한 만남》이 출간되었다.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고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2015년 3월엔 《고통의 해석》이란 책도 펴냈다. “독일 문학사에서 완성도 높은 19개 단편을 엄선해 전문을 새롭게 번역하고 철학·역사학·사회학·종교학을 넘나드는 통합적 해석”을 시도했다. 역시 “인간의 고통과 존재의 의미를 꿰뚫은 수작”이란 평가를 받았다.
 
  두 책을 마무리 지은 후 ‘죽음’의 문제에 천착했다.
 
  “죽음에 대한 연구는 삶에 대한 연구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문학, 예술은 물론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의학을 포괄하는 학문의 전역을 기웃거려야 했죠. 손톱으로 바위를 긁는 기분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으로 책이 끝날 때까지 몇 년은 보장받은 기분이니 신명 나고 열정이 치솟았다. “허상(虛想)이라 해도 좋으니 새로운 죽음의 문화를 세우는 데 벽돌 하나를 놓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4년이란 산고 끝에 작년 《삶을 위한 죽음의 미학》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말이다.
 
  “앞으로도 삶을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 시간에 지배당하면 시간은 쓰나미처럼 밀려와 모든 것을 망가뜨릴 테니까요. 그러니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매일이 작은 인생’이니까요.
 
  소중한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에 의미가 주어지고, 노년을 즐길 수 있어요. 쉬는 자는 녹이 습니다. 자신의 삶에, 우리의 삶에 은퇴는 없고, 늘 새로운 시작만 있어야 합니다.”
 
  이 교수는 최근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을 탈고했다. 올 하반기쯤 그의 이름을 단 새로운 책이 독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죽음은 ‘존재적 不在’
 
  인간의 생명은 죽음과 함께 태어나고,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니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으로 향해가는 한 걸음이다. 삶과 죽음, 이 둘은 시작과 끝이다. 삶이 없는 죽음이 없듯이 죽음이 없는 삶이란 없다는 뜻에서 “삶은 죽음이고, 죽음은 삶”이다. 이는 릴케의 말이다.
 
  이 교수는 “세상에서 경험을 하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죽음’ 한 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존재적 부재(不在)’”라고 했다.
 
  “독일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한 가지 좋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식탁 위에 한 유리컵이 있습니다. 그 유리컵의 속이 유리로 꽉 차 있다면 그것은 컵 모양의 유리 덩어리일 뿐, 결코 컵이라고 부를 수도, 컵으로 사용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속이 비어 있어야 비로소 컵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유리컵 속의 ‘빈 것’이, 다시 말하면 ‘존재적 부재’가 유리컵의 본질과 기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삶 속의 죽음이 그것이죠. 엄연히 존재는 하나 사는 동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죽음은, 삶의 본질과 의미를 결정하지요. 이것이 하이데거가 ‘존재적 부재’라고 실존적 의미로 규정한 죽음의 의미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간혹 인간을 공허와 허무에 빠지게 만들지만, 인간에게 삶이 필연적인 의무이듯 죽음 역시 반드시 겪어야 할 의무이지 낯선 힘의 전횡이 아니라는 것”이 이 교수의 지론이다. “죽음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삶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의 마지막 결실을 말해준다”고 강조했다.
 
 
  죽음이 가져다준, 인생이 줄 수 없는 가르침
 
  “그 결실이란 한 사람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흔적입니다. 아무리 죽음이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 해도 삶의 흔적만큼은 남게 마련이죠. 우리는 후에 남을 삶의 흔적이 무엇일지, 죽음이 삶을 위해 전하는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죽음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가르칩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과 친숙해지고, 죽음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죠. 그래야 이 현재를 매우 소중하고 감사히 느끼게 되고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려고 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현자(賢者)들이 말하는 공통된 의미는, ‘죽음은 자연의 법칙임으로 우리는 필연적인 죽음을 슬퍼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죽음은 삶에 훌륭한 결실을 맺게 하는 최고의 선’이기에, 인간은 죽음과 친숙해야 합니다.
 
  ‘진실로 삶을 사랑하는 자는 죽음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 죽음이 줄 수 있는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교수는 니체와 슐레겔(Friedlich Schlegel)을 들어 ‘죽음’의 의미를 강조했다.
 
  니체에 따르면 죽음은 “삶의 자극(Stimulans des Lebens)이자 강장제(Tonikum)”로 작용한다. 죽음이 인간의 삶을 성숙하게 만든다면, 인간의 삶은 죽음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슐레겔은 “나의 유일한 삶은 죽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의 말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깊이 파악하게 하고, 윤리적 의식과 도덕적 행위를 통해 죽음을 아름답게 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추억 속에서 사는 자는 죽지 않고 다만 멀리 있을 뿐이다. 오직 잊힌 자만이 죽을 뿐이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죽은 자는 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비로소 죽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잠시 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부모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삽니다. 그러면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말을 나눕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음을 가슴에 품고 또 죽음에 안기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왔듯이 그렇게 그 사랑 속에서 그 사랑이 베푸는, 아니 바로 그 죽음이 베푸는 안식과 평화와 위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교수는 “죽음이 두렵고,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것처럼 삶도 그러하다. 그러니 삶을 두려워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삶을 사랑하는 자는 죽음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을 불평할 수 있고, 죽음을 슬퍼할 권리가 있다’(레싱)고 말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윤리 의식을 일깨워 좀 더 높은 삶을 얻게 해줍니다.
 
  팔십을 넘은 지금, 저는 여전히 죽음이 두렵습니다. 아니 죽음에 이르는 길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니 제 삶이 죽음을 맞이하기에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삶의 성숙은 곧 죽음의 성숙을 의미한다’는 깊은 뜻을 아직도 못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숙한 삶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어요.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면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진리를 몸소 깨달아야겠어요.”⊙
 
이창복 교수의 ‘노년 극복기’
 
  노인은 어려지지 말고 어린애처럼 지내야 한다
 
  다음은 노년의 자세에 대한 이창복 교수의 주장이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노년은 두 번째 아동기’라고 말했고, 시공을 넘어 현대에 이르러서 마크 트웨인은 ‘고령의 노년은 우유가 없는 제2의 유년기’라 정의했다. 고래로 사람들은 늙으면 다시 어린애처럼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죽음은 나이 먹은 순서대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과는 달리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온다. 5세나 20세나 80세나 간에 누구에게도 오늘의 이 순간은 처음 살아보는 새 나이이며, 현존의 가장 어린 날이다.
 
  다만 문제는, 지나온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다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즉 가장 어린 시작의 날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것이다. 고령의 노인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때문에 시간은 더 절실해지고, 그만큼 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이 순간을 값지게 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괴테는 《파우스트》 원고를 완성하려는 충동에서 ‘오늘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내일도 못 하는 것이니/ 단 하루도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 되느니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에게 창조적 충동은 연령에 묶여 있지 않다. 비록 노인이라 해도 유희에 몰입하는 어린애처럼 창조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노화는 성장과 성숙이어야 하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벤저민 버튼의 생애처럼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에스파냐의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인간은 자기의 일을 사랑하는 한 늙지 않는다’고 말했다. 괴테가 늙음의 지혜를 ‘늙어서도 어린애처럼 지내는 것’이라 정의했듯이, 노발리스는 ‘인간은 아이로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그만큼 더 나이 들게 된다’고 했다. 나이 듦이 어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어린애처럼 지내는 것일 때 비로소 늙음이 존경받게 되고, 노인은 품위와 유머와 겸손을 보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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