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8월 예술감독으로 위촉, ‘K-Star’ 연극아카데미 단원 25명 지휘 총괄
⊙ ‘이윤택 사태’로 폐쇄된 사택·숙소·극장 대청소하고 리모델링해 ‘면모 일신’
⊙ “도서관·박물관·공연장·학습장 집대성한 ‘퍼포먼스 아트센터’로 만들 계획”
⊙ “관객과 소통·교감하는 ‘인터랙티브’ 연극 ‘박무근 일가’, 12월 중순 무대에 올려”
⊙ “배우는 무대 밖에서도 배우… 어디서든 ‘사람 그 이상’의 본보기가 돼야”
이대영
1961년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同)대학원 연극학 석사, 문예창작학 박사 /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으로 시나리오 작가 등단. 극단 ‘그리고’ 대표, 국제극예술협회 이사, 자유주의연대 문화위원장, 한국문화산업진흥위원, 문화체육관광부 정책위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분과위원 역임. 現 중앙대 예술대학원 공연영상창작학부 교수, 밀양연극촌 예술감독 / KBS 드라마 ‘겨울에서 겨울까지’, 연극 ‘정의의 사람들’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세일럼의 마녀들’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연어는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뮤지컬 ‘방황하는 별들’ ‘꿈빛 도서관’ 등 다수 연출 및 극본 집필 / 저서 《이대영 희곡집》 《스토리텔링의 역사》 등
⊙ ‘이윤택 사태’로 폐쇄된 사택·숙소·극장 대청소하고 리모델링해 ‘면모 일신’
⊙ “도서관·박물관·공연장·학습장 집대성한 ‘퍼포먼스 아트센터’로 만들 계획”
⊙ “관객과 소통·교감하는 ‘인터랙티브’ 연극 ‘박무근 일가’, 12월 중순 무대에 올려”
⊙ “배우는 무대 밖에서도 배우… 어디서든 ‘사람 그 이상’의 본보기가 돼야”
이대영
1961년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同)대학원 연극학 석사, 문예창작학 박사 /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으로 시나리오 작가 등단. 극단 ‘그리고’ 대표, 국제극예술협회 이사, 자유주의연대 문화위원장, 한국문화산업진흥위원, 문화체육관광부 정책위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분과위원 역임. 現 중앙대 예술대학원 공연영상창작학부 교수, 밀양연극촌 예술감독 / KBS 드라마 ‘겨울에서 겨울까지’, 연극 ‘정의의 사람들’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세일럼의 마녀들’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연어는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뮤지컬 ‘방황하는 별들’ ‘꿈빛 도서관’ 등 다수 연출 및 극본 집필 / 저서 《이대영 희곡집》 《스토리텔링의 역사》 등
- 사진=조현호
“여기 와서 제일 먼저 한 건 청소입니다. (폐쇄된 이후로) 사람이 살지 않으니까 거미들이 급속하게 집을 지어 놨더라고요. 조명·의상, 기타 소품도 다 빠져나갔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 청소라는 건 연기의 기본입니다. 단원들에게 청소할 때 말하지 말라고, ‘묵언수행’하라고 했어요. 내 마음도 같이 청소하라고요. 추문(醜聞)의 진원지이기도 했으니까, 지금 맑은 곳으로 그 기운을 바꾸고 있는 중입니다.”
단풍이 익어 가던 가을날 오후,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는 앳된 단원들의 발걸음이 힘찼다. 뮤지컬 연습 중인 대학생 단원은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웃는 얼굴로 기자를 맞이한 이들도 여럿이었다. 한 단원은 연극인 이윤택씨가 머물던 사택을 보여줬다. 작은 집 두 채가 연결돼 있는 구조였다. 리모델링한 사택은 현재 다리 다친 단원과 외부 강사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된다고 했다. 기자와 30분 차이로 KTX를 타고 내려온 이대영 중앙대 교수는 코트 차림으로 돌길을 걸으며 말했다.
“(방문하는) 교수·연극인들에게 제가 다 설명합니다. 여기가 그곳이라고, 여기서 주무시라고…. 사람은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을 불행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본인이 불행해지는 겁니다. 저도 단원들도 이제 그런 분위기 없이 잘 지냅니다. 외부의 (부정적) 시선을 빨리 걷어내는 게 일이죠.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러 내려왔다”
밀양연극촌이 달라지고 있다. 2018년 2월 성(性)추문으로 이사장 이윤택씨가 물러난 뒤 연극촌은 여름까지 잠정 폐쇄 상태였다. 이씨가 거느리던 극단 ‘연희단거리패’도 빠져나가고 시비(市費) 지원도 끊겼다. 밀양시는 2018년 8월 연극촌 재건을 위해 이대영 중앙대 예술대학원 공연영상창작학부 교수를 예술감독으로 위촉했다. 그에게 연극촌 운영과 미래 연극인들을 양성하는 프로그램 ‘K-Star 연극아카데미’ 총지휘를 맡겼다.
한 달 뒤, 이 교수는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까지의 청년 단원을 모집, 현재 총 25명의 단원을 이끌고 12월에 상연될 새 연극 작품을 준비 해왔다. 밀양시는 이 교수와 협업, 연극촌 시설을 전부 리모델링하고 문화예술교육센터를 설립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사단법인 체제로 운영되던 연극촌을 직영(直營)·관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기자와 만난 이 교수 또한 연극촌 안에 모든 공연예술 콘텐츠를 집적시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듣기 위해 밀양연극촌을 찾았다.
― 밀양연극촌 예술감독직을 수락한 이유가 있나요. ‘미투 사태’로 추문이 많이 불거진 곳이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사실 오고 싶은 사람이 없죠. 여기 내려온다고 마음먹는 순간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나는 살면서 별일이 없었는가.’ 크고 작은 결함 내지는 언행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독으로 위촉되면) 과연 또 얼마나 이슈가 될지 많이 고민했어요. 그나마 연희단거리패가 남아 있으면 관심을 안 가져도 되는데, 다 빠져나가니까 서울(연극계)에서도 연극촌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들이 많았어요. 일단 밀양시장의 이걸 살리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를 지더라도 좀 바꿔 보자고 다시 각오를 했죠. 그렇게 우리 (K-Star) 단원들을 뽑아서 하다 보니까 가능성이 있겠더라고요.”
― 어떤 가능성이죠.
“연극촌을 과거의 방식이 아닌 완전 새로운 방식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다고 본 거죠. 그래서 좀 희망을 갖고 있어요.”
― 본업은 교수인데, 기존 강의는 어떻게 처리하고 내려오게 된 건가요. 스케줄 조절이 가능했나요.
“하필 제가 9월 강의(시간표)가 다 세팅된 상황에서 내려왔잖아요. 지금도 월·화·수·목 강의가 있어요. 다행히 금요일에는 없어서, 목요일 저녁 수업이 끝나면 밤차 타고 내려옵니다. 일요일까지 연극촌 일을 보고, 월요일 아침에 올라가서 다시 강의하죠. 약간 피곤하긴 해도, 지금까지 별 탈 없이 두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사진·녹음·논문·소품 集積된 365일 상시 공연장으로”

― 와서 보니까 연극촌 상황이 어떻던가요. 시설 관리나 운영 방식 등 손볼 데가 많을 듯합니다.
“그동안 이 연극촌은 어떤 한 개인의, 극단의 공간이었어요. 이제는 연극인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자산으로 만들어 보려고 해요. 여기가 부산·울산·경남·대구에서 1시간 정도면 다 올 수 있는 거립니다. 이를테면 ‘부울경’의 퍼포먼스 아트센터라고나 할까요. 공연예술의 총체, 훌륭한 연극인들이 구현했던 (연극) 내용·사진·육성녹음 등을 모아서 박물관처럼 꾸며 놓고 싶어요. 그리고 각 극단들이 각종 세트·소품들을 맡겨 놓을 수 있는 곳으로도 활용하고 싶어요. 보통 공연 끝나고 (사설) 보관소에 맡겨 놓으면 돈이 들거든요. 1~2달 뒤에 또 공연이 있는데 (폐기하고) 다시 만들기는 그러니까, 이쪽에 (전시·교육용으로) 두면 서로가 좋지요.”
― 부지가 큰 편은 아닌 것 같던데, 공간은 충분한가요.
“충분합니다. 지금 시에서 외주(外注)를 줘서 이곳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 중이라고 하던데, 그쪽과 연계한다면 365일 상시 공연이 가능한 무대를 만들 수도 있어요. 우리 단원들만 하는 게 아니라 대관도 해서, 관광객들이 지나가다 언제든지 공연을 볼 수 있게 말이죠. 또 학교 쪽에다 연락을 해서 공연과 관련된 전국의 모든 석·박사 논문들을 다 보내 달라고 할 거예요. 연극 도서관이 될 수 있게요. 우리 단원들이 머무는 레지던스·게스트하우스가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숙식 프로그램’도 돌릴 수 있죠.”
― 지역 명소 수준이 아니라, 전국적인 ‘복합공연예술센터’ 같은 걸 만들겠다는 구상인가요.
“공연예술인들의 허브가 되는 거죠. 이윤택씨가 (연극촌 기반을 세운 지) 한 20년 가까이 됐으니까, 이 구상을 완성하려면 한 3~5년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이제는 개인에게 의존해서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니까 국가도 나서야죠. 밀양시에만 미뤄 두면 안 돼요. 아시아권에서도 주목받는 아카데믹한 공간이 돼야 합니다. 낮에는 박물관·도서관이 있어서 공부하는 아이들끼리 심포지엄을 열기도 하고, 밤에는 연극·뮤지컬 같은 공연예술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부활시켜야죠. 50년, 100년을 이어 가는 메카로 만들어 보고 싶은 게 꿈이에요. 잘해 봐야죠.”
“청년 단원들의 배우려는 열망, 살아있는 연극에 적합”
이 교수는 단원들과 합심, 12월에 상연될 ‘박무근 일가’라는 작품을 준비 중이다. 기존의 정적인 연극이 아닌, 관객들과 긴밀하게 소통·교감하기 위해 실험적 요소를 가미했다. 그러면서도 대학로 일각의 극단에서 시도하고 있는 ‘관객에게 말 걸기’ 수준과는 차별화를 꾀했다.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극의 흐름과 내용이 실시간으로 다변화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 교수는 정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현직 교수 등 외부 강사를 초청, 단원들에게 보컬(발성)·연출·연기술·연극사 등을 가르치는 중이다.
단원들은 철저한 교육을 통해 기본기를 다지면서 공연 연습에도 매진했다. 일상에서는 재기발랄한 청년이었지만, 무대에 올라서면 눈빛이 달라졌다. 기자는 인터뷰 당시 먼발치에서 그들의 연기 연습을 지켜봤다. 가정불화를 다룬 대목이었다. 여동생 역을 맡은 배우가 피아노를 내리치면서 대사를 격정적으로 쏟아냈다. 언니 역을 맡은 배우가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받아쳤다. 주변에 선 배우들의 왁자지껄한 말들이 무대를 메웠다. 소음 속에서도 서사는 흐트러짐 없이 진행됐다.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몰입감이 살아났다. 이 교수는 수십 명의 배우들을 돌아가면서 빠르게 지목했다. 서로 다른 대사들이 충돌하면서 묘한 조화를 이뤘다. 그는 이런 상호작용이 만들어 내는 ‘극적 화음’이 바로 ‘K-Star’ 아카데미 단원들의 가능성이라고 했다.
― 준비 중인 ‘박무근 일가’는 일종의 실험 연극이라고 들었습니다. 단원들이 아직 초심자 수준인데 ‘클래식한 연극’부터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극은 살아있어야 해요. 더구나 지금은 SNS 시대잖아요. 인터랙션(상호작용)이 중요해요. 우리가 만드는 작품은 배우를 ‘삽화적 객체’로 만들지 않습니다. 배우가 대본에 써 놓은 것을 토해 내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 자기 이야기를 집어넣기도 하고, 공연 도중에 극이 중단돼서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연기 경험이) 오래된 배우들은 (여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요. 연극을 조금 알면서도 완벽하진 않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시도해 보는 거죠. 이 친구들은 배우려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열려 있잖아요. 이렇게 배우고 나면 일반 연극을 할 때도 유연하게 잘할 겁니다.”
“노 스캔들, 노 비즈니스, 노 폴리틱, 노 리커”
― 단원이 총 25명입니다.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연극에 대한 열의·경험 그리고 인간적 품성을 기준으로 봤어요.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인격적인 부분을 많이 봤어요. 경험은 없어도, 인격이 좋고 열정이 가득한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 애들이 연기를 더 잘합니다. 백옥같이 맑은 상태라서 때가 안 묻어 있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는 질료(質料)인 것이죠.”
― 단원들을 지도하면서 특별히 당부한 게 있나요.
“제가 여기서 (연극촌을) 잘못 이끌었다고 하면 또 얼마나 이슈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애들한테 4가지를 지키라고 강조했어요. ‘노 스캔들(Scandal)’ ‘노 비즈니스(Business)’ ‘노 폴리틱(Politic)’. 그리고 ‘노 리커(Liquor)’. 전체적으로, 공개적으로 파티하는 것 외에는 술도 먹지 마라. 뭔 일이 있다면 큰일이니까 조심해야 하고…. 그 억눌렀던 열정들을 예술 쪽으로 풀어 내라고 했어요. 당분간 수도원 생활 같은 걸 유지해 나갈 겁니다. 우리가 다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여기서 누가 이탈될 수도 없으니까요. 밑바닥부터 가르쳐서 대배우·대연출가 한 명 만든다는 게, 어떻게 보면 전투기 조종사 한 명 키우는 겁니다. 그중에 몇 명이라도 남아서 여길 키워 갔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 임계점만 딱 돌파하면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 겁니다. 힘든 겁니다. 정말 눈물 난다고.”
― 밀양시는 본인의 연극촌 부흥 계획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시에서는 지금 우리 단원들의 인건비부터 시설 관리비 등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밀양문화재단과도 연계해서 연극촌을 유명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어요. 특히 시장이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요. 그분이 또 (이번 지방선거에서) 재선이 된 사람이에요. 더구나 이 ‘쓰나미’에 자유한국당 소속이에요. 그만큼 밀양 시민들의 인심을 얻고 있는 거죠. 농담 삼아서 3선까지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임기가) 7년 정도 되니까 그때까지 밀어라. 단체장의 의지가 중요하거든요. 기업·시민 후원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시에만 예속돼 있으면 커지질 못해요. 반민반관(半民半官) 형태로 운영하는 것도 생각 중인데….”
― 연극촌의 체제나 성격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고민이 크겠군요.
“독립한다고 해서 ‘이윤택 사단’이 이끈 것처럼 개인의 그걸로 갈 순 없고요. 2019년 초에는 설립 형태에 대한 고민을 좀 본격화해야 될 것 같아요. 사실 또 밀양이 굉장히 축제가 많은데 통폐합이 안 돼서 따로 노는 게 많아요. 연극촌이 있는 동네라면 규정화된 대본이 날아가 버리는, 주민들이 함께 만들고 등장하는 연극도 시도해 봐야죠. 연극촌 홍보와 연극 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투어공연’도 생각하고 있어요.”
“박학·겸손·배려 없으면 무대 올라가지 마라”
밀양시에서는 2018년 10월 5~9일 ‘이윤택 파문’으로 잠정 중단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의 명칭을 ‘밀양푸른연극제’로 바꿔 개최했다. 당시는 이 교수와 ‘K-Star’ 단원들이 갓 모인 시기라 작품을 상연하진 않았고 연극제의 제반 실무만 담당했다. 매표 업무, 극장 관리, 손님 안내 등 연극촌 운영에 관한 ‘실전 워크숍’을 가진 셈이었다. 이 교수는 “푸른연극제는 외부 작품을 초빙해서 열리는 행사다. (내가 내려오기 전에) 시에서 다른 분이 맡아서 이미 진행을 하고 있었다”며 “(‘K-Star’ 아카데미와 행사가) 이원화가 되는 게 문제다. (관계자) 전체 합평을 통해 추후 (공연 방식이나 조직 운영의) 일원화를 할지 등을 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 연극학과 교수는 물론, 실제 공연 연출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진정한 연극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연기 잘해서 존경받는 건 드물어요. 그건 배역이 준 (행운인) 거죠. 세상을 향해 메신저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돼야죠. 배우라는 것 자체만으로 자존감이 있어야 해요. 배우가 평소 행실과 무대 매너와 다를 수 없어요. 배우는 무대 밖에서도 광채가 나야 합니다.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본보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존경받아야 해요. ‘배우(俳優)’라는 한자 뜻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 인’ 변에 ‘아닐 비’ 자 아닙니까.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아주 우수하다는 거죠. 사람 그 이상으로 우수한 존재.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존재….
상대가 부자든, 빈자든, 아이든, 노인이든 다 대화가 능통해야 하고 뭘 물어보면 해박해야 해요. 박학(博學)하지 않으면 겸손해야 하고. ‘겸손과 배려가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무대 올라가지 말라고 했어요. 얼굴 예쁘고, 잘생기고, 키 크고, 연기 좀 하고. 그게 무슨 배우냐. 진짜 배우는 현실에서도 무대에서도 빛이 난다. 그런 인물로 좀 컸으면 좋겠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이 일도 使命…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 배우라면 인격자가 돼야 한다는 뜻이네요. 연기의 길이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말로 들립니다.
“(미투 사태 때) 아무개 배우들 추문 났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봤습니까? … 배우의 삶이란 성직자와 같은 거예요. 그나마 배우는 다행히 끼를 발산하면서라도 살잖아요. 그 (욕망이나) 끼를 무대에서만 발산하라는 말이에요. 무대에서는 음험한 역할, 살인자 역할, 목사·신부·귀부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어요. 그건 무대에서만 존재하는 거죠. 무대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그런데 그 차원에서 내려왔으면, 우리 이 3차원 현실 세계에서 ‘그 짓’ 하지 말라는 겁니다. 3차원 세상 사람들에게 (인격적인) 표상이 될 수 있도록, 거울이 될 수 있도록 해야죠. 그런 아이들만이 ‘스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 일생 연극을 연출하고 연기를 지도하면서 살아온 본인의 길은 어떻습니까.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보기라기보다는…. 사실 어처구니없이 살아왔던 거죠. 지금이야 우여곡절 끝에 교수도 되고 연극촌에도 오게 됐지만, 저는 완전 판자촌에서 ‘똥지게’ ‘물지게’ 져 가면서 컸거든요. 지금 그런 얘기하면 다들 안 믿어요. (생활고에 여러 직업을 전전할 때는) 정말 죽고 싶을 때도 있었죠. 그런데 그 순간을 다 넘기고 나니까,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항상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매번 배워요. 제가 북한인권운동을 하다 보니까 탈북 청년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뭔가 불안해하고 의기소침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생 제자들이랑 ‘남북동행’이라는 타이틀로 연극을 시켰어요. 제자들은 자유의 소중함과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고, 탈북 청년들은 ‘나도 이제 남한 친구들이 많다’며 자신감을 얻었어요. 저도 물론 배웠어요. 그들이 어려운 과정을 뚫고 사선(死線)을 넘어온 걸 보고, ‘내가 지금 너무 나태하게 사는 거 아닌가’ 하고 느껴요….
그렇게 보면, 지금 이 일도 그래요. 어떤 사명(使命)이라고 생각하면요. 마음이 편해집니다.”⊙
단풍이 익어 가던 가을날 오후,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는 앳된 단원들의 발걸음이 힘찼다. 뮤지컬 연습 중인 대학생 단원은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웃는 얼굴로 기자를 맞이한 이들도 여럿이었다. 한 단원은 연극인 이윤택씨가 머물던 사택을 보여줬다. 작은 집 두 채가 연결돼 있는 구조였다. 리모델링한 사택은 현재 다리 다친 단원과 외부 강사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된다고 했다. 기자와 30분 차이로 KTX를 타고 내려온 이대영 중앙대 교수는 코트 차림으로 돌길을 걸으며 말했다.
“(방문하는) 교수·연극인들에게 제가 다 설명합니다. 여기가 그곳이라고, 여기서 주무시라고…. 사람은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을 불행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본인이 불행해지는 겁니다. 저도 단원들도 이제 그런 분위기 없이 잘 지냅니다. 외부의 (부정적) 시선을 빨리 걷어내는 게 일이죠.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러 내려왔다”
![]() |
밀양시는 이대영 교수와 협업, 연극촌 시설을 전부 리모델링하고 문화예술교육센터를 설립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사단법인 체제로 운영되던 연극촌을 直營·관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사진=조현호 |
한 달 뒤, 이 교수는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까지의 청년 단원을 모집, 현재 총 25명의 단원을 이끌고 12월에 상연될 새 연극 작품을 준비 해왔다. 밀양시는 이 교수와 협업, 연극촌 시설을 전부 리모델링하고 문화예술교육센터를 설립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사단법인 체제로 운영되던 연극촌을 직영(直營)·관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기자와 만난 이 교수 또한 연극촌 안에 모든 공연예술 콘텐츠를 집적시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듣기 위해 밀양연극촌을 찾았다.
― 밀양연극촌 예술감독직을 수락한 이유가 있나요. ‘미투 사태’로 추문이 많이 불거진 곳이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사실 오고 싶은 사람이 없죠. 여기 내려온다고 마음먹는 순간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나는 살면서 별일이 없었는가.’ 크고 작은 결함 내지는 언행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독으로 위촉되면) 과연 또 얼마나 이슈가 될지 많이 고민했어요. 그나마 연희단거리패가 남아 있으면 관심을 안 가져도 되는데, 다 빠져나가니까 서울(연극계)에서도 연극촌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들이 많았어요. 일단 밀양시장의 이걸 살리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를 지더라도 좀 바꿔 보자고 다시 각오를 했죠. 그렇게 우리 (K-Star) 단원들을 뽑아서 하다 보니까 가능성이 있겠더라고요.”
― 어떤 가능성이죠.
“연극촌을 과거의 방식이 아닌 완전 새로운 방식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다고 본 거죠. 그래서 좀 희망을 갖고 있어요.”
― 본업은 교수인데, 기존 강의는 어떻게 처리하고 내려오게 된 건가요. 스케줄 조절이 가능했나요.
“하필 제가 9월 강의(시간표)가 다 세팅된 상황에서 내려왔잖아요. 지금도 월·화·수·목 강의가 있어요. 다행히 금요일에는 없어서, 목요일 저녁 수업이 끝나면 밤차 타고 내려옵니다. 일요일까지 연극촌 일을 보고, 월요일 아침에 올라가서 다시 강의하죠. 약간 피곤하긴 해도, 지금까지 별 탈 없이 두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사진·녹음·논문·소품 集積된 365일 상시 공연장으로”

― 와서 보니까 연극촌 상황이 어떻던가요. 시설 관리나 운영 방식 등 손볼 데가 많을 듯합니다.
“그동안 이 연극촌은 어떤 한 개인의, 극단의 공간이었어요. 이제는 연극인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자산으로 만들어 보려고 해요. 여기가 부산·울산·경남·대구에서 1시간 정도면 다 올 수 있는 거립니다. 이를테면 ‘부울경’의 퍼포먼스 아트센터라고나 할까요. 공연예술의 총체, 훌륭한 연극인들이 구현했던 (연극) 내용·사진·육성녹음 등을 모아서 박물관처럼 꾸며 놓고 싶어요. 그리고 각 극단들이 각종 세트·소품들을 맡겨 놓을 수 있는 곳으로도 활용하고 싶어요. 보통 공연 끝나고 (사설) 보관소에 맡겨 놓으면 돈이 들거든요. 1~2달 뒤에 또 공연이 있는데 (폐기하고) 다시 만들기는 그러니까, 이쪽에 (전시·교육용으로) 두면 서로가 좋지요.”
― 부지가 큰 편은 아닌 것 같던데, 공간은 충분한가요.
“충분합니다. 지금 시에서 외주(外注)를 줘서 이곳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 중이라고 하던데, 그쪽과 연계한다면 365일 상시 공연이 가능한 무대를 만들 수도 있어요. 우리 단원들만 하는 게 아니라 대관도 해서, 관광객들이 지나가다 언제든지 공연을 볼 수 있게 말이죠. 또 학교 쪽에다 연락을 해서 공연과 관련된 전국의 모든 석·박사 논문들을 다 보내 달라고 할 거예요. 연극 도서관이 될 수 있게요. 우리 단원들이 머무는 레지던스·게스트하우스가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숙식 프로그램’도 돌릴 수 있죠.”
― 지역 명소 수준이 아니라, 전국적인 ‘복합공연예술센터’ 같은 걸 만들겠다는 구상인가요.
“공연예술인들의 허브가 되는 거죠. 이윤택씨가 (연극촌 기반을 세운 지) 한 20년 가까이 됐으니까, 이 구상을 완성하려면 한 3~5년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이제는 개인에게 의존해서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니까 국가도 나서야죠. 밀양시에만 미뤄 두면 안 돼요. 아시아권에서도 주목받는 아카데믹한 공간이 돼야 합니다. 낮에는 박물관·도서관이 있어서 공부하는 아이들끼리 심포지엄을 열기도 하고, 밤에는 연극·뮤지컬 같은 공연예술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부활시켜야죠. 50년, 100년을 이어 가는 메카로 만들어 보고 싶은 게 꿈이에요. 잘해 봐야죠.”
“청년 단원들의 배우려는 열망, 살아있는 연극에 적합”
![]() |
이대영 교수는 “연극은 살아있어야 한다. 우리가 만드는 작품은 배우를 ‘삽화적 객체’로 만들지 않는다”며 “실제 자기 이야기를 집어넣기도 하고, 공연 도중에 극이 중단돼서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변하기도 한다. (단원) 친구들은 배우려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라고 했다. 사진=조현호 |
단원들은 철저한 교육을 통해 기본기를 다지면서 공연 연습에도 매진했다. 일상에서는 재기발랄한 청년이었지만, 무대에 올라서면 눈빛이 달라졌다. 기자는 인터뷰 당시 먼발치에서 그들의 연기 연습을 지켜봤다. 가정불화를 다룬 대목이었다. 여동생 역을 맡은 배우가 피아노를 내리치면서 대사를 격정적으로 쏟아냈다. 언니 역을 맡은 배우가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받아쳤다. 주변에 선 배우들의 왁자지껄한 말들이 무대를 메웠다. 소음 속에서도 서사는 흐트러짐 없이 진행됐다.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몰입감이 살아났다. 이 교수는 수십 명의 배우들을 돌아가면서 빠르게 지목했다. 서로 다른 대사들이 충돌하면서 묘한 조화를 이뤘다. 그는 이런 상호작용이 만들어 내는 ‘극적 화음’이 바로 ‘K-Star’ 아카데미 단원들의 가능성이라고 했다.
― 준비 중인 ‘박무근 일가’는 일종의 실험 연극이라고 들었습니다. 단원들이 아직 초심자 수준인데 ‘클래식한 연극’부터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극은 살아있어야 해요. 더구나 지금은 SNS 시대잖아요. 인터랙션(상호작용)이 중요해요. 우리가 만드는 작품은 배우를 ‘삽화적 객체’로 만들지 않습니다. 배우가 대본에 써 놓은 것을 토해 내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 자기 이야기를 집어넣기도 하고, 공연 도중에 극이 중단돼서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연기 경험이) 오래된 배우들은 (여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요. 연극을 조금 알면서도 완벽하진 않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시도해 보는 거죠. 이 친구들은 배우려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열려 있잖아요. 이렇게 배우고 나면 일반 연극을 할 때도 유연하게 잘할 겁니다.”
― 단원이 총 25명입니다.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연극에 대한 열의·경험 그리고 인간적 품성을 기준으로 봤어요.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인격적인 부분을 많이 봤어요. 경험은 없어도, 인격이 좋고 열정이 가득한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 애들이 연기를 더 잘합니다. 백옥같이 맑은 상태라서 때가 안 묻어 있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는 질료(質料)인 것이죠.”
― 단원들을 지도하면서 특별히 당부한 게 있나요.
“제가 여기서 (연극촌을) 잘못 이끌었다고 하면 또 얼마나 이슈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애들한테 4가지를 지키라고 강조했어요. ‘노 스캔들(Scandal)’ ‘노 비즈니스(Business)’ ‘노 폴리틱(Politic)’. 그리고 ‘노 리커(Liquor)’. 전체적으로, 공개적으로 파티하는 것 외에는 술도 먹지 마라. 뭔 일이 있다면 큰일이니까 조심해야 하고…. 그 억눌렀던 열정들을 예술 쪽으로 풀어 내라고 했어요. 당분간 수도원 생활 같은 걸 유지해 나갈 겁니다. 우리가 다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여기서 누가 이탈될 수도 없으니까요. 밑바닥부터 가르쳐서 대배우·대연출가 한 명 만든다는 게, 어떻게 보면 전투기 조종사 한 명 키우는 겁니다. 그중에 몇 명이라도 남아서 여길 키워 갔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 임계점만 딱 돌파하면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 겁니다. 힘든 겁니다. 정말 눈물 난다고.”
― 밀양시는 본인의 연극촌 부흥 계획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시에서는 지금 우리 단원들의 인건비부터 시설 관리비 등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밀양문화재단과도 연계해서 연극촌을 유명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어요. 특히 시장이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요. 그분이 또 (이번 지방선거에서) 재선이 된 사람이에요. 더구나 이 ‘쓰나미’에 자유한국당 소속이에요. 그만큼 밀양 시민들의 인심을 얻고 있는 거죠. 농담 삼아서 3선까지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임기가) 7년 정도 되니까 그때까지 밀어라. 단체장의 의지가 중요하거든요. 기업·시민 후원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시에만 예속돼 있으면 커지질 못해요. 반민반관(半民半官) 형태로 운영하는 것도 생각 중인데….”
― 연극촌의 체제나 성격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고민이 크겠군요.
“독립한다고 해서 ‘이윤택 사단’이 이끈 것처럼 개인의 그걸로 갈 순 없고요. 2019년 초에는 설립 형태에 대한 고민을 좀 본격화해야 될 것 같아요. 사실 또 밀양이 굉장히 축제가 많은데 통폐합이 안 돼서 따로 노는 게 많아요. 연극촌이 있는 동네라면 규정화된 대본이 날아가 버리는, 주민들이 함께 만들고 등장하는 연극도 시도해 봐야죠. 연극촌 홍보와 연극 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투어공연’도 생각하고 있어요.”
“박학·겸손·배려 없으면 무대 올라가지 마라”
![]() |
이대영 교수는 단원들에게 “배우라면 사람 그 이상으로 우수한 존재,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겸손과 배려가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무대 올라가지 말라고 했다”며 “진짜 배우는 현실에서도 무대에서도 빛이 난다. (단원들이) 그런 인물로 좀 컸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사진=조현호 |
― 연극학과 교수는 물론, 실제 공연 연출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진정한 연극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연기 잘해서 존경받는 건 드물어요. 그건 배역이 준 (행운인) 거죠. 세상을 향해 메신저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돼야죠. 배우라는 것 자체만으로 자존감이 있어야 해요. 배우가 평소 행실과 무대 매너와 다를 수 없어요. 배우는 무대 밖에서도 광채가 나야 합니다.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본보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존경받아야 해요. ‘배우(俳優)’라는 한자 뜻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 인’ 변에 ‘아닐 비’ 자 아닙니까.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아주 우수하다는 거죠. 사람 그 이상으로 우수한 존재.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존재….
상대가 부자든, 빈자든, 아이든, 노인이든 다 대화가 능통해야 하고 뭘 물어보면 해박해야 해요. 박학(博學)하지 않으면 겸손해야 하고. ‘겸손과 배려가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무대 올라가지 말라고 했어요. 얼굴 예쁘고, 잘생기고, 키 크고, 연기 좀 하고. 그게 무슨 배우냐. 진짜 배우는 현실에서도 무대에서도 빛이 난다. 그런 인물로 좀 컸으면 좋겠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 배우라면 인격자가 돼야 한다는 뜻이네요. 연기의 길이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말로 들립니다.
“(미투 사태 때) 아무개 배우들 추문 났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봤습니까? … 배우의 삶이란 성직자와 같은 거예요. 그나마 배우는 다행히 끼를 발산하면서라도 살잖아요. 그 (욕망이나) 끼를 무대에서만 발산하라는 말이에요. 무대에서는 음험한 역할, 살인자 역할, 목사·신부·귀부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어요. 그건 무대에서만 존재하는 거죠. 무대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그런데 그 차원에서 내려왔으면, 우리 이 3차원 현실 세계에서 ‘그 짓’ 하지 말라는 겁니다. 3차원 세상 사람들에게 (인격적인) 표상이 될 수 있도록, 거울이 될 수 있도록 해야죠. 그런 아이들만이 ‘스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 일생 연극을 연출하고 연기를 지도하면서 살아온 본인의 길은 어떻습니까.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보기라기보다는…. 사실 어처구니없이 살아왔던 거죠. 지금이야 우여곡절 끝에 교수도 되고 연극촌에도 오게 됐지만, 저는 완전 판자촌에서 ‘똥지게’ ‘물지게’ 져 가면서 컸거든요. 지금 그런 얘기하면 다들 안 믿어요. (생활고에 여러 직업을 전전할 때는) 정말 죽고 싶을 때도 있었죠. 그런데 그 순간을 다 넘기고 나니까,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항상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매번 배워요. 제가 북한인권운동을 하다 보니까 탈북 청년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뭔가 불안해하고 의기소침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생 제자들이랑 ‘남북동행’이라는 타이틀로 연극을 시켰어요. 제자들은 자유의 소중함과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고, 탈북 청년들은 ‘나도 이제 남한 친구들이 많다’며 자신감을 얻었어요. 저도 물론 배웠어요. 그들이 어려운 과정을 뚫고 사선(死線)을 넘어온 걸 보고, ‘내가 지금 너무 나태하게 사는 거 아닌가’ 하고 느껴요….
그렇게 보면, 지금 이 일도 그래요. 어떤 사명(使命)이라고 생각하면요. 마음이 편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