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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탄자니아인과 결혼한 김용우 전 국방장관의 딸 김영회씨

“우리 아이들은 탄즈코메리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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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우 전 장관, 주영대사 나가면서 “국방장관을 한 사람이 병역을 치러야 할 아들을 데리고
    나갈 수는 없다”며 아들 두고 나가
⊙ 세계은행에서 29년간 근무하면서 아프리카 담당, 남편 키마로 씨는 IMF 이코노미스트 지내
⊙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기슭의 마을에서 봉사활동하며 여생 보내고 있어

김영회
1946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뉴욕주립대 정치학 석사, 메릴랜드대 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 세계은행 근무, 세계은행 우간다·모리셔스·소말리아 담당 컨트리 오피서 역임
  지금은 국방부 장관이 예비역 장성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지만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던 장면 정권 시절은 물론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민간인 출신 국방부 장관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제6대 김용우(金用雨·1956년 5월~1957년 7월 재임) 장관이다. 국방장관을 그만둔 후 그는 초대 주영대사로 나갔다.
 
  1958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해양법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그는 미국안(案)에 찬성표를 던지라는 본국의 훈령을 거부하고 반대표를 던졌다. 미국안이 영해 및 어업권 확보 측면에서 우리에게 불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국익(國益)에 맞는 판단이었지만, 그는 이 항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는 이후에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 대한체육회장,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지인에게서 “김용우 전 장관의 딸이 아프리카 탄자니아 추장의 아들과 결혼한 후 세계은행에서 활동하다가 은퇴했는데 잠시 귀국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이름은 김영회다. 남다른 인생이다 싶어서 그를 만났다.
 
  올해 70세인 그는 소년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멋쟁이 여성이었다. 김영회씨에게 부친의 대사 시절 항명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그때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바깥사람에게서 그 얘기를 듣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책 빌리러 남편과 처음 만나
 
1956년 초대 주영대사로 임명되어 출국하는 김용우 대사 가족. 가운데는 어머니 심양순씨, 오른쪽 끝이 김영회씨.
  — 부친이 영국 대사로 나갈 때 함께 가셨나요.
 
  “6남매였는데,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던 저만 부모님과 함께 갔어요. 오빠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은 제 나라에서 커야 한다. 내가 국방장관을 한 사람이다. 병역을 치러야 할 아들을 데리고 나갈 수는 없다’며 데리고 가지 않았어요.”
 
  —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요.
 
  “아버지가 외교관이 되라고 권했어요. 심리학이나 의학을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 뜻에 따르기로 했죠.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1969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 뉴욕주립대 대학원으로 진학했어요. 장학생 선발 인터뷰를 함병춘 교수(전 대통령비서실장)가 했는데 ‘유학 갔다가 결혼해서 안 돌아오면 어떡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뉴욕주립대에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었다.
 
  — 남편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정치학은 재미가 없었지만 아프리카 정치에는 관심이 있었어요. 그때가 가나의 은쿠루마, 탄자니아의 니에레레 같은 지도자들이 한참 각광을 받을 때였거든요. 니에레레가 쓴 《자족(自足)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Self-conficiency)》이라는 책을 구해 보려고 하는데 누가 ‘탄자니아에서 온 학생이 하나 있다’고 하더군요.”
 
  그가 사디키엘 키마로(Sadikiel Kimaro)로, 그때 경제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다.
 
  “1주일 후에 책을 돌려달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데이트 신청을 하더군요. 석 달을 사귀었어요.”
 
 
  남편은 탄자니아 독립 후 최초의 미국 유학생
 
1970년 10월 키마로씨와의 결혼식. 왼쪽은 가난한 두 유학생에게 성당을 빌려준 가톨릭 신부. 오른쪽은 증인이 되어 준 반 아르넘 하원의원.
  — 탄자니아 추장의 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제 친구들 사이에도 제가 ‘아프리카 프린스’하고 결혼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때마다 ‘왕자는 왕자다. 정글의 왕자’라고 답하곤 해요. 열심히 일해서 조금 여유 있게 살게 된 자작농(自作農)의 아들이에요. 김 선생(김영회씨는 키마로를 ‘김 선생’이라고 불렀다)은 탄자니아가 독립한 후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에요.”
 
  — 어떤 점이 좋았습니까.
 
  “늘 웃는 표정이었는데 그게 무척 매력적이었어요. 나중에 탄자니아에 가서 보니 그곳 사람들은 다 그렇게 웃는 표정이더군요. 거기에다가 미남이고, 유머 감각 뛰어나고 …. 토론도 잘해서 내게 지적(知的) 자극이 됐어요.”
 
  — 부군은 선생님의 어떤 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하던가요.
 
  “내가 피아노 치는 걸 보고서는 ‘피아노를 저렇게 잘 치는 사람이면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농담하더군요.”
 
  — 당시 흑인, 그것도 미국인도 아닌 아프리카 흑인하고 결혼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
 
  “김 선생과 사귄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어머니가 언니들과 함께 워싱턴D.C에 와 있었어요. ‘좋은 사람을 만났어요. 록펠러 장학금을 받고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인데, 키마로라고 해요’라고 했더니 좋아하시더군요. ‘한국 사람만은 못하지만 일본 사람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키마로’라니까 일본 사람인 줄 아신 거죠.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했더니 한참 말이 없다가 ‘당장 워싱턴으로 와라’고 하시더군요.”
 
  — 난리가 났겠군요.
 
  “어머니가 묵고 있는 호텔에 갔더니 언니 셋, 형부 셋, 오빠가 함께 있었어요. 모두들 문화적 차이며 아이들의 정체성(正體性) 같은 걸 얘기하면서 나를 설득했죠. 한참을 얘기해도 내가 설득되지 않자 어머니가 별안간 ‘몸이 안 좋다’면서 방으로 들어가셨어요. ‘이러다가 어머니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서 헤어지기로 결심했어요. 김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헤어지자고 했죠.”
 
  — 그래서 헤어졌나요.
 
  “뉴욕에 있는 친구들과 통화했더니 ‘키마로가 너무 안됐다’고 걱정하더군요. 한 이틀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집안이 원하는 대로 하면 일평생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뭘 좀 살 게 있다’고 말하고 호텔을 나와서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왔어요. 그러고는 바로 김 선생과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결혼식은 두 달 뒤에 했어요.”
 
 
  사위 인정하면서도 딸의 결혼 사실 감춘 아버지
 
세계은행에 근무하던 1995년 우간다에서 교육진흥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현지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결혼식에 부모님은 오셨나요.
 
  “어머니, 언니, 오빠들은 왔는데, 아버지는 안 오셨어요. 식장 분위기가 싸했죠.”
 
  — 아버지는 키마로 씨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까.
 
  “나중에는 미국에 오면 김 선생과 만났고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하셨어요. 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는 내가 미국에서 결혼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그게 당시 한국 사회의 한계였던 것 같아요.”
 
  — 한국에는 자주 다니셨나요.
 
  “3년 전에 처음으로 김 선생과 함께 들어왔어요.”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70년 10월로, 흑인에 대한 편견이 만만치 않던 시절이었다. 1972년 그는 세계은행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29년을 근무했다.
 
  — 세계은행에 들어가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황인종, 제3세계 국가 출신, 여성 …. 안 좋은 조건은 다 갖고 있었죠. 제일 밑바닥인 타이피스트로 들어갔어요. 프로페셔널(세계은행의 상위직급)들이 작성한 원고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곤 했는데, 그걸 상사(上司)가 좋게 봤어요. 1년 반 후에 리서치 어시스턴트(중간직급)로 승급했어요.”
 
  — 세계은행에서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우간다, 소말리아, 모리셔스 등 아프리카 국가들을 담당하는 컨트리 오피서까지 하고 나왔죠.”
 
  — 컨트리 오피서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여섯 명이 한 팀인데 처음에는 토론을 주재하는 게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그런 훈련이 덜되어 있었거든요. 토스 매스티스 클럽이라는 곳에 다니면서 연설, 토론 훈련을 했는데 한 6개월 정도 지나니 나아지더군요.”
 
 
  세계은행에서 아프리카 담당
 
금년 6월 제막된 김용우 전 장관의 흉상 앞에 선 김영회씨. 김 전 장관은 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를 지냈다.
  — 1990년대의 소말리아는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죠. 영화 〈블랙호크다운〉을 보니 살벌하더군요.
 
  “컨트리 오피서는 본부에 근무하는 직책이었지만 1년에 3번 정도 소말리아 현지로 출장을 갔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떠나던 날 소말리아 재무부 차관이 ‘무사히 떠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인근 은행 건물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어요.”
 
  — 지난 50여 년간 세계은행이나 유엔, 선진국들이 수많은 지원을 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의 발전은 더디기만 합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아프리카 국가들은 자원이 풍부한데도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리더십 문제라고 봐요. 세계은행이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걸 절실하게 느끼지 않으면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더군요. 권위주의적인 풍토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 부패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아프리카 어느 나라나 다 부패가 심각한 게 사실입니다. 우간다의 무세베니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형제가 군대를 장악하고 부패해졌어요. 그래도 우간다는 문제가 있으면 극복하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탄자니아는 문제가 있어도 팔짱을 끼고 있는 쪽이고 ….”
 
  — 아프리카에 희망은 없는 겁니까.
 
  “모리셔스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질 못했어요. 세계은행은 이 나라 국민들이 영어·불어를 할 줄 알고 대학진학률이 50%를 넘는다는 데 주목해서 농업 위주에서 ICT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제안했어요. 정부는 타운홀 미팅(townhall meeting)을 열어 국민들을 설득했습니다. 모리셔스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구조개혁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장·차관들이 저 정도로 열심히 하는 걸 보니 한번 따라가 보자는 생각이 든다’고 …. 절대로 1인당 GDP 5000달러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나라라고들 했는데 작년에 9000달러를 넘었어요.”
 
 
  “우리 아이들은 탄즈코메리칸”
 
엠키와성경대학에 설립된 이화홀 앞에서 남편과 함께 선 김영회씨. 김영회씨는 이화여고를 나왔다.
  — 부군은 IMF에서 근무하셨다고요?
 
  “이코노미스트와 어드바이저를 지냈죠. 16년 전 IMF를 그만둔 후에는 탄자니아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을 5년 동안 했습니다. IMF 부총재를 지낸 아이보리코스트 대통령이 탄자니아 대통령에게 김 선생을 추천했어요.”
 
  — 지금은 부군의 고향에서 부부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킬리만자로 산기슭에 있는 무이카 빌리지라는 곳이에요. 100km²쯤 되는 넓이에 있는 11개 마을에 4만3000명 정도 살고 있어요. 도서관에만 신문이 들어오는 깡촌이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면 말도 못하게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죠.”
 
  — 어떤 봉사활동을 하나요.
 
  “김 선생은 정부에서 나온 후 무이데프(무이카개발트러스트)라는 NGO를 만들었어요. 관개사업, 전기보급, 교육 등 다양한 일을 합니다. 외국 로터리클럽의 지원을 받아서 시멘트 바닥에 지붕과 화장실이 있는 시장(市場)을 만든 일, 독일 사람들이 세운 작은 교회를 고쳐서 도서관을 만든 일이 기억에 남네요. 이 일을 하면서 ‘세계은행 컨트리 오피서를 할 때에 이런 풀뿌리 경험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자녀들이 어떻게 되나요.
 
  “아들, 딸이 하나씩 있어요. 딸아이는 심리학을 공부한 후 영화 일을 하다가 요즘에는 강사 생활을 하고 있어요. 아들은 고교 때 미국 태권도 챔피언을 했는데 경제학을 공부한 후 지금은 피트니스·재활센터를 하고 있어요.”
 
  — 자녀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지는 않았습니까.
 
  “딸이 어릴 때 ‘내 피부색은 왜 이래?’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아이에게 물었죠. ‘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한 가지만 먹는 게 좋으니, 섞어 먹는 게 좋으니’라고 …. ‘섞어 먹는 게 좋다’고 대답하더군요. ‘너는 섞은 애라서 그래’라고 말해 줬죠. 사실 애들은 아프리카인도,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죠. 저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탄즈코메리칸’이라고 말해 줍니다. 탄자니아인+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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