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한국영화 100년 다큐멘터리 만드는 李錫基 원로 영화감독

“영화는 나의 운명”

  •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aglebsk@chosun.com
  •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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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영화계 첫발 들인 후 180여 편 촬영·제작… 대종상 4차례 수상
⊙ 한국영화 100년史 5부작 다큐멘터리 제작 中, 최근 1편 마무리해
⊙ 1919년 제작된 <의리적 구투(仇鬪)> 한국영화의 출발…
    나운규, 이규환, 전창근 감독 독립운동하듯 영화 만들어
⊙ “윤정희 작품 가장 많이 촬영… 가장 예쁜 여배우는 정윤희”

李錫基
⊙ 74세. 용산고 졸업. <보경 아가씨>로 촬영감독 데뷔. <성리수일뎐> 등 10여 편 연출감독,
    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現 사단법인 미래영상테크위원회 이사장.
⊙ 대종상 촬영상(창공에 산다·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대종상 특별상(깃발 없는 기수),
    대종상 공헌상, 황금촬영상 등 주요 영화상 수상. 올림픽 문화훈장 수훈.

취재지원 : 劉旿相 月刊朝鮮 인턴기자
한국 영화계가 100년을 향하고 있다. 일본강점기였던 1919년 <의리적 구투(仇鬪)>를 한국영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우리 영화계는 지금까지 제작한 편수가 총 7000여 편이라고 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한국영화가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수십 차례 수상했고, 근래에 와서는 해외 배급을 통해 전(全)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수많은 영화계 인사의 꿈과 열정이 묻어 있는 ‘한국영화 100년’을 이석기(李錫基) 원로 영화감독이 5부작 다큐멘터리로 담고 있다. 이석기 감독은 1960년 영화계에 첫발을 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180여 편을 촬영·제작한 영화계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
 
  지난 4월 8일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 시사회에서 그를 만났다.
 
  “세계 영화사(史)에서 볼 때 우리 영화의 역사는 긴 편입니다. 1910년 미국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당시 영화인(人)들은 일제의 핍박과 억압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만들었지요. 광복, 6·25전쟁 직후의 후배 영화인들은 굶어가면서도 영화 제작에 몰두했습니다. 이런 영화인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 영화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판 누벨바그
 
젊은 시절의 이석기 감독.
  ―우리 영화사를 기록한 서적은 시중에 나와 있는데 영상으로 제작한 것은 없었습니까.
 
  “공중파 방송국에서 일부 인물 중심으로 만든 것은 있지만, 우리 영화사 전체를 조명한 영상물은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영상물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이 감독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요.
 
  “일본강점기와 1950년대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가 아는 분들의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만든 작품도 많고요.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인연으로 저작권을 해결했지요. 안면으로 해결한 겁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1960년부터 ‘영화 밥’을 먹기 시작해 현역으로 40여 년을 일했습니다. 현업에서 물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영화계 후배들을 만나왔는데 우리 영화에 대한 역사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죠.”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아쉬웠습니까.
 
  “영화계 젊은이들이 프랑스의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New Wave)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더군요. ‘새로운 물결’이라는 의미로 195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새로운 영화 풍조입니다. 저(低)예산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자는 정신이죠. 그런데 우리는 프랑스보다 훨씬 앞서 누벨바그 정신으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이런 정신이 후배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겁니다.”
 
  ―오래된 영화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한국영상자료원에 자료가 많아요. 하지만 일본강점기나 광복, 6·25전쟁 전후의 작품들은 많지 않습니다. 검열제도 때문에 없어진 것도 많고요. 1960년대 이후의 작품 중에서도 없는 게 꽤 됩니다. 중국이나 북한에 흘러들어 간 영화도 있습니다. 영화광(狂)인 김정일(金正日)이 우리 영화를 좋아했잖아요. 아마 지금 북한에는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영화가 적잖게 있을 거예요. 정진우 감독이 만든 <하얀 까마귀>란 영화도 북한에 있다고 들었어요.”
 
  다큐멘터리는 총 5부작이다. 이번 시사회는 제1부 ‘초창기편’으로 무성영화부터 1950년대까지를 다뤘다. 1편을 제작하는 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 내년부터 성장기편(1960년대), 통제기편(1970년대), 중흥기편(1980년대), 전성기편(1990년대)을 연이어 발표할 예정이다.
 
  “우리 영화는 대체로 10년 단위로 구분할 수 있어요. 일제 식민시대 때는 연극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파영화와 민족주의를 다룬 영화가 많았어요. 광복 이후에는 리얼리즘 경향을 보이다 6·25전쟁 이후에는 전쟁영화, 멜로영화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성장기라 할 수 있지요. 1970년대는 군사 정부의 통제로 영화 자체가 폐쇄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 들어 사실상 자유의 시대에 접어들었지요.”
 
 
  蔣介石, ‘한국 만세’라는 친필 써줘
 
영화계에 처음 입문하고 <낙동강 칠백리>에서 촬영 조수로 일했던 이석기(맨 왼쪽).
  이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검열과 통제는 빼놓을 수 없는 아픔”이라고 했다. 검열제도는 1926년 조선총독부의 ‘활동사진필름 검열규칙’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광복 후 1946년 재(在)조선 미(美) 육군사령부의 군정법령(제68호)이 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1962년 영화법이 새로 만들어졌지만, 검열제도는 없어지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지속한 검열제도는 1996년 영화법 위헌 결정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공연윤리위원회가 상영 전 심의를 하는 것은 위헌(違憲)’이라고 결정했다.
 
  ―다큐멘터리 첫 편을 만들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일제하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일본계 영화인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자체 제작 인력이나 기술이 열악해 영화감독이 배우도 하고 촬영도 했지요. 하지만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어요. 이규환, 최인규, 나운규 감독 같은 분은 민족성을 특히 강조했지요. 나운규 감독이 만든 <아리랑>은 정말 대단한 작품입니다. 서슬이 퍼런 일본강점기에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어요. 내가 일본강점기에 살았다면 과연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나운규 감독은 일본인 조수를 고용해 그가 영화감독인 것처럼 당국에 신고해 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도 민족의식을 고취한 훌륭한 작품입니다.”
 
  ―당시 관객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아리랑>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어요. <임자 없는 나룻배>는 한국 예술영화의 시작이었죠. 두 작품 모두 일제에 억압된 조선 백성의 감성을 자극했는데 영화관은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일제 당국은 영화 검열을 강화했습니다. 전창근 감독은 <복지만리>란 영화를 만들고 결국 수감됐습니다. 이규환, 전창근 같은 분은 안중근 등 여느 독립운동가만큼이나 치열하게 생을 살았지요.”
 
  ―광복기 우리 영화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지요. 억눌려 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영화인들은 자유(自由)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해방된 내 고향> <자유 만세> 등 제목부터가 일본강점기와 달랐지요. 특히 <자유 만세>는 중국에 수출됐는데 당시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영화를 본 후 ‘자유 만세가 아니라 한국 만세다’라는 친필까지 써주기도 했습니다.”
 
  ―1편을 만드는 데 들어간 제작 비용은 얼마입니까.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대부분 제 개인 돈을 썼다고 보면 됩니다. 정부나 영화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많이 받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불만은 없어요. 지금 하는 일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죠. 저는 한때 돈도 많이 벌었어요. 하지만 영화인이라는 게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항상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영화를 사랑하는 가까운 후배들이 동참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게 제 인생의 재산이기도 하지요.”
 
  이석기 감독은 앞으로 계속 나올 다큐멘터리는 자신이 활동했을 때의 내용이라 1편보다 훨씬 실감나게 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30kg짜리 배터리 나르는 제3조수로 영화계 入門
 
1968년 <창공에 산다>를 통해 첫 번째 대종상을 받았다. 아래 사진은 당시 제작진이 촬영 현장에 모여 회의하는 모습.
  이석기 감독은 1960년 촬영기사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정일성(鄭一成) 촬영감독보다 후배지만 작품 수나 활동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과묵한 성격에다 언론에 나서는 것을 싫어한 탓에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부산에서 태어났어요. 머리는 좋았던 것 같아요. 경남중학교를 나왔지요. 찬종(정치인 박찬종 변호사)이가 중학교 친구이고, 검찰총장을 지낸 김기수는 초등학교 친구입니다.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용산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고교 시절에도 공부를 잘했습니까.
 
  “서울 오니까 공부가 잘 안 되더라고요. 당시 왕십리 집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 반 동안 걸어 다녔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공부도 멀어졌습니다. 점심때 학교 운동장 철봉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수업에 들어가곤 했지요. 3일 동안 굶은 적도 있어요.”
 
  이석기 감독은 고교 졸업과 동시에 연세대 화학과에 들어갔지만, 학비가 없어 결국 중도에 포기했다.
 
  “학교를 그만둘 무렵 작은 아버지(이병삼 촬영감독)가 일하던 촬영현장에 심부름차 갔어요. 손이 부족하던 터라 촬영현장에서 차량 통제하는 일을 잠시 도와줬지요. 그게 제 영화 인생의 출발입니다. 당시 삼촌 밑에서 일하던 조수가 제게 자장면을 사주면서 ‘계속 나와서 도와달라’고 했어요. 자장면이 어찌나 맛있던지 그 다음날에 또 갔습니다. 조수는 곰보빵도 사줬어요. 제게 자장면과 빵을 사준 그분은 나중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일했던 고(故) 안면희 촬영감독입니다.”
 
1977년 <임진왜란과 계월향> 촬영 당시의 임권택(왼쪽 두 번째) 감독과 이석기 감독 그리고 배우 정윤희(오른쪽).
  촬영기사 보조로 들어간 청년 이석기는 영화현장에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말단 제3조수로 30kg이 넘는 카메라 배터리를 들고 이리저리 다녔다.
 
  “제3조수는 ‘배터리 이동’이 주요 업무였어요. 당시에는 자동차 배터리를 카메라용(用)으로 썼는데 매우 무거웠어요. 제2조수는 카메라를 들고 다녔고, 제1조수는 노출계 하나만 딱 들고 다녔어요. 1조수만 돼도 촬영현장에서의 위치는 상당했습니다. 그 위가 촬영기사입니다. 지금은 촬영감독이라 부르지요. 촬영감독은 지시만 하면 됩니다. 정말이지 당시 현장에서의 위계질서는 대단했습니다. 군대 이상이었어요. 삼촌이 촬영감독이라고 봐주지 않았어요. 스스로 커 나가야 했습니다.”
 
  ―한 달 일하고 받은 돈은 얼마였습니까.
 
  “조수는 월급이 없었어요. 대신 공짜 밥을 먹었습니다. 당시 필름현상소가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먹고 자고 했어요. 15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어요. 즐거웠으니까요.”
 
  ―부모님 반대는 없었습니까.
 
  “아버지는 동생(이병삼 감독)이 조카를 데리고 일하는 걸로 알고 큰 걱정을 안 하셨지요. 자식의 학비도 제대로 못 댄 처지에 당신께서는 미안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느냐’며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창의력, 열정 뛰어난 천재 영화감독 이만희
 
이석기 감독은 1966년 <보경 아가씨>로 데뷔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책임감 있게 일했던 젊은 이석기는 영화계 선배들의 눈에 뜨이게 된다. “조수 생활을 5년 만에 끝냈어요. 남들은 7년 이상을 했지요. 촬영현장을 집처럼 생각하고 일했으니 선배들의 대우가 달랐어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1966년에 촬영감독으로 독립했습니다. 노진섭 감독의 <보경 아가씨>가 첫 번째 작품이지요. 두 번째 영화는 정인엽 감독의 <명동 왈가닥>이었습니다. 그 무렵 이만희 감독이 삼촌 이병삼 촬영감독과 <군번 없는 용사>를 찍고 있었는데 제가 촬영을 지원하게 됐어요. 그때 처음으로 이만희 감독을 알게 됐습니다.”
 
  ―이만희 감독은 어떤 분입니까.
 
  “요즘 사람들은 이만희 감독을 잘 모르죠. 정말 훌륭한 감독이었어요. 마흔넷에 세상을 떠난 천재적 감독입니다. 우리 영화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한 명을 꼽으라면 이만희 감독을 택할 겁니다. 예술성과 창의력, 영화에 대한 열정이 정말 남달랐어요. 그분은 촬영감독, 작가 등 여러 스태프와 항상 같이 다녔어요. 밥을 먹으면서도 영화 얘기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배우들도 자연스럽게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더군요.”
 
  이석기 감독은 이만희 감독과 <귀로> <휴일> <창공에 산다> 등 13편을 같이 만들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얼마나 됩니까.
 
  “사실 이 감독의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예술성을 중요시했거든요. 그래도 그분이 당시 영화인들에게 보여준 작품성은 지금도 높게 평가받고 있어요.”
 
1978년에 발표한 정인엽 감독, 이석기 촬영의 <꽃순이를 아시나요>의 주요 제작진. 여 주인공을 맡은 정윤희씨는 당대 영화인들에게 최고의 미녀로 평가받았다.
  이석기 감독은 이만희 감독에 이어 김수용, 김기덕, 정인엽, 고영남, 변장호, 임권택, 장길수, 정진우 감독 등과 수많은 역작(力作)을 만들었다.
 
  “김수용 감독과 네 작품을 만든 다음 정인엽, 고영남 감독과 수십 편을 찍었지요. 특히 정 감독과는 당대 내로라하는 여배우 문희, 남정임 그리고 윤정희씨를 <결혼교실>이라는 한 작품에 모두 캐스팅해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고영남 감독과는 <태양은 늙지 않는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을 만들면서 영화에 대한 사색과 철학을 갖는 계기를 마련했지요. 하이틴 영화의 붐을 일으킨 문여송 감독, 그리고 변장호 감독, 최인현 감독과도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었어요.”
 
 
  임권택-채령 부부와의 인연
 
이석기 감독은 임권택 감독과 영화배우 채령씨가 부부의 연을 맺게 해줬다. 채령(왼쪽)은 이석기를 두고 ‘남편과 결혼하게 해준 분’으로 소개하곤 했다.
  이석기 감독은 임권택 감독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만희 감독만큼이나 임권택 감독도 훌륭한 분입니다. 임 감독은 인간적인 분이지요. 그래서인지 영화에도 인간미가 듬뿍 들어 있어요.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질까 싶은데도 촬영을 끝내고 완성된 작품을 보면 심금을 울리는 영화가 돼 있는 거예요. 임 감독과는 <족보> <깃발 없는 기수> 등 10편 이상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임 감독과는 개인적 인연이 있어요. 임권택-채령 부부가 결혼에 골인하도록 한 게 저거든요.”
 
  ―두 분을 소개한 겁니까.
 
  “당시 배우로 활동했던 채령씨와 임 감독이 서로 마음은 있었는데 연인으로 발전할 결정적인 계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모시고 충남 온양에 놀러 갔습니다. 저는 카메라를 단단히 준비했지요. 좋은 장소에 가서 두 사람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주면서 ‘좀 더 밀착하시라’고 했죠. 저녁에는 술을 많이 마시게끔 분위기를 잡았고요. 그날 밤 숫기가 없었던 임 감독을 채령씨 방에 밀어 넣다시피 했어요.(웃음) 채령씨는 저를 두고 ‘남편과 결혼시켜 준 분’이라고 소개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임 감독과는 수시로 연락하고 편하게 지냅니다.”
 
  40년 넘게 한국 영화계를 누빈 만큼 이 감독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갖고 있었다.
 
  “영화인 중 인품을 얘기하자면 김수용 감독을 빼놓을 수 없지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윤정희, 신성일씨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였습니다. 경주에 촬영차 갔는데 어느 날 신성일씨가 술 한잔 하자는 거예요. 제가 술을 잘 못하는데 그날따라 양주를 많이 마셨어요. 인사불성이 돼 숙소로 돌아왔지요. 방에 들어가 저녁에 먹은 것을 다 토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우려고 하니 윤정희씨가 자고 있는 겁니다. 급히 나와서 제 방을 찾아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난리가 났어요. 그날 촬영할 윤정희씨의 옷에다 제가 ‘실례’를 했던 겁니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었어요. 그런데 김수용 감독이 ‘술을 마시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다’며 사태를 수습해 주시더군요. 윤정희씨에게 사과하고 촬영을 계속했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여러 배우 중에서 윤정희씨가 출연한 영화를 많이 찍게 됐습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씨가 동시에 출연한 <결혼교실>을 촬영할 때 윤정희씨한테 유리한 쪽으로 촬영하자 다른 배우 중 한 분이 ‘편애하지 마라’고 투정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 일들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네요.”
 
  ―기억에 특별히 남는 배우가 있습니까.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지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30년간 살았는데 집 앞에 작은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어요. 당시 함께했던 영화배우들을 데리고 그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영화 얘기를 하곤 했지요. 유명한 배우들이 그 포장마차에 자주 나타나니까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밤늦게 몰려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젊었을 때 안성기씨도 그 포장마차에 좀 다녔지요.”
 
  ―여배우 중에서 어느 분이 가장 예뻤습니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인정했지요. 정윤희가 정말 예쁘다고…. 자연 미인(美人) 그 자체였어요.”
 
 
  여배우의 섹시 美 기준
 
1971년 첫 영화감독 데뷔작인 <엄마 안녕>의 한 장면. 최무룡씨의 제안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흥행에 실패해 빚더미에 올랐다.
  이석기 감독은 신성일, 최무룡 등 당대 잘나가던 남자 배우들과도 인연이 깊다. 특히 최무룡씨와는 영화도 같이 만들려 했다고 한다.
 
  “촬영감독으로 잘나가던 때였는데 어느 날 최무룡씨가 ‘돈을 대겠다’며 영화를 같이 만들자고 했어요. 영화 제작을 총괄하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좋은 기회라는 말도 덧붙이면서요. 그래서 모든 걸 준비하고 촬영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갑자기 최무룡씨가 사정이 생겨 돈을 댈 수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대신 ‘출연은 할 수 있다’고 해요. 우여곡절 끝에 최무룡, 윤정희 주연의 <엄마 안녕>이라는 영화를 1971년도에 내놨지요. 저의 영화감독 데뷔작이었습니다. 어떻게 됐냐고요? 빚더미에 올랐지요. 흥행이 되지 않아 돈 들어올 데가 없었어요. 제작비 등 모든 비용을 제가 고스란히 갚아야 했습니다. 한동안 빚쟁이들을 피해 다녔지요.”
 
  이 감독은 1980년대 들어 정인엽 감독과 <애마부인> 1·2·3편을, 이규형 감독과는 <청춘스케치>를 제작하면서 경제적 형편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 덕에 빚도 다 갚았다고 한다.
 
  “<애마부인>의 베드신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죠. 촬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외설이 될 수도 있었지요. 촬영감독의 역량이 많이 필요한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베드신을 찍을 때 여배우의 몸을 가급적 노출하지 않았어요. 대신 절정의 장면에서 닭이 알을 낳는 장면을 찍거나 여배우의 손동작을 통해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정인엽 감독과 함께 만들었던 <애마부인> 1·2·3편은 지금 봐도 예술입니다.”
 
서울올림픽 기록영화 제작 당시 이석기는 촬영 총감독, 임권택(오른쪽 두 번째)은 연출 총감독을 맡았다. 가운데 앉아 있는 여성은 당시 통역을 맡았던 김연주 전 방송인.
  ―베드신을 예술적으로 잘 표현한 배우는 누구였습니까.
 
  “실력 있는 유명한 배우는 다 잘했어요. 물론 신체적 특징이 주는 섹시함도 무시할 수 없었죠. 당시 여배우들에게서 섹시함이란 가슴에서 나왔어요. <애마부인> 1·2·3편의 여배우를 보면 다 가슴이 컸어요. 1편 주인공으로 나왔던 안소영씨와는 특별한 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단역에 머물고 있던 무명(無名)의 안소영을 임권택 감독에게 추천해 <내일 또 내일>이라는 영화에 나오게 했어요. 장미희, 정윤희씨가 영화에 처음 데뷔한 작품들도 제가 찍었지요.”
 
  ―강우석 영화감독의 사부(師父)라는 얘기가 있던데요.
 
  “제가 연출한 <성리수일뎐>에서 조감독을 했었죠. 시나리오도 직접 쓸 줄 아는 유능한 친구였어요. 크게 성공할 거라고 봤는데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미국 현지 제작한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로 대박
 
이석기 감독은 김한길 원작소설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를 미국 현지 올 로케이션으로 제작해 크게 성공했다.
  이석기 감독은 1991년 미국 현지에서 영화 전(全) 장면을 촬영한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를 제작해 대박을 터트린다.
 
  “영화계 선배인 정일성 촬영감독이 하루는 ‘소설가 김한길이 쓴 작품인데 영화로 만들어 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판권과 시나리오를 검토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른 감독이 돈을 먼저 지불하고 제작 권한을 가져갔다고 해요.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제작하겠다던 감독이 갑자기 포기를 하면서 제가 만들게 됐지요. 그 작품은 시나리오 구성상 해외 장면이 많았어요. 미국 현지에서 모든 장면을 찍기로 했지요. 이른바 현지 올 로케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영화에는 해외 장면이 거의 없었어요. 라스베이거스 현지 카지노가 들어가는 등 영화 전체에 이국적 풍경이 흐르니까 국내 관람객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용도 좋았고요.”
 
  이 감독은 <집시애마>를 스페인 현지 올 로케로 제작하기도 했다.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는 어디서 개봉했습니까.
 
  “그 어렵다던 대한극장에서 했지요. 대박이었어요. 매회 극장표 2000장이 매진되는 겁니다. 매진 행렬은 두 달 동안 계속됐는데 전체 관람객이 수십만 명에 달했어요. 요즘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지만 그때로써는 대성공이었어요.”
 
  ―영화 인생에서 대한극장이 가장 기억에 남겠군요.
 
  “1992년도에 제작한 <땅끝에 선 여인>도 그곳에서 개봉했습니다. 무엇보다 극장 음향시설이 좋았어요. 대한극장은 1970년대부터 음향이 탁월하기로 소문났지요.”
 
  ―과거 잘나가던 배우들의 경제적 사정은 어땠나요.
 
  “1960년대에 가장 잘나가던 신성일, 엄앵란씨 등은 자가용을 타고 다녔습니다. 다른 배우들은 엄두를 못 냈어요. 최무룡씨는 유명세를 탔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어요. 후배들한테 술 사느라 다 써버렸거든요. 아무튼 못살면 못사는 대로, 잘살면 잘사는 대로 살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배우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캐스팅했습니까.
 
  “1950년대에는 연극인들을 대상으로 뽑았지요. 1960년 이후 영화인들이 늘어나면서 각자 인맥을 통해 주연을 발탁하곤 했습니다.”
 
  ―발탁 기준은 뭐였습니까.
 
  “그때는 인물 생김새가 중요했습니다. 요즘 같은 오디션은 없었어요. 의지를 보이고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그냥 배역을 맡기는 겁니다. 그때는 동시녹음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연기력보다 얼굴이 더 중요했어요. 음성은 전문 성우가 녹음했지요. 동시녹음을 했다면 신성일처럼 사투리를 쓰는 배우는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대구 출신인 신성일씨는 경상도 사투리를 많이 썼지요.”
 
  이석기 감독은 영화배우 안성기씨가 지금까지 장수(長壽)하는 데는 남다른 비결이 있다고 했다.
 
  “안성기씨는 절제할 줄을 알았어요. 속이 깊은 배우입니다. 흔히 배우들이 인기를 얻게 되면 개런티를 많이 불러요. 그런데 안성기는 달랐어요. 몸값이 비싸져도 개런티를 높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나중 인기가 떨어질 때를 생각했던 거죠. 그는 돈보다 배우활동을 더 중시했습니다.”
 
 
  F5 전투기 타고 5만 피트까지 올라가 촬영
 
  ―180여 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는다면.
 
  “몇 편 들 수 있겠지만 1968년 작품 <창공에 산다>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대본을 받자마자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각오가 생겼어요. 촬영하면서 F5 전투기를 직접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 전투기로 몇 시간을 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중학교 선배가 공군 블랙이글팀에 있었는데 그에게서 도움을 받았지요. 며칠 동안 촬영하면서 20시간 이상을 탔습니다. 5만 피트까지 올라갔어요. 고도(高度)가 상승하면 기온이 급강하하는데 그 때문에 체력이 급격히 저하됐어요. 그래도 촬영을 강행했습니다. 결국 고막이 터졌지요. 중이염이 생겨 촬영 기간 내내 귀에서 고름이 나왔어요. 그 영향으로 지금도 귀가 좋지 않아 작은 소리를 잘 못 듣습니다. 이 작품으로 그해 대종상 촬영상을 받았어요. 영화계에 입문하고 얼마 되지 않아 대종상을 받으면서 젊은 나이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깃발 없는 기수>도 기억에 많이 남고, 또다시 대종상을 안겨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도 열정을 쏟은 작품입니다.”
 
  ―공로상을 포함해 대종상을 네 번이나 수상했더군요.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투지 때문이라 생각해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상(賞)이 그냥 따라오더군요. 이런 적이 있어요. 초년병 시절 선배 촬영감독들이 저를 두고 ‘이석기는 픽스를 잘해’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다른 감독들과 비교해 촬영 구도가 달랐던 거죠. 필요한 인물과 배경 등을 잘 배치했습니다. ‘어디서 배웠느냐’고 선배들이 물어왔어요. 저는 외국 잡지나 영화를 보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림 공부도 별도로 했습니다. 외국 잡지, 특히 카메라 잡지를 보면서 괜찮은 그림을 찾아 스크랩을 해두었어요.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그림은 다 스크랩을 했지요. 인물 위주, 풍경 위주로 분류해 만든 대학 노트가 10여 권에 달했어요.”
 
  이석기 감독은 영화현장에 있으면서 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를 10년간 맡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기록영화 촬영 총감독으로 봉사했다. 연출 총감독은 임권택 감독이 맡았다.
 
  이 감독은 지난 2011년 사단법인 미래영상테크위원회를 만들었다. 영화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영화의 촬영기법, 기술 분야를 체계화하기 위해서다.
 
  “제가 40년 전에 황금촬영상 수상 제도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대로 유지하지를 못했어요. 미국에는 기술영화제가 있는데 우리는 없습니다. 그런 걸 만들어 영화기술 분야를 발전시킨 이들을 발굴하고 격려해야 해요. 그래야 우리 영화의 깊이가 더욱 깊어집니다.”
 
 
  선배들의 헝그리 정신 배워야
 
이석기 감독은 후배 영화인들에게 “선배들의 헝그리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석기 감독은 충무로에 있는 맥주가게 ‘그린호프’를 30년 이상 다니고 있다. 그가 충무로를 떠나지 않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과거 명동에는 글 쓰는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렸지요. 그 옆 충무로에는 영화인들이 모였습니다. 옛날 스타다방, 태극다방, 청맥다방 등은 영화인들의 집합소였어요. 스타다방에는 영화배우들이, 태극다방에는 감독들이 드나들었어요. 청맥다방에는 영화 스태프들이 많았어요. 다들 개인 사무실이 없으니 다방에 모여 회의를 한 겁니다. 식당, 술집에도 영화인들이 가득했어요. 이른 아침에 ‘어느 해장국집에 모여라’고 하면 모두 모였어요. 해장국 한 그릇 먹고 말죽거리로 나가 촬영하곤 했습니다. 당시 말죽거리는 허허벌판이라 촬영하기에 안성맞춤이었지요. 충무로에는 영화인들의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충무로는 한국영화의 발상지이자 한국의 할리우드입니다. 후배 영화인들이 충무로를 ‘역사의 장(場)’으로 계승, 발전시켜 ‘한국영화사의 현장’으로 만들어야 해요.”
 
  ―영화는 이석기 감독에게 무엇입니까.
 
  “삶의 모든 것이지요. ‘영화는 나의 운명’입니다.”
 
  ―영화인으로서 자신에게 점수를 준다면.
 
  “인생을 100이라고 한다면 60, 70점 정도에 불과해요.”
 
  ―왜요.
 
  “살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데 집사람과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항상 미안하지요.”
 
  이석기 감독은 “죽을 때까지 영화와 함께하겠다”고 했다.
 
  “지금 만드는 ‘한국영화 100년 다큐멘터리’를 무사히 마쳐야 하는데 예전 같지 않아요. 힘도 많이 들고…. 그래도 자신은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처럼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는 동료, 선후배들이 있으니까요.”
 
  ―영화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선배들의 영화 정신, 헝그리 정신을 배웠으면 해요. 이게 없으면 어려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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