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석
⊙ 53세. 중앙대 문창과 졸업. 《실천문학》으로 등단.
⊙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장편소설 《십년간》
《당신의 왼편》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때》 《백 개의 아시아 1.2》,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 신동엽창작기금, 오영수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 현재 중앙대 교수.
아시아스토리텔링위원회 위원장.
⊙ 53세. 중앙대 문창과 졸업. 《실천문학》으로 등단.
⊙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장편소설 《십년간》
《당신의 왼편》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때》 《백 개의 아시아 1.2》,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 신동엽창작기금, 오영수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 현재 중앙대 교수.
아시아스토리텔링위원회 위원장.
그의 손을 거쳐 간 한국 기업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그는 견디기 어려운 장면을 자주 목격해야만 했다. 베트남에서 조금 자리를 잡기 무섭게 우쭐거리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흔해서 일일이 보아줄 수조차 없었다. 그를 결정적으로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노동자들을 대하는 한국 기업의 태도였다. 70년대 한국의 주력 산업이 베트남으로 이전해 오면서 노동자를 다루는 습성도 70년대 한국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의 주선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공장에 들렀다가 베트남 노동자를 신발로 때리는 한국 관리자를 목격한 날, 그는 밤을 새워 통음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이 진출하는 데 첨병 노릇을 한 자신을 주먹질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가 쓴 글이 한국의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그가 멀리하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그를 멀리했다. 쓰는 글의 횟수가 늘면서 그는 교민사회에서 기피의 대상을 넘어 저주의 대상으로 바뀌어 갔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고립과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 본문에서
이 소설은 베트남 수교 후 베트남어와 문화를 익혀 그곳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했던 한 남자가 주인공이다. 무더운 한여름 베트남의 작은 아파트에서 시나리오 번역 작업을 하다 과거를 회상한다. 한때는 한국 기업이 그를 교두보 삼아 베트남으로 진출했던 일, 지금은 그들에게 소외됐던 일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한때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가 국내 여행객을 데려와 통역을 부탁하는 과정에 수치와 실망을 느낀다.
그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베트남의 유명한 시인이자 영화감독은 호찌민 루트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명 중의 한 명이다. 가끔씩 얼굴이 어둡던 까닭이 죽은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등과 어깨가 드러난 탱크탑을 입고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아가씨들, 아오자이 자락을 살짝살짝 날리며 자전거를 탄 여학생들, 그곳에서 전쟁은 먼 시공에서나 존재했었다. 작중 화자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저항도 과감히 하지만, 자신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이해해야 함을 깨닫는다.
방현석 작가는 국적을 막론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 우선인 휴머니스트다. 그는 주로 산업현장 노동자의 고락을 체험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소설을 쓴다. 독자는 그가 쓴 소설이 어디까지가 실화인지,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설마’라는 부조리한 사회의 비현실성 때문이다. 작가는 ‘소설은 소설’이라며 스마일 눈웃음을 짓는다.
맨 처음 외국행으로 베트남 찾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존재의 형식》은 베트남을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현장 취재는 어떻게 한 겁니까.
“그 무렵 제가 베트남을 자주 다녔어요. 시나리오 번역 작업에도 참여한 적 있고요.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모티브를 얻었어요. 제가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 겪었던 일들을 엮어서 쓴 거죠.”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개봉했나요.
“아니요. 개봉 못했어요. 베트남전 영화를 베트남에서 찍는다는 게 애초에 무리였죠. 할리우드 영화나 베트남을 소재로 한 많은 전쟁영화가 있었지만, 그 영화들 중에 ‘조용한 미국인’이라는 것만 빼고는 거의 다 태국이나 이런 데서 찍었어요. 최근 들어서야 개방이 좀 됐지만, 당시만 해도 검열이 까다롭고 허가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소설은 거의 실화에 가깝게 보입니다.
“제가 소설을 너무 잘 썼나 보네요.(웃음) 실화도 있지만 그래도 소설은 소설이죠. 99%의 사실과 1%의 허구가 섞여 있어도 허구니까요. 기본적으로 팩트는 많은 부분이 사실인데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엮이고 질서화를 하느냐에 따라서 의미와 맥락이 달라지니까요.”
—베트남엔 어떤 연유로 자주 갔습니까.
“제가 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어요. 그 당시 대학생들이 많이 읽었던 책 중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잉게 숄 저자의 책인데 독일 나치하에서 반나치 운동을 했던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죠. 그 책이 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읽혔어요. 제목을 줄여서 ‘아미자’라고도 했는데, 그 책과 더불어 읽혔던 소설이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책이었어요. 그 책은 부패한 베트남 정부 아래서 반정부 활동을 하는 젊은 대학생의 이야기이죠. 그 두 권이 당시 대학생 사이에서 많이 읽혔어요.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우리와 유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랑 다른 체제에 살고 있으니까 더 호기심이 생기고 궁금했어요. 언젠가 세상이 좋아져 베트남에 갈 수 있다면, 그 나라를 꼭 한 번 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땐 그렇게 빨리 베트남에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 못했죠. 그때만 해도 외국 나가는 게 굉장히 어려웠잖아요. 불문과 학생들이 프랑스 한 번 가는 게 꿈이었으니까요. 요새 대학생들이야 누구나 어학연수를 가지만요.”
—그때가 몇 년도 쯤인가요.
“1990년 초반이죠. 동구권의 소련이 붕괴하면서 해외여행도 자유로워졌어요. 제 여권에 처음 비자도장을 찍은 나라가 베트남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베트남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죠. 오랫동안 국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죠. 외대에 베트남어 학과가 있었지만 그 학과를 나온 사람들조차 베트남어를 쓸 일이 없었어요.
베트남이라는 체제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상태에서 개인적으로 베트남에 대해 공부한 드문 사람 중에 하나가 저였어요. 장님나라에 가면 한 눈 가진 사람이 왕을 한다고 베트남에 대한 공부를 하고 좀 아는 게 생기고 친구도 생기니까 제가 베트남에 대해 진짜 뭘 제법 아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어요.(웃음) 뜻하지 않게 나름 베트남 전문가가 된 거죠. 한동안 그 방면 전문가 취급을 받았죠. 베트남에서 다리를 놓을 때 다리를 어떻게 놓을지 저한테 자문을 할 정도로요. 그 후에 다른 나라도 많이 가 봤지만, 제가 제일 많이 간 나라는 베트남이죠.”
베트남 다큐멘터리 감독 반레와의 인연

—소설에서처럼 실제 기업도 자문을 구한 거네요.
“대학교 다닐 때 사회과학 공부도 조금 하잖아요. 그러면서 자본주의 이론도 공부하고 사회주의 체제라는 게 뭔지도 좀 안 거죠. 그런데 한국 기업들이나 베트남에 투자하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베트남 체제를 잘 몰랐고 그 나라에서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의 원리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죠.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런 거에 대해서 제가 조금 먼저 이해할 수가 있어서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었어요. 저 사람들은 이렇게 할 것이고, 또 저렇게 나올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조언을 해 주는 것 정도는 가능했던 상태였죠.”
—언어도 꽤 익혔겠네요.
“베트남 유학생을 선생으로 모시고 2~3년 베트남어 공부를 했어요.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처음에는 열심히 해서 베트남 가서도 막 써먹고 그랬는데, 자주 쓰지 않으니까 잊어먹게 되더라고요.(웃음)”
—베트남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시인이고, 작가인 ‘반레’가 실명으로 등장하는데 그분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지난해 마지막 저녁을 사이공에서 반레와 먹었지요. 시골 제 작업실에서 쓰라고 해먹을 사 줬어요. 그 해먹을 올 여름에는 써 볼 작정이에요.”
—그분은 참전도 하고 호찌민 루트에도 있었던 분인가요.
“네. 열일곱 살에 입대해서 호찌민 루트를 타고 내려가 중남부 전선에서 9년 정도를 전쟁터에서 살았어요. 동료들은 대부분 다 죽었고. 아주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몇 사람 중의 한 분이죠.”
—우리나라에 대한 생각이 어떤가요. 호의적인가요.
“우리 국민들과 전쟁을 했던 게 아니고, 우리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니까요.”
—베트남엔 라이 따이한이 많이 살고 있나요.
“전쟁 당시의 라이 따이한은 다 나이가 많아요. 벌써 40년이 지났어요. 한국 군인들이 1970년대 초반에 거의 철수를 했으니까요.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많고 지금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죠. 미국이나 프랑스는 자기 핏줄을 잘 챙겨서 돌아간다고 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그런 것을 용인하는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데려오는 게 더욱 어려웠겠죠. 서구에서는 입양이나 다른 핏줄을 키우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반면,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않잖아요. 심지어 국교가 정상화된 다음에 베트남의 자식이 먼저 한국인 아버지를 찾아와도, 아버지가 자식을 부인하기도 했죠.”
—작중에 여행객 행태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어요. 국내서는 점잖던 사람이 외국에 나가면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요.
“그 부분은 조금 유쾌하지 않죠. 똑같은 사람이 유럽이나 미국에 가면 안 그러거든요. 잘사는 나라에 가면 바가지를 써도 항의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보다 좀 가난하다거나 현대화가 덜된 나라에는 문화적 편견을 꽤 강하게 드러내요. 베트남에도 부자가 많거든요. 중국 사람 가운데도 어마어마한 부자가 많고요. 우리로 치면 롯데백화점이나 신세계백화점은 안 가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한국을 다 봤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베트남 가서 벤탄시장을 가 보고 베트남을 다 봤다고 전면화해 버리면 안 되는 거죠. 삶의 다른 양식들에 대한 너그러움과 관대함이 부족한 거죠.”
—《존재의 형식》은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적인 제목입니다. 인간과 문학은 무엇입니까.
“제가 굉장히 로맨티스트인데 시대를 잘못 만나가지고 80년대에 대단한 리얼리스트로, 그런 작가로 평가받았어요.(웃음) 문학을 한다는 건 상투성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쉽게 딱지를 붙이고 표면적으로 평가하고 결론을 내리는 건 굉장히 위험하고 그것은 문학의 본질과도 거리가 먼 일입니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정말 그럴까’ 하고 의심하고, ‘저 사람 나쁜 놈이야’ 할 때 ‘저 사람 진짜 나쁜 사람일까’ 하고 다시 생각하는 게 문학이 하는 일이죠. ‘진짜 그럴까’ 하고 다시 물어보는 것, 그래서 그 이면에 있는 진실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 문학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잘되고 잘나가는 건 다들 알아주고 축복하죠. 하지만 문학은 어떠한 관심도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어떤 기억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잊혀 가는 그런 것을 살피고 기억해 주는 일이죠.”
대학졸업 후 한때 위장취업
—문학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욕망을 파헤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 있겠네요.
“제가 그렇게 훌륭하지 못해서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있어요.”
—초기의 다수 작품이 산업 노동자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노동소설을 쓰는 소설가인가요.
“저는 노동소설이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노동자의 이야기를 썼던 이유는 그 시대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들을 그리려고 하다 보니까 노동자의 이야기를 쓰게 됐어요. 그게 노동자도 되고 다른 사람도 될 수 있는데, 80~90년대에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들은 그 시대의 노동자라고 생각해요. 값진 땀을 흘려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우리 사회를 아래로부터 지탱하고 감당한 그들은 묵묵히 삶을 일구고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가정을 지켜 나갔어요. 그들이야말로 80~90년대를 살아간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었지요.”
—산업현장과 직간접적인 인연도 있었죠.
“제가 1985년 말 공장에 취직했는데 하루 일당이 3700원이었어요. 그 돈이면 설렁탕 두 그릇을 먹고 담배 한 갑 정도 살 수 있었어요. 그 공장은 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어요. 오후 5시쯤 반장이 와서 ‘오늘 8시 퇴근이야’ 그러면 꼼짝없이 8시까지 일해야 해요. ‘오늘 철야야’ 하면 무조건 다음 날까지 일하는 거죠. 저녁에 애인하고 약속을 해 놔도 못 가요. 시골에서 어머님이 올라오셔도 못 가는 거죠. 가면 그 다음날 관둬야 하니까요. 지금도 어려운 노동자들이 많지만, 그 당시는 모두 정말 어려웠죠.”
—대학생 신분으로 공장에 들어간 겁니까.
“학교는 그만두고 들어갔어요.”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나요. 다른 이유였나요.
“그 당시 용어로는 위장취업이었죠. 제가 공장을 다니면서 노조라는 게 조금씩 합법화되어 갔죠. 그 전에는 거의 대부분 유명무실했고요. 노조가 일반화된 87년을 분기점으로 임금도 많이 올랐죠. 그 당시 일당 천원이 올랐으니까 어마어마한 액수가 오른 거죠. 당시 천원이나 오르니까 회사가 망하지 않을까 했는데 망하지 않더라고요.”
—지금으로 치면 한 달치 스마트폰 요금인데, 어떻게 생활을 했을까요.
“그 월급을 받아서 어떻게 애들을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지 진짜 신기했어요. 저는 그거 받아 혼자 사는 자취방 방세 내고 생활하기도 어려웠거든요. 자기 권리에 눈 뜨고, 이유 없는 복종·부당한 강압에 저항하고, 스스로 인간의 권리를 지켜 나가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죠. 제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저를 감동시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이 저로 하여금 노동자들에 대해 쓰고 그리게 만들었어요.”
—위장취업이 들통나지는 않았어요?
“제가 생긴 게 지식인처럼 보이지 않아서인지, 아무도 저를 대학생 출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해고를 여러 차례 당하긴 했는데 학생 출신이란 게 들통나서가 아니고 다 부화뇌동했다는 이유였어요. 수더분하고 성실한 사람이 왜 부화뇌동하느냐고, 그래서 짤렸었죠.”
김근태 최후진술서 써
—고 김근태 전 장관이 주인공인 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는 실화라기 보다 진짜 소설같이 재밌었어요. 생전에 그분을 여러 번 만났을 텐데 특별히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일도 많겠죠.
“몇 번 있습니다. 한 번은 그분이 대통령후보 경선엔가 나갔다가 꼴등 한 적이 있어요. 그 과정에 선거비용을 신고하는데 자기가 규정보다 더 썼다고 고백했어요. 여러 후보들 중에서 제일 적게 썼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규정을 어겼다고 고백해 재판 받고 유죄를 받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고백한 사람만 유죄 판결을 받은 거죠. 그건 코미디죠. 다른 후보자들이 규정보다 훨씬 더 많이 썼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비밀인데, 그분만 홀로 심판을 받은 거죠.
그때 최후진술서를 제가 썼어요. 최후진술이 감동적이라고 신문에 전문이 다 수록되기도 했어요. 기자들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라고 하니까, ‘제가 쓴 게 아니라 저작권은 저기 방 작가한테 있다’고 말했어요.
정치인은 그러면 안 되잖아요. ‘제가 쓴 게 아닙니다’, 그런 말 같은 거 안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그렇게 말하시면 다시는 ‘부역 안 해드린다’고 말했어요. 최후진술을 제가 쓴 건 맞지만, 저는 김근태 선배가 평소에 했던 말을 모아서 정리한 것뿐이죠. 그분의 생각에 입각해서 쓴 거니까 그건 당연히 그분의 언어인 거고, 저는 정리자라는 표현이 맞는 거죠. 그런 면에서 그분은 정말 비정치적이었죠.”
—정치인다운 쇼맨십이 전혀 없는 모양이지요.
“그런 면에서는 그 어떤 예술가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죠. 제가 인천에 있는 공장에서 일할 때 그분이 당했던 고문이 적힌 글을 산동네 냉방에 엎드려 읽은 적이 있어요. 아마 정치인이 작가들한테 술과 밥을 얻어먹은 사람은 그분밖에 없을 거예요. 정치에 입문한 뒤에, 정치자금 고백해서 유죄판결을 받고 났을 때 작가들 열댓 명이 김근태 선배를 초대해서 인사동에서 저녁을 사 드렸죠.”
서로를 인정한 김근태와 박태준
—그런 인연으로 그분을 모델로 소설을 쓰려고 생각한 겁니까.
“그분도 자신이 그렇게 일찍 운명할 줄은 몰랐을 거예요. 병실에 있으면서 제 소설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고 해요. 그리고 병실을 지키던 후배가 어느 날 저하고 김형수 소설가를 불러서 서울대 병원에 갔어요. 병상에서 시간이 많으니까 생애를 돌아보고 글로 정리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김형수 소설가와 상의해서 제가 맡았어요. 그런데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니까 인터뷰를 할 시간도 안 됐던 거죠.
저는 그때 만주에 취재차 가 있었는데, 밤에 문자가 왔어요. 김근태 선배가 위독하다는 문자였어요. 그날 만주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그 문자를 보고 독한 술을 많이 퍼마셨어요. 다음 날 아침에 술이 덜 깬 채 일어났는데 돌아가셨다는 문자가 와 있더군요.”
—끝내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을 못 읽고 떠나셨네요.
“인생을 정리하려고 쓴 글인데 인터뷰가 어려워져서 소설로 바꿔서 썼어요. 김근태라는 인간을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아주 가깝다는 사람들도 잘 몰랐나 봐요. 소설을 보고서야 김근태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해요. 한편 김근태라는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만 자신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봐요.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취했다면 그건 김근태가 아니었겠죠. 그런 성공은 김근태 스스로 자신이 옳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결과가 되었을 테니까요.”
—그 시대 정치 현실이 한 인간의 실패를 통해 자신이 옳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네요.
“그렇죠. 주변에서 김근태는 왜 정치를 그렇게 하느냐, 쇼맨십이 없고, 전술적이지 못해서 김근태는 안 된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죠. 김근태가 바뀔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시대가 바뀌었어야죠. 김근태라는 사람이 통용될 수 있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시대였어야 하는 거죠.
취재를 하면서 김근태 선배가 박태준 회장를 굉장히 존중했다는 걸 알고 좀 놀랐어요. 확인취재를 했더니 박태준씨도 김근태씨를 진실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시 놀랐어요. 진영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좋은 사람이라고 했더라고요.
박태준 회장이 진정한 애국적 보수라는 건 어떤 것이고 어떤 게 진짜 보수인가를 보여준 것처럼 김근태 선배도 진정한 진보라는 게 어떤 것인가를 그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그 가치를 지켜낸 드문 사람이었죠. 그분을 잃은 건 우리 사회 진보진영이나 민주화운동 세력에는 큰 손실이죠. 세력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크기의 정신적인 손실인 것이죠.”
베트남인의 우정에 감동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은 현재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습니까.
“지금은 후배들이 맡아서 하는데 옛날처럼 열성적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 전에는 해마다 베트남 여행도 가고 베트남 작가를 한국에 초청해서 여행도 시켜 주고 회원 집에다 나누어 재워 주기도 했어요.
한 번은 일본대사관이 베트남작가협회에 항의를 했다고 해요. 일본에서는 초대하면 융숭한 대접은 물론 사례도 해 주었는데 돌아가 아무 반응이 없다가, 왜 한국에 다녀와서는 작가들이 여기저기 지면에 한국에 대한 글로 도배를 하느냐고요. 한국에서 받은 인상을 글로 아주 잘 쓴 거죠. 그러니 일본으로선 화가 난 거죠.”
—베트남 하면 쌀국수가 유명하잖아요. 현지에서는 맛이 어떤가요.
“아주 맛있어요. 우리나라에서 먹는 쌀국수는 그 맛에 훨씬 못 미치죠. 쌀국수는 무엇보다 국물이죠. 원래 오리지널은 닭국물을 우려내서 담백하고 고소하고 그윽한 맛이에요. 눈물이 핑핑 도는 매운 맛은 슬픔을 이기게 하는 힘도 있어요.”
—현지 가격은 어떤가요.
“관광객을 상대로 해서는 우리 돈으로 4000원 정도고, 현지사람들이 먹는 깔끔한 식당은 2000~3000원 정도고, 길거리 노점에서는 1000원 정도예요.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비싸죠.”
—최근 그리스·로마신화를 능가하는 《백개의 아시아》를 출간했어요. 방대한 아시아권 설화에 놀랐어요. 또한 점점 소외되어 가는 ‘종이책’에 대한 의견과 디지털시대에 스토리라는 콘텐츠가 미칠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베트남으로부터 출발한 여행이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어요. 우리는 아시아에 살면서 정작 아시아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장에 꽂혀 있는 《세계문학전집》이 실은 서구 문학전집이었는데 그걸 읽으면서 세계 문학전집을 다 읽었다고 생각했어요. 서구가 곧 세계였고, 세계의 표준은 곧 서구였었죠. 서구의 눈으로 가치를 재고 그게 아니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죠. 아시아의 대지에도 수많은 정신의 높이들이 있는데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죠.
저도 아시아를 다니면서 아시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많은 한국 사람이 앙코르와트를 가도 거기 있는 탑과 회벽마다 새겨져 있는 그림의 구조를 알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림은 라마야나라는 인도 신화의 주인공이고 그게 다 스토리텔링이거든요. 벽에 새겨진 그림을 통하여 신화가 전해지고 있어요.
아직도 그 나라 사람들은 서구 현대문학이 도입된 지 얼마 안 되어 익숙지가 않아요. 오히려 구전 구술이 훨씬 발달해 있어요. 지적인 훈련, 교양, 전통들이 책으로가 아닌 대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로부터 그걸 습득하고 있어요. 자기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고 하면 안 되는지를 구술로 습득하는 거죠. 자식들에게도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지를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는 거예요. 이야기 속에 그들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다 담겨 있어요.”
—작중에 인상 깊었던 스토리텔링은 무엇입니까.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요. 베트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고아로 자란 두 친구 얘기예요. 둘은 남의 집에서 일을 해 주고 살았는데, 한 친구는 총명했고 한 친구는 아주 착했어요. 하루는 착한 친구가 총명한 친구에게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머슴살이밖에 못하겠다, 너는 똑똑하니까 공부를 해라, 내가 너 대신 열심히 일해 너를 뒷바라지하겠다’, 그렇게 해서 총명한 친구는 과거급제를 해 관리가 되죠. 그런데 착한 친구가 찾아가자 만나 주지를 않아요. 착한 친구는 너무 슬퍼 강둑에 앉아 있었어요.
그때 선녀가 내려와서 왜 우느냐고 물으니까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어요. 선녀는 자기랑 결혼하자고 해요. 그래서 착한 친구는 선녀와 결혼을 해요. 선녀는 궁궐 같은 집을 뚝딱뚝딱 짓고, 그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요. 총명한 친구는 자기가 가는 길에 양탄자를 깔아 달라고 해요. 선녀는 양탄자를 깔아 주죠.
친구가 와서 보니까 착한 친구는 궁궐 같은 집에서 절세미인 아내와 살고 있거든요. 총명한 친구는 너와 나는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자고 했으니 이제부터 관직은 네가 하라며 바꾸자고 해요. 선녀 부인은 바꾸라고 해요. 착한 친구는 궁궐로 갔어요. 그런데 다음 날 아름다운 집은 움막으로 변하고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총명한 친구는 나룻배 뱃사공이 됐어요.
그런데 결론이 흥미로워요.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요. 한 친구가 벌을 받아 불행해진 게 아니라 총명한 친구는 관직을 잃고 사람이 된 거죠. 그렇지 않았으면 괴물로 변해 관직에 있었겠죠. 나룻배 사공으로 살면서 진짜 사람으로 산 거죠. 그래서 둘 다 행복한 거죠. 이게 우리나라와 다른 결말이에요. 이런 결말로 그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여준 거죠.”
“문학이 외롭지만 근본역할이 쇠퇴하진 않을 것”
—우리나라 같으면 권선징악으로 끝났을 텐데요.
“그렇죠. 우리나라 같으면 ‘그놈은 그렇게 비참하게 살았다’로 끝나죠. 베트남 사람들은 친구가 소중해요. 도시쪽은 약간 다르지만, 지금도 그들은 돈을 벌면 친구들을 불러 마시고 즐기고, 그게 최고의 낙이에요. 친구가 최고예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살면 욕먹죠.
“그 얘기도 했더니 그게 한국과 베트남의 차이라고 말하더군요.”
—현재 중앙대에서 강의하고 계시죠. 역사가 깊은 중대 문창과를 다니는 젊은 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어떻습니까.
“문학이 예전보다 대중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문학하는 사람들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 대중적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지만, 인간의 문제를 가장 깊은 시선으로 다룰 수 있는 건 여전히 문학이죠.
인간은 문자를 통해 사유합니다. 문자라는 것이 사라지거나, 인간이 사유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문학의 근본역할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제 생각이에요. 다만 외로워지는 것은 각오해야 하죠. 이미 문학을 하겠다고 들어온 학생들은 그런 각오를 하고 있겠죠.
문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문학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아직도 문학하는 사람들의 기쁨이고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학은 다른 장르에 비해 굉장히 승률이 높은 작업이에요. 열심히 쓰면 최소한 소설책을 낼 수 있어요. 소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100% 들려줄 수 있어요. 저는 영화작업도 해 보고 시나리오 작업도 해 봤지만,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그거에 비하면 소설은 승률이 매우 높아요. 영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못 들려주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 혼자 노력으로 소설은 돼요. 물론 시(詩)도요. 그렇지만 영화는 그렇게 안 돼요. 그러니까 문학하는 사람들이 의기소침해하지 말고 좀 더 담대해져야 한다는 거죠.”
—깊이 들어가면 현재 우리나라 등단제도에 문제점이 있어요. 문학의 규제도 좀 풀려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등단제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이미 효용성이 없는 제도죠. 그 장벽 때문에 문학의 정체가 가속되고 있어요. 한마디로 문학기술자가 너무 많아요. 저마다 기교를 갈고 닦고 연마해 너무 잘 쓰는 작가들이 많아요. 심사를 하면 도대체 누구를 뽑아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예요. 그만큼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와 있는 사람은 너무나 많아요.
문학이라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죠. 그런데 정신의 깊이를 발견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문학기술자들이 너무 많이 선두에 포진해 있어요. 기술자들이 촘촘히 딱 막고 있으니까 정체가 일어나죠. 소설이라는 게 그렇게 고정된 완결적 형식이 아니거든요. 소설은 과정의 형식이죠. 계속 엎어지고 전복해야 하는데, 너무나 완고한 틀과 형식에 따라 신인을 선발하는 제도는 아니라고 봐요.
요즘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들을 뽑는 기준이 아예 다 똑같아요. 특징도 없어요. 저는 그게 걱정이고 문학 발전의 저해요인이라고 봐요. 우리나라 등단 제도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아주 독특한 제도이죠. 글 쓰는데 무슨 라이선스가 필요해요? 무슨 영업허가서도 아니고.”
—현재 안식년 기간인데, 어디에 서재를 두었나요. 다음 책을 집필중인가요.
“아직 비밀인데, 저는 재미있는 (웃음) 장편소설을 하나 쓰고 있어요. 홍천에 있는 시골 오두막에 들어가 엎드려 있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