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충족한 환경에서 생활하니까 호강스럽게 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나라가 잘돼야 편하게 살 수 있는 거야.”
‘백수(白壽)를 맞는 심정’을 묻는 기자의 당돌한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한없는 온화함과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듬뿍 묻어 있었다.
1914년에 태어나 올해 백수를 맞은 국헌(菊軒) 이석희(李石姬) 여사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람이 백수를 맞는 일도 쉽지는 않을 터인데 이석희 여사는 정정하기까지 하다. 왼쪽 무릎이 잘 펴지지 않아 처음 자리에서 일어날 때 조금 불편한 것을 제외하고는 혼자 거동(擧動)이 가능하고, 손자·손녀·증손주의 이름과 생일은 물론이고 70~80년 전 상황에 대한 기억이 밝았다. 이뿐이랴. 자식교육에도 성공했다. 이 여사는 남편 고(故) 이종덕(李鍾悳)씨와의 사이에 주(駐) 핀란드·러시아 대사를 지내 ‘여성 1호 대사’ 타이틀을 얻은 이인호(李仁浩)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수출입은행 고문을 지낸 이선호(李善浩) 상지경영컨설팅 대표, LG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이문호(李文浩) 천안연암대 총장 등 6남매를 길러냈다. 한 세기를 살고 있는 이 여사는 요즘도 매일 신문을 꼬박꼬박 챙겨 읽는다. 인터뷰를 한 날은 마침 이석희 여사의 조카(88세), 조카 며느리(81세)가 한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참석자 셋의 나이 합이 269세, 참 보기 드문 광경이다.
시어른 버선, 베개가 예단
어르신들은 《조선일보》가 연재 중인 ‘부모의 눈물로 올리는 웨딩마치’에 대해 얘기했다.
이석희 여사의 얘기다. 인터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이 여사의 어투 그대로 옮긴다.
“요새 결혼 제도가 뭔가 잘못됐지. 예단이라는 게 언제 생겨서 이 난리인지 몰라. 얼마 전까지도 이런 건 없었는데 말야. 자식이 결혼하는데 사돈끼리 돈을 주고받는 건 천박한 거야. 우리가 혼례를 했던 때(1930년대)는 시어른들 버선을 준비해 갔지. ‘시집에 발을 담근다’는 뜻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정성껏 미싱질하고, 거기에 시어른들 쓰실 수놓은 베개가 전부였어. 친정에서 사돈 챙기는 게 어디 있어. 자기 딸한테 옷을 많이 챙겨 줬지. 저고리 30개, 여름 적삼 20개 이런 식으로 말야. 딸이 생전에 입을 옷을 시집으로 다 가져가라는 의미에서 딸 것만 잔뜩 챙겨 줬어. 신랑집에서는 다홍, 푸른 옷감에 청홍실을 둘러서 혼서지(婚書紙)랑 함에 넣어 보내는 게 전부야. 그러면 신부집에서 폐백음식 준비해서 시집가는 거야.”
―예단이나 혼수품은요.
“결혼식이 다 끝나고 나면 시어른이 며느리한테 해 주는 게 혼수인데 일반 가정은 아무 것도 없지 뭐.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던 시기니까. 잘사는 집은 모시 한 필, 금비녀 한 개, 장롱 같은 걸 줬는데 ‘내 집에 며느리가 들어오니까 내가 해 준다’는 식(式)이었어. 일반집에서야 아무것도 없는데 며느리도 못 받았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요즘처럼 죽어도 어떤 것을 받아야 한다가 어디에 있어. 혼례 때 술도 없었어.”
―혼례할 때 신랑 신부가 술 주고받는 거 아닙니까.
“노론댁에는 술이 있었다는데 우리 같은 소론 집안은 술이 없었어. 술도 있는 집이나 먹었던 건가 봐. 우리 6촌 시누이, 청운동 댁이 며느리를 볼 때 며느리가 술을 해 왔더래. 그걸 집안 어른들이 볼까봐 얼른 감췄다잖아. 전통이랍시며 요즘 하는 것들을 보면 전부 요새 식이지 옛날 거 없어. 옛날에야 물자(物資)가 귀했으니까 지금 같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혼례 치를 때 요새처럼 난리 떨지 않았거든. 시부모한테 ‘와이로’(뇌물을 뜻하는 일본어)가 어딨어. 애초에 아들 가진 집 부모가 조금 문제였다고 봐.”
―왜요.
“셋째가 군의관 갔을 때 중매쟁이들이 나를 졸졸 따라다녔어. 의사는 48평 아파트에 열쇠 3개 받는다나. 어떤 색시집에서 평생 먹을 걱정은 안 하게 해 줄 거라고 해서 내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했어. 중매쟁이가 사모님 같은 사람 처음 봤대(웃음). 신랑쪽 엄마가 아들 키운 값 받으려고 뭐 요구하고 또 신부집에서 하나가 얹혀지고 또 신랑집에서 얹혀지다 보니까 복잡해졌나 봐. 부모는 자식 키운 값 받으려 하면 안 되는 거야. 엄마가 자기 아들 아까우면 신부는 뭐 혼자 컸나.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다들 남들 생각을 좀 하고 살아야 해.”
옆에서 듣고 있던 이석희 여사의 88세 조카가 이랬다.
“요즘은 다들 내 자식 위하는 것밖에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아주머니(이석희 여사) 계신 앞에서 말하기 뭣하지만 살고 나니 별거 아니에요. 인생은 정말 꿈같은 거거든요. 요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왜 그렇게 심각하게 살았나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그냥 내 마음을 다스렸으면 지금 내 운명도 많이 달라졌을 것을. ‘죽을 때 철난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에요.”
1910년대 장례는 보통 5일장, 9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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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희 여사가 받은 졸업증서와 상장. 1930년대 초반 것들이다. |
“유교식이고 상가(喪家)에서 상주(喪主)들이 반드시 곡(哭)을 해서 조문했지. 하인들이 크게 울어서 곡성이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 법이었어. 보통 5일장, 9일장을 했어. 발인하기 전까지 여러 절차들이 있었다고 해. 요새처럼 사진을 모시는 대신에 ‘요요’라고 하는 작은 가마에 위패를 모시어 상여 앞에 세우고 상여 뒤에 상주랑 자손들이 줄줄이 행렬을 지었지. 여자들은 장지에 가지 않는 법이었어. 나는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집안 어른들한테 귀여움을 많이 받았어. 아버지가 늦은 나이(40세)에 나를 얻은 데다, 내 앞에 있던 형제들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떴거든. 내 이름에 돌석(石) 자를 쓰잖아. 어린 자식들을 모두 앞세워서 오래 살아야 한다고 돌석 자를 썼다고 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릴 적에는 이름이 이게 뭐냐고 했잖아(웃음). 아버지,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면서 나를 키웠지.”
이석희 여사에 따르면 그 시절에는 일반적인 여아(女兒)들을 혼자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더구나 이 여사가 다녀야 할 학교는 10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학교에서는 글을 배울 수 없었다. 대신 이 여사의 부친이 어린 딸내미를 앞에 앉혀 놓고 직접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여사의 부친은 조선 말기에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학자, 치재(恥齋) 이범세(李範世) 선생이다. 치재 선생은 조선왕조 말년에 정부 요직을 거쳤지만 권문세도가는 아니었고, 청백리를 자랑으로 여겼던 골수 소론 집안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여자들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어. 아버지한테 한문, 일어, 산수, 붓글씨를 다 배웠어. 분판이라고 하는데 물로 닦아 내고 쓰기를 반복했지. 우리 집으로 시집 온 새언니가 나랑 같이 배웠어. 나야 딸이니까 그렇지, 새언니는 시아버지 앞에서 글 배우기가 참 어려웠을 거야. 아버지 덕분에 나중에 서울 올라와서 학교에 들어갔을 때 수업 따라가는 게 어렵지 않았어. 일본 여자 선생 말도 다 알아듣고.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아마 아버지가 잘 가르쳐서 그럴 거야.”
1920년대, 양평에서 서울까지 3박4일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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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지금의 남영동 거리. |
“배 네 척에 짐을 싣고 양평에서 서울 오는데 꼬박 3박4일이 걸렸어. 배로 왔으니까. 요즘 같은 스피드 시대에는 상상이 안되지? 원효로 끝에 마포로 통하는 한강변 동네였어. 그때도 거기는 주택지였어. 뚝섬은 논밭이었는데 거기는 아니었거든. 강변에 수력발전소가 있어서 석탄 나르는 두레박이 공중으로 다니고, 발전하고 난 폐수가 폭포처럼 강물로 쏟아졌던 게 눈에 선해.”
이석희 여사는 서울 마포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고, 이후 숙명여자고등학교보통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마쳤다.
“지금 생각해도 열 받아. 보통학교에 갔는데 국어 시간은 일본어 시간이고, 우리말은 조선어 시간이라고 해서 일주일에 한 두어 번 배웠지. 일본 놈들한테 무슨 구박을 받고 산 줄 알아. 일본 놈들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그래. 일본 여자 선생들한테 수업 받고, 기미가요(일본국가) 부르고 살았지. 보자기로 책을 두루두루 말아서 옆에 끼고 학교에 갔어.”
옆에 앉은 88세 조카가 거들었다.
“우리 때는 더했어요. 일제 시대 말기였잖아요. 일본 놈들 말도 못하지 뭐. 그래도 보통학교 갈 때 엄마가 니꾸사꾸(등 배낭) 사 줬는데 아주머니 시절에는 그것도 없었나 봐요. 근데 그때는 이북 애들이 참 많았어. 기숙사에 태반이 이북 애들이었어요. 이북에 잘사는 애들이 많으니까 고등교육 시키려고 서울로 유학 보냈었나 봐요.”
이석희 여사가 말을 받았다.
“이북이 교육열이 더 셌어. 이북에 잘사는 집에서는 일본으로 유학 보내고, 아니면 서울로 오는데 이북서 오는 애들은 전부 기숙사 생활을 했지. 그런데 요즘 일본 놈들이 자기네 역사 인정 안 하고 그러는 걸 보면 여전히 화가 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없을지라도 자기네 역사는 알 거 아니야. 정신대 문제도 그래. 거기 끌려간 늙은이들이 죽으면 해결된다고 기다리는 거잖아. 멀쩡한 젊은 처녀들 취직시켜 준다고 꼬셔서 정신대 끌고가고.”
88세의 조카가 다시 말을 거들었다.
“예전에 시골 국민학교 옆에 천막 같은 가건물 세워 놓고 일본말을 가르치고 했어요. 가다카나를 왜 그렇게 시골 애들한테까지 열심히 가르치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걔들을 정신대 데려가려고 시킨 거 아닌가 싶어요.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애들한테 일본말 가르치면서 끌고가고 했으니까, 정말 나쁜 짓 많이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시절에는 시집들을 빨리 갔지요.”
이석희 여사의 얘기다.
“20살 전에 시집 간 사람도 많았지. 그때는 나라고사(고등사범학교 입학)를 최고로 쳐 줬어. 고시는 일본 가야 보니까 친일파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어서 꺼려했지. 내 남편도 고시를 보지 않고 은행가가 됐잖아. 그런 시절이었어.”
1930~40년대, 굶는 이가 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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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숙명고녀 입학 기념으로 친척들과 찍은 사진. 맨 오른쪽이 이석희 여사. |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별세계지. 요즘 같은 이런 세상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처음에 시집을 가니까 시조부모, 시부모가 한집에 사시고, 일가친척이 전부 근처에 있었어. 애들을 어떻게 키웠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애들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밑에서 보호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큰 애들이야. 내가 극성을 떤 것도 없고 공부하라고 한 것도 없어. 우연히도 학교에 넣으면 잘들 했지. 저희들이 잘 컸지. 나도 운이 좋아. 옛날 시집살이로 시부모에게 볶인 것도 없고, 고생 안 했어. 옛날에야 다들 일하고 살았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삼촌 꺼 옷이며 바느질했는데 다들 그러고 살았어. 손으로 다리미질하고. 우리가 죄업이 많아서 요즘 같은 세상에 못 태어나고 지긋지긋한 전쟁을 겪었나 봐.”
―1930~40년대에는 어떻게 먹고살았나요.
“조반석죽이라고, 아침에는 밥 먹고 저녁에는 죽 먹었지.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게 부족했어. 지주한테 바쳐서이기도 하고. 보릿고개라고, 그게 옛말 같지? 아니야. 얼마 전에도 그랬어. 보리가 나올 때까지 굶는 사람이 많았지. 우리 집은 부유하지는 않아도 다행히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어. 세상에 태어나서 배고픈 거 모르고 살았으니까. 우리 애들도 그래, 배고픈 거 몰랐으니 너무 염치가 없는 거라고. 굶는 이가 태반이었지. 간장, 된장 없는 집이 숱하고. 지금이야 무역해서 우리 땅에서 안 나는 것도 먹지만 옛날에야 그런가. 내 땅에서 난 것만 먹었는데 그나마 많이 안 나니까.”
―고기 구경은 하기 어려웠겠네요.
“부잣집이라도 밥은 실컷 먹는데 고기는 못 먹었지. 명절에나 고깃국 먹는 게 전부야. 고기는 농사 지어 먹을 수도 없는 거잖아. 아무튼 모든 물자가 그렇게 귀했어. 옛날에는 근검절약해서 부자가 됐고, 요즘은 부정축재해서 부자 되는 거 같아.”
이석희 여사는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기자의 손을 잡아 끌더니 “내가 이 날 이때까지 가장 잘한 점이 뭔 줄 아느냐”고 했다. 이 여사의 얘기다.
“내가 별로 잘한 것 없이 살았어. 개 중 자랑거리가 하나 있는데 음식 남기지 않는 거야.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랑 밥을 같이 먹으면 어른들 밥은 주발에 담기잖아. 아버지가 남길 것 같으면 주발에서 미리 밥을 한쪽에 덜어 내고 드셨어. 그게 몸에 뱄어. 내가 98년 평생 살면서 먹다가 버린 밥이 한 말이 되지 않을 거야. 애들 키울 때도 집에서 일 돕던 애들한테, 애들 먹다 남긴 음식 한 번 안 먹였어. 내가 먹기 싫은 음식이면 남들도 똑같을 거 아냐. 사람들이 위아래가 어디 있어? 요즘은 음식이 흔하니까 경로사상이 없어지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싶어. 우선 식탁이 달라졌지. 옛날에는 진지상이 따로 있었는데 이제는 다같이 앉아 먹잖아. 예전에 LA 갔더니 한 부인이 이런 얘기를 해. ‘어르신, 미국은 대통령이나 거지나 똑같이 먹어요. 햄버거 먹어요’라는 얘기를 듣고 웃었는데 우리도 비슷한 시기가 됐지. 그래도 어른들 좀 위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 때는 좋은 음식 생기면 으레껏 어르신 몫이었어. 근데 요즘은 자기 자식부터 주더라고. 많이 달라졌지.”
피란길에 흙벽에 바르려 신문지 챙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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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순 때 안방에서, 1983년. |
“갑자기 소란이 시작되더니 혜화동 명륜동 길거리가 인민군 세상이 됐어. 혜화동 사는 은행원 몇 댁이 우리 집에 피신하러 왔지. 애들은 영문도 모르고 지하실로 들여보냈고, 밖에서 포성소리가 났어. 그때 88세셨던 증조할머니는 왜 이리 밖이 소란하냐며 옛날 동학의병 같은 난리인 줄 아셨지. 이틀쯤 후에 우리 집에 있던 쌀이며 독에 있던 먹을거리가 싹 다 없어졌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지. 집에 있는데 느닷없이 인민군 한 명이 들어왔어. 키가 작고 어려 보였는데 비까지 흠뻑 맞고. 겁이 나서 찐감자를 주면서 먹으랬더니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 먹더니, 자기 고향은 길주라면서 울기 시작했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몸조심하라고 타일러 보냈지. 그 사람 나름대로 억지로 끌려나왔지 자의는 아니었나 싶더라고. 살아서 돌아갔는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네. 그 전쟁통은 보리밥과 공포의 나날이었어.”
그리고 얼마 뒤, 이석희 여사는 자식들을 데리고 부산 영주동으로 피란을 갔다. 졸망졸망한 아이들이 홍역이며 발진을 앓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고, 가는 길에 가방을 도둑맞기도 했단다. 부산 영주동 지점 숙직실 방에 임시거처를 정했는데 어른들은 앉아서 밤을 새우고 아이들은 굴비두름처럼 눕혀서 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것이 이 여사의 얘기다. 나중에 겨우 영도 산꼭대기에 방 하나를 얻어 피란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피란 갈 때 신문지를 들고 가는 사람이 많았어. 신문지가 참 유용했거든. 신문지를 깔고 자거나, 흙방 벽에 붙이면 흙냄새가 덜 났어. 그런데 문맹 퇴치가 되지 않아서 신문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시골에는 드물었고 또 신문 값도 비쌌지. 그러니까 신문지는 유용한데 구할 길이 없는 거야. 그러니 피란길에 챙겨 갈 정도로 귀했지.”
고모, 이모란 표현 원래 없어
1953년이 되자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의 폐허 끝에 다시 태어난 한국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그리고 상처도 남겼다.
“9·28 수복이 되어 살 만했는데 불상사가 튀어나왔지. 둘째댁 할아버님께서 중앙청 뒤 통의동에 사셨는데 수복됐으니 작은 어머니 모시고 온다고 갔다가 감감무소식이 된 거야. 이날 이때까지. 덕산 할머니 큰사위도 불상사가 났고 변을 당한 이도 여럿이고. 전쟁이 남긴 건 참혹했어.”
이 시대에는 언어 표현도 조금 달랐던 같다. 함께 자리한 88세의 조카는 이석희 여사에게 ‘고모’ 대신에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이모, 고모란 표현이 없었어. 이모, 뭐 이런 말은 상스러워했지. 그것도 요즘 생긴 말이야. 천안에 살면 천안 아주머니, 명륜동 살면 명륜동 아주머니, 사는 곳을 기준으로 이름을 불렀어. 형제지간은 언니라고 했어. 손위면 언니인 거야. 아들들끼리도 서로 그렇게 불렀지. 말이 바뀌는 것도 빨라.”
88세 조카가 거들었다.
“어찌 보면 사람의 머리가 물질 개벽을 못 쫓아가는 것 아닌가 싶어요. 요즘하고는 다른 게 하나둘이 아니지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녔는데 서울이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그때는 다니는 곳이 빤하니까요. 나중에 교통수단 발달하고 나서 보니까 서울이 이렇게 크더라고요.”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문맹률’은 상당했다고 한다. 이석희 여사의 얘기다.
“큰아들이 군대에 간 것이 1958년인데 하루는 편지가 왔어. ‘여기 와서 깜짝 놀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라면서. 시골에서 입대한 친구들이 글 못 읽고, 못 쓰는 걸 모른 거야. 촌에서 장가는 일찍 갔는데 색시를 두고 군대에 나왔다면서, 여편네한테 편지 좀 써 달라는 사람이 많더래. 그래서 서울 녀석들이 그 색시한테 ‘사랑한다, 보고 싶어 미친다’고 과장을 해서 편지를 써 주고 그런다는 거야. 그렇게 우스개소리도 하고 했어. 글 못 읽는 사람이 많았어.”
―우리나라는 발전 속도가 빨라서 1년 전만 해도 지금과 다르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모습의 기틀이랄까, 비슷해지기 시작한 때는 언제입니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부터지. 그때부터 좀 살 만하고, 부자들도 나오고 그랬어. 그 전까지는 뭐 형편없지. 냉장고가 어디 있고, 에어컨이 어디 있어. 여자들은 더우면 저 뒤편에 가서 등목이나 하고 그러고 살았지. 목욕탕이 있기는 했는데 쉽사리 갈 곳은 아니었고. 집에서 큰 통에 물 받으면 젤 위에 할아버지가 들어가 씻으시고, 그 다음에 아버지가 들어가고, 맨 나중에 애들이 들어가는 식이었지. 냉장고가 없어서 그랬는지 김치도 요즘 담그는 식이랑 달랐어. 김치를 담그고 사흘 만에 조기젓을 끓여서 식힌 국물을 또 부었어. 배추김치가 꼭 동치미처럼 물에 푹 잠겨 있었지. 독에서 오래가라고 그랬는지.”
편하게 지내는 것이 장수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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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희 여사에게 가장 애틋하게 남아있는 부친 치재 이범세 선생. |
“아버지가 별안간에 나 스물 일곱에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 아버지를 떠올리면 나이가 먹을수록 가슴이 벅차. 사랑 대청에 뒷짐 지고 무언가 생각하시던 모습도 떠오르고. 철 나서 알고 보니 나라 잃은 한(恨)을 씹어 삼키시느라 그랬던 것 같아. 하인들도 자식처럼 아끼고 글자 한 자라도 가르치려 하셨지. 어머니는 미인에 사교적이고 예의범절이 바른 분이었어. 아버지는 바둑 두시다가 객사하셨고, 어머니는 6·25 난리통에 돌아가셨는데 나는 나중에 알았어. 부모란 그런 건지, 나는 백 해 가까이 살아올수록 두 분 생각이 나.”
이석희 여사는 신식이었다. ‘스피드(speed)’며 ‘픽업(pick up)’ 등 영어 단어를 섞어서 말했고, 손아래 조카들이 얘기를 할 때에는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얘기를 이어 갔다. 대화 중간중간에 과자를 손에 꼭 쥐여 주시며 기자를 어린아이 대하듯 했다. 그럴 법도 했다. 이석희 여사의 6남매는 17명의 손주를 낳았고, 손주 17명은 지금까지 16명의 증손주를 낳았다. 이 여사는 “오늘 증손주 하나가 더 태어났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붓글씨에 재능이 많았던 그는 손녀들이 결혼할 때마다 ‘시집가면 지켜야 할 덕목’을 붓글씨로 정성스럽게 써서 전해 줬다. 증손주들이 돌 때 쓰는 머리 장신구를 직접 손바느질할 정도다.
“다들 충족한 환경에서 생활하니까 호강스럽게 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 점령했을 때 태어나서 오래도록 살았잖아. 그때 겪어 봐서 아는데 나라가 잘돼야 편하게 살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너무 까탈 부리며 살 거 없어. 요즘은 애들한데 너무 유달스러워. 옷에 침 한 번 흘리면 당장 갈아입히고 난리를 치고, 시댁이나 친정에 잠시 다녀가는데도 애들 옷을 이렇게 쌓아서 들고 다녀. 그런 것도 아이들한테 좋은 거 아냐, 결벽증에 걸리지. 너무 유난 떨면서 살 거 없어.”
―장수의 비결이 뭘까요.
“별거 없어. 그냥 소식(小食)하고, 편하게 지내고. 뭐 좋은 거 찾아 먹는 스타일이 아니야. 그냥 차려진 대로 먹어. 하긴 내 친구 중에 하나는 그렇게 몸에 좋은 걸 챙겨 먹었어. 남편도 안 주고, 애들도 안 주고. 근데 예순 조금 넘어서 저세상 갔어. 세상살이에 걱정 없는 사람은 없지. 그냥 나는 참을성은 좀 있어. 참고 참다 보면 또 지나가더라고. 옛날 사람들은 인고(忍苦)의 세월을 살아간다고 했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야.”
이석희 여사의 표정은 상당히 편해 보였다.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또 그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면서 그의 장수비결이 ‘편안한 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어떤 질문에도, 또 어떤 답을 할 때에도 꽤 편안해 보여서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몇 명의 지인이 이 여사에게 안부를 여쭙기 위해 다녀갔다. 그중 한 사람은 현대사 기록 때문에 이 여사를 10여 차례 인터뷰했는데, 곧 외국 유학을 떠난다고 했다. 이 여사가 작별 인사를 온 그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유학 잘 다녀와. 갔다 와서 다시 또 보자고. 나 그때까지 살고 있을 테니까. 혹여 멀리서 ‘그 할머니 죽었다’는 소리 들으면 그냥 웃으면서 행복하게 생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