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訪蘇 때 허담과의 회담 잘 대응해 YS 눈에 들어
⊙ 하나회 숙정으로 물러난 金振永 육참총장, “YS의 무한한 신뢰 보았는데…”
⊙ YS에게 김현철 문제 보고하자 견제 들어와, 결국 비서실장 물러나
⊙ 1997년 대선 당시 李仁濟 후보 사퇴 협상 추진
朴寬用
⊙ 74세. 동아대 정치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박사.
⊙ 국회 전문위원, 11~16대 국회의원, 남북국회회담 대표, 대통령비서실장, 국회 외무통일위원장,
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부총재·총재권한대행, 제16대 국회의장 역임.
現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
⊙ 저서: 《나의 삶, 나의 꿈 그리고 통일》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
《통일은 산사태처럼 온다》.
⊙ 상훈: 청조근정훈장.
⊙ 하나회 숙정으로 물러난 金振永 육참총장, “YS의 무한한 신뢰 보았는데…”
⊙ YS에게 김현철 문제 보고하자 견제 들어와, 결국 비서실장 물러나
⊙ 1997년 대선 당시 李仁濟 후보 사퇴 협상 추진
朴寬用
⊙ 74세. 동아대 정치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박사.
⊙ 국회 전문위원, 11~16대 국회의원, 남북국회회담 대표, 대통령비서실장, 국회 외무통일위원장,
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부총재·총재권한대행, 제16대 국회의장 역임.
現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
⊙ 저서: 《나의 삶, 나의 꿈 그리고 통일》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
《통일은 산사태처럼 온다》.
⊙ 상훈: 청조근정훈장.
“비서실장으로 누가 적당할 것 같소?”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하는데, 김덕룡 의원이 적임일 것 같습니다.”
김 당선자는 “김덕룡은 다른 할 일이 있어서 안 된다”면서 “당신이 하라”고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얘기였다.
“저는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저는 오랫동안 야당만 해와서 파괴는 할 줄 알아도 건설은 할 줄 모릅니다. 행정경험이 없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잘 알아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비서실장을 하려면 금배지를 떼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김 당선자는 헤어지면서 “잘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이 비서실장 제안을 거두어들일 눈치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 의논을 했는데, 대부분 비서실장직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친구인 최병렬(崔秉烈) 의원도 “꼭 맡으라”고 했다. 열흘 뒤 김영삼 당선자의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전병민씨에게서 연락이 와서 만났다. 그는 “당선자께서 꼭 시키려고 하니 수락하시라”고 했다.
보름 뒤 “상도동으로 오라”는 연락이 와서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김영삼 당선자를 만났다. 그는 “할 사람이 없으니 당신이 하라”고 했다. 내가 재삼 사양하자 그는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했다. 나는 “3일만 여유를 달라”고 했다.
며칠 후 친구들과 서교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방송에서 내가 비서실장에 임명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방적인 발표였다. 민자당 당사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나는 “청와대는 더 이상 권력기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北, YS-허담 회담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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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와 북한 허담의 모스크바 회동 사실을 보도한 1989년 6월 15일자 《조선일보》. |
나는 YS가 1989년 소련방문 때부터 나를 좋게 보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당시 YS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IMEMO(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면서 나를 수행원에 포함시켰다. 아마 소련 측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남북한 관계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국회통일정책특별위원장이던 나를 포함시킨 것 같았다.
소련에 도착한 후 YS가 나와 정재문(鄭在文) 통일민주당 국제위원장을 불렀다. 북한이 소련 측을 통해 만나자는 제의를 해왔으니,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하라는 것이었다. 첩보영화에서와 같은 접선과정을 거쳐 북한 측 안내원들을 만났다. 역도 선수같이 생긴 그들을 따라 한 건물로 들어갔다. 한순간 ‘이거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북국회회담에서 자주 보았던 전금진(일명 전금철)과 안경호였다. 그들은 “허담(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선생이 올 것”이라며 YS와의 회담을 제안했다.
우리는 회담의 절차와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북측은 “조선 땅에서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며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갖자고 했다. 우리는 소련이 YS에게 제공한 영빈관에서 비공개로 만나자고 했다. 전금진 등과 만나고 돌아온 후, 북측과의 접촉내용을 YS에게 보고했다. 비공개 회담을 하려면 기자들을 따돌려야 했다. 이인제(李仁濟) 대변인이 기자들을 데리고 회담 당일 서커스를 보러 가기로 했다.
YS, 허담의 獨對 요청 거부
가만히 생각해 보니 YS가 북한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남북국회회담에 참석했던 경험을 살려, 허담과의 회담 시 나올 수 있는 문제들, 즉 고려연방제, 주한미군, 남북대화 등에 대해 일문일답(一問一答) 식으로 답변자료를 만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나는 “북한이 반드시 배석자 없이 총재님과 허담 간의 단독회담을 제안할 텐데, 절대로 응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1989년 6월 6일 YS와 허담과의 회담에는 우리 측에서 나와 황병태(黃秉泰) 부총재가, 북에서는 전금진과 안경호가 배석했다. 내가 회담 내용을 기록했다.
허담은 먼저 “외군(外軍)이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얘기였다. YS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고 잘 대답했다. 이후 허담이 꺼낸 얘기들은, YS와 허담 간의 단독회담 제안만 빼놓고는 내가 예상한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회담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허담이 말했다.
“총재님, 저와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YS는 “2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더 할 얘기가 있겠습니까? 다음에 합시다”며 허담의 제의를 일축했다.
다음 날부터 기자들 사이에서 YS가 북한 측 인사와 접촉했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YS의 다음 행선지는 미국이었다. 비행기가 뉴욕에 도착할 무렵, 일부 기자들은 “YS가 권희경 주소(駐蘇)북한대사와 만났다”는 기사를 송고(送稿)했다. 더 이상 부정확한 보도가 나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결국 YS가 워싱턴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을 통해 허담과의 만남을 공개하기로 했다.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YS와 허담의 대화록을 정리해 보도자료를 만들었다. 워싱턴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복사점으로 달려가 보도자료를 복사했다. YS는 기자회견을 마친 후 자세한 내용은 내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함구한 데 대해 항의하는 기자들을 달래느라고 진땀을 뺐다.
아마 이 일이 있은 후 YS는 ‘박관용이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대통령에게는 그를 제대로 보좌할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YS, 언론의 인사검증에 즉각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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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2월 17일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민자당 총재실에서 박관용 비서실장 내정자의 인사를 받고 있다. |
비서실장으로서 사전에 그에 대비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변명 같지만, 대개 인사가 있을 때에는 민정수석실의 존안(存案)자료를 이용하는데, 거기에는 딸의 국적이라든가 부동산 문제 같은 세세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언론에 의한 인사검증이 전에 없던 일이어서 대비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일부 인사들이 하자(瑕疵)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 망설이지 않고 경질해 파문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야당 생활을 오래 한 대중정치인인 그는 언론에 민감했다.
사실 공직인사가 있은 후 이런저런 잡음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그늘일지도 모른다. 멀리 일제(日帝)시대부터 시작해 정치적 격변과 산업화의 과정에서 흙탕물이 튀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박양실 장관 같은 경우 부동산 투기 때문에 낙마(落馬)했지만, 사실 우리 집사람도 돈만 있었으면 그랬을 수 있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裁斷)하는 것은 무리한 일일 것이다. 공직인사에서 검증이 강화되면서, 공직에 나서려면 처신이나 재산문제에서 흠결이 없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내 친구’ 김진영의 전격 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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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정으로 예편된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
YS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나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제1분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분과위는 외무부·국방부·통일원·안기부 등을 관장했다. 나는 여러 사람에게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묻고 다녔다. 그때 만난 최(崔)모 예비역 중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나면, 나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나가서 싸울 거요. 총을 받으면 총알을 장전한 후, 먼저 하나회 장교들을 쏘아 죽이고 나서 북진(北進)하겠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하나회에 대해 아는 것은 《월간조선》 등에서 관련 기사를 읽은 게 전부였다.
“도대체 하나회가 어떤 조직입니까?”
최 장군은 “하나회가 군(軍)을 망쳤다”면서 하나회의 폐해를 낱낱이 얘기해 주었다. 위관(尉官)급 장교도 만났는데, 그도 하나회의 문제점에 대해 말했다. 나는 비공개적으로 김영삼 당선자를 만나 보고했다.
“군 내에 하나회라는 것이 있는데 아주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김 당선자는 “그에 대해서는 나도 잘 듣고 있다”면서 “그 문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논의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에도 나는 하나회 숙정(肅正)은 좀 더 시일이 걸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월 8일 김 대통령은 권영해(權寧海) 국방장관을 부르라고 하더니, 그 자리에서 “김진영 총장을 해임하고, 후임은 김동진(金東鎭) 장군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전격 해임된 김진영 장군은 나와 부산중학교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말했다.
“김진영 장군은 저와 절친한 친구입니다.”
“나도 알아요.”
“비록 하나회긴 하지만 유능한 군인이었는데, 만나서 식사라도 하면서 위로해 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습니다.”
얼마 후 김진영 장군과 시내 호텔 음식점에서 만나 식사를 같이했다. 김 장군이 말했다.
“해임 일주일 전 대통령을 뵈었을 때도 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하나회 숙정이 있기 전, 김영삼 대통령은 3군(軍)본부가 있는 계룡대를 방문해 김진영 육참총장 등과 조깅을 했었다. 내가 말했다.
“야, 넌 천상 어쩔 수 없는 군인이구나. 네가 정치인의 속을 어떻게 알겠냐?”
우리는 웃었다.
홍인길, “김현철에 대해 YS에게 말하면 큰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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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는 인사 간여 등으로 물의를 빚었다. |
나는 홍인길(洪仁吉) 총무수석비서관을 불렀다. 홍 수석과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얘기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가면 너하고 김 소장이 구속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고 말했다. 홍 수석은 부산중학교 후배여서 내가 편하게 말을 하는 사이였다. 홍 수석은 펄쩍 뛰면서 말했다.
“대통령께는 절대 김 소장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큰일 납니다. 김 소장에 대한 대통령의 애정이 대단합니다.”
그 후 6개월 정도가 흘렀다. 김현철씨와 관련해서 계속 불미스러운 얘기가 들려왔다. 그때의 일이다. 어느 공기업에 자리가 비어 경제수석에게 후보자를 복수(複數)로 추천하라고 했다. 하지만 경제수석이 올린 인사에는 한 사람만 올라 있었다.
“협의는 끝났습니까?”
“네. 끝났습니다.”
나는 유관 부처 장관과 협의가 끝났느냐는 의미였고, 그렇게 이해했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게 아니라 김현철씨와 협의가 다 됐다는 얘기였다. 나는 화가 나서 서류를 집어던졌다.
어떤 장관들은 공기업 인사 등이 있을 때면, 그들이 먼저 김현철씨에게 “고생하신 분들 중에서 배려해야 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김현철씨가 나서서 부정을 저지르거나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관들을 비롯해 권력 주변의 사람들이 김현철씨를 망친 것이다.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훗날 역사에서는 뭐라고 할까? 대통령비서실장은 그때 무엇을 했느냐고 하지는 않을까?’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가까이 지내던 한 언론인은 “김현철 문제는 형님이 대통령께 말씀드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대통령집무실로 올라갔다.
“대단히 어려운 보고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금 전국에서 김 소장을 통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얘기가 파다합니다. 각하의 통치에 누가 될까 걱정입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물러 나왔다. 일주일쯤 지나 김현철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께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까?”
‘어디서 얘기가 새 나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대통령과 종속관계에 있는 비서요. 비서가 모시는 분에게 한 얘기를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겠소? 김 소장은 각하와 부자(父子)간이니 아버지에게 물어보는 게 당연할 거요.”
성수대교 붕괴 후 실장 물러나
그로부터 열흘쯤 지난 후 정진홍(鄭鎭弘·현 《중앙일보》 논설위원) 실장보좌관이 말했다.
“참새떼가 실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정도 흐른 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이제 1차 개혁이 끝났으니, 빅3(총리, 비서실장, 안기부장)를 교체해 면모를 일신할 때가 됐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쓸데없는 소리 마라”고 일축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일어났다. 이원종(李元鐘) 서울시장이 사표를 제출했다. 후임을 물색해야 했다. 나는 민정수석실과 행정수석실에 인선기준으로 시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바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시정(市政)에 밝은 사람일 것과 사고 수습을 할 수 있는 토목(土木) 전문가일 것을 제시했다. 물러난 이원종 시장도 그런 뜻을 표했다.
그 결과 1순위로 추천된 사람이 우명규(禹命奎) 당시 경북지사, 2순위로 추천된 사람이 안상영(安相英) 전 부산시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명규 지사는 대학 1년 선배였고, 안상영 전 시장은 중학 동기동창이었다. 안상영 전 시장은 재산이 많은 편이었는데, 이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결국 우명규 지사가 서울시장을 맡게 됐다. 시장에 임명된 후 우 시장은 지인(知人)을 통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나를 만난 그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어쩌자고 나를 몇 달짜리 서울시장을 시키는 겁니까?”
다음 해인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관선(官選) 시·도지사들 중에는 지자체장 선거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명규 시장도 민선(民選) 경북지사가 되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추천한 게 아니다. 모두들 당신을 추천했다”며 달랬다.
그런데 얼마 후 언론에 “청와대 고위인사(나)가 우명규 시장과 친구여서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을 무리하게 추천했다”느니 “우 시장이 성수대교 건설 당시 담당 과장이었다”느니 하는 보도가 나왔다. 정부의 인사난맥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빗발쳤다. 대통령도 나를 조금 오해하는 것 같았다. 결국 우 시장은 11일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우 시장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다. 그해 12월 23일 단행된 개각에서 나도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났다.
이인모 송환과 北의 NPT 탈퇴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그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고 말해 보수층에 충격을 주었다.
대통령 취임 직후인 그해 3월 11일 정부는 북한이 오랫동안 송환을 요구해 온 미전향 장기수(長期囚) 이인모를 북(北)으로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그의 북송에는 한완상(韓完相) 통일부총리가 앞장섰다. YS 정부로서는 이인모 송환을 통해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정부로서는 단단히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핵(核)을 가진 자와는 손을 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YS 임기 중 남북관계가 개선될 가능성은 봉쇄되고 말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그런 반응이 북핵(北核)문제를 미(美)-북 간의 문제로 만들어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기회와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핵무장을 하겠다는 북한을 상대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해결방법은 한미(韓美)공조뿐이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초기에는 한미공조가 잘 이루어졌다. 하지만 시일이 흐르면서 양국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포괄적 접근을 포함하는 대화를 주장한 반면, 우리 정부는 강경론을 주장했다.
여론도 들끓었다. 북한에 대한 유화론에 대해 언론은 “잘못을 저지른 데 대해 처벌하는 대신 상을 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대중정치인인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이런 여론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94년 6월 미 국가안보회의(NSC)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결론은 군사적 옵션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 정종욱(鄭鍾旭)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관련 정보를 입수해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내가 국군통수권자로 있는 한 한국군은 한 명도 못 움직인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북한의 핵무장을 막아야 하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 또한 막아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딜레마였다.
1998년 9월 나는 워싱턴에 갔다가 1994년 당시 NSC 멤버였던 대니얼 포네먼 핵비확산담당 특별보좌관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94년 당시 미국은 한국에의 통고나 무력 집중, 한국 주재 미국인 피란 등 사전(事前) 조치를 취할 경우 북한에 공격 빌미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해, 그런 사전 조치 없이 바로 북한을 공격하려 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한편으로는 경악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운명이 이런 식으로 결정되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에 허탈했다.
YS, 김일성과의 회담에 자신감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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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과 만난 후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됐지만, 김일성의 죽음으로 무산됐다. |
이후 상황은 남북정상회담으로 급반전됐다. 정상회담 날짜는 7월 25일로 잡혔다. 각 부처는 정상회담 준비에 들어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나는 현안문제를 놓고 싸워서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다’고 자신했다. 김 대통령은 내게 말했다.
“남북 간에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나와 김일성 사이에 핫라인이 있어야 한다. 이번에 만나면 꼭 핫라인을 놓을 거다.”
“김일성이는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와 만나서 얘기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다.”
7월 9일 아침 10시, 서울 삼청동에 있는 남북대화사무국에서는 남북정상회의 준비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열렸다. 나를 포함해 이홍구(李洪九) 통일원 장관과 한승주(韓昇洲) 외무장관, 이병태(李炳台) 국방장관, 김덕(金悳) 안기부장, 정종욱 외교안보수석비서관 등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후 여직원이 이홍구 통일원 장관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북한방송이 12시에 중대방송을 예고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회의를 계속하면서 12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12시가 지난 후 다시 메모가 들어왔다. 김일성 사망!
우리는 바로 청와대로 달려갔다. 김영삼 대통령도 이미 보고를 받은 후였다. 대통령은 이병태 국방장관에게 전군(全軍)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이어 김 대통령은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논평은 청와대에서만 내겠으니, 정부는 따로 논평을 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청와대 논평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부실한 북한급변대책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체제가 곧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북한 붕괴에 대비해 정부에서 마련해 놓은 대책이 있다. 곧 보고드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안기부와 통일원에 ‘북한급변대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데 내 책상 위에 올라온 ‘북한급변대책’이라는 것을 보니 너무나 저급한 수준이었다. 수십 년간 통일을 외쳐왔고, 동구-소련 사회주의의 붕괴를 목격한 대한민국의 통일 준비 태세가 겨우 그 정도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나는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안기부와 통일원에서 만든 ‘북한급변대책’을 보니 도저히 대통령께 보고드릴 내용이 못 됩니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겠습니다.”
나는 안기부와 통일원은 물론 각 부처에, 북한급변 사태 시 부처 차원의 대처방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철도청과 도로공사, 한국전력에는 북한과의 철도·도로·송전선 연결방안을 연구하고 준비하도록 했다.
아쉽게도 나는 ‘북한급변대책’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비서실장을 그만두었다.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북한급변대책’을 보완하는 작업을 중단했다고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여론몰이에 능한 李會昌 감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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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관용 신한국당 사무총장과 이회창 대표. |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씨를 감사원장으로 임명하면서 “소신껏 하라”고 격려했다. 이후 이 감사원장은 성역(聖域)을 파괴하는 감사로 ‘대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쉬운 부분도 나타났다. 감사원법에 따르면 “감사원은 대통령에 소속하되, 직무에 관하여는 독립의 지위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과거 감사원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행상 청와대와 조율했었다. 이회창 감사원장은 이런 관행을 깼다.
1993년 8월 감사원이 율곡비리, ‘평화의 댐’ 건설과 관련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서면조사서를 보낼 때에도 청와대와 협의가 없었다. 이 사실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김 대통령은 “실장하고 의논이라도 했어야지…”라고 했다. 불쾌해하는 기색이었다.
안기부에 대한 감사발표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기부장과 만나 조용히 “이제 안기부도 감사원 감사를 받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면서 양해를 구하고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회창 감사원장은 감사 날짜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그는 여론몰이에 능했다.
李會昌 총리에게 국정 상황 자주 설명
때문에 그해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이회창 감사원장을 국무총리로 발탁한 것은 뜻밖이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UR(우루과이 라운드)협상에 따른 쌀시장 개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시절 수차례 “쌀시장 개방은 직(職)을 걸고 막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쌀시장 개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쌀시장 개방이 결정되자 서울역 앞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 큰 시위는 아니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이 문제를 방치했다가는 심각한 사회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다는 기미를 읽었다. 평생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를 해온 김영삼 대통령의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어느 날 김영삼 대통령은 내게 말했다. “어제 깊이 생각했는데, 총리를 바꾸어야겠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 김영삼 대통령이 “황인성(黃仁性) 총리는 참 훌륭한 분”이라고 얘기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럼 후임은 누굴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회창 감사원장이오.”
김영삼 대통령은 총리 경질 이유는 얘기하지 않았다. 착잡하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다음 날 UR협상 책임과 관련해 국무총리를 경질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은 인사를 통해 국면전환을 꾀한 것이다.
사실 국무총리는 청와대가 하는 일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국정(國政)현안에서 소외되다 보니 총리는 ‘대독(代讀)총리’, ‘의전(儀典)총리’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총리 공관과 비서실장 공관은 붙어 있었다. 뒷문을 통하면 1분이면 갈 수 있었다. 나는 수시로 총리 공관으로 찾아가서 이회창 총리에게 국정현안을 설명해 주었다. 이회창 총리도 무척 고마워했다. 어느 날 이회창 총리가 말했다.
YS, 이회창 총리 지시 보고받고 “당장 총리 불러요” 화내
“헌법에 의하면 국무총리가 내각을 통할(統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총리는 국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책임제 국가입니다. 총리가 내각통할권을 너무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통령과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십시오. 나도 돕겠습니다.”
“총리가 내각통할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정부조직법 개정안(案)을 낼 생각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정 그러면 실장은 빠지세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회창 총리의 생각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서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걸 보라”면서 서류를 건네주었다. 이회창 총리가 가져온 정부조직법 개정안이었다. 대통령은 냉소적으로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1994년 4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운영을 놓고 사달이 났다. 4월 21일 이회창 총리는 “정부정책은 내각의 논의과정을 거쳐 입안-결정돼야 한다”며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회부된 안건도 관계 장관이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회창 총리가 이런 식으로 ‘총리의 권한’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화가 났다. 4월 22일 아침, 김 대통령은 이회창 총리를 부르라고 지시했다. 내가 말했다.
“화가 나신 상태에서 총리를 부르지 마십시오.”
“어서 총리를 불러요!”
“화가 난 상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참으십시오.”
“당장 총리를 불러요!”
이회창 총리 사임 幕前幕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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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창 국무총리는 총리 권한 보장을 요구하다가 1994년 4월 22일 전격 경질됐다. |
“내가 ‘총리가 잘못했다’고 야단쳤어요. 그래도 사표를 내겠다는 소리를 안 하기에 ‘책임지라’고 했어요. 사표가 올라올 거요. 총리가 먼저 사표를 낸 걸로 해주기로 했으니, 밖에는 그렇게 발표하도록 해요.”
그날 오후 이흥주(李興柱) 국무총리비서실장이 사표를 갖고 왔다. 그러나 정식으로 사표가 올라오기도 전에 방송에서는 이미 이회창 총리가 사표를 냈다는 뉴스가 나가고 있었다. 이회창 총리의 사표 제출을 놓고 김영삼 대통령이 요구한 것이냐, 이 총리가 먼저 사표를 낸 것이냐, 논란이 있었다.
얼마 후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다. 시간이 난 기회를 이용해 서울 구기동에 있는 이회창 총리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나는 “두 분을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 두 분이 만나서 오해를 푸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귀국한 후 나는 김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이회창 전 총리를 불러서 칼국수도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누시지요. 어차피 퇴임 총리에게 훈장도 수여해야 하지 않습니까?”
김영삼 대통령은 내켜 하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 말씀드렸다.
“조금 있으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입니다. 이회창씨는 이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분인데, 김대중씨가 영입해서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우기라도 한다면 정부의 체면은 뭐가 되겠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DJ 측에서는 실제로 이회창 전 총리를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사람을 보냈었다고 한다. 얼마 후 김영삼 대통령은 이 전 총리를 청와대로 초치해 식사를 같이했다. 이어 1996년 제15대 총선을 앞두고는 이 전 총리에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겼다.
97년 대선 당시 이인제 후보와 협상 추진
이회창 전 총리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직후의 일이다. 지방을 돌아보고 온 이 위원장에게 내가 인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녀보시니 어떻던가요?”
“재미있었습니다. 할 만하더군요.”
사실 나는 ‘어휴, 정치가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습니다’ 같은 대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분이 이렇게 정치적인 분이었나’ 싶어서 내심 놀랐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는 수줍어하는 면모도 있었다. 1997년 대선(大選) 후보 시절 유세를 하다가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모두들 이 후보에게 주방 아주머니에게 가서 인사라도 나누고 오라고 했다. 이 후보는 주방으로 가다가 말고 다시 돌아왔다.
1997년 대선 당시 처음에는 이회창 후보의 승리가 점쳐졌었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기피 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판세는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회창 후보의 ‘대쪽’ 이미지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이인제 후보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대통령 선거일자가 가까워 오면서 이인제 후보 지지율이 한풀 꺾이긴 했지만, 그가 사퇴하지 않는 한 이회창 후보의 승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나는 한밤중에 이회창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인제 후보가 사퇴하지 않는 한 당선이 어렵겠습니다. 이인제 후보 사퇴를 놓고 저쪽과 협상을 벌여보겠습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제게 전권을 위임해 주십시오.”
이회창 후보도 동의했다. 나는 김운환 의원을 통해 이인제 후보에게 만남을 제안했다. 이인제 후보도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이인제 후보에게 당권이나 총리직을 제안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 이인제 후보는 나오지 않았다. 밤 1시쯤 김운환 의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인제 후보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요 며칠 동안 이인제 후보가 유세를 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이 후보는 당선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건 DJ 측의 공작이었다. 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표를 잠식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DJ 측에서는 DJ 지지자들에게 이인제 후보의 유세장을 찾아가고, 더 나아가 후원금까지 보내도록 독려했다고 한다. 이에 고무된 이인제 후보는 끝까지 완주했고 492만5000여 표를 득표했다.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 간의 표차는 39만 표에 불과했다.
대통령은 국회에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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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관용 국회의장은 국회의 예산·결산 심의 및 정책기능 강화를 위해 예산정책처를 신설했다. 2004년 4월 예산정책처 개청식에서 축사를 하는 박관용 의장. |
나는 국회의장직을 끝으로 정계(政界)에서 은퇴하겠다고 공언(公言)하고 한나라당 당적(黨籍)도 포기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입장에서 나는 나름 국회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국회법을 개정해 본회의 대(對)정부 질문 방식을 일문일답 식으로 바꾸었다. 국회의원들의 무책임한 폭로와 비방을 막고 국정에 대한 건실한 토론이 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국회의 예산·결산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2004년 4월 예산정책처를 신설했다. 예산정책처 설치를 착안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국회 전문위원으로 일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2002년 7월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후 김대중 대통령이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김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앞으로 국회시정(施政) 연설은 국무총리에게 대독시키지 말고 반드시 직접 나와서 해주십시오. 그게 국민에 대한 예의이고, 정치의 근본을 세우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동의했다. 그런데 그해 정기국회가 열리자 대통령 대신 김석수(金碩洙) 국무총리가 나타났다. 나는 김 총리에게 “미안하지만 연설문은 여기 두고 돌아가 달라”고 했다. 김 총리는 난감해 했고, 여야 원내총무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 그해 한번만 총리의 시정연설 대독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대신 총리의 연설에 앞서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시정연설을 직접 하지 않으면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실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 같은 TV프로그램에는 자주 얼굴을 내밀면서 정작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하는 시정연설에는 국무총리를 대신 내보내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국회가 대통령과 대등한 위치에서 국정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盧武鉉에게 “1년만 지나면 당신도 帝王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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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월 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만난 노무현 당선자는 청와대 생활 등에 대해 진지하게 조언을 구했다. |
노무현 당선자와는 1988년 그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가 부산에 선거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비행기 안에서 만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정치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때로는 돌출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똑똑하고 용기 있는 신인 정치인으로 좋게 보았었다.
노무현 당선자는 내게 ▲정치개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국회와 청와대의 관계 ▲남북한 관계 ▲청와대 생활 등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는 대통령비서실장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노무현 당선자는 내가 하는 얘기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가 말했다.
“의장님, 회고록을 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글쎄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메모해 놓은 것들은 있지만, 아직은 회고록을 쓸 생각까지는 없어요. 회고록 얘기는 왜 하는 건가요?”
“오늘 해주신 말씀은 정말 귀한 말씀입니다. 가지고 계신 메모나 회고록 원고를 제게 보내주시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무현 당선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내가 말했다.
“지금 당선자께서는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지만, 1년 후에는 제왕(帝王)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노 당선자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盧武鉉의 콤플렉스
“비서실·경호실을 비롯한 청와대와 장관 등 국정 시스템이 대통령을 그렇게 만들어요. 나라를 위해 봉사하려는 순수한 의지를 가진 사람도 제왕으로 만드는 게 이 나라의 시스템입니다.”
“저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려면 혀를 깨무는 각오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이번 임기만 마치면 정계를 떠날 사람입니다. 당선자께서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도록 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후의 일이다. 청와대에서 각계 요인들을 초청해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북핵문제, 한미관계 등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내가 말했다.
“대학 2학년 때 국제정치학 시간에 교수님이 ‘이 학문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국제정치에서 약소국은 언제나 강대국의 희생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모임을 끝내고 나오는데 문희상 비서실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대통령 앞에서 대학 얘기는 왜 하셨습니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노 대통령은 아직까지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병렬, “나라 꼬라지가 이렇게 되어 가는데…”
안타깝게도 노무현 당선자에게 ‘취임 1년쯤 지나면 제왕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 나의 얘기는 적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를 ‘82학번’이라고 자처하면서 1980년대 학생운동권을 방불케 하는 역사인식과 세계관, 기성질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친형과 측근의 비리는 감싸고 돌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은 참고 넘기지를 못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민주당을 버리고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2004년 제17대 총선을 앞두고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를 경고하자 청와대는 “중앙선관위 입장을 존중하지만 납득하지는 못하겠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국회는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기본적으로 김대업 등을 동원한 노무현 측의 네거티브 캠페인 때문에 2002년 대선에서 억울하게 패배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신당을 만들어 당을 깨고 나간 데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드디어 2004년 3월 5일 조순형(趙舜衡) 민주당 대표는 “3월 7일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측근비리에 대해 사과하고, 선거법 위반 발언에 대해 재발방지 약속을 하지 않으면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즉각 호응하고 나섰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탄핵공세에 대해 청와대는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맞섰다. 탄핵발의를 앞두고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는 서로 말을 놓는 친구 사이였다. 그가 말했다.
“탄핵발의를 하면 결과는 뻔한 일 아니겠나? 문제는 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해서라도 의결해 주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으니, 도와줘야겠어.”
“이봐, 최 대표. 이제 얼마 있으면 총선이야. 총선을 앞두고 이런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라 꼬라지가 이렇게 되어 가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無爲로 끝난 원내대표 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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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장 시절 여야 4당 원내대표와 산행(山行)길에서. 왼쪽부터 홍사덕, 박관용, 김학원, 유용태, 김근태. |
“이대로 가면 정치는 파국입니다. 우리 누구도 국가에 그런 짐을 지울 권리는 없어요. 파국만은 막아야 합니다. 우리, 진지하게 대화를 해봅시다.”
하지만 김학원 자민련 원내대표만이 동의를 표했을 뿐, 분위기는 냉랭했다. 나는 홍사덕·유용태 원내대표에게 “탄핵결의안 대신 대통령에게 경고결의안을 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소득없이 모임을 마치고 문을 나서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말이 없던 여야 원내대표들은 기자들 앞에서는 기염을 토하며 자기들 입장을 피력했다.
다음 날인 3월 9일 저녁, 야당의원 159명은 기어코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나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탄핵 논의가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전직 총리, 종교계 지도자, 지식인들을 만나 자문(諮問)했다. 하지만 그들도 나라 걱정만 할 뿐,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청와대에 대통령-야당 대표회담 제안
3월 10일 아침 나는 김우식(金雨植)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건 위험한 일이에요.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노 대통령에게 간곡하게 얘기해 주시오. 오늘 저녁도 좋고, 내일 새벽이나 밤도 좋아요. 노 대통령을 모시고 나오시오.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야 3당 대표들을 끌고나가겠습니다. 대통령께 꼭 이 말을 전해주시고 대답을 주세요.”
나는 하루종일 청와대의 전화를 기다렸다. 오후 5시가 돼서야 김우식 실장의 전화가 왔다.
“대통령님께서는 의장님의 뜻은 고마우나 지금 너무 지쳐 있어서 만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순간 ‘아, 이 사람들이 파국을 원하고 있구나’, ‘탄핵이라는 절망적 사태를 일부러 불러왔구나’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다음 날인 3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가졌다. 나는 의장실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TV를 지켜봤다. 야당 의원들도 함께 TV를 시청했다.
기자회견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은 회견문을 읽었다. 초미의 관심사인 탄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 언급이 없었다. 대신 이광재(李光宰) 비서관 등 비리혐의로 구속된 측근들에 대한 변명만 구구하게 늘어놓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입건된 형 노건평씨를 비호하면서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탄핵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이 나오자 마지못한 듯 “총선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고 정치적 결단을 내리겠다”고 답했다. 탄핵을 총선용 이벤트로 여기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TV를 시청하던 야당 의원들은 격분했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사태가 발생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 중 언급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3월 11일 아침부터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열린우리당 원로인 김원기(金元基) 의원이 의장실로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의장실을 찾아온 金元基 의원
“꼭 이래야 하는 거요? 의장께서 어제 청와대에 전화해서 협상을 주선했다고 하던데, 지금 다시 한 번 그런 거 해보면 안 되겠소?”
나는 김 의원이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라는 걸 직감했다.
“내가 어제 간곡하게 얘기할 때는 왜 안 들어줬습니까? 지금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슨 협상을 한다는 겁니까? 너무 늦었어요.”
김원기 의원은 “이래서는 안 되는데…”를 연발했다. 나는 김 의원에게 쏘아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경험이 적어서 그렇다 쳐도, 김 의원은 명색이 당내 원로면서 도대체 무엇을 한 겁니까? 이번 일은 당신들의 자업자득입니다.”
김원기 의원은 “허, 참”하는 탄식만 늘어놓다가 자리를 떴다.
그날 강용식(康容植) 국회사무총장이 아이디어를 하나 갖고 왔다. “탄핵소추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는 대신 법사(法司)위원회를 거치도록 해 정국(政局)을 냉각시킬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다. 원내 교섭단체들이 합의만 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야 모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의사봉을 쥐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파국을 막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워진 이상 의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의회주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나는 두 차례에 걸쳐 본회의장 의장석으로 가려 했으나,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저지에 가로막혔다.
그날 저녁 퇴근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이 의장실로 몰려들어 퇴근을 막았다. 내가 의장 공관으로 퇴근했다가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공관을 봉쇄해 다음 날 출근을 저지하는 상황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장실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인 3월 12일 아침, 나는 의장실에서 질서유지권(국회의장이 회의장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회경위들을 동원하는 권한) 발동여부를 고민하고 있었다. 갑자기 의장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같은 당 의원들과 함께 나를 만나기 위해 의장실로 들어오려다가 야당 의원들과 옥신각신하는 소리였다. 나는 “김 대표를 들여보내라”라고 했지만 야당 의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근태 원내대표가 돌아가 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비서에게 “김근태 대표에게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고 밖에서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하라”고 지시했다. 비서는 김 원내대표를 만나 내 뜻을 전했다고 보고했다.
열린우리당, 마지막까지 언론플레이
나는 ‘혹시라도 김 대표가 파국을 막기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하는 기대감에 김근태 원내대표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김 원내대표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뒤늦게 나는 그가 나를 만나러 왔던 것도 하나의 ‘쇼’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국을 막기 위해 의장을 만나러 왔다가 야당 의원들에게 저지당하는 그림을 보여준 후, 기자들 앞에서 “(탄핵안을 상정하면) 민란(民亂)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동하는 것으로 그가 할 일은 다한 것이었다.
파국을 막기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을 외면하면서 언론플레이만 벌이는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의 행태에 나도 화가 났다. 나는 의장석에 서서 사회를 보기로 결심했다. 오전 11시 나는 국회사무총장을 불러 질서유지권 발동을 지시했다.
이어 나는 본회의장으로 나갔다. 여야의 몸싸움으로 본회의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의장석으로 향하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는 경위들의 도움으로 여당 의원들의 저지를 뚫고 간신히 의장석에 설 수 있었다.
투표 결과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투표자 195명 가운데 193명의 찬성을 얻어 가결됐다. 대통령 탄핵안 가결 정족수인 187명을 넘는 압도적인 찬성이었다. 투표 결과를 발표한 후, 나는 말했다.
“이 불행한 사태는 여러분 스스로 초래한 자업자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대한민국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진해야 합니다.”
그 이후의 상황, 즉 카메라 앞에 선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눈물과 절규, 국회의사당 앞의 탄핵반대 시위대 같은 것들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방송의 편파보도였다.
방송은 탄핵안 가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의회쿠데타’로 몰아붙이며 국민들의 궐기를 선동했다. 거의 9대 1의 비율로 탄핵반대의 목소리만을 전했다. 내가 의장 공관에 도착하자마자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은 단 한마디도 방송하지 않았다.
방송의 편파보도에 경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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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3월 12일 박관용 국회의장이 국회경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탄핵안 가결을 선포한 후 소회를 얘기하고 있다. |
하지만 MBC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탄핵안 처리의 정당성을 강조한 내 이야기의 핵심부분은 하나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켜 의장으로서 괴롭다”고 한 부분만 나갔다. 방송 분량은 6초였다. 마치 탄핵안을 통과시킨 나도 후회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방송이었다.
탄핵안 가결을 규탄하는 촛불시위가 전국을 뒤덮은 가운데 그해 4월 15일 실시된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얻어 원내 과반을 차지했다. 한나라당은 121석, 민주당은 9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총선 후 한 달이 지난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일부 위반했으나 그 위반 정도가 탄핵의 사유가 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기각(棄却)했다.
우리 헌법상 탄핵소추권은 국회에, 탄핵결정권은 헌법재판소에 있다. 하지만 국회가 압도적 다수로 결정한 탄핵소추안을 헌법재판소가 그런 식으로 뒤집는 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내가 탄핵안 투표 때 의사봉을 잡았던 것은 누가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헌법과 법률에 반하는 행위를 한 대통령을 국회가 탄핵하는 것이 법치주의와 의회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탄핵사태가 대중선동의 무기로 역이용된 후, 이 땅에는 법률은 물론이고 헌법까지도 필요하면 깔아뭉개면 된다는 위험한 사고(思考)가 횡행했다. 여당이 다수를 차지한 국회는 다시 대통령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과거로 되돌아갔다.
남북국회회담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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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국회회담 예비회담을 마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는 국회 대표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관용 의원. |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은 대학 시절 통일운동 이래, 정치를 하는 동안 나의 일관된 관심사였다. 1985년 남북국회회담이 처음 시작된 이후 5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89년 국회 통일특위 위원장으로 재야운동권까지 포함하는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통일문제공청회를 열어 ‘한민족연합체통일방안’을 만들어낸 것은 지금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방안은 노태우 정부가 만든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5년여를 끈 남북국회회담은 본회담은 열어보지도 못하고, 11번의 예비회담만 하다가 끝났다. 의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우리와는 달리 북한에서는 수석대표인 전금진(전금철) 혼자서 준비된 발언만 했다. 발언 도중 메모가 들어오면 차석대표인 안경호가 먼저 읽은 후 전금진에게 넘겼다. 그러면 전금진은 메모에서 지시하는 바에 따라 태도를 갑자기 경화(硬化)시키거나 완화시켰다.
우리는 남북 간의 접촉과 교류를 우선시했고, 북측은 불가침선언이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그런 것은 입법부가 아니라 행정부가 할 일”이라고 얘기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세 번째 예비회담 때의 일이다. 판문점에서 만난 북측 대표 한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오기 전에 판문점의 과수원에서 풍성한 과실을 많이 먹고 왔습니다. 박 선생은 여기 오기 전에 무엇을 했습니까?”
“골프를 쳤습니다.”
“…”
내가 물었다.
“북에도 골프장이 있습니까?”
“많지요.”
“어떤 분들이 골프를 칩니까?”
“아, 그, 골프야 뭐, 선수가 치지 누가 치겠습니까?”
그는 골프가 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그를 보면서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통일의 공약수를 찾겠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北 한시해, “통일은 아주 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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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국회통일특위는 통일문제공청회를 열어 ‘한민족연합체통일방안’을 만들어냈다. |
“통일을 이야기하는데, 아주 쉬운 일입니다. 남쪽은 빈부(貧富)의 차가 심하지만 우리는 형평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선(線)을 그으면, 남쪽에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수치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백 보를 양보해도 우리보다 못사는 사람이 남쪽 인민의 절반은 될 것입니다. 통일문제를 놓고 남북이 국민투표를 한다면 우리보다 못사는 사람들, 즉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시위학생 100만명이 어느 쪽 편을 들겠습니까?”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북한은 역시 계급혁명에 기초한 대남적화(對南赤化)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평양에서 돌아오고 얼마 후 나는 어떤 노사(勞使)분규 현장을 보게 되었다. 노조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여러분, 어제 여러분은 무엇을 먹었습니까? 라면 끓여 먹었습니다! 사장은 무엇을 먹었습니까?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타고 출근했습니까? 콩나물 시루 같은 전철을 타고 출근했습니다! 사장은 무엇을 타고 출근했습니까? 벤츠 타고 출근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잤습니까? 꽁꽁 얼어붙은 냉방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사장은 어디서 잤습니까? 고급 호텔방에서 여자 끼고 잤습니다!”
그 선동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평양에서 한시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소름이 끼쳤다.
‘진보’에서 ‘보수’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보수(保守)’로 기울게 됐다. 남북국회회담 등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보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시절을 거치면서 운동권 출신이 정치를 주도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야당이 운동권에 끌려다니는 것을 보면서, 그 운동권의 일부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세력임을 확인하게 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내게 있어 정치는 책상 앞의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부대끼고 피와 땀을 흘리면서 키가 자란 한 그루 나무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생명이고 현실이었다. 그 생명의 나무는 자유라는 공기와 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였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토양 속에서 더욱 무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였다.⊙
| 취재후기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증언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의 우리 정치사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상이군인들이 목발을 휘두르며 야당 집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사찰과 형사들이 야당인사의 집을 감시하던 1950년대의 풍경에서부터 정치공작이 난무하던 19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서 문민정부로, 다시 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1990년대, 그리고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국회의장이 출현하고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소추하는 2000년대까지…. 개인적으로는 4·19 직후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이었던 박정희(朴正熙) 소장(少將)과의 인연(9월호)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시 언제나 민생부터 생각했었구나’ 생각했다. 박관용 전 의장은 대체로 거리낌 없이 옛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하지만 이회창 전 총리의 사임 당시 이야기나, 1997년 대선 당시 이인제 후보 사퇴를 추진했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분들에게 누가 되는 것 아니냐”며 망설이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안타까움이 많이 묻어났다. 박 전 의장을 인터뷰하는 내내, ‘옛 야당 출신 인사답지 않게 굉장히 실질(實質)을 중시하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말에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없었다. 정치개혁이나 통일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추상적인 당위론(當爲論)보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 실질적인 방안을 많이 이야기했다. 아마 젊은 시절 국회전문위원 등을 하면서 예산안 등을 많이 들여다보았고, 계보정치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自力)으로 입신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