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살 때 데뷔, 출연작 340여편 중 235편이 멜로물
⊙ 홍성기 감독,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 의사 이종구 등과 사랑 나눠
⊙ 전통형에서 벗어난 첫 현대적 이미지의 여배우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홍성기 감독,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 의사 이종구 등과 사랑 나눠
⊙ 전통형에서 벗어난 첫 현대적 이미지의 여배우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대중매체가 확장되면서 스타의 의미는 김연아, 박지성과 같은 스포츠 선수들에게까지 넓혀졌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녀를 능가하는 스타의 의미를 가진 인기인은 없었다.
그 이후 한국 영화계에 청춘 영화의 붐이 일면서 엄앵란, 문희·윤정희·남정임 등 트로이카 군단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도전해 왔지만, 그녀는 특유의 자존심과 승부욕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켜 냈다. 엄앵란은 스크린 콤비였던 신성일과 결혼하고 출산하면서 외모가 많이 변해 청춘의 이미지가 퇴색됐고, 트로이카 삼인방은 서로 극심한 견제로 누구 한 명이 김지미의 아성에 도전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할리우드에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최고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리즈(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애칭)가 청순미의 상징인 두 여배우 <로마의 휴일>(1953)의 오드리 헵번과 <초원의 빛>(1961)의 내털리 우드와 경쟁하면서 <애정이 꽃피는 나무>(1957)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1958)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 그녀 역시 <황혼열차>(1957) <별아 내 가슴에> (1958)로 영화팬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두 여배우는 영화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오랜 세월 유지해 왔지만, 가정적으로는 여러 차례 파경을 겪는 등 기복이 심한 삶을 살아온 점도 비슷하다. 심지어 그 상대가 그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던 유명인사들이었다는 점도 같다. 더군다나 에이즈 퇴치를 위한 운동에 앞장선 점도 공통적이다.
지난해 3월, 79세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리즈는 대표작 <자이언트>에서 함께 출연했던 동료 배우이자 친구인 록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리자 1985년 에이즈 퇴치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1991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에이즈재단을 설립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녀에게 2000년 버킹엄궁에서 데임(귀부인) 작위를 내렸다. 리즈는 지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에이즈 퇴치 기금 마련 행사에는 꼬박꼬박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의지를 보였다. 김지미는 한국에이즈연맹 후원회장을 지냈다.
두 사람에게 차이가 있다면 건강관리가 아닐까 한다. 리즈는 중년 이후 알코올중독과 싸우며 보행까지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등 처절한 삶을 보냈지만, 올해로 일흔한 살이 된 김지미는 평생 48kg(신장 160cm)을 철저하게 지켜 내며 나이를 뛰어넘는 건강한 삶과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정비석, “요부형의 여성”
김지미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매는 균형이 잡혀 시대와는 무관한 표준형 미인이다. 젊은 시절 그녀의 사진은 지금 들여다봐도 탄성이 나올 만큼 완벽하게 아름답다. 일자로 곧게 뻗은 긴 다리와 늘씬한 팔은 자신의 키보다 훨씬 커 보이게 만드는 착시현상마저 일으킨다. 젊은 시절 그 모습으로 지금 데뷔를 한다 해도 현재 어느 여배우에 뒤지지 않는 주목 받을 만한 아름다운 외모이다.
포토제닉한 그녀의 조그맣고 귀여운 얼굴은 화면 속에서는 올차고 여무지며 가끔은 교만스럽게 비치기도 한다. 1950~1960년대 스크린 속 그녀의 모습을 본 관객들은 이런 표현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소설가 정비석은 김지미에 대해 ‘당돌하고 오만하여 함부로 접근하기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뭇 남성들을 매혹하는 요부(妖婦)형의 여성’(《조선일보》 1966년 1월8일 자)으로 분류한 바 있다.
스크린 속에서도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희극보다는 곡절이 많은 운명적인 비극의 주인공 역을 주로 맡았다. 남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였던 것은 관능적인 요소보다는 내밀한 비애의 이미지였다. <장희빈>(1961, 정창화 감독) <요화 배정자>(1966, 이규웅 감독) <칠십칠 번 미스 김>(1963, 김기덕 감독) <잡초> (1973, 임권택 감독) 등에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30년이 넘는 연기생활에서 희극은 고작 6편밖에 안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지미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의 영화평론가인 우정식은 당시 활동하던 여배우들의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누었다. 최은희는 체취 계열의 배우(육감적 이미지를 이렇게 표현한 듯)로, 주증녀는 향토미의 배우로, 이민자는 생활 미각의 배우(따뜻한 아내형의 이미지)로, 김지미에 대해서는 젊은 미모계의 배우로 각각 평했다. 우정식의 평이 의미있는 건 ‘젊은 미모’라는 평범한 수식어를 쓰기는 했지만 김지미의 미모를 이전의 배우들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아름다움으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사실 김지미를 기점으로 여배우들의 외모가 보다 현대적인 이미지로 급속하게 바뀌어 갔다.
김지미의 미모가 세월의 흐름과 무관하게 남다르게 평가받는 것은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이다. 청순함이 묻어 나던 초기를 벗어나면서 그녀는 자신의 배역만이 아니라 영화를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의 작품들을 보면 이 말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사격장의 아이들>(1967, 김수용 감독) <메밀꽃 필 무렵>(1967, 이성구 감독) <대원군>(1968, 신상옥 감독) <너의 이름은 여자>(1969, 이형표 감독)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인기와 미모에 의존하는 배우’라는 항간의 비판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연기자로 재탄생한다.
그녀는 요즘 배우들이 보여주는 캐릭터 강한 배역보다는 감정표현에 중심을 두는 멜로드라마에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KMDb)에 따르면, 그녀가 그간 출연한 작품은 340여 편에 이른다. 그 가운데 액션 36편, 사극·시대극 34편, 추리물 9편, 희극 8편 등 기타 장르의 영화 100여 편을 제외하고는 235편이 멜로드라마라는 사실은 그가 ‘멜로의 여왕’임을 확인시킨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의 영화세계를 들여다보자.
김기영의 〈황혼열차〉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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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영 감독. |
덕성여고 3학년 재학 시절 집안에서 명동에 ‘배꽃’이라는 다방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들렀다가 김기영 감독을 만나 출연제의를 받았다. 당시 김 감독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영화계의 기인이었다. 그는 2년 전에 <주검의 상자>(1955)를 내놓고 다섯 번째 작품선정에 골몰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 작품이 바로 <황혼열차>(1957)이다.
김 감독이 불러서 영화사 사무실을 찾은 그녀를 본 제작자(동광영화사)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유보적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김 감독이 교복 대신 어른 옷으로 갈아입히고 시나리오 중 한 대목을 찍어서 보여주자 그제야 비로소 흔쾌히 승낙을 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출연을 계기로 그녀는 ‘김지미(金芝美)’라는 예명을 갖게 됐다.
<황혼열차>는 이광수의 소설 《애욕의 피안》을 임희재와 유호가 공동 각색한 작품이다. 김지미는 고아원을 경영하는 보석상의 딸 역을 맡았는데, 고아원 대리 경영자를 사랑하는 현대여성의 역할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가련한 모습과 대담한 연기로 관객들의 눈길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이에 김 감독은 김지미를 다시 내세워 <초설>(1958)을 촬영했고, 비슷한 시기에 박상화 감독도 <장미는 슬프다>를 촬영해 거의 동시에 개봉했다.
<초설>에서 김지미는 말더듬이인 남동생(안성기)과 살면서 밤이면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용산역 구내의 석탄을 훔쳐다 파는 처녀 역을 맡았다. 김 감독은 “이 역할을 그녀에게 맡기면서도 미모가 오히려 걸렸는데, 정작 촬영장에 나타난 그녀는 미리 석탄재를 바르고 캐릭터에 맞는 남루한 의상을 입고 있어서 놀랐다”는 말을 당시 언론매체에 하기도 했다. 김지미의 이런 열의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자막이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녹음이 조악해 흥행에 실패했다. 이런 결과는 <황혼열차>의 성공으로 더 전진하고자 했던 그녀에게 좌절을 안겼다. 그녀가 김 감독과 다시 일을 한 것은 10년이나 세월이 흐른 뒤인 1969년 <랜의 애가(哀歌)>부터였다.
홍성기 감독과의 밀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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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특무대(CIC) 본부에서 기록영화를 촬영하면서 김창룡 특무대장(왼쪽)에게 연출지시를 하는 홍성기 감독(오른쪽). |
<별아 내 가슴에>는 전체적으로 화면이 깨끗한 데다 한국영화의 결정적 흠이라고 여겨지던 슬로모션을 극복해 어느 정도 시원한 터치를 보여줬고, 자신의 나이대인 대학생 역을 맡은 김지미의 연기도 자연스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25일간 유례없는 장기흥행에 성공하면서 관객 13만명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웠다.
뒤이어 이들은 <산 넘어 바다 건너> (1958)도 만들었는데, 명콤비로서 연인관계가 된 이들은 이 영화의 상영이 끝날 무렵인 1958년 9월 11일 정오 서울 종로 동원예식장에서 결혼했다. 김 감독의 나이 서른한 살, 그녀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이들은 결혼 직후 <자나 깨나> <청춘극장> <별은 창 너머로> <비극은 없다>(이상 1959) 등 연이어 4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다.
그녀는 홍 감독의 작품 이외에도 최훈 감독의 <모녀>(1958)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와 <사랑이 가기 전에> (정창화 감독) <육체의 길>(조긍하 감독)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박종호 감독) <고개를 넘으면>(이용민 감독, 이상 1959) 등 2년 동안 모두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출연한 영화 중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작품은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와 <고개를 넘으면> 단 두 편뿐이다.
1960년대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신년 벽두부터 신정 대목을 노리고 국제극장에 간판을 내건 홍 감독의 <재생>(1960)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다른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한 다른 경쟁작들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홍-김 커플은 어느새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존재로 부각됐다. 이해에만 그녀는 자신이 출연한 최초의 활극인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감독)을 비롯해 14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최은희 vs. 김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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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빈>. |
이 영화는 신세대를 대표하는 젊은 춘향 김지미와 구세대를 대표하는 나이든 춘향 최은희의 대결이기도 했다. <성춘향>은 74일간 38만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끌어들임으로써 홍 감독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성춘향>이 대형화면에 성의 있는 고증으로 한국적 정서를 풍성하게 살려 놓았다면, <춘향전>은 어설픈 다이제스트로 극적인 악센트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김지미는 다행히 그 직후 개봉한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1961)에서 성공해 체면을 살렸다. 또 홍 감독이 <춘향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추석개봉에 맞춰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만든 <에밀레종>이 관객몰이에 성공하면서 김지미의 아성을 지켰다.
그녀는 장일호 감독의 <원술랑>(1961)과 <원효대사>, 최훈 감독의 <양귀비>, 권영순 감독의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등 사극에 나가 건재를 과시하는 한편 코미디물과 추리물에도 출연하며 장르를 넓혀 갔다. 홍 감독의 첫 액션영화 <대지의 성좌>(1963)에도 출연했다.
이즈음 김지미는 홍 감독과 사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화 한 편 출연료가 30만원(당시 집 한 채 값 300만원) 할 당시 600만원을 제작비로 대 주었지만 홍 감독은 재기에 실패했다. 그녀는 결국 1962년 딸을 홍 감독에게 주고 결혼 4년 반 만에 이혼했다. 그리고 <젊음이 밤을 지날 때>(1964)에서 재회할 때까지 그와의 모든 인연을 끊었다. 김지미가 출연한 홍 감독의 영화는 모두 13편이었다.
최무룡과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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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미와 최무룡. |
그녀는 재혼한 후 1963년에 들어서면서 연기패턴에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만 결혼과 출산, 이혼과 재혼이라는 인생의 큰 변화를 겪으며 몇 차례 성장통을 앓고 난 후라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면에서는 영화계 데뷔 동기인 도금봉과 후배인 최지희가 각기 <또순이>로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김약국집 딸>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연기성과를 거둔 것에 자극을 받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녀는 그간 유지해 온 ‘도도한 주연배우’의 이미지를 벗고 배역을 봐 가면서 출연하는 자세로 전환했다. 김수용 감독의 <혈맥>에서는 보조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큰 변화였다. <혈맥>은 해방 직후 남산 기슭 빈민가에 사는 실향민들의 궁핍한 삶을 리얼하게 그린 수작으로 김승호와 황정순이 이끌어 가는 영화였다.
1964년을 기점으로 그녀의 연간 출연작은 20편대를 넘어섰고, 1966년부터는 연간 30편대로 늘어났다. 그녀는 한국영화의 중심점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시선을 끈 네 편의 작품이 있다.
1967년부터 3년 사이에 나온 <사격장의 아이들>(1964, 김수용 감독) <메밀꽃 필 무렵>(1967, 이성구 감독) <대원군> (1968, 신상옥 감독) <너의 이름은 여자>(1969, 이형표 감독)가 이 작품들이다. 특히 동시녹음인 <대원군>에서는 대사를 거의 암기해야 할 만큼 어려움이 뒤따랐으나 매끄러운 성우 녹음 때보다 오히려 개성적인 연기빛깔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 영화로 그녀는 신영균과 함께 백상예술대상 주연연기상을 받았다.
<너의 이름은 여자>에서 한국판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주인공처럼 불륜의 아내 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김지미는 제15회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한 후 공허하게 지내던 그녀에게 때맞춰 찾아온 희소식이었다.
사실 1968년 말부터 영화계에는 두 사람의 이혼설이 나돌았다. 당시 최무룡은 영화 제작 등 사업을 벌이고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김지미는 사재를 털어 남편을 지원했다. 최무룡이 <피 어린 구월산>(1965)으로 감독 데뷔할 때도 그 뒤에는 그녀가 있었다. 김지미의 도움이 없었다면 최무룡이 <한 많은 석이 엄마>(1966) <나운규의 일생>(1966) <제3지대>(1968) 등의 거듭된 실패에 영화 15편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이로 인해 아내 김지미가 떠안을 여러 가지 부담을 덜어 주고 톱스타인 아내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며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명언을 남기고 이혼했다. 이 둘 사이에는 ‘밍크’라고 불리는 딸이 하나 있었고, 그녀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한국영화의 침체기 속 자리매김
김지미가 30대로 접어든 1970년대는 한국영화의 침체기로 분류된다. 이때부터 영화제작이 절반으로 줄었을 뿐 아니라 작품의 질도 떨어져 흥행 면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TV의 보급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도 줄었고, 검열도 심각해 창작의욕을 저해하던 시절이었다.
영화계가 이렇게 부진한 상황에서 1970년도의 제작편수가 사상 최다인 231편을 기록한 것은 미리 제작해 놓은 작품들이 뒤늦게 개봉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지미 역시 그해 36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록을 세웠다. 월 3편 꼴이니 매주 드라마 한 편을 찍는 수준으로 영화에 출연한 셈이다. 극심한 겹치기 출연배우였다.
하지만 출연한 영화편수는 이때를 정점으로 급속히 줄어들었다. 1971년 20편, 1972년 13편, 1973년과 1974년에 각 2편, 1975년에는 4편에 출연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잡초>(1973, 임권택 감독) <토지>(1974, 김수용 감독) <육체의 약속>(1975, 김기영 감독)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뚜렷한 변화 중 하나는 어머니의 역할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한 <잡초>에서 보여주는 내면적인 연기는 그녀가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다.
1976년부터 이후 6년 동안 김지미는 영화활동을 중단했다. 7살 연하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던 가수 나훈아와 약혼을 발표하고 동거에 들어간 이후 살림에 몰두하고 살았다. 당시 그녀는 영화계와 연락을 끊은 채 대전에서 ‘초정’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했다.
이 시기에 유일하게 출연한 영화가 변장호 감독의 <을화>(1979)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접신(接神)의 경지와 애욕을 넘나드는 관능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무렵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김지미는 나훈아의 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로 개종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2개월 후인 1982년 5월 결국 헤어지기로 공식 발표했다.
<화녀 ’82>는 <육체의 약속>에 이어 7년 만에 다시 이어진 김기영 감독과의 네 번째 고리이다.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정숙한 아내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임신한 가정부를 독살하려고 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줬다.
중년 이후 제2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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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미필름’ 창립작인 <티켓>. |
이런 현상은 영화의 대부분이 젊은 배우 중심으로 기획되기 때문에 중년 이후에 접어든 연기자가 비중 있는 배역으로 등장할 만한 스토리를 가진 영화가 드문 탓이기도 했다. <길소뜸>은 경륜 있는 노역 자체가 필요한 특별한 경우이고, <티켓> 등 그밖의 배역은 김지미가 제작자로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티켓>은 그녀가 1986년에 설립한 제작사 ‘지미필름’의 창립작으로, 국내에서 여배우 출신으로는 최초로 영화제작자 1호 여성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비록 여건은 안 좋았지만, 그녀는 후반기 7편의 영화 속에서 ‘새로운 김지미’를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삭발 투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동안 미국에 머물다가 <외출>에 출연한 이후 다시 연기욕이 살아난 김지미는 태흥영화사가 의욕적으로 제작하는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송길한 극본)에 캐스팅돼 의욕을 불태웠다. 50대 중반에 이르러 모처럼 만난 대작의 기회라 삭발까지 감행했던 그녀에게 뜻밖의 좌절이 찾아왔다. 불교계에서 제작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비구니>가 종교를 세속화하고 비구니를 모독하는 외설적인 내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는 김지미의 신상문제까지 거론했다.
이런 압력에 굴복해 결국 제작중단 사태에 이르렀다. 그녀로서는 장차 자신의 연기생애를 빛나게 했을 중요한 작품을 잃어버린 셈이다. 이 부분은 아직도 그녀에게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다.
말년의 투혼
<비구니>에서 좌절한 팀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 <길소뜸>(1985)은 이런 서운함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민족상잔의 비애를 이산가족의 관점에서 투시한 이 작품에서 그녀는 <이별>(1973, 신상옥 감독) 이후 12년 만에 신성일과 만났다. 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중년의 모습으로 눈에 띄는 내면연기를 보여줬다. <티켓>에서도 그녀의 연기는 훌륭했다.
스토리는 항구와 일부 지방에서 성행하고 있는 티켓제 매춘행위를 그대로 노출하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인데, 그녀는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으로의 복귀가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민 마담 역할을 맡았다.
<추억의 이름으로>(1989)도 그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재벌 기업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야심 많은 상속녀(심혜진)를 뒤에서 움직이는 재벌그룹 여총수 역할을 맡아 악역에 도전했다. 그는 이 연기로 제27회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주연의 자리를 내놓고 조연의 자리로 물러서서 받은 상이라는 점에서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아낌없이 주련다>(1989)에서는 남편의 제자였던 연하의 청년(이영하)과 사랑에 빠지는 미망인 역할을 맡았는데,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농도 짙은 베드신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녀의 가장 최근작이면서 마지막 제작·주연작이기도 한 <명자 아끼꼬 쏘냐>(1992)는 명자라는 젊은 여자가 역사의 고비마다 아끼꼬, 쏘냐로 이름을 바꿔 가며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통해 한국의 근대사를 재조명한 작품이다. 그녀는 자신의 본명인 20대의 명자에서부터 80대의 쏘냐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열정적으로 연기했다. 작품성은 뛰어났지만 관객들은 50대를 넘어선 그녀가 20대의 명자에 도전한 것은 무리한 설정이었다는 비판을 하면서 외면했다.
4번째로 ‘명예의 전당’ 헌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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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미는 2010년 ‘연예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영화 행정가로 변신하여 1995~2000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여장부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2010년 10월에는 한국영화인복지재단(이사장 정진우)에서 선정하는 명예의 전당에 ‘화려한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헌액되었다. 명예의 전당에는 고 신상옥 감독, 고 유현목 감독, 배우 황정순에 이어 네 번째로 올랐다.
김지미는 현재 미국 LA에서 딸들과 손자들과 함께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배우로서 ‘은퇴’를 한 것은 아니다. 좋은 작품이 나오면 언제든 카메라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여배우로 자신을 지키고 있기도 하다. 윤정희가 66세에 <시> (2010, 이창동)로 세계영화제를 흔들었듯, 김지미 역시 나이에 걸맞은 작품이 나오면 다시 스크린에 멋지게 컴백할 날이 돌아올 것이다.⊙
[인터뷰] 김지미
“어린 남자, 나이 든 남자 다 살아 봤지만 남자는 어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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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조선일보 DB |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특출한 미모로 남다른 인생을 살아온 그녀의 이력은 화려하다. 영화배우로서 3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시카고영화제 세계평화메달상 등 국제무대를 누볐고, 대종상 여우주연상도 수차례 받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개인적으로는 각 분야에서 최고를 기록하는 남성들과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으로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키면서도 흔들림 없는 여장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길소뜸>(1985)과 <티켓>(1988)으로 서로의 대표작을 만들어 준 임권택 감독은 “보통 여자들이 남자에게 선택돼 결혼을 하고 결혼 후에는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느낌을 받는데, 김지미는 자기가 남자를 선택했고, 또 결혼했다고 해서 남자한테 종속되는 삶을 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 여배우 시리즈의 첫 회는 김지미씨이다. 한국 여배우를 대표하는 존재인 그를 뒤에 두고 다른 배우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2월 초, 미국에 있는 김씨와 국제전화를 통해 인터뷰했다.
밤참 꼭 먹으면서도 평생 48kg 유지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딸하고 손자 손녀와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직접 살림을 다 해요. 평생 살림을 못해 봤잖아요? 그런 것 안 하고 일만 하고 다녀서 가족이 뭔지, 살림이 뭔지 모르고 살다가 모든 걸 털어버리니 편하고 행복해요.”
―가족들 이외에는 안 만나나요.
“내가 있는 곳이 LA인데, 코리아타운에서 거리가 있어요. 그래서 한국사람 많지 않고 스트레스 받는 일 없어요. 남이 많이 알아봐 주는 것이 고맙고 즐거우나 너무 알아보면 피곤해요. 미국에 친구도 많아요. 새로운 사람 사귀는 것보다는 알았던 사람들과 만나는데, 영화제작에 참여한 사람들 40~50명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봐요. 개별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한 달 한 번 정도는 만나지요.”
―영화와 관련된 일은 전혀 안 하나요.
“그냥 과거의 영화인들이니까 과거동료로서 만나는 것이에요. ‘지미필름’도 영화인협회 이사장 할 때 접었어요. 부정 방지하는 차원에서 협회의 장(長)은 영화사업 못하게 돼 있어서 그때 간판 내렸어요. 공직이나 마찬가지라 이권에 관계된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그랬어요. 그러곤 연임을 했지요.”
―가끔 매스컴에 모습을 보여주는데, 나이가 들어 가면서도 여배우로서의 관리는 철저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비결이라도.
“저는 성장 후 160cm, 48kg을 평생 유지하고 살아왔어요. 그래도 따로 운동은 안 해요. 5시면 일어나서 뉴스와 책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아이들 학교 가면 봐주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한 가지 음식 먹는 습관이 좋지 않아요. 평생 야간촬영으로 밤참 먹는 습관 있어서 그게 안 없어집디다(웃음). 어디 가서든 흐트러지지 않게 꼿꼿하게 다리를 45도 각도로 붙이고 앉아 있는 것도 지켜 온 버릇이에요. 무엇보다 부모한테 체질을 잘 물려받은 것 같아요. 소일거리로 가끔가다 아이들과 걷고 고스톱 치며, 그렇게 살고 있어요.”
―덕성여고 재학 당시에 연예계 데뷔를 했는데, 지금은 흔한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파격적인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가족들이 반대를 많이 했지요. 그때는 예술 쪽으로 나간다면 누구나 다 반대하는 시절이었으니까요. 제가 하려고 할 때도 상당히 반대했었기 때문에 그냥 저 혼자 결정해서 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데뷔를 하게 됐나요.
“제가 덕성여고에 다닐 때인데 저희 작은어머니가 명동에서 다방을 크게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하고 작은엄마를 보러 명동에 가는 길이었는데, 김 감독님이 저를 보셨는가 봐요. 그 길로 광화문에 있는 저희 집까지 따라오셔서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가족들과 상의를 해 보니 결론이 나질 않아서 제가 며칠 고민 끝에 결국 출연하게 되었지요.”
존 포드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 제의받아
―연기 공부는 어떻게 했나요.
“사실 데뷔해서 영화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출연했지요. 촬영 때 ‘이렇게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하나 보다는 식으로 했어요. 당시 18세인데, 요즘 같으면 연기학원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해서라도 영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TV 매체를 통해서도 많이 볼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TV도 없었을 때니까요. 그래서 당시 한컷 한컷 찍을 때마다 많이 쑥스러웠어요.
제 입장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선배들이 촬영장에서 저를 지켜보는 일이었어요. 최무룡, 김진규, 윤일봉 선생님 같은 선배들이 모여서는 ‘김지미라는 배우가 하나 나왔다는데 어디 한번 보러 가자’고 한 거예요.”
―데뷔 이후 전성기를 홍성기 감독과 결혼하고 함께 일하면서 열어 갔는데, 남편을 떠나 홍 감독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홍 감독님하고는 <산 넘어 바다 건너>(1958)를 같이 하면서 만났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사실 제가 ‘홍성기 프로덕션’에서 하던 영화보다는 외부에서 하던 영화가 더 많았어요. 여기저기서 스케줄 안 준다고 난리가 났었으니까요. 그분은 다른 재주는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영화 만드는 재주만 가진 분이었죠. 굉장히 인간성도 좋으시고 성품도 좋으시고요.
제가 다른 영화를 촬영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홍 감독님 영화를 찍으러 왔는데,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니까 촬영을 중지시키고 쉬게 할 정도로 배려를 많이 해 주셨어요.
감독이자 프로덕션을 가진 대표로서 욕심도 부리고 그럴 만한데, 그런 것보다는 상대방 배우들이나 주위 사람들한테 따뜻하게 인정을 많이 베푸시는 분입니다.”
―1961년에 김 선생님이 출연한 홍 감독의 <춘향전>과 최은희 선생님이 출연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같이 개봉돼 <춘향전>이 대패한 일은 아직도 영화계에서 신화처럼 내려오는 일화인데요, 왜 그렇게 됐을까요.
“홍 감독님의 실패는 캐스팅에서 온 것 같아요. 저쪽 <성춘향>에서는 김진규 선생님이 이 도령 역을 했는데, 홍 감독님은 이 도령과 성춘향을 극 중 실제 연령을 많이 고려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 연령대 배우를 찾기 힘들었고, 거기에서 미스캐스팅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배우나 감독이나 한 작품 실패하더라도 그 다음에 재기를 할 수도 있는 거니까 당사자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난리라도 난 것처럼 과장되게 말하더군요.”
―1959년에 한국을 방문한 존 포드 감독으로부터 할리우드로 가자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더군요. 왜 무산됐나요.
“당시 존 포드 감독은 미국정부가 미군들의 실태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한국에 왔었어요. 그 작품에 제가 출연하게 되었는데, 영화를 찍고 나니까 괜찮은 배우라고 생각했던지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를 같이 해 보자는 거예요.
그때 저는 이미 한국영화를 떠나서는 안 되는 포지션에 있었기 때문에 할리우드라는 미지의 세계로 가서 어떤 대우와 보장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래서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모르지요. 그때 할리우드로 가서 잘됐으면 지금 여기 이러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요.”
“연기는 최무룡이 단연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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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의 약속> |
“저와 트로이카는 완전히 따로, 다르게 있었어요. 왜냐면 당시 저도 20대였지만 저는 2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폭넓은 연기를 소화했어요. 저는 역할을 다양하게 할 수 있으니까 많이 쓰인 거고, 그분들은 달랐지요. 당시 그 세 사람 간의 경쟁이 굉장히 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예를 들어 ‘문희한테 갈 일이 남정임한테 갔다’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저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1960년대는 한 해에 200편이 넘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한국영화의 중흥기이고, 그 중앙무대에 있었는데, 그 시절 엄청난 겹치기 출연을 했지요.
“사실 제가 가장 많이 했지요. 그때는 인기 있는 배우들이 몇 안됐거든요. 그 사람들이 그 많은 영화를 다 소화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남자배우들은 좀 나았어요. 수가 더 많았으니까요. 여배우들은 사적인 시간을 낼 여유가 전혀 없었어요. 심지어 어느 날 밤에는 12시까지 저기에서 찍고 그 이후부터 해뜨기 전까지는 또 다른 곳에서 찍어야 했으니까요. 다들 웬만하면 겹치기를 수십 편씩 하고 있을 정도였지요.”
―어떻게 그런 제작시스템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네요.
“지금이야 대형 메이저 제작사들이 재벌그룹의 지원을 받아서 제작하지만, 그 당시의 제작시스템은 정말로 가난한 제작사들이 지방 흥행사들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제작비를 마련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니 지방 흥행사들이 쓰라는 배우를 안 쓸 수 없었던 거예요. 말 안 들으면 제작비를 안 대주니까. 그분들의 선택에 의해서 제가 가장 많이 출연하게 된 거지요. 가장 많을 때는 34편까지 겹치기를 해 봤어요. 불가사의한 얘기죠.”
―필모그래피를 보니 TV 드라마는 한 편도 없습니다. 요즘 말로 로또 맞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CF도 단 한 번 출연한 적이 없던데, 이유가 있나요.
“한국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영화를 지켜줘야겠다는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에 다른 건 안 했어요. 영화관으로 관객 끌어들여야지 안방에서 앉혀 놓고 보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광고에 나서지 않은 건 어렵게 모든 영화인들이 만들어 준 이름을 쉽게 팔아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완강히 거절했어요. 했으면 돈이야 더 많이 벌 수 있었겠지요.”
―그러면서도 부(富)와 명예를 다 이룬 비결이 있으신지요.
“열심히 해 왔어요. 나한테 우선권이 있어서 한 작품이라도 더 좋은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어요. 영화계에서 그만큼 받들어 줬어요. 개런티도 늘 남보다 두 배 이상으로 최고 액수를 받았어요.”
―1970년대 작품을 보면 ‘스타 김지미’에서 ‘배우 김지미’로 변신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연기의 깊이가 달라지는데요. 1974년도에는 김수용 감독의 <토지>로, 그 다음해에는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으로 2년 연속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연기관에 변화가 생긴 계기라도 있었는지요.
“우선 저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작품이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 사실 상에 연연한 배우도 아닙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왔다면 그건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왔다는 것이지요. 한 영화에 같이 출연한 배우들이라 하더라도 파트별로 따로 찍을 때가 있잖아요? 그때도 저는 연기하는 다른 배우 앞에 꼭 앉아 주고는 했어요.”
―같이 공연한 남자배우 중 가장 연기를 잘했던 분은 누구인가요.
“그야 최무룡씨죠.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이야기인데, 연기는 그분이 제일입니다.”
―남편이었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았던 건 아니고요.
“상대방 배우를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어요. ‘많은 상대를 만나 봐도 제일 편한 상대는 역시 최무룡씨’라는 이야기는 여배우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에요.”
“배우 김지미를 이용해 다른데 기웃거리면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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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소뜸>. |
“저를 탄생시킨 김기영 감독님이지요. 작품을 많이 안 하셨지만 그분이 김지미라는 배우를 만들어 놨어요. 그분이 저를 제일 잘 아세요. 그분은 신인을 픽업하면 꼭 대배우로 만들어 놓는 대단히 훌륭한 감독이십니다.”
―1980년대 작업에서 <길소뜸>을 만든 임권택 감독이 선생님 연기에 대해 “비로소 목소리까지 찾은, 영화와 몸이 딱 붙는 순간”이라고 했는데요.
“저는 영화배우로나 개인적인 삶에서나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대신 가식이 없게 해요. 제 목소리를 예쁘게 변성한다든지 그런 게 싫었어요. 아시겠지만 저는 목소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제 목소리로 녹음을 할 수는 없었고, 옛날에는 후시(後時) 녹음으로 성우들이 예쁜 목소리를 넣어줬거든요. 그만큼 그 작품이 저한테는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고 베를린 영화제까지 갔다 오게 된 거지요.”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살면서 동시에 스타로서 자기 가치를 유지하며 사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여배우로서 갖춰야 할 배포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배우생활할 때 나 이상의 배우는 없다는 자신감으로 살았어요. 열심히 해 왔어요. 비굴하게 안 살고, 눈치 보지 않고 나한테 필요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했어요. 내가 필요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라도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로서 정치적으로 콜도 받고 여러 가지 있었지만 인기를 이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회의원 제의도 받았어요. 그 여러 가지 불신 속에서 내가 꼭 해야 할 이유도 없어요. 내가 배우 김지미로 사는 것이지 그걸 이용해서 다른 데 기웃거린다든지 넘나들면 배신하는 것이라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게 영화계에 빚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자신감과 책임감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남다른 선생님의 미모가 연기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
“항상 자신감이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그것인 것 같아요. 뭐든지 어디에 내놔도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에 실패를 잘 안 했어요.”
―그런 자신감이 외모에서 나온다는 말인지요.
“그렇죠. ‘나는 나고 너는 너다’는 마음이 있는 거지요. 수많은 여배우가 각자 서로 이름도 다르고 얼굴도 다른데 어떻게 나하고 똑같으냐, 나는 나다라고 생각했어요.
―삶의 원칙이 있다면요.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지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당당하게 하면 그게 나로서 모든 명성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작품을 꼽는다면.
“글쎄요. 좌절한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1984년 <비구니>를 만들 때, 여배우로서 작품이 타의에 의해 못하게 될 때 많이 당황했어요. 제작이 중지되고 나서 정신적으로나 여배우로서 좌절을 느꼈고, 그 충격이 꽤 오래갔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별 영화가 다 나오지 않습니까? 요즘에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들을 보니까 일반관객에게 자극만 주는 그런 영화가 많이 나오더군요.
그 작품이 완성됐으면 한국영화 역사에 길이 남는 작품이 됐을 거예요. 임권택 감독님과 정일성 촬영감독님이 함께 오랜 시간 아픔을 느끼면서 많이 방황하고 다녔어요. 강원도로 어디로 셋이 여행 다니다가 <티켓>을 만들게 된 거예요. 그거 하면서도 심의가 안 떨어져 굉장히 고통받았어요.”
“결혼은 가장 편한 사람과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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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미씨는 1991년 서울 중앙병원 심장센터 소장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지만, 10년 후 이혼했다. |
“남자는 다 어린애예요. 불안하고 부족한 존재지요. 여자들이 모성애로 감싸니까 사는 거지. 내가 어린 남자, 나이 든 남자 다 살아봤지만 남자는 다 똑같아요. 어린애예요.”
―특별한 사랑관이 있나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할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나한테는 그런 권리가 별로 없었어요. 왜냐면 가만 내버려 두질 않았으니까.
인간은 어떤 위치에서든 누구나 다 외로움이 있어요. 그럴 때 누가 조금만 거들어주는 척하면 마음이 움직이는 수가 있지요. 그런데 사랑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거든요. 추했을 때 어떻게 처리를 잘하느냐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 처세를 잘못하면 안 되고 그럴 경우에는 그 보상을 충분히 치러야지요. 저는 그런 것 다 경험해 봤기 때문에 비굴하게 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유명하고 파워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입니다.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 한다는 걸 제가 이 나이가 돼서야 깨달았어요. 집안 좋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 집에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지 마세요. 딸이 불행해져요. 제겐 조카가 서른두 명이 있는데 사람 외에 다른 것은 보지 말라고 말해요. 그 사람의 장래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요. 완전하게 갖춰진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완전하게 갖춰진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희생이 필요하니까요.”
―그곳에서 한국영화는 보고 있나요.
“최근에 <최종병기 활>(2011, 김한민 감독)을 봤어요. 우리 때 영화는 시청각 교육이었어요. 예술영화, 반공영화 그런 거 저런 거 다 경험했어요.
여러 가지 장르의 영화가 생산돼야 하는데 전부 흥밋거리에만 치중해서 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젊은 청소년들이나 아이들이 봐서 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유의 영화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게 많이 결여된 것 같아요. 흥행이 잘돼서 돈 벌겠다는 생각이 우선적이겠지만, 영화정책이 좀 정화돼야 한다고 봅니다.”
“배우에게 은퇴란 없다”
―한국에는 자주 나오나요.
“일 년에 한두 번은 왔다가는 편이에요. 여기서는 모든 것 다 털어버리고 편안하게, 꼴 보기 싫은 것 안볼 수 있어서 좋아요. 보고 싶은 사람만 볼 수 있거든요. 얼굴 비쳐 달라고 안 하니까 좋아요.”
―그래도 모든 추억이 있는 한국 땅이 그리울 때도 있지 않겠어요.
“한국 방송에서 어느 지방 기행 같은 것이 나오면 가 보고 싶어요. 그래서 지난해인가 나갔을 때 소설가 최인호씨와 수덕사에 갔다 왔어요. 제일 아쉬운 게 국내여행이고요. 한국 가면 가끔 봐야 할 사람들을 만나요.”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가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윤정희씨가 <시>로 세계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선생님도 영화에서 다시 모습을 뵐 수 있겠지요.
“좋은 작품이 나오면 그때 상황에서 고민하겠어요. 배우에겐 은퇴가 없어요. 10년 있다가도 할 수 있는 거고 20년 있다가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잠시 쉬는 거고, 나를 사랑해 줬던 국민들에게 가슴속에 남아 있으면 되는 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