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安澤秀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사상最大 규모 47兆원 보증지원… 올핸 성장 유망기업 보증 확대

  • : 김정우  hg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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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당시 14.5%까지 치솟았던 부실률, 지난해 금융위기 땐 4.4%로 막아
⊙ 知人 보증 청탁 거절했더니 “사람이 달라졌다”며 돌아서
⊙ “信保·技保 통합은 거의 물 건너간 일… 지역 갈등 해결할 대안 필요”
⊙ JP 존경해 딸 이름 JP 딸과 똑같이 지어… “DJP 연합 땐 원망 많이 했다”
⊙ 노사갈등 해결 위해 전국 109개 지점 돌며 직접 설득

安澤秀
⊙ 1943년 경북 예천 출생.
⊙ 경북고·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한국기자협회 회장, 보건사회부 공보관, 국민연금공단 재정이사,
    제15·16·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자민련 대변인, 국회 재정경제위원장 등 역임.
⊙ 現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이게 성적표입니다. 분야별로 정리해서 한눈에 볼 수 있죠. 임직원들을 위해 매달 만듭니다. 외부 홍보자료가 아니에요.”
 
  안택수(安澤秀) 신용보증기금(이하 신보) 이사장은 앉자마자 작은 종이 수첩부터 내보였다. 노란색 종이에 ‘통계수첩 - 2010년 3월 말 잠정분’이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종이를 펼쳐 보니 조직현황, 기본재산 현황, 주요실적, 보증부실 및 구상권 관리 현황 등 주요 수치로 가득 차 있었다.
 
  “신보는 수치가 생명입니다.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죠.”
 
  지난해 신보는 설립 이래 최대 규모의 신용보증 지원을 실시했다. 46조9000억원을 일반 보증으로 지원했고, 이 중 17조7000억원은 5만9000여 개의 신규 중소기업에 보증자금으로 지원됐다. 2009년 국내 중기대출 순증액은 총 21조1000억원이다. 이 중 41.7%인 8조9000억원이 신보를 통해 보증부 대출됐다.
 
 
  “信保는 중소기업 대신 빚보증 서는 곳”
 
  “쉽게 말해서 40%가 넘는 중소기업이 신보의 보증을 통해 대출을 받았다고 보면 됩니다. 이전 수치를 보면 2008년 전체 순증액 5조4000억원에 신보가 1조8000억원 지원했어요. 지난해 절대값과 비중 둘 다 큰 차이로 증가했죠. 모두 얼마나 치열하게 금융위기를 극복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안 이사장은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2008년 10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8개월 동안 ‘죽음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신규보증 금액이 5배 이상 폭증했고, 신규보증 공급 업체 수는 4.4배 증가했다. 신보 직원들은 급증한 보증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제가 2008년 7월 18일에 부임했습니다. 2달 후에 리먼브러더스가 부도났죠.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도, 우리 정부도, 신보도, 저도 그 여파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보는 우리 중소기업의 위기가 바로 피부에 와 닿는 곳입니다. 보증 수요가 늘기 때문이죠. 이사장 되자마자 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힘든 연말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서 1월이 되니 더 심각해졌어요. 앞이 캄캄할 정도로 보증 수요는 몇 배로 늘어났습니다.”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겠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일복이 많은 놈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신보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찬스라고도 생각했고요. 국회의원 생활하면서 IMF 사태도 지켜봤고, 그 과정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이사장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낙하산 인사’란 말이 나와 곤욕을 치렀는데요.
 
  “그냥 말 나온 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이 나왔죠. 한 일간지는 한 달 동안 18번이나 저를 낙하산 인사라고 비판을 했습니다. 불쾌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어요. 제가 국회에 있을 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7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간사도 하고 위원장도 했죠. 7년이나 지켜보고 공부한 사람을 앞뒤 모르는 사람이라고 폄하하고, 그냥 하던 대로 재정경제부 공무원 출신이 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아주 왜곡되고 편향된 시각입니다. 재경부 공무원들도 재정과 경제 정책에 관련해선 잘할지 몰라도, 여기 올 땐 신보의 ‘신’자도 모르고 와요.”
 
  ―재경부 공무원뿐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신보가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릅니다.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자금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은행에서 대출할 때 빚보증을 대신 서 주는 곳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은행은 기업에 대출을 줄 때 담보능력을 봅니다. 그런데 많은 중소기업이 담보능력이 부족해 대출을 못받죠. 그래서 신보가 보증을 서 주고, 수수료 1.2%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중소기업이 서로 보증을 받으려고 하죠.”
 
  신보는 신용보증기금법에 따라 1976년 특별법인으로 설립된 기금관리형 준(準)정부기관이다. 신용보증을 통해 중소기업의 금융을 원활히 하고 신용정보를 관리 운용해 건전한 신용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신용보증뿐 아니라 경영지도와 신용보험 등을 통해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출연금의 12~13배에 이르는 신용을 창출해 국가 경제의 선순환(善循環)구조를 유도하는 곳이다.
 
 
  작년 상반기에만 한 해 보증 총량의 73% 조기 집행
 
  특히 지난해와 같이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신보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많은 중소기업이 유동성이 부족해 위기를 겪게 되고, 신보의 보증이 그만큼 절실해지기 때문이다. 안 이사장은 “경기가 좋을 땐 기업인이 답답할 일이 없어 신보를 별로 찾지 않지만, 경제위기가 오면 보증기관의 역량이 커진다”고 했다.
 
  “은행들은 위기가 오니까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니 뭐니 하면서 다 빠지고, 기업 입장에선 돈이 필요한데 담보능력은 없고, 결국 찾아오는 곳이 보증기관밖에 더 있겠습니까. 위기 극복을 위해 한 해 보증 총량의 73%를 상반기에 공급했습니다. 그만큼 저희 직원들은 밤새워 일해야 했죠. 이사장으로서 직원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저는 이번 경제위기 극복의 1등 공신은 신보 직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증 규모가 큰 만큼 부실도 속출하기 마련이다. 보증한 기업이 파산할 경우 신보가 대위변제(代位辨濟·신보가 기업을 대신해 빚을 갚아 주고 기업에 대해 구상권을 갖는 일)를 하게 된다. 신보의 대위변제액은 2007년(7219억원)부터 증가해 지난해 1조3235억원을 기록했다.
 
  ―대위변제액이 크단 것은 보증이 무분별하게 이뤄졌다는 얘기 아닌가요.
 
  “신보의 대위변제 규모를 평가할 땐 ‘대위변제액’뿐 아니라 ‘대위변제율’도 함께 놓고 평가해야 합니다. 대위변제액이 지난해 크게 증가한 가장 큰 이유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입니다. 보증규모 자체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당연히 대위변제액도 증가했죠. 그런데 전체 보증잔액 대비 대위변제율은 오히려 줄고 있습니다.”
 
  신보의 대위변제율은 2007년 2.5%, 2008년 3.5%, 2009년 3.4%를 기록했다. 2010년은 3월 현재 3.3%다. 또 신보의 안정성 지표인 기본재산대비 보증운용배수는 8.1배를 기록해 적정운용배수 12배보다 훨씬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신보가 34년 동안 은행 대출 기업의 보증을 서 준 결과, 평균 부실률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5%, 굉장히 양호한 수치입니다. 미국 7%, 일본 9%, 태국 18%, EU 6~7% 등과 비교해 봐도 차이가 분명히 납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기업인이 양심적이고 신보가 운용을 잘한 덕분이죠. IMF 외환위기 당시 14.5%까지 치솟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 땐 4.4%대로 부실률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안 이사장은 부실률 증가를 억제한 요인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먼저 “보증 심사를 제대로 했다”는 것이다.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도 보증 건전성 관리를 강화했고, ‘퍼주기식(式)’이 아닌 ‘옥석(玉石)을 가리는’ 신중한 보증지원이 이뤄졌다는 평가다. 그래도 부실이 생겼을 경우엔 경영지도를 통해 기업 정상화를 도왔다.
 
 
  “知人들 청탁도 들어준 적 없어”
 
  셋째는 유동성에 대한 가(假)수요 현상이다. IMF 외환위기 때 호되게 당했던 기업들이 미리 대비를 했고, 가수요가 생긴 부분을 1년이 지나 상환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난해 11월부터 회복세로 돌아선 국내 경기의 영향이다.
 
  ―정부의 보증확대 정책으로 한계기업(限界企業·재무구조 부실기업)이 퇴출되지 않는 등 불안을 키운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지난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정부의 비상조치 계획에 따라 2009년 만기가 도래하는 보증의 전액 만기연장 조치가 실시됐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한계기업의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부작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작년 초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극심한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죠. 좌고우면(左顧右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제 1년이 지나 세계 경제는 점차 늪에서 벗어나고 있고, 한국은 G20 국가 중에서 가장 빠른 수준의 회복세를 보이고 있죠. 정부에서도 시장에 큰 충격이 없도록 비상조치 정상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에 대해 ‘생명연장식 보호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기업의 자생력을 저해해 국가경쟁력까지 약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신보도 한계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과 성장유망 기업에 대한 일시적 유동성 지원 등 제대로 된 ‘옥석 가리기’ 정책을 시행할 계획입니다.”
 
  전대미문의 금융위기 동안 ‘보증 청탁’도 거세게 들어왔다. 3선 국회의원 출신인 이사장에게 정치권 관계자와 지인들이 줄지어 찾아왔지만, ‘단 한 건도’ 부당한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사람이 달라졌네’ 하며 곤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죠. 직원들에게 항상 애국적 사명감에 입각한 공심(公心)경영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는데, 제가 어떻게 먼저 청탁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정당한 심사절차를 거쳐 보증지원을 받으라고 하고 거절했어요. 제가 이곳 이사장으로 있는 한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보증지원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의 보증지원을 한 신보는 올해도 확대 정책을 이어 나갈 전망이다.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추이를 주시하면서 정책 방향을 신축적으로 결정할 계획이다. 또 ‘선택과 집중을 통한 차별화 정책’을 추진해 부실률을 줄이고, 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에 기여하기 위해 창업기업과 고용창출기업에 대한 지원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우리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균형 있는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경영혁신형 기업, 설비투자 기업, 지방소재 기업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계획입니다. 하지만 작년과 경제 여건이 바뀐 만큼 보증운용 정책도 변화가 있어요.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시행했던 각종 특례보증을 중단하는 대신, 성장유망 기업에 대한 보증과 유동화(流動化)회사 보증은 확대합니다. 유보됐던 장기·고액 보증에 대한 선별적인 감축도 재개할 것입니다.”
 
 
  중·장년층 창업기업에 7000억원 보증공급
 
  ‘보증만기 연장조치’와 ‘보증비율 확대’ 등 비상조치들도 시장 여건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정상화된다. 한계기업에 대해선 시장 중심의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옥석 가리기’ 작업으로 확보한 보증지원 여력은 미래성장동력 및 일자리 창출 분야에 집중해 보증의 정책적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약 35조6000억원(미래성장동력 23조6000억원, 일자리 창출 분야 12조원)을 지원한다.
 
  “청년실업률이 10%를 넘어서고 있고, 중·장년층 실업 증가도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년창업기업, 40~50대 중·장년층 창업기업에 대한 보증지원을 확대해 총 1만 창업기업에 7000억원의 보증공급을 할 계획입니다. 이를 통해 약 3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 일반기업 중 고용창출기업에 대해서도 총 4000여 기업에 3조원 보증을 공급해 약 1만 개 일자리가 창출되도록 지원할 것입니다.”
 
  신보는 올해 1분기 동안 청년창업기업 2360개 업체에 847억원, 창업지원프로그램(중·장년층)을 통해 1423개 업체에 1324억원, 고용창출기업 2792개 업체에 1조5060억원을 보증지원해 이미 연간계획의 46%의 지원실적을 달성한 상태다.
 
  ―2000년대 초 벤처기업에 대한 무분별 보증으로 오히려 부실기업을 키운 사례가 있습니다. 최근 신(新)성장동력 산업분야 지원에 대해서도 같은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신성장동력 육성 사업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어렵고, 민간 대기업에 대한 특혜시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신성장동력 산업은 국가의 미래성장동력이자 일자리 창출의 ‘블루오션 산업’입니다. 신보는 이를 위해 미래성장동력 확충 분야를 명확히 설정하고, 강화된 보증심사 시스템과 리스크 관리에 기반을 둔 선별적인 지원을 통해 부실을 예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2001년 당시 벤처기업에 대한 무분별한 보증은 주로 기술보증기금(이하 기보)에서 한 겁니다. 기보는 이로 인해 다음해 파산지경에 빠져 정부 특별지원을 받고 소생했죠. 신보는 벤처기업보증을 하지 않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2008년 논란을 불러온 신보와 기보의 통합 문제는 금융위기 이후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의 시급성으로 인해 현재 논의가 유보된 상태다. 주요 업무가 중복돼 효율적 운영을 위한 통합 의견이 제기됐지만, 기보 본사가 위치한 부산 지역의 반대와 실무적 차이로 인해 현행 체제 유지에 대한 주장도 강하다.
 
  “사실 통합문제는 거의 물 건너간 것으로 봐도 됩니다. 신보는 본사 대구 이전 계획에 대한 정부 승인이 지난 1월에 났고, 기보는 부산 본사 신축 공사가 지금 한창 진행 중입니다. 물론 통합의 주체는 정부이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신·기보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통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대구와 부산의 지역 갈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렵습니다. 효율성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배경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적절한 대안이 제시돼야 하겠죠.”
 
 
  ‘사람 고치는’ 의사 꿈꾸다 ‘사회 고치는’ 정치인으로
 
  안 이사장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꿈은 의사였다. 명의(名醫)가 돼 아픈 사람을 치료하겠다던 생각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정치인으로 바뀌었다. 사람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회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께서 자유당 시절 군수(郡守)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민주당 들어서면서 하루아침에 그만둬야 했죠. 전 그때 고 2였는데, 공부도 제대로 못 하고, 먹고살기도 어려워졌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서울대 정치학과였다. 큰 꿈을 품고 입학했지만, 어수선한 정국은 그를 학교에만 두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시위현장에 나갔고, 그만둔 친구를 대신해 문리대 학생회장까지 지냈다. 1964년 한일(韓日)회담 반대시위 당시엔 현장을 온종일 누볐다고 한다.
 
  “밤새워 시위에 필요한 마네킹도 만들고, 직접 뛰어나가 데모에도 앞장서고…. 대학생활 4년 중 3년을 길거리에서 보냈습니다.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두 차례 당했고, 전국지명수배자도 돼 봤죠. 결국 경찰에 체포돼 구속영장도 청구됐어요. 3년 동안 공부는 안 하고 시위만 했으니, 저만큼 불행한 대학생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치인을 희망했는데 왜 신문사에 들어갔습니까.
 
  “당시 문리대 정치학과 출신이 갈 수 있는 분야는 딱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시험 봐서 공무원이 되는 길, 둘째 한국은행 입사하기, 셋째 신문기자뿐이었죠. 다른 직장에선 데모 많이 해서 머리 아프다고 해서 채용을 꺼렸습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공무원을 하자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고, 한국은행은 전공하고 너무 거리가 멀어 어렵고, 결국 남은 건 신문기자밖에 없었죠. 그래서 한국일보에 입사했습니다.”
 
  ―기자가 되고 나서도 정치인 꿈을 버리지 않았나요.
 
  “정치부 기자가 돼 보니 좋은 점이 많았어요. 당시 총리나 장관 같은 정계 거물급 인사를 직접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훌륭한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 꿈도 세상을 고치는 것이었고, 이런저런 분을 만나다 보니 본받고 싶은 분도 보였고, 그러다 국회의원이 돼야겠다 결심했죠.”
 
  안 이사장이 기자 시절 닮고 싶어했던 인물은 김종필(金鍾泌·JP) 전(前) 자민련 총재와 박준규(朴浚圭) 전 국회의장이었다고 한다. JP와는 총리와 출입기자로 만났고, 박 전 의장과는 공화당 출입 때 만났다.
 
 
  “JP 원망 많이 했다”
 
  “그때 박 전 의장은 정책위의장이었는데 정책에 대해 정말 해박했어요. 큰 인물이었죠. 김 전 총재의 경우 딸 이름이 ‘예리’였는데, 저도 첫딸 이름을 똑같이 ‘예리’로 지었습니다. 그만큼 존경하고 좋아했죠.”
 
  ―그 사실을 JP도 알고 있습니까.
 
  “누구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 처음 말하는 거예요. 사람 인연이 참 묘한 게, 그렇게 존경했던 두 분을 몇 년이 흘러 자민련에서 다시 만나게 됐죠. 그리고 하늘처럼 모셨는데, 결국 1997년 DJP 연합으로 돌아서게 됐고요.”
 
  ―연합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까.
 
  “당시 자민련 대변인을 했기 때문에 여러 정보가 오갔습니다. 몇 달 전부터 그런 말들이 있었고, 저도 이상한 낌새를 느껴 직접 물어봤죠. ‘DJP 연합에 대한 소문이 도는데 그럴 생각이 있느냐’고요. 그러니 펄쩍 뛰면서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연합 직전 한 번 더 물어봤는데 마찬가지 반응이었어요. 대통령 후보 시절 같은 차 옆자리에 앉아 이동하던 시절인데다, 전혀 아니라며 부인하기에 마음을 푹 놓고 있었습니다. ”
 
  ―결국 언제 DJP 연합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날 아침에 <조선일보> 보고 알았습니다. 당 대변인이란 작자가 나라를 뒤흔든 소식을 신문 보고 알았으니, 정말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습니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충격이 컸어요. 그렇게 가까이 모셨던 분이 한마디 말씀도 없이 행동에 옮겼으니, ‘내가 정말 못미더웠던 대변인이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어요.”
 
  대구를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이 DJP 연합을 따를 경우 정치인생이 끝나던 시절이었다. 충격과 원망으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자민련을 탈당, 한나라당으로 옮겼고, 김대중(金大中)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당시엔 그렇게 실망하고 원망을 많이 했는데, 요즘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그분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아요. DJP 연합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뭔가 이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죠. 정확한 내막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추측하고 이해를 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신뢰가 회복된 것은 아니에요.”
 
  안 이사장은 1997년 6월 자민련 대변인 시절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선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을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았다. “수우미양가로 하면 가, 점수로 하면 30점인 비참한 대통령”이라며 혹평했다.
 
  ―이후 3명의 대통령이 더 나왔는데, 지금 생각하는 최악의 대통령은 누구입니까.
 
  “당시 개인 감정보다는 당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3당 합당을 이뤄 놓고 쫓겨났으니 자민련으로선 그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은 공직에 있는 상황에서 전 대통령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최악은 말 못하겠고, 대신 최고를 말하자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 시절엔 학생운동을 하다 보니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독재자라고 생각했는데, 40~50년 정도 더 살아 보니 국민으로서 미운 점보다는 고맙고 감사한 점이 훨씬 큽니다.”
 
 
  適正, 適期, 適量, 3適정책
 
  ―국회의원 3선까지 한 후 공기관 이사장으로 오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2008년 3월 한나라당 공천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탈락이 됐습니다. 5월에 임기가 끝나고 이런저런 정보를 찾던 중 신보 이사장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됐죠. 정치를 계속하려면 4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앉아서 놀 수도 없고 해서 공직에 다시 나갈 결심을 했습니다. 마침 신보는 국회의원 하는 동안 재경위를 통해 정책질의도 하고 해서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응모했고, 11명 중 운이 좋아서 이사장이 됐죠.”
 
  ―국회의원 출신이 이사장으로 오는 것에 대해 기존 임직원들이 부담스러워하진 않았나요.
 
  “3선 중진 의원 출신이 오니까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노조에서 크게 환영했죠. 취임하는 날 노조위원장이 직접 참석해 축사까지 해 줬어요. 다른 기관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환영합니까.
 
  “노조와 좋은 관계는 유지하고 있지만,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공기업 선진화 작업까지 겹쳐 44명을 명예퇴직시키고 임금을 5% 삭감했습니다. 임금 깎고 사람 내보내는 데 찬성할 노조가 어디 있겠습니까. 노사갈등을 겪었던 지난해 9~10월 두 달이 취임 후 가장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안 이사장이 선택한 노사갈등 해결책은 ‘정면 돌파’였다고 한다. 법이 정하는 규정과 원칙대로 추진하고 어설픈 동의는 하지 않았다. 대신 전국 109개 지점을 모두 돌며 직접 노조원과 직원들을 만나 현실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결국 노조 내부에서도 끝까지 반대해 봐야 할 수 없다는 현실론이 대두했고, 투표를 시행한 결과 75% 찬성으로 결론을 짓게 됐다. 안 이사장은 공기업 선진화 과정에 대해 “수십 년 누적된 병폐를 바로잡는 일이었지만, 이사장과 노조위원장 모두에게 어려웠던 과정”이라면서 “정부는 선진화 추진 과정에서 합리성과 형평성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신보는 안 이사장 취임 이후 중소기업 금융지원 포상(대통령 표창), 준정부기관 경영실적평가 우수기관 선정(기획재정부), 공공기관 청렴도조사 우수기관 선정(국민권익위원회) 등 수상 성적을 올렸다.
 
  안 이사장의 경영철학은 ‘합리적 개혁’ ‘솔선수범’ ‘공심경영’으로 요약된다. 애국적 사명감에 입각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기업 경영을 신보에 정착시키고, 합리적 개혁 추진을 통해 실용성 있는 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특히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얻은 자신감과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신보 내부의 근본적 체질개선과 경영효율화를 남은 임기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가장 중심 업무인 중소기업 보증업무 처리는 ‘3적(適) 정책’을 강력히 실천하고 있다. 성장 유망한 적정한 기업을 선별하는 ‘적정(適正)’, 자금이 필요한 시기에 적절하게 지원하는 ‘적기(適期)’, 엄정한 심사·평가를 통해 적정한 금액을 지원하는 ‘적량(適量)’을 정리한 표현이다.
 
  “저는 인생 대부분을 공직자로 살아왔습니다. 기자도 어떻게 보면 공직이나 다름없죠. 그 말은 곧 국가와 사회로부터 빚을 많이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앞으론 그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뭐라고 딱 정한 것은 없습니다. 거창한 봉사는 아니더라도 제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해야겠죠.”⊙
 
  사진 : 서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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