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품과 생필품 일부 지원으론 한계
⊙ “공기 중 전염되는 결핵, 우리나라도 관리 부실”
金相煥
⊙ 1947년 경북 청송 출생.
⊙ 장로회 신학대학 졸업. 캐나다 장로교 목사.
⊙ “공기 중 전염되는 결핵, 우리나라도 관리 부실”
金相煥
⊙ 1947년 경북 청송 출생.
⊙ 장로회 신학대학 졸업. 캐나다 장로교 목사.
하지만 결핵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경제적 풍요로움을 어느 정도 피부로 느끼면서 결핵은 더는 우리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크리스마스 실 판매도 해마다 줄어들면서 2008년에는 발행한 실의 74%가 창고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3월 24일은 제28회 세계결핵의 날이다. 이날은 박테리아 연구가인 로베르트 코흐(독일)가 1882년 결핵균을 확인한 날로 유엔(UN)은 결핵 예방과 관리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이날을 세계결핵의 날로 지정했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결핵을 앓는 사람은 14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지난 2008년에는 3400여 명이 결핵으로 숨졌다. 우리나라의 결핵 발생률은 10만명당 90명꼴로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만난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김상환 본부장은 우리나라가 결코 결핵의 무풍지대(無風地帶)가 아님에도 너무나 관심이 적고, 정부의 관리도 부실하다고 말했다.
“20대 후반에 결핵 걸려 5년이나 투병”
올해 63세인 김 본부장은 풍채가 좋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178cm의 키에 몸무게도 90kg에 육박하는 당당한 체구였다. 그는 “지금도 건강만큼은 자신 있다”라며 웃었지만 1970년대 말 결핵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간 경험이 있다. 그런 병력(病歷)이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는 정말 건강했어요. 결핵에 걸릴 때까지는 감기 한 번 제대로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감기·몸살로 힘들어 하면 오히려 ‘야, 나도 감기 같은 거 한 번 걸려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정도였으니까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신학대학에 다시 진학했던 그는 1976년에 미국으로 신학공부를 떠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결핵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1975년 다니던 신학대학에서 간단한 엑스레이 검진을 받았습니다. 당시 의사선생님은 저의 몸이 정상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정밀진단을 받아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대로 했는데 몸에 결핵균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죠.”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소리였다. “당시 결혼을 앞둔 약혼자(지금의 아내)가 있었거든요. 결혼과 유학 둘 다를 앞두고 있었는데 그렇게 됐죠. 의사선생님은 폐가 아주 썩어버린 것처럼 나빠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구토와 설사를 하고 약간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신경외과에 가서 골수검사를 해 보니 결핵균이 뇌로 들어가 뇌막에 염증을 일으킨 결핵성 뇌막염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게 됐습니다. 1975년 12월이었는데 그때부터 쓰러지고 혼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가 안되겠다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뇌막염도 치료하기가 어려운데 결핵성 뇌막염을 치료하기는 더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더욱이 한 5개월에서 6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습니다. 식물인간으로 살지도 모른다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하더군요.”
외국에서 치료할 수 있을까 알아봤지만, 미국이나 일본, 네덜란드 같은 선진국들도 모두 한국에서 치료하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대답만 들었다고 한다.
“산다는 것을 거의 포기했죠. 인생에서 별로 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허탈했습니다. 머리에 통증은 계속됐고 그 통증을 없애기 위해 이마 한가운데나 머리 뒤통수에 진통제 주사를 맞기도 했습니다.”
증세가 계속되면서 김씨는 아예 빛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외부 소리를 듣기도 힘들었다. 삶의 의욕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한 봉사단체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방에 들어가서 검은색 켄트지로 빛이 아예 들어올 수 없도록 막고, 귀마개를 하면서 누워 지내기 시작했다.
“밤에도 누워 있었고, 낮에도 누워 있었으니,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였죠. 정신은 있는데 제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약혼녀가 번갈아 방으로 들어오셔서 미음을 떠 주면 겨우 먹곤 했죠. 어머니는 서른 살도 안된 아들이 그처럼 지내는 것을 보시고는 울면서 ‘제발 죽지만 마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이나 제가 다니던 교회 사람들도 다들 저를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렇게 5년을 보냈습니다. 결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때 알게 됐습니다.”
젊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부터 김 본부장의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기적이었죠. 1980년쯤 들어가면서 몸이 나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해서 어린아이처럼 걸음마도 할 수 있게 되자 이제 빛을 보고 살 수 있다는 소망에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간절한 기도가 기적을 부른 겁니다.”
몸이 회복되자 김 본부장은 신학교에 복학하고 오랫동안 수발을 들어 준 약혼녀와 결혼했다. 김 본부장은 그때부터 결핵환자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신학교를 마친 김 본부장은 대학과 교회에 종교학과 성서 강의를 나가다가 1988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교회에서 목사생활을 하면서 결핵 환자 투병상담도 했다.
한국에 본부 둔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설립
1999년 캐나다 국적을 취득한 김 본부장은 그해 한국으로 들어와서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를 세웠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던 지인들까지 참여해 서울에서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99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국제기구 본부가 하나도 없었는데 조국에 국제기구 본부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현재 본부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는 캄보디아나 한국 등에 있는 결핵환자들을 위해 치료약이나 휠체어를 공급했고, 2006년 이후부터는 약품과 함께 각종 생필품도 보내고 있다.
결핵은 공기 중으로 전염되는 병이며 환자의 침과 땀을 통해서도 걸릴 수 있다. 그런데 결핵에 대처하는 우리나라 시스템에는 적잖은 문제가 있다고 김 본부장은 지적한다.
“일반 환자들은 5~6개월 치료하면 깨끗하게 나을 수 있습니다. 결핵은 공기 중으로도 감염됩니다. 그래서 외국 같으면 결핵보균자와 5분 이상 얘기만 해도 전부 다 엑스레이를 찍어야 합니다. 과거 미국이나 일본은 결핵환자가 발생하면 격리치료를 했고 지금도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계속 환자를 추적해 관리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인권의 문제도 있고 해서 격리치료를 하지 않습니다. 또 결핵 환자가 일반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결핵약을 사 먹을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잠시 증상이 없어졌다고 판단되는 환자들이 완치되지도 않았는데 치료를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성이 생겨서 더 상태가 악화되기도 합니다.”
김 본부장은 결핵에 노출된 우리나라 20~30대 환자들이 특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20~30대 결핵환자 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가장 큰 요인입니다.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죠. 몸 관리 하고 다이어트도 해야 하고, 취업과 대입 준비로 스트레스 받고, 직장 들어가서는 승진까지 신경을 쓰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당연히 결핵환자 수가 늘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 결핵환자, 남한 1960년대 수준
김 본부장은 북한 결핵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도 백방으로 뛰고 있다. 김 본부장은 지난 2006년부터 15차례 북한의 평양, 원산, 나진, 선봉 등에 들어가서 치료약을 전달하고 왔다.
“작년 한 해 북한 결핵환자를 위해 69억원 정도의 약품과 생필품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북한에서 몇 명이 결핵을 앓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다만 세계보건기구(WHO) 등의 추정으로 미뤄 보면 120만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현지에 가 보니 우리나라의 1960년대 상황과 비슷하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앓았던 결핵성 뇌막염 환자 한 명을 만났는데 정말 슬프더라고요. 약품을 가져다주면 북한 의사나 환자들 정말로 좋아합니다.”
김 본부장의 바람은 소박했다.
“캐나다에서 한인 3세 교포 학생이 ‘한국인들이 인류를 위해 한 일이 뭔가요’라고 물어보더라고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은 결핵으로 제일 많이 죽고 고통받고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결핵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사진 : 서경리






































